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동석이 오빠. 저기 앞에 정류장에서 좀 세워주세요. 들릴 곳이 있어서요." 답답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미진의 방문으로 그리고 그녀의 얘기로... "내일 뵐게요.." 승희는 애써 동석과 동민에게 미소지어보이며 차에서 내렸다. 차가 출발하고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승희는 길을 따라 무적정 걷기 시작했다. 그가 있던 곳에서 벗어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한번 정도는 이 런 경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며 자신이 받아들였던 것이었는데... 후회스러웠다. 첫 시련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해 본 것이 없는데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었을 뿐인데... 그냥, 그냥 못 보게 되더라도 잠시 동안만 그리워하다 끝날 줄 알 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훗.." '차 승희. 네가 자초한 일이야. 넌 사랑이란 감정을 너무 우습게 봤어... 너 혼자 감당하고.. 너 혼자 이겨내야 해... 처음부터 정해진 길이었어. 네가 아무리 아파하고 힘들어한다고 해 도 달라질 거는 하나도 없어. 넌 너의 길을.. 그 사람은.. 그녀와 함께 그의 길을... 그렇게... 그렇게 가야 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래 시간이 지 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 질 거야...' 승희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 에 있던 미소는 사라져버렸다. 동민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모를까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 럴 수 있을지 TV에서든 방송국에서든 하다못해 길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서까지도 그 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과연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게 될지... 지금의 그녀로서 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바보 그냥 평범한 사람을 사랑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승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절기다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벌 써 해는 넘어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그 녀가 찾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동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를 비유할 수 있는... 별은 아직 떠 있지 않았다. 동민은 승희가 내리고도 앞으로 옮겨 타지 않았다. 승희의 모습으로 동민의 머릿속은 복잡 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확실하다고 단안 지을 수 있었다. 미진이 승희를 만났다는 것을... 미진은 승희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과연 이번엔 어떤 말로 그녀에게 위협하며 상처 를 주었을까.. 서연이 보였던 슬픈 눈이 떠올랐다.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람... 그 것도 자신과는 무관한 그런 사람에게... 동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노라 자신에게 다짐했었는데...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 그 녀에게 경고 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있어 소중하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 게 또다시 상처를 주려고 하다니...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동석아.. 미진이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어두운 분위기인데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음악 때문인지 왠지 모를 아늑함을 느끼게 해 주는 이곳. 한 땐 즐거움과 여유로움으로 자주 찾던 이곳. 하지만 그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그리움과 원망으로 혼자 외로이 찾았던 이곳... 지금 미진은 설레는 마음과 초 조한 마음으로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의 전화를 받고 그들과 함께 앉았던 그 자리에... 미진 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선 한마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위협적으로 대하 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며 미진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가며 그러면 적어도 그녀 입으로 동민에 게 까바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까지 동민에게 말 할 수 있는 사이 까지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려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었다. 미진은 동민이 즐겨 마시던 칵테일을 시켰다. 술을 마시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지금 미진 의 심경으로는 그냥 맨 정신으로 그를 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우선은 알코올의 기운으로 긴장 감을 풀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만 엄습해 오는 불안함과 초조 함까지도... 처음 동민의 연락을 받은 미진은 당황했었다. 겨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미진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했지만 승희의 성격과 대 화 했을 때에 태도로 보건데 그렇게까지 사리분별 못 할 정도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연일 거야. 그 계집애 그렇게까지 분별 없이 행동할 계집애로는 보이지 않았어. 그래 우 연이야. 우연... 하지만.. 하지만 만일.. 만일 그 계집애 짓이라면.. 그땐.. 차 승희.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미진은 승희을 떠올리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렸다. 동민은 가게 입구에 서서 심호흡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승희를 만난 것은 틀 림이 없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녀를 보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동민으로서도 난감했다. 무작정 터트릴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일 까. 예전에 계영에게 했던 것처럼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으름장을 놓은 것일까 아니면 서 영이 누나 때처럼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말을 하며 살살 꾀어 놓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승희의 성격으로 협박 같은 건 통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까 보았던 승희의 모습 으로는 좋은 조건에 자리로 인해 좋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민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잘 지냈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가까이 온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며 앉아 있는 미진을 보며 동민이 먼저 말을 건넸다. "어?! 어.. 언제.. 왔어?" 벌써 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지 자신의 등장에 조금은 당황해 하는 모습에 미 진이었다. "지금." "그래?.. 앉아." 동민은 미진 옆에 앉았다. 그리곤 언제나 그랬듯이 바텐더에게 인사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미 소를 보내고는 고갯짓을 한번 해 보였다. 바텐더는 동민의 뜻을 알았는지 그 또한 가볍게 고 갯짓을 하고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동민씨가 먼저 내게 연락을 다 하고.." "훗.." 동민은 미진의 말에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렸고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 이렇게 이곳에 마주하며 앉아 있는 거..." 미진이었다. 예전에 일을 회상하는지 미진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래.." 왠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씁쓸함이 느껴지는 동민이었다. 회상만으로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과연 저렇게 웃을 수 있을 만큼 즐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꼭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 같았다. "드라마 촬영도 이제 끝나간다면서?" 현실로 돌아왔는지 조금 전에 보였던 미소는 사라지고 없는 미진이었다. "어. 이제 막바지 촬영만 남았어." "그래.." 미진은 두려웠다.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자신이 먼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동석씨..." 미진의 말이 끊어졌다. 동석에 안부를 물을 참이었는데 동민이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오늘 왔었다면서?" 동민의 목소리는 여느때보다도 더 가라앉아 있었고 그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미진 이었다. "어?! 어.. 일이 있어서.." 당황하는 것 같던 미진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왠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물어오는 동민이었다. 미진은 그런 동민의 모습에 당황스러 움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미진의 마음은 승희의 대한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진의 표정도 차갑게 변해갔다. "몰라서 묻는 거야? 그새 내 직업이 뭔지 잊어버리기라도 했어?" 목소리 또한 지금의 감정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 차가웠다. 동민은 미진을 돌아보았다. 예전 그대로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그런 그녀의 모습으로... 하지만 눈빛만 큼은 그녀도 어쩔 수 없었나보다. 그녀의 눈빛은 맞서려는 듯 도전적인 눈빛이긴 했지만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지 흔들리고 있었다. "훗. 그냥.. 거기까지 왔는데 왜 얼굴도 안보고 그냥 갔을까 해서." "촬영하느라 바쁜 것 같아서..." 잠시 동민의 눈을 마주하고 있던 미진은 시선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금 말이 없었다. "나 왔던 거.. 당신 코디가 얘기해 준거야?" 미진의 말투는 차가움 그 자체였다. 동민은 싸늘한 눈빛으로 미진을 바라보았다. 당신 코디.. 이 말은 분명 승희를 만났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동민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동민은 따져 묻고 싶었다. 도대체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거냐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싸늘했던 동민의 눈빛이 차츰차츰 측은함으로 바뀌어 갔다. 미진의 모습 때문이었다. 동민의 느낌상 미진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 했다. 여자의 직감은 무섭다 하더니... 미진은 자신 앞에 놓인 잔이 승희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증오와 분노로 뒤섞여 있는 표정으로... 동민은 천천히 자신의 잔으로 시 선을 돌렸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저렇듯 격분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 또한 자신 때문에 아파하며 힘 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데... "아니 우연히 다른 코디들이 하는 얘길 들었어." "흐흣. 그래?" 못미더운지 비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고 있는 미진이었다. 동민은 그런 미진의 반응에 조금은 불쾌감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못 본척 그냥 넘겨버렸다. 그리곤 조용한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진아.. 난 말이야. 너와 좋은 인연으로 남고 싶어... 편하게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는.. 서 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옆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같은 인연.. 미진아.. 우리 그 냥 좋은 친구로 남자." 동민은 말을 끝으로 미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과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도 아닌 원망도 아닌 고통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의 연인은 사기꾼 스타. (67)
"저.. 동석이 오빠. 저기 앞에 정류장에서 좀 세워주세요. 들릴 곳이 있어서요."
답답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미진의 방문으로 그리고
그녀의 얘기로...
"내일 뵐게요.."
승희는 애써 동석과 동민에게 미소지어보이며 차에서 내렸다. 차가 출발하고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승희는 길을 따라 무적정 걷기 시작했다. 그가 있던 곳에서 벗어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한번 정도는 이
런 경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며 자신이 받아들였던 것이었는데... 후회스러웠다.
첫 시련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해 본 것이 없는데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었을 뿐인데... 그냥, 그냥 못 보게 되더라도 잠시 동안만 그리워하다 끝날 줄 알
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훗.."
'차 승희. 네가 자초한 일이야. 넌 사랑이란 감정을 너무 우습게 봤어... 너 혼자 감당하고..
너 혼자 이겨내야 해... 처음부터 정해진 길이었어. 네가 아무리 아파하고 힘들어한다고 해
도 달라질 거는 하나도 없어. 넌 너의 길을.. 그 사람은.. 그녀와 함께 그의 길을... 그렇게...
그렇게 가야 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래 시간이 지
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 질 거야...'
승희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
에 있던 미소는 사라져버렸다. 동민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모를까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
럴 수 있을지 TV에서든 방송국에서든 하다못해 길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서까지도 그
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과연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게 될지... 지금의 그녀로서
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바보 그냥 평범한 사람을 사랑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승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절기다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벌
써 해는 넘어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그
녀가 찾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동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를 비유할 수 있는...
별은 아직 떠 있지 않았다.
동민은 승희가 내리고도 앞으로 옮겨 타지 않았다. 승희의 모습으로 동민의 머릿속은 복잡
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확실하다고 단안 지을 수 있었다. 미진이 승희를 만났다는 것을...
미진은 승희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과연 이번엔 어떤 말로 그녀에게 위협하며 상처
를 주었을까.. 서연이 보였던 슬픈 눈이 떠올랐다.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람... 그
것도 자신과는 무관한 그런 사람에게... 동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노라 자신에게 다짐했었는데...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 그
녀에게 경고 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있어 소중하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
게 또다시 상처를 주려고 하다니...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동석아.. 미진이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어두운 분위기인데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음악 때문인지 왠지 모를 아늑함을 느끼게
해 주는 이곳. 한 땐 즐거움과 여유로움으로 자주 찾던 이곳. 하지만 그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그리움과 원망으로 혼자 외로이 찾았던 이곳... 지금 미진은 설레는 마음과 초
조한 마음으로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의 전화를 받고 그들과 함께 앉았던 그 자리에... 미진
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선 한마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위협적으로 대하
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며 미진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가며 그러면 적어도 그녀 입으로 동민에
게 까바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까지 동민에게 말 할 수 있는 사이
까지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려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었다. 미진은
동민이 즐겨 마시던 칵테일을 시켰다. 술을 마시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지금 미진
의 심경으로는 그냥 맨 정신으로 그를 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우선은 알코올의 기운으로 긴장
감을 풀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만 엄습해 오는 불안함과 초조
함까지도... 처음 동민의 연락을 받은 미진은 당황했었다. 겨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미진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했지만 승희의 성격과 대
화 했을 때에 태도로 보건데 그렇게까지 사리분별 못 할 정도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연일 거야. 그 계집애 그렇게까지 분별 없이 행동할 계집애로는 보이지 않았어. 그래 우
연이야. 우연... 하지만.. 하지만 만일.. 만일 그 계집애 짓이라면.. 그땐.. 차 승희.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미진은 승희을 떠올리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렸다.
동민은 가게 입구에 서서 심호흡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승희를 만난 것은 틀
림이 없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녀를 보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동민으로서도 난감했다. 무작정 터트릴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일
까. 예전에 계영에게 했던 것처럼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으름장을 놓은 것일까 아니면 서
영이 누나 때처럼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말을 하며 살살 꾀어 놓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승희의 성격으로 협박 같은 건 통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까 보았던 승희의 모습
으로는 좋은 조건에 자리로 인해 좋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민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잘 지냈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가까이 온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며 앉아 있는 미진을 보며
동민이 먼저 말을 건넸다.
"어?! 어.. 언제.. 왔어?"
벌써 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지 자신의 등장에 조금은 당황해 하는 모습에 미
진이었다.
"지금."
"그래?.. 앉아."
동민은 미진 옆에 앉았다. 그리곤 언제나 그랬듯이 바텐더에게 인사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미
소를 보내고는 고갯짓을 한번 해 보였다. 바텐더는 동민의 뜻을 알았는지 그 또한 가볍게 고
갯짓을 하고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동민씨가 먼저 내게 연락을 다 하고.."
"훗.."
동민은 미진의 말에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렸고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 이렇게 이곳에 마주하며 앉아 있는 거..."
미진이었다. 예전에 일을 회상하는지 미진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래.."
왠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씁쓸함이 느껴지는 동민이었다. 회상만으로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과연 저렇게 웃을 수 있을 만큼 즐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꼭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 같았다.
"드라마 촬영도 이제 끝나간다면서?"
현실로 돌아왔는지 조금 전에 보였던 미소는 사라지고 없는 미진이었다.
"어. 이제 막바지 촬영만 남았어."
"그래.."
미진은 두려웠다.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자신이 먼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동석씨..."
미진의 말이 끊어졌다. 동석에 안부를 물을 참이었는데 동민이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오늘 왔었다면서?"
동민의 목소리는 여느때보다도 더 가라앉아 있었고 그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미진
이었다.
"어?! 어.. 일이 있어서.."
당황하는 것 같던 미진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왠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물어오는 동민이었다. 미진은 그런 동민의 모습에 당황스러
움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미진의 마음은 승희의 대한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진의 표정도 차갑게 변해갔다.
"몰라서 묻는 거야? 그새 내 직업이 뭔지 잊어버리기라도 했어?"
목소리 또한 지금의 감정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 차가웠다. 동민은 미진을 돌아보았다. 예전
그대로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그런 그녀의 모습으로... 하지만 눈빛만
큼은 그녀도 어쩔 수 없었나보다. 그녀의 눈빛은 맞서려는 듯 도전적인 눈빛이긴 했지만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지 흔들리고 있었다.
"훗. 그냥.. 거기까지 왔는데 왜 얼굴도 안보고 그냥 갔을까 해서."
"촬영하느라 바쁜 것 같아서..."
잠시 동민의 눈을 마주하고 있던 미진은 시선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금 말이 없었다.
"나 왔던 거.. 당신 코디가 얘기해 준거야?"
미진의 말투는 차가움 그 자체였다. 동민은 싸늘한 눈빛으로 미진을 바라보았다.
당신 코디.. 이 말은 분명 승희를 만났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동민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동민은 따져 묻고 싶었다. 도대체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거냐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싸늘했던 동민의 눈빛이 차츰차츰 측은함으로
바뀌어 갔다. 미진의 모습 때문이었다. 동민의 느낌상 미진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 했다.
여자의 직감은 무섭다 하더니... 미진은 자신 앞에 놓인 잔이 승희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증오와 분노로 뒤섞여 있는 표정으로... 동민은 천천히 자신의 잔으로 시
선을 돌렸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저렇듯 격분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 또한 자신 때문에 아파하며 힘
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데...
"아니 우연히 다른 코디들이 하는 얘길 들었어."
"흐흣. 그래?"
못미더운지 비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고 있는 미진이었다.
동민은 그런 미진의 반응에 조금은 불쾌감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못 본척 그냥 넘겨버렸다. 그리곤 조용한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진아.. 난 말이야. 너와 좋은 인연으로 남고 싶어... 편하게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는.. 서
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옆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같은 인연.. 미진아.. 우리 그
냥 좋은 친구로 남자."
동민은 말을 끝으로 미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과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도 아닌
원망도 아닌 고통에 가까운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