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승맞게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가 어둠이 짙게 깔린 아스팔트를 흠뻑 적시며 차량들의 전조등 불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눈이 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올 겨울엔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경아는 하기 싫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 없는 곳이라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나와야 했다.
더구나 야간에 빗길 운행이 처음인지라 핸들을 잡고 있는 이경아의 두 손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면에다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최고 시속 60킬로미터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나마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온화해 눈이 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운전교습을 받을 때 강사가 가르쳐 준대로 뒤차가 경적을 울리던 말던 천천히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두 개의 와이퍼가 부채꼴 모양으로 연신 움직이며 부딪치는 빗방울들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하필 이런 날에 만나자고 할 게 뭐야.”
지금 이경아는 지난번 강민지와 함께 가 식사했던 ‘양수리성솟대’라는 음식점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비도 오고 날씨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 만나든지 아니면 서울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그녀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그곳에 먼저 가 있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왔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 이경아는 오승구와의 완전한 이별을 위해 아는 사람들 모두와 일체 연락을 끊고서 예전에 룸살롱에 다닐 때 만난 친구의 원룸에서 도피 생활하듯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친구는 할인 전문 화장품 가게를 하나 낼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도 룸살롱에 나가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고생하면 목표치에 도달하는 듯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경아 역시 그 친구의 대견스러움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송곳으로 찔러대는 것처럼 순간 순간 찾아오는 가슴의 통증을 잊을 수가 있었다.
하루 하루를 가만히 집구석에 갇혀 지내는 게 답답하고 무료하고, 괴롭고 서글펐지만 지금 마음을 단단히 잡지 못하면 나중에 집채만한 해일처럼 닥쳐올지 모르는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경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늘도 할 일이 없어 비디오 테이프나 빌려 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민지에게서 만나자고 전화가 온 것이다. 이경아는 진동으로 바꾼 핸드폰이 부르르 떨자 어쩌면 오승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폴더를 열어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군지를 먼저 확인을 했다. 월 이천 원씩 지불하면서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며칠 전부터 받고 있는 덕분에 그녀는 전화한 사람이 강민지라는 것을 알고 SEND를 눌렀다.
“경아니? 나, 민지야.”
“응,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니?”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강민지를 만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난 것이다.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작년이 된 것이다. 이경아는 보름 동안 할 일 없이 친구의 원룸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야, 그렇지 뭐. 그런데, 오늘 바쁘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은 하지만 어눌한 강민지의 목소리에서 이경아는 뭔가 안 좋은 일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바쁘지는 않아.”
“그럼, 나하고 만날 시간이 있겠구나.”
“그러지 뭐.”
“지난번 우리가 양수리에 갔을 때 식사하던 음식점 있지?”
“양수리성솟대?”
“그래. 이따 일곱 시에 거기에서 만나자.”
“지금 비가 오는데, 내가 어떻게 운전하고…….”
“긴히 의논할 게 있어서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니?”
“그래도 비가 오는데……”
이경아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선뜻 거절은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여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
“다른 데는 안 되고 꼭 거기서 만나야 되는 거니?”
“내가 그곳에 가고 싶어서 그래. 이따 그곳에서 만나. 알았지?”
“그럼 우리 같이 가자.”
아무래도 혼자 그곳까지 운전하고 간다는 게 불안한 이경아는 강민지에게 같이 가 줄 것을 희망했다.
“아냐. 나 그쪽에 일이 있어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
“……. 알았어.”
이경아는 잠깐 망설이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하고 나서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그렇게 이경아는 강민지와 통화를 끝냈고,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팔당대교를 건너 양수리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김광덕은 잠시 서서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묻힌 아파트 공사 현장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러나 사물을 식별하지 못할 만큼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그는 하늘이 자신을 도와주는 거라고 믿었다. 그는 어제 이곳에 와 현장을 살펴본 뒤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김광덕은 차 트렁크를 열고 안에서 볼트 절단기를 꺼냈다. 아파트 골조가 반쯤 올라간 공사 현장에는 철망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었고, 철망으로 만든 문에는 맹꽁이 같이 생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가 볼트 절단기로 자물쇠를 아주 못쓰게 만들었다. 손에 길쭉한 철사와 손전등을 들고 옆에 서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동생인 김광현이 문을 밀자, 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빨리 서두르자.”
김광덕이 산처럼 높게 쌓인 모래더미 옆에 세워져 있는 덤프 트럭으로 가면서 차 도둑이 전문인 김광현에게 말했다. 사람이 주위에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조용했다.
차 도둑이 되기 전 김광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열아홉 살 먹은 경리 여직원을,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를 성폭행한 사장을 죽도록 두들겨 패기 전까지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김광현은 덤프 트럭 앞에 서서 운전석 창틀 사이로 길쭉한 철사를 넣고 능숙하게 손을 놀리자 금방 차 문이 열렸다.
“정말 너는 대단해.”
김광덕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감탄 섞인 목소리로 김광현에게 말했다.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김광현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나서 운전석에 올라타 만년필 크기 만한 전지를 입에 물고 상체를 숙인 체 숙달된 손놀림으로 핸들 아랫부분을 만지작거리자 이내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차 시동을 거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제 넌, 아까 내가 말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목표가 나타나면 연락을 해. 알았지?”
김광덕은 덤프 트럭의 시동을 걸어 놓고 내린 동생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주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므로 실수를 해선 안되었다.
“알았으니까, 형이나 실수하지마.”
“그럼, 이따 보자.”
덤프 트럭에 올라탄 김광덕은 공사 현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전조등을 끈 채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 뒤를 동생이 함께 타고 왔던 승용차를 운전하며 조심스럽게 따라오고 있었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편지를 띄우고,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춤을 춥시다…….”
해병대 곤조가를 부르면서 빗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김광덕은 갓길에 덤프 트럭을 세웠다. 그리고 시동을 켜놓은 채 전조등을 끈 다음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평상시 번잡한 도로엔 차량의 불빛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에게 오늘은 그야말로 최상의 날이었다.
김광덕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차창을 내려 밖으로 내던질 때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핸드폰 폴더를 열고, 지금 막 목표 차량인 빨간 승용차가 지나갔다는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동생은 차량번호를 확인한 결과 그 차가 틀림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5분, 5분만 있으면 빨간 승용차가 시야로 들어올 것이다. 김광덕은 여자의 몸 속에 정액을 쏟아 넣을 때와도 같은 흥분을 느끼며 기아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천천히 차선으로 진입했다.
이경아는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날까봐 속도를 60킬로미터 이상은 내지 않고 극도로 조심하면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에 차량이 뜸하다는 거였다.
이경아는 핸드폰이 울리자 차의 속도를 40킬로미터 이하로 낮췄다.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폴더를 열고 전화를 한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그녀는 핸드폰을 어깨와 턱으로 귀에 붙인 채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강민지였다.
“여보세요?”
“경아니? 나, 민지야.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어딘데?”
“거의 다 갔으니까, 조그만 기다려..”
“알았어. 빨리 와.”
이경아는 강민지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 폴더를 닫고서 면허시험장의 에스자 코스처럼 구불구불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때 전방에서 갑자기 덤프 트럭 한 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중앙선을 침범한 채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녀의 차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쭈뼛 곤두섰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경아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으나, 타이어가 귀청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순간 덤프 트럭은 그녀의 차를 힘껏 들이박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게 실로 눈 깜짝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장성우에게 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은 이경아가 교통사고가 난 이틀 뒤였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어둠이 깔린 저녁에 야반도주하다시피 신림동의 한 원룸으로 이사는 했지만 어영부영하다 짐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그였다.
갑자기 침대 위에서 김건모의 ‘짱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송창식의 ‘왜 불러’에서 바꾼 지 며칠 되지 않은 장성우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벨소리였다.
혹시 이경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아니 강민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망설이던 장성우는 조심스럽게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제발 이경아이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받고 있는 터라, 만약 강민지의 전화라면 폴더를 닫으면 그만이었다.
장성우는 핸드폰 번호를 바꿀 생각이었지만 이경아에게서 아직 전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틀림없이 자신에게 전화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에 장성우가 모르는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역번호가 ‘031’인 경기도 전화번호였다. 그래도 혹시 강민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성우는 망설이다 SEND를 눌렀다.
“여보세요?”
약간의 불안이 깔린 목소리였다.
“장성우 씨 되십니까?”
“그런데……, 누구십니까?”
장성우는 매우 무뚝뚝한 남자 목소리에 입안의 침이 쓰디쓴 맛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강민지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역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이요?”
장성우는 병원이라는 말에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소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경아 씨를 알고 계십니까?”
“예……. 그런데?”
“지금 이경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중에 있습니다.”
“이경아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성우는 못 믿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경아 씨는 매우 위독한 상태입니다.”
병원 원무과 직원은 최악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감정이 전혀 실려있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성우는 딛고 있는 얼음장이 쨍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디, 어……디 병원이죠?”
이경아가 교통사고를 당해 위독한 상태라니……, 기겁한 암탉처럼 화들짝 놀란 장성우는 말까지 더듬거려야 했다.
“구리시에 있는 한양대학병원입니다.”
“당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니, 교통사고를 당해 매우 위독한 상태라니……, 핸드폰 폴더를 닫고서 내동댕이치듯 침대 위로 던진 후 장성우는 현기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동안 오른손으로 벽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짐을 정리하면서 책꽂이에 꽂으려던 소설책 한 권이 들려져 있었다. 옛날 대학 다닐 때 이경아가 읽던 조정희의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고 싶네’라는 소설이었다. 아마, 그 이후로는 자신이 단 한 권의 소설책도 읽지 않은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엉거주춤 서 있던 장성우는 이윽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구리에 있는 한양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한 장성우는 경광등을 켠 채 사이렌을 울리며 119 구급차가 도착하고, 머리가 깨져 피를 많이 흘린 환자를 급히 응급실로 옮기는 구급대원들을 보면서 원무과로 갔다.
이경아의 입원을 확인하는 장성우에게 금테안경을 쓴 작달막한 젊은 직원이 보호자냐고 묻고서 먼저 그녀의 담당 의사를 만나야 한다고 일러주자 그는 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에 가까스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은 휠체어를 탄 어린아이와 링거병을 든 어린아이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많은 방문객들이 비좁게 어깨를 겹치고 서 있었다.
원무과 직원이 일러준 대로 장성우는 7층에서 내려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성우가 노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위태롭게 콧등에 걸쳐있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영문으로 된 의학서적을 보고 있었다.
“이경아 씨 일로…….”
“아, 그러세요.”
장성우는 의사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으면서 진료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진료실 벽면엔 형광판이 설치된 뷰어 박스가 있고 여러 개의 필름이 걸려 있었다. 이경아의 두개골과 목 부위를 촬영한 엑스레이 필름들이었다.
의사는 몹시 불안정한 표정으로 자신이 권한 의자에 앉는 장성우에게 이경아와의 관계부터 물었다.
“이경아 씨 소지품에서 나온 게 주민등록증하고 장성우 씨의 명함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렸는데, 이경아 씨하고는 어떤 사이입니까?”
아, 그렇구나. 이경아가 내 명함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서 병원에서 내게 연락을 한 거구나. 장성우는 택시를 타고 오면서 그때서야 왜 병원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연락을 했는지 의아해 했었다.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가슴 한구석에 눈처럼 쌓였던 의문이 스르르 풀리자 장성우는 이경아가 자신의 명함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안타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가 교통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녀는 자신에게 전화를 했으리라, 만나자고.
“약혼자입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은 아니지만, 장성우는 의사에게 보호자로서의 믿음을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세요.”
의사는 슬픈 눈으로 장성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다른 가족은……?”
장성우는 자신을 대하는 의사의 태도가 처음과는 달리 무척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곧 이경아의 불행을 의미하는 거였다. 갑자기 그는 진료실 안의 공기가 질식할 듯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전부 미국에 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장성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무 거리낌없이 거짓말이 목구멍에 술 넘어가 듯 술술 나왔다. 나중에 거짓말이 탄로가 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는 듯 의사는 음울한 표정으로 장성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조용히 앉아 있다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의사는 벽면에 형광판이 설치된 뷰어 박스 안에 걸려있는 필름을 가리키며 장성우에게 이경아의 현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그녀에게 최종적으로 선고한 진단은 뇌 과다출혈로 인한 뇌사 상태였다. 그녀가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척수신경이 손상당해 목 아래로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거였다.
칠흑처럼 검게 굳어진 얼굴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 장성우는 의사의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마치 꿈속에서 외계인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비행접시를 타고 우주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부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었다고 한들,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빈 라덴이 납치한 여객기로 부시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을 폭파시켰다고 한들 이보다 더한 충격이 어디 있겠는가. 충격이 너무 엄청나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아 장성우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종이배 23. <절망의 나락으로>
절망의 나락으로
청승맞게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가 어둠이 짙게 깔린 아스팔트를 흠뻑 적시며 차량들의 전조등 불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눈이 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올 겨울엔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경아는 하기 싫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 없는 곳이라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나와야 했다.
더구나 야간에 빗길 운행이 처음인지라 핸들을 잡고 있는 이경아의 두 손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면에다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최고 시속 60킬로미터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나마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온화해 눈이 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운전교습을 받을 때 강사가 가르쳐 준대로 뒤차가 경적을 울리던 말던 천천히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두 개의 와이퍼가 부채꼴 모양으로 연신 움직이며 부딪치는 빗방울들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하필 이런 날에 만나자고 할 게 뭐야.”
지금 이경아는 지난번 강민지와 함께 가 식사했던 ‘양수리성솟대’라는 음식점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비도 오고 날씨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 만나든지 아니면 서울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그녀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그곳에 먼저 가 있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왔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 이경아는 오승구와의 완전한 이별을 위해 아는 사람들 모두와 일체 연락을 끊고서 예전에 룸살롱에 다닐 때 만난 친구의 원룸에서 도피 생활하듯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친구는 할인 전문 화장품 가게를 하나 낼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도 룸살롱에 나가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고생하면 목표치에 도달하는 듯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경아 역시 그 친구의 대견스러움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송곳으로 찔러대는 것처럼 순간 순간 찾아오는 가슴의 통증을 잊을 수가 있었다.
하루 하루를 가만히 집구석에 갇혀 지내는 게 답답하고 무료하고, 괴롭고 서글펐지만 지금 마음을 단단히 잡지 못하면 나중에 집채만한 해일처럼 닥쳐올지 모르는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경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늘도 할 일이 없어 비디오 테이프나 빌려 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민지에게서 만나자고 전화가 온 것이다. 이경아는 진동으로 바꾼 핸드폰이 부르르 떨자 어쩌면 오승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폴더를 열어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군지를 먼저 확인을 했다. 월 이천 원씩 지불하면서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며칠 전부터 받고 있는 덕분에 그녀는 전화한 사람이 강민지라는 것을 알고 SEND를 눌렀다.
“경아니? 나, 민지야.”
“응,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니?”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강민지를 만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난 것이다.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작년이 된 것이다. 이경아는 보름 동안 할 일 없이 친구의 원룸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야, 그렇지 뭐. 그런데, 오늘 바쁘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은 하지만 어눌한 강민지의 목소리에서 이경아는 뭔가 안 좋은 일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바쁘지는 않아.”
“그럼, 나하고 만날 시간이 있겠구나.”
“그러지 뭐.”
“지난번 우리가 양수리에 갔을 때 식사하던 음식점 있지?”
“양수리성솟대?”
“그래. 이따 일곱 시에 거기에서 만나자.”
“지금 비가 오는데, 내가 어떻게 운전하고…….”
“긴히 의논할 게 있어서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니?”
“그래도 비가 오는데……”
이경아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선뜻 거절은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여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
“다른 데는 안 되고 꼭 거기서 만나야 되는 거니?”
“내가 그곳에 가고 싶어서 그래. 이따 그곳에서 만나. 알았지?”
“그럼 우리 같이 가자.”
아무래도 혼자 그곳까지 운전하고 간다는 게 불안한 이경아는 강민지에게 같이 가 줄 것을 희망했다.
“아냐. 나 그쪽에 일이 있어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
“……. 알았어.”
이경아는 잠깐 망설이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하고 나서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그렇게 이경아는 강민지와 통화를 끝냈고,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팔당대교를 건너 양수리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김광덕은 잠시 서서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묻힌 아파트 공사 현장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러나 사물을 식별하지 못할 만큼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그는 하늘이 자신을 도와주는 거라고 믿었다. 그는 어제 이곳에 와 현장을 살펴본 뒤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김광덕은 차 트렁크를 열고 안에서 볼트 절단기를 꺼냈다. 아파트 골조가 반쯤 올라간 공사 현장에는 철망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었고, 철망으로 만든 문에는 맹꽁이 같이 생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가 볼트 절단기로 자물쇠를 아주 못쓰게 만들었다. 손에 길쭉한 철사와 손전등을 들고 옆에 서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동생인 김광현이 문을 밀자, 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빨리 서두르자.”
김광덕이 산처럼 높게 쌓인 모래더미 옆에 세워져 있는 덤프 트럭으로 가면서 차 도둑이 전문인 김광현에게 말했다. 사람이 주위에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조용했다.
차 도둑이 되기 전 김광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열아홉 살 먹은 경리 여직원을,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를 성폭행한 사장을 죽도록 두들겨 패기 전까지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김광현은 덤프 트럭 앞에 서서 운전석 창틀 사이로 길쭉한 철사를 넣고 능숙하게 손을 놀리자 금방 차 문이 열렸다.
“정말 너는 대단해.”
김광덕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감탄 섞인 목소리로 김광현에게 말했다.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김광현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나서 운전석에 올라타 만년필 크기 만한 전지를 입에 물고 상체를 숙인 체 숙달된 손놀림으로 핸들 아랫부분을 만지작거리자 이내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차 시동을 거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제 넌, 아까 내가 말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목표가 나타나면 연락을 해. 알았지?”
김광덕은 덤프 트럭의 시동을 걸어 놓고 내린 동생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주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므로 실수를 해선 안되었다.
“알았으니까, 형이나 실수하지마.”
“그럼, 이따 보자.”
덤프 트럭에 올라탄 김광덕은 공사 현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전조등을 끈 채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 뒤를 동생이 함께 타고 왔던 승용차를 운전하며 조심스럽게 따라오고 있었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편지를 띄우고,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춤을 춥시다…….”
해병대 곤조가를 부르면서 빗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김광덕은 갓길에 덤프 트럭을 세웠다. 그리고 시동을 켜놓은 채 전조등을 끈 다음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평상시 번잡한 도로엔 차량의 불빛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에게 오늘은 그야말로 최상의 날이었다.
김광덕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차창을 내려 밖으로 내던질 때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핸드폰 폴더를 열고, 지금 막 목표 차량인 빨간 승용차가 지나갔다는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동생은 차량번호를 확인한 결과 그 차가 틀림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5분, 5분만 있으면 빨간 승용차가 시야로 들어올 것이다. 김광덕은 여자의 몸 속에 정액을 쏟아 넣을 때와도 같은 흥분을 느끼며 기아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천천히 차선으로 진입했다.
이경아는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날까봐 속도를 60킬로미터 이상은 내지 않고 극도로 조심하면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에 차량이 뜸하다는 거였다.
이경아는 핸드폰이 울리자 차의 속도를 40킬로미터 이하로 낮췄다.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폴더를 열고 전화를 한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그녀는 핸드폰을 어깨와 턱으로 귀에 붙인 채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강민지였다.
“여보세요?”
“경아니? 나, 민지야.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어딘데?”
“거의 다 갔으니까, 조그만 기다려..”
“알았어. 빨리 와.”
이경아는 강민지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 폴더를 닫고서 면허시험장의 에스자 코스처럼 구불구불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때 전방에서 갑자기 덤프 트럭 한 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중앙선을 침범한 채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녀의 차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쭈뼛 곤두섰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경아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으나, 타이어가 귀청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순간 덤프 트럭은 그녀의 차를 힘껏 들이박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게 실로 눈 깜짝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장성우에게 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은 이경아가 교통사고가 난 이틀 뒤였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어둠이 깔린 저녁에 야반도주하다시피 신림동의 한 원룸으로 이사는 했지만 어영부영하다 짐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그였다.
갑자기 침대 위에서 김건모의 ‘짱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송창식의 ‘왜 불러’에서 바꾼 지 며칠 되지 않은 장성우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벨소리였다.
혹시 이경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아니 강민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망설이던 장성우는 조심스럽게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제발 이경아이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받고 있는 터라, 만약 강민지의 전화라면 폴더를 닫으면 그만이었다.
장성우는 핸드폰 번호를 바꿀 생각이었지만 이경아에게서 아직 전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틀림없이 자신에게 전화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에 장성우가 모르는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역번호가 ‘031’인 경기도 전화번호였다. 그래도 혹시 강민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성우는 망설이다 SEND를 눌렀다.
“여보세요?”
약간의 불안이 깔린 목소리였다.
“장성우 씨 되십니까?”
“그런데……, 누구십니까?”
장성우는 매우 무뚝뚝한 남자 목소리에 입안의 침이 쓰디쓴 맛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강민지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역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이요?”
장성우는 병원이라는 말에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소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경아 씨를 알고 계십니까?”
“예……. 그런데?”
“지금 이경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중에 있습니다.”
“이경아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성우는 못 믿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경아 씨는 매우 위독한 상태입니다.”
병원 원무과 직원은 최악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감정이 전혀 실려있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성우는 딛고 있는 얼음장이 쨍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디, 어……디 병원이죠?”
이경아가 교통사고를 당해 위독한 상태라니……, 기겁한 암탉처럼 화들짝 놀란 장성우는 말까지 더듬거려야 했다.
“구리시에 있는 한양대학병원입니다.”
“당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니, 교통사고를 당해 매우 위독한 상태라니……, 핸드폰 폴더를 닫고서 내동댕이치듯 침대 위로 던진 후 장성우는 현기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동안 오른손으로 벽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짐을 정리하면서 책꽂이에 꽂으려던 소설책 한 권이 들려져 있었다. 옛날 대학 다닐 때 이경아가 읽던 조정희의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고 싶네’라는 소설이었다. 아마, 그 이후로는 자신이 단 한 권의 소설책도 읽지 않은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엉거주춤 서 있던 장성우는 이윽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구리에 있는 한양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한 장성우는 경광등을 켠 채 사이렌을 울리며 119 구급차가 도착하고, 머리가 깨져 피를 많이 흘린 환자를 급히 응급실로 옮기는 구급대원들을 보면서 원무과로 갔다.
이경아의 입원을 확인하는 장성우에게 금테안경을 쓴 작달막한 젊은 직원이 보호자냐고 묻고서 먼저 그녀의 담당 의사를 만나야 한다고 일러주자 그는 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에 가까스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은 휠체어를 탄 어린아이와 링거병을 든 어린아이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많은 방문객들이 비좁게 어깨를 겹치고 서 있었다.
원무과 직원이 일러준 대로 장성우는 7층에서 내려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성우가 노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위태롭게 콧등에 걸쳐있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영문으로 된 의학서적을 보고 있었다.
“이경아 씨 일로…….”
“아, 그러세요.”
장성우는 의사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으면서 진료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진료실 벽면엔 형광판이 설치된 뷰어 박스가 있고 여러 개의 필름이 걸려 있었다. 이경아의 두개골과 목 부위를 촬영한 엑스레이 필름들이었다.
의사는 몹시 불안정한 표정으로 자신이 권한 의자에 앉는 장성우에게 이경아와의 관계부터 물었다.
“이경아 씨 소지품에서 나온 게 주민등록증하고 장성우 씨의 명함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렸는데, 이경아 씨하고는 어떤 사이입니까?”
아, 그렇구나. 이경아가 내 명함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서 병원에서 내게 연락을 한 거구나. 장성우는 택시를 타고 오면서 그때서야 왜 병원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연락을 했는지 의아해 했었다.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가슴 한구석에 눈처럼 쌓였던 의문이 스르르 풀리자 장성우는 이경아가 자신의 명함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안타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가 교통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녀는 자신에게 전화를 했으리라, 만나자고.
“약혼자입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은 아니지만, 장성우는 의사에게 보호자로서의 믿음을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세요.”
의사는 슬픈 눈으로 장성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다른 가족은……?”
장성우는 자신을 대하는 의사의 태도가 처음과는 달리 무척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곧 이경아의 불행을 의미하는 거였다. 갑자기 그는 진료실 안의 공기가 질식할 듯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전부 미국에 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장성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무 거리낌없이 거짓말이 목구멍에 술 넘어가 듯 술술 나왔다. 나중에 거짓말이 탄로가 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는 듯 의사는 음울한 표정으로 장성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조용히 앉아 있다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의사는 벽면에 형광판이 설치된 뷰어 박스 안에 걸려있는 필름을 가리키며 장성우에게 이경아의 현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그녀에게 최종적으로 선고한 진단은 뇌 과다출혈로 인한 뇌사 상태였다. 그녀가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척수신경이 손상당해 목 아래로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거였다.
칠흑처럼 검게 굳어진 얼굴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 장성우는 의사의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마치 꿈속에서 외계인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비행접시를 타고 우주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부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었다고 한들,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빈 라덴이 납치한 여객기로 부시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을 폭파시켰다고 한들 이보다 더한 충격이 어디 있겠는가. 충격이 너무 엄청나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아 장성우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