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구와 약속이 있어 레코드 가게문을 여느 때보다 일찍 닫은 이경아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영동호텔 커피숍까지 걸어가면서 서너 번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특별히 의심 가는 남자는 없었다. 누군가가 몸을 감추고 뒤따라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며칠째 계속 걸려온 괴상한 전화에 극도로 두려움을 느낀 이경아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 전화는 오늘도 예외일 수 없었고, 그녀는 망연자실해져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고, 코드를 빼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 한 번 꼴로 단골손님들이 미리 CD를 주문하기 때문이었다.
이경아는 궁여지책으로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도 해봤지만 부질없는 짓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남자라면 애당초 시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꾸만 불안해지고 두려워지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경아가 호텔 커피숍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오승구가 몸을 반쯤 일어난 상태에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겼다. 그녀를 반기는 그의 눈은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이 그녀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고, 그는 그녀보다 열일곱 살이 더 많은 마흔다섯 살이었다.
“생일 축하해.”
두 사람이 만난 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므로, 오승구는 오늘 처음으로 이경아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거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고, 격 없이 굴어 난처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생일을 핑계삼아 그녀가 원한다면 하늘에서 별을 따다 주고 싶을 만큼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승구는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다음 헛기침을 하고 나서 멋진 폼을 잡으며 양복 주머니 속에서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이경아 앞으로 내밀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생일선물로 뭐 해줄까 고민 끝에 마련한 선물이었다.
“생일선물이야.”
이경아에게 선물하는 것이 즐거운 듯 오승구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선물이요?”
이경아는 마치 성탄절 날에 산타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은 코흘리개처럼 즐거워하며 오승구가 건네준 선물 상자를 받아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그녀는 은박지로 된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고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순간 그녀는 의외의 선물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자 안에는 금으로 된 행운의 열쇠와 함께 또 다른 열쇠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생일선물인가. 그러니까 스물다섯 번째 생일날 임형석으로부터 하트 모양의 목걸이를 선물로 받고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3년 전의 일이 거만 이경아는 아주 먼 옛날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그 시절 그녀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즐거웠었다.
경신대학교에 입학하고서 임형석을 만나 사랑을 꽃 피우던 이경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질투하는 뭇 남녀들에 의하여 못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곤혹을 겪어야만 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한 무역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녀는 그 일을 기회로 삼아 다시 대입시험에 응시했고, 결과가 좋아 한국여대 산업디자인과에 재입학을 했던 것이다.
이경아는 눈을 감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임형석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 지웠다.
너무 사랑해 꿈속에서조차 떠나지 않았던 임형석에게 이경아가 배신을 당한 것은 스물여섯 번째 생일 전날이었다. 열흘 동안 아무 연락이 없던 그가 회사로 불쑥 찾아와 그녀가 근무를 끝내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타.”
임형석이 운전석에 앉은 채 팔을 뻗어 옆자리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웬일이에요?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고.”
이경아는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며 임형석의 차에 올라탔다.
“…….”
임형석은 입가에 미소을 머금은 채 이경아의 말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은 숨기지 못했다.
임형석이 반시간 정도 차를 운전해 이경아를 데려간 곳은 뚝섬 둔치였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두 사람은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위너스’라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을 때까지, 그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임형석은 말할 수 없는 고민이라도 생긴 듯,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는 듯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한 빛을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커피잔 밑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이경아가 먼저 침묵을 깨며 물었다.
“나……, 며칠 있으면 결혼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임형석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이 깃든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네에?”
너무 놀라서 이경아는 임형석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 며칠 있으면 결혼해.”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듯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임형석의 목소리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낮았고 불분명했다. 그는 목이 타는 듯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동안 일언반구도 없이 열흘만에 불쑥 나타나 ‘며칠 있으면 결혼을 한다’는 임형석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다시 앉은 이경아는 엄습해온 깊은 절망감에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완벽한 배신이었다.
“경아한테 못할 짓이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임형석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이경아의 시선을 피해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물 위엔 오리 모양의 놀잇배들이 물결 따라 출렁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도저히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었어.”
이경아를 무진장 사랑한다고,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어떠한 어려운 난관이 있더라도 너와 꼭 결혼할 거라고, 자신의 오피스텔 침대 위에 알몸을 누워 있는 그녀의 몸을 애무하면서 속삭였던 임형석이 지금은 헤어지기 위해 어머니를 끌어들여 구차스런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을 거야.”
임형석에게 말을 했다기보다는 이경아가 자신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재력가의 고명딸로 세도가의 외아들인 아버지와 결혼을 해서 외아들을 둔 그의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는 확률은 숫자 여섯 개를 맞추는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보다 어렵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로또복권에서도 한꺼번에 1등 당첨자가 여러 명이 나오듯이 임형석의 말을 믿고 희망을 갖고 있었던 이경아는 석고상처럼 앉아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감았다. 울컥 치솟은 배신감에 의한 울분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길 뻔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다소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숨도 쉬는 것 같지 않게 조각상처럼 앉아 있던 이경아는 임형석의 얼굴을 정면으로 노려보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아무 말 없이 레스토랑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있으면 결혼한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경아는 뚝섬 둔치를 벗어나면서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했다. 지금 당장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이경아가 경신대학교 신입생 때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의 모임인 콩나물 동아리에서 만나 5년을 넘게 교제한 임형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후 이경아는 임형석에 대해서 일절 들은 바가 없었다. 아니, 그의 소식을 들을만큼 그녀는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 열쇠는 뭐예요?”
이경아가 또 다른 열쇠를 상자 안에서 꺼내 보이면서 물었다.
“자동차 키야.”
오승구는 이경아가 부담감과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그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동차 키요?”
이경아는 예상 못했던 뜻밖의 생일선물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커다랗게 쌍꺼풀진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오승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생일선물에 아무래도 그녀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
오승구가 티스푼으로 커피에 프림과 설탕을 섞으며 물었다. 커피가 식어 미지근해져 있어 그는 티스푼으로 여러 번 저어야 했다.
“그렇지만,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오래 전부터 꼭 해주고 싶었던 선물이었어.”
“그래도 이 선물은…….”
“부담 갖지마.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승구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이경아의 입을 막기 위해 커피잔을 높이 쳐들었다.
“경아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두 사람은 커피잔을 쨍그랑 마주치고 나서 식은 커피를 샴페인 마시듯 단숨에 쭈욱 들이켰다.
“우리 이젠 그만 일어날까?”
여전히 부담스러워 하는 이경아를 향해 오승구가 말했다.
“어디로 갈 건데요?”
“이제 축하 파티를 해야지.”
오승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계산대로 걸어갔다. 계산을 끝내고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막 내려가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순간 그는 머리칼이 쭈뼛 서면서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끼면서 계단에 한 발을 내려놓았던 동작을 우뚝 멈췄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경아와의 관계를 들켰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오승구는 아내에게 이경아와의 관계를 꼬리 잡히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었다. 무의식중에 실수를 저지를까봐 말조심은 물론 몸조심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몸이 움츠러들면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던 이경아 역시 심각한 일이 발생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긴장된 굳은 얼굴로 슬그머니 오승구 곁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오승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웬 낯선 남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구시죠?”
오승구는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두성 씨 아니세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난 오승구는 다행이다 싶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짧게 내쉬었다.
“김두성이요? 아닙니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여러 번 도리질하면서 말한 오승구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으셔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승구는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남자에게 얼떨결에 자신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머물렀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매우 겸연쩍어 하면서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오승구는 먼저 지하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경아를 따라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예요?”
앞서 걷던 이경아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오승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날 자기 친구로 착각했었나봐.”
“그럼, 아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응.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혹시나 해서 저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이경아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을 때 빨간 승용차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오승구가 빨간 승용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벅찬 기쁨에 눈시울이 아침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이경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매우 흡족해 했다. 그녀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간에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그런 그녀를 그는 머리칼부터 발가락 끝까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고, 소유하고 싶은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내가 존재하고 있는 한 이경아와의 관계는 불확실한 미래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승구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모든지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시승을 해야지?”
오승구가 이경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재촉하자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시트에 씌워진 비닐이 벗겨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운전석에 앉았다.
“이젠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해야지.”
“내가요?”
오승구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하자 이경아가 정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안 하면 언제 하려고?”
오승구가 장난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면허증을 5년 전에 취득한 이경아였지만 그 후로는 운전대 앞에 앉아볼 기회가 없었던 완전초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차를 선물한 것은 일주일 정도 부지런히 연습을 하면 그런 대로 몰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연습 많이 해서 몰고 다닐게요.”
이경아가 커다란 동작으로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승구는 이경아 대신 빨간 승용차를 몰고 말죽거리에 있는 그녀의 원룸으로 향했다. 그녀가 운전을 못할게 뻔했기 때문에 미리 자신의 차를 그곳에 주차해 놓고, 대신 빨간 승용차를 운전하고 영동호텔로 온 그였다.
오승구는 오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맞은 이경아에게 생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오승구는 이경아를 만나면서도 한 번도 외박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와 몸을 섞은 후 하룻밤조차 함께 보내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입고 호텔을 빠져나올 때 그는 안타까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곤 했었다. 그건 그녀의 존재를 아내에게 들키지 않고 그녀와의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려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아내에게, 지금 그는 출판 학술세미나 관계로 부산에 출장 온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성우는 영동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와 신사동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해 말죽거리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빨간 승용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의 만남을 목격하지 못했던 장성우는 오늘은 이경아의 집을 꼭 알아두리라는 마음으로 차를 그녀의 레코드 가게 건물 뒤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 세워 놓고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며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날씨가 겨울답게 제법 추웠지만 미리 준비해온 오리털 파카로 갈아입은 그는 충분히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경아가 평상시보다 서너 시간이나 일찍 레코드 가게문을 닫는 것을 본 장성우는 지금 그녀가 오승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장성우는 눈에 띄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경아의 뒤를 미행했다. 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가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렇게 영동호텔 커피숍까지 따라 들어간 그는 오승구와 만나는 그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 부리나케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를 몰고 영동호텔 입구 도로변에 세워 놓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두 사람은 어디로 가든 커피숍에 나와 차로 이동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두 사람이 탄 차를 놓칠 뻔한 장성우였다. 오승구가 이경아에게 생일기념으로 선물한 빨간 승용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그는 오직 오승구의 그랜저가 나오기만 기다리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장성우가 시동을 건 채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막 불을 붙이려고 할 때 임시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는 빨간 승용차가 영동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장성우는 앞에 손님을 태우기 위해 택시가 가로막고 있어 좌회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빨간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빨간색의 승용차는 거의 여자가 운전한다는 관념이 머릿속에 박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어떤 여자인지 돈 많은 놈팽이 하나 물었나 보군’하고, 호기심으로 운전석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기 위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순간 장성우는 깜짝 놀라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운전석엔 오승구가 앉아 있었고, 조수석엔 이경아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안간 장성우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된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저 자가 차를 바꿨나? 아냐, 그랜저를 몰던 놈이 어떻게 저런 차를 몰고 다닐 수 있겠어. 그렇다면 그녀에게 선물을……? 그래, 틀림없어. 그놈이, 돈 많은 놈이니까 그녀에게 선물한 차가 틀림없을 거야.
손님을 태운 택시가 떠나고 두 사람이 탄 빨간 승용차가 좌회전을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성우는 재빨리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서 기어를 일단으로 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두 사람이 탄 빨간 차를 미행하면서 남을 미행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장성우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미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경아의 원룸에 도착한 오승구는 자신의 그랜저로 바꿔 탄 다음 골목을 빠져 나와 양재 사거리에서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성남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남시 복정동에서 구리 판교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강동대교를 건너 양수리에 있는 ‘화이트 하우스’라는 모텔로 갈 예정이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모텔에선 이경아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승구가 주문한 음식을 이미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데요?”
차가 내곡동을 지나 헌인릉 입구를 지나칠 때,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경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가보면 알아.”
오승구는 웃음 띤 얼굴로 이경아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또 그곳에 가서 생일 축하 파티를 어떻게 해줄 것인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승구는 스위치를 눌러 라디오를 켰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볼륨을 높이고 핸들을 잡은 손끝으로 박자를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사처럼 항상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이경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영동호텔에서부터 뒤에 바싹 따라붙어 미행하고 있는 장성우의 차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오승구는 이경아와 함께 하룻밤을 보낼 생각에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다. 젊은 날의 첫사랑을 만나는 사람처럼 마음을 설레며 오래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오늘이 아니었던가.
아내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자신과 이경아가 섹스를 할 때 아내가 시뻘겋게 두 눈을 치켜 뜨고 들이닥쳐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오승구는 한치의 빈틈없이 행동해오고 있었다.
항상 집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그 동안 오승구는 이경아와의 관계가 마치 청량리 오팔팔에서 창녀와 섹스를 하고 난 후처럼 뒤끝이 꺼림칙했던 게 사실이었다. 길을 가다 공중화장실에서 급한 용변을 본 사람처럼 그는 그녀와 섹스를 하고 나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호텔을 나왔던 것이다. 혹시 아는 사람 눈에 띨까 봐 함께 나오지도 못하고 그녀를 혼자 남겨 놓은 채.
두 사람이 함께 호텔에 들어왔다 가도 항상 먼저 돌아가는 오승구에게 이경아는 한 번도 더 있다 가라고 잡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일로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경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오승구으로서는 가슴이 미어져올 정도로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는데, 오늘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고 해서 그 동안의 일들이 만회될 리는 없겠지만 그녀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성심 성의를 다할 생각이었다.
오승구는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무인카메라를 피해가며 시속 120킬로미터 이상 속도로 달려서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뒤엔 야산이 있는 양수리의 ‘화이트 하우스’ 모텔에 도착했다. 전에 몇 번 이경아와 함께 왔던 모텔로, 새 건물인데다 시설도 좋아 일급 호텔 못지 않았다.
오승구는 차를 주차장에 세워 놓고 로비를 지나쳐 프런트로 갔고, 이경아는 지난번처럼 곧장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오승구를 알아본 종업원이 반갑게 맞으면서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따로 전자카드로 된 객실 키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았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승구는 종업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나서 고마움의 표시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팁으로 주고 몸을 돌려 이경아가 기다리고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두 사람만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경아아와 마주보고 선 오승구가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있을 때, 앞차를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따라온 장성우는 드문드문 차들이 주차해 있는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시동을 켜놓은 채로 운전석에 앉아 불이 꺼져 있는 객실 창문들을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지금 막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앞으로 불이 켜지는 객실이 그 두 사람이 머무는 객실이 틀림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성우는 내일 모텔을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는 차안에서 밤을 새워야할 판이었다.
그렇게 5분 정도 기다리자 6층에 있는 객실 중 하나에 불이 켜졌다. 장성우는 가방을 열고 필름이 감겨져 있는 사진기를 꺼내 줌렌즈를 망원렌즈로 교체하고, 제발 객실 창의 커튼이 젖혀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동지섣달 추운 날씨에, 그것도 컴컴한 밤중에 그 누가 밖의 풍경을 감상하겠다고 커튼을 젖히겠는가. 무리한 기대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사진기를 손에 꼭 쥔 채 창문을 응시하고 있는 장성우는 갑자기 밀려드는 허무함과 고독감에 좁쌀 만한 소름들이 온몸에 돋는 것을 느꼈다.
예약해 놓은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경아는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고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이 객실이 이 모텔에서 제일 좋은 특실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창가에 있는 테이블 위에 바닷가재 요리 등 이경아가 보지도 먹지도 못한 다양한 특별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그 옆엔 와인 한 병과 그녀의 나이 숫자만큼 초가 꽂혀 있는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켜놓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 촛불은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이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너무 멋져요!”
이경아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성대한 생일 축하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그녀였다. 오승구는 그녀가 '행복해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행복해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만족감에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선 촛불부터 끄자.”
오승구의 제의에 이경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입을 오므리며 바람을 내뿜자 그녀의 나이 숫자만큼의 촛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감격의 눈물이 눈가에 머금은 이경아가 오승구의 가슴에 안기며 말했다.
“우리 샤워부터 먼저 할까?”
가슴에 안은 이경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오승구가 말했다. 그의 가슴은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면서도 오승구와 이경아의 모습이 창가에 나타나지 않자 장성우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꽤 오래된 듯했다.
그때였다. 먼저 샤워를 끝낸 오승구가 샤워를 하고 있는 이경아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속옷을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친 채 커튼을 열어제치고 창가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차창을 재빨리 내리고 사진기를 든 장성우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그의 손가락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마치고 오승구에게 다가오는 이경아의 얼굴은 막 씻은 사과처럼 싱그러웠다. 그녀 역시 속옷은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을 뒤에서 껴안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몸을 돌려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면서 꼭 껴안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오승구와 이경아는 마치 장성우에게 보아란 듯이 창가에 서서 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담기 위해 그는 사진기에 부착한 망원렌즈를 바짝 앞으로 끌어당기고 초점을 맞춰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뜨겁게 치솟아 오른 욕정으로 식욕이 사라진 오승구와 이경아는 와인 한 잔으로 목구멍을 축이고 나서 테이블 위의 바닷가재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알몸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오승구와 이경아의 긴 입맞춤을 사진기에 담고 난 장성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함을 동반한 질투심에 의해 끓어오르는 분노로 미칠 것만 같았다.
종이배 8. 그녀의 생일날
그녀의 생일날
오승구와 약속이 있어 레코드 가게문을 여느 때보다 일찍 닫은 이경아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영동호텔 커피숍까지 걸어가면서 서너 번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특별히 의심 가는 남자는 없었다. 누군가가 몸을 감추고 뒤따라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며칠째 계속 걸려온 괴상한 전화에 극도로 두려움을 느낀 이경아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 전화는 오늘도 예외일 수 없었고, 그녀는 망연자실해져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고, 코드를 빼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 한 번 꼴로 단골손님들이 미리 CD를 주문하기 때문이었다.
이경아는 궁여지책으로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도 해봤지만 부질없는 짓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남자라면 애당초 시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꾸만 불안해지고 두려워지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경아가 호텔 커피숍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오승구가 몸을 반쯤 일어난 상태에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겼다. 그녀를 반기는 그의 눈은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이 그녀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고, 그는 그녀보다 열일곱 살이 더 많은 마흔다섯 살이었다.
“생일 축하해.”
두 사람이 만난 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므로, 오승구는 오늘 처음으로 이경아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거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고, 격 없이 굴어 난처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생일을 핑계삼아 그녀가 원한다면 하늘에서 별을 따다 주고 싶을 만큼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승구는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다음 헛기침을 하고 나서 멋진 폼을 잡으며 양복 주머니 속에서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이경아 앞으로 내밀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생일선물로 뭐 해줄까 고민 끝에 마련한 선물이었다.
“생일선물이야.”
이경아에게 선물하는 것이 즐거운 듯 오승구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선물이요?”
이경아는 마치 성탄절 날에 산타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은 코흘리개처럼 즐거워하며 오승구가 건네준 선물 상자를 받아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그녀는 은박지로 된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고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순간 그녀는 의외의 선물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자 안에는 금으로 된 행운의 열쇠와 함께 또 다른 열쇠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생일선물인가. 그러니까 스물다섯 번째 생일날 임형석으로부터 하트 모양의 목걸이를 선물로 받고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3년 전의 일이 거만 이경아는 아주 먼 옛날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그 시절 그녀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즐거웠었다.
경신대학교에 입학하고서 임형석을 만나 사랑을 꽃 피우던 이경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질투하는 뭇 남녀들에 의하여 못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곤혹을 겪어야만 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한 무역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녀는 그 일을 기회로 삼아 다시 대입시험에 응시했고, 결과가 좋아 한국여대 산업디자인과에 재입학을 했던 것이다.
이경아는 눈을 감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임형석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 지웠다.
너무 사랑해 꿈속에서조차 떠나지 않았던 임형석에게 이경아가 배신을 당한 것은 스물여섯 번째 생일 전날이었다. 열흘 동안 아무 연락이 없던 그가 회사로 불쑥 찾아와 그녀가 근무를 끝내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타.”
임형석이 운전석에 앉은 채 팔을 뻗어 옆자리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웬일이에요?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고.”
이경아는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며 임형석의 차에 올라탔다.
“…….”
임형석은 입가에 미소을 머금은 채 이경아의 말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은 숨기지 못했다.
임형석이 반시간 정도 차를 운전해 이경아를 데려간 곳은 뚝섬 둔치였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두 사람은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위너스’라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을 때까지, 그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임형석은 말할 수 없는 고민이라도 생긴 듯,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는 듯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한 빛을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커피잔 밑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이경아가 먼저 침묵을 깨며 물었다.
“나……, 며칠 있으면 결혼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임형석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이 깃든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네에?”
너무 놀라서 이경아는 임형석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 며칠 있으면 결혼해.”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듯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임형석의 목소리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낮았고 불분명했다. 그는 목이 타는 듯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동안 일언반구도 없이 열흘만에 불쑥 나타나 ‘며칠 있으면 결혼을 한다’는 임형석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다시 앉은 이경아는 엄습해온 깊은 절망감에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완벽한 배신이었다.
“경아한테 못할 짓이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임형석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이경아의 시선을 피해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물 위엔 오리 모양의 놀잇배들이 물결 따라 출렁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도저히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었어.”
이경아를 무진장 사랑한다고,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어떠한 어려운 난관이 있더라도 너와 꼭 결혼할 거라고, 자신의 오피스텔 침대 위에 알몸을 누워 있는 그녀의 몸을 애무하면서 속삭였던 임형석이 지금은 헤어지기 위해 어머니를 끌어들여 구차스런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을 거야.”
임형석에게 말을 했다기보다는 이경아가 자신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재력가의 고명딸로 세도가의 외아들인 아버지와 결혼을 해서 외아들을 둔 그의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는 확률은 숫자 여섯 개를 맞추는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보다 어렵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로또복권에서도 한꺼번에 1등 당첨자가 여러 명이 나오듯이 임형석의 말을 믿고 희망을 갖고 있었던 이경아는 석고상처럼 앉아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감았다. 울컥 치솟은 배신감에 의한 울분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길 뻔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다소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숨도 쉬는 것 같지 않게 조각상처럼 앉아 있던 이경아는 임형석의 얼굴을 정면으로 노려보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아무 말 없이 레스토랑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있으면 결혼한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경아는 뚝섬 둔치를 벗어나면서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했다. 지금 당장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이경아가 경신대학교 신입생 때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의 모임인 콩나물 동아리에서 만나 5년을 넘게 교제한 임형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후 이경아는 임형석에 대해서 일절 들은 바가 없었다. 아니, 그의 소식을 들을만큼 그녀는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 열쇠는 뭐예요?”
이경아가 또 다른 열쇠를 상자 안에서 꺼내 보이면서 물었다.
“자동차 키야.”
오승구는 이경아가 부담감과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그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동차 키요?”
이경아는 예상 못했던 뜻밖의 생일선물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커다랗게 쌍꺼풀진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오승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생일선물에 아무래도 그녀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
오승구가 티스푼으로 커피에 프림과 설탕을 섞으며 물었다. 커피가 식어 미지근해져 있어 그는 티스푼으로 여러 번 저어야 했다.
“그렇지만,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오래 전부터 꼭 해주고 싶었던 선물이었어.”
“그래도 이 선물은…….”
“부담 갖지마.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승구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이경아의 입을 막기 위해 커피잔을 높이 쳐들었다.
“경아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두 사람은 커피잔을 쨍그랑 마주치고 나서 식은 커피를 샴페인 마시듯 단숨에 쭈욱 들이켰다.
“우리 이젠 그만 일어날까?”
여전히 부담스러워 하는 이경아를 향해 오승구가 말했다.
“어디로 갈 건데요?”
“이제 축하 파티를 해야지.”
오승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계산대로 걸어갔다. 계산을 끝내고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막 내려가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순간 그는 머리칼이 쭈뼛 서면서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끼면서 계단에 한 발을 내려놓았던 동작을 우뚝 멈췄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경아와의 관계를 들켰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오승구는 아내에게 이경아와의 관계를 꼬리 잡히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었다. 무의식중에 실수를 저지를까봐 말조심은 물론 몸조심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몸이 움츠러들면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던 이경아 역시 심각한 일이 발생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긴장된 굳은 얼굴로 슬그머니 오승구 곁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오승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웬 낯선 남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구시죠?”
오승구는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두성 씨 아니세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난 오승구는 다행이다 싶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짧게 내쉬었다.
“김두성이요? 아닙니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여러 번 도리질하면서 말한 오승구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으셔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승구는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남자에게 얼떨결에 자신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머물렀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매우 겸연쩍어 하면서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오승구는 먼저 지하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경아를 따라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예요?”
앞서 걷던 이경아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오승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날 자기 친구로 착각했었나봐.”
“그럼, 아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응.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혹시나 해서 저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이경아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을 때 빨간 승용차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오승구가 빨간 승용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벅찬 기쁨에 눈시울이 아침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이경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매우 흡족해 했다. 그녀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간에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그런 그녀를 그는 머리칼부터 발가락 끝까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고, 소유하고 싶은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내가 존재하고 있는 한 이경아와의 관계는 불확실한 미래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승구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모든지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시승을 해야지?”
오승구가 이경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재촉하자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시트에 씌워진 비닐이 벗겨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운전석에 앉았다.
“이젠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해야지.”
“내가요?”
오승구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하자 이경아가 정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안 하면 언제 하려고?”
오승구가 장난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면허증을 5년 전에 취득한 이경아였지만 그 후로는 운전대 앞에 앉아볼 기회가 없었던 완전초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차를 선물한 것은 일주일 정도 부지런히 연습을 하면 그런 대로 몰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연습 많이 해서 몰고 다닐게요.”
이경아가 커다란 동작으로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승구는 이경아 대신 빨간 승용차를 몰고 말죽거리에 있는 그녀의 원룸으로 향했다. 그녀가 운전을 못할게 뻔했기 때문에 미리 자신의 차를 그곳에 주차해 놓고, 대신 빨간 승용차를 운전하고 영동호텔로 온 그였다.
오승구는 오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맞은 이경아에게 생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오승구는 이경아를 만나면서도 한 번도 외박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와 몸을 섞은 후 하룻밤조차 함께 보내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입고 호텔을 빠져나올 때 그는 안타까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곤 했었다. 그건 그녀의 존재를 아내에게 들키지 않고 그녀와의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려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아내에게, 지금 그는 출판 학술세미나 관계로 부산에 출장 온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성우는 영동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와 신사동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해 말죽거리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빨간 승용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의 만남을 목격하지 못했던 장성우는 오늘은 이경아의 집을 꼭 알아두리라는 마음으로 차를 그녀의 레코드 가게 건물 뒤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 세워 놓고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며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날씨가 겨울답게 제법 추웠지만 미리 준비해온 오리털 파카로 갈아입은 그는 충분히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경아가 평상시보다 서너 시간이나 일찍 레코드 가게문을 닫는 것을 본 장성우는 지금 그녀가 오승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장성우는 눈에 띄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경아의 뒤를 미행했다. 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가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렇게 영동호텔 커피숍까지 따라 들어간 그는 오승구와 만나는 그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 부리나케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를 몰고 영동호텔 입구 도로변에 세워 놓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두 사람은 어디로 가든 커피숍에 나와 차로 이동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두 사람이 탄 차를 놓칠 뻔한 장성우였다. 오승구가 이경아에게 생일기념으로 선물한 빨간 승용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그는 오직 오승구의 그랜저가 나오기만 기다리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장성우가 시동을 건 채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막 불을 붙이려고 할 때 임시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는 빨간 승용차가 영동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장성우는 앞에 손님을 태우기 위해 택시가 가로막고 있어 좌회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빨간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빨간색의 승용차는 거의 여자가 운전한다는 관념이 머릿속에 박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어떤 여자인지 돈 많은 놈팽이 하나 물었나 보군’하고, 호기심으로 운전석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기 위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순간 장성우는 깜짝 놀라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운전석엔 오승구가 앉아 있었고, 조수석엔 이경아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안간 장성우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된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저 자가 차를 바꿨나? 아냐, 그랜저를 몰던 놈이 어떻게 저런 차를 몰고 다닐 수 있겠어. 그렇다면 그녀에게 선물을……? 그래, 틀림없어. 그놈이, 돈 많은 놈이니까 그녀에게 선물한 차가 틀림없을 거야.
손님을 태운 택시가 떠나고 두 사람이 탄 빨간 승용차가 좌회전을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성우는 재빨리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서 기어를 일단으로 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두 사람이 탄 빨간 차를 미행하면서 남을 미행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장성우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미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경아의 원룸에 도착한 오승구는 자신의 그랜저로 바꿔 탄 다음 골목을 빠져 나와 양재 사거리에서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성남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남시 복정동에서 구리 판교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강동대교를 건너 양수리에 있는 ‘화이트 하우스’라는 모텔로 갈 예정이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모텔에선 이경아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승구가 주문한 음식을 이미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데요?”
차가 내곡동을 지나 헌인릉 입구를 지나칠 때,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경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가보면 알아.”
오승구는 웃음 띤 얼굴로 이경아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또 그곳에 가서 생일 축하 파티를 어떻게 해줄 것인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승구는 스위치를 눌러 라디오를 켰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볼륨을 높이고 핸들을 잡은 손끝으로 박자를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사처럼 항상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이경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영동호텔에서부터 뒤에 바싹 따라붙어 미행하고 있는 장성우의 차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오승구는 이경아와 함께 하룻밤을 보낼 생각에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다. 젊은 날의 첫사랑을 만나는 사람처럼 마음을 설레며 오래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오늘이 아니었던가.
아내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자신과 이경아가 섹스를 할 때 아내가 시뻘겋게 두 눈을 치켜 뜨고 들이닥쳐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오승구는 한치의 빈틈없이 행동해오고 있었다.
항상 집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그 동안 오승구는 이경아와의 관계가 마치 청량리 오팔팔에서 창녀와 섹스를 하고 난 후처럼 뒤끝이 꺼림칙했던 게 사실이었다. 길을 가다 공중화장실에서 급한 용변을 본 사람처럼 그는 그녀와 섹스를 하고 나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호텔을 나왔던 것이다. 혹시 아는 사람 눈에 띨까 봐 함께 나오지도 못하고 그녀를 혼자 남겨 놓은 채.
두 사람이 함께 호텔에 들어왔다 가도 항상 먼저 돌아가는 오승구에게 이경아는 한 번도 더 있다 가라고 잡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일로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경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오승구으로서는 가슴이 미어져올 정도로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는데, 오늘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고 해서 그 동안의 일들이 만회될 리는 없겠지만 그녀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성심 성의를 다할 생각이었다.
오승구는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무인카메라를 피해가며 시속 120킬로미터 이상 속도로 달려서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뒤엔 야산이 있는 양수리의 ‘화이트 하우스’ 모텔에 도착했다. 전에 몇 번 이경아와 함께 왔던 모텔로, 새 건물인데다 시설도 좋아 일급 호텔 못지 않았다.
오승구는 차를 주차장에 세워 놓고 로비를 지나쳐 프런트로 갔고, 이경아는 지난번처럼 곧장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오승구를 알아본 종업원이 반갑게 맞으면서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따로 전자카드로 된 객실 키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았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승구는 종업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나서 고마움의 표시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팁으로 주고 몸을 돌려 이경아가 기다리고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두 사람만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경아아와 마주보고 선 오승구가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있을 때, 앞차를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따라온 장성우는 드문드문 차들이 주차해 있는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시동을 켜놓은 채로 운전석에 앉아 불이 꺼져 있는 객실 창문들을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지금 막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앞으로 불이 켜지는 객실이 그 두 사람이 머무는 객실이 틀림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성우는 내일 모텔을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는 차안에서 밤을 새워야할 판이었다.
그렇게 5분 정도 기다리자 6층에 있는 객실 중 하나에 불이 켜졌다. 장성우는 가방을 열고 필름이 감겨져 있는 사진기를 꺼내 줌렌즈를 망원렌즈로 교체하고, 제발 객실 창의 커튼이 젖혀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동지섣달 추운 날씨에, 그것도 컴컴한 밤중에 그 누가 밖의 풍경을 감상하겠다고 커튼을 젖히겠는가. 무리한 기대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사진기를 손에 꼭 쥔 채 창문을 응시하고 있는 장성우는 갑자기 밀려드는 허무함과 고독감에 좁쌀 만한 소름들이 온몸에 돋는 것을 느꼈다.
예약해 놓은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경아는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고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이 객실이 이 모텔에서 제일 좋은 특실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창가에 있는 테이블 위에 바닷가재 요리 등 이경아가 보지도 먹지도 못한 다양한 특별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그 옆엔 와인 한 병과 그녀의 나이 숫자만큼 초가 꽂혀 있는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켜놓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 촛불은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이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너무 멋져요!”
이경아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성대한 생일 축하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그녀였다. 오승구는 그녀가 '행복해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행복해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만족감에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선 촛불부터 끄자.”
오승구의 제의에 이경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입을 오므리며 바람을 내뿜자 그녀의 나이 숫자만큼의 촛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감격의 눈물이 눈가에 머금은 이경아가 오승구의 가슴에 안기며 말했다.
“우리 샤워부터 먼저 할까?”
가슴에 안은 이경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오승구가 말했다. 그의 가슴은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면서도 오승구와 이경아의 모습이 창가에 나타나지 않자 장성우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꽤 오래된 듯했다.
그때였다. 먼저 샤워를 끝낸 오승구가 샤워를 하고 있는 이경아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속옷을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친 채 커튼을 열어제치고 창가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차창을 재빨리 내리고 사진기를 든 장성우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그의 손가락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마치고 오승구에게 다가오는 이경아의 얼굴은 막 씻은 사과처럼 싱그러웠다. 그녀 역시 속옷은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을 뒤에서 껴안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몸을 돌려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면서 꼭 껴안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오승구와 이경아는 마치 장성우에게 보아란 듯이 창가에 서서 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담기 위해 그는 사진기에 부착한 망원렌즈를 바짝 앞으로 끌어당기고 초점을 맞춰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뜨겁게 치솟아 오른 욕정으로 식욕이 사라진 오승구와 이경아는 와인 한 잔으로 목구멍을 축이고 나서 테이블 위의 바닷가재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알몸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오승구와 이경아의 긴 입맞춤을 사진기에 담고 난 장성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함을 동반한 질투심에 의해 끓어오르는 분노로 미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