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저녁.. 강남의 한 고급 바에서 열린 영재의 생일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늦게까지 이어진 수술로 인해 평소보다 더 늦게 퇴근을 한 은수는 병원밖에서 내내 기다리 던 영재를 먼저 돌려보내고 나중에서야 서둘러 그가 알려준 약속장소를 찾아가고 있었고 제과점에 들러 케익을 사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철을 몇 번인가 갈아 탄후에야 도착 한 그곳은 강남에 위치한 술집이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꽤 고급스런 느낌을 주는 Bar 였다. 멀리서 <지중해>라는 상호를 확인한 그녀는 그냥 그곳으로 들어가려다 근처에 있는 꽃집을 발견하고선 후리지아 한다발을 포장해서 나왔다. 귀국해서 처음 만나는데다 명색이 생일인데 아무래도 케익만으로는 뭔가 허전했던 은수는 풍성하게 포장된 후리지아 꽃을 받아들고서야 만족한 듯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그렸고 다시 <지중해>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후 문앞에 다다르자 그곳에선 능숙한 피아노 연주와 섹스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수백개의 금빛 전구와 색색의 풍선들로 꾸며진 내부를 보 고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넓게 자리한 무대위엔 어디선가 초청되어져 왔을 밴드가 열심 히 연주를 하고 있었고 저마다 술잔을 하나씩 들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TV에서 나 봐왔던..혹은 파티문화가 발달한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에 자리한 5단짜리 케잌과 정성스레 꽃꽂이된 붉은 장미들은 그 생일파티를 더 욱 화려하게 고조시키는 것 같았다. 은수는 그 5단케잌과 30송이 장미로 이뤄진 꽃꽂이, 그리고 자신의 양손에 들린 생크림 케 익과 후리지아를 번갈아 보며 씁쓸한 기분은 들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들 속 어딘 가에 있을 영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영재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너...은수 맞지? 서은수...어쩜 하나도 안변했어..." "..........." 남색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서있는 그를 은수는 하마터면 못 알아볼뻔 했다. 테가 없는 안경에 앞머리에 살짝 들어간 초록색 염색까지 영재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했던거 보다 훨씬더 스마트했고 또 의외였던 것이다. 그 공부밖에 모르던 모범생이 머리카락에 초록색 브릿지까지 하고 다니다니...... "너....네가 영재니? 최영재 맞어?" "그래 나 영재야..왜...못알아 보겠니? 내가 그렇게 많이 변했어?" "그래...길거리에서 지나치면 정말 모를수도 있겠다." 은수는 그제야 웃음을 띠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영재는 낯선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변 하긴 했지만 어릴적 모습마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다. 유학갈 당시엔 하지 않았던 안경 이 더 추가되긴 했지만 그시절에 비하면 그는 확실히 세련되어졌고 좀더 말라보였다. 그녀는 새삼스런 표정으로 영재를 바라보더니 그에게 케익과 후리지아를 건네주며 다시 말 을 이었다. "어쨌든 귀국한거 환영하고..생일도 축하해...또 이렇게 만나서 너무 반갑고.... 그런데 생각 보다 파티장이 화려해... 누가 다 준비한거니?" "우리 부모님들이랑 영진이 누나지 뭐...귀국파티겸 해서 친구들이랑 시간 보내라고 마련해 주신거야... 나도 이제 이틀뒤엔 일 시작해야 하구...그러면 정말 시간 안날테니까... 너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영진이 누나랑 우리 부모님 볼수 있었을텐데...아깝네.. 안그래 도 다들 너 궁금해하고 많이 보고싶어 하셨거든...그리고 넌 내 예상대로 여전히 이쁘구나." 은수는 영재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평소보다 많은 수술때문에 퇴근이 늦어진걸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영재마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엔 언젠가부터 그의 집엔 거의 발길조 차 하지 않았고(사실 그래야할 명분이 없어진거지만) 자연스레 연락도 끊어져 많이 소원해 졌는데 이제와 새삼 인사를 한다한들 꽤 서먹할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다들 자신의 소식을 궁금해 했다니 어쩌면 정말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그의 표정에서 은수는 영재의 말이 약간의 과장이 섞인 인사치레 라는걸 쉽게 읽어내며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월이 그들에게 준것은 단순히 나이와 추억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영재는 그사이 다시 한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나눠 마시며 얘기꽃을 피우다가 아이스티를 받아들고 서있는 은수와 함께 여러 테이블을 순회하며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에 게 그녀를 소개 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오른 영재는 은수를 자기가 어릴때부터 좋아해온 여자친구라며 다소 요란하게 소 개했지만 그런자리가 익숙치 않은 그녀는 금새 지루함을 느끼며 그곳을 찾은 사람들 구경에 만 관심을 뒀다. 처음엔 죄다 한국친구들만 있는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금발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 도 보였고 어설픈 한국말을 구사하는 재일교포도 있었다. 아마 유학하면서 만났던 친구들이 대부분인듯 한데 하나같이 정장이나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어서 스웨터에 청바지를 걸친 은 수의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은 오히려 그런 장소에서 더 튀어보였다. 그녀에게 영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분명 좋은친구이지만 10년이란 세월을 건너면서 자연 스레 찾아든 그 어색한 느낌들은 그렇게 옷차림에서부터 나타나 있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 치자 그녀는 그런 영재가 갑자기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그녀의 손에 들린 아이스 티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을때 영재는 갑자기 어디론가 가더니 손에 뭔가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거 받아...한국 들어오면서 가족들 선물살때 네꺼도 같이 준비했거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됐네. 오늘은 네가 축하받고 선물도 받아야 하는 날인데 웬일이 야? 내가 이런걸 다 받다니...그런데 뭐야?" "옷이야...그리고 선물은 나도 너한테 받았잖아. 후리지아 너무 이뻤어. 그옷 너한테 잘어울릴거 같은데 지금 한번 뜯어봐..다행히 치수도 잘맞을거 같다. 사실 이옷 사면서 그게 제일 걱정됐는데....." "아니...그냥 집에가서 볼께. 어쨌든 고맙다. 그럼 난 이쯤에서 그만 일어날께..." "왜 벌써 가려고 그래? 내일 일요일이잖아. 천천히 더 놀다가" "피곤해서 그래. 집에가서 좀 쉴려구...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 "잠시만...." 그때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하던 밴드가 갑자기 음악을 멈췄고 피아노를 치던 중년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뭐라고 몇마디 말을 한후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던 사람들도 갑자기 음악이 끊어지고 사람이 나가자 모두 무대쪽으로 눈이 쏠렸다. 은수는 긴장된 영재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갑자기 왜저러는건데?" "흐음..아까 나간 그 남자가 오늘 여기서 노래까지 하고 가기로 했는데 몸이 많이 안좋은가 봐. 다른사람을 불렀다는군... 좀 실망이다..." "그렇구나... 그래도 음악은 끊지말지...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졌네..." 은수는 그렇게 말한후 옷과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일어섰다. 하지만 곧 이어져 나온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무심코 무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듯 몇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그대로 멈춰섰다. 자기에게 신분증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던 <블루노트>의 그남자... 장민하가 그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 몇마디를 한후 마이크를 받아들고선 자신에게 집중된 눈들이 다소 부담스러운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사람들속에 파묻힌채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은수와 눈이 마주치자 그역시 얼굴은 굳어져 버렸다. 민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고 마이크도 그쪽으로 자리를 바 꿔 잡았다. 그리고 들릴듯 말듯한 작은목소리로 뭐라고 말도 했는데 적어도 그녀의 귀엔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여기는 좀 흥겨운 노래가 어울리는 자리 같아서 올때 그렇게 준비를 했었어요. 두곡 이어서 부를건데 우선 제시카의 good bye 입니다."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 잠시 술렁대던 사람들도 어느새 목소리를 낮추며 분위기를 맞췄고 은수는 자신이 집으로 가려했다는 사실조차 잊은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서 있었다. "은수야...." "..........." "은수야.... 너 왜그래? 저사람 아는 사람이야?" "어.....뭐라고? 뭐라고 했니 영재야?" 그녀는 마치 서서 졸다가 들킨 사람처럼 대답하며 영재를 돌아보았다. "지금 네 표정이 얼마나 웃긴줄 아니?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을 정도다...너 여태껏 그렇게 멍청한 얼굴을 한건 처음보는거 같아..." 은수는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웃어보였다. 저 <블루노트> 남자의 출현이 너무 의외이긴 하지만 표정관리까지 안되고 있었다니 스스로도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저남자 혹시 아는사람이야?" "아니....그런건 아닌데...." "그런데 왜그래..내가 몇 번이나 불러도 반응없고 한참동안 저기만 바라보고 있길래 난 또 혹시나 했지. 아니면 됐어...사실 노래는 별로인거 같아서 말야...때와 장소에 맞춰 노래를 해야지 저게 뭐냐? 처음엔 너무 젊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상한 댄스곡만 립싱크로 대충 때 우고 가면 어떡하나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다행이지만 뭐...." "그것도 선입견이야...난 저노래 좋은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은 노래를 하는 민하에게 꽂혀 있었다. 영재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자신보다 다른곳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있는 은수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며 그녀 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그런가? 아무튼 나 너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어." "나한테?" "사실은 나 미국에서 수련과정까지 다 마치고 올려고 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계획을 바꾸고 한국으로 들어온건 네가 가장 큰 이유가 됐지. 너 많이 보고싶었어. 할수만 있다면..널 미국 으로 데려와서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으니까....그런데 한 6개월 전인가 엄마랑 통화하다가 우연히 네소식 들었거든. 너 아직 결혼 안했다는 말 듣고는 더이상 망설 일 이유가 없더라구....지금 내가 하는말 무슨뜻인지 알지?" "너 생각보다 참 무모하구나. 만약 나에게 지금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곁에 있다면 어쩌려 고 그렇게 무작정 들어온거니?" "그런건 별로 개의치 않아. 난 자신 있거든. 우린 어릴때부터 거의 같이 자라다시피 했잖아. 나만큼 널 잘 아는 남자는 없을거야." "그래? 그런데.....정말.....그럴까?" 그녀는 그렇게 대답한후 그의 시선을 피해 무대로 고개를 돌렸고 밴드의 연주에 맞춰 어느새 wolly bully를 흥겹게 부르고 있는 민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멀쩡한 머리만 쓸어 올렸 다. 예상치 못한 영재의 고백이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녀는 그만큼 가볍게 흘려 들었다. 저러다 말겠지. 은수는 상우와 헤어진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저 장민하라는 남자와 또 갑자기 미국에서 돌아와 자신을 찾아온 영재의 일로 복잡해져 자기가 정말 실연당한 여자인 지 그 사실조차 아득하게 잊을 지경이었다. 남자쪽 부모의 반대가 있었긴 했지만 그에 반해 치열함도 절박함도 없었던 사랑. 그녀는 상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빨리 식어버릴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정말 그를 사랑하긴 했었는지 그마저 의심스러워지며 서글퍼졌고 마치 집나온 소녀처럼 정처없이 떠돌기만 하는 자신의 마음 역시 힘겨울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벌써 노래를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 민하의 움직임을 감지한 듯 그의 뒷모습 만 오래도록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이것저것...여기 오니까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거 같다...이젠 정말 가야겠어." "그럼 같이 나가자. 차 타는데 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괜찮아...혼자 좀 걷고싶어서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영재야." "꼭 그래야겠어? 하여간 고집센거까지 넌 여전하구나. 그럼 조심해서가..안나갈께" 은수는 대답대신 그에게 웃어보이며 잠시 벗어뒀던 회색 자켓을 걸치고 그렇게 지중해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지하철역을 향해 한참을 걷다가 도로변에 서있는 빨간 우체통이 보이자 자신의 가방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을 민하의 신분증이 생각났고 그걸 꺼내선 잠시 망설였다. 그냥 우체통에 넣어버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녀는 영재의 생일파티 장소에서 또다시 마주친 그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착잡해진 듯 입술을 깨물었고 결국 우체통대신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카페 <블루노트>가 있던 자리를 기억해내기 위해 머릿속의 필름을 되감으며 한발짝 씩 그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우연하게 들렀던 곳이라 쉽게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었고 결국 택시를 타고 그 카페가 있었던 동네에 내려 몇 번을 돌고나서야 조그만 네온사 인 간판을 걸어둔 <블루노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카페 입구에 서서 새삼스러운 듯한 표정이 되어 작고 오래된 그 건물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그리고 좀전의 크고 고급스러웠던 <지중해>와는 많이 비교되지만 그대신 단아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카페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페 안은 무슨 영화에선가 들었던 익숙한 팝송이 흐르며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그리 많지 않은 테이블 사이로 한 종업원이 서빙을 하다가 마침 들어오는 은수를 보자 의례적인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민하를 찾고 있었다. "여기 장민하씨라고 계시죠? 그사람에게 볼일이 있어 왔는데....." "어....저희 사장님이신데....저기 바에 노란색 니트 입고 있는 분이세요. 그런데 무슨일로 오셨는지는 몰라도 웬만하면 다음에 오세요. 지금 혼자 술마시고 계셔서....." 은수는 종업원이 일러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의 말처럼 노란색 니트를 입고 혼자 앉아서 벌써 소주 두병째를 마시고 있는 민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중에 오라는 종업원의 권유를 무시하고 안주도 없이 달랑 소주만 들이키고 있는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무슨 술을 안주도 없이 그렇게 마시니? 나도 한잔 줄래?" 그러자 민하는 술기운으로 인해 상기된 얼굴을 천천히 돌렸고 자기 옆에 앉은 사람이 은수 인걸 확인하자 한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술잔을 하나 건네준후 자기가 마시던 소주를 따라 주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다신 못볼줄 알았는데..." "자기 나이 말하는것도 힘들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신분증 던져주고 사라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너밖엔 없지 싶다. 우체통에 넣을려고 했는데 할말이 있어서 그냥 찾아왔어. 좀전에 거긴 왜온거니?" 민하는 갑자기 찾아와서 거침없이 반말로 얘기를 하는 그녀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기만 했 다. 그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다 비워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흔한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아르바이트처럼 다른곳에서 노래하고 그러기도 해. 하지만 아까 그곳은 별로 내키지 않아 정말 가기 싫었는데 아는분의 부탁이라 거절할수도 없고...그래서 잠시 다녀온거야. 그런데 거기서 또 만날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넌 그곳에 왜 갔던 거야? 우 연한 만남이 세 번 이어지면 그건 운명이라던데...우리도 운명일까?" 은수는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덩달아 반말로 대답하는 민하를 보면서 기가막힌 표 정을 지었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자리는 친구 생일파티겸 귀국파티였어. 그리고 난 너보다 2살이나 많은데 적어도 누나라 는 호칭은 써줘야 하는거 아니니? 다음부턴 그렇게 해..." "뭐? 누나? 웃긴다. 처음부터 당신은 내게 여자로 다가왔는데 어떻게 누나라고 불러.. 난 절대 그렇게 못해! 할수 없어." 민하가 그렇게 말하자 은수는 오히려 웃음까지 지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소주잔을 천천 히 비우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말 무시하고 건방떨며 끝까지 반말하는 네가 황당하기 짝이 없고..그래서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한편으론 그런 널 보며 재밌어 하고 있다니..그러고 보면 나란 인간은 참 모순덩어리야...네말대로 우리가 세 번씩 만난게 운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만약 그런 게 운명이라면 너무 싱겁지 않니?"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빈 소주잔을 다시 채우더니 그 잔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이제와서 이런말 한들 소용없겠지만 역시 여긴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결국 여기까지 찾아와서 너에게 이렇게 주절대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일런지....단순히 운명이니 뭐니 하는걸로 치부하기엔 사실 난 많이 복잡하다." "기대고 싶은걸 거야. 누군가에게...마치 급하게 탈옥한 사람처럼 비에 온통 젖어서 여길 들어서던 널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싸한 감정이 내게 그걸 말해주는 듯 했어. 난 이세상에 사람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다고 봐.. 사실 전쟁이니 마약이니 하는것도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잖아..그런데 한때 믿고 있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테니 감정도 없는 무쇠인간이 아니고서야 그 영혼은 지칠만도 하지. 너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누군진 알수 없지만 언젠가는 아프게 후회할거야..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버려둔 자체가 죄일테니... 힘들다면...그래서 기대고 싶다면 그렇게 해..바람처럼 스쳐 지나듯 그렇게 가볍게 말야. 그 예쁜눈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워낼수 있다면...그래서 행복해질수 있다면 난 당신에게 뭐든지 다해줄거야." "넌 하여간 사람 감동시키는 덴 굉장한 재주를 가진거 같다...그말 빈말이라도 고마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민하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며 그렇게 대답한후 자리에서 일어났 다. 민하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출입문이 닫히고 그림자마 저 사라지자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다가갔다. "은수야...." "너 정말 끝까지 그러네....누나라...." 그는 은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그녀는 뜨거운 알콜냄새로 무장된 그의 돌발적인 키스에 가벼운 두통을 느껴야 했지만 민하 는 차가운 그녀의 어깨를 오히려 끌어안았다. "사랑해...널 사랑하고 있다고...그말을 하고 싶었어." 그의 목소리는 진지함이 지나쳐 무거운 느낌마저 들게 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버리며 그를 밀어냈다. "그런말 함부로 하지마. 넌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 "착각....이런 감정이 착각이라고?" ".........." 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유난히 눈에 띄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또다시 확인하면서 누 군가에게 그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마저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나의 전설이라면...[7편]
다음날 저녁.. 강남의 한 고급 바에서 열린 영재의 생일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늦게까지 이어진 수술로 인해 평소보다 더 늦게 퇴근을 한 은수는 병원밖에서 내내 기다리
던 영재를 먼저 돌려보내고 나중에서야 서둘러 그가 알려준 약속장소를 찾아가고 있었고
제과점에 들러 케익을 사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철을 몇 번인가 갈아 탄후에야 도착
한 그곳은 강남에 위치한 술집이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꽤 고급스런 느낌을 주는 Bar
였다.
멀리서 <지중해>라는 상호를 확인한 그녀는 그냥 그곳으로 들어가려다 근처에 있는 꽃집을
발견하고선 후리지아 한다발을 포장해서 나왔다.
귀국해서 처음 만나는데다 명색이 생일인데 아무래도 케익만으로는 뭔가 허전했던 은수는
풍성하게 포장된 후리지아 꽃을 받아들고서야 만족한 듯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그렸고
다시 <지중해>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후 문앞에 다다르자 그곳에선 능숙한 피아노 연주와 섹스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수백개의 금빛 전구와 색색의 풍선들로 꾸며진 내부를 보
고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넓게 자리한 무대위엔 어디선가 초청되어져 왔을 밴드가 열심
히 연주를 하고 있었고 저마다 술잔을 하나씩 들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TV에서
나 봐왔던..혹은 파티문화가 발달한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에 자리한 5단짜리 케잌과 정성스레 꽃꽂이된 붉은 장미들은 그 생일파티를 더
욱 화려하게 고조시키는 것 같았다.
은수는 그 5단케잌과 30송이 장미로 이뤄진 꽃꽂이, 그리고 자신의 양손에 들린 생크림 케
익과 후리지아를 번갈아 보며 씁쓸한 기분은 들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들 속 어딘
가에 있을 영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영재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너...은수 맞지? 서은수...어쩜 하나도 안변했어..."
"..........."
남색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서있는 그를 은수는 하마터면 못 알아볼뻔 했다.
테가 없는 안경에 앞머리에 살짝 들어간 초록색 염색까지 영재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했던거
보다 훨씬더 스마트했고 또 의외였던 것이다.
그 공부밖에 모르던 모범생이 머리카락에 초록색 브릿지까지 하고 다니다니......
"너....네가 영재니? 최영재 맞어?"
"그래 나 영재야..왜...못알아 보겠니? 내가 그렇게 많이 변했어?"
"그래...길거리에서 지나치면 정말 모를수도 있겠다."
은수는 그제야 웃음을 띠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영재는 낯선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변
하긴 했지만 어릴적 모습마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다. 유학갈 당시엔 하지 않았던 안경
이 더 추가되긴 했지만 그시절에 비하면 그는 확실히 세련되어졌고 좀더 말라보였다.
그녀는 새삼스런 표정으로 영재를 바라보더니 그에게 케익과 후리지아를 건네주며 다시 말
을 이었다.
"어쨌든 귀국한거 환영하고..생일도 축하해...또 이렇게 만나서 너무 반갑고.... 그런데 생각
보다 파티장이 화려해... 누가 다 준비한거니?"
"우리 부모님들이랑 영진이 누나지 뭐...귀국파티겸 해서 친구들이랑 시간 보내라고 마련해
주신거야... 나도 이제 이틀뒤엔 일 시작해야 하구...그러면 정말 시간 안날테니까...
너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영진이 누나랑 우리 부모님 볼수 있었을텐데...아깝네.. 안그래
도 다들 너 궁금해하고 많이 보고싶어 하셨거든...그리고 넌 내 예상대로 여전히 이쁘구나."
은수는 영재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평소보다 많은 수술때문에 퇴근이 늦어진걸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영재마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엔 언젠가부터 그의 집엔 거의 발길조
차 하지 않았고(사실 그래야할 명분이 없어진거지만) 자연스레 연락도 끊어져 많이 소원해
졌는데 이제와 새삼 인사를 한다한들 꽤 서먹할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다들 자신의 소식을
궁금해 했다니 어쩌면 정말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그의 표정에서 은수는 영재의 말이 약간의
과장이 섞인 인사치레 라는걸 쉽게 읽어내며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월이 그들에게 준것은 단순히 나이와 추억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영재는 그사이 다시 한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나눠 마시며 얘기꽃을 피우다가
아이스티를 받아들고 서있는 은수와 함께 여러 테이블을 순회하며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에
게 그녀를 소개 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오른 영재는 은수를 자기가 어릴때부터 좋아해온 여자친구라며 다소 요란하게 소
개했지만 그런자리가 익숙치 않은 그녀는 금새 지루함을 느끼며 그곳을 찾은 사람들 구경에
만 관심을 뒀다.
처음엔 죄다 한국친구들만 있는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금발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
도 보였고 어설픈 한국말을 구사하는 재일교포도 있었다. 아마 유학하면서 만났던 친구들이
대부분인듯 한데 하나같이 정장이나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어서 스웨터에 청바지를 걸친 은
수의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은 오히려 그런 장소에서 더 튀어보였다.
그녀에게 영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분명 좋은친구이지만 10년이란 세월을 건너면서 자연
스레 찾아든 그 어색한 느낌들은 그렇게 옷차림에서부터 나타나 있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
치자 그녀는 그런 영재가 갑자기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그녀의 손에 들린 아이스 티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을때 영재는 갑자기 어디론가 가더니 손에 뭔가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거 받아...한국 들어오면서 가족들 선물살때 네꺼도 같이 준비했거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됐네. 오늘은 네가 축하받고 선물도 받아야 하는 날인데 웬일이
야? 내가 이런걸 다 받다니...그런데 뭐야?"
"옷이야...그리고 선물은 나도 너한테 받았잖아. 후리지아 너무 이뻤어.
그옷 너한테 잘어울릴거 같은데 지금 한번 뜯어봐..다행히 치수도 잘맞을거 같다.
사실 이옷 사면서 그게 제일 걱정됐는데....."
"아니...그냥 집에가서 볼께. 어쨌든 고맙다. 그럼 난 이쯤에서 그만 일어날께..."
"왜 벌써 가려고 그래? 내일 일요일이잖아. 천천히 더 놀다가"
"피곤해서 그래. 집에가서 좀 쉴려구...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
"잠시만...."
그때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하던 밴드가 갑자기 음악을 멈췄고 피아노를 치던 중년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뭐라고 몇마디 말을 한후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던 사람들도 갑자기 음악이 끊어지고 사람이 나가자 모두
무대쪽으로 눈이 쏠렸다. 은수는 긴장된 영재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갑자기 왜저러는건데?"
"흐음..아까 나간 그 남자가 오늘 여기서 노래까지 하고 가기로 했는데 몸이 많이 안좋은가
봐. 다른사람을 불렀다는군... 좀 실망이다..."
"그렇구나... 그래도 음악은 끊지말지...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졌네..."
은수는 그렇게 말한후 옷과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일어섰다.
하지만 곧 이어져 나온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무심코 무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듯 몇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그대로 멈춰섰다.
자기에게 신분증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던 <블루노트>의 그남자... 장민하가 그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 몇마디를 한후 마이크를 받아들고선 자신에게 집중된
눈들이 다소 부담스러운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사람들속에 파묻힌채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은수와 눈이 마주치자 그역시 얼굴은 굳어져 버렸다.
민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고 마이크도 그쪽으로 자리를 바
꿔 잡았다. 그리고 들릴듯 말듯한 작은목소리로 뭐라고 말도 했는데 적어도 그녀의 귀엔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여기는 좀 흥겨운 노래가 어울리는 자리 같아서 올때 그렇게 준비를 했었어요.
두곡 이어서 부를건데 우선 제시카의 good bye 입니다."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 잠시 술렁대던 사람들도 어느새 목소리를 낮추며 분위기를 맞췄고
은수는 자신이 집으로 가려했다는 사실조차 잊은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서 있었다.
"은수야...."
"..........."
"은수야.... 너 왜그래? 저사람 아는 사람이야?"
"어.....뭐라고? 뭐라고 했니 영재야?"
그녀는 마치 서서 졸다가 들킨 사람처럼 대답하며 영재를 돌아보았다.
"지금 네 표정이 얼마나 웃긴줄 아니?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을 정도다...너 여태껏 그렇게
멍청한 얼굴을 한건 처음보는거 같아..."
은수는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웃어보였다. 저 <블루노트> 남자의 출현이 너무
의외이긴 하지만 표정관리까지 안되고 있었다니 스스로도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저남자 혹시 아는사람이야?"
"아니....그런건 아닌데...."
"그런데 왜그래..내가 몇 번이나 불러도 반응없고 한참동안 저기만 바라보고 있길래 난 또
혹시나 했지. 아니면 됐어...사실 노래는 별로인거 같아서 말야...때와 장소에 맞춰 노래를
해야지 저게 뭐냐? 처음엔 너무 젊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상한 댄스곡만 립싱크로 대충 때
우고 가면 어떡하나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다행이지만 뭐...."
"그것도 선입견이야...난 저노래 좋은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은 노래를 하는 민하에게 꽂혀 있었다. 영재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자신보다 다른곳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있는 은수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며 그녀
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그런가? 아무튼 나 너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어."
"나한테?"
"사실은 나 미국에서 수련과정까지 다 마치고 올려고 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계획을 바꾸고
한국으로 들어온건 네가 가장 큰 이유가 됐지. 너 많이 보고싶었어. 할수만 있다면..널 미국
으로 데려와서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으니까....그런데 한 6개월 전인가
엄마랑 통화하다가 우연히 네소식 들었거든. 너 아직 결혼 안했다는 말 듣고는 더이상 망설
일 이유가 없더라구....지금 내가 하는말 무슨뜻인지 알지?"
"너 생각보다 참 무모하구나. 만약 나에게 지금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곁에 있다면 어쩌려
고 그렇게 무작정 들어온거니?"
"그런건 별로 개의치 않아. 난 자신 있거든. 우린 어릴때부터 거의 같이 자라다시피 했잖아.
나만큼 널 잘 아는 남자는 없을거야."
"그래? 그런데.....정말.....그럴까?"
그녀는 그렇게 대답한후 그의 시선을 피해 무대로 고개를 돌렸고 밴드의 연주에 맞춰
어느새 wolly bully를 흥겹게 부르고 있는 민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멀쩡한 머리만 쓸어 올렸
다. 예상치 못한 영재의 고백이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녀는 그만큼 가볍게 흘려 들었다.
저러다 말겠지.
은수는 상우와 헤어진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저 장민하라는 남자와 또
갑자기 미국에서 돌아와 자신을 찾아온 영재의 일로 복잡해져 자기가 정말 실연당한 여자인
지 그 사실조차 아득하게 잊을 지경이었다.
남자쪽 부모의 반대가 있었긴 했지만 그에 반해 치열함도 절박함도 없었던 사랑.
그녀는 상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빨리 식어버릴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정말
그를 사랑하긴 했었는지 그마저 의심스러워지며 서글퍼졌고 마치 집나온 소녀처럼 정처없이
떠돌기만 하는 자신의 마음 역시 힘겨울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벌써 노래를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 민하의 움직임을 감지한 듯 그의 뒷모습
만 오래도록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이것저것...여기 오니까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거 같다...이젠 정말 가야겠어."
"그럼 같이 나가자. 차 타는데 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괜찮아...혼자 좀 걷고싶어서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영재야."
"꼭 그래야겠어? 하여간 고집센거까지 넌 여전하구나. 그럼 조심해서가..안나갈께"
은수는 대답대신 그에게 웃어보이며 잠시 벗어뒀던 회색 자켓을 걸치고 그렇게 지중해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지하철역을 향해 한참을 걷다가 도로변에 서있는 빨간 우체통이 보이자
자신의 가방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을 민하의 신분증이 생각났고 그걸 꺼내선 잠시
망설였다.
그냥 우체통에 넣어버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녀는 영재의 생일파티 장소에서 또다시
마주친 그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착잡해진 듯 입술을 깨물었고 결국 우체통대신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카페 <블루노트>가 있던 자리를 기억해내기 위해 머릿속의 필름을 되감으며 한발짝
씩 그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우연하게 들렀던 곳이라 쉽게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었고 결국 택시를 타고 그 카페가 있었던 동네에 내려 몇 번을 돌고나서야 조그만 네온사
인 간판을 걸어둔 <블루노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카페 입구에 서서 새삼스러운 듯한 표정이 되어 작고 오래된 그 건물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그리고 좀전의 크고 고급스러웠던 <지중해>와는 많이 비교되지만 그대신 단아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카페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페 안은 무슨 영화에선가 들었던 익숙한 팝송이 흐르며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그리
많지 않은 테이블 사이로 한 종업원이 서빙을 하다가 마침 들어오는 은수를 보자 의례적인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민하를 찾고 있었다.
"여기 장민하씨라고 계시죠? 그사람에게 볼일이 있어 왔는데....."
"어....저희 사장님이신데....저기 바에 노란색 니트 입고 있는 분이세요. 그런데 무슨일로
오셨는지는 몰라도 웬만하면 다음에 오세요. 지금 혼자 술마시고 계셔서....."
은수는 종업원이 일러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의 말처럼 노란색 니트를 입고 혼자
앉아서 벌써 소주 두병째를 마시고 있는 민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중에 오라는 종업원의 권유를 무시하고 안주도 없이 달랑 소주만 들이키고 있는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무슨 술을 안주도 없이 그렇게 마시니? 나도 한잔 줄래?"
그러자 민하는 술기운으로 인해 상기된 얼굴을 천천히 돌렸고 자기 옆에 앉은 사람이 은수
인걸 확인하자 한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술잔을 하나 건네준후 자기가
마시던 소주를 따라 주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다신 못볼줄 알았는데..."
"자기 나이 말하는것도 힘들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신분증 던져주고 사라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너밖엔 없지 싶다. 우체통에 넣을려고 했는데 할말이 있어서
그냥 찾아왔어. 좀전에 거긴 왜온거니?"
민하는 갑자기 찾아와서 거침없이 반말로 얘기를 하는 그녀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기만 했
다. 그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다 비워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흔한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아르바이트처럼 다른곳에서 노래하고 그러기도 해. 하지만 아까
그곳은 별로 내키지 않아 정말 가기 싫었는데 아는분의 부탁이라 거절할수도 없고...그래서
잠시 다녀온거야. 그런데 거기서 또 만날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넌 그곳에 왜 갔던 거야? 우
연한 만남이 세 번 이어지면 그건 운명이라던데...우리도 운명일까?"
은수는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덩달아 반말로 대답하는 민하를 보면서 기가막힌 표
정을 지었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자리는 친구 생일파티겸 귀국파티였어. 그리고 난 너보다 2살이나 많은데 적어도 누나라
는 호칭은 써줘야 하는거 아니니? 다음부턴 그렇게 해..."
"뭐? 누나? 웃긴다. 처음부터 당신은 내게 여자로 다가왔는데 어떻게 누나라고 불러..
난 절대 그렇게 못해! 할수 없어."
민하가 그렇게 말하자 은수는 오히려 웃음까지 지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소주잔을 천천
히 비우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말 무시하고 건방떨며 끝까지 반말하는 네가 황당하기 짝이 없고..그래서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한편으론 그런 널 보며 재밌어 하고 있다니..그러고 보면 나란 인간은
참 모순덩어리야...네말대로 우리가 세 번씩 만난게 운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만약 그런
게 운명이라면 너무 싱겁지 않니?"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빈 소주잔을 다시 채우더니 그 잔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이제와서 이런말 한들 소용없겠지만 역시 여긴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결국 여기까지 찾아와서 너에게 이렇게 주절대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일런지....단순히 운명이니 뭐니 하는걸로 치부하기엔 사실 난 많이 복잡하다."
"기대고 싶은걸 거야. 누군가에게...마치 급하게 탈옥한 사람처럼 비에 온통 젖어서 여길
들어서던 널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싸한 감정이 내게 그걸 말해주는 듯 했어.
난 이세상에 사람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다고 봐.. 사실 전쟁이니 마약이니 하는것도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잖아..그런데 한때 믿고 있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테니
감정도 없는 무쇠인간이 아니고서야 그 영혼은 지칠만도 하지.
너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누군진 알수 없지만 언젠가는 아프게 후회할거야..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버려둔 자체가 죄일테니...
힘들다면...그래서 기대고 싶다면 그렇게 해..바람처럼 스쳐 지나듯 그렇게 가볍게 말야.
그 예쁜눈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워낼수 있다면...그래서 행복해질수 있다면 난 당신에게
뭐든지 다해줄거야."
"넌 하여간 사람 감동시키는 덴 굉장한 재주를 가진거 같다...그말 빈말이라도 고마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민하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며 그렇게 대답한후 자리에서 일어났
다. 민하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출입문이 닫히고 그림자마
저 사라지자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다가갔다.
"은수야...."
"너 정말 끝까지 그러네....누나라...."
그는 은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그녀는 뜨거운 알콜냄새로 무장된 그의 돌발적인 키스에 가벼운 두통을 느껴야 했지만 민하
는 차가운 그녀의 어깨를 오히려 끌어안았다.
"사랑해...널 사랑하고 있다고...그말을 하고 싶었어."
그의 목소리는 진지함이 지나쳐 무거운 느낌마저 들게 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버리며 그를 밀어냈다.
"그런말 함부로 하지마. 넌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
"착각....이런 감정이 착각이라고?"
".........."
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유난히 눈에 띄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또다시 확인하면서 누
군가에게 그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마저 달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