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14-

러브콜2007.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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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날

  양선아의 수필집이 출간되어 전국의 서점에 깔리면서 그녀와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없어진 나는 다리를 영영 못쓰게 된 축구 선수가 축구 경기를 보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듯 그녀를 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잊으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눈앞에서 그녀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리며 더욱 더 내 가슴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는 그때마다 버릇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양선아와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면서 윤덕재의 출판사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던 나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자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끼며 출판사에서 나왔다.

  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길 잃은 고아처럼 무작정 거리를 배회하던 나는 인쇄소들이 무질서하게 꽉 들어차 있는 비좁은 인현동 골목 모퉁이의 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긴 나무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기름때가 시커멓게 묻은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돼지 곱창이 진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내가 앉은 옆자리에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와 얼굴에 심한 흉터가 있는 남자가 앉아서 자신들의 친구인 듯한 어떤 사람을 끌어다가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을 다루듯이 화제(話題)로 삼고 있었다.

 「억세게 재수 없는 놈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현모양처로만 생각했던 그놈 마누라가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이야. 구조조정에 걸려 회사에서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마누라가 퇴직금을 몽땅 갖고 놈팡이하고 눈 맞아 도망가 버렸으니…….」

  두 남자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주 한 병을 간단히 비우고 밖으로 나온 나는 인현동 골목을 벗어나 바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쑤셔 넣고 두 어깨 사이로 목을 움츠리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대한 극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시골로 보낼 생각인가 봐.」

 「애들하고 생이별하게 생겼군.」

 「아주 못된 마누라야. 자기가 낳은 애들까지 버리고 도망갔으니…….」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두 남자의 대화가 내 귓전에 남아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들의 친구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친구는 마누라가 도망갔지만 나는 내가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를 찾았으나 라이터는 없고 성냥갑이 나왔다. 아마 출판사에다 놓고서 무의식적으로 성냥으로 바꾸어 넣은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성냥을 켰으나 성냥불은 부는 바람에 이내 꺼지고 말았다. 곧바로 또 하나를 켰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담배 피우는 것을 포기하고 담배를 도로 갑 속에 집어넣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소리 없이, 그러나 아주 무겁게 내려앉는 걸 느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변화였다. 숨이 확 막혀 왔다. 그때 텅 빈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띄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공중전화 박스의 접이문을 손으로 밀고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수첩에서 양선아의 전화번호를 찾아 0344, ×75, 82×8의 열 개 숫자를 서둘러 눌렀다. 그러나 벨이 울리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을까 봐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나는 하루하루를 외로움에 흠뻑 취해 속수무책으로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팔을 베개 삼아 베고 배를 방바닥에 깔고 엎드린 채 아내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면서 잔뜩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자신이 무척이나 슬퍼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후드득…….」

  비가 내리는 소리였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며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고 있었다. 곧이어 번개가 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커다랗게 들려 왔다. 그러나 소나기는 황소 오줌 갈기듯 금세 그치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 소나기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요란스럽게 울렸던 것이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방바닥에 엎드린 채 팔을 길게 뻗어 재떨이를 끌어당길 때 전화벨 소리가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며 울어댔다. 전화벨이 계속해서 울어댔지만 집에 있는 줄 알았던 아내는 외출을 했는지 전화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집에서 전화 받을 때의 내 목소리는 빚쟁이에 쫓기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되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 선생님이세요?」

  놀랍게도 전화를 건 사람은 양선아였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듣고 혹시나 아내가 집구석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내는 확실히 집에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 양선아예요.」

 「아, 예…….」

  가뭄에 비 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반갑고 기쁘면서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던 나는 어떻게 대꾸해야 될지 특별히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짜증이 날 정도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지금 뭐하고 계셨어요?」

  양선아는 마치 애인에게 전화를 한 듯 상냥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냥, 그냥 있었습니다.」

  나는 양선아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설레는 가슴을 그녀에게 들킬까 봐 바보처럼 정상적인 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럼, 바쁘시지 않겠네요?」

 「예.」

  나는 그럴듯한 말로 대꾸하려고 했으나 머릿속이 알갱이를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상자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죠?」

  양선아를 다시 만날 기회가 찾아오다니,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사람이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오랜만에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행복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가슴에 가득 차 오르는 기쁨이 느껴졌다.


  나는 양선아보다 약속 장소인 광화문에 있는「커피 하우스 위드」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기 위해 서둘러서 이십 분 가량 일찍 나갔으나 그녀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숍은 좌석이 절반도 차지 않아 한산했다. 그녀는 내가 시선을 똑바로 주지 못할 정도로 언제 봐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 선생님 덕분에 제 수필집이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그래서 저녁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뵙자고 했어요. 괜찮으시죠?」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양선아에게 해준 게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나로서는 그녀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양선아씨의 글이 워낙 좋으니까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줬던 겁니다.」

  나는 담배 연기를 입 밖으로 내뱉은 다음 가슴이 두근거리는 내 모습을 양선아에게 들킬까 봐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를 계속 쳐다보면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감싸고 있는 빨간 도톰한 입술을 내 입술로 덮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에요. 이 선생님이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편집을 아주 잘 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특히 표지 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을 유혹시킬 만큼 근사하고요. 저까지 표지 디자인에 유혹되었는데요.」

 「하여튼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처럼 기분이 좋았을 때가 언제였던가. 나는 양선아와 함께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커피 하우스 위드」에서 나와 내자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친구들 모임 때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일식집이었다.

  일식집으로 들어서자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원이 우리를 다다미가 깔린 사인용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모듬회와 백세주를 주문하자 양선아가 소주를 마시는 게 좋지 않겠냐는 듯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혹시 자신에게 술꾼이라는 이미지를 내가 가질까 봐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백세주를 취소하고 소주를 시킨 다음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술을 마실 줄 아시네요.」

 「예. 조금이요.」

  밝게 웃는 양선아의 볼에서 보조개가 드러났다.

  양선아의 주량은 소주 두 병 정도로 보통 남자들보다도 술이 센 편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대화의 대부분을 작가와 출판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가 말을 할 때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고, 내가 말을 할 때에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술기운이 얼마만큼 오른 나는 양선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고, 여유 만만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개인적인 질문을 그녀에게 내뱉었다.

 「양선아씨는 결혼 안 하세요?」

 「결혼이요?」

  양선아의 입에서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는 도둑놈의 심보를 갖고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내가 하자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깃들 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전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하는 거예요.」

  술기운에 눈가가 붉어진 양선아가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예?」

 「나중에 기회가 오면 말씀드릴 게요.」

  나는 양선아에게 뭔가 복잡하고 슬픈 사연이 있구나, 하는 호기심이 생겼지만 애써 알려고 한다면 그녀가 괴로워할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일식집에서 나온 우리는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기 위해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애인인 듯한 남녀 몇 쌍만 테이블에 앉아 있어서인지 호프집 분위기는 조용했지만 우리가 빈 테이블에 가서 앉을 때까지 그들의 시선은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맥주와 마른안주를 시켰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취기가 오른 양선아는 나에게 아까 못 다한 질문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가정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누워서 침 뱉는 일이었지만, 가끔 내가 아내에 대한 실망스러움을 말할 때에는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던 뭔가 모르는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시간을 다 빼앗기는 바람에 그녀에 대한 질문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술에 너무 취한 양선아는 모범택시를 타는 순간부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있지 않아 내 바지에다 꺼억거리며 오물을 토해 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과 바지에 묻은 오물을 대충 닦아 냈으나 문제는 일산의 아파트 마을 이름만 알뿐 그녀의 집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거였다. 더구나 그녀가 오물을 토하자 화가 난 택시 기사는 나에게 세차비를 빨리 지불하고 하차해 줄 것을 요구했다. 택시 기사는 욕을 하지 않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로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냄새가 차에 배면 다음 손님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택시 기사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면서 이해를 구했다.

 「그러면 저기 앞에 보이는 여관 앞에다 내려 줄 테니까, 그곳에서 내려요.」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택시 기사의 목소리는 귀찮고 짜증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관이요?」

  아무렇지도 않게 손짓으로 여관을 가리키는 택시 기사와 달리 당황해진 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양선아를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싫으세요?」

  내 눈치를 보던 택시 기사의 목소리는 나를 경멸하듯 차가웠다. 억지로 양선아에게 술을 마시게 해서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을 부린 파렴치한 인간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아, 아닙니다.」

  한참 동안 몸을 흔들며 양선아를 깨웠으나 정신을 잃은 그녀는 죽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도 모르고, 나는 난처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를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궁시렁 대는 택시 기사에게 세차비를 섭섭하지 않게 지불하고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의 몸은 업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새털처럼 가벼웠다.

  양선아를 등에 업은 나는 그 와중에서도 그녀의 젖가슴이 등에 와 닿자 두근거리는 가슴이 여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는 가슴이 물고기 아가미처럼 펄떡펄떡 뛸 정도로 흥분을 느꼈다.

  이미 양선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로서는 술에 취한 그녀의 모습까지도 아름다워 보였다. 한순간 떨치기 힘든 충동에 휩싸인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흔들어 충동을 떨쳐 냈다. 무방비 상태인 그녀를 탐하는 것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무는 것처럼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은 귀엽고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양심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던 내 마음은 결코 그 짓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유혹을 참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우선 바지에 묻은 토사물을 물로 씻어 내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 문고리에 걸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끝낸 나는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다시 옷을 입고 욕실을 나왔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선이 침대에서 자고 있는 양선아에게로 자꾸만 향했다. 또 다시 유혹의 그림자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안 돼!」

  나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어 댔다. 만일의 경우 유혹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양선아가 나를 평생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젠장!」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불을 끄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잠자는 거였다. 이 상황에서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양선아를 여관에 혼자 남겨 두고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자리가 불편해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대 위에 올라가 그녀의 옆에서는 잘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나는 끝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침대 위에서 베개를 집어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참을 청했다. 시간이 흐르자 피곤이 몰려왔다. 


  양선아가 눈을 떴을 때는 아침해가 거의 모습을 드러낼 무렵이었다. 늦게 잠을 이룬 내가 아직도 바닥에 누워 자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양선아는 어렴풋이 택시에 타는 것만 기억할 뿐 그 다음에 벌어졌던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수치스러움에 내가 깨어나기 전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었음을 안 양선아는 나의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두 번 실수하는 것 같은 마음에서였다.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양선아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물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내가 겸연쩍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눈빛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아버지처럼 오빠처럼 애인처럼, 포근하고 다정스럽고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녀는 내게서 삼 년 전에 만났던 어떤 남자를 기억해 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남자와 내가 너무 닮은꼴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각자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이곳을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양선아가 곧장 문을 나서려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되돌아보더니 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했어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 양선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를 이대로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게 내 속마음이고, 진실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영영 찾아오지 않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그녀를 잡아 둘 용기가 없었다.

 「오전에 대학 문고에서 펜사인회가 있어 지금 가 봐야 돼요. 오후 다섯 시쯤에 광화문에 있는 커피 하우스 위드에서 뵙기로 해요.」

  양선아는 나에게 다가와 빨개진 얼굴로 내 뺨에 입술을 맞추고 급히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순간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감돌았다. 방안에 혼자 남겨진 나는 이제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내가 한 일이 옳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이 옳았던 것이다. 나는 양선아의 입술이 닿은 뺨을 어루만지면서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기분 좋은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