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도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것이다. '훗 무슨 드라마 속에 한 장면 같군...' 자신의 눈에 들어온 세 사람 아니 두 사람의 모습을 그녀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신 과 함께한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시간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동민과 동석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듯이 자신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돌려 생각해 보려고 해도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들이 보이고 있는 눈빛 이 자신의 생각이 허황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진은 고수부지 에서 보았던 동민의 모습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라도 빨리 차 승희라는 애송이 코디를 그에게서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조금 전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미진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미진의 눈에 들어온 세 사람의 모습은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전엔 자신도 그랬듯 저 애송이 코디도 그냥 동석과 동민의 곁에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 데 지금은 세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떼어내 버릴 수 없는 마치 한 덩어리와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민의 변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겉으 로는 웃어도 진심이 아닌 듯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던 그였는데 지금은..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눈도 표정만큼이나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눈빛...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동민을 바라보던 자신의 눈빛. 그것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빛보다는 조금은 더 부드러운 그런 눈빛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소유욕이란 감 정으로 자신의 눈빛이 조금 더 강하다면 그에게는 아직 그런 감정은 없다는 듯 부드럽기만 한 그런 눈빛. 미진은 그런 동민의 눈빛을 보며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민씨.. 자기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어. 사랑엔 절실함도 있어야 하는 거야. 아직.. 늦지 않았어.' 미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로 돌아 세트장 밖으로 나갔다. 오늘 분에 마지막 촬영이 시작되었다. 동민은 카메라 앞에서 한창 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승희는 그런 동민의 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 촬영이 끝나고 소품과 의상들을 옮기면 바쁘게 움직여야 될 것 같아서 미리 차에 옮겨 놓기로 했다. 차에 소품과 의상들을 옮겨 실어놓은 승희는 다시 세트장으로 향했고 세트장 입구로 들어가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자신 의 이름을 불렀다. "승희씨!" 승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 쪽이 쿵 하고 소리를 낼 만큼 내려앉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 생각만으로도 자신 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사람 그래서 되도록이면 피해가고 싶은 사람. 서 미진이었다. "안녕.. 하셨어요?" 승희는 약간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승희씨도 잘 지냈지요?" 첫 만남 때에도 그랬듯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었다. "승희씨 지금 바빠요? 괜찮으면 차 한 잔 하고 싶은데...." 촬영이 아직 끝난 상태가 아니라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나가자는 거 아니에요. 요 앞에 자판기가 있는데 거기서 차 한 잔 했으면 해서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였다. "네.." 복도 끝에 자판기가 있는 것을 승희도 알고 있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커피한잔 마시 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랴 하는 생각으로 대답하고는 미진의 뒤를 따랐다. 커피를 뽑아든 두 사람은 커다란 창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람 좀 까다롭지요?"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어.." 승희는 미진이 무슨 뜻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 의상 쪽으로 있어선 많이 예민한 편이거든요." '아..' "승희씨는 그런 거 못 느꼈나요?" 자신도 느끼고 있는 바였지만 어떻게 보면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알았는지 미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과 함께 일 했을 때 그런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기도 많이 하고 또 상처도 많이 받 고 그랬었는데.. 그때 승희씨가 했던 실수. 실력 있고 능력 있는 프로가 저질렀다면 아마 한 바탕 뒤집어 지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때라는 때가 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승희도 알 수 있었다. 고수부지에서의 실수. "지금은 승희씨 실력이나 경력을 생각해서 그냥 너그럽게 지나갈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 고 나면 승희씨에게도 그럴 거예요. 그런 쪽으로 예민해서 그런지 냉정하기도 하거든요." 왠지 모르게 자신의 무능력함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씩 불쾌해 지고 있는 승희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승희씨 자리 옮겨볼 생각 없나요?... 이번에 회사에서 댄스 그룹을 결 성했는데 그 댄스 그룹에 코디를 구하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코디로서의 첫 걸음으로 동민 씨는 벅찰 것 같아서요. 아직 십대들이고 신인이니깐 승희씨가 대하기도 편할 거고 음악 쪽 이니깐 코디로서의 자질도 맘껏 펼쳐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인지 잠시 머뭇거리는 미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미진이 말을 끝내고 돌아간 뒤로도 잠시 동안 그 자리에 혼자서 우 두커니 서 있던 승희였다. 승희는 그대로 화장실로 향햤다. 지금 이 기분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민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승희는 미진이 건네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무 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요. 지금은 바쁜 것 같으니 이쪽으로 나중에 연락 주세요. 자세한 얘기는 그때 다시 하기로 해요.' 훗.. 왠지 자꾸 웃음만이 나왔다. 무슨 말이 더 남았 다는 것일까? 그녀의 말대로 난 나의 또 다른 자리를 찾아 가면 되는 거고 그녀는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 이 자리로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사람 곁으로 그 사람의 옆자리로.. 미진이 머뭇거리며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왔다. '그리고... 승희씨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예요. 동민씨 하고 나 그냥 보통 사이 아니라는 거.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잠시 시 간을 두기로 한 건데...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지 않으면 곁에서 지켜보며 맞춰 갈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하는 거였는데..훗.. 솔직히 말해서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승희씨 만나려고.. 아무래도 이젠 내가 있어야 할 자 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훗.. 참 이상도 하지 왜 지금의 기분과는 다르게 자꾸 웃 음만이 나오고 있는 것인지... 혹시 이런 걸 두고 비참함에서 나오는 그런 현상이라고 하 는 것인지... 승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라는 생각 밖에는 할 수가 없었 다. 자신과 동민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깐. 그저 그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말그대로 고용인에 불과했으니깐.. '그 사람과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 비참함 같은 걸 느낄 그런 이유 같은 건 없단 말이야..' 승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 가가 울컥대며 올라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승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곤 입을 앙다물었다. '그래 오히려 잘 된 거야. 그 곰탱이 처음부터 나 같은 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았잖아. 언 제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것처럼 괴롭히기만 했잖아. 잘 된 거야. 잘 된 거라고.. 그 곰탱 이 한테서 벗어날 수 있어서 잘 된 거고 앞으로는 코디로서의 내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 어서 잘 된 거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래 미진 선배 말대로 내 실력으로는 벅찬 상대였어. 다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가 없는 곳에서...' 승희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애써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만큼 그녀의 기분은 조금도 바뀌지가 않았다. 생각과 마음으로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설득했지만 솔직한 심 정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그가 없는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을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동안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다시금 고개를 떨어 뜨리는 승희였다. 동민은 촬영이 끝나갈 무렵부터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승희의 모습을 발견했다. 촬영 이 끝나고 동석에게 슬며시 물어보았지만 동석 또한 모르겠다며 의상과 소품을 가져다 놓으 러 차에 갔다 온 뒤부터 그래 보인다는 얘기만 해 줄 뿐이었다. 동민은 무거운 것을 들고 왔 다 갔다 하느라고 힘들어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하며 괜히 죄 없는 동석에게 윽박질렀었다. 남자란 놈이 기사도 정신도 없이 그런 일을 여자인 승희에게 시켰다고... 하지만 나중에 손 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을 때 우연히 여자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다른 배우들의 코디들 인 것 같았는데 그녀들이 하는 얘기로는 미진이 그 곳에 왔다 갔다는 얘기 였다. 동민은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몸에 피곤 함으로 나타나는 얼굴에 표정과 무슨 일이 있었던 듯 상념에 빠져 어두워 있는 표정쯤은 동민도 구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 밖으로 지나치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승희 는 동민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 즐거운 주말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라면서 송꾸락 이만 물러가 보겠슴다. 항상 건강하십쇼~~~^^*1
나의 연인은 사기꾼 스타. (66)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도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것이다.
'훗 무슨 드라마 속에 한 장면 같군...'
자신의 눈에 들어온 세 사람 아니 두 사람의 모습을 그녀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신
과 함께한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시간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동민과 동석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듯이 자신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돌려 생각해 보려고 해도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들이 보이고 있는 눈빛
이 자신의 생각이 허황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진은 고수부지
에서 보았던 동민의 모습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라도 빨리 차 승희라는 애송이 코디를
그에게서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조금
전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미진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미진의 눈에 들어온 세 사람의 모습은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전엔 자신도 그랬듯 저 애송이 코디도 그냥 동석과 동민의 곁에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
데 지금은 세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떼어내 버릴 수 없는 마치 한 덩어리와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민의 변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겉으
로는 웃어도 진심이 아닌 듯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던 그였는데 지금은..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눈도 표정만큼이나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눈빛...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동민을 바라보던 자신의 눈빛. 그것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빛보다는
조금은 더 부드러운 그런 눈빛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소유욕이란 감
정으로 자신의 눈빛이 조금 더 강하다면 그에게는 아직 그런 감정은 없다는 듯 부드럽기만
한 그런 눈빛. 미진은 그런 동민의 눈빛을 보며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민씨.. 자기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어. 사랑엔 절실함도 있어야 하는 거야.
아직.. 늦지 않았어.'
미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로 돌아 세트장 밖으로 나갔다.
오늘 분에 마지막 촬영이 시작되었다. 동민은 카메라 앞에서 한창 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승희는 그런 동민의 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 촬영이 끝나고 소품과 의상들을 옮기면 바쁘게
움직여야 될 것 같아서 미리 차에 옮겨 놓기로 했다. 차에 소품과 의상들을 옮겨 실어놓은
승희는 다시 세트장으로 향했고 세트장 입구로 들어가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자신
의 이름을 불렀다.
"승희씨!"
승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 쪽이 쿵 하고 소리를 낼
만큼 내려앉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 생각만으로도 자신
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사람 그래서 되도록이면 피해가고 싶은 사람. 서 미진이었다.
"안녕.. 하셨어요?"
승희는 약간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승희씨도 잘 지냈지요?"
첫 만남 때에도 그랬듯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었다.
"승희씨 지금 바빠요? 괜찮으면 차 한 잔 하고 싶은데...."
촬영이 아직 끝난 상태가 아니라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나가자는 거 아니에요. 요 앞에 자판기가 있는데 거기서 차 한 잔 했으면 해서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였다.
"네.."
복도 끝에 자판기가 있는 것을 승희도 알고 있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커피한잔 마시
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랴 하는 생각으로 대답하고는 미진의 뒤를 따랐다.
커피를 뽑아든 두 사람은 커다란 창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람 좀 까다롭지요?"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어.."
승희는 미진이 무슨 뜻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 의상 쪽으로 있어선 많이 예민한 편이거든요."
'아..'
"승희씨는 그런 거 못 느꼈나요?"
자신도 느끼고 있는 바였지만 어떻게 보면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알았는지 미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과 함께 일 했을 때 그런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기도 많이 하고 또 상처도 많이 받
고 그랬었는데.. 그때 승희씨가 했던 실수. 실력 있고 능력 있는 프로가 저질렀다면 아마 한
바탕 뒤집어 지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때라는 때가 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승희도 알 수 있었다. 고수부지에서의 실수.
"지금은 승희씨 실력이나 경력을 생각해서 그냥 너그럽게 지나갈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
고 나면 승희씨에게도 그럴 거예요. 그런 쪽으로 예민해서 그런지 냉정하기도 하거든요."
왠지 모르게 자신의 무능력함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씩 불쾌해 지고 있는 승희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승희씨 자리 옮겨볼 생각 없나요?... 이번에 회사에서 댄스 그룹을 결
성했는데 그 댄스 그룹에 코디를 구하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코디로서의 첫 걸음으로 동민
씨는 벅찰 것 같아서요. 아직 십대들이고 신인이니깐 승희씨가 대하기도 편할 거고 음악 쪽
이니깐 코디로서의 자질도 맘껏 펼쳐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인지 잠시 머뭇거리는 미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미진이 말을 끝내고 돌아간 뒤로도 잠시 동안 그 자리에 혼자서 우
두커니 서 있던 승희였다. 승희는 그대로 화장실로 향햤다. 지금 이 기분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민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승희는 미진이 건네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무
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요. 지금은 바쁜 것 같으니 이쪽으로 나중에 연락 주세요.
자세한 얘기는 그때 다시 하기로 해요.' 훗.. 왠지 자꾸 웃음만이 나왔다. 무슨 말이 더 남았
다는 것일까? 그녀의 말대로 난 나의 또 다른 자리를 찾아 가면 되는 거고 그녀는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 이 자리로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사람 곁으로 그 사람의 옆자리로..
미진이 머뭇거리며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왔다. '그리고... 승희씨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예요. 동민씨 하고 나 그냥 보통 사이 아니라는 거.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잠시 시
간을 두기로 한 건데...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지
않으면 곁에서 지켜보며 맞춰 갈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하는 거였는데..훗.. 솔직히
말해서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승희씨 만나려고.. 아무래도 이젠 내가 있어야 할 자
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훗.. 참 이상도 하지 왜 지금의 기분과는 다르게 자꾸 웃
음만이 나오고 있는 것인지... 혹시 이런 걸 두고 비참함에서 나오는 그런 현상이라고 하
는 것인지... 승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라는 생각 밖에는 할 수가 없었
다. 자신과 동민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깐. 그저 그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말그대로
고용인에 불과했으니깐..
'그 사람과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 비참함 같은 걸 느낄 그런 이유 같은 건 없단 말이야..'
승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
가가 울컥대며 올라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승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곤 입을
앙다물었다.
'그래 오히려 잘 된 거야. 그 곰탱이 처음부터 나 같은 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았잖아. 언
제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것처럼 괴롭히기만 했잖아. 잘 된 거야. 잘 된 거라고.. 그 곰탱
이 한테서 벗어날 수 있어서 잘 된 거고 앞으로는 코디로서의 내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
어서 잘 된 거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래 미진 선배 말대로 내 실력으로는 벅찬
상대였어. 다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가 없는 곳에서...'
승희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애써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만큼 그녀의 기분은
조금도 바뀌지가 않았다. 생각과 마음으로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설득했지만 솔직한 심
정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그가 없는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을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동안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다시금 고개를 떨어
뜨리는 승희였다.
동민은 촬영이 끝나갈 무렵부터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승희의 모습을 발견했다. 촬영
이 끝나고 동석에게 슬며시 물어보았지만 동석 또한 모르겠다며 의상과 소품을 가져다 놓으
러 차에 갔다 온 뒤부터 그래 보인다는 얘기만 해 줄 뿐이었다. 동민은 무거운 것을 들고 왔
다 갔다 하느라고 힘들어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하며 괜히 죄 없는 동석에게 윽박질렀었다.
남자란 놈이 기사도 정신도 없이 그런 일을 여자인 승희에게 시켰다고... 하지만 나중에 손
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을 때 우연히 여자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다른
배우들의 코디들 인 것 같았는데 그녀들이 하는 얘기로는 미진이 그 곳에 왔다 갔다는 얘기
였다. 동민은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몸에 피곤
함으로 나타나는 얼굴에 표정과 무슨 일이 있었던 듯 상념에 빠져 어두워 있는 표정쯤은
동민도 구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 밖으로 지나치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승희
는 동민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
항상 건강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