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긴장하고 있는 탓인가, 장성우는 지독한 독감에 걸리기라도 한 듯 머리가 지끈거리고 입안이 메말라왔다. 그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사무실을 나와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휴게실로 갔다. 퇴근시간 때라 그런지 항상 왁자지껄하던 휴게실은 텅 비어 있어 철지난 바닷가에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성우는 긴장을 풀기 위해 휴게실 소파에 앉아 오른손으로 턱을 고인 채 자판기에서 빼낸 종이컵을 왼손에 들고 마치 와인을 마시듯 커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천천히 마셨다.
앞으로 한 시간 후……, 장성우가 맞선을 보기로 한 약속시간은 정확하게 6시 30분이었다. 처음 보는 맞선이라 그런지 그는 밀려오는 긴장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장성우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가슴속 깊이 빨아들였던 담배연기를 한숨에 섞어 길게 내뿜었다.
오늘 장성우가 맞선 보기로 한 상대는 그와 동갑내기인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녀는 한국여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음악이 너무 좋아 음악과 함께 생활하고 싶어 강남구 신사동에서 전공과 무관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였다.
가끔 회사로 찾아오는 나이가 오십대 중반인 보험회사 생활설계사 아주머니와 보험 하나 들어준 대가로 처음엔 농담으로 시작된 일이 정말로 맞선보는 데까지 이어질 줄 몰랐던 장성우로서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 당황함은 기대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장성우는 약속장소인 삼성동의 인터콘티넨탈호텔 커피숍으로 가기 위해 퇴근시간보다 20분 가량 일찍 회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맞선 보러 간다는 소리는 절대 할 수가 없어 시골집에 일이 생겨 급히 내려갔다 와야 한다는 적당한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맞선 본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져 그 누구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아주 곤혹스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영상을 기록하며 온화했던 날씨가 낮에 한동안 빗방울이 제법 떨어지더니 얼음처럼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거리는 텅 비어 적막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장성우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장성우는 주위를 야금야금 삼켜가고 있는 어둠 속에 서서 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빈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도로변의 은행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놓고 있었고, 떨어진 노란 잎새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빈 택시가 장성우 앞에 와서 멈췄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여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성격인 그는 말주변이 없었다. 특히 여자들 앞에서는 더 심한 증세를 보였다.
여느 때와 달리 도로가 막히지 않아 그는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퇴근시간보다 20분 가량 일찍 나와 복잡한 러시 아워를 피한 덕분이었다.
장성우는 위에 센서가 달려있어 사람이 들어서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회전문을 통과해 호텔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1층 로비에는 무슨 대대적인 행사가 마악 끝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분홍색 보자기에 싼 선물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소란스럽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인터콘티넨탈호텔에 처음 온 장성우는 로비의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서울에 막 올라온 촌놈처럼 엉거주춤 서서 커피숍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커피숍 안내판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안내판이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는 듯 심호흡을 여러 번 크게 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장성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흰색 와이셔츠 위에 짙은 감청색 양복을 입고 흰색과 하늘색이 섞인 줄무늬 넥타이를 맨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외모에 유독 신경을 많이 쓴 만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자신의 성격이었다. 자신의 성격을 걱정하면서도 장성우는 다시 한 번 첫사랑의 이경아만큼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난다면 후회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는 아직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서 묻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장성우는 느긋하게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찾기 위해 안을 둘러보다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매를 서준 아주머니와 그녀가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장성우가 쑥스러운 얼굴로 다가가자 아주머니가 손으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찍 오셨습니다.”
자리에 앉으면서 장성우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눈꺼풀을 끔벅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나기가 쏟아진 뒤 갈라진 먹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살처럼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가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장성우의 가슴은 자기도 모르게 방망이질 쳐댔고,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익어가고 있는 사과처럼 발그스레하게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장미꽃 같은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키며 그녀의 향기를 음미한 장성우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넓은 커피숍 안이 그녀의 향기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긴장감에 휩싸인 장성우의 얼굴은 그녀에게 퇴짜를 맞을까봐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주머니가 두 사람의 소개를 해주지도 않고 중요한 약속이 있어 그만 가봐야 한다면서 먼저 자리를 뜨자 두 사람은 갑자기 할 말을 잃은 듯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도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장성우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숨을 한 번 고른 다음 최대한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나서 용기를 모두 끌어 모아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장성우라고 합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지만 장성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저도 반가워요. 이경아라고 합니다.”
“이경아?”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장성우는 호흡이 가빠오면서 전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경아라는 이름은 대학시절에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던, 사랑한다고 고백을 못한 채 혼자 가슴만 까맣게 태웠던, 8년 동안 머릿속에서 꿈꾸고 그리워했던, 결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용기를 내어 앞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장성우의 눈빛이 몹시 흔들렸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엔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 잘 몰랐는데,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경아가 자신의 첫사랑 여인인 이경아였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장성우는 혹시 잘못 본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며 이경아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 오르며 앗, 하고 짧은 비명이 새어나올 뻔했다. 뜻밖의 인연, 그는 오늘 그녀를 만난 건 필연이라고 단정짓고 싶었다.
이경아를 8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장성우와는 달리 그녀는 그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극도로 소심한 성격 때문에 고백도 못한 채 혼자 가슴만 까맣게 태우며 그녀의 뒤를 몰래 쫓아다닌 건 그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경신대학교에 다녔던 적이 없었냐?’고, ‘혹시 나를 기억할 수 있겠냐?’고 이경아에게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장성우는 약간 망설였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어쩌면 무성하게 떠돌아 다녔던 소문 중에 일부가 사실일 수도 있었으므로, 괜스레 불미스런 과거를 끄집어내어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건 그녀와의 영영 이별을 의미하는 거였다. 앞으로 그녀와의 만남이 지속된다면 절대 삼가야하는 일종의 금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생전처음 오늘 그녀를 만난 것이라야 했다.
그러나 장성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농담이랍시고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이 웃지 않을 정도로 달변이 아닌 그는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러 마땅한 화젯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술서 쓰듯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그다지 의미 없는 상투적인 질문에 똑같이 상투적인 대답만 주고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전자면 큰 회사라고 알고 있는데, 회사에서 하시는 일이……?”
말꼬리를 감추며 이경아가 먼저 물었다.
“영업부에서, 주로 대리점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이경아의 물음에 장성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대학에서는 뭘 전공하셨어요?”
이경아가 먼저 물었다.
“경신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장성우는 아무 생각 없이 이경아의 물음에 대답했다.
“경신대학교…….”
경신대학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이경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
이경아의 질문에 장성우는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것이지만 경신대학교라는 말이 나오자 눈썹을 파르르 떨며 당황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덩달아 당황해진 그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또한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고, 그러자 제각기 시선을 다른 곳에 둔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성우는 대학시절 때처럼 이경아에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커피숍 안의 공기가 질식하듯 답답해지면서 이마에 진땀까지 흘렸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커피숍 안이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꾹 참아야만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실낱같은 기대감이지만, 장성우는 천만다행으로 이경아와의 일이 잘 이루어져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서 함께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장성우의 실낱같은 기대감은 보기 좋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경아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찾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커피숍 종업원이 테이블 옆으로 지나칠 때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미안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경아는 겨울바람만큼이나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장성우는 벗어놓았던 코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앉은 채 새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물벼락 맞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장성우는 이경아가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지난번 대학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또 퇴짜를 맞았다는 것을 그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시 극도로 소심한 자신의 성격에 큰 실망감을 금치 못한 장성우의 표정은 안쓰럽다 못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경아는 마치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불통인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강제로 맞선보는 자리에 참석한 여자처럼 단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총총히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뒤를 쫓아가 붙잡을 용기가 없는 그로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멍한 시선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장성우는 이경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강물에라도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참담한 심정으로 커피숍을 나와 자동회전문을 이용해 호텔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낯선 숲 속에 들어온 양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장성우는 잠시 고개를 들고 허공을 올려다보고 나서 커피숍 안에서 꾹 참고 있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에서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경아……!”
장성우는 인상을 찡그리고 담배연기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다가 몸 안의 모든 것을 토해내는 것처럼 한숨에 섞어 밖으로 길게 내뿜으며 그녀의 이름을 무심코 불러봤다.
하지만 결코 운이 나쁜 날은 아니었다. 장성우는 8년 만에 이경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맞선 본 게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일생동안 사람에게 찾아오는 행운이 과연 몇 번이나 되겠는가? 또 행운이 찾아오면 그 기회를 움켜잡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장성우는 이제 이경아를 절대 놓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어쩌면 생애에서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장성우는 다짐 또 다짐을 했다. 절대로. 이건 하느님이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장성우는 한숨을 토해내듯 거푸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필터까지 타 내려간 담배를 드럼통 크기 만한 항아리로 만든 재떨이 속에 불을 끄지 않은 채 던져 넣었다.
그때 모범택시 한 대가 장성우 앞에 와서 멈췄다. 할 일 없이 서성거리던 호텔 도어맨이 잽싸게 달려와 문을 열어주자 그의 눈을 매혹시키는 섹시한 여자가 택시에서 내렸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여자는 택시에 내리면서 바람에 날리는 금발에 가까운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겼다. 샴푸광고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여자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렸으며, 양 손목에는 홍옥 팔찌를 끼고 있어 부티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여자의 뒤를 따라 택시에서 내린 중년남자를 보고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남자가 호텔 종업원에게 혀 짧은소리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는 비위 상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울컥, 하고 뱃속에서 오물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고무맙스므니다.”
키가 여자보다 작고 배가 축 늘어진 못생긴 남자는 일본인이었다. 더더구나 남자는 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목에 쇠사슬 같은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고, 귀고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잣집 딸인 줄 알았던 여자는 일본인의 현지처였던 것이다.
일제시대 때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서 만주 벌판을 누볐던 독립운동가의 증손자인 장성우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독도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가 갈릴 정도로 철두철미한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장성우였기에 팔짱을 낀 채 여자를 쏘아보며 적개심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자의 면상에다 대고 가래침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조금도 수치스러워하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잠깐 동안 노골적으로 장성우를 쏘아보았다. 여자가 ‘네까짓 게 뭔데’라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듯 속눈썹을 내리깔고 불쾌한 표정으로 일본인과 팔짱을 끼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미친 년!’하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고 나서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여자의 뒷모습을 겨눴다. 정말 총이 있다면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성우는 지하철을 타러가기 위해 맥빠진 기분으로 삼성전철역까지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웅크리고 목은 옷깃 속에 파묻고서.
장성우는 금방 그 여자에게 가졌던 기분 나쁜 감정을 떨쳐버리고 대신 삼성역 내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시 찾아온 이경아에 대한 생각을 한시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강력접착제처럼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머릿속에 착 달라붙어 버린 그녀였다. 계속해서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윙윙거렸고, 콧속으로는 그녀의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스며들었다.
이경아를 맞선 자리에서 만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장성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는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장성우는 전철을 타고 구의역에서 내려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등받이가 없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서 소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
장성우가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를 마시려는 순간, 한 여자의 얼굴이 술잔에 비쳤다. 오늘 8년 만에 만난 이경아였다. 술잔 속에서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히 드러난 함박꽃 같은 웃음이었다.
장성우는 이경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오늘 그녀와의 만남은 분명 필연이라고 생각하며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종이배 3. <재회>
재회
너무 긴장하고 있는 탓인가, 장성우는 지독한 독감에 걸리기라도 한 듯 머리가 지끈거리고 입안이 메말라왔다. 그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사무실을 나와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휴게실로 갔다. 퇴근시간 때라 그런지 항상 왁자지껄하던 휴게실은 텅 비어 있어 철지난 바닷가에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성우는 긴장을 풀기 위해 휴게실 소파에 앉아 오른손으로 턱을 고인 채 자판기에서 빼낸 종이컵을 왼손에 들고 마치 와인을 마시듯 커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천천히 마셨다.
앞으로 한 시간 후……, 장성우가 맞선을 보기로 한 약속시간은 정확하게 6시 30분이었다. 처음 보는 맞선이라 그런지 그는 밀려오는 긴장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장성우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가슴속 깊이 빨아들였던 담배연기를 한숨에 섞어 길게 내뿜었다.
오늘 장성우가 맞선 보기로 한 상대는 그와 동갑내기인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녀는 한국여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음악이 너무 좋아 음악과 함께 생활하고 싶어 강남구 신사동에서 전공과 무관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였다.
가끔 회사로 찾아오는 나이가 오십대 중반인 보험회사 생활설계사 아주머니와 보험 하나 들어준 대가로 처음엔 농담으로 시작된 일이 정말로 맞선보는 데까지 이어질 줄 몰랐던 장성우로서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 당황함은 기대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장성우는 약속장소인 삼성동의 인터콘티넨탈호텔 커피숍으로 가기 위해 퇴근시간보다 20분 가량 일찍 회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맞선 보러 간다는 소리는 절대 할 수가 없어 시골집에 일이 생겨 급히 내려갔다 와야 한다는 적당한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맞선 본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져 그 누구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아주 곤혹스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영상을 기록하며 온화했던 날씨가 낮에 한동안 빗방울이 제법 떨어지더니 얼음처럼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거리는 텅 비어 적막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장성우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장성우는 주위를 야금야금 삼켜가고 있는 어둠 속에 서서 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빈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도로변의 은행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놓고 있었고, 떨어진 노란 잎새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빈 택시가 장성우 앞에 와서 멈췄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여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성격인 그는 말주변이 없었다. 특히 여자들 앞에서는 더 심한 증세를 보였다.
여느 때와 달리 도로가 막히지 않아 그는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퇴근시간보다 20분 가량 일찍 나와 복잡한 러시 아워를 피한 덕분이었다.
장성우는 위에 센서가 달려있어 사람이 들어서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회전문을 통과해 호텔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1층 로비에는 무슨 대대적인 행사가 마악 끝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분홍색 보자기에 싼 선물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소란스럽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인터콘티넨탈호텔에 처음 온 장성우는 로비의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서울에 막 올라온 촌놈처럼 엉거주춤 서서 커피숍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커피숍 안내판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안내판이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는 듯 심호흡을 여러 번 크게 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장성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흰색 와이셔츠 위에 짙은 감청색 양복을 입고 흰색과 하늘색이 섞인 줄무늬 넥타이를 맨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외모에 유독 신경을 많이 쓴 만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자신의 성격이었다. 자신의 성격을 걱정하면서도 장성우는 다시 한 번 첫사랑의 이경아만큼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난다면 후회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는 아직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서 묻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장성우는 느긋하게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찾기 위해 안을 둘러보다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매를 서준 아주머니와 그녀가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장성우가 쑥스러운 얼굴로 다가가자 아주머니가 손으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찍 오셨습니다.”
자리에 앉으면서 장성우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눈꺼풀을 끔벅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나기가 쏟아진 뒤 갈라진 먹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살처럼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가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장성우의 가슴은 자기도 모르게 방망이질 쳐댔고,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익어가고 있는 사과처럼 발그스레하게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장미꽃 같은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키며 그녀의 향기를 음미한 장성우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넓은 커피숍 안이 그녀의 향기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긴장감에 휩싸인 장성우의 얼굴은 그녀에게 퇴짜를 맞을까봐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주머니가 두 사람의 소개를 해주지도 않고 중요한 약속이 있어 그만 가봐야 한다면서 먼저 자리를 뜨자 두 사람은 갑자기 할 말을 잃은 듯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도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장성우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숨을 한 번 고른 다음 최대한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나서 용기를 모두 끌어 모아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장성우라고 합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지만 장성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저도 반가워요. 이경아라고 합니다.”
“이경아?”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장성우는 호흡이 가빠오면서 전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경아라는 이름은 대학시절에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던, 사랑한다고 고백을 못한 채 혼자 가슴만 까맣게 태웠던, 8년 동안 머릿속에서 꿈꾸고 그리워했던, 결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용기를 내어 앞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장성우의 눈빛이 몹시 흔들렸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엔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 잘 몰랐는데,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경아가 자신의 첫사랑 여인인 이경아였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장성우는 혹시 잘못 본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며 이경아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 오르며 앗, 하고 짧은 비명이 새어나올 뻔했다. 뜻밖의 인연, 그는 오늘 그녀를 만난 건 필연이라고 단정짓고 싶었다.
이경아를 8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장성우와는 달리 그녀는 그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극도로 소심한 성격 때문에 고백도 못한 채 혼자 가슴만 까맣게 태우며 그녀의 뒤를 몰래 쫓아다닌 건 그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경신대학교에 다녔던 적이 없었냐?’고, ‘혹시 나를 기억할 수 있겠냐?’고 이경아에게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장성우는 약간 망설였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어쩌면 무성하게 떠돌아 다녔던 소문 중에 일부가 사실일 수도 있었으므로, 괜스레 불미스런 과거를 끄집어내어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건 그녀와의 영영 이별을 의미하는 거였다. 앞으로 그녀와의 만남이 지속된다면 절대 삼가야하는 일종의 금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생전처음 오늘 그녀를 만난 것이라야 했다.
그러나 장성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농담이랍시고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이 웃지 않을 정도로 달변이 아닌 그는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러 마땅한 화젯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술서 쓰듯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그다지 의미 없는 상투적인 질문에 똑같이 상투적인 대답만 주고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전자면 큰 회사라고 알고 있는데, 회사에서 하시는 일이……?”
말꼬리를 감추며 이경아가 먼저 물었다.
“영업부에서, 주로 대리점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이경아의 물음에 장성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대학에서는 뭘 전공하셨어요?”
이경아가 먼저 물었다.
“경신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장성우는 아무 생각 없이 이경아의 물음에 대답했다.
“경신대학교…….”
경신대학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이경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
이경아의 질문에 장성우는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것이지만 경신대학교라는 말이 나오자 눈썹을 파르르 떨며 당황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덩달아 당황해진 그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또한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고, 그러자 제각기 시선을 다른 곳에 둔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성우는 대학시절 때처럼 이경아에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커피숍 안의 공기가 질식하듯 답답해지면서 이마에 진땀까지 흘렸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커피숍 안이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꾹 참아야만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실낱같은 기대감이지만, 장성우는 천만다행으로 이경아와의 일이 잘 이루어져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서 함께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장성우의 실낱같은 기대감은 보기 좋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경아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찾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커피숍 종업원이 테이블 옆으로 지나칠 때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미안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경아는 겨울바람만큼이나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장성우는 벗어놓았던 코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앉은 채 새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물벼락 맞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장성우는 이경아가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지난번 대학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또 퇴짜를 맞았다는 것을 그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시 극도로 소심한 자신의 성격에 큰 실망감을 금치 못한 장성우의 표정은 안쓰럽다 못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경아는 마치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불통인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강제로 맞선보는 자리에 참석한 여자처럼 단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총총히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뒤를 쫓아가 붙잡을 용기가 없는 그로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멍한 시선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장성우는 이경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강물에라도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참담한 심정으로 커피숍을 나와 자동회전문을 이용해 호텔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낯선 숲 속에 들어온 양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장성우는 잠시 고개를 들고 허공을 올려다보고 나서 커피숍 안에서 꾹 참고 있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에서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경아……!”
장성우는 인상을 찡그리고 담배연기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다가 몸 안의 모든 것을 토해내는 것처럼 한숨에 섞어 밖으로 길게 내뿜으며 그녀의 이름을 무심코 불러봤다.
하지만 결코 운이 나쁜 날은 아니었다. 장성우는 8년 만에 이경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맞선 본 게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일생동안 사람에게 찾아오는 행운이 과연 몇 번이나 되겠는가? 또 행운이 찾아오면 그 기회를 움켜잡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장성우는 이제 이경아를 절대 놓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어쩌면 생애에서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장성우는 다짐 또 다짐을 했다. 절대로. 이건 하느님이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장성우는 한숨을 토해내듯 거푸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필터까지 타 내려간 담배를 드럼통 크기 만한 항아리로 만든 재떨이 속에 불을 끄지 않은 채 던져 넣었다.
그때 모범택시 한 대가 장성우 앞에 와서 멈췄다. 할 일 없이 서성거리던 호텔 도어맨이 잽싸게 달려와 문을 열어주자 그의 눈을 매혹시키는 섹시한 여자가 택시에서 내렸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여자는 택시에 내리면서 바람에 날리는 금발에 가까운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겼다. 샴푸광고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여자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렸으며, 양 손목에는 홍옥 팔찌를 끼고 있어 부티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여자의 뒤를 따라 택시에서 내린 중년남자를 보고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남자가 호텔 종업원에게 혀 짧은소리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는 비위 상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울컥, 하고 뱃속에서 오물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고무맙스므니다.”
키가 여자보다 작고 배가 축 늘어진 못생긴 남자는 일본인이었다. 더더구나 남자는 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목에 쇠사슬 같은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고, 귀고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잣집 딸인 줄 알았던 여자는 일본인의 현지처였던 것이다.
일제시대 때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서 만주 벌판을 누볐던 독립운동가의 증손자인 장성우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독도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가 갈릴 정도로 철두철미한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장성우였기에 팔짱을 낀 채 여자를 쏘아보며 적개심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자의 면상에다 대고 가래침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조금도 수치스러워하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잠깐 동안 노골적으로 장성우를 쏘아보았다. 여자가 ‘네까짓 게 뭔데’라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듯 속눈썹을 내리깔고 불쾌한 표정으로 일본인과 팔짱을 끼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미친 년!’하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고 나서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여자의 뒷모습을 겨눴다. 정말 총이 있다면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성우는 지하철을 타러가기 위해 맥빠진 기분으로 삼성전철역까지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웅크리고 목은 옷깃 속에 파묻고서.
장성우는 금방 그 여자에게 가졌던 기분 나쁜 감정을 떨쳐버리고 대신 삼성역 내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시 찾아온 이경아에 대한 생각을 한시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강력접착제처럼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머릿속에 착 달라붙어 버린 그녀였다. 계속해서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윙윙거렸고, 콧속으로는 그녀의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스며들었다.
이경아를 맞선 자리에서 만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장성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는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장성우는 전철을 타고 구의역에서 내려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등받이가 없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서 소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
장성우가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를 마시려는 순간, 한 여자의 얼굴이 술잔에 비쳤다. 오늘 8년 만에 만난 이경아였다. 술잔 속에서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히 드러난 함박꽃 같은 웃음이었다.
장성우는 이경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오늘 그녀와의 만남은 분명 필연이라고 생각하며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절대 그녀를 놓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