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사내에서 자신들의 관계가 동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강민지보다는 장성우가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늘도 먼저 퇴근을 해서 삼성동의 일식집 동해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그는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장성우는 빈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며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나 눈이 올 것처럼 잔뜩 흐려 있던 날씨는 뜨문뜨문 별이 보일 정도 맑게 개어 있었다.
장성우가 일식집 동해에 도착하자 20분 정도 먼저 온 강민지는 지난번처럼 입구에 있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오랜만에 재회하는 사람처럼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으면서 그를 반겼다.
두 사람은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원의 안내로 4인용 객실로 들어갔다.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 있고, 편하게 다리를 뻗을 수 있도록 테이블 밑이 파여져 있는 객실이었다.
장성우가 등받이가 붙여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광어와 우럭을 주문하면서 백세주를 시키자 강민지는 생선회 안주에는 뭐니뭐니해도 소주가 최고라면서, 마치 술꾼이라도 되는 양 소주를 마시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밤은 매우 술맛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또 정신을 잃으려고?”
장성우는 백세주를 취소하고 소주를 주문한 다음 기겁을 한 얼굴로 강민지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그때가 좋았는데.”
말을 하고 나서 강민지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빨개졌다.
“이번엔 길거리에 그냥 내버려두고 갈 거야.”
장성우는 장난끼가 섞여 있는 말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강민지와 섹스를 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1년 전, 그러니까 작년 12월 말 직원 송년회 때의 일이었다. 삼성동 섬유센터 뒷골목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가진 직원 회식이 끝나고 각자 헤어져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장성우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은 마신 술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2호선 전철을 타고 신천역 앞에 다시 모여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기 위해 호프집을 찾아 들어갔는데, 그 무리에 강민지도 끼여 있었다. 나이가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친구처럼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나 같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 강민지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회식 자리에서도 혼자서 얼추 소주 두 병을 마신 것 같은데도 호프집에서도 병맥주를 세 병이나 홀짝홀짝 마시면서 평상시 그녀답지 않게 많은 말을 떠들어댔다. 아무리 술을 잘 마시는 여자라도 그렇게 마신 그녀가 고주망태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필이면 혼자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는 장성우의 집은 망우리이고, 강민지의 집은 중곡동이었다. 두 사람만이 집이 같은 방향이라 술에 잔뜩 취한 그녀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택시를 타자마자 강민지는 장성우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채 의식불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택시가 출발하고 롯데백화점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다음 잠실대교를 건널 때 그녀는 몇 번 왝왝, 헛구역질을 하더니 순식간에 그의 바지 위에다 먹고 마신 것을 몽땅 토해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돌발 사태에 기겁을 한 그는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라고 투덜거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급한 문제는 바지에다 토한 강민지의 토사물이 아니고 택시기사였다. 화가 난 택시기사가 구의동 사거리를 지나서 바로 차를 세우더니 장성우에게 세차비와 요금을 지불하고 빨리 하차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토사물을 치운다고 해도 음식물이 썩는 듯한 지독한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계속 영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상이 험악해진 택시기사를 보며 욕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려야만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차해 줄 것을 재촉하는 택시기사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장성우의 시야에 5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여관 간판이 들어왔다. 강민지의 집이 어딘지 잘 모르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난감한 지경에 빠져버렸다.
장성우는 바지에 묻은 토사물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낸 후, 토사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가로수 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람은 항상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면서 지난 추석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속옷과 함께 사준 손수건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섭섭해하지 않게 똑같은 손수건으로 한 장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택시기사가 찌푸린 인상을 펼 수 있을 만큼의 요금과 세차비를 두둑하게 지불하고 강민지를 흔들어 깨웠다.
“민지 씨!”
하지만 강민지는 인사불성이었다. 장성우는 할 수 없이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를 등에 업고 가는 그의 모습을 길 가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쳤다. 그는 창피한 생각에 고개를 못 들고 땅만 바라보며 여관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강민지를 등에 업고 문을 밀치며 들어오는 장성우를 본 여관 종업원이 급하게 안내실에서 뛰쳐나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실을 무조건 거부했다. 내심 아까웠지만 그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다섯 장 꺼내주자 종업원은 금방 얼굴 표정이 바뀌더니 침대가 있는 방으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숙박료를 제외한 이만오천 원은 종업원의 몫이었다.
‘더럽고 치사스런 놈!’ 장성우는 속으로 종업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장성우는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강민지를 침대에 눕힌 다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빠진 그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듯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냥 가버릴까? 하지만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성격의 장성우였다. 그는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강민지를 여관에 혼자 남겨두고 도망치듯이 내뺄 수 있는 몰상식한 사람은 못되었다.
만약 그랬다가 험악하고 각박한 세상에 강민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못된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장성우는 두고두고 원망의 소리를 들을 것이고, 직장 동료들은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삿대질을 해대며 왕따를 시킬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성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괴롭히는 죄책감으로 사정없이 자신을 학대하면서 제명에 못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결혼을 약속한 연인 사이도 아닌 여자와 함께 여관방에서 밤을 지새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사면초가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강민지는 추운 겨울날인데도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짧은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단추를 잠그지 않아 풀어헤쳐진 바바리 코트 사이로 그녀의 하얀 허벅지와 언뜻 보이는 그녀의 팬티가 자꾸만 장성우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별안간 갈증을 느낀 장성우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으나 뜨겁게 솟구치는 욕정에 마구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고 강민지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려니까 마치 맛있는 음식을 놓고도 주인의 명령을 기다려야하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침을 흘리고 있는 것 같은 초라함 마저 느꼈다.
거의 혼수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든 강민지를 굶주린 늑대처럼 덮치고 싶어하는 욕정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장성우는 남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별개로 포르노잡지를 보고 수음하는 청소년들처럼 욕정은 불 같이 뜨겁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장성우는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서 몸을 일으켜 강민지의 몸을 시트로 덮어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바지에 묻은 토사물 자국을 물로 깨끗이 닦아낸 후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어 문고리에 걸었다. 그녀를 혼자 여관에 남겨두고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장성우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자 약간 느꼈던 취기가 가시면서 한결 마음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샤워를 끝낸 그는 팬티만 입고 있을 수 없어 다시 젖은 바지와 옷을 그대로 입고 욕실을 나왔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강민지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막을 수 없었다. 유혹의 그림자가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듯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대기 시작하면서 아랫도리의 물건이 고개를 뻗뻗하게 세우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보일 수도 있겠지만, 끼 많은 남자들은 장성우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혹시 고자가 아니냐고 놀려되겠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무방비 상태인 강민지를 탐한다는 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강간이었다.
하지만 장성우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강간이든 강민지가 원했든 간에 그녀와의 섹스가 아니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일순간 들이닥친 욕정에 의해 그녀를 평생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거였다. 차라리 돈을 주고 직업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만큼 그는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쉽게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빨리 잠이 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장성우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끈 후 침대 옆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이리 저리 뒤척거렸다. 현 상황에서 그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잠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강민지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방안이 너무나 어두워 잠시 동안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처음 잠깐 동안은 자신의 집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방안의 형체들을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게 되자 강민지는 경험에 의해 자기가 여관방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여관방에서 자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민지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스탠드를 켜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일 먼저 남성용 화장품과 드라이어가 놓인 거울 달린 화장대가 눈에 보였고, 작은 원탁과 의자 두 개 그리고 미니냉장고와 옷걸이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강민지는 침대 밑에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온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자세로 곤하게 자고 있는 장성우를 발견하자 온몸이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면서 심장 박동이 쿵덕쿵덕 떡방아를 찧는 듯이 큰 소리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강민지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남자들을 만나 길거나 짧은 관계를 맺으면서 더러는 섹스까지 했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하고 겨울햇빛만큼이나 짧았다. 그들에게서는 전혀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외로움을 잘 타는 강민지였기에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쓸쓸한 바람에 뒹굴던 낙엽 하나가 날아 들어와 헤집고 다녔다. 그런 그녀에게 장성우의 등장은 얼어붙은 대지 위를 감싸는 따사로운 봄빛과도 같았다.
장성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듯 낯설지 않은 얼굴이라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치 주전자 속에 있는 물이 끓기 시작하듯 강민지의 가슴속에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끔 회사 내에서 장성우와 마주 대할 때마다 강민지는 자신도 모르게 귀밑이 빨개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녀는 가슴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뜨겁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강민지는 장성우의 관심 없는 냉정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경우 일언지하 거절당할까봐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장성우와 함께 여관방에 있다니……. 강민지는 호프집에서 나와 신천전철역 앞에서 그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 올라탄 것까지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끊어진 필름처럼 기억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강민지는 어떻게 해야되나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엿보고 있었던 기회가 찾아왔는데, 하느님이 주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강민지는 더 이상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장성우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난 강민지는 우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냉장고 안에서 생수병을 꺼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 후 샤워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그를 한 번 쳐다본 다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걸어 조용히 욕실 문을 열고 차가운 타일바닥에 발을 올려놓았다.
강민지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면서 샤워기 꼭지를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온수 쪽으로 돌렸다. 따스한 물이 그녀의 머리에 떨어져서 등줄기를 타고 흩어져 내렸다. 몸 속에 남아있는 술의 찌꺼기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샤워를 하고 나서 일회용 칫솔에 치약을 잔뜩 묻혀 입안 가득 거품을 물고 양치질까지 끝낸 강민지는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장성우는 아직도 온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곤하게 자고 있었다. 강민지는 벌거벗은 몸 그대로 자고 있는 그를 깨우고 싶었지만 잘못하다가는 그에게 천한 인상을 남겨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 어떤 남자가 발기부전증 환자나 동성연애자가 아닌 이상 저돌적인 여자의 유혹에 안 넘어갈 수 있겠는가.
얼마만큼 잤을까. 서너 시간을 잔 것 같은데, 장성우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얼굴을 비치는 환한 불빛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강민지가 옆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샤워를 한 그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언제 일어났어?”
장성우가 졸음 섞인 목소리로 물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강민지가 갑자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기습적이고 저돌적인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그는 그녀의 입에서 상쾌한 치약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얼떨결에 강민지의 입술을 받아들인 장성우는 더 이상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성적 욕구를 자제할 이유가 없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고, 굴러 들어온 떡을 그냥 내팽개친다는 것은 절대 현명한 처신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양심과 도덕적 책임감이 뜨거운 석쇠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증발해버린 장성우는 몸을 일으켜 강민지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고 침대에 눕힌 후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강민지의 알몸이 드러나자 장성우는 자신도 서둘러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침대에 올라갔다. 마치 이 순간을 갈망했던 사람처럼, 마치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만나 섹스를 즐겼던 사이처럼 그는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데다 탄력이 넘쳐흐르는 강민지의 몸은 장성우의 작은 동작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그녀의 몸 속 깊이 성기를 집어넣었다. 자신의 몸 속으로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진 그의 성기가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거친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장성우의 움직임에 맞춰 짧고 굵은 신음소리가 강민지의 악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지자 그녀의 신음소리 또한 점점 거칠어지고 높아졌다.
절정에 오른 강민지가 장성우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신음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몸 속 깊숙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날 이후부터 장성우는 강민지가 이상형이 아니면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책임질 수 없는 여자이면서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끔 여관을 찾아가 관객이 없는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극하는 배우처럼 그녀와 후회 없는 섹스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강민지와 섹스를 할 때 커다란 쾌감을 느끼면서도 가슴 한쪽 구석에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외로움을 달래지 못했다.
종이배 5. <섹스파트너>
섹스파트너
두 사람은 사내에서 자신들의 관계가 동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강민지보다는 장성우가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늘도 먼저 퇴근을 해서 삼성동의 일식집 동해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그는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장성우는 빈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며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나 눈이 올 것처럼 잔뜩 흐려 있던 날씨는 뜨문뜨문 별이 보일 정도 맑게 개어 있었다.
장성우가 일식집 동해에 도착하자 20분 정도 먼저 온 강민지는 지난번처럼 입구에 있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오랜만에 재회하는 사람처럼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으면서 그를 반겼다.
두 사람은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원의 안내로 4인용 객실로 들어갔다.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 있고, 편하게 다리를 뻗을 수 있도록 테이블 밑이 파여져 있는 객실이었다.
장성우가 등받이가 붙여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광어와 우럭을 주문하면서 백세주를 시키자 강민지는 생선회 안주에는 뭐니뭐니해도 소주가 최고라면서, 마치 술꾼이라도 되는 양 소주를 마시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밤은 매우 술맛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또 정신을 잃으려고?”
장성우는 백세주를 취소하고 소주를 주문한 다음 기겁을 한 얼굴로 강민지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그때가 좋았는데.”
말을 하고 나서 강민지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빨개졌다.
“이번엔 길거리에 그냥 내버려두고 갈 거야.”
장성우는 장난끼가 섞여 있는 말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강민지와 섹스를 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1년 전, 그러니까 작년 12월 말 직원 송년회 때의 일이었다. 삼성동 섬유센터 뒷골목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가진 직원 회식이 끝나고 각자 헤어져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장성우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은 마신 술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2호선 전철을 타고 신천역 앞에 다시 모여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기 위해 호프집을 찾아 들어갔는데, 그 무리에 강민지도 끼여 있었다. 나이가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친구처럼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나 같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 강민지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회식 자리에서도 혼자서 얼추 소주 두 병을 마신 것 같은데도 호프집에서도 병맥주를 세 병이나 홀짝홀짝 마시면서 평상시 그녀답지 않게 많은 말을 떠들어댔다. 아무리 술을 잘 마시는 여자라도 그렇게 마신 그녀가 고주망태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필이면 혼자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는 장성우의 집은 망우리이고, 강민지의 집은 중곡동이었다. 두 사람만이 집이 같은 방향이라 술에 잔뜩 취한 그녀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택시를 타자마자 강민지는 장성우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채 의식불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택시가 출발하고 롯데백화점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다음 잠실대교를 건널 때 그녀는 몇 번 왝왝, 헛구역질을 하더니 순식간에 그의 바지 위에다 먹고 마신 것을 몽땅 토해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돌발 사태에 기겁을 한 그는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라고 투덜거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급한 문제는 바지에다 토한 강민지의 토사물이 아니고 택시기사였다. 화가 난 택시기사가 구의동 사거리를 지나서 바로 차를 세우더니 장성우에게 세차비와 요금을 지불하고 빨리 하차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토사물을 치운다고 해도 음식물이 썩는 듯한 지독한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계속 영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상이 험악해진 택시기사를 보며 욕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려야만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차해 줄 것을 재촉하는 택시기사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장성우의 시야에 5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여관 간판이 들어왔다. 강민지의 집이 어딘지 잘 모르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난감한 지경에 빠져버렸다.
장성우는 바지에 묻은 토사물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낸 후, 토사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가로수 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람은 항상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면서 지난 추석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속옷과 함께 사준 손수건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섭섭해하지 않게 똑같은 손수건으로 한 장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택시기사가 찌푸린 인상을 펼 수 있을 만큼의 요금과 세차비를 두둑하게 지불하고 강민지를 흔들어 깨웠다.
“민지 씨!”
하지만 강민지는 인사불성이었다. 장성우는 할 수 없이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를 등에 업고 가는 그의 모습을 길 가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쳤다. 그는 창피한 생각에 고개를 못 들고 땅만 바라보며 여관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강민지를 등에 업고 문을 밀치며 들어오는 장성우를 본 여관 종업원이 급하게 안내실에서 뛰쳐나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실을 무조건 거부했다. 내심 아까웠지만 그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다섯 장 꺼내주자 종업원은 금방 얼굴 표정이 바뀌더니 침대가 있는 방으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숙박료를 제외한 이만오천 원은 종업원의 몫이었다.
‘더럽고 치사스런 놈!’ 장성우는 속으로 종업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장성우는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강민지를 침대에 눕힌 다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빠진 그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듯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냥 가버릴까? 하지만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성격의 장성우였다. 그는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강민지를 여관에 혼자 남겨두고 도망치듯이 내뺄 수 있는 몰상식한 사람은 못되었다.
만약 그랬다가 험악하고 각박한 세상에 강민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못된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장성우는 두고두고 원망의 소리를 들을 것이고, 직장 동료들은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삿대질을 해대며 왕따를 시킬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성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괴롭히는 죄책감으로 사정없이 자신을 학대하면서 제명에 못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결혼을 약속한 연인 사이도 아닌 여자와 함께 여관방에서 밤을 지새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사면초가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강민지는 추운 겨울날인데도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짧은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단추를 잠그지 않아 풀어헤쳐진 바바리 코트 사이로 그녀의 하얀 허벅지와 언뜻 보이는 그녀의 팬티가 자꾸만 장성우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별안간 갈증을 느낀 장성우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으나 뜨겁게 솟구치는 욕정에 마구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고 강민지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려니까 마치 맛있는 음식을 놓고도 주인의 명령을 기다려야하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침을 흘리고 있는 것 같은 초라함 마저 느꼈다.
거의 혼수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든 강민지를 굶주린 늑대처럼 덮치고 싶어하는 욕정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장성우는 남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별개로 포르노잡지를 보고 수음하는 청소년들처럼 욕정은 불 같이 뜨겁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장성우는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서 몸을 일으켜 강민지의 몸을 시트로 덮어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바지에 묻은 토사물 자국을 물로 깨끗이 닦아낸 후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어 문고리에 걸었다. 그녀를 혼자 여관에 남겨두고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장성우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자 약간 느꼈던 취기가 가시면서 한결 마음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샤워를 끝낸 그는 팬티만 입고 있을 수 없어 다시 젖은 바지와 옷을 그대로 입고 욕실을 나왔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강민지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막을 수 없었다. 유혹의 그림자가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듯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대기 시작하면서 아랫도리의 물건이 고개를 뻗뻗하게 세우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보일 수도 있겠지만, 끼 많은 남자들은 장성우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혹시 고자가 아니냐고 놀려되겠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무방비 상태인 강민지를 탐한다는 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강간이었다.
하지만 장성우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강간이든 강민지가 원했든 간에 그녀와의 섹스가 아니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일순간 들이닥친 욕정에 의해 그녀를 평생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거였다. 차라리 돈을 주고 직업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만큼 그는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쉽게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빨리 잠이 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장성우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끈 후 침대 옆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이리 저리 뒤척거렸다. 현 상황에서 그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잠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강민지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방안이 너무나 어두워 잠시 동안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처음 잠깐 동안은 자신의 집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방안의 형체들을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게 되자 강민지는 경험에 의해 자기가 여관방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여관방에서 자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민지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스탠드를 켜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일 먼저 남성용 화장품과 드라이어가 놓인 거울 달린 화장대가 눈에 보였고, 작은 원탁과 의자 두 개 그리고 미니냉장고와 옷걸이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강민지는 침대 밑에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온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자세로 곤하게 자고 있는 장성우를 발견하자 온몸이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면서 심장 박동이 쿵덕쿵덕 떡방아를 찧는 듯이 큰 소리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강민지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남자들을 만나 길거나 짧은 관계를 맺으면서 더러는 섹스까지 했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하고 겨울햇빛만큼이나 짧았다. 그들에게서는 전혀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외로움을 잘 타는 강민지였기에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쓸쓸한 바람에 뒹굴던 낙엽 하나가 날아 들어와 헤집고 다녔다. 그런 그녀에게 장성우의 등장은 얼어붙은 대지 위를 감싸는 따사로운 봄빛과도 같았다.
장성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듯 낯설지 않은 얼굴이라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치 주전자 속에 있는 물이 끓기 시작하듯 강민지의 가슴속에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끔 회사 내에서 장성우와 마주 대할 때마다 강민지는 자신도 모르게 귀밑이 빨개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녀는 가슴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뜨겁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강민지는 장성우의 관심 없는 냉정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경우 일언지하 거절당할까봐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장성우와 함께 여관방에 있다니……. 강민지는 호프집에서 나와 신천전철역 앞에서 그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 올라탄 것까지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끊어진 필름처럼 기억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강민지는 어떻게 해야되나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엿보고 있었던 기회가 찾아왔는데, 하느님이 주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강민지는 더 이상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장성우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난 강민지는 우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냉장고 안에서 생수병을 꺼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 후 샤워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그를 한 번 쳐다본 다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걸어 조용히 욕실 문을 열고 차가운 타일바닥에 발을 올려놓았다.
강민지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면서 샤워기 꼭지를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온수 쪽으로 돌렸다. 따스한 물이 그녀의 머리에 떨어져서 등줄기를 타고 흩어져 내렸다. 몸 속에 남아있는 술의 찌꺼기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샤워를 하고 나서 일회용 칫솔에 치약을 잔뜩 묻혀 입안 가득 거품을 물고 양치질까지 끝낸 강민지는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장성우는 아직도 온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곤하게 자고 있었다. 강민지는 벌거벗은 몸 그대로 자고 있는 그를 깨우고 싶었지만 잘못하다가는 그에게 천한 인상을 남겨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 어떤 남자가 발기부전증 환자나 동성연애자가 아닌 이상 저돌적인 여자의 유혹에 안 넘어갈 수 있겠는가.
얼마만큼 잤을까. 서너 시간을 잔 것 같은데, 장성우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얼굴을 비치는 환한 불빛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강민지가 옆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샤워를 한 그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언제 일어났어?”
장성우가 졸음 섞인 목소리로 물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강민지가 갑자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기습적이고 저돌적인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그는 그녀의 입에서 상쾌한 치약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얼떨결에 강민지의 입술을 받아들인 장성우는 더 이상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성적 욕구를 자제할 이유가 없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고, 굴러 들어온 떡을 그냥 내팽개친다는 것은 절대 현명한 처신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양심과 도덕적 책임감이 뜨거운 석쇠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증발해버린 장성우는 몸을 일으켜 강민지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고 침대에 눕힌 후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강민지의 알몸이 드러나자 장성우는 자신도 서둘러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침대에 올라갔다. 마치 이 순간을 갈망했던 사람처럼, 마치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만나 섹스를 즐겼던 사이처럼 그는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데다 탄력이 넘쳐흐르는 강민지의 몸은 장성우의 작은 동작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그녀의 몸 속 깊이 성기를 집어넣었다. 자신의 몸 속으로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진 그의 성기가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거친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장성우의 움직임에 맞춰 짧고 굵은 신음소리가 강민지의 악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지자 그녀의 신음소리 또한 점점 거칠어지고 높아졌다.
절정에 오른 강민지가 장성우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신음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몸 속 깊숙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날 이후부터 장성우는 강민지가 이상형이 아니면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책임질 수 없는 여자이면서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끔 여관을 찾아가 관객이 없는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극하는 배우처럼 그녀와 후회 없는 섹스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강민지와 섹스를 할 때 커다란 쾌감을 느끼면서도 가슴 한쪽 구석에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외로움을 달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