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홍 Story +14

수레국화200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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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불이 번쩍 들었다.  다홍이 자존심이 세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의 기분에만 도취되어 다홍에게 무조건 사주려고 했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이다. 다홍을 찾아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서 내려갔다. 다홍은 미동도 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에 곧게 서서는 앞만 보고 있었다.

은수는 다홍의 팔을 잡고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1층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다홍은 화가 나서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되어서는 은수에게 질질 끌려오다 시피 따라왔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인정할게. 너랑 한 집에 살게 되고 쇼핑을 같이 온 건 처음이라 내 기분에 취했나봐. 난 그냥 니가 이쁜 막내동생같아서 이것저것 해주고 싶었거든.”

“선배집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전 부담이 된다구요. 그런데 뭐예요? 선배가 그러는거 동정으로 밖에 못 받아들이겠어요.”

“넌 공부하느라 아직 돈 벌 기회가 없었으니 내가 미리 사주고 나중에 너 돈 벌면 그때 갚으면 되잖아.”

“그런 비현실적인 말이 어디 있어요? 그건 제가 안 갚아도 그만인 거잖아요. 전 제 수준에 맞게 필요한 것도 거기에 맞춰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선배가 함부로 이것저것 사주고 하면 자꾸 선배한테 받으려고만 할 거예요. 아니어도 지금 전 혼란스러워요. 제가 알던 은수선배랑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왜? 내가 그렇게 좋은 집에 살아서?”

“아니라고는 말 못해요. 준용선배나 민경이처럼 그냥 서민이 아니라 계층이 다른 사람 같아서 어려워요. 그러니 자꾸 뭘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은수는 여느 아가씨들처럼 남자들을 봉으로 여기는 여자가 아니라서 다홍이 더 좋지만, 아직 어려 자존심을 너무 내세우다 보니 마찰이 생기는 것 같아 이번에는 물러서 주기로 했다.

“좋아. 대신 꼭 필요한게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말하기. 알았지? 그럼 이제 가방사러 가자.”

다홍은 금새 또 기분이 풀렸는지 은수의 뒤를 따라 가방을 보러 갔다. 은수는 분명 예전의 무표정, 무뚝뚝 대장과는 다른 다홍의 모습에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자기 기분을 표현하지 않던 다홍이 아니라 싫은 내색, 좋은 내색을 은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스물다섯이다. 스물둘의 젖살이 덜 빠진 앳된 모습의 다홍이 아니라 이제는 어딜 가더라도 아가씨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었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은수는 반바지와 초록색 티를 입고 가방을 고르고 있는 다홍을 흐뭇한 듯 지켜보며 미소지었다.

“무슨 생각하면서 웃었어요?”

다홍은 가방을 사서는 들고 나오며 웃고 있는 은수의 팔을 잡았다.

“그냥. 자, 이제 간식 먹으러 갈까? 뭐 먹고 싶어?”

“소프트아이스크림.”

다홍은 자기가 산다며 빅 사이즈로 두 개를 사왔다.

“이렇게 큰 걸 다 먹으라구?”

“싫으면 저 주세요. 뭐 두 개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럴 수야 없지. 배탈이 나더라도 다 먹을 수 있어.”

“선배, 한가지 부탁 있어요. 말해도 되죠?”

다홍이 갑자기 진지해져서 은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부모님 오시면 절 그냥 딱한 처지의 후배로 소개시켰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선배가 사심을 가지지 말고 부모님이 혹시 선보라고 하면 선보고 그렇게 하라구요.”

“난 사심없는데... 이런..... 혼자 넘겨짚기하는거 아니야?”

은수의 정색에 다홍은 당황했지만 기분은 좀 나아졌다.

“아니...전 또 선배가 그런 마음이 있는 줄 알고... 정말 없는거죠?”

“그럼. 나 그래도 잘 나가는 한의사야. 쭉쭉빵빵한 여자들 줄 섰다구.  반바지입고 이런 초등학생같은 티셔츠나 입고 다니는 학생에게는 관심이 없는 걸. 내가 눈이 좀 높아서..”

“누가 뭐래요? 쭉쭉빵빵들은 뭐 눈이 없나..”

다홍이 뾰로통해져서 입을 삐죽 내밀자 은수는 자신의 대처법이 옳았음을 내심 기뻐했다. 그렇게 말해야지만 다홍이 편히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일요일 저녁을 먹고 난 후에야 은수의 부모님은 여행에서 돌아오셨다. 다홍이 공손하게 인사하자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은수가 아니어도 어제 전화했던데 내가 집에 없어서 아줌마더러 좀 챙기랬더니 불편한데는 없었나 모르겠어요.”

“말씀 낮추셔요. 이렇게 좋은 방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은수 누나가 쓰던 방인데 걔가 원래 자질구레하게 갖다놓는 걸 싫어해서 그렇게 방이 휑하다오. 12월에 시험이라고 했지? 그때까지 내 집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생활하구. 내가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네. 대신 이모한테 해달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 신경써서 식사시간 맞출 필요는 없어요. 이모가 6시에 왔다가 8시에 가니까 필요한 시간에 맞춰서 밥 달라고 하구. 사실, 우리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집을 비우니까 같이 밥먹을 시간도 별로 없을거야.”

그의 어머니는 부잣집 마님처럼 고운 자태를 뽐내셨지만 의외로 털털한 듯 했다. 아버지는 별 말씀 없으셨지만 은수처럼 온화해 보이는 분이다.

6시에 일어나 얼른 씻고 새벽반을 들으려고 나가려는데 은수 부모님은 이미 일어나서 정원에서 운동을 하고 계셨다. 다홍이 가방을 메고 나가자 어머니는 다홍을 잡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먹고 공부하러 가면 안돼. 잠깐만 기다려봐.”

어머니는 들어가시더니 사과 한 개와 베이컨 세 조각을 금방 구워서 가지고 나오셨다.

“얼른 이거라도 먹고 가. 사과는 가면서 먹고. 자, 얼른.”

다홍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원에서 서서 포크로 베이컨을 찍어 먹고는 사과를 받아들고 나왔다. 그의 어머닌 마음이 너무 따뜻한 분인 것 같다. 이른 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다홍은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사과를 우적우적 깨물어 먹었다. 그의 어머니 정성이니 무조건 다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여름이 지나고 9월 중순에 이르자 날씨도 싸늘해지고 마음도 조급해져서 집에 와서도 다홍은 서둘러 씻고는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같이 살던 아들이 군대갔다며 아주 들어와 살게 되어서 12시에 들어오는 다홍을 기다려 간식을 챙겨주시곤 했다.

“오늘 사모님 일본 가셨는데 일주일 걸리시나봐. 은수랑 요즘 냉전 중이라서 특별히 다홍이 학생 오면 얘기 좀 해달라고 하더라구.”

“냉전요?”

“그래. 사모님이 기껏 잡아놓은 선자리를 은수가 결국 안나갔다지 뭐야. 그러니 화나실 수 밖에. 그래서 다홍이 학생 오면 은수 좀 설득해 보라고.”

“그런거야 뭐 기꺼이 할 수 있죠. 우리 은수 총각 방에 있어요?”

“들어온 지 얼마 안돼. 내일 쉬는 날이라고 술마셨는지 술냄새 나더라구. 잘지도 모르니까 일단 올라가봐.”

은수랑도 주말 외에는 거의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 할 시간도 없었다. 다홍은 아주머니가 해주신 고구마 샌드위치를 마저 먹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은수 방에서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통화중인가 보다. 이 밤에 누구와 통화하는 것일까. 다홍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거 신경쓰고 싶지 않다.

통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씻고 나오니 조용했다. 1층에서도 이모가 이미 들어가셨는지 불이 없다. 은수 방을 노크했다. 대답이 없다.

“선배 자요? 할 말 있는데.”

그렇게 빨리 잠들었을리 없는데..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대답이 없다.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렸다. 팬티만 입고 그가 서 있었다.

“이제 들어왔어? 늦었네.”

다홍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들어와. 할 말 있다며?”

“옷 좀 입어봐요. 눈을 둘 데가 없어요.”

“난 너의 이야기만 듣고 다시 잘건데 옷을 입는 수고를 또 하란 말이야?”

“왜 다 벗고 자고 난리얌. 그럼 이대로 얘기할 테니까 들어요.”

다홍은 은수의 방을 등지고 섰다. 은수는 문에 기대어 다홍의 뒷모습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늘어져있고, 짧은 반바지 밑으로 나온 다리는 이리저리 바닥에서 원을 그리고 있다.

“선 왜 안봤어요?”

“그거 물어보려고 이 밤에 이러고 대화하자는거야?”

“전 심각해요. 장난스럽게 받아치지 마요.”

“좋아. 하고싶은 말이 선 보라는거지?”

“그렇죠. 어머니랑 냉전 중이라면서요? 나같으면 효도하는 셈치고 선 백번도 더 볼 수 있겠다. 그게 어렵나뭐.”

“어렵지. 잘난척하는 여자들이랑 마주앉아서 재미없는 얘기 나누는 것도 어렵고, 나를 저울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재고 있는 모습 보는 것도 역겹고, 더할까?”

“그건 뭐 선배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겠지. 하지만 난 언젠간 나타날 줄리엣을 기다리는 것이고, 그 여자들은 백마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거지. 그러니 만나봤자 안된다는 거지. 줄리엣이 만날 남자는 백마탄 왕자가 아니라 로미오거든. 이제 대화 종료해도 될까? 오늘 한잔 했더니 졸린데.”

“좋아요. 그럼 무조건 3번은 선보겠다고 약속해요. 선배랑 어머니 사이가 원만해야 얹혀사는 제 마음도 편하죠.”

“세 번은 너무 많고 한번만 더 보지 뭐. 그건 타협할 수 있지?”

은수는 얼른 대화를 끝내고 자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약속하고 다홍은 방으로 돌아왔다. 공부가 되지 않았다. 은수와 한집에 살면서 가슴떨림이 좀 줄어드는가 싶었는데 반나체의 은수를 보고는 다시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포기하고 자려고 누웠는데 아무래도 간식으로 먹은 샌드위치가 걸렸나보다. 혼자서 가슴을 두드려보다가 쿵쿵 뛰어도 봤지만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힘들어졌다. 겨우 은수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노크할 정신도 없다.

“선배, 나 좀 봐줘요”

은수는 서둘러 불을 켜고는 다홍을 잡아 일으켜서는 침대에 앉혔다.

“어디가 아픈거야?”

“좀 전에 먹은 샌드위치가 걸렸나봐요. 숨쉬기가 힘들어.”

은수는 다홍을 바닥에 눕히고 등을 밟았다. 두두둑~ 등에서 소리가 나자 은수는 침을 찾아들고 왔다.  열손가락 열발가락을 다 찔러서 피를 내고 나서야 다홍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급하게 먹었길래 그런거야? 너 조금만 늦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에그... 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에휴~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다홍은 일어나려다  은수의 팬티만 걸친 모습에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아플땐 정신이 없어서 입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 신경도 안쓰이다가 그제서야 주변을 돌아볼 정신도 생겼나 보다.

“뭐해? 자러 안가?”

“가요. 그런데 옷 좀 입던지, 아님 뒤돌아 서서 있어요.”

“남자들은 원래 다 이렇게 입고 자는거야. 뭐 처음보는 애처럼 굴기는..”

“그럼 처음보지 뭐 매일 봐요? 내가 변태예요?”

은수는 침대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다홍이 귀여워서 더더욱 어찌하나 보려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뒤돌았어요?”

대답이 없자 다홍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은수의 벗은 몸을 보고는 괴성을 지르며 후다닥 자기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은수의 웃음소리가 문을 닫고 있어도 들렸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문자가 왔다.

[나의 벗은 몸이 자꾸 떠올라서 잠이 안오지? 어쩌냐..송곳 좀 빌려줄까?]

다홍은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가 키득키득 웃었다. 조금전까지 긴장했던 것이 스르르 풀렸다. 은수 말대로 자꾸만 벗은 몸이 떠올랐는데 은수의 문자가 송곳이 되어 허벅지를 찔러 주어서 편히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