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장성우가 경신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해였다.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이경아라는 이름을 가진 그와 같은 학년인 동갑내기 여학생이 있었다.
여고시절에 학생잡지 표지 모델로 뽑힌 경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이경아의 주위엔 설탕에 개미 들끓듯 항상 남학생들이 북적거렸다. 남학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지만 그녀의 벽은 백두산만큼이나 높았다. 아무도 그녀의 환심을 사지 못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남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하루가 멀다 하고 오락게임처럼 미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한 미팅 한번 못 해보고 여자 친구조차 없는 꽁생원 무리 중에 한 명이었던 장성우의 가슴속에 장미꽃이 만발한 5월 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찾아온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이경아였다.
우연히 학교 앞 모차르트 커피숍에 혼자 앉아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 G단조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경아를 처음 본 순간 장성우는 빈자리를 찾아 걸어가면서 시종 눈길을 그녀에게서 떼어놓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는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용암처럼 뜨겁게 솟아오르며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버렸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장성우는 나무 잎새에 또르르 구르는 아침이슬을 바라보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보며 이경아를 위한 시를 쓰고 싶어 할 정도로 마음속엔 온통 그녀로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그에게 그녀는 아름다운 영화나 아름다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경아를 향한 장성우의 꺼지지 않는 열정은 그만이 간직하고 있는 외롭고 괴로운 사랑이었다. 용기 없는 여느 남학생들처럼 그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주위를 빙빙 맴돌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가슴만 애태웠을 뿐이었다.
장성우는 이경아를 사랑하면서 사랑이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끔찍한 형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녀가 보고 싶어 괴로웠고, 그녀가 눈앞에 있을 때에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달래느라 괴로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는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입맞춤을 할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큼은 이경아에게 ‘그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지. 장성우는 그런 각오를 골백번도 더 머릿속에 되새겼지만, 그건 마음뿐이었고 달라진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혈액형이 B형인 장성우는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너무 강해 쉽게 상처를 받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남에게 부탁 같은 것을 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사랑을 고백할 경우 이제껏 품고 있던 꿈마저 깨질까봐 두려운 그로서는, 어렸을 때도 쑥스럽고 계면쩍어서 여자아이들 곁에 가까이 가지 못했던 그로서는, 그래서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그로서는, 이경아를 유혹한다는 것은 무면허 운전자가 강원도의 험한 비탈길을 차를 몰고 가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장성우는 이경아가 너무 그리워진 밤이면…, 그 그리움에 서글퍼질 만큼 외로워진 밤이면…, 그 외로움에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동지섣달 긴긴밤처럼 밤이 길게 느껴지는 밤이면…,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을 설쳐야 했다.
그렇게 장성우는 급류에 휩쓸려 위태롭게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덧없이 세월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유난히 맑고 청명한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유행가 ‘시월의 마지막 날’을 연상케 하는 그날, 이경아가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이경아의 모습은 도서관 2층 창가에 앉아 공부하다 피곤해진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던 장성우의 시야에 들어왔고, 눈이 동그래진 그를 매혹시키기에 한치의 모자람이 없었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왔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경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성우는 넋을 잃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커다란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도서관문을 밀치고 나갔다. 그 행동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새 이경아가 사라져 버릴까봐, 그녀가 낙엽처럼 바람에 떠밀려 날아 갈까봐 조바심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간 장성우는 아직도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뒤 주머니를 뒤져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도서관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빼들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그의 행동으로 봐서는 매우 엉뚱한, 자신조차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나 막상 이경아 앞에 가서 선 장성우는 깜박 잊고 있던 두려움이 갑자기 들이닥친 탓에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이경아는 느닷없이 나타나서 불쑥 캔커피를 내밀며 인사를 하는 장성우에게 엉겁결에 응답하고는 누군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 이경아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성우와 같은 방법으로 그녀에게 찰거머리처럼 접근하는 남학생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것이다.
“경영학과일학년장성우라고합니다.”
점호 시간에 소대장에게 지적을 받고 관등 성명을 대는 장병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또박또박 밝히고 싶었던 장성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그는 자꾸만 가슴이 떨리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띄어쓰기를 무시한 글을 읽는 것처럼 단숨에 말을 내뱉은 덕분에 더듬거리지 않고 자기소개를 끝마쳤다는 거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잠시 뒤, 금방 떠나지 않을 듯이 계속 버티고 서 있는 장성우의 태도에 이경아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그냥…….”
장성우는 이경아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잔뜩 긴장한 그는 그 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두었던 말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경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장성우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주눅이 들어 고개를 발 아래로 떨궜다. 그리고는 시월의 마지막 날 부는 바람에 뒹구는 낙엽 하나를 담뱃불 끄듯이 발로 비벼대는 그의 가슴속은 무거운 바위에 눌린 듯 답답하기만 했다.
“…….”
두 사람 사이에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너무 차가워서 식은땀을 흘리는 장성우의 몸이 추위를 느끼고 몇 번 부르르 떨었다.
“이거 잘 마실 게요. 고마워요.”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경아였다. 그녀는 복잡한 거리의 흉물스러운 전신주처럼 거추장스럽게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장성우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일분일초라도 빨리 떨쳐버리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냉랭한 표정으로 캔커피는 주는 것이니까 고맙게 마시겠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무시한 채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경아에게 일언지하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장성우가 한없는 절망감에 휩싸여 가슴속이 고통으로 가득 찰 때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희롱하다 들켜 쫓기는 사람처럼 아주 다급하게 도서관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이경아가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읽고 있던 책은 도덕이란 굴레 속에 갇힌 사랑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한 사랑을 좇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조정희의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고 싶네’라는, 제목이 유난히 긴 소설이었다.
별로 소설을 접하지 않던 장성우였지만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를 이경아가 읽는 소설이라는 것에 큰 의무를 부여하고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던 책을 미련 없이 덮고 도서관에서 나와 부랴부랴 학교 앞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졸린 눈을 끔벅이며 그는 그 소설을 판권까지 단숨에 다 읽어 내려갔다.
불과 10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가 천만 년을 흘러도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적인 거리처럼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렇게 장성우가 이경아의 주위를 맴돌면서 가슴을 애태우고 있을 때 좋지 않은 소문이 캠퍼스 안에 슬그머니 퍼지고 있었다.
이경아가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실세로 정치판을 흔들고 있는 임석규 국회의원의 아들인 임형석과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 여관 앞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는 등, 그녀가 어느 날 아침에 임형석이 아닌 어떤 남자와 여관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등, 그리고 그녀가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등등……. 그런 기분 나쁜 소문들이 가을 하늘에 떼 지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 속에 섞여 캠퍼스 안에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성우는 남 얘기 좋아하는 계집년과 사내놈들이 질투심에 꾸며낸 모함일 것이라는 생각에 전혀 개의치 않고 피식,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무시해버렸다.
조정희의 소설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에서, 서른한 살인 노처녀 김지숙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의 성화에 못 견뎌 도망치듯이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여행지인 제주도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고 방황하는 시인 박재현과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사채업자인 허상구를 만나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면서 육체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김지숙은 가슴속이 뻥 뚫린 듯 공허해지면 박재현을 찾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뭔가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뜨겁게 끓어오르면 허상구를 찾아가 그와 동물적인 섹스를 나눈다.
장성우는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조정희의 소설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를 읽고 있던 이경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여주인공인 김지숙을 생각했다.
긴 방황을 끝내고 별을 헤아리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시인 박재현을 선택하는 김지숙을 생각하면서 장성우는 이경아에게 소설 속에 박재현이 되고 싶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2학년에 올라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장성우가 바지에 똥 싼 놈처럼 온 곳을 헤집고 다녔지만 이경아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갔다 말인가? 장성우는 이경아를 잊을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녀를 찾아다녔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 대해 좀더 알아두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이경아의 모습이 캠퍼스 내에서 사라지자 거기에 따른 소문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 임형석인지 아니면 다른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누구의 아이를 임신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소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무성했던 소문은 당사자가 없으므로 해서 썰렁한 유행어처럼 이내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소문과는 상관없이 이경아를 향한 그리움으로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에 빠진 장성우는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머리가 곧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방안에 처박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절망과 허탈감 속으로 빠져 들어간 그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진흙탕 속을 걸으며 방황을 해야 했다.
종이배 2. <첫사랑>
첫사랑
8년 전, 장성우가 경신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해였다.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이경아라는 이름을 가진 그와 같은 학년인 동갑내기 여학생이 있었다.
여고시절에 학생잡지 표지 모델로 뽑힌 경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이경아의 주위엔 설탕에 개미 들끓듯 항상 남학생들이 북적거렸다. 남학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지만 그녀의 벽은 백두산만큼이나 높았다. 아무도 그녀의 환심을 사지 못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남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하루가 멀다 하고 오락게임처럼 미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한 미팅 한번 못 해보고 여자 친구조차 없는 꽁생원 무리 중에 한 명이었던 장성우의 가슴속에 장미꽃이 만발한 5월 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찾아온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이경아였다.
우연히 학교 앞 모차르트 커피숍에 혼자 앉아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 G단조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경아를 처음 본 순간 장성우는 빈자리를 찾아 걸어가면서 시종 눈길을 그녀에게서 떼어놓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는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용암처럼 뜨겁게 솟아오르며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버렸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장성우는 나무 잎새에 또르르 구르는 아침이슬을 바라보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보며 이경아를 위한 시를 쓰고 싶어 할 정도로 마음속엔 온통 그녀로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그에게 그녀는 아름다운 영화나 아름다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경아를 향한 장성우의 꺼지지 않는 열정은 그만이 간직하고 있는 외롭고 괴로운 사랑이었다. 용기 없는 여느 남학생들처럼 그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주위를 빙빙 맴돌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가슴만 애태웠을 뿐이었다.
장성우는 이경아를 사랑하면서 사랑이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끔찍한 형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녀가 보고 싶어 괴로웠고, 그녀가 눈앞에 있을 때에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달래느라 괴로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는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입맞춤을 할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큼은 이경아에게 ‘그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지. 장성우는 그런 각오를 골백번도 더 머릿속에 되새겼지만, 그건 마음뿐이었고 달라진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혈액형이 B형인 장성우는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너무 강해 쉽게 상처를 받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남에게 부탁 같은 것을 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사랑을 고백할 경우 이제껏 품고 있던 꿈마저 깨질까봐 두려운 그로서는, 어렸을 때도 쑥스럽고 계면쩍어서 여자아이들 곁에 가까이 가지 못했던 그로서는, 그래서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그로서는, 이경아를 유혹한다는 것은 무면허 운전자가 강원도의 험한 비탈길을 차를 몰고 가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장성우는 이경아가 너무 그리워진 밤이면…, 그 그리움에 서글퍼질 만큼 외로워진 밤이면…, 그 외로움에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동지섣달 긴긴밤처럼 밤이 길게 느껴지는 밤이면…,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을 설쳐야 했다.
그렇게 장성우는 급류에 휩쓸려 위태롭게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덧없이 세월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유난히 맑고 청명한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유행가 ‘시월의 마지막 날’을 연상케 하는 그날, 이경아가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이경아의 모습은 도서관 2층 창가에 앉아 공부하다 피곤해진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던 장성우의 시야에 들어왔고, 눈이 동그래진 그를 매혹시키기에 한치의 모자람이 없었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왔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경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성우는 넋을 잃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커다란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도서관문을 밀치고 나갔다. 그 행동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새 이경아가 사라져 버릴까봐, 그녀가 낙엽처럼 바람에 떠밀려 날아 갈까봐 조바심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간 장성우는 아직도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뒤 주머니를 뒤져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도서관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빼들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그의 행동으로 봐서는 매우 엉뚱한, 자신조차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나 막상 이경아 앞에 가서 선 장성우는 깜박 잊고 있던 두려움이 갑자기 들이닥친 탓에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이경아는 느닷없이 나타나서 불쑥 캔커피를 내밀며 인사를 하는 장성우에게 엉겁결에 응답하고는 누군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 이경아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성우와 같은 방법으로 그녀에게 찰거머리처럼 접근하는 남학생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것이다.
“경영학과일학년장성우라고합니다.”
점호 시간에 소대장에게 지적을 받고 관등 성명을 대는 장병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또박또박 밝히고 싶었던 장성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그는 자꾸만 가슴이 떨리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띄어쓰기를 무시한 글을 읽는 것처럼 단숨에 말을 내뱉은 덕분에 더듬거리지 않고 자기소개를 끝마쳤다는 거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잠시 뒤, 금방 떠나지 않을 듯이 계속 버티고 서 있는 장성우의 태도에 이경아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그냥…….”
장성우는 이경아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잔뜩 긴장한 그는 그 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두었던 말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경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장성우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주눅이 들어 고개를 발 아래로 떨궜다. 그리고는 시월의 마지막 날 부는 바람에 뒹구는 낙엽 하나를 담뱃불 끄듯이 발로 비벼대는 그의 가슴속은 무거운 바위에 눌린 듯 답답하기만 했다.
“…….”
두 사람 사이에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너무 차가워서 식은땀을 흘리는 장성우의 몸이 추위를 느끼고 몇 번 부르르 떨었다.
“이거 잘 마실 게요. 고마워요.”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경아였다. 그녀는 복잡한 거리의 흉물스러운 전신주처럼 거추장스럽게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장성우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일분일초라도 빨리 떨쳐버리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냉랭한 표정으로 캔커피는 주는 것이니까 고맙게 마시겠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무시한 채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경아에게 일언지하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장성우가 한없는 절망감에 휩싸여 가슴속이 고통으로 가득 찰 때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희롱하다 들켜 쫓기는 사람처럼 아주 다급하게 도서관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이경아가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읽고 있던 책은 도덕이란 굴레 속에 갇힌 사랑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한 사랑을 좇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조정희의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고 싶네’라는, 제목이 유난히 긴 소설이었다.
별로 소설을 접하지 않던 장성우였지만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를 이경아가 읽는 소설이라는 것에 큰 의무를 부여하고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던 책을 미련 없이 덮고 도서관에서 나와 부랴부랴 학교 앞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졸린 눈을 끔벅이며 그는 그 소설을 판권까지 단숨에 다 읽어 내려갔다.
불과 10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가 천만 년을 흘러도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적인 거리처럼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렇게 장성우가 이경아의 주위를 맴돌면서 가슴을 애태우고 있을 때 좋지 않은 소문이 캠퍼스 안에 슬그머니 퍼지고 있었다.
이경아가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실세로 정치판을 흔들고 있는 임석규 국회의원의 아들인 임형석과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 여관 앞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는 등, 그녀가 어느 날 아침에 임형석이 아닌 어떤 남자와 여관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등, 그리고 그녀가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등등……. 그런 기분 나쁜 소문들이 가을 하늘에 떼 지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 속에 섞여 캠퍼스 안에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성우는 남 얘기 좋아하는 계집년과 사내놈들이 질투심에 꾸며낸 모함일 것이라는 생각에 전혀 개의치 않고 피식,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무시해버렸다.
조정희의 소설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에서, 서른한 살인 노처녀 김지숙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의 성화에 못 견뎌 도망치듯이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여행지인 제주도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고 방황하는 시인 박재현과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사채업자인 허상구를 만나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면서 육체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김지숙은 가슴속이 뻥 뚫린 듯 공허해지면 박재현을 찾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뭔가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뜨겁게 끓어오르면 허상구를 찾아가 그와 동물적인 섹스를 나눈다.
장성우는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조정희의 소설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를 읽고 있던 이경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여주인공인 김지숙을 생각했다.
긴 방황을 끝내고 별을 헤아리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시인 박재현을 선택하는 김지숙을 생각하면서 장성우는 이경아에게 소설 속에 박재현이 되고 싶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2학년에 올라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장성우가 바지에 똥 싼 놈처럼 온 곳을 헤집고 다녔지만 이경아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갔다 말인가? 장성우는 이경아를 잊을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녀를 찾아다녔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 대해 좀더 알아두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이경아의 모습이 캠퍼스 내에서 사라지자 거기에 따른 소문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 임형석인지 아니면 다른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누구의 아이를 임신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소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무성했던 소문은 당사자가 없으므로 해서 썰렁한 유행어처럼 이내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소문과는 상관없이 이경아를 향한 그리움으로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에 빠진 장성우는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머리가 곧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방안에 처박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절망과 허탈감 속으로 빠져 들어간 그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진흙탕 속을 걸으며 방황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