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경아는 1년 365일을 어둠이 깔릴 즈음에 친구 두 명과 함께 기거하고 있는 원룸에서 나와 다음 날 새벽 어둠이 서서히 걷힐 때 술과 담배에 찌든 녹초가 된 몸을 끌다시피 하며 룸살롱에서 나와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이 깬 낮 동안에는 딱히 할 일 없는 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무료한 시간을 때워야 했다. 룸살롱에 나가는 그날로 즐기던 독서에 손을 뗀 그녀였다.
룸살롱을 찾는 남자들의 계층은 천차만별이었다. 그 중엔 저질스럽고 불쾌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면서 그녀들의 치마 속과 브래지어 속에 손을 집어넣는 일에만 골몰해 있는, 그녀들을 마치 노리갯감으로 여겨 마구대하는 상대조차 하기 싫은 버러지 같은 작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싫든 좋든 손님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여하튼 그들은 그녀들을 원한 대가로 그녀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들은 일종의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이경아는 전시장에 진열된 완벽한 상품처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래서 단연 남자들 눈에 돋보였고, 모두 그녀를 옆에 앉히고 싶어했고, 그녀와 섹스 하길 원했다.
1년 전, 거래처 인쇄소인 김승현 사장과 함께 저녁 식사 후 소주를 마신 탓에 거나하게 취한 오승구가 김 사장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간 곳이 무교동의 ‘별들의 고향’이라는 룸살롱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무교동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가지각색의 조명으로 휘황찬란한 야구장 전광판 크기 만한 ‘별들의 고향’이라는 룸살롱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두 사람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를 밟으며 10미터 가량 걸어가자 또 다른 유리문이 나왔다. 그 앞에 서자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리면서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웨이터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고 두 사람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시는 웨이터 있으세요?”
웨이터 중 제일 고참으로 보이는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때 웨이터들 사이를 비집고 ‘박찬호’라는 야구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가슴에 단 웨이터가 다가와 김 사장에게 인사를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박찬호!”
엄청난 단골인 듯 김 사장이 ‘박찬호’라는 웨이터에게 반가워하며 악수까지 청했다.
김 사장은 웨이터가 안내하는 룸으로 들어가면서 오승구에게 특별 접대를 한답시고 ‘별들의 고향’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는 호스티스를 불러 옆에 앉혔다. 그 호스티스가 바로 이경아였던 것이다.
이경아는 오승구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여자 중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는 눈길을 도저히 뗄 수가 없어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즐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뜻밖의 행운에 감사해 했다. 정말 그녀는 마스코트 인형처럼 언제나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경아가 오승구의 옆에 바싹 다가와 앉으면서 다리를 꼬자 그녀의 짧은치마가 올라가면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고, 가슴선이 패인 블라우스 속에서 탄력 있는 젖가슴이 숨을 쉬고 있었다.
이경아의 농염한 모습에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 오승구는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녀가 잡놈들이 다 모이는 이런 룸살롱에서 몸을 마구 굴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주가 두 병이나 동이 나고 다시 양주 한 병과 안주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런데도 오승구는 전혀 취기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이경아의 향기에 취해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유혹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그로서는 맨 정신으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다.
김 사장 역시 자신과 똑같은 감정에 빠져있다는 것을, 오승구는 술을 마시면서도 파트너의 허리가 휘어지도록 꼭 껴안고 있는 그의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아주 오래 전에 중매로 만나 결혼한 아내와 이혼하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외로운 남자였다. 결혼하기 전부터 음란비디오를 상습적으로 즐겨보던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가끔 봤는데, 어느 날 아직 결혼 전인 친구의 오피스텔에서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흘러나온 음란비디오를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디오는 어느 러브호텔에서 몰래 카메라로 촬영된 것인데, 그 비디오 속에서 남자와 뒤엉켜 섹스를 즐기는 여자의 얼굴이 다름 아닌 아내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김 사장은 설마 하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을 하다가 아내를 추궁한 결과 그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결국 아내와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김 사장은 계속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여자의 유혹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오승구는 잘 알고 있었다.
룸살롱 ‘별들의 고향’에서 나온 오승구와 김 사장은 호스티스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먼저 웨이터가 와서 객실을 예약해놓고 돌아간 상태였기 때문에 각자 호스티스를 데리고 정해진 객실로 들어가면 되었다.
먼저 샤워를 끝낸 오승구는 팬티 차림으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처음으로 총각 딱지를 떼는 청소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경아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큰 수건으로 알몸을 감싸고 욕실을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는 자신의 감정을 걷잡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몸은 솜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경아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으면서 오승구는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그녀의 입술에 가져갔다. 순간 짜릿한 쾌감을 느낀 그는 다급하게 그녀를 침대로 이끌고 갔다. 그녀의 몸에서 향긋한 비누냄새가 풍겼다.
“너, 나하고 연애할래?”
방금 이경아의 몸 위에서 내로운 오승구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경아에게 물었다.
“…….”
이경아는 오승구의 뜬금없는 소리에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담하는 거 아냐. 네가 내 애인이 되어주면 넌 이런 곳에 나오지 않아도 잘살 수 있어. 넌 이런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오승구는 자신의 제안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경아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이경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냐. 네가 내 애인만 되어준다면, 난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오승구는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의사 소통을 해보려고 손짓 발짓하듯 이경아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
그러나 이경아는 여전히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서 나중에 전화해 줘.”
오승구는 이경아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정말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절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녀가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과 십만 원짜리 수표를 여러 장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거울 달린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먼저 팬티를 입고, 러닝셔츠를 입고, 와이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맨 뒤 바지를 입고서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었다.
“꼭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 게.”
오승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경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나서 그녀 혼자 남겨 두고 먼저 객실을 나왔다.
이경아는 오승구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실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애인하자’면서 끊임없는 유혹을 던져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들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왔었다.
처음엔 그들의 달콤한 유혹에 이경아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룸살롱에 나가 여러 남자들 앞에서 인형 노릇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고민이 해결될 것이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신뢰감이 들지 않아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이경아의 마음은 오승구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열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와 바람난 아버지에게 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탓일까. 오늘밤 처음 만났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아버지 같은 다정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믿지 못할 것이 사람이 마음이었다.
이경아는 객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멀어져 가는 오승구의 희미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룸살롱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룸살롱의 영업시간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지만, 돈이 모아지는 대로 이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싶은 그녀로서는, 하루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로서는 하루하루가 급할 따름이었다.
오승구는 이경아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가능하면 조급해지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그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만 마음이 그녀를 만났던 룸살롱으로 향했다. 그녀의 그리움에 외로움을 느낄 정도로 그는 그녀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오늘 퇴근시간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가 만나러 가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승구는 이경아를 만나러 룸살롱으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룸살롱 같은 곳에서 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 만남은 그냥 거래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언제 변하게 될지 장담은 하지 못했다.
이경아에게서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식사를 한 후 사무실로 들어온 오승구는 몸을 뒤로 젖혀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식당 앞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가판대에서 사온 스포츠신문을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보던 신문을 덮고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이경아에요. 절 기억하시겠어요?”
이경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이경아?”
이경아의 전화에 오승구는 너무 기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녀의 전화였기에 채 2분도 안 되는 짧은 통화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꿈속인 듯 달콤했다. 이렇듯 지금까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전화를 기다렸다는 말은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오승구는 오늘에 와서야 그토록 열망하던 일이 이루어지고 보니 정말이지 어딘가를 꼬집어보고픈 심정이었다. 이경아와 만나는 약속시간은 7시였고, 장소는 광화문에 있는 ‘갤러리’라는 커피숍이었다.
오승구는 핸드폰 폴더를 닫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신문을 펼쳤으나 이경아의 아름다운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당장 그녀를 만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신문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승구는 몇 번이고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계바늘은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2시 1분을, 2시 2분을 가리켰다. 그가 벽시계를 힐끗거리며 쳐다볼 때마다 시간은 겨우 1분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1분이 한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만나려면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들뜨고 흥분된 감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오승구의 마음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데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내일 소풍가는 아이가 잠을 못 이루듯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더디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양복을 다른 것으로 갈아입고 오는 바람에 깜박 잊고 예금통장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것을 확인한 오승구는 남은 시간을 이용해 거래은행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인 서인호 대리를 찾았다. 처음부터 이경아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전해줄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것은 지난번 제안했던 문제의 해답을 알려주기 위함이리라. 분명 그녀의 대답은 엑스가 아니라 동그라미일 것이다. 엑스라면 굳이 자신을 만나자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서 대리가 자리에 없어 전화는 짜증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옮겨다니다가 한참만에 서 대리에게 전해졌다. 오승구는 서 대리에게 깜박 잊고서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다음에 한 시간 후에 직원을 보낼 테니까 백만 원짜리 수표로 열 장을 준비해 놓아줄 것을 부탁하고 나서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급한 마음에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갤러리 커피숍’에 도착한 오승구는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경아의 전화를 받고 나서 다섯 시간 동안 벌써 열다섯 개비 째 피우는 담배였다. 그러니까 계산상 담배를 20분마다 한 개비씩 피워 댄 셈이었다.
그러나 이경아는 약속시간이 되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의 약속시간이 겨우 10분을 넘겼는데도 30분을 먼저와 기다려서 그런지 오승구에게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경아는 감각무소식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시계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등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오승구는 자신이 혹시 약속장소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닌지, 아니면 그녀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지나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먼 거리였지만 오승구는 그 여자가 이경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승구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테이블 앞에 서서 늦게 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이경아의 얼굴에는 애교가 넘쳐흘렀다.
“아냐. 나도 나온 지 얼마 안 돼.”
30분이나 일찍 나와 30분을 더 기다렸다면 이경아가 무척 미안해 할까봐 오승구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잠시 더 그렇게 서 있다가 그와 마주 앉았다.
“뭘 마시겠어?”
종업원이 가지고 온 메뉴판을 펼쳐 오승구가 이경아에게 보이며 물었다.
“커피요.”
이경아는 메뉴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두 잔.”
들뜬 기분으로 오승구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담뱃갑을 손에 쥐었다.
“내가 했던 말 생각해봤어?”
오승구는 이경아가 어떤 대답을 할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저한테 그런 관심을 가졌어요? 그것도 그 날 처음 봤으면서…….”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경아는 그런 곳에서 썩기엔 너무나 아름다워. 그래서 경아를 돕고 싶은 거야.”
이경아는 오승구의 마음을 알면서도 뻔한 질문을 했고, 그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사장님의 애인이 되어주면 저한테 어떻게 해주실 건데요?”
“지금의 경아보다 열 배, 아니 백 배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오승구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위엄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미리 준비한 백만 원짜리 수표가 열 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꺼내 이경아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므로 그녀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게 뭐예요?”
오승구가 불쑥 내미는 봉투를 얼떨결에 받아들면서 이경아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경아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거야.”
“예?”
“경아는 아무 소리하지 말고 받아두면 돼.”
“…….”
그제야 오승구의 뜻을 알아챈 이경아는 대답 대신 커피잔을 들어 두 손으로 감싸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부터 오승구는 이경아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 동안 유지해오던 생활의 리듬에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와 그녀는 열일곱 살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취향이나 생각이 서로 달랐지만, 그 열일곱 살의 차이가 두 사람의 만남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경아와의 만남이 지속되면서 오승구는 아내의 모습이 조금씩 낯설게 느껴졌고, 아내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와 함께 누워 있으면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선뜻 아내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오승구는 이경아를 만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고,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같았다. 그녀와 잠시라도 헤어져서 있는 그 시간이 아쉬울 만큼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종이배 10. <달콤한 유혹>
달콤한 유혹
무슨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경아는 1년 365일을 어둠이 깔릴 즈음에 친구 두 명과 함께 기거하고 있는 원룸에서 나와 다음 날 새벽 어둠이 서서히 걷힐 때 술과 담배에 찌든 녹초가 된 몸을 끌다시피 하며 룸살롱에서 나와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이 깬 낮 동안에는 딱히 할 일 없는 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무료한 시간을 때워야 했다. 룸살롱에 나가는 그날로 즐기던 독서에 손을 뗀 그녀였다.
룸살롱을 찾는 남자들의 계층은 천차만별이었다. 그 중엔 저질스럽고 불쾌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면서 그녀들의 치마 속과 브래지어 속에 손을 집어넣는 일에만 골몰해 있는, 그녀들을 마치 노리갯감으로 여겨 마구대하는 상대조차 하기 싫은 버러지 같은 작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싫든 좋든 손님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여하튼 그들은 그녀들을 원한 대가로 그녀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들은 일종의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이경아는 전시장에 진열된 완벽한 상품처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래서 단연 남자들 눈에 돋보였고, 모두 그녀를 옆에 앉히고 싶어했고, 그녀와 섹스 하길 원했다.
1년 전, 거래처 인쇄소인 김승현 사장과 함께 저녁 식사 후 소주를 마신 탓에 거나하게 취한 오승구가 김 사장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간 곳이 무교동의 ‘별들의 고향’이라는 룸살롱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무교동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가지각색의 조명으로 휘황찬란한 야구장 전광판 크기 만한 ‘별들의 고향’이라는 룸살롱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두 사람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를 밟으며 10미터 가량 걸어가자 또 다른 유리문이 나왔다. 그 앞에 서자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리면서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웨이터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고 두 사람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시는 웨이터 있으세요?”
웨이터 중 제일 고참으로 보이는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때 웨이터들 사이를 비집고 ‘박찬호’라는 야구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가슴에 단 웨이터가 다가와 김 사장에게 인사를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박찬호!”
엄청난 단골인 듯 김 사장이 ‘박찬호’라는 웨이터에게 반가워하며 악수까지 청했다.
김 사장은 웨이터가 안내하는 룸으로 들어가면서 오승구에게 특별 접대를 한답시고 ‘별들의 고향’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는 호스티스를 불러 옆에 앉혔다. 그 호스티스가 바로 이경아였던 것이다.
이경아는 오승구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여자 중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는 눈길을 도저히 뗄 수가 없어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즐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뜻밖의 행운에 감사해 했다. 정말 그녀는 마스코트 인형처럼 언제나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경아가 오승구의 옆에 바싹 다가와 앉으면서 다리를 꼬자 그녀의 짧은치마가 올라가면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고, 가슴선이 패인 블라우스 속에서 탄력 있는 젖가슴이 숨을 쉬고 있었다.
이경아의 농염한 모습에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 오승구는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녀가 잡놈들이 다 모이는 이런 룸살롱에서 몸을 마구 굴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주가 두 병이나 동이 나고 다시 양주 한 병과 안주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런데도 오승구는 전혀 취기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이경아의 향기에 취해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유혹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그로서는 맨 정신으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다.
김 사장 역시 자신과 똑같은 감정에 빠져있다는 것을, 오승구는 술을 마시면서도 파트너의 허리가 휘어지도록 꼭 껴안고 있는 그의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아주 오래 전에 중매로 만나 결혼한 아내와 이혼하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외로운 남자였다. 결혼하기 전부터 음란비디오를 상습적으로 즐겨보던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가끔 봤는데, 어느 날 아직 결혼 전인 친구의 오피스텔에서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흘러나온 음란비디오를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디오는 어느 러브호텔에서 몰래 카메라로 촬영된 것인데, 그 비디오 속에서 남자와 뒤엉켜 섹스를 즐기는 여자의 얼굴이 다름 아닌 아내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김 사장은 설마 하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을 하다가 아내를 추궁한 결과 그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결국 아내와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김 사장은 계속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여자의 유혹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오승구는 잘 알고 있었다.
룸살롱 ‘별들의 고향’에서 나온 오승구와 김 사장은 호스티스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먼저 웨이터가 와서 객실을 예약해놓고 돌아간 상태였기 때문에 각자 호스티스를 데리고 정해진 객실로 들어가면 되었다.
먼저 샤워를 끝낸 오승구는 팬티 차림으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처음으로 총각 딱지를 떼는 청소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경아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큰 수건으로 알몸을 감싸고 욕실을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는 자신의 감정을 걷잡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몸은 솜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경아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으면서 오승구는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그녀의 입술에 가져갔다. 순간 짜릿한 쾌감을 느낀 그는 다급하게 그녀를 침대로 이끌고 갔다. 그녀의 몸에서 향긋한 비누냄새가 풍겼다.
“너, 나하고 연애할래?”
방금 이경아의 몸 위에서 내로운 오승구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경아에게 물었다.
“…….”
이경아는 오승구의 뜬금없는 소리에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담하는 거 아냐. 네가 내 애인이 되어주면 넌 이런 곳에 나오지 않아도 잘살 수 있어. 넌 이런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오승구는 자신의 제안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경아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이경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냐. 네가 내 애인만 되어준다면, 난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오승구는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의사 소통을 해보려고 손짓 발짓하듯 이경아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
그러나 이경아는 여전히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서 나중에 전화해 줘.”
오승구는 이경아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정말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절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녀가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과 십만 원짜리 수표를 여러 장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거울 달린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먼저 팬티를 입고, 러닝셔츠를 입고, 와이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맨 뒤 바지를 입고서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었다.
“꼭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 게.”
오승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경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나서 그녀 혼자 남겨 두고 먼저 객실을 나왔다.
이경아는 오승구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실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애인하자’면서 끊임없는 유혹을 던져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들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왔었다.
처음엔 그들의 달콤한 유혹에 이경아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룸살롱에 나가 여러 남자들 앞에서 인형 노릇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고민이 해결될 것이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신뢰감이 들지 않아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이경아의 마음은 오승구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열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와 바람난 아버지에게 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탓일까. 오늘밤 처음 만났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아버지 같은 다정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믿지 못할 것이 사람이 마음이었다.
이경아는 객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멀어져 가는 오승구의 희미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룸살롱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룸살롱의 영업시간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지만, 돈이 모아지는 대로 이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싶은 그녀로서는, 하루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로서는 하루하루가 급할 따름이었다.
오승구는 이경아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가능하면 조급해지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그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만 마음이 그녀를 만났던 룸살롱으로 향했다. 그녀의 그리움에 외로움을 느낄 정도로 그는 그녀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오늘 퇴근시간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가 만나러 가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승구는 이경아를 만나러 룸살롱으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룸살롱 같은 곳에서 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 만남은 그냥 거래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언제 변하게 될지 장담은 하지 못했다.
이경아에게서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식사를 한 후 사무실로 들어온 오승구는 몸을 뒤로 젖혀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식당 앞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가판대에서 사온 스포츠신문을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보던 신문을 덮고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이경아에요. 절 기억하시겠어요?”
이경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이경아?”
이경아의 전화에 오승구는 너무 기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녀의 전화였기에 채 2분도 안 되는 짧은 통화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꿈속인 듯 달콤했다. 이렇듯 지금까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전화를 기다렸다는 말은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오승구는 오늘에 와서야 그토록 열망하던 일이 이루어지고 보니 정말이지 어딘가를 꼬집어보고픈 심정이었다. 이경아와 만나는 약속시간은 7시였고, 장소는 광화문에 있는 ‘갤러리’라는 커피숍이었다.
오승구는 핸드폰 폴더를 닫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신문을 펼쳤으나 이경아의 아름다운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당장 그녀를 만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신문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승구는 몇 번이고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계바늘은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2시 1분을, 2시 2분을 가리켰다. 그가 벽시계를 힐끗거리며 쳐다볼 때마다 시간은 겨우 1분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1분이 한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만나려면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들뜨고 흥분된 감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오승구의 마음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데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내일 소풍가는 아이가 잠을 못 이루듯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더디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양복을 다른 것으로 갈아입고 오는 바람에 깜박 잊고 예금통장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것을 확인한 오승구는 남은 시간을 이용해 거래은행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인 서인호 대리를 찾았다. 처음부터 이경아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전해줄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것은 지난번 제안했던 문제의 해답을 알려주기 위함이리라. 분명 그녀의 대답은 엑스가 아니라 동그라미일 것이다. 엑스라면 굳이 자신을 만나자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서 대리가 자리에 없어 전화는 짜증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옮겨다니다가 한참만에 서 대리에게 전해졌다. 오승구는 서 대리에게 깜박 잊고서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다음에 한 시간 후에 직원을 보낼 테니까 백만 원짜리 수표로 열 장을 준비해 놓아줄 것을 부탁하고 나서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급한 마음에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갤러리 커피숍’에 도착한 오승구는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경아의 전화를 받고 나서 다섯 시간 동안 벌써 열다섯 개비 째 피우는 담배였다. 그러니까 계산상 담배를 20분마다 한 개비씩 피워 댄 셈이었다.
그러나 이경아는 약속시간이 되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의 약속시간이 겨우 10분을 넘겼는데도 30분을 먼저와 기다려서 그런지 오승구에게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경아는 감각무소식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시계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등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오승구는 자신이 혹시 약속장소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닌지, 아니면 그녀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지나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먼 거리였지만 오승구는 그 여자가 이경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승구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테이블 앞에 서서 늦게 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이경아의 얼굴에는 애교가 넘쳐흘렀다.
“아냐. 나도 나온 지 얼마 안 돼.”
30분이나 일찍 나와 30분을 더 기다렸다면 이경아가 무척 미안해 할까봐 오승구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잠시 더 그렇게 서 있다가 그와 마주 앉았다.
“뭘 마시겠어?”
종업원이 가지고 온 메뉴판을 펼쳐 오승구가 이경아에게 보이며 물었다.
“커피요.”
이경아는 메뉴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두 잔.”
들뜬 기분으로 오승구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담뱃갑을 손에 쥐었다.
“내가 했던 말 생각해봤어?”
오승구는 이경아가 어떤 대답을 할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저한테 그런 관심을 가졌어요? 그것도 그 날 처음 봤으면서…….”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경아는 그런 곳에서 썩기엔 너무나 아름다워. 그래서 경아를 돕고 싶은 거야.”
이경아는 오승구의 마음을 알면서도 뻔한 질문을 했고, 그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사장님의 애인이 되어주면 저한테 어떻게 해주실 건데요?”
“지금의 경아보다 열 배, 아니 백 배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오승구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위엄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미리 준비한 백만 원짜리 수표가 열 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꺼내 이경아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므로 그녀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게 뭐예요?”
오승구가 불쑥 내미는 봉투를 얼떨결에 받아들면서 이경아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경아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거야.”
“예?”
“경아는 아무 소리하지 말고 받아두면 돼.”
“…….”
그제야 오승구의 뜻을 알아챈 이경아는 대답 대신 커피잔을 들어 두 손으로 감싸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부터 오승구는 이경아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 동안 유지해오던 생활의 리듬에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와 그녀는 열일곱 살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취향이나 생각이 서로 달랐지만, 그 열일곱 살의 차이가 두 사람의 만남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경아와의 만남이 지속되면서 오승구는 아내의 모습이 조금씩 낯설게 느껴졌고, 아내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와 함께 누워 있으면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선뜻 아내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오승구는 이경아를 만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고,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같았다. 그녀와 잠시라도 헤어져서 있는 그 시간이 아쉬울 만큼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