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최은수는 이하나를 만날 때마다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자신이 억지로 붙들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마치 구도가 맞지 않는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이 그의 가슴속에서 출렁거리며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좋은 예감은 맞지 않아도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을 해도 하나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는, 근래의 하나에게서 느끼는 불길한 예감은 기우일까? 기우였으면 좋을 텐데, 만약에 그게 기우가 아니고 사실로 다가온다면…….」
최은수는 이하나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불안하고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지만 도리어 미친개가 뼈다귀 물고 늘어지듯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최은수는 지금까지 잠들기 전에 항상 이하나를 생각하며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오늘밤은 그 즐거움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운 예감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단 한순간이라도 생각을 멈추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져 영영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이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애써 뭔가를 감추려는 듯한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최은수는 가끔 당혹감을 느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때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면서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순간, 최은수는 오늘 이하나의 목에 항상 걸려 있던 목걸이와 왼쪽 손목에 차고 있었던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그를 만날 때는 지금까지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고,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괴롭기 시작했다.
옛날 최은수가 어느 여인을 짝사랑할 때였다. 그녀는 그에게 짝사랑마저도 허락하지 않은 채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그녀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한 적이 있었다. 요즘에 그는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뻥 뚫린 허전한 가슴속에 가득 차는 슬픔이었다.
며칠 후, 「갤러리」커피숍에 이하나가 먼저 와서 최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가게와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두고 나서는 그녀가 먼저 약속 장소에 와서 그를 기다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그는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금방 쏟아질 것 같았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마음 깊은 곳에 억눌려 있는 슬픔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어?」
최은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이하나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그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
그러나 이하나는 최은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식어 버린 커피를 단숨에 비운 뒤 최은수가 조금 불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아직 이하나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하나는 입을 반쯤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을 수만 없었다.
「앞으로 우리 못 만날 것 같아요.」
이하나는 슬픈 눈빛을 하고서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고 나서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하나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어진 최은수의 가슴이 철렁하면서 밑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바위 덩어리를 안고 강물로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이하나는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최은수의 시선을 피해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피카소 그림처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쇳덩어리처럼 차가운 침묵이 흐르면서 사방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은 최은수는 애써 침착해지기 위해 얼마 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다그치듯 이하나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얘기해 봐.」
필사적으로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하나의 두 손이 만지작거리고 있던 빈 커피 잔을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저…… 결혼…… 해요.」
최은수의 시선을 마주보며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지 이하나는 고개를 떨군 채 빈 커피 잔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는 그의 손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마침내 망설이고 있던 입을 열었다.
「결혼한다고?」
이하나가 결혼한다는 말에 최은수는 딱딱한 물체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온몸의 힘이 쫙 빠지면서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가 결혼을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기 마련이고, 그녀의 결혼이 그에게 그런 일이었다.
최은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 버린 느낌이었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몰려왔다. 그는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가 고쳐 물었다. 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려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그냥 재떨이에 올려놓았다. 이제야 이하나가 왜 수심에 잠긴 듯 가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금방 명랑한 표정을 지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결혼을 앞두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좋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고 은근히 분노가 치솟았다.
「미안해요.」
이하나의 눈에서 갑작스럽게 눈물이 넘쳐 뺨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폭포같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이 최은수에게 고통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그녀의 흐느낌은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격렬해졌다.
최은수는 자리를 옮겨 이하나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주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감싸 안은 채 그녀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서 그는 그녀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이 뒤섞인 괴로움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한참 시간이 흘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이하나가 최은수가 내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결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이하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하고 나서 다시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최은수는 이하나의 결혼을 무조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예…….」
「말도 안 돼!」
최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 잔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깨지지는 않았다. 그의 격렬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더욱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짐승처럼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진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미안해요.」
이하나는 계속 최은수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상심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왜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그 남자는 그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일 것이다. 그녀의 결혼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전개였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는 격언을 아주 옛날에 터득해 알고 있었지만 최은수는 이하나가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 왔던가. 또 그는 그걸 실현시키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고 견디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그녀의 결혼은 그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였다.
축복해 주고, 잘 살아라, 부디 행복 하라고 마음으로 빌려주면서도 한편으로 최은수는 맨땅에다 머리를 들이박고 싶을 정도로 충격에 휩싸여 마냥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오래 전에 헤어지는 연습을 많이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탓인가? 그는 온 세상이 한순간에 허물어질지 모르는 모래로 이루어졌다는 절망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최은수는 못마땅하고 불쾌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 담배만 연거푸 두 개비나 피워 댔고, 이하나 역시 담배를 피우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침묵을 견디지 못한 그가 음울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하는데?」
최은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 달 이십삼 일에 해요.」
「뭐라고? 이십삼 일에 한다고? 그럼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최은수는 화난 듯 소리쳤다.
「예…….」
「그런데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최은수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면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하나의 결혼 결정이 이루어진 게 며칠 전인지 알았다. 그런데 이 달 이십삼 일에 결혼식을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의 결혼은 며칠 전이 아니라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둔다고 했을 때보다도 더 훨씬 전에 결정된 것이었다. 그녀는 차마 그에게 결혼하기 때문에「아방궁」을 그만 둔다는 말을 못하고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댔던 것이다. 그때 그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의심했어야 했다.
「미안해요.」
이하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그녀는 최은수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할말이 없었다.
「뭐하는 남자야?」
이하나에게 반발하듯 최은수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일산종합시장에서 어머니가 하는 옷가게의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떨어뜨렸던 고개를 든 이하나의 얼굴에는 슬픈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나이는 몇 살인데?」
자기가 직접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직업 없이 겨우 어머니가 하는 옷가게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이하나에게 실망을 한 최은수는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듯이 남자의 나이를 물었다.
「서른네 살이에요.」
이하나는 최은수의 화난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가 주위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뭐라고? 서른네 살이라고?」
남자의 나이가 이하나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 서른네 살이라는 말에 최은수는 버럭 화를 냈다. 서른네 살이라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퍼붓고 싶은 욕설을 참기 위해 목에 굵은 핏줄을 곤두세웠다.
「…….」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하지 않는 이하나의 눈에서 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최은수는「갤러리」커피숍에서 나와 이하나와 함께 레스토랑「아셀」로 갔다. 기분이 깨진 박처럼 엿 같았지만, 그 기분으로 그녀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사이에 깊은 웅덩이 하나가 가로놓인 것처럼 낯선 사람 대하듯 서먹스럽기만 했다. 이하나는 최은수가 먼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는 묵묵히 그녀 앞에 놓인 스테이크에 소금을 뿌려 주면서 눈으로 말했다. 맛있게 먹으라고.
레스토랑「아셀」에서 나오자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최은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이하나의 속마음을 한번 떠보고 싶었다.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 동안의 만남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만약에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그 동안의 만남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치사스럽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오늘은 진짜 널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 부탁하는데, 나 오늘 너하고 자고 싶어.」
그러나 이하나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것이라는 예감을 느낀 최은수의 얼굴과 목소리는 무뚝뚝하게 굳어 있었다.
「…….」
이하나는 최은수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대로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며 걷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왜 싫지?」
「…….」
비록 이하나가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두고부터는 한 번도 같이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최은수의 마음속에는 그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호스티스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을 그녀가 휴식이 필요할 것이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녀의 승낙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서글퍼지는 걸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 최은수는 이하나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것을 꼭 실행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불쑥 그녀의 속마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거절에 마음은 서글퍼졌지만 결혼할 그 남자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그녀를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면서 항상 하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가 슬쩍 손을 빼며 딴전을 부렸다. 이번엔 그가 팔짱을 끼려고 하자 마찬가지로 그녀가 슬쩍 팔을 풀었다.
최은수는 그런 이하나에게서 예전의 느껴졌던 그 어느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하루아침에 자신이 알고 있던 그녀와는 아주 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간신히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그의 가슴속으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이젠 내가 필요 없었진 거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넌 아주 나쁜 여자야!」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최은수는 이하나와 헤어진 뒤 그녀가 탄 버스의 꽁무니를 먼발치에서 지켜본 후 돌아서는 순간 지독한 괴로움을 억누를 수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그냥 선 채로 돌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암담하고 괴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최은수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최대한 마음의 안정을 시키기 위해 애썼다. 마음을 고쳐먹은 이하나가 버스에서 내려 자신에게 달려올 것 같은 기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서서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최은수는 바닥에 꽁초를 내버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집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교동으로 가 주세요.」
최은수는 룸살롱「아방궁」에 가기 위해 코오롱 빌딩 앞에서 내렸다. 이하나가 없더라도 그녀의 친구인 유진이는 있을 것이다. 아니, 유진이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꼭 그녀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만약 그녀가 없다면 그는 아무 여자라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싶었다.
유진이는 이미 다른 룸에서 손님을 받고 있었다. 인기가 좋은 그녀를 지금 이 시간까지 남자들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대신 최은수의 옆자리에 성인식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작고 귀여운 여자가 앉았다. 이름이 이화라고 했지만, 애당초 여자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여자의 이름을 모르면서 여자가 따라 주는 양주를 미친 놈 막걸리 마시듯 마셔 댔다.
최은수는 말도 안 되는 이하나의 선택에 도저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처지와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떻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그것도 결혼을 한 번은 실패했을 것 같은 나이에, 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 사람과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하나와 헤어지면서 최은수는 그녀를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성관계를 원하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것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을 하게 되자 그 동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은수는 이하나가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두고서 성관계를 서너 번 요구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적당한 핑계로 그의 요구를 거절했었다. 자기가 무슨 요조숙녀라고,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그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땐 그녀를 이해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면 최은수는 이하나의 몸을 다른 접대부와의 관계처럼 돈을 주고 샀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돈을 받고 자기 몸을 그에게 팔았다는 결론과 함께…….
「나는 그녀에게 도대체 뭐였던가?」
최은수는 머릿속에서 들끓어 대는 혼란을 털어 내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과연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인가?」하고, 자신의 내면이 거짓을 감추기 위해 위선으로 위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이켜봤다.
최은수가 조금이라도 이하나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그런 화난 목소리로 눈을 부라리며, 뭐 하는 남자냐고 묻지 말고 그녀에게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하나를 탓하거나 욕할 필요도 없었다. 최은수는 자신을 위했던 것일 뿐, 그녀를 위해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그녀가 행복해지기보다는 불행해지기 바라는 사람 같았다. 그건 그녀에게 배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하나를 만나서 그녀의 고민을 함께 고민을 하고, 즐거움은 같이 나누어 갖고, 그녀를 위해 룸살롱「아방궁」에 가 술을 마시고, 그냥 그대로 헤어지기 싫어 호텔에 가서 몸을 섞고, 어느 땐 다른 남자를 접대하느라고 늦게 오는 그녀를 기다리며 침대 위에서 성냥팔이 소녀처럼 쭈그리고 앉아 애꿎은 담배만 피우다 홀로 잠이 들고…….
그렇게 이하나를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최은수의 가슴속에서 출렁거렸다. 그는 갑자기 자기 혼자만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괴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최은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뜨거운 물 끓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거침없이 술잔을 비웠고 계속해서 잔이 빌 때마다 점점 취해 갔다.
웬만큼 최은수와 이하나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이화가 최은수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하고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별의별 아양을 다 떨었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둘러 옷을 벗었다. 너무 취한 최은수는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콘돔을 끼워 준 이화를 껴안고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서 이하나의 냄새가 맡아졌다. 향긋한 꽃내음이었다. 그는 이하나의 몸이 그리워 한동안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한숨을 푹푹 내쉬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마치 오늘밤을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끝내려는 듯 이화의 몸을 탐하는 최은수의 행동은 운동선수처럼 거칠고 격려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절정으로 내닫던 이화가 탄성과 신음을 내뱉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땀을 흘리며 성관계에 몰입하던 최은수는 정액을 쏟아 내고서 그녀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이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화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최은수의 알몸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시들어진 그의 성기에서 콘돔을 빼서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었다.
룸살롱에서 최은수는 대단한 단골손님이었다. 이화는 앞으로 이하나가 결혼하고 나면 그를 자기 손님으로 끌어들일 예정이었다.
사랑할 수밖애 없는 사람 -10-
그녀의 결혼
요즈음 최은수는 이하나를 만날 때마다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자신이 억지로 붙들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마치 구도가 맞지 않는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이 그의 가슴속에서 출렁거리며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좋은 예감은 맞지 않아도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을 해도 하나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는, 근래의 하나에게서 느끼는 불길한 예감은 기우일까? 기우였으면 좋을 텐데, 만약에 그게 기우가 아니고 사실로 다가온다면…….」
최은수는 이하나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불안하고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지만 도리어 미친개가 뼈다귀 물고 늘어지듯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최은수는 지금까지 잠들기 전에 항상 이하나를 생각하며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오늘밤은 그 즐거움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운 예감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단 한순간이라도 생각을 멈추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져 영영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이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애써 뭔가를 감추려는 듯한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최은수는 가끔 당혹감을 느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때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면서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순간, 최은수는 오늘 이하나의 목에 항상 걸려 있던 목걸이와 왼쪽 손목에 차고 있었던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그를 만날 때는 지금까지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고,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괴롭기 시작했다.
옛날 최은수가 어느 여인을 짝사랑할 때였다. 그녀는 그에게 짝사랑마저도 허락하지 않은 채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그녀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한 적이 있었다. 요즘에 그는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뻥 뚫린 허전한 가슴속에 가득 차는 슬픔이었다.
며칠 후, 「갤러리」커피숍에 이하나가 먼저 와서 최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가게와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두고 나서는 그녀가 먼저 약속 장소에 와서 그를 기다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그는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금방 쏟아질 것 같았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마음 깊은 곳에 억눌려 있는 슬픔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어?」
최은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이하나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그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
그러나 이하나는 최은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식어 버린 커피를 단숨에 비운 뒤 최은수가 조금 불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아직 이하나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하나는 입을 반쯤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을 수만 없었다.
「앞으로 우리 못 만날 것 같아요.」
이하나는 슬픈 눈빛을 하고서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고 나서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하나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어진 최은수의 가슴이 철렁하면서 밑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바위 덩어리를 안고 강물로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이하나는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최은수의 시선을 피해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피카소 그림처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쇳덩어리처럼 차가운 침묵이 흐르면서 사방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은 최은수는 애써 침착해지기 위해 얼마 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다그치듯 이하나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얘기해 봐.」
필사적으로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하나의 두 손이 만지작거리고 있던 빈 커피 잔을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저…… 결혼…… 해요.」
최은수의 시선을 마주보며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지 이하나는 고개를 떨군 채 빈 커피 잔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는 그의 손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마침내 망설이고 있던 입을 열었다.
「결혼한다고?」
이하나가 결혼한다는 말에 최은수는 딱딱한 물체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온몸의 힘이 쫙 빠지면서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가 결혼을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기 마련이고, 그녀의 결혼이 그에게 그런 일이었다.
최은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 버린 느낌이었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몰려왔다. 그는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가 고쳐 물었다. 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려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그냥 재떨이에 올려놓았다. 이제야 이하나가 왜 수심에 잠긴 듯 가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금방 명랑한 표정을 지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결혼을 앞두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좋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고 은근히 분노가 치솟았다.
「미안해요.」
이하나의 눈에서 갑작스럽게 눈물이 넘쳐 뺨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폭포같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이 최은수에게 고통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그녀의 흐느낌은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격렬해졌다.
최은수는 자리를 옮겨 이하나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주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감싸 안은 채 그녀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서 그는 그녀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이 뒤섞인 괴로움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한참 시간이 흘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이하나가 최은수가 내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결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이하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하고 나서 다시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최은수는 이하나의 결혼을 무조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예…….」
「말도 안 돼!」
최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 잔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깨지지는 않았다. 그의 격렬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더욱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짐승처럼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진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미안해요.」
이하나는 계속 최은수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상심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왜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그 남자는 그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일 것이다. 그녀의 결혼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전개였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는 격언을 아주 옛날에 터득해 알고 있었지만 최은수는 이하나가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 왔던가. 또 그는 그걸 실현시키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고 견디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그녀의 결혼은 그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였다.
축복해 주고, 잘 살아라, 부디 행복 하라고 마음으로 빌려주면서도 한편으로 최은수는 맨땅에다 머리를 들이박고 싶을 정도로 충격에 휩싸여 마냥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오래 전에 헤어지는 연습을 많이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탓인가? 그는 온 세상이 한순간에 허물어질지 모르는 모래로 이루어졌다는 절망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최은수는 못마땅하고 불쾌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 담배만 연거푸 두 개비나 피워 댔고, 이하나 역시 담배를 피우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침묵을 견디지 못한 그가 음울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하는데?」
최은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 달 이십삼 일에 해요.」
「뭐라고? 이십삼 일에 한다고? 그럼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최은수는 화난 듯 소리쳤다.
「예…….」
「그런데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최은수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면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하나의 결혼 결정이 이루어진 게 며칠 전인지 알았다. 그런데 이 달 이십삼 일에 결혼식을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의 결혼은 며칠 전이 아니라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둔다고 했을 때보다도 더 훨씬 전에 결정된 것이었다. 그녀는 차마 그에게 결혼하기 때문에「아방궁」을 그만 둔다는 말을 못하고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댔던 것이다. 그때 그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의심했어야 했다.
「미안해요.」
이하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그녀는 최은수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할말이 없었다.
「뭐하는 남자야?」
이하나에게 반발하듯 최은수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일산종합시장에서 어머니가 하는 옷가게의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떨어뜨렸던 고개를 든 이하나의 얼굴에는 슬픈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나이는 몇 살인데?」
자기가 직접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직업 없이 겨우 어머니가 하는 옷가게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이하나에게 실망을 한 최은수는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듯이 남자의 나이를 물었다.
「서른네 살이에요.」
이하나는 최은수의 화난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가 주위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뭐라고? 서른네 살이라고?」
남자의 나이가 이하나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 서른네 살이라는 말에 최은수는 버럭 화를 냈다. 서른네 살이라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퍼붓고 싶은 욕설을 참기 위해 목에 굵은 핏줄을 곤두세웠다.
「…….」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하지 않는 이하나의 눈에서 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최은수는「갤러리」커피숍에서 나와 이하나와 함께 레스토랑「아셀」로 갔다. 기분이 깨진 박처럼 엿 같았지만, 그 기분으로 그녀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사이에 깊은 웅덩이 하나가 가로놓인 것처럼 낯선 사람 대하듯 서먹스럽기만 했다. 이하나는 최은수가 먼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는 묵묵히 그녀 앞에 놓인 스테이크에 소금을 뿌려 주면서 눈으로 말했다. 맛있게 먹으라고.
레스토랑「아셀」에서 나오자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최은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이하나의 속마음을 한번 떠보고 싶었다.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 동안의 만남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만약에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그 동안의 만남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치사스럽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오늘은 진짜 널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 부탁하는데, 나 오늘 너하고 자고 싶어.」
그러나 이하나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것이라는 예감을 느낀 최은수의 얼굴과 목소리는 무뚝뚝하게 굳어 있었다.
「…….」
이하나는 최은수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대로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며 걷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왜 싫지?」
「…….」
비록 이하나가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두고부터는 한 번도 같이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최은수의 마음속에는 그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호스티스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을 그녀가 휴식이 필요할 것이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녀의 승낙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서글퍼지는 걸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 최은수는 이하나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것을 꼭 실행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불쑥 그녀의 속마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거절에 마음은 서글퍼졌지만 결혼할 그 남자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그녀를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면서 항상 하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가 슬쩍 손을 빼며 딴전을 부렸다. 이번엔 그가 팔짱을 끼려고 하자 마찬가지로 그녀가 슬쩍 팔을 풀었다.
최은수는 그런 이하나에게서 예전의 느껴졌던 그 어느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하루아침에 자신이 알고 있던 그녀와는 아주 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간신히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그의 가슴속으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이젠 내가 필요 없었진 거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넌 아주 나쁜 여자야!」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최은수는 이하나와 헤어진 뒤 그녀가 탄 버스의 꽁무니를 먼발치에서 지켜본 후 돌아서는 순간 지독한 괴로움을 억누를 수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그냥 선 채로 돌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암담하고 괴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최은수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최대한 마음의 안정을 시키기 위해 애썼다. 마음을 고쳐먹은 이하나가 버스에서 내려 자신에게 달려올 것 같은 기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서서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최은수는 바닥에 꽁초를 내버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집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교동으로 가 주세요.」
최은수는 룸살롱「아방궁」에 가기 위해 코오롱 빌딩 앞에서 내렸다. 이하나가 없더라도 그녀의 친구인 유진이는 있을 것이다. 아니, 유진이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꼭 그녀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만약 그녀가 없다면 그는 아무 여자라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싶었다.
유진이는 이미 다른 룸에서 손님을 받고 있었다. 인기가 좋은 그녀를 지금 이 시간까지 남자들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대신 최은수의 옆자리에 성인식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작고 귀여운 여자가 앉았다. 이름이 이화라고 했지만, 애당초 여자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여자의 이름을 모르면서 여자가 따라 주는 양주를 미친 놈 막걸리 마시듯 마셔 댔다.
최은수는 말도 안 되는 이하나의 선택에 도저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처지와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떻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그것도 결혼을 한 번은 실패했을 것 같은 나이에, 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 사람과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하나와 헤어지면서 최은수는 그녀를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성관계를 원하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것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을 하게 되자 그 동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은수는 이하나가 룸살롱「아방궁」을 그만 두고서 성관계를 서너 번 요구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적당한 핑계로 그의 요구를 거절했었다. 자기가 무슨 요조숙녀라고,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그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땐 그녀를 이해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면 최은수는 이하나의 몸을 다른 접대부와의 관계처럼 돈을 주고 샀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돈을 받고 자기 몸을 그에게 팔았다는 결론과 함께…….
「나는 그녀에게 도대체 뭐였던가?」
최은수는 머릿속에서 들끓어 대는 혼란을 털어 내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과연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인가?」하고, 자신의 내면이 거짓을 감추기 위해 위선으로 위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이켜봤다.
최은수가 조금이라도 이하나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그런 화난 목소리로 눈을 부라리며, 뭐 하는 남자냐고 묻지 말고 그녀에게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하나를 탓하거나 욕할 필요도 없었다. 최은수는 자신을 위했던 것일 뿐, 그녀를 위해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그녀가 행복해지기보다는 불행해지기 바라는 사람 같았다. 그건 그녀에게 배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하나를 만나서 그녀의 고민을 함께 고민을 하고, 즐거움은 같이 나누어 갖고, 그녀를 위해 룸살롱「아방궁」에 가 술을 마시고, 그냥 그대로 헤어지기 싫어 호텔에 가서 몸을 섞고, 어느 땐 다른 남자를 접대하느라고 늦게 오는 그녀를 기다리며 침대 위에서 성냥팔이 소녀처럼 쭈그리고 앉아 애꿎은 담배만 피우다 홀로 잠이 들고…….
그렇게 이하나를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최은수의 가슴속에서 출렁거렸다. 그는 갑자기 자기 혼자만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괴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최은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뜨거운 물 끓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거침없이 술잔을 비웠고 계속해서 잔이 빌 때마다 점점 취해 갔다.
웬만큼 최은수와 이하나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이화가 최은수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하고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별의별 아양을 다 떨었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둘러 옷을 벗었다. 너무 취한 최은수는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콘돔을 끼워 준 이화를 껴안고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서 이하나의 냄새가 맡아졌다. 향긋한 꽃내음이었다. 그는 이하나의 몸이 그리워 한동안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한숨을 푹푹 내쉬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마치 오늘밤을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끝내려는 듯 이화의 몸을 탐하는 최은수의 행동은 운동선수처럼 거칠고 격려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절정으로 내닫던 이화가 탄성과 신음을 내뱉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땀을 흘리며 성관계에 몰입하던 최은수는 정액을 쏟아 내고서 그녀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이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화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최은수의 알몸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시들어진 그의 성기에서 콘돔을 빼서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었다.
룸살롱에서 최은수는 대단한 단골손님이었다. 이화는 앞으로 이하나가 결혼하고 나면 그를 자기 손님으로 끌어들일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