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홍 Story +6

수레국화200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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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용은 민경에게로 갔다. 영자신문을 읽는라 책상 가득 신문을 펼쳐놓고 보고 있었다.

“오늘 은수 형이 저녁때 술한잔 하자는데. 같이 갈거지?”

“저야 괜찮지만 다홍이가 가려고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호야네서 바로 만날까? 너희는 거기 밥먹으러 가고 우리는 뒤에 가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면 되잖아. 어때?”

“선배 생각보다 잔머리 잘 굴리는걸. 다홍이랑 은수선배 화해해야하는데..”

6시부터 와서 밥먹으러 가자는 다홍에게 민경은 하던거 마저 하고 간다고  7시로 미뤘다. 배가 많이 고픈지 다홍은 몇 번이나 와서 민경에게 다 했는지 물어보고 돌아갔다. 7시 10분전이다. 다홍이 또 와서 얼마나 남았나 묻기에 민경도 시간이 되었다 싶어 다홍과 함께 밥먹으러 나왔다.

“뭐 먹을래? 저녁에는 밥먹고 싶은데.”

“난 오늘 호야네 알탕이랑 밥먹으면 좋겠다. 어때?”

“술마시는 사람들 많을텐데 우리가 밥먹을라구 자리 차지하고 있어도 될지 모르겠다. 일단 가보자.”

다홍은 아무것도 모른 채 민경을 따라왔다. 빈 테이블이 몇 개 없었다. 주문하고 티비를 보고 있는데 준용이 들어왔다. 뒤이어 은수와 보라도 들어왔다. 은수는 아주 잠깐이지만 보라를 보는 다홍의 눈에서 불이 번뜩였다고 생각했다.

“아니어도 너희 찾으러 가니까 벌써 나가고 없던데 여기 와 있었구나. 뭐 시켰어?”

“알탕. 선배네도 식사하세요.”

“은수형, 우리도 알탕시킬까? 날도 쌀쌀하니 따뜻한게 먹고 싶네. 오늘 비온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날씨가 영 꾸물하네. 보라도 알탕 괜찮지?”

준용은 오버스럽게 우연한 만남인척 연기를 했다. 그렇지만 다홍은 티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민경도 보라의 출현이 반갑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동아리 후배이니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껏 은수와 다홍을 화해시키려고 만든 자리에 보라의 출현은 눈 내린데 서리까지 더한 꼴이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선배님들 술집에 왔는데 술은 안시키세요?”

보라는 은수 옆에 붙어 앉아서는 또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은수형이 오늘 쏘는거죠? 그럼 소주에다가 안주는 닭발로 시키지뭐.”

그래도 다홍은 반응이 없다.

“다홍이랑 저는 공부해야 하는데 저희는 그럼 한잔씩만 할게요.”

민경도 분위기를 띄울려고 못하는 소주를 받았다. 준용은 다홍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가득 채워서 다홍에게 내밀었다. 민경은 다홍이 그 술을 거절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홍은 넙죽 잔을 받더니 한번에 마셔버렸다. 준용이 다시 다홍의 잔을 채우자 보라의 선창으로 건배를 외치고 다들 깔끔하게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민경이 소주병을 들고 잔마다 가득 채웠다.

“오늘 속도 넘 빠른거 아냐? 술 모자란다. 아껴마셔라.”

그러면서도 준용은 건배를 하고 다시 빈 잔들을 채웠다. 그렇게 알탕이 나오기도 전에 소주 2병을 마시고는 알탕이 나오자 또 건배를 외쳤다.

“이다홍, 오늘 뭐 술고픈 날이었냐? 자식.. 진작 말을 하지.”

“그러게요. 다홍언니 술 넘 잘하세요. 언니 저랑도 한잔해요.”

보라는 다홍과 둘이 마주할때와는 달리 애교스럽게 다홍에게 건배하자고 잔을 내밀었다.

다홍은 말없이 보라와 건배를 하고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마치 대결이라도 하듯 또 보라와 자신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언니, 또 한잔 해요. 전 언니가 너무 부러워요. 영어도 그렇게 잘하고.. 오늘보니 언니 넘 이쁜거 있죠.”

그럼 뭐 평소에는 영 아니었단 말인가. 다홍은 보라가 콧소리만 좀 자제한다면 그런대로 귀여운 후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콧소리는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너 원래 말투가 그래?”

“네? 제가 뭐요?”

“원래, 언니~잉~, 선배니~임. 이렇게 말하냐고.”

“아 그거요? 제가 집에서도 막내라서 좀 그래요. 싫으세요?”

“싫긴. 귀엽기만 하구만. 다홍이 너도 좀 소질이 있다. 다시 해봐.”

다홍이 말하기도 전에 준용이 먼저 보라를 감싸주었다. 

“은수선배님, 선배님도 제 말투가 싫으세요?”

보라는 갑자기 화살을 은수에게 날렸다.

“귀여운데. 원래 막내들은 애교가 많잖아.”

“그렇죠? 저만 그런거 아니죠?”

보라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은수에게 몸을 기댔다. 은수는 보라가 가슴까지 밀착시키며 팔에 달라붙어서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다.

“오늘 선배가 사는거죠? 그럼 칠면조훈제 시켜주세요.”

다홍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그동안 아무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은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은수는 다홍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이야기했다는 걸 안다. 준용은 다홍의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해서인지 신나서 종업원을 불렀다.

“이모, 여기 칠면조훈제 하나요. 소주도 한병 더 주시구요.”

칠면조가 나오자 다홍은 시켜달라고 해놓고는 먹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은수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뼈를 발라서 먹기 좋게 접시에 놓았더니 그제야 다홍은 젓가락을 들고는 소스를 듬뿍 찍어서 먹었다. 그걸 보라가 그냥 보아 넘길리 없었다.

“은수선배님, 이거 하나 드세요. 자, 아- 해보세요.”

보라는 소스에 찍은 칠면조를 집어서는 은수 입 앞에 대고는 먹여주려고 했다.

준용과 민경은 당황스러워서 마주보다가 준용이 수습에 나섰다.

“어이, 이런 닭살스런 행위를 우리 앞에서 하다니.. 은수 형은 뭐 손이 없나, 형, 직접 집어드슈”

“어머어머, 선배님도 참.. 제가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건데요. 선배님, 자, 아- ”

“고마워. 내가 먹을게.”

은수는 보라 손에서 칠면조를 받아서 직접 먹었다. 다홍의 질투를 자극하기 위해 보라가 일부러 그런 것이란 걸 알기 때문에 그 장단을 맞출 수는 없었다.

“선배님들 우리 술도 웬만큼 마셨는데 노래방가요.”

“우리는 노래 부르는 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형, 가실거예요?”

“오랜만에 노래방 가보지뭐. 나가자. 오늘 풀코스로 쏠게.”

준용과 민경은 다홍이 집에 간다고 할까봐 양 옆에서 팔짱을 꼈다.

“이러지 않아도 돼. 나도 노래방 좋아해. 걱정말고 앞서들 가시오.”

준용과 민경은 무안해서 둘이서 팔짱을 끼고 먼저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보라는 처음부터 신나는 댄스곡으로 시작했다. 가수 못지 않은 노래 실력이었다. 준용은 음치지만 구성지게 트로트를 불렀다.  은수에게로 넘어가려던 마이크를 빼앗아서 보라는 다홍에게 넘겼다.

“언니 이소라의 ‘프로포즈’ 잘하신다면서요? 그거 해주세요. 제가 예약해놨어요.”

예전에 동아리 엠티 가서 한 번 불렀던 것이 소문이 났나보다. 다홍은 마이크를 받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은수는 다홍의 노래부르는 모습을 처음 봐서 잔득 기대하고 응시했다.

전주가 나오는 동안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다홍은 노래가 시작되자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에어로빅 동작과 함께 노래를 열창했다. 예전에 어느 코미디 프로에선가 본 것을 따라했는데 어느새 다홍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노래다.

“원투쓰리포~ 말할거예요 이제 우리 결혼해요..............그대에게 나 반한 것 같아. 말한 뒤에라도 후회하진 않을께요오~헛둘 헛둘..”

다들 웃느라 소파에 쓰러졌지만 다홍은 끝까지 꿋꿋하게 에어로빅을 하며 노래를 완수했다.

은수는 그동안의 과묵한 이미지를 너무나 깨는 다홍의 열창에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언니 우리 다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언니 노래가 워낙 유명해서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이제 소원이 없겠어요”

어느새 다홍도 보라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코러스를 넣어주기도 했다. 한창 뛰며 노래부르다가  잠시 쉬느라 다들 소파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은수는 틈을 이용해 분위기있는 노래 부른다며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를 선곡했다. 물론 은수가 원하는 그대는 다홍이겠지만, 보라는 다시 심술쟁이로 돌아가 은수 옆에 붙어서서  은수의 노래가 끝나자 그의 손을 잡았다.

“선배님, 노래 너무 잘 하세요. 신청곡도 받아주시나요?”

보라의 과장된 칭찬에 은수는 머쓱했지만 다시 보라가 윤도현의 ‘사랑했나봐’를 선곡해서 시작버튼을 눌렀으므로 자리에 앉을 사이도 없이 노랠 불러야했다. 소파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던 다홍이 갑자기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은수의 솔로가 듀엣이 되었다.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후회하나봐 널 기다리나봐 또 나도 몰래 가슴 설레여와 저기 널 닮은 뒷모습에......”

그제야 노래를 부르며 다홍은 은수의 눈과 마주보았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은수는 행복감에 더더욱 열창해서 노래를 불렀다.

“오~ 둘이 목소리 너무 잘 어울린다. 신청곡 하나 더 해도 돼?”

민경이 노래를 선곡하려고 하자 다홍은 화장실 간다며 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마이크를 잡고 은수와 다정하게 노래부른 것이 부끄러워서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화장실은 노래방에서 한층 내려가야 있었다. 술이 조금 되었는지 다홍은 그만 화장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목을 삐끗했다. 오랜만에 뾰족구두를 신은 탓도 있겠지만 부끄러움에 서둘러 내려가서 실수를 했나보다. 접지른 발목은 점점 더 아파왔다. 보라가 노래 부르며 빨리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분위기나 맞춰 주려고 나가는데 그만 소파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은수가 다홍에게로 달려가자 다홍은 이미 퉁퉁 부어있는 발목을 잡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아까 화장실가다가 접질렀어요. 괜찮아질거예요.”

“이리 내봐. 발목이 퉁퉁 부었네. 지금은 침도 못맞겠고....일단 얼음 찜질부터 하자.”

은수는 나가더니 얼음을 한 봉지 얻어왔다. 다홍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목을 만지는 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는 마치 자기 몸이 아픈 사람 모양 인상을 쓰며 차가운 얼음 봉지를 맨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문지르고 있다.

“괜찮아질거예요. 그만해요, 선배.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다들 못 놀잖아요.”

“지금 노는게 문제냐?”

“그래 다홍아, 너 발목다쳤는데 우리가 무슨 노래방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너 여기 두고 노래부를 수 있겠냐? 은수선배, 좀 어때요? 많이 삔 것 같아요?”

민경도 은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일단 부기가 좀 가라앉아야 침을 맞을텐데... 걸을 수 있겠어?”

다홍은 일어나 보았다. 한 다리를 옮기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이를 악물고 걸으려는데 은수가 업겠다고 등을 내밀었다.

“발목삔데는 움직이는거 보다 더 나쁜게 없어. 일단 업혀. 택시타는데까지만 업고 가자.”

다홍은 하필 치마를 입고 와서 더더욱 업힐 수 없었다.

“치마입었단 말이예요.”

다홍이 소파를 꽉 잡고 앉아서 울상을 지었다. 은수는 미처 그런 것을 생각못한 자신이 미련스러웠다. 얼른 셔츠를 벗어 민경에게 주었다.

“다홍이 업으면 이걸로 뒤 좀 덮어줘.”

그제서야 다홍은 얇은 티쳐츠 하나 입고 있는 은수의 등에 업혔다. 민경은 셔츠로 그대로 드러난 다홍의 다리를 가렸다. 택시에 다홍을 앉히고 은수도 옆에 탔다.

“내가 데려다 주고 갈테니까 준용이 니가 저 녀석들 잘 데려다 주고. 알았지?”

“걱정마요, 형.”

집까지 가는 내내 둘 다 말이 없다. 노래방에서 조금 어색한 관계가 회복되려나 했는데 어처구니없이 다홍이 다치는 바람에 다시 어색함이 감돌았다. 은수는 한 번 와 본 경험이 있어서 택시기사에게 다홍의 집을 상세히 설명해가며 대문앞까지 데려왔다. 다홍을 조심스럽게 택시에서 내려주고는 택시비를 계산했다.

“뭐해? 문 안열어?”

다홍은 열쇠를 꽂으려다 생각하니 시간도 너무 늦었고, 아침에 민경과 화장한다고 난리내고는 치우지도 않고 갔던 것이 떠올랐다.

“선배,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제 여기서 돌아가세요. 시간도 너무 늦었는데.”

“부기빠지면 침 좀 맞아야돼. 왜? 동네 사람들 눈에 띌까봐?”

“꼭 그런게 아니라 ...... 청소도 안했고, 솔직히 사람들 눈도 신경쓰이고..얼굴 다 아니까..”

은수는 다홍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너희들 또래의 불장난할 나이도 아니고, 지금은 의사로서 너를 보살펴 주러 온거야. 어서 문이나 열어. 그렇게 계속 그 다리로 서 있으면 깁스해야할지도 몰라.”

다홍은 깁스해야 한다는 말에 얼른 문을 열었다. 일단 발에 걸리는 것부터 대강 주워들고는 은수를 소파로 안내했다.

“부기 좀 빠졌는지 보자. 아까  뼈가 어긋난 건 바로 맞춰뒀는데 아직 부기는 좀 남았다. 30분만 더 기다려보자.”

“30분이나요?”

“그 정도 되면 부기 다 빠질 것 같은데. 일단 반바지 같은 걸로 갈아입고 와바. 그런 치마입고는 아무래도 침 맞기는 불편할거야.”

다홍이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오니 은수는 욕실에서 찬물을 한 대야 가져다 놓았다.

“소파위에 앉아봐”

다홍이 소파 위에 앉자, 은수는 다홍의 발목에다 계속 찬물을 끼얹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가 은수는 침통을 꺼내 다홍의 발목을 깨끗이 닦은 다음 침을 찔러 피를 뽑았다.

거품이 있는 뭉쳐있는 피가 나왔다.

“이걸 어혈이라고 하는데 죽은피라고 보면 돼. 집에 압박 붕대있지?”

다홍은 붕대가 안방 화장대 안 구급함에 있는 것을 기억해냈다. 엄마는 소화제에서부터 파스까지 상비약을 두루 갖춰놓고 언제라도 식구들이 아프다고 하면 마치 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알아서 처방을 해주곤 했다.  

“집에 없는 약이 없네. 어머니께서 꼼꼼한 성격이신가봐?”

은수는 붕대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스스로 의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붕대 감으면 끝나는거죠?”

“아니, 침 좀 맞고 붕대 감아야 돼. 졸리면 자.”

술기운이 남아 있었던지 침을 꽂아서 누워있으려니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왔다. 다홍이 잠든 사이 은수는 조심스레 침을 빼고 붕대를 꽉 감았다.

이불을 가지러 다홍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면에는 다홍의 어린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사진까지 사진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중 제일 큰 액자에는 교복을 입은 앳된 단발머리 소녀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책꽂이에는 여러 종의 선인장 화분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책상머리엔 초등학생처럼 원을 그려 색연필로 칠한 하루일과표가 붙어있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매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도 은수는 자신이 처음 다홍을 봤을 때 수줍어하던 여린 소녀의 모습이 진정한  다홍의 모습일 것 같아 싱긋 웃었다. 은수는 침대에 있는 이불을 가져다 다홍에게 덮어주고는 자신도 소파 밑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