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아 사탕아

이구아나2007.03.16
조회288

말해봐..

 

언제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이 고통에 끝이 있긴 한건지..

 

 

1막> 사탕등장 ==================

 

 공부.. 공부.. 공부..

 나의 일상은 오직 공부다. 대한민국 공무원의 벽이 이토록 높았더란 말이냐. 몇 년의 수험생활과 수 차례의 낙방.. 난 이미 온 몸의 기가 다 빠져버린 상태다.

 눈을 떴다. 수면상태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지만 나는 한참이나 뒤척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몸은 더욱 나른하고 머릿속은 멍할 뿐이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난.. 일어나야 한다. 책상엔 어제 사 두었던 옥수수빵과 커피우유가 놓여 있다. 시장기도 없지만 빵비닐을 북 뜨어내고 입속에 밀어넣는다. 옥수수빵의 퍽퍽함을 우유로 적셔가며 끝낸 내 아점은 5분이면 오케이..

 

투박한 가방을 어깨에 대충 두르고 고시원 문을 나섰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 차가운 물기가 얼굴을 스친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신 햇살..약간 부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햇살 속으로 어정쩡한 걸음마를 시작한다.

 저벅저벅.. 그 투명한 그물 속을 무심히 헤치며 걸음을 이어가자니 몇몇의 고시생들이 눈에 띈다. 건물 옆에서 담배를 피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잔뜩 찌든 표정들.. 지루하다. 

 30초간의 평지.. 20초간의 내리막길.. 그리고 1분간의 평지.. 그렇게 지루한 걸음이 끝나는 순간 철컥.. 독서실 문에 갇혀버린다. 여기서부턴 무글무글 좀비 걸음으로 52번 내 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탠드의 버튼을 틱 켜면 오늘도 똑같은 일상이 시작된다.

 두꺼운 행정학 책을 힘겹게 펼쳤다. 징그럽게 빽빽한 글씨들.. 하루 종일 공부를 한다지만 내가 읽고 있는 이 수천, 수만 개의 글자들이 내 머리 속에 들어가 정리가 되고 있는 건지.. 아님, 그저 내 동공에 반사가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읽는 것이다.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읽다 보면 어느새 머리에 스며들겠지. 저절로 스며들겠지. 책장이 넘어간다. 읽는 걸 적어보기도 한다. 적다 보면 이 글자들이 손가락에서 팔로 전달, 근육에 스며들어 결국 몸에 체화된다. 그럼 내 몸 전체가 알게 될 거야.

 나의 뇌는 게으르다. 몇 년간의 캄캄한 독서실 생활은 나에게 무기력증과 귀차니즘과 매너리즘  그리고 우울증이란 합병증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환자다. 공부가 끝나는 날에야 회복이 가능할까? 행정학 책의 매끄러운 페이지를 무심히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다. 그러다 연습장도 문지른다. 한 순간 모든 생각이 소멸하는 느낌.. 숨이 턱하고 막힌다. 옥수수빵이 식도에서 멈춰버린 걸까? 

잠시 창문께를 올려다본다. 햇살이 힘겹게 스며들고 있다. 그 하얀 빛 줄기 속에 은가루가 곱게 흩뿌려져 있다. 아름답다. 온몸의 뼈가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손가락의 관절과 팔을 쭉쭉 뻗어본다. 그것도 모자라 발가락과 다리까지 쭉 펼친다. 하지만 부족하다. 나는 결국 펜을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작이 시작된 모양이다. 저벅저벅 조금은 힘찬 발걸음으로 독서실을 나선다. 철컥! 두꺼운 문이 끼익하고 둔탁하게 열린다. 촤르르.. 곧이어 내 몸이 하얀 햇살 속에 온통 노출되었다. 온 몸이 짱하게 아리다. 비로소 에너지가 충전된 느낌..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적한 오후.. 저벅저벅저벅.. 나는 지그시 실눈을 하고서 어딘가로 향한다. 저벅저벅저벅.. 그리고 결국 좀비의 걸음이 멈춘 곳은.. 역시 DVD방이다. 지루한 레파토리.. 이렇듯 내 생활은 언제나 지루하다. 하지만 내 레파토리에서 그나마 나를 기쁘게 하는 장소는 아무래도 이 곳뿐인 듯 하다.

 늘 그렇듯 DVD진열장 앞을 한참이나 방황한다. 그러다 인기순위 목록을 열심히 체크하고는 다시 한번 방황을 반복한다. 이 순간.. 영화시청에 앞선 이 전초전은 늘 나를 기분좋게 긴장시킨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간택을 받는 영화는, 독서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계획해 두었던 그 영화. 맥없는 선택이지만 나는 늘 그 달콤한 방황을 대단한 권리인양 행사한다. 어느 정도의 권리행사를 마치고 돈을 지불했다. 창백한 피부에 붉은 여드름이 가득한 알바생이 기다렸다는 듯 계산을 끝낸 후 깔깔한 목소리로 말한다.

 "5번방입니다."

 5번방.. 문을 열고 독서실보다도 더 까만 공기 속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푹신한 쇼파에 녹녹히 녹아드는 느낌.. 그리고 파란화면..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되련다.

 끼익~ 순간 5번방의 문이 열린다. 사람 모양을 한 어두운 그림자가 나의 공간 속에 불쑥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내 옆에 풀썩 자리를 잡는다. 솨악~ 뒤이어 향긋한 내음이 내 몸을 덮친다.

 "뭐.. 뭐예요!"

 너무 놀라 목소리가 막혀버린다. 한 순간 화면에서 발사되는 초록빛에 이 남자의 옆 모습이 푸르게 드러난다. 섬세한 얼굴선.. 아름다운 눈매가 슬퍼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온통 영화에 빠져 버린 이 사람.. 내가 아무리 흔들고 소리쳐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할 것만 같은 생면부지의 이 사람을..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 이건 분명 환상이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미지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아름다운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이 환상과 난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야. 난 어쩜 정말로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2시간 남짓한 꿈은 천천히 올라가는 자막과 함께 정지된다. 하지만 꿈이 끝나고 불이 켜지는 순간 이 남자는 더 이상 환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형광등 불빛아래, 공허한 공간 속에서 나는 이 사람의 실체를 오감으로 느끼며 한 동안 멍해져버린다. 나른함과 청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남자.. 아니, 소년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리겠다. 2시간 동안 익숙해 져버린 탓일까? 난 이 소년에게 묘한 친근감마저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사람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본다. 이제야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생경한 눈빛..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남자도 나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른다. 그렇게 우린 말없이 방을 나섰다. 심장이 어색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 눈빛.. 내 지루함을 단숨에 앗아버린 그 눈빛이 지금 내 뒷모습을 보고 있을까.

그렇게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소년이 호주머니에서 5000원짜리 한 장을 쭉 내민다.

 "자."

 "네?"

 이 사람.. 말도 하는구나.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같이 봤잖아. 더치페이 하자구."

 친근한 말투.. 의외의 따스한 음성에 나는 아무 말 없이 5000원을 받아 든다. 같은 방에서 나와 이렇게 나란히 서 있자니, 나는 마치 불건전한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으로 얼굴이 새빨개져 버린다.

 "이제 어디가?"

 소년이 묻는다. 아주 자연스런 반말이다.

 "독..서실요.."

 나는 어색하게 대답한다. 소년은 내 대답을 듣지 못한 듯 무심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다.

 "독서실엔 왜?"

 하고 되묻는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할말을 잃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가자,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거기까지 바래다 줄게."

 소년은 내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더니, 방향을 문의하듯 내 눈을 바라본다. 아몬드 모양의 눈.. 참 예쁘게 생겼네.. 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 새삼 놀라서는 그 눈빛을 피하듯 독서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무엇일까 이사람.. 틀에 박힌 나의 공간 속에 난데없이 들어선 이 사람을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잔뜩 곤두서버린다. 공부를 시작한 후로 남자라는 인종을 멀리해 왔더랬다. 아니, 남자라는 그 자식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던가.. 그리고 그 자식 때문에 남자를 멀리했던가. 어찌되었든 싫다. 사람 마음을 제멋대로 어지럽혀 버리고 결국 달아나버리는 자식들.. 그런 고로 옆에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놀리려 드는 이 존재 또한 여간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남자.. 나의 생활을 어지럽히려 드는 인간.. 역시 나는 비약이 심한 타입이다. 하지만 생각이 여기에 도달하는 순간 나의 몸은 무한 경계태세로 돌입하고 만다.

 "저기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전에 없이 당돌한 목소리로 입술을 뗀다.

 "어? 왜 자꾸 높임말 써? 내가 아저씨로 보여?"

 소년은 자기가 한 말이 꽤나 우습다는 듯, 큭 하며 웃어버린다. 뭐야. 나는 이렇게나 곤두 서 있는데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보고 웃고 있는가.

 "저 혼자 갈 테니 가시라구요."

 내 목소리에 가시가 돋혔다. 일순간 나조차 섬뜩함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아저씨로 보이냐구!"

 이 사람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나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안 먹힐 것 같은 녀석.. 통제할 수 없는 머저리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쏘아보듯 응시한다. 하지만 이 소년은 아저씨가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내 시선에 똑바로 응수하는 것 아닌가. 장난스럽지만 왠지 모르게 슬픈 갈색 눈이 차차 내 눈 속에 스며든다. 그 갈색 빛은 나의 몸에 순식간에 퍼져 들어 내 심장의 독기를 무력화시킨다. 한 순간 그의 갈색머리가 햇빛에 반짝하고 천연의 빛을 발했다. 잠시 현기증이 인다. 나는 그 틈을 들킬 새라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빨리 한다. 소년의 발걸음이 당황한 듯 잠시 내 뒤를 좇는가 싶더니 멈추고 만다. 잘 가.. 하는 작은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다. 그 따스한 목소리는 왠지 무척이나 슬프게 느껴졌다. 아직 내 몸 속에 남아있는 그의 갈색눈빛 만큼이나... 

 

 여기는 다시 52번 책상이다. 스탠드를 켜고 두꺼운 행정학 책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내 머릿속이 허무한 공상으로 채워졌음을 깨닫는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본다. 예상했던 바다. 나는 내 감정을 민들레 씨라고 정의해 왔다. 미풍에도 저만치 날아가 버리는 변덕스런 감정.. 그런 내 감정이 막 태풍을 만나버린 것이다.

 '잘 가' 하며 잦아들던 목소리.. 그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빛이 내 머리와 가슴에 안착한 뒤 떠날 줄을 모르고 있다. 아쉽게 멈춰서던 그 발소리도 마음이 아픈 기억이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찾아 드는 생각은 역시 공부는 오래할 게 못 된다는 것. 또 이런 사소한 일에 맘이 온통 흔들려버렸으니 말이다. 잠시 책에 이마를 묻는다. 막막함과 답답함이 다시 한번 엄습한다. 혼자만의 싸움.. 고독하고 힘든 여정..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 공부를 시작한 후로 내 마음은 항상 병들어 있다. 끝도 없는 진도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나는 늘 이렇게 뒤쳐지고 만다. 내가 정해놓은 진도이건만, 이것이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박동과 쭈뼛쭈뼛 기분 나쁜 긴장감..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일시적이나마 마음을 안정시켜줄 몰핀이 필요하다. 나의 도피처.. 내 공상의 세계.. 나는 금지된 그것을 머릿속에 주입한다. 그러면 어느덧 나는 혼자만의 공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번 공상 편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갈색 눈의 소년.. 그 소년이 유머러스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소년의 손은 그의 눈빛만큼이나 부드럽고 따스하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팔짝팔짝 극장으로 향한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 거리며 팝콘도 하나 샀다. 그는 팔걸이를 뽑아 버리고 내 곁으로 바짝 붙어 앉는다. 나는 소년의 가슴에 기대어 두근두근 심장소리를 듣는다. 그는 내 어깨를 사랑스럽게 감싼다. 영화는 아름답고 소년의 가슴은 따뜻하다. 달콤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싼다.

 한 순간 눈을 떴다. 몰핀의 효력이 다한 것인가? 눈 앞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핑 눈물이 난다. 공상 후에 오는 상실감.. 몰핀의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나는 오늘도 혼자 이렇게 울어버린다. 부디 미쳐버리지는 말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쳐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휴지로 눈을 꾹 누른다. 휴지가 말랑하게 젖어간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런 날도 과거가 되어버리겠지.. 참자.. 조금만 더 참자.

 "왜 울어?"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독서실의 공기를 살짝 흔들어놓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아직 공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내 눈앞에 거짓말처럼 그 소년이 서 있다. 입에는 막대사탕하나를 우물거리며 그렇게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여긴.."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도 못한다.

 "왜 우냐구.. 무슨 일 있어?"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붉게 충혈된 내 눈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기억 속을 떠나지 않던 바로 그 갈색 눈이 다시금 내 눈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민망함도 잊은 채 잠시 그렇게 사탕의 눈을 바라보다 흠짓 고개를 숙여버린다. 책장 위엔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져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미칠 듯이 두근거린다. 내 상상을 모두 들킨 듯 너무 부끄러워 얼굴도 화끈화끈 새빨개져 버렸다.

 "말해봐."

 사탕이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한다. 독서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기웃기웃 내 자리를 노려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소년을 독서실 밖으로 몰아낸다. 살짝 밀어낸 그의 팔은 내 상상 속 체온만큼이나 따뜻하다.

 "뭐..뭐에요!"

 떨림과 놀라움으로 복잡하게 교차하는 쉰 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온다.

 "왜 울었냐니깐!"

 이 녀석 또 딴소리다. 나는 대답을 못한 채 그냥 짧은 침묵의 쉼표를 찍는다.

 "이럴 줄 알았어. 그렇게 가버리고서 공부가 될 리 없잖아."

 이 자식 뭐지? 나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가자."

 하며 무턱대고 내 손을 잡아 끈다. 나는 눈이 똥그래져서는 이 녀석에게 훅 끌려가고 만다. 정말 뭐지  이 자식? 나는 분명 그의 손을 뿌리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미친 놈이라고 밀쳐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저항의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니, 그런 여유 따윈 없다. 어디든 저 52번 자리보다는 나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 이 손은 나를 구제해 주기 위한 구원의 손이다. 난 이 녀석을 따라야 한다. 나를 끌어라. 어디든 나를 이끌어 봐라..

 나의 텔레파시가 전달되었던 것일까? 소년은 부여 받은 내 손을 꼭 쥐고는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끌고 가는 그의 독단성이 나를 미칠 만큼 벅차게 만든다. 미지의 상황극.. 나는 터질 듯 발광하는 설렘을 감추며 조용히 그의 걸음걸음을 따른다. 얼마의 걸음 후 우리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빈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가 출발한다. 곧 사라질 듯한 긴 햇살이 그를 비추고 있다. 살짝 찡그리며 햇빛을 가리는 소년..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왠지 서늘해 보이던 그의 옆모습이 정면이 되는 순간, 내 눈동자가 파르르 방황한다. 가늘게 뜬 그의 눈에 갈색 눈동자가 담겨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본다. 날렵한 턱선과 섬세한 입술.. 그의 입가에 어느새 엷은 미소가 묻어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미소를 흉내 내본다. 그의 손은 따뜻하다. 한 순간 이 느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몇 구간이 지나고 버스를 내렸다. 얼마 후 지하철도 탔다. 어디서 타고 어디서 내렸는지도 모른다. 난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가 멈추면 나도 멈추고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도 그를 따른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는 단 한번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서로가 놓칠 새라 꼭 맞잡은 느낌.

 "뭐 볼까?"

 긴 침묵의 끝을 탁 자르는 그의 짧은 물음에 나는 번쩍 정신을 정렬시킨다. 동그랗게 뜬 내 눈을 보며 소년은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뭐야, 자다 일어난거야? 큭!"

 소년의 고유한 웃음. 귀엽다. 그제서야 나는 그와 내가 멈추어 선 곳의 큰 건물을 바라본다. 순간 동그란 내 눈이 한층 더 똥그래지고 만다. 이 녀석 뭐야.. 내 생각을 읽고 있었던 걸까? 건물을 들어서자 살가운 영화입자가 우리의 몸을 잔뜩 감싼다. 그리웠던 영화관의 공기.. 꿈속의 그 공기다.

 소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영화표 두 장을 사고 팝콘도 하나 산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을 놓지 않는다.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 순간 감동하는 내가 우습지만 그는 계속 나를 감동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소년은 그제서야 손을 놓는다. 하지만 그 손은 다시 내 어깨를 감쌌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진다. 손보다 더 뜨거운 체온. 갑자기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리얼리티한 이 꿈을 즐기자. 눈을 뜨면 어두운 독서실자리에 있을지라도 지금은 소년의 심장소리만 들으리라.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영화였건만 상영시간 내내 나는 소년의 체온 속에서 3D영상보다 더욱 스팩터클한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지만 끝이 있으리란 불안감과 그에 반항하는 행복감. 이런 격정적 동요는 내 생애 처음인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관을 나설 무렵 해는 뉘엿뉘엿.. 붉은 공기들이 반딧불처럼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소년의 손이 다시 내 손을 붙들었다. 다시 독서실 앞에 다다를 때 까지..  

 

 

2막> 고시생임을 잊지 마라================

 

 

  독서실 앞.. 소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멈추었다.

 “들어 갈 거야?”

 소년이 묻는다. 그의 목소리에 밝음이 한 알 빠져있다.

 “어..”

 망설임이 두 알 보태진 목소리.

 “가고 싶어?”

 소년이 다시 묻는다.

 “가야지.”

 나는 천천히 눈동자를 떨군다.

 "참! 너 내 이름도 모르지?"

 소년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내게 묻는다. 나도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내 이름은 사탕이야. 이사탕."

 소년이 자랑스레 자문자답을 한다.

 "뭐? 사탕?"

 이름이 사탕이라니.. 나는 장난은 사절이란 눈빛으로 그를 쏘아본다. 소년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  살짝 눈웃음을 짓더니,

 "진짜야. 내가 지은 이름이긴 하지만.. 내 이름 정말 사탕이라구."

 "말도 안돼!"

 자기 이름을 자기가 짓다니.. 난 더욱 황당하단 표정을 지어보인다. 하지만 어느새 그와 내가 자연스레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여 우리는 동시에 큭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야.. 너 뭐하냐?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

 정적을 쓸어가는 메마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정아다. 날이 갈수록 조여 드는 내 숨통을 더욱더 졸라매는 공부쟁이 정아. 정아의 손에 분신처럼 붙어있는, 닳고닳은 초록색 메모장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텅 맞은 듯 번쩍 정신을 차린다. 오늘 계획했던 진도들.. 각각의 챕터들이 내 머리 속을 꽈악 메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소년의 환각은 저만치 물러난다.

 “누구..”

 소년을 흘긋 훔쳐보는 정아의 눈가에 호기심이 이글거리는가 싶더니 그가 붙들고 있는 내 손에 잠시 시선이 고정된다. 한심하단 눈빛의 정아. 하지만 그녀는 싸늘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며 휭 가버린다. 그와 나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소년은 그 정적을 깨려는 듯 내게 한걸음 다가선다. 하지만 난,

 “나 들어갈게 잘 가.”

 하며 그가 어찌할 틈도 없이 독서실로 후다닥 들어가 버린다. 꿈은.. 끝났다.

 

 후미진 구석, 52번 내 자리.. 책상엔 분홍빛 포스트잇이 붙어있고 정아의 글씨체가 도대체 어디 간 거냐고 묻고 있다. 나는 불을 틱 켜고 주저앉듯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다시 몽롱해진 내 정신은 눈인사도 못한 채 남겨진 소년에게 온전히 빠져버린다. 사탕.. 생각해보니 그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난 책상에 고꾸라지듯 머리를 박고 눈을 찔끔 감는다.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한 회의 영어모의고사를 겨우 풀어내고는 맥이 풀려버린다. 역시.. 오늘은 영 꽝이다. 하루 종일 공부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괴롭다. 사탕이란 소년도 원망스럽다. 하지만 단 몇 시간도 맘 편히 놀 수 없는 내 신세가 더욱 원망스럽다. 난 어쩔 수 없이 대충 가방을 챙겨 맨 후 메모장을 손에 들고 독서실 문을 나선다. 고시원까지 5분거리.. 걸으면서 메모장이라도 보자. 나는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누군가 내 어깨에 툭 부딪힌다. 향긋한 내음...

 "엄마야!"

 메모장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따뜻한 손이 나 대신 메모장을 줍고 있다.

 "야, 넘어지겠다."

 사탕이 웃으며 메모장을 건넨다. 난 멋적게 메모장을 받아 들었다. 역시 마법소년은 내 기대를 져버리 지 않는다. 사탕이가 아직 가지 않기를.. 50% 아니..99% 원하고 있었으니까.

 "집에 가?"

 "고시원"

 짧게 답한다.

 "가자 데려다 줄게."

 사탕이 내 손을 잡는다. 나는 그냥 걸음을 옮긴다. 레몬색 메모장을 반대쪽 손에 꼭 쥐고서..

 "근데 말이야."

 사탕이 말을 꺼낸다.

 "어."

 "너 영화내용 기억나? 나 이상하게 하나도 기억 안나."

 나는 입이 굳는다.

 "너두.. 기억 안나?"

 대답대신 얼굴만 빨개져 버린다. 밤이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얼마간 말없이 걸었다. 고시원이 보인다. 고시원까지의 길이 이토록 짧은 거리라는 것이 처음으로 원망스럽다.

 "다 왔어."

 내가 먼저 아쉬운 침묵을 깬다.

 "뭐 벌써?"

 사탕이의 목소리에도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다.

 "여기야."

 딱딱하게 생긴 고시원 건물 앞. 사탕이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한다. 뜻 모를 섭섭함.. 나도 사탕을 따라 가볍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말없이 고시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나.. 내일도 꿈꿀 수 있을까.

 

 눈을 떴다. 이미 날은 밝았다. 언제 잠이 들었지? 긴 밤을 한참이나 뒤척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곧 어제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꿈이었나?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건 현실이라 하기엔 꿈에 더 어울리는 해프닝이었다. 해프닝.. 그래. 그건 다 순간의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사탕이란 소년도.. 꿈같은 해프닝도.. 그렇게 기억 속에 꿈처럼 남는 그런 것이다.

나는 늘 그렇듯 샤워를 마치고 고시원 문을 나선다. 눈부신 햇살과 나의 찌든 표정.. 골목의 나른함도 어제와 똑같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시원을 나선다.

 "안녕?"

 어디선가 맑고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향한다. 놀란 나는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린다. 그 곳에서.. 사탕이 웃고 있다. 햇살보다 더 눈부시고 싱그러운 표정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

 꿈이.. 아니었던가? 나도 그를 따라 헤벌쭉 웃고 만다. 순간 사탕이 쏜살같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살짝 흩뜨려 놓는다. 머리에 머금은 찬 물기가 알알이 느껴진다. 꿈은 아닌가 보다.

 "오~ 촉촉한 머리. 섹시컨셉이야? 큭."

 아직 몽롱한 난 그저 헤벌쭉한 표정으로 사탕을 올려다본다. 사탕이 나를 보고 있다. 아몬드처럼 예쁜 사탕의 눈.. 눈이 부시다. 나는 실눈을 뜨고 그의 눈썹과 눈과 코를 바라본다. 사탕은 그런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이것 보세요."

 하며 내 볼을 톡톡 두드린다. 그의 손끝에 여문 따스함이 그대로 내 볼에 안착한다.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내 눈은 형편없이 부어있을 것이다. 급히 시선을 떨군다.

 "잘 잤어?"

 하지만 사탕은 애써 나와 눈을 맞추어 가며 답하기도 없는 묻기를 계속한다. 난 그의 노력을 피하듯 주춤주춤 걸음을 옮긴다.

 "배고프지?"

 사탕은 계속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나는 지금 눈이 부었는데, 이 녀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짜증이 난다.

 "왜 이러세요."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탕도 놀랐는지 잠시 멈칫한다.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리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시작한다.

 "튕기긴."

 어렴풋한 사탕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뭐라구요?"

 내가 어이없다는 투로 묻자, 사탕은

 "반가우면서.."

 하며 익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탕을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 정의하며 걷기를 시작한다.

 "나 배고파."

 사탕의 칭얼거림이 전해온다. 사탕은 여전히 나를 좇고 있다. 나 역시 배가 고프다. 아침은 애초에 늦잠을 자느라 걸렀으니 아점이라도 먹어야 할 타이밍. 그래서 늘 그렇듯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를 사 먹을 참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에게 그런 처량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사탕이 내 식사시간을 방해하고 있다.

 "어디가?"

 사탕의 지친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대꾸도 없이 독서실로 향한다. 배가 고프다. 짜증은 끝도 없이 치솟는다.

 "배 안고파?"

 다시 한번 사탕의 목소리가 나를 자극한다.

 "뭐에요! 따라오지 마요!"

 나는 야수를 경계하는 한 마리의 희생양처럼 불안정하게 소리친다. 나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예민하고 날카롭다. 일순 사탕의 표정도 굳는다. 반듯한 눈매. 감정 없는 입술선. 나는 열없이 미안해지고 만다. 그리고 차분한 감정으로 다시 그를 바라본다. 그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 이미 그는 내 손을 잡았고, 길가의 벤치로 나를 이끌었다. 그의 부드러운 이끌림에 나는 저항 없이 그를 따른다. 그리고 나는 그때서야 그의 오른손에 짐이 들려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빨강머리 앤에나 나올 법한 소풍바구니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바구니를 열더니 마술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 듯 먹음직한 파이와 샌드위치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뭐에요?"

 나는 줏대 없이 입 속 가득한 군침을 삼키며 묻는다.

 "어. 내가 만든 건데 시식 좀 해 보라구."

 사탕은 내 입 앞에 애플파이를 들이밀며 씨익 웃는다. 나는 이제껏 그런 웃음을 본 적이 없다. 순간 코끝으로 몰려드는 이 뭉클함은 무엇일까? 가슴을 겹겹이 저미는 감미로운 미소. 나는 말 없이 파이를 받아 한입 베어 문다. 바삭한 파이 속에서 달콤한 사과 향이 입안 가득 차오른다.

 "맛있어?"

 사탕이 천진하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사탕이 웃는다. 세상엔 저런 표정도 존재하는구나. 그 착한 웃음에 또 다시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파이와 함께 꿀꺽 삼킨다. 이 아인.. 도대체 뭘까.

 "정말 직접 만든 거에요?" 

 우물우물 파이를 다 먹어갈 즈음.. 얼마의 여유를 갖고 묻는다.

 "어? 또 말 높이네?"

 사탕이 장난 투로 내게 말한다. 순간 나는 파이 씹기 동작마저 멈춘다.

 "아냐, 먹어, 먹어."

 사탕은 졌다는 듯 나를 다독인다. 나는 단세포처럼 다시 파이를 씹기 시작한다.

 "당연히 직접 만들었지. 나 이래봬도 제빵사 자격증도 있다구. 말만해 크로와상, 베이글, 치즈케익 뭐든 다 만들어 줄 테니."

 사탕은 어느새 샌드위치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자신도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든다. 아침을 거른 탓인가? 내가 이렇게 빵에 열광했었던가? 그가 건네는 빵은 정말 아주 특별히 맛있다. 우리는 입가심으로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뽑아 들고 독서실 옆 벤치에 앉았다. 부드러운 미풍이 커피의 수증기를 조금씩 앗아간다.

 "잘 먹었어요."

 "응, 맛있게 먹어주니까 기분 좋다. 말만 안 높이면 더 좋겠는데.."

 나는 눈을 내리깔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나의 옆모습을 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직업이 이쪽 이신가 봐요?"

 내가 적막을 깨며 묻는다.

 "아닌데?"

 "그럼 학생?"

 내가 조금 궁금하다는 듯 다시 묻는다.

 "학교를 다니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말한다면, 난 학생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어."

 그가 이상한 답을 한다.

 "에?"

 나는 물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나는 학교란 곳을 다녀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이것이 있을 법한 말인가? 학교를 다녀 본적이 없다니.. 대한민국사람은 교육의 의무가 있다.

 "말도 안돼."

 나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왜 말이 안돼?"

 사탕이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실한 빛을 띠고 있다. 

 "정말이야. 엄마가 가기 싫음 안 가두 된 댔거든.."

 "그래서 정말 안갔다구요?"

 "첨엔 갈까 했는데.. 학교 다니는 애들이 다 학교 가는 걸 싫어하더라구.. 그래서 안간다구 했지.."

 "그럼.. 뭐했는데요?"

 "음.. 그냥 뭐 내가 하고 싶은 거 했어.. 난 하고 싶은 거 아님 안하거든."

 기가 막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은근한 호기심도 발동한다.

 "그래서.. 그 동안 뭘 했냐구요."

 "내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돌아다녔대. 집 앞에서 노는가 하면 옆 동내에 가 있고, 그러다 또 그 옆 동내까지 진출하고.. 우리 엄마 흰머리는 다 나 때문에 생긴 거래! 큭."

 사탕은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지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왠지 행복한 동화를 듣는 기분으로 작은 미소가 흘러나온다. 사탕은 그런 내 모습이 좋다는 듯 함께 웃으며 다음 말을 잇기 시작한다.

 "그러니 커서는 오죽했겠어? 나 12살 되던 해엔 우리나라 전국일주를 끝냈어. 설날 추석에 받는 세뱃돈이랑 용돈을 고스란히 여행에 받쳤지. 그걸 가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단지 내 삶이었어. 새로움에 대한 도전.. 그리고 거기서 느끼는 흥분과 감동이 없으면 살아있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의 마지막 구절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쨌든 말야. 그래서 그때부턴 해외로 눈을 돌렸지. 처음엔 엄마가 걱정된다고 굳이 일본 출장가는 삼촌한테 날 맡겼는데, 내가 그만 행방불명이 된 거야. 하지만 그 때 난 정말 멋진 일주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갔었거든. 그 날은 울엄마한테 죽는 줄 알았지만 말이야 큭."

사탕이 다시 귀여운 웃음을 섞는다. 나의 눈은 점점 꿈에 빠져들 듯 초점을 잃어간다.

 "그때부터 일어와 영어를 익혔어. 이태원에서 외국친구들을 사귀어가면서 말이야.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익히는 거야. 훨씬 다양한 삶을 볼 수가 있거든.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긴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아주 아주 많은 곳을 걸었어. 뜨겁지만 야생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던 아프리카, 이집트의 피라밋, 유럽의 아름다운 건물들.. 한국도 참 예쁜 나라지만 말이야. 한국 너머에 얼마나 멋지고 다양한 세상들이 있는지..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다." 

 부럽다.. 너무나도 자유로운 사람. 심장의 이끌림을 의심 없이 따르는 사람. 나는 머릿속이 멍해진다.

 "그리고 빵은.. 취미 삼아 배웠어. 이렇게 환심사기 좋잖아? 큭. 난 하고 싶은 게 참 많아. 일러스트, 사진 찍기, 작곡, 춤.. 이런 걸 좋아하다 보니 이 쪽 분야로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두 꽤 있어. 지금은 좀 쉬고 있지만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흐른다.

 "넌?"

 소년이 묻는다.

 "네?"

 "너두 말해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저런 인생이 가능한 걸까. 난.. 난 지금껏 뭘 하며 살아온 걸까..

 "인생이란 거 참 재밌어. 늘 내가 하고 싶은 걸 즐기다 보면 어느 새 내가 성장해 가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학교에 안 다닐 수가 있어요? 부모님이 가만둬요?"

 "엄만.. 내가 하는 일에 절대로 막아서는 법이 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놔둬. 어차피 한번뿐인 니 인생 이라고."

 "하지만 어느 부모가.."

 "우리 부모님은 그래. 오죽하면 이름도 내가 지었겠냐?"

 그렇다 그것도 황당한 이야기였더랬지.

 "근데 정말 이름이 사탕이에요?"

 "응, 엄마가 내 이름은 내가 지으랬거든.. 원래는 현우라고 대충 부르다가.. 나한테 선택권이 주어진 거야.. 그때 내가 젤 좋아하는 게 사탕이었거든.. 그래서 두 번 생각 않고 결정했지. 사탕이라구..뭐.. 나중에서야 초콜렛이 더 맛있다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어.. 어쨌든 난 사탕이 좋아."

 나는 알게 뭐냐는 표정으로 눈알을 한 바퀴 뺑그르 굴린다. 

 "신기해?"

 소년은 내 표정을 살피며 재밌다는 듯 큭 하고 웃어버린다. 나는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정말인데"

 소년이 조금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우리 엄만 그래.. 우리 형이 일찍 죽고 난 후엔 내가 하고 싶어하는 건 절대 막아서는 법이 없거든."

 형이 죽었다? 나는 말문이 막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잖아? 미루고 미루다 내일 당장 죽으면 어쩔 거야."

 도통한 척 하는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벅차 오르는 이 설렘은 뭘까. 정말 내일 죽는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못해본 일이 너무나도 많다. 하고 싶은 일도 무진장 많다. 내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인생이라.. 나는 빈 종이컵을 꾹 구겨버린다.

 

 웅성웅성..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나 보다. 식사시간에 맞추어 이제 막 고시생들이 독서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초췌한 얼굴들.. 저기 정아와 현정이의 모습도 보인다.

 "점수 매겨봤어?"

 "몰라! 엉망이야."

 "이제 또 한달 앞으로 다가왔구나."

 "우리 4시에 스터디실에서 모의고사 한번 더 보자."

 "그래, 빨리 밥 먹고 와서 틀린 문제 좀 정리해야지."

 그녀들은 잰 발걸음으로 식당을 향하다 내가 앉은 벤치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정아는 먼저 내 옆에 앉은 사탕을 보더니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본다.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린다. 한심하단 표정인지 꿈을 꾸는 표정인지..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그냥 가던 길로 빠르게 행진한다. 그녀들의 맹렬한 뒷모습.. 메모장을 펼쳐 드는 그녀들의 모습이 멀어져 간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현실로 빠르게 귀환한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있었던 거지? 이제 한달 앞이다. 조급함이 심장을 급습한다. 거친 박동수가 나의 신경을 잔뜩 자극하며 어서 일어나라고 독촉한다. 나는 그 독촉에 쫓겨 번개처럼 일어선다. 꿈꾸던 나의 표정도 일순 지극히 현실적인 페이스로 돌변한다. 사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올려다본다.

 "왜 그래?"

 "나 이제 들어가야겠어."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이제 니 꿈 얘기 할 차례잖아."

 사탕이 진지하게 내 손을 끌어당긴다.

 "이것 봐요. 나 지금 봐야 할게 너무 많거든요?"

 나는 그 손을 정중히 거절한다.

 "말 높이면 대답 안 할거야."

 사탕도 단호하게 말한다.

 "많거든?"

 나는 졌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고쳐 말하고 그제야 사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나 이제 들어가서 공부해야 한다구."

 사탕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잘가!"

 난 짧은 인사말을 하고 돌아선다.

 "무슨 공부하는데?"

 사탕이 뒤에서 묻는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린다.

 "뭐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분데?"

 사탕이 다시 한번 묻는다. 나는 사탕에게 온전히 돌아서서 다시 한번 단호히 대답한다.

 "나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야. 바쁘다구."

 아주 똑똑히 말한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왜 그렇게 바쁜 거야?"

 "한달 있으면 공무원 시험 있어."

 사탕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한 박자의 여유를 갖고 다시 묻는다.

 "공무원.. 그거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어" 한마디를 분명히 하고 돌아선다. 죽도록 하고 싶다. 죽도록.

 "왜?"

 끝없이 꼬리를 무는 물음.. 저 자식은 쓸데없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지금까지 쏟은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 부모님 뵐 면목이 없으니까.. 친구들 보기도 민망하니까.. 빨리 뭐라도 되고 싶으니까..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나는 가슴속에 꽉 찬 대답을 꾹 삼키며 사탕에게서 돌아서버린다.

 "사실 아니잖아."

 "뭐?"

 "진짜 원하는 걸 하는 사람눈빛은 그렇지 않아."

 "무슨 말이야?"

 "니 눈빛, 표정이 다 아니라구. 억지로 하는 게 역력한 걸 뭐.."

 "니가 뭘 안다고 그래! 가!"

 왠지 나는 치마 속의 헤진 속옷이라도 들킨 것처럼 창피해지고 만다. 그래서..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그냥 독서실로 도망가버리고 만다. 아픈 곳만 찔러대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내게 촌철살인이다.

 

 자리에 앉은 나는 고개를 흔든다. 사탕의 이야기가 나의 정체성을 통째로 흔들어 놓으려 한다.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흔들려선 안된다. 그래, 한 달만 참자. 딱 한 달만.. 나는 이를 악물고 모의고사집을 펼친다. 엄지로 타이머를 누르고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5지선다. 하지만 내가 채워가는 답안 중 확신이 서는 문제는 단 하나도 없다. 고작 하루를 쉬었을 뿐인데 절반은 까먹은 느낌이다. 내 머릿속 세포는 휘발성이 강하다. 한국사문제를 다 풀어내고는 신경질 적으로 숨을 몰아낸다. 멍.. 그러다 아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기적으로 돌아서는 순간순간 홀로 남겨진 사탕은 무얼 하고 있을까.. 이상하리만치 나에게 맹목적인 그 아이를 난 매번 차갑게 버렸었다.

 "사탕아.. 사탕아.."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의 이름을 주문처럼 중얼거려본다.

 "왜?"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정수리로 똑 떨어진다. 번쩍 고개를 들자 눈앞에 소년의 맑은 눈동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어이없는 황당함과 민망함.. 그래 이게 사탕이지.

 "왜, 왜 불렀냐구. 큭!"

 마법소년 사탕이. 내가 부르면 눈앞에 나타나는 마법소년. 나는 소년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자제시키며 그를 독서실 밖으로 끌어냈다.

 "또 왜 왔어?"

 내가 따지듯 묻는다.

 "어? 나 부르고 있었잖아."

 소년은 황당한 쪽은 이쪽이라는 표정으로 답한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오르고 나는 얼굴이 붉어진다.

 "왜 이러는데?"

 나는 사탕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이 묻는다.

 "응? 뭐가?"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말해줄 수 있어?"

 "이러는 게 어떤 거지?"

 "이렇게 맹목적으로 찾아오는 거."

 "귀찮아?"

 "궁금해. 아니.. 이상해."

 절대로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탕은 부드러운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그냥.. 그러고 싶어서."

 하고 말한다. 그래. 그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이란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공부를 방해하는 건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 그의 의도가 도저히 이해 되지 않는다. 혼란스럽다. 예전 그 자식의 모습도 스쳐간다. 기대만 남겨놓고 떠났던 인간.. 혼란만 안겨놓고 도망갔던 그 놈..나는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고자 서둘러 독서실로 몸을 돌린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그를 혼자 남겨두고 만다.

 

 어느새 12시다. 정신 없이 모의고사를 풀고 틀린 문제를 정리하고나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매고 독서실을 나선다. 독서실 밖의 민숭한 공기가 폐를 가득 메운다. 나는 메모장을 펴 들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열심이네?"

 낯익은 인기척이 내 옆으로 다가선다. 따스하고 단단한 그의 팔이 내 팔에 무작정 기대어온다. 갔을 거야. 이젠 아마 안 오겠지. 했던 내 생각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는 그의 목소리. 내 심장이 나의 예상보다 더욱 벅차 오른다.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안타까움과 섭섭함의 덩어리들이 시원하게 날아가버리는 기분.   

 "오늘은 공부가 잘 됐나 보네?"

 그러면서 내 메모장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사탕이. 그의 보드라운 볼이 내 뺨에 닿을 듯 가깝다. 이 아인 지금 이 시간까지 뭘 하고 있었을까? 홀로 남겨진 오후부터 지금까지 하염없이 이곳을 서성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정말 나만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걸까? 고시원까지의 단 몇 분을 위해서? 나는 그의 얼굴로 눈길을 돌린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천진해 보이는 그의 눈매가 나를 보고 생긋 웃는다. 나는 문득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낀다. 어쩜 내가 오늘밤 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탕에 대한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믿음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가슴속이 자꾸 출렁출렁한다. 이 아이의 모든 것이 나를 가슴 뛰게 만든다. 하지만..하지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 왔네.."

 어느새 고시원이다.

 "어.."

 아쉬움이 가슴속을 쓸고 지나간다. 사탕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작게 안녕이라는 말을 하며 사탕에게서 돌아선다. 하지만 그 순간 사탕이 내 손을 잡아 끌어 어두운 그늘 속에 옮겨놓는다. 사탕이의 뜻밖의 행동에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사탕이가 내 눈을 들여다 보며 작게 속삭인다.

 "너.. 키스 해봤어?"

 내 심장은 폭발직전을 알리며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뭐든 못하는 게 없는 사탕이 앞에서 더 이상 키스도 못해 본 쑥맥으로 보이고 싶진 않다. 나는 잔뜩 언 고개를 힘겹게 끄덕인다. 이 까짓 키스 아무것도 아닐 거야. 오늘따라 믿기지 않을 만치 대담한 내가 대견스러울 정도다. 오늘은 내가 내가 아니다. 왠지 한결 자유로워진 느낌.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고 싶은 기분.. 이 아이는 언제나 나를 꿈꾸게 만든다. 사탕이는 그 따뜻한 손으로 내 얼굴과 목덜미를 조심이 감싼다.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아버린다. 사탕이의 숨결이 뜨거울 정도로 가까이 느껴진다. 오늘은 나도 키스라는 걸 하는 것이다. 나의 사탕이랑 키스를 하는 것이다. 내 심장은 정말 폭발해 버릴 지도 모를 것 같다.

 "큭"

 순간 사탕이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는 꼭 감은 눈을 뜬다.

 "너.. 안 해 봤지?"

 사탕이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이 모든게 장난이었던가?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눈물이 울컥 솟는다. 나는 사탕이를 거칠게 밀쳐내고 고시원으로 뛰어든다. 또 속아버린 것이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내 감정이 빨리 낫지 않을까봐 두렵다. 조금만 건드려도 미친 듯이 반응하는 내 심장을 건드려 버린 사탕이를 증오한다.

 

 햇살이 방안을 가득 비춘 지 오래... 얼마나 더 잤을까.. 한 근이나 되는 눈꺼풀을 힘겹게 움직여본다. 껌뻑껌뻑 탱탱 부푼 눈꺼풀이 부담스럽다.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바라본다. 11시라니.. 한숨이 푹 나온다. 고작 일주일전 계획했던 진도들이 쌓여만 간다. 정아는 지금쯤 책장을 뒤적이며 열공모드일게다. 언제나 나를 숨막히게 하는 43번 자리.. study machine 정아의 뒷모습.. 나는 뿌드득 뿌드득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솨악~ 샤워기에서 내 정수리로 물방울들이 줄지어 쏟아져 내린다. 물을 흠뻑 적시며 눈을 감는다. 사탕의 뜨거운 숨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터벅터벅 독서실을 향한다.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따라 온몸이 무겁다. 어딘가 그냥 쓰러져버리고 싶다. 끽 문을 열자마자 특유의 독서실 냄새가 폐 속을 가득 메운다.

 끄적끄적.. 나에게는 작은 노트가 있다. 기분이 나쁜 날은 글을 적는다. 우울한 기분, 외로운 심정, 현재의 내 마음을.. 나만의 이야기를 적는다. 나만 아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하지만 적다 보면 계속 그 세계에 빠져들고 마니까.. 어느 순간 현실세계의 끈을 놓칠까 두려워 얼른 노트를 덮어버리기 일쑤다. 집중이 필요하다. 지금은 오로지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하지만 오늘은 노트를 덮는 순간을 놓쳤나 보다. 내 글 속엔 어느새 사탕이가 등장하고 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노트를 덮어버렸다. 다시 한국사책으로 눈을 돌린다.

 "바보.."

 흠짓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사탕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숙여버린다. 완벽히 무시하리라.

 "글 잘 적네? 재밌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나만의 글을.. 내 세계를 들켜버렸다.

 "이렇게 잘 적는데 왜 딴 공부를 하고 있어? 바보같이.."

 "나가."

 난 고개도 들지 않고 낮게 말한다.

 "싫어. 그럼 너두 나와."

 나는 사탕이를 데리고 독서실을 나선다.

 "이제 오지마. 왜 자꾸 오는 거야?"

 "너두 보고 싶었잖아. 내 글도 썼으면서."

 내 마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녀석, 짜증이 난다.

 "이제 오지마."

 나는 돌아선다.

 "돌아서지마."

 사탕이 말한다.

 "보고 싶으니까.. 돌아서지마."

 제멋대로 녀석. 하지만 그 말이 내 마음을 또 흔들고 있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가던 걸음을 멈춘다.

 "어제 웃었던 거 밤새 후회했다구."

 후회라는 것도 하는 녀석이군.

 "그래도 어떡해. 너무 귀여운 걸.."

 작은 여운이 흘렀다. 그리고 한 순간 사탕이 내 허리를 살짝 감싸고 사탕이의 체온이 내 등을 가득 덮는다. 사탕의 입술이 내 귀에 닿았다. 사탕 같은 목소리가 내 귀에 달콤하게 스며든다.

 "니가 좋아. 너무 너무.."

 몸이 휘청하는 느낌.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사탕이 뜬금없이 묻는다. 이자식, 내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가? 하긴 가르쳐 준 적도 없다.

 "난주.. 강난주."

 대충 대답한다.

 "어제 말야.. 니가 혼자 내 이름 막 불렀잖아.. 왜 그랬는지 알겠어"

 말없이 서서 사탕의 말을 듣는다. 사탕 같은 목소리. 사탕의 목소리는 참으로 달콤하다.

 "어제 밤새 부르고 싶었는데 부를 이름이 없잖아.. 그리우면 이름을 부르게 되나봐? 그치?"

말을 않는다.

 "이제는 부를 수 있겠다. 난주야 난주야.. 큭!"

 이상하다. 가슴속이 이상하다. 사탕에게서 처음으로 불리워지는 내 이름이 낯설다. 근데.. 이 낯설음이 좋다. 너무 너무..

 

 곧 독서실을 나선다. 햇살의 옅은 베일 속에서 사탕이 기웃기웃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발견한 사탕은 곧 사탕처럼 달콤한 표정으로 포닥포닥 달려와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솜사탕마냥 따스한 사탕의 손.. 아직 한끼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그리고 어제 밤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점심을 사겠다는 사탕이.. 나는 처음 사탕을 만났던 날처럼 말없이 사탕의 이끌림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유 없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이 아이.. 사탕이는 특별하다

 나는 사탕이 이끈 작은 이탈리아 레스토랑.. 노란 테이블보가 둘러진 앙증맞은 테이블에서 하얀 크림소스스파게티를 냠냠 먹는다. 바삭한 바게뜨를 크림소스에 듬뿍묻혀 사탕에게 건낸다. 사탕은 씩 웃으며 와삭 하고 바게뜨를 베어문다. 햐얀 크림소스가 사탕의 입가에 묻었다. 내가 보랏빛 냅킨으로 사탕의 입가를 훔치자 사탕은 방긋하고 기분좋은 웃음을 선보인다. 사탕도 내게 바게뜨를 건낸다. 나도 입가에 크림이 묻었다. 사탕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점심을 마친 우리는 곧 거리로 나선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따사로운 햇살아래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야성적인 젊음을 뿜어대고 있다. 활기찬 공기, 모험을 찾아 떠나는 바람의 발걸음.. 모두가 즐거워 보인다. 화려한 젊음이 가득한 이 거리에서 나만 홀로 고시생 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는 건 아닌가. 참담한 심정으로 사탕을 올려다 본다. 간단한 티를 레이어드하고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멋스럽기 그지없는 사탕이. 하지만 오직 공부모드에 맞추어진 추리닝을 걸친 나는 이 길을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여기는 아무래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닌 듯 하다. 나와 무관한 세계에서 이방인처럼 떠돌아 다니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독서실에선 한없이 두드러져 보이던 사탕인 꼭 이 세계사람이었나 보다. 이 거리와 완벽히 어우러진 사탕의 존재는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나 이제 그만 갈게."

 나의 우울한 표정에 사탕이 즉시 발걸음을 옮긴다. 언젠가 시험만 끝나라. 화려하게 변신해서 이거리 구석구석까지 누비고 다니리라.

 "있잖아.. 담에 있잖아.."

 사탕이 입을 연다.

 "어.."

 천하의 사탕이 뭘 저렇게 망설인담..

 "니 글 보여 줄 수 있어?"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만 살짝 끄덕한다. 언젠간.. 보여줄 수도 있지 뭐.

 "약속했다."

 사탕인 다시 한번 확답을 받으며 싱긋 웃는다.

 "난주 난주 강난주.. 난주 난주 강난주.."

 사탕인 내 이름으로 박자까지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따스한 햇볕 아래 우리는 손을 잡고 내 이름의 멜로디를 따라 따뜻한 길을 걸었다.

 

 

3막> 사탕에게 빠지다==========================

 

 

 "니 글 보여 줄 수 있어?"

 사탕이 내게 한 유일한 부탁.. 나는 어느 새 공부보다 내 글에 열중하고 있다. 내 글은 사탕에게 보여줄 글이 되어 나의 글 쓰는 욕구를 더욱 더 자극하고 있다. 사탕이가 내 글을 읽으며 큭큭 웃는 모습.. 심각해 지는 모습.. 감동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러다 달력을 바라본다. 어느 새 시험이 코앞이다. 안 된다. 안 될 말이다. 여기서 주저 앉을 수 없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이면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주저 앉으려고 하니..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난 고개를 쭉 빼고 43번 자리를 바라본다. 정아의 열정적인 뒷모습.. 다시 한번 숨막히는 공기가 나를 짓누른다. 난 고개를 흔들며 내 이야기 노트를 저만치 밀쳐내 버린다. 그리고 몇 시간을 집중했다. 그 동안 미루었던 진도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다. 하지만 미루어진 진도들에 치이고 치일수록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밀어 오른다.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가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다 엎드려 버린다. 눈물이 난다. 그냥 주저앉고만 싶은 느낌.. 괴롭다. 힘들다. 숨이 막혀..

쿡쿡.. 누군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나는 고개를 든다. 역시나 밝고 밝은 사탕의 얼굴이 보인다.

 "많이 힘들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 싫은 걸 하니까 그렇게 힘든 거야.. 그래도 꼭 해야겠니?"

 순간 파고드는 이 흥분은 무엇인가?

 "안하면.. 나.. 이제 뭐하니?"

 나는 사탕을 바라본다. 이 아이가 나를 이 수렁에서 구해줄 수 있을까?

"니가 원하는 거. 그게 뭔지 말해봐."

 나는.. 나는 그냥 자유롭고 싶다. 사탕이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다. 모든 속박에서부터 벗어나고 싶다.

"니 인생은 니 거야. 다른 사람 말 말고 니 심장소리를 들어봐. 심장이 뛰는 곳을 따라 가라구. 그래야 니가 행복해."

 심장을 따라라.. 나의 심장소리.. 떨리다 못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요동치기 시작하는 내 심장소리. 나의 심장을 따라라..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듯 분출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지고 있던 모든 의무의 짐을 놓아버린다.

 "그래. 나.. 이제 그만할래. 도와줘 사탕아."

 사탕은 나의 간절한 눈빛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나의 손을 끈다. 우리는 그렇게 무작정 밤의 거리로 나섰다. 오랜만에 느끼는 화려한 밤의 열기. 번쩍이는 네온싸인속에서 나는 사탕과 함께 한다. 얼마를 걸었다. 사탕이 나를 끄는 게 아니라 내가 사탕을 이끈다. 내 자유를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이런 게 행복일까? 어느 순간 사탕의 손을 끌고 술집을 들어선다. 공부를 시작한 후 뜸했던 이 곳을.. 나는 한때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소주 3병이요."

 사탕의 눈이 동그래진다.

 "술 잘 마셔?"

 "너두 마셔야지!"

 나는 간만에 호탕한 목소리로 사탕을 대한다.

 "자, 원샷!"

 사탕에게 마구 술을 권한다. 사탕은 못이기는 척.. 하지만 기꺼이 나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껏해야 너댓잔을 들이킨 사탕의 눈이 감기기 시작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한다. 

 "뭐라구?"

 "보고싶었다구. 되게 힘들게 찾았어. 꼭꼭 숨어갖구. 어떤앤지 궁금했는데 말야."

 "무슨 말이야?"

 "글말이야 글. 같이 가, 같이.. 같이 가줄게."

 사탕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다 결국 테이블위로 머리를 콕 박고 만다. 약간의 취기가 오른 난 깔깔 웃으며 사탕을 흔들어 깨운다. 사탕은 비몽사몽간에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하지만 곧 화장실로 달려간 사탕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남자화장실로 찾아가 사탕을 찾는다. 사탕은 변기를 붙잡고 쓰러져 있다.

 "괜찮니?"

 사탕의 등을 쓸어준다. 사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어렴풋한 미소를 짓는다.

 "바보야, 못 마신다고 할 것이지."

 난 가까스로 사탕을 화장실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술집을 나선다. 사탕의 두발이 갈지자 스탭을 화려하게 밟고 있다.

 "사탕아 집에 가야지. 사탕아!"

 사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정신 좀 차려봐! 응?"

 사탕의 볼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깨우려 한다. 하지만 사탕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어떡해.."

 무슨 용기가 났던 걸까? 술의 힘이었을까? 나는 순간 눈에 띈 모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런 일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방하나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열쇠를 받은 난 사탕을 지탱하며 방으로 향한다. 사탕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처음으로 보는 사탕의 표정.. 왠지 고독해 보이는 그 모습에 가슴이 짠해진다.

 "못 하는 게 없는 인간인줄 알았더니, 술은 나보다 못하는 구나?"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지 사탕이 철없는 웃음을 보인다. 사탕을 간신히 방으로 밀어 넣고 침대에 눕혔다. 사탕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침대위로 고꾸라져 잠이 들고 만다. 그런 사탕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한다. 그냥 가야 하나? 아님, 여기서 사탕과 함께해야 하나?

 자유.. 모든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지만 사탕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있다.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든 사탕이.. 나는 가슴이 뭉클한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바랬단 말인가. 이 아이도 단지 자신의 심장을 쫓고 있는 아이다.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단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한 달을 남겨두고 도망가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현실은 적나라하게 내 치부로 침범해온다. 나는 지금 그 무엇도 아니다. 현실에서 돌아서면 나는 다시 현실을 돌아본다. 현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 삶의 일부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불안정한 나의 심장은 고장 난 네비게이션처럼 나를 혼란 속에서 방치하고 있다. 질펀한 늪 속에서 발을 빼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나는 그냥 두려운 마음에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울음을 그쳐야 한다. 냉정해져야 한다. 일단은 현실을 받아들이자. 현실에 최선을 다한 후 미련 없이 버리자. 나는 사탕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방을 나선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민들레씨 같은 내 감정이 다시 조용히 뿌리를 내리려 한다.

 

 아직 해가 낮은 새벽. 오늘은 새벽녘에 고시원문을 나선다. 어느 때 보다 상쾌한 공기가 내 얼굴을 감싼다. 오늘부터 바빠질 것이다. 해야 할 것이 쌓이고 쌓여버린 상태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난 할 수 있을 것이다.

 52번 내 자리. 분명 어제도 앉았던 자리이건만 무척이나 오랜만에 돌아온 느낌이다. 나는 영단어집을 꺼내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한다. 나도 언젠가 의지에 불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영단어 50개 외우기로 하루를 시작하여 틀린 문제를 정리하며 하루를 끝내던 시절.. 나는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어를 외우고 모의고사집을 펼친다. 타이머를 누르고 전과목에의 도전을 시작한다. 이제부턴 나의 취약점을 철저히 분석하여 전략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제한시간이 지나고 점수를 체크한다. 맞는 것은 동그라미 틀린 것은 사선.. 사선.. 사선.. 사선.. 끔찍한 자괴감이 엄습한다. 할 수 있을까? 불안감이 증폭한다. 지금쯤 정아는 여유 있게 시험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난.. 딸꾹. 너무 긴장한 탓일까? 난데없는 딸꾹질이 시작된다.

 "큭"

 나는 고개를 든다.

 "술이 아직 안 깬 거야?"

 사탕이다. 사탕의 천진난만한 얼굴.. 하지만 이젠 안된다. 나는 사탕을 데리고 독서실 밖으로 향한다

 "사탕아."

 "응?"

 "나 이제 공부할거야."

 "왜? 안 한다며."

 "해야 해. 역시나 해야겠어."

 "근데 역시나 힘든 거니?"

 딸꾹.. 힘들다. 너무나도 힘들다. 나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만다.

 "니가 그걸 꼭 해야 한다면 말이야. 정말 하고 싶은 걸로 만들면 되는 거야."

 사탕인 순식간에 내 책과 가방을 챙기더니, 내 손을 끌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한다.

 

 사탕이 나의 손을 붙잡고 도착한 곳은 아담한 커피숍. 우리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사탕은 나를 쇼파로 밀어 넣고는 내 옆에 꼭 붙어 앉는다.

 "자, 이제 니가 공부한 거 나한테 가르쳐 줘..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쉽고 재밌게 말이야.."

 뭐 하는 거지? 이 녀석?

 "빨리.. 나 열심히 배울 테니까 대신 내가 잘하면 뽀뽀해 주기다."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탕일 바라본다. 왜 이러는 거지? 난 이럴 시간이 없다. 시간이 금쪽 같은 나에게 너 이래서는 안 된다.

 "난 학교 안 다녀서 한국사 이런 거 잘 몰라. 가르쳐 줘 궁금해.."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사탕의 눈을 바라본다. 누구보다 맑고 진실해 보이는 사탕의 예쁜 눈. 사탕은 지금 나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수호천사 사탕이.. 이 아이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고조선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과 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들.. 그리고 수많은 정책들에 대해서.. 첨엔 그냥 에라 모르겠단 식으로 담담히 시작했는데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하고 즐겁게 경청하고 있는 사탕이를 보자 흥이라는 것이 솟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습관적으로 외우고 있던 것들이 실타래 처럼 자연스레 풀리면서 더욱 차근차근 정리가 되어가는 느낌이 신기했다. 한국사가 이렇게 재밌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다름이었다. 그리고 내 설명은 국사와 국어, 행정학을 넘나들기에 이르렀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짧은 길에서도 설명은 계속 되었고, 밤에는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사탕에게 더욱 재밌게 설명해 줄 방법을 연구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온통 국사와 국어이야기가 가득했고 고시원을 나서면 사탕이가 팔을 벌리고 인사를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사탕에게 달려가 갈고 닦은 장대한 이야기를 선사한다.

 "역시 니가 글을 잘 쓰니까 이렇게 재밌게 설명할 수 있는가 보다."

 사탕인 웃으며 내 설명을 한 음절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들어준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책을 뒤적거리고 다시 정리까지 해 가며 그야말로 열정적인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내 피가 처음으로 무한히 뜨거워짐을 느낀다. 매너리즘도 귀차니즘도 우울증도.. 저만치 물러가 버린 느낌이다. 그 딴것들은 사탕이가 모두 던져버렸다. 난 더 이상 독서실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내 공부장소는 오직 한 자리.. 사탕의 옆이면 족했다. 가끔 들르는 독서실의 내 책상 위엔 한심하다고.. 정신 좀 차리라는 정아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달이란 시간이 흘러 시험은 내일로 다가왔다. 한 달이 그렇게 짧다는 것에 경악할 정도로 놀랐더랬다. 오늘도 나는 새벽같이 고시원을 나선다. 사탕이 손을 흔들며 나를 맞이한다. 부지런한 사탕이.. 어쩜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나를 찾아올 수 있을까?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도 못할 만큼 사탕은 늘 내 곁에 있어준다.

 "자, 시험 열심히 봐!"

 사탕이 커다란 막대사탕을 내민다. 사탕이 사탕을? 풋.. 나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린다. 사탕도 핑크색 막대사탕처럼 달콤한 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오늘은 마지막 총정리를 하는 날이다. 마지막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가벼이 걸으며 정리를 끝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사탕이 준 막대사탕을 할짝대며 사탕과 함께 총정리를 시작해 그 커다란 막대사탕이 반으로 줄어들 때즘 대충 정리가 끝나버렸다. 머릿속이 상쾌하다. 시험 전날 이렇게 기분 좋았던 날이 또 있었던가?

 "자신 있어?"

 나는 대답대신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사탕도 기분 좋은 웃음으로 답한다.

 "고마워 사탕아."

 내가 사탕에게 말한다. 가슴속 깊숙이 끌어낸 이 말은 음절음절이 100% 진심엑기스다.

 "바보..”

 사탕이 실룩거리며 내 어깨를 툭 친다. 무슨 뜻일까? 꿈을 좇지 않는 바보란 뜻일까? 아님, 고마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드디어 시험날이다. 고사장까지 향하는 동안 사탕이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 손이 없어도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을까? 불안할 정도로 나를 안심시키는 이 따뜻한 손.. 나는 어쩜 사탕의 손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주 화이팅!"

 사탕은 돌아서는 나를 보며 주먹을 꽉 쥐어 보인다. 난 그런 사탕을 뒤로하며 모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시험시작...

 사각사각. 나는 시험시간 동안 단 1초도 정신을 놓지 않는다. 사탕의 따뜻한 손도.. 해맑은 미소도 잠시 기억 속에서 지운 채 오롯이 한 문제 한 문제에 집중해 나갔다. 그 어느 때 보다 충만한 느낌으로 자신만만하게 답안지를 채워 넣으며 가슴이 뿌듯함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절대 후회라는 건 없을 시험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고사장을 나서자 저기서 눈부시게 하얀 티셔츠를 걸친 사탕이 햇볕을 함박 담아 나에게 달려온다. 언제나 내 앞에 저렇게 나타나는 사탕이.. 사탕인 혼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수험생들이 신기한 듯 나를 흘긋거린다. 사탕인 손을 내밀고 난 그 손을 잡는다.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그 불안감이 사라져버렸다.

 "수고했어!"

 "응."

 나도 해맑은 미소로 답한다.

 "오늘은 수고했으니까 니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거 해볼까?"

 "정말?"

 "말만해!"

 사탕이 장담하듯 답한다.

 "글쎄."

 나는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곧, 한 편의 시나리오가 내 머릿속을 꽈악 메운다. 언제나 내 공상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복수 Story..

 "그럼.. 나랑 어디 좀 같이 갈래?"

 "어디?"

 "그 자식한테.."

 사탕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대학시절..

 나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수업대신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미팅을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식이 다가왔다. 동아리 선배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가왔던 그는 술이라도 마시는 날이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었다. 나는 그의 앞에만 서면 늘 얼굴이 붉은 아이가 되었더랬다.

 어느 날 우리 동아리는 엠티를 가게 되었다. 나도 가고 그도 갔다. 나는 그날따라 술에 잔뜩 취해 주절주절 헛소리를 하다 말다 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도 역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술김에서인지 그 자식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기억이 끊겼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땐 불이 꺼져있고 모두가 뒤엉켜 잠이 들어 있었다. 방안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가득하고, 밖에서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나는 눈을 부비적 거리며 수면 속에 갇혀있던 술기운을 훅하고 내쉬었다.

 "깼니?"

 순간, 낮은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있었다. 내 옆에서 꼭 붙어 잠든 줄 알았던 그 사람은 바로 그 선배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시 잠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주야."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타고 온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내 귀에 살짝 닿는 순간 내 몸은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한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한동안 그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내 입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지만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그 손만은 뿌리치지 않았다.

 "좋아해, 난주야."

 그의 속삭임이 귀에 전달되었다. 나는 온몸이 바닥에 녹아 내릴 듯한 혼미함을 견디어 내야 했다. 그렇게 새벽이 밝았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리들에 섞여 짐을 챙겼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그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멀리서 그의 실루엣만 보여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동아리룸에 가기 전엔 혹 그를 만날까 하는 생각에 옷이며 화장에 더욱 신경이 쓰였고 그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진 않았다. 대신 가끔 문자를 보내왔다. '예쁜 난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라' 같은 달콤한 안부용 문자였다. 그러면 나는 한참을 고민하며 그의 문자에 정성스레 답을 하곤 했다.

 사랑의 열병이 그런 걸까? 나는 온종일 그의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날 그의 숨결과 체온을 나는 너무나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보지 못한 날이나 그의 연락이 없는 날은 견딜 수가 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연락이 차츰 뜸 해져갔다. 그 날 내가 그의 키스를 거부했기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소극적이어서 그가 너무 힘든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문자를 보냈고 매일같이 전화를 했다.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늘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했다.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건 다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말았다. 나는 철저히 그에게 조롱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에게서 한참이나 연락이 없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단발머리에 피부가 흰 여자의 손을 잡고 나타나 여자친구라며 자랑스레 소개를 했다. 이번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대단한 여자라며 으스대고 있었다.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살짝 살짝 쳐다보곤 했다. 나는 표정을 잃은 채 그들을 보고 서 있었다.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술을 진탕 마셔댔다. 친구들이 왜 이러냐며 말려도 마구마구 마셨다. 흐려져가는 시선 속에 그와 그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 속엔 내가 없었다. 온종일 여자친구라는 여자에게 흠뻑 빠져있던 그는 그녀를 데려다 줘야 한다며 일어서고 있었다. 분명 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가 한 순간 지독하게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분개했다. 들고 있던 소주잔을 거칠게 던져버렸다. 잔이 깨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그도 드디어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눈빛에 따스함이란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나는 꺼져가는 기억을 추스르며 그 자리를 뛰쳐나와 버렸다. 그리고 길가에 앉아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 후로 그도 연락이 없었고 나도 연락을 끊었다. 혹시나 연락을 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도 여지없이 무너뜨린 그 자식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단발머리 여자의 세계로 들어가 그 여자 보다 훨씬 더 멋진 여자가 될 거라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독기는 오래가지 않아 사그라들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는 늪 속에 빠져있었다. 돌아 갈수도 없고 전진하기는 너무나도 막막한 지옥.. 나는 그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빌어먹을 자식!"

 내 부끄러운 과거를 듣고 있던 사탕은 주먹을 꽉 쥐며 빌어먹을을 연발한다. 그런 사탕을 보자 복수심이고 뭐고 행복해지는 건 뭘까. 어쨌든 난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럼 오늘은 우리 멋지게 변신 해야겠는데? 미리 준비하길 잘했네!"

 사탕이 묘한 말을 하며 내 손을 잡아 끈다. 나는 역시나 무덤이 사탕을 따른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볍다. 날아갈 듯 가볍다.

 사탕은 어디선가 한 꾸러미의 종이가방을 들고 와선 내 고시원 방에 잠시 가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탕을 쳐다본다. 이 녀석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일까? 하지만 사탕인 내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무작정 내 손을 끌고 고시원으로 향한다. 나는 맥없이 사탕을 따른다. 다행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고시원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나는 바닥에 널린 빨랫감들을 얼른 치우고 초라한 방에 사탕을 초대했다.

 "자 눈 감아봐."

 자리를 잡고 앉은 사탕이 나를 자기 앞에다 앉혀놓더니 갑작스런 요구를 한다. 왜 이러지? 다시 한번 처음 만났던 날의 키스사건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뜬다.

 "얼른!"

 사탕이 조른다. 귀여운 표정.. 이런 사탕을 당해 낼 재간도.. 이유도 없다. 나는 그냥 모른 척 눈을 감아버린다. 곧 사탕의 부드러운 손이 내 얼굴을 감싼다. 난 나도 모르게 더욱 더 꼭 눈을 감아 버린다. 곧 내 얼굴에 향기로운 무언가를 쓱쓱 바르고 있는 사탕의 손이 느껴져 나는 눈을 번쩍 뜬다.

 "응, 나 예전에 메이컵하는 거 배운 적 있거든.. 너한테 꼭 해 주고 싶었어! 더 이쁘게 해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사탕이 상큼 웃으며 내 얼굴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뜬금없기도 한 이 상황에 다시 눈을 감는다.

 "자, 베이스는 다 했으니 이제 눈 화장 해야지?"

 한창 신이 난 목소리로 내 얼굴을 만지작 거리던 사탕의 손놀림이 어느 순간 멈추고 정적이 흐른다. 그 정적을 이기지 못한 내가 눈을 뜬다. 내 눈앞에 사탕의 눈이 보인다. 사탕은 내 머리를 감싸더니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내 얼굴을 꼭 묻어버린다.

 "너무 예뻐.. 너무 예뻐서.. 더 이상은 손 못 대겠다."

 나는 눈을 꼭 감는다. 가슴이 쩌릿쩌릿해 진다. 공부에 찌든 나에게 이런 달콤한 말을 해 준건 사탕이 뿐이니까.. 사탕인 살짝 감겨진 내 눈에 입을 맞추었고.. 곧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맛 본 사탕의 입술은 그 어떤 사탕보다도 달콤하고.. 달콤했다.

 

 사탕의 메이컵 솜씨를 확인하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겨우 붓이 몇 번 스쳤을 뿐인데.. 깊고 신비롭게 빛나는 눈과 체리빛 입술의 나는 마치 동화 속 작은 공주님 같다. 마법의 손을 가진 사탕이.. 사탕인 정말 못하는 게 없다. 나는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듯 들떠서는 평소 입지 않던 분홍빛 가디건을 입고 무지개빛 플레어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사탕이 손을 꼭 잡고 잡고 고시원을 나선다. 오늘의 공기는 어제의 공기와는 다른 온도로 채워져 있다. 상쾌함과 시원함이 가득한 거리.. 나는 사탕과 그 거리로 달려나간다. 폴짝 폴짝 어디든 뛰어 다니고 싶은 기분으로..

 "야! 우리 복수하러 가야지!"

 사탕이 나의 계획을 환기시킨다.

 "아, 맞다!"

 나는 복수를 계획한 사람의 표정에 걸맞지 않게 방긋 웃고 만다. 어쨌든 복수는 하고 보자. 우리는 학교로 발길을 돌린다. 그는 거기 있다. 그도 고시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그 선배 몇 번이나 낙방하고도 계속 고시에 목매고 있다 했다. 여자친구와는 애당초 헤어지고 공부는 제대로 하는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도서관앞에 도착했다. 도서관 로비는 고시생들의 사교장인 듯, 초췌한 모습의 그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역시 찌든 표정이 역력한 인간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한 얼굴들이다. 그들은 고시생의 때를 벗어버린 나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낙이라곤 없는 그들의 삶에서 이런 소소한 볼거리는, 휴식시간에 덤으로 주어지는 일종의 디저트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여유있게 둘러보다 하나의 시선과 맞닥뜨린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내 감정을 멋대로 조정하던 그 눈빛..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나를 또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젠 조금의 설레임도 없다. 복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전의만이 불타오를 뿐이다. 그의 옆엔 자그만 여자애가 하나 서 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낀 창백한 여자..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다. 나의 사기가 한껏 충전되기 시작한다. 몇걸음 뒤의 사탕을 바라다본다. 사탕도 그를 알아 챈 듯 회심의 미소를 보낸다.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진저리 나는 저런 눈빛을 하고 내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옆에 있던 여자는 안중에도 없이 나만을 보고 있다. 여자는 쭈뼛쭈뼛 주변을 방황하기 시작한다.

 "여어.. 난주야 이게 얼마만이니?"

 그가 반갑다는 듯 내 팔뚝을 가볍게 친다. 소름이 다 돋는다.

 "아, 네 오빠. 잘 지냈어요?"

 가식적인 인삿말을 건낸다.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나저나 너.. 많이 이뻐졌다?"

 그가 나를 녹일듯이 쳐다보고 있다.

 "고마워요."

 나도 그를 뜨겁게 쳐다보며 답한다. 나의 반응에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대담해져만 간다.

 "난주.. 요즘 뭐하니?"

 "뭐..그냥.."

 말을 흐린다.

 "남자친구는 있고?"

 "그런 거 없어요."

 내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답하자 그의 얼굴에 금새 화색이 돈다.

 "오! 남자들이 눈이 삐었는가 보네? 난주같은 애를 가만둔단 말이야?"

 그의 가식에 몸서리를 치며 애써 웃음을 보인다.

 "언제 우리 밥이나 한번 먹자! 술도 좋고."

 저 뻔뻔한 표정. 가관이다.

 "좋죠!"

 내가 생긋 웃어 보인다. 그는 자신감이 증폭된 표정으로,

 "일단 음료수나 한잔 할까?"

 하며 내 등에 가볍게 손을 대고 나를 자판기쪽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뭐에요!"

 따뜻하지만 단호한 사탕의 목소리.. 사탕이 등장했다. 싱그러움이 넘쳐흐르는 핸섬보이 사탕이. 사탕이 앞에서 그는 너무나 보잘것 없이 초라해지고만다. 사탕은 그의 손을 날카롭게 견제하며 나를 끌어당긴다.

 "난주야 뭐야, 이 사람?"

 잔뜩 흥분한 목소리.. 사탕이 연기는 완벽할 정도로 진실되다.

 "어.. 그 남자."

 내가 한마디로 그를 정의한다.

 "그 남자라면 예전에 엠티가서 너한테 추근댄 놈?"

 사탕이 제법 큰 소리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몇몇의 사람들이 이쪽을 흘금거린다.

 "어.."

 나는 긍정한다.

 "뭐야, 이 자식! 아직도 남의 여자한테 추근대?"

 사탕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어간다.

 "야, 그냥가자!"

 나는 당황한 척 사탕을 진정시키며 끌어당긴다.

 "공부나 해! 이 자식아!"

 사탕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는 황망히 얼어버렸다. 사탕은 나 대신 통쾌한 복수를 해 주었다. 우리는 깔깔대며 학교를 나선다. 복수는 끝났다.

 

 

영화도 보고 좌판에서 예쁜 분홍 머리띠도 하나 사서 꼈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도 먹고 아이스크림을 빨며 거리를 걷는다. 그러다 눈에 띈 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사탕이가 내 무릎에 살며시 머리를 대고 눕는다. 사탕이 얼굴은 햇볕을 담아 한없이 눈부시다. 사랑스런 사탕이..

“너.. 이렇게 내 옆에만 있어두 돼?”

차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입 머금고는 사탕에게 묻는다. 늘 품어왔던 질문이다. 하지만 선뜻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꿈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난 하나에 미치면 그것밖에 안 봐. 딴 건 아무것도 못 해.”

사탕이 하얀 아이스크림을 빨며 말한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고 싱긋 웃는다. 그런 사탕의 웃음이 전염된 나도 싱긋 웃어 보인다. 그래.. 사탕이는 지금 나에게 미쳐있다. 하지만.. 언젠가 사탕이가 다른 무언가에 미치는 날.. 사탕인 날 떠날 것이다. 문득 슬퍼진다. 하지만 다 잊겠다는 듯 함박 미소를 지으며 사탕의 따뜻한 손을 더욱 꼭 잡아본다. 사탕이도 덩달아 내 손을 꼭 잡는다.

“축하해! 이제 진짜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응?”

“원 없이 열심히 했잖아. 아니야? 미련 있어?”

“근데.. 한달 뒤에 또 시험이 있어.”

나는 멋적게 대답한다.

“그래서?”

말랑하던 사탕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합격인지도 모르는데 포기할 순 없잖아. 이번이 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사탕은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연다.

“내가 널 어떻게 찾아왔는지 아니?”

  사탕이를 바라본다. 늘 궁금했던 그 답을 하려는 것 인가?

   “니 글을 봤어.”

“내.. 글?”

“언젠가 니가 시험에 떨어지고 적은 글이었을 거야. 세상이 꺼진 듯이 슬퍼하던 글 말이야.”

기억을 더듬어 본다. 두 달쯤 전이었다. 같이 스터디하던 친구들 중 나만 합격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날. 그 날처럼 절망적이었던 날은 없었다. 내가 미치도록 한심했던 날이었다.

“근데 말이야.”

사탕이 다시 말을 잇는다.

“니 글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어. 이제 늪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떠나고 싶다던 그 구절.. 기억나니?"

예상치도 못했던 사탕의 고백에 한 동안 망연스레 있던 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끝나버렸다.

나는 내 목표 앞에서 발목이 잘린 채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질퍽이는 늪속을 헤매던 그 발은 내 것이 아니었다.

의족을 잃은 나는 드디어 내 진짜 발을 찾았다.

내 발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이끌 것이다.

내 발이 자유로운 그 곳,

길은 수백수천가지로 뻗어있었는데..

나는 이제야 다른 길을 선택할 자유를 얻었다.

 

"내 영혼의 느낌이었어. 심장이 막 뛰었어. 소름이 다 돋더라.”

 사탕이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찾아 온 거야. 너를 만나고 싶었어. 자유를 갈망하는 너한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어.”

"근데 실망했었겠구나? 내가 여전히 구질구질하게 굴고 있어서."

내 언어는 나도 모르게 삐딱선을 탄다. 사탕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본다. 부끄럽다. 용기없는 내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그러게 왜 남의 글을 함부로 읽고, 멋대로 판단하는 거야!  나는 사탕의 손을 뿌리치고 벤치에서 일어선다.

"난주야."

사탕이 몸을 일으키며 나를 부른다.

"몰라! 난 너처럼 되는대로 살 용기 없어. 지금 난 좀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거라구. 니 말만 듣다가 나중에 더 한심한 인간이 되면 책임질거야? 집도 절도 없는 그런 인간이 되면 책임질거냐구!"

"그런 생각은 안해."

"거봐. 미래를 대비하고 살아야지, 현재 감정만 따라가면 어떡하니? 우리가 언제까지나 청춘일 줄 알어?"

사탕은 잔뜩 흥분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내 감정에 충실하면 미래에 대한 의심따위 없어. 두려움따위도  없어.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걸 하는 사람이 하기싫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보다 불행할 리 없으니까."

조금도 흔들림 없는 사탕의 목소리.. 사탕은 다시 벤치에 누워 눈을 감는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사탕을 내려다 본다. 역시나 사탕의 말이 옳은 것인가? 나의 의지는 다시 길을 잃고 만다.

나는 사탕의 옆에 주저 앉는다. 그리고 벤치 아래로 늘어진 사탕의 손을 꼭 붙들었다. 사탕이 눈을 떠 나를 바라본다. 지친 듯 흔들리는 사탕의 눈동자가 불안하다. 하지만 오늘은 다 잊자. 오늘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파란 하늘이 붉게 물들고 다시 짙은 보랏빛으로 어두워질 때까지 우린 그렇게 함께 있었다.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걸으며..

 

4막> 이러다 미친다==============================

 

다음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어제의 자유.. 어제의 그 심장이 아직까지 똑 같은 느낌으로 뛰고 있다. 그래! 오늘 하루쯤은 더 놀아도 된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나는 사탕이를 떠올리며 행복감에 흠뻑 빠지고 만다. 시계를 본다. 1시라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매일 아침 8시 반에도 문을 열면 서 있던 사탕이.. 지금쯤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급한 마음에 씻는 둥 마는 둥 세수만 어푸어푸하고 고시원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탕이 없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 있던 사탕이 없다.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나서 그럴 것이다. 이제 내가 일어났다고 알려야 한다. 하지만 난 사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폰이 있는지도 모르고 집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늘 내 앞에 있던 아이니까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느끼지 못했더랬다. 하긴 나도 폰이 없다. 독하게 마음먹고 폰 까지 없애버린 지 1년이다. 사탕이가 나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다. 사탕아.. 사탕아.. 다시 한번 사탕이를 불러본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을 불러본다. 하지만.. 사탕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시원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망연히 사탕을 기다린다. 느린 공기의 움직임.. 내 머리 위 태양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사탕도 이렇게 나를 기다렸을까? 기약없는 기다림이란 사람을 무척이나 불안하게 또는 나약하게 만든다. 문득 사탕이 미치도록 보고싶다. 하지만 태양을 피하는 내 그림자가, 끝도 없이 길어져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사탕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달 뒤 또 시험이 있다.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사탕 없이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공기처럼 늘 내 옆에 있던 사탕이.. 사탕인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항상 사탕을 기다리게만 하던 나였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보자 그랬다. 벌을 주는 거라면 달게 받겠다 그랬다. 하지만 역시 안될 것 같다. 조바심이 난다. 사탕의 생각외에는 다른 무엇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니, 불가능하다. 날 이렇게 숨도 못 쉬는 바보로 만들어 놓고, 넌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어쩜..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 할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지만 않았다면.. 제발 죽지만은 않았기를.. 울며 기도하고 하늘에 애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망도 해 본다. 나도 모르게 날 괴롭히는 냉정한 생각. 그 자식.. 또 다른 흥미거리를 찾았을지도 모르지. 예전 놀잇감이 귀찮게 할까 봐 애초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그저 혼자서 자유롭고 싶어서.. 그래! 다 계획적이었어.구속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나타나기만 해 봐라 뺨이라도 때려주리라. 이기적인 속물이라고 나쁜 말을 잔뜩 해 주리라. 평생 아파할 말만 해주리라.

 어느덧사탕이가 없는 일주일이 지났다. 사탕이 없어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가 보다. 나또한 생존해있다. 하지만 1주일간 가슴이 저릴만치 아팠고 아픈만큼사탕이를 원망했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자 그 그리움이 너무나 사무쳐 원망도 저주의 마음도 사라진 채 사탕이가 나타나면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리라.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라고 다짐해본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저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런 고문이란 걸 세상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나만큼 괴로운 사람이 또 있을까? 나를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사탕인 이 세상 어디에서 숨쉬고 있단 말인가.. 나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놨다가 결국 지옥같은 혼란속에 방치한 사람.. 내 머릿속은 사탕으로만 꽉 채워져있는데, 그래서 다른생각은 단 일초도 할 수가 없는데 그 아인 과연 내 존재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라도 곱씹고 있을까? 또 다른 대상에 매달려 나 따윈 생각해줄 여유조차 없는 건 아닐까?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펜을 잡으면 사탕이의 이름으로 도배되는 책을 잡고 무슨 공부를 할 수가 있겠는가. 사탕에게 완벽히 미쳐버린 내가.. 그 아이 없인 이제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는 공간속에 내 심신은 그저 무중력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손끝이 머문곳을 바라본다. 내 이야기 노트가 거기 있었다. 사탕이에게 보여줄 이야기를 적던 내 이야기 노트.. 순간 나의 모든 촉각이 블랙홀속으로 소멸하듯 노트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사탕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어떤 것.. 이건 사탕이를 찾을 수 있는 지도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노트를 펼쳤다. 사탕이가 있는 세계를 나 혼자 만들어 보리라. 언젠가 사탕에게 보여줄 이야기.. 사탕이와 나의 이야기..

 나의 기억은 사탕이와 처음만난 그 날의 추억속으로 온전히 옮겨간다. 사탕이를 밀어내기만 했던 그때-그래.. 그럴때도 있었지- 사탕과의 만남, 추억.. 그리고 마지막 시간까지.. 그와 함께 했던 한달을 내 기억속에서 조심스레 오려내 노트 위로 쏟아놓는다. 한장 한장 넘어가는 노트 속에 그의 체온과 목소리 그리고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입체그림처럼 내 앞에 여과없이 터져나온다. 나는 잡히지도 않는 그 환영을 그러쥐고 비참하리만치 그의 굴레속으로 빠져들려 노력한다. 이 순간마저 그에게 외면당한다면 나는 정말 버틸 수 없으리라.

 꼬박 한 달간 난 현실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직 내 상상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내 상상 속에서 만 잠을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었다. 끝없는 사각거림.. 사각사각 규칙적인 연필의 선율을 들어야만 안정이 되었다. 가끔은 밥을 먹는 것도 잊곤 했다. 나는 점점 말라간다. 하지만 미치는 쪽보단 이쪽이 나으리라.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잠시도 어쩔 줄 몰랐으리라.. 어쩔 줄 몰라 미쳐버렸으리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나중에.. 사탕이가 날 찾아왔을 때 미쳐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으니..

고시원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순간 사탕을 찾았다. 사탕의 환영이 나의 걸음걸음을 붙잡아 독서실로 가는 시간은 늘 더디었다. 독서실에선 글만 썼다. 혹시나 사탕이 내 글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루에 수천번도 더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사탕과 함께 앉던 벤치와 사탕과 함께 마시던 커피자판기를 서성이며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그리고 밤 늦게 고시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몇번씩이나 가슴이 철렁철렁 했던가.
 분명 나쁜 놈이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나쁜 놈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화를 낼 수는 없다. 너무 아프고 죽을만큼 힘들지만 그를 미워할 수는 없다. 증오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 욕이라도 토해내며 이 감정을 삭히련만 미워할 수도 없는 내 감정은 속으로 곪아서 썩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만은 그는 아직 내 곁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난 글 쓰기를 멈출 수가 없다. 내 영혼을 쉬게 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는 내가 만들어 내는 이 작은 세상뿐이니까.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아직은 미완성의 엔딩이지만 사탕이가 보고 싶어 했던 내 글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그러자 왠지 사탕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벅차올랐다. 하지만.. 사탕이가 내 글을 읽어야 한다. 나는 내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사탕이가 또 다시 내 글을 읽을 수 있을까? 많은 곳에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부디 사탕이가 있기를 희망하며..
그리고 그 즈음, 나는 내 합격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쿠 우리 딸 장하다 장해!"

 

"축하해! 한턱 쏴라!"

 

"역시 해낼 줄 알았다니까! 대단하다 강난주!"

 

"이야! 이제 팔자폈네! 축하한다."

...........

 

이 순간을 위해 그토록 힘들었던 것이었을까? 주위로부터 쏟아져 오는 축하말들.. 가족들의 충족된 기쁨에 잠시 착란상태를 벗어난 듯 하다. 그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리라.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벗어나 일상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난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정상적인 생각을 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난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하염없이 메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게 된다. 몇몇 독자들의 힘내라는 메일을 받아본다. 사탕일 꼭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사탕이의 메일은 확인할 수 없다. 어쩜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를 것을 기다리는 이 막막함.. 난 여전히 사탕이만 생각하면 온 몸의 힘이 쭉 빠지고 끝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사탕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초록색 화면에 반사되던 그 나른한 얼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영화를 바라보던 그 옆모습.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얼굴은 Fiction일 수 가 없다. 환상속에서만 존재 할 수 있는 캐릭터. 그래, 그건.. 어쩜 그냥 캐릭터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원하고 꿈꿔온 캐릭터.. 현실을 도피하기위해 필요했던 단지 하나의 환상일 뿐.. 그 때 내가 잠시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쩜 사탕은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존하지 않는 환영.. 잠시 내 공상이 만들어낸 내 영혼의 오아시스 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사탕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5막> 기다려===============================

 

 나는 한껏 해방된 기분으로 친구들과 쇼핑을 즐기고 영화를 보고 예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다. 오랫동안 미루어 오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읽고 TV도 본다. 고시생시절엔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아주 일상적인 생활들.. 이젠 나도 할 수 있다는 이 평범한 기쁨에 푹 빠져든다. 혹시나 하며 메일 앞에 매달려 있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은 환상에 매달려 미치지는 않으리라. 그래..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평생을 이렇게 안주하리라.

 

 

그렇게 소원하던 공무원으로의 생활이 어느덧 1년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눈이 아프도록 바라봐야 하는 컴퓨터 모니터.. 상사의 눈치.. 끊임없는 회식.. 이것이 내가 그토록 바래왔던 인생이었던가?

 

"강난주씨 아까 내가 부탁했던 거 아직 안끝났어?"

"아, 예.. 곧.."

 

계속되는 살얼음판과...

 

"난주씨, 여기 커피 좀.."

 

잔 심부름..

 

"오늘 술자리 있는 거 알지?"

 

내 자유의지는 언제쯤 고개를 들수 있을까?

 

업무를 끝내고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붉음과 푸름이 묘하게 조화된 공기의 빛깔이 서글픔을 자아낸다. 터벅터벅.. 고요한 공기의 균열이 내 발소리에 침잠해 들어간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내 이마를 스쳤다.

무거움.. 고요함..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이런 느낌의 조직으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아득한 감정의 낭떠러지.. 언젠가는 그 낭떠러지로 추락해 버릴것이다. 

'드르를르'

폰의 진동음이 고요한 공기사이로 퍼져나간다.

"어.."

엄마다.

"7시라고 했다! 가고 있는 거지?"

다짜고짜 들려오는 엄마의 강압적인 목소리. 반항할 힘도 없다. 일주일전부터 반복해 오던 소리였다. 이제 직장을 얻었으니 시집을 가야한다며 선을 보라고 성화인 것이다. 나는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결혼을 한다고 생각해보니 내 인생이 그렇게 한심하고 아까울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진정 인생을 즐긴 적이 있었던가? 분명 이루어 온것이 있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건만 나는 왜 이리도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왜 자꾸만 무언가 잃어가는 조급함만이 엄습해 오는 것인가. 삶이란 건 또 왜 이렇게나 한스러운가. 

내 꿈이 닿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 왔던 그 사람.. 가슴한쪽이 아려온다. 불치에 가까운 반응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늘 이렇게 아려오는 가슴을 참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나에겐 이중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 피해의식을 없애야 할 것이다.

"알겠어 알겠다고."

모든 것이 틀에 박혀있다. 답답하다.

 

대기업의 과장이라는 사람.. 시커먼 얼굴을 하고 앉아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따라 쭉 지켜보고 있다.

"아.. 안녕하십니까? 강난주씨.."

"아, 네.."

어색한 눈인사 후 자리에 앉았다.

"저.. 뭐 식사하셔야죠."

"아, 네.."

대충 메뉴를 고르고 나니 또다시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가 된다. 거기서부터는 각자의 취미, 가족관계, 주말의 일과.. blah blah blah..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기계적 레파토리..

"얼마전 끝낸 프로젝트가 꽤 인정을 받아서 다음 승진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하하."

"아, 네.."

"하지만 이제 저두 빨리 안정을 찾고 싶네요. 가정을 이뤄서 애도 놓고.."

"아, 네.."

"아무래도 안정된 가정이 바탕이 되야 남자가 출세를 해도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을까요?"

나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

"저.. 정말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네, 여기서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요. 뭐.."

겨우 남자와 헤어지고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일, 결혼, 가족, 그렇게 흘러가는 삶.. 그럼 내 꿈은? 이미 어두워진 검은 공기속에 훅 하고 한숨을 불어넣는다. 가슴이 왜이리도 답답한 것일까.

'드를르르'

모르는 번호가 떠오른다.

"여보세요?"

"어.. 난주야!"

왠지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 누구더라.

"누구.."

"얘는! 나야! 정아.."

정아라면..  study machine?

"아! 왠일이니, 니가?"

정아는 내가 합격을 한 후로도 한동안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며 단 한번도 연락이 없었더랬다.

"나.. 이번에 합격했잖아! 7급으로다가!"

"어머, 그래? 축하한다, 얘!"

이럴 땐 아니꼽더라도 같이 호들갑을 떨어주는 것이 이 바닥의 예의다.

"아.. 드디어 이 언니도 사회로 진출한다는거 아니냐! 일해보니 어떻든?"

일년이 지나서야 안부를 묻는군.

"그냥 뭐.. 그럭저럭."

"하긴.. 공무원 좋다는게 편하고 안정적인 거 말고 또 있니? 하하하."

신나셨다. 하긴 지금이 고시생에겐 가장 신날 타이밍이다.

"암튼 축하해. 너무 잘됐다 얘."

"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두 이제 남친 사귈거야."

하긴.. 솔로인생 27년의 고귀한 정아아니더냐?

"그래.. 이제 연애두 하구 그래야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때 그 남자랑 잘 지내?"

"응?"

"왜.. 그때 꽃미남 있잖아. 어우 내가 그때 말은 안했지만 새끼좀 쳐라 얘. 너 혼자 런 꽃미남 독차지 할거야?"

"어?"

"치사하다 얘! 걔만큼은 안돼도 하나 부탁해 알겠지?"

지금.. 사탕을 말하는 것인가?

"그럼 다음에 보자. 사회선배로써 한턱 쏘는거 있지말구."

사탕은.. 환상이 아니었던가?    

집에 돌아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버팀목이 사정없이 박살난 것이다. 벽이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아간다. 사탕의 얼굴이 벽지화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천진한 표정과 맑은 눈빛, 장난끼 가득한 웃음소리.

사탕아.. 사탕아.. 넌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니?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정신을 차린 나의 두 눈동자에 까만 모티터가 들어온다. 나는 마치 마법에 이끌리듯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메일함을 열었다. 그리고 난.. 특별한 메일 하나를 발견했다.

 


메일은 어느 출판사로부터 온 것이다. 내 글에 대한 출판을 상의하고 싶다는 메일.. 나는 메일에 적힌 전화번호를 조심스레 누른다. 내가 쓴 책을 갖는다는 건 어렸을 적부터 꿈꿔왔던 내 막연한 꿈이었다. 평안하기만 하던 내 심장이 생소한 느낌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 느낌은 기분 좋은 흥분을 수반하고 있다.

"메일보고 전화 드렸는데요.. 강난주라고 합니다."

약속은 잡혔다. 나는 출판사로 향한다.

"아 난주씨. 반갑습니다."

깔끔하게 생긴 출판사 직원이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네, 반갑습니다."

난 엉거주춤 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

"난주씨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죠.. 이런 일은 저도 처음입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우선 이 삽화 좀 보시겠어요?"

나는 남자가 건 내는 여러 장의 종이를 받아 든다. 아름다운 컬러의 그림들.. 하지만 난 그 삽화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아찔해지는 정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쇼파위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아 .. 난주씨 괜찮아요?"

남자가 나를 붙든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답을 할 수 없다.

"누군가 이 삽화를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인터넷에 어떤 글을 이 삽화와 함께 출판해 달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그림이 하도 괜찮아서 난주씨 글을 찾아봤더니.. 이거 대박감이더라구요. 허허.."

이건 분명.. 나와 사탕이다. 레몬 빛 메모장을 왼손에 든 나와  내 오른손을 꼭 잡은 사탕이. 독서실에서 울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선 사탕이. 분홍색 가디건에 무지개빛 스커트를 입은 나와 내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사탕이.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사탕이..사탕이 뿐이다. 나의 사탕이..

다시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한장 한장 넘겨보던 내 손이 한 순간 멈췄다. 10장의 그림 중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마지막 이 한 장의 그림.

언젠가 사탕과 함께 독서실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날.. 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자니 바다가 생각났다. 넓고 넓은 바다.. 끝없는 푸르름이 넘실대는 바다가 그리웠다. 너무나 그리워서 문득 눈물이 솟았다. 사탕은 그런 나를 보며 하늘을 닮은 바다를 안다고 했다. 그 바다 속은 하늘보다도 아름다우며 살아있는 보석들로 가득하다고..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 그 눈부신 보석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함께 그 보석들 속에서 재미나게 놀아보자 그랬다.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은 그 날 사탕의 약속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나와 사탕이 하늘을 닮은 바다 속에 있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탕과 내가 손을 잡고 있다. 녹을 듯이 여유로운 푸르름과 무한한 자유를 가득 담은 마지막 그림을 보며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절실히 원하면, 죽을만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그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도와준다고 했지. 지금 우주가.. 나를 돕고 있는 것일까? 사탕이 드디어.. 나를 부르고 있다.

집에 돌아온 난 책장 한 구석에 꽂혀있는 이야기 노트를 펼쳤다. 아직 미완성인 내 글을 완성시켜야 한다. 사탕이 내 글의 엔딩을 알려주었다. 내 꿈이 반짝이는 그 곳에서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더 이상 비극은 없다. 난 사탕을 만날 것이다. 내 글은.. 해피엔딩이다.


<Ending>

2007년 9월 15일.. 정확히 2년 전 오늘, 사탕은 내 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오늘 나는 사탕을 만나기 위해 몰디브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좌석에 앉은 난 사탕의 마지막 그림을 펼쳐 본다. 하늘을 닮은 바다 속.. 나는 사탕이가 있는 몰디브로 간다. 사탕인 분명 거기에 있다. 분명히..
비행기가 뜬다. 지면이 저만치 멀어져 간다.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하늘과 충돌할 듯 날아오른다. 창문밖으로는 하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나는 구름위를 날고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 가슴속을 짓누르던 어떤 무게감마저 중력에서 차차 벗어나고 있다.  손에 촉촉히 땀이 차오른다. 저 구름너머에서.. 사탕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사탕을 볼 수 있을 것 만 같은 기분에 점점 숨이 가빠온다.  
드디어 몰디브 공항에 도착한 난 보트를 타고 코코아 아일랜드로 향한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빛의 바다.. 사탕이가 말하던 하늘을 닮은 바다를 눈 앞에 두고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조그맣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다이버들의 보트가 가까워 온다. 다이버들이 하나 둘 잠수를 하고 있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살펴본다. 내 눈은 바쁘게 사탕이만을 찾고 있다. 마스크와 호흡기에 가려진 그들 중에서 사탕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사탕이라 여겨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은 터질 것만 같은데 다리는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불안감이 엄습하고 만다.
언제나 멋대로였던 사탕이.. 난 어쩜 영원히 사탕이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탕인 이제.. 나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무언가에 미쳐있을 사탕이.. 사탕은 떠났다.
나는 그렇게 허망하게 보트에 서서 공허한 시선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버린다.

"난주 난주 강난주, 난주 난주 강난주.."

잠시 나의 귀를 의심한다. 어디선가 사탕의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바다를 응시한다. 하늘 빛 바다 위에 거짓말처럼 사탕이가 누워있다.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사탕이.. 언제나 그랬듯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박자를 맞추어 내 이름을 불러주고 있다.  

"난주 난주 강난주, 난주 난주 강난주.. 만세! 난주가 드디어 자유를 찾았습니다!"

"너.."

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고 만다. 언제나 날 찾아왔던 사탕이.. 이번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 한 장을 전해주고 저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에서 나를 탈출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내게 보여주려고..

그 날 오후.. 우리는 쏟아지는 햇살을 따라 바다속을 미끄러져 들어갔다. 거대한 산호초와 빛나는 물고기들이 사탕이와 나를 감쌌다. 사탕이가 자유를 쫓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온 몸이 터질 듯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을 만끽하며 푸른 바다속으로 녹아든다. 내 손을 꼭 잡은 사탕이.. 사탕인 나에게 자유로 통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바닷물에 일그러진 햇살을 바라본다. 다시는..다시는 이 자유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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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노트를 덮었다. 사탕과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나는 Ending을 인터넷에 올렸다. 앞으로 한 달 후인 9월 15일이 되는 날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난 휴가를 내기로 결심하고 일주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나의 휴가계획은 보기좋게  reject당했다. 너무 심했나? 그럼 몇일로 하지? 3일? 2일? 한동안을 그렇게 고민하던 나의 머릿속에 일순 사탕의 눈빛이 떠올랐다. 언제나 자신감과 기대감으로 찬란했던 그 눈빛.. 꿈을 쫓는 자의 그 당당한 자태.. 그렇다. 난 내 꿈을 찾아떠나는 것이다.

이틀간의 휴식을 위한 여행이 아니다. 지금 나는 내 일생을 걸고 내 젊음에 진정한 산소를 불어넣어 줄 작정이다. 다른 이들의 인생지도와 어긋난 그림이 그려질 수 있겠지만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나만의 지도를 내 의지로 그려 나갈 수 있다면 현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좋다.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미지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글을 쓸 것이다. 그 모험에 사탕이가 동행해 준다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나는 내 꿈을 찾아 떠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9월 15일 나는 공항에 들어서며 생각한다. 정말 사탕이를 만날 수 있을까? 결국 사탕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래 실망하겠지.. 슬플 것이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드디어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비행기에 탑승 후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본다. 곧 비행기가 이륙하고 구름위로 날아오르겠지.. 갑자기 두근대기 시작하는 가슴에 후.. 하고 큰 숨을 내쉰다. 왜 이리도 불안한 것일까. 나는 눈을 꼭 감는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왼손이 완벽한 따스함에 휩싸임을 느낀다. 내 두근대는 심장을 잠재우는 익숙한 따스함..

"무서워?"

나는 눈을 뜨고 왼편을 바라본다. 사탕의 갈색 눈.. 언제 떠났었냐는 듯, 항상 내 옆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 날 찾아온 사탕이가..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나쁜 놈.."

나도 모르게 이 한마디가 툭 튀어나온다. 참고 참아왔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린다. 사탕은 조심스레.. 하지만 주저 없이 내 눈물을 닦는다. 뭐하다 이제 온 거냐고 막 소리치고 싶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냥 사탕을 보자마자.. 이 따스함을 느끼자 마자.. 내 몸에 박혀 있던 모든 원망은 없던 것이 되고 만다.

"멋진 엔딩이야.. 역시 맘에 들었어."

사탕은 내 얼굴을 보며 고유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에잇! 니 소설이랑 똑같이 재연하려구 했는데..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더라."

곧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한다. 하지만 난 아무런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내 옆에는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사탕이가 있으니까..
나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 끝없이 하얀 구름 위를 날고 있다. 자유와 가까워진 느낌. 사탕이가 말하던 자유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놓치고 싶지 않은 이 느낌을 사탕은 나와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사탕이가 아니었다면 난 어쩜 평생토록 이런 느낌을 경혐하지 못한 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곁에 있는 사탕을 확인한다. 사탕의 갈색눈이 나를 보며 웃음짓는다. 나도 결국 웃어버린다.
내 글의 엔딩을 수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결국 내 소설은 완벽했으니까. 사탕이를 조금 일찍 만났다는 것 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