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15-

러브콜200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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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

  내가 샤워를 끝내고 여관을 빠져나왔을 때에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마음까지 밝게 해주는 화창한 날씨였다.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바늘이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윤덕재를 만나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갔다. 지금 집에 들어가 봤자 아내의 잔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야 할 판이었다.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면 외박으로 간주하고 있는 아내가 하루 꼬박 밤을 새우고 들어오지 않은 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출판사로 올라가는 층계참에서 나는 외출을 하려던 윤덕재와 마주쳤다. 씩씩하게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나를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띠며 무척 반가워했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경제가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양선아의 수필집「스물아홉에 느낀 사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존폐의 위기까지 몰렸던 출판사의 경영이 한시름 놓게 되자 종래의 여유를 되찾은 그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나 역시 그녀와 아침에 있었던 일로 기분이 좋아 얼굴에 즐거움이 만연해 있었다.

 「어디 가는 길이야?」

 「아니야.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돼.」

  윤덕재는 몸을 돌려 앞장서서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지하에 있는 다방에다 전화로 커피 두 잔을 시키고는 나를 사장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장실이라고 해야 책더미가 잔뜩 무질서하게 쌓인 책장으로 가득 차 있어 게으른 사람의 서재 같았다.

 「오늘은 자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윤덕재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실업자가 좋은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윤덕재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양선아와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궤도를 벗어난 열차처럼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향하는 내 마음을 더더욱 그에게 내보일 수 없었다. 반면에 말을 한다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지만 나는 그저 그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나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에게 그 일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팬티가 거의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은 다방 아가씨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자네의 얼굴은 실업자의 얼굴이 아니야.」

  윤덕재는 아가씨를 대수롭지 않게 힐끗 한 번 쳐다보는 듯 하면서 한쪽 눈을 찡그려 보였다.

 「실업자의 얼굴이 어떤 얼굴인데?」

  나는 다방 아가씨가 타 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표현하자면 절망과 고뇌에 찬 얼굴이겠지.」

 「실업자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절망과 고뇌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메말라 가나 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튼 오랜만에 자네의 웃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좋네.」

  윤덕재는 한 손으로는 커피 잔을 들고 마시면서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를 배달해 온 다방 아가씨의 우유빛 같은 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자네에게 연락할 생각이었어.」

 「나한테?」

 「다른 게 아니고, 내일부터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면 어때?」

  윤덕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고 자네 밑에서 자네가 주는 봉급을 받으면서 일하라고?」

  나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얘기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자네보고 내 밑에서 내가 주는 봉급 받고 일하라고 그랬어? 내 일을 도와 달라는 거지.」

 「그렇다면 좋아.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가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어떤 조건인데?」

 「출퇴근을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뿐만 아니라 지난번처럼 일이 있을 때 그 일의 대가로만 보수를 받겠어. 알겠어?」

 「알았어. 그런 조건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자네를 위해서는 출근을 매일 하는 게 좋아.」

 「자네의 뜻에 동의하겠네.」

  나는 윤덕재의 마음 씀씀이를 속으로는 고마워하면서도 쥐꼬리만한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는 탐탁스럽지 않지만 그의 설득에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처럼 승낙을 했다.

 「자, 그리고 이것 받아.」

  윤덕재는 다방 아가씨가 빈 잔을 챙겨 밖으로 나가자 서랍에서 두툼한 편지 봉투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뭔데?」

  내가 윤덕재가 내민 편지 봉투를 바라보며 의아해 물었다.

 「돈이야.」

 「돈?」

 「응. 돈이야.」

 「무슨 돈?」

 「양선아씨 수필집 판매 이익금 중 자네 몫이야.」

 「이렇게 많아?」

 「많이 팔렸잖아. 전부 자네 덕분이야.」

 「수필 내용이 좋았던 거야.」

 「내용이 좋아도 편집이 좋지 않으면 돼지 목에 건 진주 목걸이에 불과해.」

 「고마워. 나도 자네 덕분에 이 돈 잘 쓸게.」

  나는 계면쩍게 웃으며 돈이 든 봉투를 집어 양복 윗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양선아를 자주 만나게 될 경우 돈이 필요하게 된 나였다. 전 직장에서 쫓겨날 때 받았던 퇴직금은 한 푼도 빠뜨리지 않고 아내가 몽땅 챙겨 버렸고, 지금 나는 아내 몰래 삼 개월 치 월급을 기준으로 해서 지급된 소위 위로금이라는 돈만 챙겨 그 돈을 곶감 빼먹듯이 야금야금 빼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앞으로 그녀와의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앞에 윤덕재가 없었다면 큰 소리로 웃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좋은 친구였다. 나는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거의 다 들어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윤덕재의 출판사에서 어린아이가 성탄절날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양선아를 만나기로 한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양선아가 미소를 띠며 날 반기는 모습을 보자 기뻤다. 그러나 짧은 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내 육체는 사춘기 소년으로 되돌아 간 것처럼 뜨거운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젖가슴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어쩔 수 없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내 손과 입술이 실수를 저지를까 봐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감았다. 내 가슴은 마치 드럼을 치듯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 아닙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비로소 양선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 진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오늘 펜사인회 잘 끝났어요?」

  나는 멍청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대성황이었어요. 다 이 선생님 덕분이에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요.」

  커피숍에서 나온 우리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가 서대문을 벗어나 무악재를 넘을 때 양선아가 머리를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녀의 향긋한 채취가 내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나는 그녀를 힘껏 껴안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가 불편해 할까 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슴 깊숙이 무겁게 눌러 앉아 있던 쇠뭉치 하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면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자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선물로 받고 좋아하듯 뛸 듯이 기뻤다.

  나는 택시를 북악터널 못 미처 있는「다미(多味)」라는 음식점 앞에서 세웠다. 그때까지 양선아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여기 음식 맛이 좋아요.」

  택시에서 내리며 내가 말했다.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취재원과 만날 때 몇 번 왔던 곳이었다.

 「음식점이 아담하고 깨끗하네요.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마음에 들어요.」

 「선아씨가 마음에 들어 하니까 다행이에요.」

  나는 정통 한식을 주문하고 나서 마주앉은 양선아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끔벅거리며 손으로 물 컵을 만지락거렸다.

  식사를 끝내고 나온 나는 양선아를 그녀가 사는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기로 하고 택시를 잡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하면서 마신 반주(飯酒)에 취한 내가 용기를 내어 우겼던 것이다.

 「다음에 또 선아씨가 술에 취할 경우에 대비해서……」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말을 중단했다. 양선아에게 수치심을 주고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젯밤 일에 대해 나에게 사과를 했다.

 「어젯밤에 제가 너무 실수한 것 같아 미안해요. 이 선생님이 너무 편하게 대해 주셔서 긴장이 풀렸나 봐요.」

  수줍음을 탔는지 양선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나는 발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입맞춤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도리어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 역시 선아씨의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안았으니까요.」

  내 목소리엔 장난끼가 섞여 있었지만,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머, 제가 자는 모습이 어땠어요?」

 「천사 같았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이 선생님도 농담 좋아하세요?」

 「전 농담할 줄 몰라요. 어제 제 마음이 어떤지 아셨습니까? 선아씨 자는 모습을 보면서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구요.」

 「선녀와 나무꾼이요?」

 「예.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처럼 지상으로 목욕하러 내려온 선아씨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선아씨의 옷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선아씨가 옷을 입고 자는 바람에 옷을 감출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나는 은근 슬쩍 양선아의 손을 살며시 잡고 제풀에 긴장해서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내가 염려했던 것처럼 잡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곧 얼굴에 웃음기가 감도는 그녀를 보고 긴장이 풀린 나는 이왕이면 그녀를 가슴에 안고 싶었지만 애써 자제했다.

  양선아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나무꾼이 들키지 않고 선녀의 옷을 훔쳤을 때의 기분을 느끼고 좋아서 낄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