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소 오줌 누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은수는 후드득거리며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에 이끌려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에 서서 활짝 핀 목련꽃들이 젖어드는 걸 바라보며 이하나를 생각했다. 항상 그의 마음속에 활짝 핀 목련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의 향기를 퍼뜨리며 그를 행복의 나라로 떠나보내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비에 젖는 목련꽃이 안쓰러워 그의 마음은 슬픔을 느꼈다. 어쩌면 불어오는 비바람을 못 이기고 푸른 나뭇잎이 돋기 전에 꽃잎이 전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을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최은수는 문득 오 헨리의 단편소설인「마지막 잎새」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일곱, 여섯……, 숫자를 거꾸로 세며 폐렴으로 죽어 가는 소녀를 생각했다.
그 소녀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잎새를 그려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담쟁이덩굴에다 절대 떨어지지 않게 붙여 놓고 도리어 자신이 폐렴으로 죽은 늙은 화가도 생각했다. 그 화가의 희생으로 소녀가 병마에서 빠져나와 활기를 되찾고 새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감동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인 것이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지금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비바람이 불면 떨어지는 목련꽃이 아니라 항상 웃고 있는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목련꽃이 되도록, 그는 자신이 허락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하나는 최은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고, 격의 없이 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어떠한 요구라도 그녀가 요구를 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다 들어주고 싶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집에 없는 듯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재발신 버튼을 누르고 이번엔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다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지금은 고객이 통화할 수 없으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 음성이 흘러나왔다.
최은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다 다시 한번 재발신을 누르고 이하나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전화벨이 한참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혹시 그녀가 지금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뒤늦게 전화벨 소릴 듣고 허겁지겁 전화를 받아 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기대감에 부응하려는 듯 드디어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던 것이다. 잠이 덜 깬 그녀의 목소리는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다.
「어디 아프니?」
최은수는 걱정 섞인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었다.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이하나는 아프지 않다고 하지만, 최은수는 그녀의 정상이 아닌 목소리에서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안 아파?」
「괜찮아요.」
이하나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정말 그녀는 아픈 것이다.
「이따 만날까?」
최은수는 병원까지 못 데려가더라도 이하나에게 약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이따가 PR 나가야 돼요.」
「PR?」
「예. 오늘 안 나가면 다른 애들한테 왕따 당해요.」
이하나의 목소리엔 PR을 나가기 싫어하는 짜증이 잔뜩 배어 있었다.
「지금 비도 오고, 몸도 아픈데?」
「그래도 오늘은 꼭 나가야 해요.」
이하나가 말하는 PR이란, 룸살롱「아방궁」의 아가씨들이 조를 편성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직접 거리로 나가서 선전물을 돌리는 것을 말했다. 지난번에는 깜박 잊고 최은수를 만나는 바람에 빠졌던 그녀는 이번 PR엔 절대 빠질 수 없다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룸살롱「아방궁」도 직장이라면 직장이니 만큼 조직의 생활에서 혼자 예외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비가 와 날씨가 쌀쌀하니까 옷을 단단히 입고 나가라고 이르고는 전화를 끊은 후 그녀가 지금 아파하고 있는 데도 속수무책인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슬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오늘 같은 날, 하나를 위해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최은수의 발걸음은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어둠이 찾아 왔지만 여전히 비가 대지를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이 먹구름에 가리어 지상을 내려다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우산 위에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어느 연인들의 슬픈 이야기처럼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허전함을 못 이기고 최은수는 마냥 걷고 싶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길을 걷다 불현듯 찾아오는 소주 생각에 포장마차 앞에서 걸음을 멈춰 보지만, 결국 이하나가 없는 옆자리의 쓸쓸함 때문에 허전함이 더욱 더 커질 것 같아 그는 그냥 다시 발길을 돌렸다.
계속해서 비는 후드득 소리를 내며 우산 위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빗소리는 이하나의 그리움에 괴로워하는 최은수의 마음에 묻혀 버렸다. 그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어린아이 달래듯 달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빗소릴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그녀 때문이라는 걸,
비 오는 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그녀라는 걸,
비 오는 날 그녀의 그리움이 너무나 커서
가슴속에 담을 수 없다는 걸,
그녀가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날 슬프게 합니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서 닭살이 솟구칠 정도로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을 하면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남녀가 최은수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버릇없는 것들!」
최은수는 이하나와 이 빗속을 같이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질투심에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보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생선 썩듯이 속만 썩을 뿐이었다.
「하나에게 전화를 할까? 그래서 목소리라도 들을까?」
그러나 최은수는 만나지도,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므로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된 음성」이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시간에 이하나는 전화를 받지 못할 게 뻔했다. 어느 남자 옆에 앉아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띠며 술을 따르고, 흥이 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최은수는 그 생각을 하면서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픔과 괴로움을 느꼈다.
기다리는 버스가 도착했지만 최은수는 버스를 타지 않고 그냥 보냈다. 그리고 어떻게 할까? 하고 무척이나 망설였다. 그건 이하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다음으로 미루라는 마음이 서로 싸움질을 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최은수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다가 망설임 끝에 할 수 없이 다음 버스에 올라 타 비 오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이하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비록 오늘은 못 만나지만 최은수의 마음속에서 이하나의 모습은 백합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으로, 영원히 향기를 잃지 않는 꽃으로, 영원히 누가 감히 꺾을 수 없는 꽃으로,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요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각에 이하나는 지난번 맞선 봤던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미 그 남자와 며칠 전부터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던 그녀는 그에게 PR 나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 남자와 만나는 바람에 평상시보다 늦게 룸살롱「아방궁」에 도착한 이하나에게 친구인 유진이가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조 사장이 아까부터 와서 널 기다리고 있어.」
조 사장은 이하나에게 홀딱 반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면서 룸살롱을 그만 두라고 했던 남자였다.
이하나는 대기실에 바지를 벗고 미니스커트로 갈아입은 후 조 사장이 기다리고 있는 룸으로 갔다. 그녀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룸 안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가득했고, 그가 혼자 마신 양주는 벌써 반이 비워 있었다.
조 사장은 이하나를 보자 반가워하며 옆에 바싹 앉히고 그녀의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여러 번 이곳에 왔지만 그때마다 만나지 못해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번 몇 번 만났지만 성관계를 갖지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간 그는 오늘은 꼭 같이 자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이블 위에 반쯤 남아 있던 양주가 금세 동이 났고, 이하나는 조 사장의 팔을 끼고 호텔로 갔다.
아내가 없는 집안의 공기는 언제나 겨울바람이 부는 듯 차가웠다. 겨우 초등학교 일 학년인 딸아이가 혼자 텔레비전에서 하는 만화를 보고 있다가 귀가하는 최은수를 반기며 품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낮엔 외할머니가 돌봐 준다고 하지만 어떻게 엄마 품하고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최은수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아내에게 가게를 그만 둘 것을 강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꺾지 않는 아내를 어떻게 할 수 없어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집에 일찍 들어와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딸아이 볼 때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곤 했다.
최은수는 양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아내의 가게로 전화를 했다. 오늘은 당장 가게문을 닫고 들어오라고 해서 결판을 낼 생각이었으나 아내는 어디를 갔는지 한참 동안 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가게에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아내와 통화를 못하게 되면 화가 나곤 했는데, 지금은 기분이 극도로 나쁜 상태라 더더욱 화가 났다.
십분 간격으로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끝내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딸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여서 한동안 같이 놀아 주다 재우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최은수가 아이들을 돌보면서 십분 간격으로 아내가 없는 가게에 전화를 하고 있을 때, 이하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조 사장이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옷을 벗고 있었다.
이하나가 먼저 옷을 다 벗고 샤워를 하지 않은 채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조 사장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거기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벗어 놓은 그녀의 팬티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은 뒤 와이셔츠를 벗고, 러닝셔츠를 벗고, 다음으로 양말을 먼저 벗은 다음 바지와 팬티를 벗고서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 사장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이하나의 젖가슴을 보물 다루듯이 어루만지다가 배가 고파진 아기처럼 입술로 젖꼭지를 빨면서 한 손으로는 그녀의 은밀한 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음모 사이에 숨어 있는 부드러운 꽃잎에 그의 손이 머무르자 그녀는 아련한 쾌감을 느꼈다.
이하나의 젖꼭지를 빨던 조 사장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그 은밀한 곳에 멈추고, 꽃잎에 묻은 이슬로 목을 축이는 듯 그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전율하기 시작했다.
조 사장이 이하나의 허리 밑으로 베개를 집어넣고 그녀의 두 다리를 들어올려 좌우로 넓게 벌렸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맺힌 꽃잎처럼 그녀의 은밀한 곳이 창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반사되어 음모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그 속으로 그의 성난 성기가 거세게 진입을 하자 그녀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이 신음 소리를 크게 내뱉었다.
조 사장의 몸이 한 번씩 크게 출렁거릴 때마다 그의 아래에 깔린 이하나는 몰려드는 격렬한 쾌감과 커다란 환희의 물결에 휩싸여 온몸을 떨며 뒤틀었다.
열두 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얼굴은 술기운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술 마셨어?」
최은수의 얼굴과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친구가 찾아와서 조금 마셨어.」
최은수는 아내의 얼굴에서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그 친구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친구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게 짐짓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최은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려는 아내의 팔을 낚아채며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오늘따라 왜 그래?」
아내 역시 최은수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내일 당장 그놈의 가게 때려치워!」
최은수가 아내의 몸을 세게 밀치며 단호하게 말을 했지만 그렇게 쉽게 가게문을 닫을 아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당초 가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심심하면 나보고 가겔 때려치우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애들을 돌봐야 할게 아냐!」
최은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애들은 외할머니가 돌봐 주고 있잖아.」
아내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엄마가 돌보는 것하고, 외할머니가 돌봐 주는 게 똑같아?」
「다를 게 뭐가 있어?」
「다를 게 뭐가 있냐고?」
「외할머니가 남이야? 요즈음 애들 다 그렇게 키워.」
최은수는 기가 막혔다. 열 번이면 열 번,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불덩이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냉장고 안에서 캔맥주를 꺼내 빗소리가 들리는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캔맥주 뚜껑을 따고는 벌컥벌컥 들이키던 최은수는 이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이 시간에 그녀도 빗소리를 듣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는 룸에서 어느 남자의 술시중을 들고 있을 것이다. 순간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 그리움과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8-
비 오는 날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소 오줌 누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은수는 후드득거리며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에 이끌려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에 서서 활짝 핀 목련꽃들이 젖어드는 걸 바라보며 이하나를 생각했다. 항상 그의 마음속에 활짝 핀 목련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의 향기를 퍼뜨리며 그를 행복의 나라로 떠나보내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비에 젖는 목련꽃이 안쓰러워 그의 마음은 슬픔을 느꼈다. 어쩌면 불어오는 비바람을 못 이기고 푸른 나뭇잎이 돋기 전에 꽃잎이 전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을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최은수는 문득 오 헨리의 단편소설인「마지막 잎새」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일곱, 여섯……, 숫자를 거꾸로 세며 폐렴으로 죽어 가는 소녀를 생각했다.
그 소녀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잎새를 그려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담쟁이덩굴에다 절대 떨어지지 않게 붙여 놓고 도리어 자신이 폐렴으로 죽은 늙은 화가도 생각했다. 그 화가의 희생으로 소녀가 병마에서 빠져나와 활기를 되찾고 새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감동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인 것이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지금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비바람이 불면 떨어지는 목련꽃이 아니라 항상 웃고 있는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목련꽃이 되도록, 그는 자신이 허락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하나는 최은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고, 격의 없이 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어떠한 요구라도 그녀가 요구를 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다 들어주고 싶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집에 없는 듯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재발신 버튼을 누르고 이번엔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다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지금은 고객이 통화할 수 없으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 음성이 흘러나왔다.
최은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다 다시 한번 재발신을 누르고 이하나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전화벨이 한참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혹시 그녀가 지금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뒤늦게 전화벨 소릴 듣고 허겁지겁 전화를 받아 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기대감에 부응하려는 듯 드디어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던 것이다. 잠이 덜 깬 그녀의 목소리는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다.
「어디 아프니?」
최은수는 걱정 섞인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었다.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이하나는 아프지 않다고 하지만, 최은수는 그녀의 정상이 아닌 목소리에서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안 아파?」
「괜찮아요.」
이하나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정말 그녀는 아픈 것이다.
「이따 만날까?」
최은수는 병원까지 못 데려가더라도 이하나에게 약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이따가 PR 나가야 돼요.」
「PR?」
「예. 오늘 안 나가면 다른 애들한테 왕따 당해요.」
이하나의 목소리엔 PR을 나가기 싫어하는 짜증이 잔뜩 배어 있었다.
「지금 비도 오고, 몸도 아픈데?」
「그래도 오늘은 꼭 나가야 해요.」
이하나가 말하는 PR이란, 룸살롱「아방궁」의 아가씨들이 조를 편성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직접 거리로 나가서 선전물을 돌리는 것을 말했다. 지난번에는 깜박 잊고 최은수를 만나는 바람에 빠졌던 그녀는 이번 PR엔 절대 빠질 수 없다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룸살롱「아방궁」도 직장이라면 직장이니 만큼 조직의 생활에서 혼자 예외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비가 와 날씨가 쌀쌀하니까 옷을 단단히 입고 나가라고 이르고는 전화를 끊은 후 그녀가 지금 아파하고 있는 데도 속수무책인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슬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오늘 같은 날, 하나를 위해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최은수의 발걸음은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어둠이 찾아 왔지만 여전히 비가 대지를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이 먹구름에 가리어 지상을 내려다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우산 위에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어느 연인들의 슬픈 이야기처럼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허전함을 못 이기고 최은수는 마냥 걷고 싶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길을 걷다 불현듯 찾아오는 소주 생각에 포장마차 앞에서 걸음을 멈춰 보지만, 결국 이하나가 없는 옆자리의 쓸쓸함 때문에 허전함이 더욱 더 커질 것 같아 그는 그냥 다시 발길을 돌렸다.
계속해서 비는 후드득 소리를 내며 우산 위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빗소리는 이하나의 그리움에 괴로워하는 최은수의 마음에 묻혀 버렸다. 그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어린아이 달래듯 달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빗소릴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그녀 때문이라는 걸,
비 오는 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그녀라는 걸,
비 오는 날 그녀의 그리움이 너무나 커서
가슴속에 담을 수 없다는 걸,
그녀가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날 슬프게 합니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서 닭살이 솟구칠 정도로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을 하면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남녀가 최은수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버릇없는 것들!」
최은수는 이하나와 이 빗속을 같이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질투심에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보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생선 썩듯이 속만 썩을 뿐이었다.
「하나에게 전화를 할까? 그래서 목소리라도 들을까?」
그러나 최은수는 만나지도,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므로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된 음성」이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시간에 이하나는 전화를 받지 못할 게 뻔했다. 어느 남자 옆에 앉아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띠며 술을 따르고, 흥이 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최은수는 그 생각을 하면서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픔과 괴로움을 느꼈다.
기다리는 버스가 도착했지만 최은수는 버스를 타지 않고 그냥 보냈다. 그리고 어떻게 할까? 하고 무척이나 망설였다. 그건 이하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다음으로 미루라는 마음이 서로 싸움질을 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최은수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다가 망설임 끝에 할 수 없이 다음 버스에 올라 타 비 오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이하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비록 오늘은 못 만나지만 최은수의 마음속에서 이하나의 모습은 백합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으로, 영원히 향기를 잃지 않는 꽃으로, 영원히 누가 감히 꺾을 수 없는 꽃으로,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요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각에 이하나는 지난번 맞선 봤던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미 그 남자와 며칠 전부터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던 그녀는 그에게 PR 나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 남자와 만나는 바람에 평상시보다 늦게 룸살롱「아방궁」에 도착한 이하나에게 친구인 유진이가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조 사장이 아까부터 와서 널 기다리고 있어.」
조 사장은 이하나에게 홀딱 반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면서 룸살롱을 그만 두라고 했던 남자였다.
이하나는 대기실에 바지를 벗고 미니스커트로 갈아입은 후 조 사장이 기다리고 있는 룸으로 갔다. 그녀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룸 안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가득했고, 그가 혼자 마신 양주는 벌써 반이 비워 있었다.
조 사장은 이하나를 보자 반가워하며 옆에 바싹 앉히고 그녀의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여러 번 이곳에 왔지만 그때마다 만나지 못해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번 몇 번 만났지만 성관계를 갖지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간 그는 오늘은 꼭 같이 자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이블 위에 반쯤 남아 있던 양주가 금세 동이 났고, 이하나는 조 사장의 팔을 끼고 호텔로 갔다.
아내가 없는 집안의 공기는 언제나 겨울바람이 부는 듯 차가웠다. 겨우 초등학교 일 학년인 딸아이가 혼자 텔레비전에서 하는 만화를 보고 있다가 귀가하는 최은수를 반기며 품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낮엔 외할머니가 돌봐 준다고 하지만 어떻게 엄마 품하고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최은수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아내에게 가게를 그만 둘 것을 강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꺾지 않는 아내를 어떻게 할 수 없어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집에 일찍 들어와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딸아이 볼 때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곤 했다.
최은수는 양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아내의 가게로 전화를 했다. 오늘은 당장 가게문을 닫고 들어오라고 해서 결판을 낼 생각이었으나 아내는 어디를 갔는지 한참 동안 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가게에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아내와 통화를 못하게 되면 화가 나곤 했는데, 지금은 기분이 극도로 나쁜 상태라 더더욱 화가 났다.
십분 간격으로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끝내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딸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여서 한동안 같이 놀아 주다 재우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최은수가 아이들을 돌보면서 십분 간격으로 아내가 없는 가게에 전화를 하고 있을 때, 이하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조 사장이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옷을 벗고 있었다.
이하나가 먼저 옷을 다 벗고 샤워를 하지 않은 채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조 사장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거기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벗어 놓은 그녀의 팬티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은 뒤 와이셔츠를 벗고, 러닝셔츠를 벗고, 다음으로 양말을 먼저 벗은 다음 바지와 팬티를 벗고서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 사장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이하나의 젖가슴을 보물 다루듯이 어루만지다가 배가 고파진 아기처럼 입술로 젖꼭지를 빨면서 한 손으로는 그녀의 은밀한 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음모 사이에 숨어 있는 부드러운 꽃잎에 그의 손이 머무르자 그녀는 아련한 쾌감을 느꼈다.
이하나의 젖꼭지를 빨던 조 사장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그 은밀한 곳에 멈추고, 꽃잎에 묻은 이슬로 목을 축이는 듯 그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전율하기 시작했다.
조 사장이 이하나의 허리 밑으로 베개를 집어넣고 그녀의 두 다리를 들어올려 좌우로 넓게 벌렸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맺힌 꽃잎처럼 그녀의 은밀한 곳이 창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반사되어 음모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그 속으로 그의 성난 성기가 거세게 진입을 하자 그녀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이 신음 소리를 크게 내뱉었다.
조 사장의 몸이 한 번씩 크게 출렁거릴 때마다 그의 아래에 깔린 이하나는 몰려드는 격렬한 쾌감과 커다란 환희의 물결에 휩싸여 온몸을 떨며 뒤틀었다.
열두 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얼굴은 술기운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술 마셨어?」
최은수의 얼굴과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친구가 찾아와서 조금 마셨어.」
최은수는 아내의 얼굴에서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그 친구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친구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게 짐짓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최은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려는 아내의 팔을 낚아채며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오늘따라 왜 그래?」
아내 역시 최은수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내일 당장 그놈의 가게 때려치워!」
최은수가 아내의 몸을 세게 밀치며 단호하게 말을 했지만 그렇게 쉽게 가게문을 닫을 아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당초 가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심심하면 나보고 가겔 때려치우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애들을 돌봐야 할게 아냐!」
최은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애들은 외할머니가 돌봐 주고 있잖아.」
아내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엄마가 돌보는 것하고, 외할머니가 돌봐 주는 게 똑같아?」
「다를 게 뭐가 있어?」
「다를 게 뭐가 있냐고?」
「외할머니가 남이야? 요즈음 애들 다 그렇게 키워.」
최은수는 기가 막혔다. 열 번이면 열 번,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불덩이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냉장고 안에서 캔맥주를 꺼내 빗소리가 들리는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캔맥주 뚜껑을 따고는 벌컥벌컥 들이키던 최은수는 이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이 시간에 그녀도 빗소리를 듣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는 룸에서 어느 남자의 술시중을 들고 있을 것이다. 순간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 그리움과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