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구의 운전기사인 차승현은 최성희로부터 호출을 받고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생전 한 번도 없었던 그녀의 호출이라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이라도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원치 않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게 없었다.
“미안해요. 바쁘신 데 집에까지 오시라고 해서.”
차 기사를 맞이하는 최성희의 입에서 약간의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얼굴에 어둡게 드리워진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그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본 그는 그녀에게 무슨 심각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아닙니다.”
차 기사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최성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오래 전에 사업하는 친구의 빚 보증을 섰다가 식구 모두가 거리에 나 앉을 뻔했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모면했던 그는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굳게 다짐했다. 그녀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결코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차 기사가 거실의 소파에 앉자 최성희는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커피를 내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녀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커피를 내오는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는 줄곧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 사람이 지금 바람을 피우는 거 알고 계시죠?”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최성희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커피잔을 유리로 된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저는…….”
최성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차 기사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차 기사님은 모르시는 일인가요?”
“글쎄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만…….”
최성희의 물음에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쥔 채 소파에 앉은 차 기사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오승구가 어떤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었다. 확실한 물증이 없기에 그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차 기사님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믿고 물어보는 거예요.”
최성희는 차 기사가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아 실망감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사장님께서 늦게 퇴근하시거나, 어디 들렸다가 퇴근하실 때에는 제가 한 번도 모셔 드린 적이 없어서…….”
“아, 그랬군요. 그러면 모를 수도 있겠군요.”
차 기사가 알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최성희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제가 차 기사님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최성희는 잠시 무거운 시선으로 차 기사를 응시하다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
차 기사는 대답 대신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최성희와 엇갈리듯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야단 맞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굳어지 얼굴이었다.
“그 사람을 미행해서……. 수고스럽지만, 그 사람이 그 여자와 만나면 저한테 바로 연락을 해주실 수 있겠어요?”
최성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빈 다음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사모님.”
차 기사는 분노와 절망으로 구겨져 있는 최성희의 얼굴이 그렇게 안타까워 보일 수가 없었다. 자기의 일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창피한 일이고 해서 제가 특별히 차 기사님을 믿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 남들에게 알려져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면 그건 자존심이 강한 최성희에게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예, 사모님. 잘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모님을 돕겠습니다.”
차 기사는 만일 최성희가 직접 살인을 하라고 명령을 한다면 아무런 주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굳은 표정으로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최성희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편지봉투를 들고 나와 차 기사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 일을 하시려면 돈이 필요하실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 정도는 저에게도 있습니다.”
차 기사는 최성희의 뜻밖의 호의에 적이 당황하며 거절했다.
“받아 두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차 기사가 돌아가고 나서도 최성희는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차 기사가 월등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잘 해낼 것으로 믿었으며,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를 믿고 상의해야 할지 한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늘 눈가에 잔주름을 지으며 웃는 얼굴이던 최성희의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여느 때처럼 오승구의 귀가를 맞이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용광로처럼 뜨겁게 부글거리는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따라 어두운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어 주고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서 돌아선 최성희의 태도에 당혹스러워 한 오승구가 죄지은 사람처럼 엉거주춤 서서 물었다.
“…….”
그러나 최성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저녁식사를 했느냐고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오승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다.
오승구는 최성희의 시선을 피하면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자신과 연관된 일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거야?”
오승구는 제발 자신과 연관된 일이 아니길 빌면서, 아닐 거라고 믿으면서 아무 말 없이 소파에 가 앉는 최성희에게 물었다.
“…….”
마찬가지였다. 최성희는 오승구를 거들떠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텔레비전만 응시하고 있었지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전에 한 번 방영되었던 호주 출신의 피터 위어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가 재방영되고 있었다.
최성희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오승구는 차라리 지금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일 것 같다는 생각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승구가 양복을 벗어 옷장에 걸고 샤워를 하기 위해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 들고 나왔을 때에도 최성희는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뒤가 구린 구석이 있는 그는 무턱대고 화를 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승구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아주 야한 사진을 본 것처럼 갑자기 아랫도리 물건이 주체 못할 정도로 꿈틀거렸다,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최성희와 섹스를 한지가 꽤 오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변강쇠가 아닌 이상 이경아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와의 섹스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만이 쌓인 것일까? 오승구는 고개를 숙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아랫도리 물건에 비누칠을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천만다행인데……. 아마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오승구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오승구가 샤워를 끝내고 욕실을 나왔을 때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최성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의 불은 켜져 있었으나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오승구는 거실의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최성희는 불을 끈 채 모로 누워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자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함을 가장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오승구는 마음먹은 대로 최성희와 섹스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잠을 자거나 그를 거부해서가 아니었다. 샤워를 하는 동안 내내 꿈틀거리던 아랫도리 물건이 그녀의 옆에 눕자마자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지더니 끝내 일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장성우에게 다가오는 강민지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장성우 맞은 편 의자에 앉자마자 강민지는 갖고 있던 편지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그것을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그 쪽으로 밀었다. 삼천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있는 봉투였다. 그때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종업원이 엽차를 내려놓으면서 손님을 기분 좋게 하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커피로 두 잔 주세요.”
장성우는 테이블 위의 봉투를 집으면서 강민지에게 묻지도 않고, 메뉴판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
일방적으로 장성우가 커피를 주문하자 종업원이 그의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는지 무언의 확인을 하는 듯 강민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도 커피로 주세요.”
종업원의 눈치를 알아차린 강민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궁을 하자 그때서야 종업원이 몸을 돌려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남녀 평등주의의 선봉자일 것 같은 종업원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장성우는 그녀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매우 감동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연극을 좀더 리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마워.”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강민지는 자신이 감쪽같이 속고 있는 줄 모르고 장성우를 도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연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인간이기에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금방 갚을 게.”
사실 필요 없는 돈이었지만, 장성우는 가장 교활한 사기꾼처럼 거짓말을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갚지 않아도 돼.”
강민지의 마음은 진실이었다. 돈을 받기 위해 빌려주는 게 아니고, 그녀는 장성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자부심에 마음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잔인할 정도로 그의 연극은 완벽에 가까웠다.
돈을 빌려주면서 갚지 않아도 된다는 강민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성우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기분 나빠하는 장성우의 표정에 당황한 강민지가 물었다.
“뭐라고? 나보고 민지 씨 돈을 떼어먹으라고?”
장성우는 짐짓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보고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그 말이지 무슨 말이야?”
“알았어. 그러면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
장성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오히려 그런 그가 믿음직스러워 행복하기까지 한 강민지는 애정이 넘치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같은 행복의 뒤에 배신이 숨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차 기사한테 전화가 왔다. 최성희는 거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이 8시를 넘게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사장님이 그 여자를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차 기사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그곳이 어디죠?”
최성희는 오늘따라 오승구에게서 무슨 일 때문에 늦는다는 연락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내며 물었다.
“무교동에 있는 밀레니엄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지금 사장님과 그 여자가 식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 그래요.”
최성희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서 그 두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파듯 솟구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윗니로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지금 바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일찍 차 기사로부터 연락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최성희는 외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승구가 반쯤 넋을 빼앗길 정도로 홀딱 빠진 여자라면 그냥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는 아닐 것이다. 그 여자 앞에 화장도 하지 않은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 미친 듯 울부짖으며 머리끄덩이를 틀어잡고 싸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짐작대로라면, 최성희가 아무리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두 사람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다음 행동을 하기 위해 호텔에 가 있을 게 뻔했다.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고 해도 두 사람이 벌거벗고 뒹구는 장면을 두 눈 똑바로 뜨고서 목격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
최성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성희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고 있자 차 기사는 조급한 마음으로 되물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나가지 않을 게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최성희의 목소리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힘드시더라도 그 여자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아봐 주세요.”
“예. 곧 알아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수고는 무슨…….”
차 기사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최성희는 한동안 소파 끝에 걸터앉아서 팔꿈치를 무릎에 짚고 두 손바닥에다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오승구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지금 어디야?’ ‘중요한 일로 사람을 만나는 중이니까 좀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배터리를 빼놨는지 신호음은 가는데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실을 서성거리던 최성희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고 전화를 걸려다가 수화기를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끔찍한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해 너무 놀라 몸서리를 쳤다. 오승구를 죽이고 싶다는, 그것도 토막을 내어 죽이고 싶다는…….
이경아는 여느 때보다 일찍 문을 닫기 위해 레코드 가게 안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오승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가게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풍부한 몸 전체에 부잣집 마나님의 티가 철철 넘쳐흐르는 여자였다.
“어서 오세요.”
이경아가 손님들이 여기 저기 흐트러뜨리고 간 CD들을 제자리에 꽂으면서 상냥하게 여자를 맞이했다. 그러나 여자는 진열대의 CD보다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같은 여자가 보아도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빛나는 보석처럼 대단히 아름다웠다. 여자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경아 씨인가요?”
벌써부터 이경아를 알고 있었는지 여자가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는 듯 묻고서 입술을 단단하게 모았다.
“예. 그런데……?”
이경아는 서릿발같은 여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얼굴에 와서 꽂히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면서 손에 들려 있는 CD가 약하게 떨었다. 그녀는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나, 오승구 씨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여자는 바로 최성희였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순간 이경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조명이 꺼진 것처럼 얼굴이 어둡게 굳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처럼 뒷걸음질치며 손에 든 CD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우리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저기에 앉아서 얘기 좀 할까요?”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다는 사실에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경아에게 최성희가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고 나서 먼저 소파에 가 앉았다.
“이리 와서 앉아요.”
동지섣달 그믐날에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온몸을 떨며 서 있어야 할지, 앉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경아가 계속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자 최성희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노에 가득 찬 최성희의 얼굴에는 이경아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경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몸을 버팅기고 있던 다리의 힘이 빠져나가 버린 듯 눈에 보일 정도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최성희의 맞은 편 소파에 가서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지금 몇 살이에요?”
최성희는 계속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고 중지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스물여덟입니다.”
취조실에 끌려와 형사에게 심문을 당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서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는 이경아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스물여덟이라……, 좋은 나이에요.”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년 저년 욕설을 퍼부으며 통속적인 난장판을 벌이고 싶지 않아 격앙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눈을 감고 중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최성희가 이윽고 눈을 뜨면서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이경아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술을 뗄 수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입이 열 개라도 최성희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녀는 절벽 끄트머리까지 바짝 내몰린 참담한 심정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떨군 채 떨리는 무릎을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이윽고 최성희가 무엇인가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얼굴을 이경아 앞으로 가까이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처음엔 두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아이들을 위해 마음이 바뀌었어요.”
정말 마음이 바뀌었는지 최성희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분노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차분하게 변해 있었지만, 무거운 표정만큼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
감히 누구 앞이라고, 떨리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움켜쥔 채 앉아 있는 이경아는 여전히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최성희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아가씨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싶어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과 헤어져요. 그럴 수 있겠죠?”
최성희는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물었다.
“…….”
처음으로 고개를 든 이경아는 눈을 어디에도 고정시키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최성희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아가씨를 믿고 가겠어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하고 나서 최성희는 핸드백에서 미리 준비해 온 수표가 든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를 이경아의 몸 쪽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베푸는 최대의 배려였다.
“…….”
이경아는 레코드 가게문을 밀치고 나가는 최성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최성희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보처럼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은 초점 없는 눈빛에 반쯤 열린 입을 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허겁지겁 레코드 가게문을 닫은 이경아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의 걸음걸이로 주차장으로 가 빨간 승용차 앞에 섰다. 지난번 스물여덟 번째 생일날에 오승구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전진 기어를 넣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뿜고는 액셀러레이터를 천천히 밟고 차를 출발시키는 이경아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아무도 찾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고통과 슬픔을 가슴에 묻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원룸에 돌아온 이경아는 소파에 앉아 여러 번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 원룸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끝났어도 이미 오래 전에 끝났어야 마땅한 일이 드디어 찾아 왔고, 다만 미처 이별을 준비도 하기 전에 갑자기 찾아 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오승구와의 관계가 한계 시점이라면 이경아는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오승구는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진실하게 대해 주었고,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가 어릴 적 아버지와 무척이나 닮은 느낌을 준다는 것도 이경아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겐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그와의 만남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그녀는 뼛속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 동안 그와의 만남은 예견된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게 된 것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경아의 두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고, 곧 그녀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승구와의 관계를 최성희에게 들켰다는 억울함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종이배 18. <예견된 이별>
예견된 이별
오승구의 운전기사인 차승현은 최성희로부터 호출을 받고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생전 한 번도 없었던 그녀의 호출이라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이라도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원치 않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게 없었다.
“미안해요. 바쁘신 데 집에까지 오시라고 해서.”
차 기사를 맞이하는 최성희의 입에서 약간의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얼굴에 어둡게 드리워진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그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본 그는 그녀에게 무슨 심각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아닙니다.”
차 기사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최성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오래 전에 사업하는 친구의 빚 보증을 섰다가 식구 모두가 거리에 나 앉을 뻔했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모면했던 그는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굳게 다짐했다. 그녀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결코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차 기사가 거실의 소파에 앉자 최성희는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커피를 내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녀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커피를 내오는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는 줄곧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 사람이 지금 바람을 피우는 거 알고 계시죠?”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최성희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커피잔을 유리로 된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저는…….”
최성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차 기사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차 기사님은 모르시는 일인가요?”
“글쎄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만…….”
최성희의 물음에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쥔 채 소파에 앉은 차 기사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오승구가 어떤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었다. 확실한 물증이 없기에 그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차 기사님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믿고 물어보는 거예요.”
최성희는 차 기사가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아 실망감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사장님께서 늦게 퇴근하시거나, 어디 들렸다가 퇴근하실 때에는 제가 한 번도 모셔 드린 적이 없어서…….”
“아, 그랬군요. 그러면 모를 수도 있겠군요.”
차 기사가 알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최성희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제가 차 기사님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최성희는 잠시 무거운 시선으로 차 기사를 응시하다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
차 기사는 대답 대신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최성희와 엇갈리듯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야단 맞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굳어지 얼굴이었다.
“그 사람을 미행해서……. 수고스럽지만, 그 사람이 그 여자와 만나면 저한테 바로 연락을 해주실 수 있겠어요?”
최성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빈 다음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사모님.”
차 기사는 분노와 절망으로 구겨져 있는 최성희의 얼굴이 그렇게 안타까워 보일 수가 없었다. 자기의 일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창피한 일이고 해서 제가 특별히 차 기사님을 믿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 남들에게 알려져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면 그건 자존심이 강한 최성희에게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예, 사모님. 잘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모님을 돕겠습니다.”
차 기사는 만일 최성희가 직접 살인을 하라고 명령을 한다면 아무런 주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굳은 표정으로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최성희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편지봉투를 들고 나와 차 기사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 일을 하시려면 돈이 필요하실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 정도는 저에게도 있습니다.”
차 기사는 최성희의 뜻밖의 호의에 적이 당황하며 거절했다.
“받아 두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차 기사가 돌아가고 나서도 최성희는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차 기사가 월등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잘 해낼 것으로 믿었으며,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를 믿고 상의해야 할지 한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늘 눈가에 잔주름을 지으며 웃는 얼굴이던 최성희의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여느 때처럼 오승구의 귀가를 맞이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용광로처럼 뜨겁게 부글거리는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따라 어두운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어 주고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서 돌아선 최성희의 태도에 당혹스러워 한 오승구가 죄지은 사람처럼 엉거주춤 서서 물었다.
“…….”
그러나 최성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저녁식사를 했느냐고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오승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다.
오승구는 최성희의 시선을 피하면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자신과 연관된 일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거야?”
오승구는 제발 자신과 연관된 일이 아니길 빌면서, 아닐 거라고 믿으면서 아무 말 없이 소파에 가 앉는 최성희에게 물었다.
“…….”
마찬가지였다. 최성희는 오승구를 거들떠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텔레비전만 응시하고 있었지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전에 한 번 방영되었던 호주 출신의 피터 위어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가 재방영되고 있었다.
최성희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오승구는 차라리 지금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일 것 같다는 생각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승구가 양복을 벗어 옷장에 걸고 샤워를 하기 위해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 들고 나왔을 때에도 최성희는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뒤가 구린 구석이 있는 그는 무턱대고 화를 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승구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아주 야한 사진을 본 것처럼 갑자기 아랫도리 물건이 주체 못할 정도로 꿈틀거렸다,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최성희와 섹스를 한지가 꽤 오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변강쇠가 아닌 이상 이경아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와의 섹스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만이 쌓인 것일까? 오승구는 고개를 숙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아랫도리 물건에 비누칠을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천만다행인데……. 아마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오승구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오승구가 샤워를 끝내고 욕실을 나왔을 때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최성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의 불은 켜져 있었으나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오승구는 거실의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최성희는 불을 끈 채 모로 누워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자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함을 가장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오승구는 마음먹은 대로 최성희와 섹스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잠을 자거나 그를 거부해서가 아니었다. 샤워를 하는 동안 내내 꿈틀거리던 아랫도리 물건이 그녀의 옆에 눕자마자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지더니 끝내 일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장성우에게 다가오는 강민지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장성우 맞은 편 의자에 앉자마자 강민지는 갖고 있던 편지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그것을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그 쪽으로 밀었다. 삼천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있는 봉투였다. 그때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종업원이 엽차를 내려놓으면서 손님을 기분 좋게 하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커피로 두 잔 주세요.”
장성우는 테이블 위의 봉투를 집으면서 강민지에게 묻지도 않고, 메뉴판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
일방적으로 장성우가 커피를 주문하자 종업원이 그의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는지 무언의 확인을 하는 듯 강민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도 커피로 주세요.”
종업원의 눈치를 알아차린 강민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궁을 하자 그때서야 종업원이 몸을 돌려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남녀 평등주의의 선봉자일 것 같은 종업원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장성우는 그녀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매우 감동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연극을 좀더 리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마워.”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강민지는 자신이 감쪽같이 속고 있는 줄 모르고 장성우를 도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연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인간이기에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금방 갚을 게.”
사실 필요 없는 돈이었지만, 장성우는 가장 교활한 사기꾼처럼 거짓말을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갚지 않아도 돼.”
강민지의 마음은 진실이었다. 돈을 받기 위해 빌려주는 게 아니고, 그녀는 장성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자부심에 마음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잔인할 정도로 그의 연극은 완벽에 가까웠다.
돈을 빌려주면서 갚지 않아도 된다는 강민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성우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기분 나빠하는 장성우의 표정에 당황한 강민지가 물었다.
“뭐라고? 나보고 민지 씨 돈을 떼어먹으라고?”
장성우는 짐짓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보고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그 말이지 무슨 말이야?”
“알았어. 그러면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
장성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오히려 그런 그가 믿음직스러워 행복하기까지 한 강민지는 애정이 넘치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같은 행복의 뒤에 배신이 숨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차 기사한테 전화가 왔다. 최성희는 거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이 8시를 넘게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사장님이 그 여자를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차 기사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그곳이 어디죠?”
최성희는 오늘따라 오승구에게서 무슨 일 때문에 늦는다는 연락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내며 물었다.
“무교동에 있는 밀레니엄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지금 사장님과 그 여자가 식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 그래요.”
최성희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서 그 두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파듯 솟구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윗니로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지금 바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일찍 차 기사로부터 연락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최성희는 외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승구가 반쯤 넋을 빼앗길 정도로 홀딱 빠진 여자라면 그냥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는 아닐 것이다. 그 여자 앞에 화장도 하지 않은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 미친 듯 울부짖으며 머리끄덩이를 틀어잡고 싸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짐작대로라면, 최성희가 아무리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두 사람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다음 행동을 하기 위해 호텔에 가 있을 게 뻔했다.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고 해도 두 사람이 벌거벗고 뒹구는 장면을 두 눈 똑바로 뜨고서 목격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
최성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성희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고 있자 차 기사는 조급한 마음으로 되물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나가지 않을 게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최성희의 목소리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힘드시더라도 그 여자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아봐 주세요.”
“예. 곧 알아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수고는 무슨…….”
차 기사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최성희는 한동안 소파 끝에 걸터앉아서 팔꿈치를 무릎에 짚고 두 손바닥에다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오승구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지금 어디야?’ ‘중요한 일로 사람을 만나는 중이니까 좀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배터리를 빼놨는지 신호음은 가는데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실을 서성거리던 최성희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고 전화를 걸려다가 수화기를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끔찍한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해 너무 놀라 몸서리를 쳤다. 오승구를 죽이고 싶다는, 그것도 토막을 내어 죽이고 싶다는…….
이경아는 여느 때보다 일찍 문을 닫기 위해 레코드 가게 안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오승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가게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풍부한 몸 전체에 부잣집 마나님의 티가 철철 넘쳐흐르는 여자였다.
“어서 오세요.”
이경아가 손님들이 여기 저기 흐트러뜨리고 간 CD들을 제자리에 꽂으면서 상냥하게 여자를 맞이했다. 그러나 여자는 진열대의 CD보다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같은 여자가 보아도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빛나는 보석처럼 대단히 아름다웠다. 여자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경아 씨인가요?”
벌써부터 이경아를 알고 있었는지 여자가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는 듯 묻고서 입술을 단단하게 모았다.
“예. 그런데……?”
이경아는 서릿발같은 여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얼굴에 와서 꽂히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면서 손에 들려 있는 CD가 약하게 떨었다. 그녀는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나, 오승구 씨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여자는 바로 최성희였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순간 이경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조명이 꺼진 것처럼 얼굴이 어둡게 굳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처럼 뒷걸음질치며 손에 든 CD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우리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저기에 앉아서 얘기 좀 할까요?”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다는 사실에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경아에게 최성희가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고 나서 먼저 소파에 가 앉았다.
“이리 와서 앉아요.”
동지섣달 그믐날에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온몸을 떨며 서 있어야 할지, 앉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경아가 계속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자 최성희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노에 가득 찬 최성희의 얼굴에는 이경아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경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몸을 버팅기고 있던 다리의 힘이 빠져나가 버린 듯 눈에 보일 정도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최성희의 맞은 편 소파에 가서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지금 몇 살이에요?”
최성희는 계속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고 중지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스물여덟입니다.”
취조실에 끌려와 형사에게 심문을 당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서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는 이경아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스물여덟이라……, 좋은 나이에요.”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년 저년 욕설을 퍼부으며 통속적인 난장판을 벌이고 싶지 않아 격앙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눈을 감고 중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최성희가 이윽고 눈을 뜨면서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이경아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술을 뗄 수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입이 열 개라도 최성희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녀는 절벽 끄트머리까지 바짝 내몰린 참담한 심정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떨군 채 떨리는 무릎을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이윽고 최성희가 무엇인가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얼굴을 이경아 앞으로 가까이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처음엔 두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아이들을 위해 마음이 바뀌었어요.”
정말 마음이 바뀌었는지 최성희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분노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차분하게 변해 있었지만, 무거운 표정만큼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
감히 누구 앞이라고, 떨리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움켜쥔 채 앉아 있는 이경아는 여전히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최성희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아가씨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싶어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과 헤어져요. 그럴 수 있겠죠?”
최성희는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물었다.
“…….”
처음으로 고개를 든 이경아는 눈을 어디에도 고정시키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최성희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아가씨를 믿고 가겠어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하고 나서 최성희는 핸드백에서 미리 준비해 온 수표가 든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를 이경아의 몸 쪽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베푸는 최대의 배려였다.
“…….”
이경아는 레코드 가게문을 밀치고 나가는 최성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최성희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보처럼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은 초점 없는 눈빛에 반쯤 열린 입을 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허겁지겁 레코드 가게문을 닫은 이경아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의 걸음걸이로 주차장으로 가 빨간 승용차 앞에 섰다. 지난번 스물여덟 번째 생일날에 오승구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전진 기어를 넣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뿜고는 액셀러레이터를 천천히 밟고 차를 출발시키는 이경아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아무도 찾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고통과 슬픔을 가슴에 묻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원룸에 돌아온 이경아는 소파에 앉아 여러 번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 원룸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끝났어도 이미 오래 전에 끝났어야 마땅한 일이 드디어 찾아 왔고, 다만 미처 이별을 준비도 하기 전에 갑자기 찾아 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오승구와의 관계가 한계 시점이라면 이경아는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오승구는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진실하게 대해 주었고,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가 어릴 적 아버지와 무척이나 닮은 느낌을 준다는 것도 이경아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겐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그와의 만남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그녀는 뼛속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 동안 그와의 만남은 예견된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게 된 것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경아의 두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고, 곧 그녀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승구와의 관계를 최성희에게 들켰다는 억울함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