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는 날들은 무척이나 느리고 지루했다. 주희와 해맞이를 하러 정동진에 가려고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문혁도 우리 목소리를 들었는지 반갑게 웃으며 돌아봤다.
“역시 두 분 이셨군요. 주희씨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듣는다니까요. 해돋이 보러 가시게요?”
주희는 원래 문혁의 팬이니 엄청 반가워했다. 문혁은 표를 바꿔 우리가 탄 칸으로 옮겨왔다. 처음에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주희도 다들 잠들자 잠들어 버렸다.
휘진이 영국으로 간지 일주일도 안지났는데 내 머릿속엔 온통 그에 대한 생각 뿐이다. 문혁이 맥주 한잔 하자고 했다. 기차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또 처음이다.
“요즘 연애사업은 어때요? 아직도 고백 못한건 아니죠?”
“고백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는 내가 휘진을 포기한 줄 알았던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지만 틀렸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고백했거든요.”
순간 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돌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그럼 이제 선혜씬 완전히 날아가버린 건가요? 아쉽네요. 그래도 뭐 나 애인 생길때까지는 필요하면 전화할테니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그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그럼요. 언제든지요.”
돌아오는 기차안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어버렸다. 사람들이 내리느라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이미 기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해있다. 주희와 문혁을 깨웠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남동생이 자취방 전세값을 사기당했다는 것이다. 건물주가 고의로 부도를 내고 도망가 버려서 경매에 올랐는데 알고보니 이중계약서였단다. 엄마가 달려갔지만 이미 집주인이 도망가 버린 뒤라 돈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고, 경매로 집을 산 사람은 있던 사람들 다 내보내고 월세로 돌린단다. 주희는 우리집 사정을 아는지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 동생 사기당한거야? 그럼 다음 학기 살 집은 어떻게 되는거야?”
“글쎄다... 지금 살던 집에 월세로 살던지 아님 다른 전세를 구해봐야지.”
“너 전세 구해 줄 돈 없잖아.”
“지방이라서 집값이 안 비싸. 어떻게든 되겠지뭐.”
문혁이 있어서 그런걸 자꾸 이야기하는 주희가 야속했다. 문혁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못 들은 척 이리 저리 걸어다녔다. 점심을 먹고 가자는 걸 먼저 들어왔다.
통장에 있는 돈이 천칠십오만원. 전세는 어림도 없고 월세 보증금은 되겠다.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엄마는 한숨만 쉬셨다.
“그 돈 다 쓰고 나면 너 시집갈 때 뭐해가지고 가니? 그 돈은 그냥 넣어둬. 우리가 구해볼게.”
“난 지금 사는 아파트 전세값 있잖아. 선우 방 구하는데 보태요. 엄마는 아버지 약값하기도 빠듯하잖아.”
다시 내 통장은 0원으로 시작된다. 주희와 반씩 돈내서 23평 아파트에 전세 들어올때는 내 집을 산 것보다 더 좋았다. 대학때 기숙사 있으면서 늘 과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래서 비록 대출이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너무 좋았다. 대출한 것을 2년만에 다 갚고 돈이 좀 모이려나 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휘진이 돌아온다고 전화가 왔다. 리무진버스를 타고 인천공항까지 나갔다. 조금 그을린 휘진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사람이 많은 데서 아무렇지 않게 내게 키스했다.
“너무 대담한거 아니예요?”
“영국가니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던걸. 잘있었소? 살이 더 빠졌구만. 내가 그리웠나보군.”
“칫. 어서 가요. 피곤할텐데.”
“잠시만. 어머니 나오신다고 했는데.”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다 보고 있었던 듯 유쾌하게 웃고 계셨다.
“선혜씨도 오랜만이예요. 일단 공항을 나가자. 사람들 많은데 오니까 머리가 아프다.”
차 안에서 그의 어머니는 궁금했던 것을 일제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선혜씨 아버님은 뭐하시고?”
“담배인삼공사 다니셨는데, 몸이 편찮으셔서 퇴직하고 5년째 쉬고 계세요.”
“그럼 동생 학비랑 생활비는 어쩌고?”
“아버지 퇴직금으로 학비는 하고 있구요. 생활비는 엄마가 조금씩 버시는 걸로 ...”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내게 집적대던 남자들과 조금이라도 깊은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면 헤어졌었다.
“어머니가 많이 힘드셨겠네. 그래도 예전에 아버님 버실 때 씀씀이가 있으니 갑자기 살림 줄이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는데...그럼 아버님은 이제 괜찮으시고?”
“네.....거의 완치되셨어요. ”
“그나마 다행이구만.”
그나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나 하나 만으로 평가받고 싶은데 우리 가족들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들고, 움츠러든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심문하시는 것도 아니고. 점심 뭐 드실래요?”
“백화점으로 가자. 아부지도 매장 둘러보러 그리 오신다고 했어.”
그의 아버지가 좀 늦으신다고 전화가 와서 어머닌 옷이나 보러 가자고 했다.
“ 난 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달랑 있어서 남들 딸들 데리고 쇼핑가는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구. 선혜씨 데리고 나도 쇼핑 좀 해보자.”
“그러세요. 어머니, 이제 선혜라고 부르세요. ”
“그럴까? 난 처음부터 선혜가 마음에 들었거든. 집안사정이야 어찌 되었든간에 밝게 웃고, 예의도 바르고..”
우리 집안 사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닌 백화점 VIP 고객이라 주차도 VIP고객 전용 주차장에 하고, 여성복 매장에서는 그녀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달려나와 인사했다.
“어머~, 며느님하고 같이 오셨어요? 어쩜 며느님도 시어머니를 닮아 이렇게 미인이세요?”
먹고 살기 힘든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겠지만 듣는 귀는 즐거웠다.
“그렇지? 얘가 좀 말라서 그렇지 이목구비는 얼마나 예뻐.”
점원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그녀는 매장을 휘 둘러보더니 하늘색 정장을 뽑아들었다.
“선혜, 이거 한번 입어봐. 딱 어울리겠는데.”
막상 받아들었지만 어찌할 줄 몰라 그를 쳐다보니 그가 눈짓으로 입어보라고 했다.
탈의실에서 나오니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 듯 돌아보라고 했다.
“거봐. 내 눈은 정확하지? 이따가 너희 아버지 만날 때 이거 입고 가면 되겠다. 갈아입지 말고 그냥 이거 입고 가지뭐. 아가씨, 여기 택이나 좀 떼고 계산해줘요.”
그의 아버지는 백화점 VIP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까다롭게 보이는 어머니와는달리 아버지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았다.
“같이 점심이나 먹고 난 매장에 들렀다가 다시 회사 가봐야 하는데..”
그의 아버진 어머니와 달리 과묵한 듯 했다. 내게 별말씀 안하셨지만, 이것 저것 먹으라고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 주셨다.
“난 바빠서 그만 들어가 봐야겠는데...자, 이걸로 휘진이랑 맛난거 사먹고 들어가요.”
그의 아버진 지갑에서 수표를 3장 꺼내 주셨다. 한사코 사양하니 그도 도와주었다.
“아버지 저 돈 있어요. 그냥 넣어두세요.”
“임마,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어? 니 생활비 하기도 바쁜 놈이. 이건 내가 선혜씨한테 주는거니 받아요.”
그의 어머니가 얼른 받으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받았다.
“너희 아버지가 웬일이냐? 선혜가 마음에 엄청 들었던가보네.. 그럼 나도 간다. 놀다가 들어가.”
“옷 감사해요. 잘 입을께요.”
“그래. 예쁘게 입고 다니렴. 다음에 또 같이 오자꾸나.”
난 그의 식구들에게 자꾸만 받아서 부담이 되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부담느끼지 말아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우리 식구들 모두 선혜씨를 좋아하고, 아끼는 건 당연한 것이잖소. 어머니 말씀처럼 우리집에 딸이 없으니 선혜씨가 딸 노릇도 해주면 좋고. 당신 부모님도 날 좋아해야 할텐데 말이오.”
그의 부모님을 만나고부터는 갑자기 진도가 쑥쑥 나가기 시작했다. 벌써 양가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들만 모신 조촐한 식사였지만, 우리집과 그의 집의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히 결혼식 이야기가 나올땐 서로의 씀씀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 우리집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애들집은 지금 휘진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있으니 거기로 신혼집 마련하면 될 것 같구요. 살림도 웬만한건 다 있으니 별로 준비하지 않으셔도 될거예요.”
그의 어머닌 통보하듯 일러주었다.
“저희는 형제도 별로 없어서 예단할 것도 없으니 예단비는 안보내셔도 되구요. 원래 며느리가 시아버지 도포는 해온다고 하니 그것만 준비하시면 될거예요.”
우리 엄마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상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하시는 분이라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저 사람 말 오해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저희는 선혜가 우리집 식구가 된다는 것만 해도 그 어떤 혼수보다 귀한 선물을 받는 것 같은데 더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저희집에 보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부디 부담갖지 마시고 간소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결혼한다고 했을때 엄마는 2년만 미루면 안되겠냐고 했다. 선우 취직하고 나면 시집갈 때 그래도 혼수 좀 해줄 수 있을거라고. 그렇지만 휘진이 우겨서 어쩔 수 없었다.
일방적인 KO패로 우리집은 무너지고 그의 어머닌 의기양양하게 차를 타고 갔다.
부모님과 우리 아파트로 왔다. 엄마는 들어서자마자 물을 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집이 그렇게 잘사는 집이야? 돈 있다고 원...사람을 무시해도..”
“엄마, 그런게 아니라 휘진씨 아버님 말씀대로 우리집에 부담될까봐 그런거지.”
“시끄러. 내가 딸이 둘이니 셋이니? 너 하나 밖에 없는데 빚을 내서라도 해줄건 해줘야지.”
“엄마 그렇게 빚내서 엄마, 아빠한테 부담주고 하는 결혼 나도 하기 싫어. 그러니 잘된거지.”
휘진이 전화가 왔다.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아파트로 온 모양이다. 우리집에 오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 엄마가 기분 상한걸 알고 풀어주려나보다.
“자네 왜 우리 선혜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행정고시 패스하고 능력있겠다, 집안 좋겠다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데..”
“어머님,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 선혜씨 데려갈 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저희 어머니 때문에 속상하시다면 다 풀어버리세요.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게 아닌데 말입니다.”
“난 우리 선혜가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나 만나서 평범하게 살면 좋겠네. 올라가지 못할 나무 올라가다 떨어지지 않길 바라네.”
수레국화 +10
그가 없는 날들은 무척이나 느리고 지루했다. 주희와 해맞이를 하러 정동진에 가려고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문혁도 우리 목소리를 들었는지 반갑게 웃으며 돌아봤다.
“역시 두 분 이셨군요. 주희씨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듣는다니까요. 해돋이 보러 가시게요?”
주희는 원래 문혁의 팬이니 엄청 반가워했다. 문혁은 표를 바꿔 우리가 탄 칸으로 옮겨왔다. 처음에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주희도 다들 잠들자 잠들어 버렸다.
휘진이 영국으로 간지 일주일도 안지났는데 내 머릿속엔 온통 그에 대한 생각 뿐이다. 문혁이 맥주 한잔 하자고 했다. 기차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또 처음이다.
“요즘 연애사업은 어때요? 아직도 고백 못한건 아니죠?”
“고백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는 내가 휘진을 포기한 줄 알았던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지만 틀렸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고백했거든요.”
순간 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돌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그럼 이제 선혜씬 완전히 날아가버린 건가요? 아쉽네요. 그래도 뭐 나 애인 생길때까지는 필요하면 전화할테니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그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그럼요. 언제든지요.”
돌아오는 기차안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어버렸다. 사람들이 내리느라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이미 기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해있다. 주희와 문혁을 깨웠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남동생이 자취방 전세값을 사기당했다는 것이다. 건물주가 고의로 부도를 내고 도망가 버려서 경매에 올랐는데 알고보니 이중계약서였단다. 엄마가 달려갔지만 이미 집주인이 도망가 버린 뒤라 돈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고, 경매로 집을 산 사람은 있던 사람들 다 내보내고 월세로 돌린단다. 주희는 우리집 사정을 아는지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 동생 사기당한거야? 그럼 다음 학기 살 집은 어떻게 되는거야?”
“글쎄다... 지금 살던 집에 월세로 살던지 아님 다른 전세를 구해봐야지.”
“너 전세 구해 줄 돈 없잖아.”
“지방이라서 집값이 안 비싸. 어떻게든 되겠지뭐.”
문혁이 있어서 그런걸 자꾸 이야기하는 주희가 야속했다. 문혁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못 들은 척 이리 저리 걸어다녔다. 점심을 먹고 가자는 걸 먼저 들어왔다.
통장에 있는 돈이 천칠십오만원. 전세는 어림도 없고 월세 보증금은 되겠다.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엄마는 한숨만 쉬셨다.
“그 돈 다 쓰고 나면 너 시집갈 때 뭐해가지고 가니? 그 돈은 그냥 넣어둬. 우리가 구해볼게.”
“난 지금 사는 아파트 전세값 있잖아. 선우 방 구하는데 보태요. 엄마는 아버지 약값하기도 빠듯하잖아.”
다시 내 통장은 0원으로 시작된다. 주희와 반씩 돈내서 23평 아파트에 전세 들어올때는 내 집을 산 것보다 더 좋았다. 대학때 기숙사 있으면서 늘 과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래서 비록 대출이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너무 좋았다. 대출한 것을 2년만에 다 갚고 돈이 좀 모이려나 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휘진이 돌아온다고 전화가 왔다. 리무진버스를 타고 인천공항까지 나갔다. 조금 그을린 휘진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사람이 많은 데서 아무렇지 않게 내게 키스했다.
“너무 대담한거 아니예요?”
“영국가니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던걸. 잘있었소? 살이 더 빠졌구만. 내가 그리웠나보군.”
“칫. 어서 가요. 피곤할텐데.”
“잠시만. 어머니 나오신다고 했는데.”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다 보고 있었던 듯 유쾌하게 웃고 계셨다.
“선혜씨도 오랜만이예요. 일단 공항을 나가자. 사람들 많은데 오니까 머리가 아프다.”
차 안에서 그의 어머니는 궁금했던 것을 일제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선혜씨 아버님은 뭐하시고?”
“담배인삼공사 다니셨는데, 몸이 편찮으셔서 퇴직하고 5년째 쉬고 계세요.”
“그럼 동생 학비랑 생활비는 어쩌고?”
“아버지 퇴직금으로 학비는 하고 있구요. 생활비는 엄마가 조금씩 버시는 걸로 ...”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내게 집적대던 남자들과 조금이라도 깊은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면 헤어졌었다.
“어머니가 많이 힘드셨겠네. 그래도 예전에 아버님 버실 때 씀씀이가 있으니 갑자기 살림 줄이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는데...그럼 아버님은 이제 괜찮으시고?”
“네.....거의 완치되셨어요. ”
“그나마 다행이구만.”
그나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나 하나 만으로 평가받고 싶은데 우리 가족들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들고, 움츠러든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심문하시는 것도 아니고. 점심 뭐 드실래요?”
“백화점으로 가자. 아부지도 매장 둘러보러 그리 오신다고 했어.”
그의 아버지가 좀 늦으신다고 전화가 와서 어머닌 옷이나 보러 가자고 했다.
“ 난 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달랑 있어서 남들 딸들 데리고 쇼핑가는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구. 선혜씨 데리고 나도 쇼핑 좀 해보자.”
“그러세요. 어머니, 이제 선혜라고 부르세요. ”
“그럴까? 난 처음부터 선혜가 마음에 들었거든. 집안사정이야 어찌 되었든간에 밝게 웃고, 예의도 바르고..”
우리 집안 사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닌 백화점 VIP 고객이라 주차도 VIP고객 전용 주차장에 하고, 여성복 매장에서는 그녀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달려나와 인사했다.
“어머~, 며느님하고 같이 오셨어요? 어쩜 며느님도 시어머니를 닮아 이렇게 미인이세요?”
먹고 살기 힘든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겠지만 듣는 귀는 즐거웠다.
“그렇지? 얘가 좀 말라서 그렇지 이목구비는 얼마나 예뻐.”
점원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그녀는 매장을 휘 둘러보더니 하늘색 정장을 뽑아들었다.
“선혜, 이거 한번 입어봐. 딱 어울리겠는데.”
막상 받아들었지만 어찌할 줄 몰라 그를 쳐다보니 그가 눈짓으로 입어보라고 했다.
탈의실에서 나오니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 듯 돌아보라고 했다.
“거봐. 내 눈은 정확하지? 이따가 너희 아버지 만날 때 이거 입고 가면 되겠다. 갈아입지 말고 그냥 이거 입고 가지뭐. 아가씨, 여기 택이나 좀 떼고 계산해줘요.”
그의 아버지는 백화점 VIP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까다롭게 보이는 어머니와는달리 아버지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았다.
“같이 점심이나 먹고 난 매장에 들렀다가 다시 회사 가봐야 하는데..”
그의 아버진 어머니와 달리 과묵한 듯 했다. 내게 별말씀 안하셨지만, 이것 저것 먹으라고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 주셨다.
“난 바빠서 그만 들어가 봐야겠는데...자, 이걸로 휘진이랑 맛난거 사먹고 들어가요.”
그의 아버진 지갑에서 수표를 3장 꺼내 주셨다. 한사코 사양하니 그도 도와주었다.
“아버지 저 돈 있어요. 그냥 넣어두세요.”
“임마,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어? 니 생활비 하기도 바쁜 놈이. 이건 내가 선혜씨한테 주는거니 받아요.”
그의 어머니가 얼른 받으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받았다.
“너희 아버지가 웬일이냐? 선혜가 마음에 엄청 들었던가보네.. 그럼 나도 간다. 놀다가 들어가.”
“옷 감사해요. 잘 입을께요.”
“그래. 예쁘게 입고 다니렴. 다음에 또 같이 오자꾸나.”
난 그의 식구들에게 자꾸만 받아서 부담이 되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부담느끼지 말아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우리 식구들 모두 선혜씨를 좋아하고, 아끼는 건 당연한 것이잖소. 어머니 말씀처럼 우리집에 딸이 없으니 선혜씨가 딸 노릇도 해주면 좋고. 당신 부모님도 날 좋아해야 할텐데 말이오.”
그의 부모님을 만나고부터는 갑자기 진도가 쑥쑥 나가기 시작했다. 벌써 양가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들만 모신 조촐한 식사였지만, 우리집과 그의 집의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히 결혼식 이야기가 나올땐 서로의 씀씀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 우리집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애들집은 지금 휘진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있으니 거기로 신혼집 마련하면 될 것 같구요. 살림도 웬만한건 다 있으니 별로 준비하지 않으셔도 될거예요.”
그의 어머닌 통보하듯 일러주었다.
“저희는 형제도 별로 없어서 예단할 것도 없으니 예단비는 안보내셔도 되구요. 원래 며느리가 시아버지 도포는 해온다고 하니 그것만 준비하시면 될거예요.”
우리 엄마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상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하시는 분이라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저 사람 말 오해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저희는 선혜가 우리집 식구가 된다는 것만 해도 그 어떤 혼수보다 귀한 선물을 받는 것 같은데 더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저희집에 보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부디 부담갖지 마시고 간소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결혼한다고 했을때 엄마는 2년만 미루면 안되겠냐고 했다. 선우 취직하고 나면 시집갈 때 그래도 혼수 좀 해줄 수 있을거라고. 그렇지만 휘진이 우겨서 어쩔 수 없었다.
일방적인 KO패로 우리집은 무너지고 그의 어머닌 의기양양하게 차를 타고 갔다.
부모님과 우리 아파트로 왔다. 엄마는 들어서자마자 물을 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집이 그렇게 잘사는 집이야? 돈 있다고 원...사람을 무시해도..”
“엄마, 그런게 아니라 휘진씨 아버님 말씀대로 우리집에 부담될까봐 그런거지.”
“시끄러. 내가 딸이 둘이니 셋이니? 너 하나 밖에 없는데 빚을 내서라도 해줄건 해줘야지.”
“엄마 그렇게 빚내서 엄마, 아빠한테 부담주고 하는 결혼 나도 하기 싫어. 그러니 잘된거지.”
휘진이 전화가 왔다.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아파트로 온 모양이다. 우리집에 오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 엄마가 기분 상한걸 알고 풀어주려나보다.
“자네 왜 우리 선혜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행정고시 패스하고 능력있겠다, 집안 좋겠다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데..”
“어머님,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 선혜씨 데려갈 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저희 어머니 때문에 속상하시다면 다 풀어버리세요.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게 아닌데 말입니다.”
“난 우리 선혜가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나 만나서 평범하게 살면 좋겠네. 올라가지 못할 나무 올라가다 떨어지지 않길 바라네.”
“저를 믿어주십시오. 마음 고생 시키지 않겠습니다.”
엄마는 마음이 좀 풀린 듯 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듯 그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