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다홍이 문을 열고 들어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문앞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나갈 때에도 스스로를 자제시켜야 했다. 아마 은수가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했다면 다홍은 맥없이 주저앉아 울었을지 모른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은수에게 기대어 울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음날 은수를 보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은수는 아직도 다홍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려는 자신의 몸이 미련스러웠다. 다홍은 지금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어 은수가 손만 뻗으면 금방 쓰러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홍의 자존심이 다칠 것이다. 다른 사람처럼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주고 힘들 때 가만히 안아줄 수 있는 사이가 어서 되길 바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다홍을 바라보기만 했다.
은수는 출근하려다 방문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다시는 그렇게 연락 안되는 일 없을 거예요. 설마 버스가 사고난다해도 저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옵니다요. 불사조 이다홍!!! 어제 일은 너그러이 용서를...^^>
아침에 학원가면서 붙여놓고 갔나보다. 은수는 싱긋 미소지으며 포스트잇을 접어 주머니안에 넣었다. 은수의 처방이 제대로 약효를 발휘했나 보다. 다홍은 금새 밤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애교까지 부려가며 은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시험이 코 앞에 다가왔다. 마지막 일주일은 수업이 없이 특강으로만 진행되는 터라 다홍은 조금 일찍 들어왔다. 은수의 어머니는 다홍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 미안해서 어쩌지? 이번에는 은수 아빠 출장이 좀 길 것 같아서 말이야. 다홍이 학생 시험치는 것도 못보게 생겼네. 그래도 아침에 내가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어머니. 저 혼자 가도 되는걸요.”
“시험은 서울로 치기로 한거야?”
“사실 아직 고민이예요. 서울이 경쟁률은 좀 낮은데 그래도 뭐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몰리니까..”
“기왕이면 큰 물에서 놀아야지. 서울로 봐. 서울에서 되면 계속 여기있으면 되잖아. 나도 딸 하나 더 얻은 것 같아서 좋은데. 어쨌거나 시험 잘 보고 나 돌아올때 멋진 선물 사올께.”
언제나처럼 한마디 한마디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시는 분이다. 다홍은 은수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치는 날 다홍은 설사가 나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새벽부터 일어나 잠을 설쳤다. 은수도 덩달아 일어나서는 약을 가지고 와서 먹였다. 예민한 성격이라 습관처럼 시험볼때는 그런 것이다. 시험보는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다홍이 마치고 혼자 갈 수 있다고 한사코 먼저 가라고 했지만 은수는 주차를 시켜놓고 기다렸다.
시험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다홍이 차에 올랐다. 은수는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아 차를 몰았다.
“낙지볶음 먹을까? 매운거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는데.”
침묵을 깨는 은수의 말에 그제서야 다홍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래요.”
힘없이 대답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보기에도 매워 보이는 시뻘건 낙지볶음이 나오자 은수는 다홍의 밥 위에 낙지를 집어서 올려 주었다.
“이거 무조건 다 먹고 가야돼. 안그럼 밀린 방세 받을거야.”
다홍은 은수 손에서 숟가락을 받아 한 입 가득 넣었다. 매웠다. 시험지에 걸린 인생도 매웠지만 낙지도 매웠다. 호호 불어가며 밥 한 그릇과 낙지를 다 먹었다.
매운 입을 불어가며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은수는 거북이 운전을 하며 조심스레 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민경과 준용이 맥주를 사들고 은수네로 왔다. 처음 다홍이 은수네 집에 와서 놀랐던 것처럼 민경과 준용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홍이 말처럼 모델하우스네요. 우리 넘 촌스러운가? 하하”
준용은 소파에 앉아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집 구경을 했다.
“이제 다홍이 시험도 끝났는데 발표날 때까지 무조건 놀아야지. 뭐하고 놀거야?”
“글쎄... 일단은 대구 가서 부모님 만나고, 그 다음엔 여행을 가볼까 생각중이야.”
“여행 좋다. 나도 여행가고 싶다.”
민경이 부러워하자 준용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그럼 우리도 가자. 형 휴가 받을 수 있죠?”
“나야 뭐 괜찮지.”
“좋아. 그럼 우리 12월 마지막주에 같이 여행가요. 가서 새해 일출 보고 돌아오면 되니까. 어때?”
준용의 말에 다들 거수로 찬성을 표시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여행이지만 각자의 가슴에 설레임을 안겨 주었다.
은수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날 은수와 함께 강민영이 왔다. 민영은 은수 어머니에게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애교를 떨고 있었다. 학원에 갔던 다홍이 들어오자 어머니는 선물을 꺼내 놓으셨다.
“민영이는 올 줄 모르고 선물을 준비 못했는데 어쩌지? 다홍이는 이번에 시험을 봐서 수고했다고 주는 선물이야. 풀어봐.”
다홍은 소파에 앉으며 선물을 풀어보았다. 커다란 아쿠아마린이 박힌 목걸이다.
“태국은 이게 유명하더라구. 젊은 사람들이 사길래 나도 하나 했지. 마음에 드니?”
“네. 감사합니다. 너무 예뻐요.”
그러자 민영은 다홍의 손에서 목걸이를 빼앗아 가듯 가져가서는 이리저리 보더니 목에 걸어봤다.
“어머니~, 너무 예뻐요. 저도 나중에 사주실거죠? 꼭 사주세요.”
“그래그래. 너도 사주마. 은수야, 다홍이 목에 한번 걸어줘봐라. 어떤지 보게.”
민영은 마지못해 은수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다홍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는 은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민영은 눈치챘다.
“다홍이는 살결이 희니까 이런 색 보석도 잘 어울리는구나. 비싼거 아니니까 편하게 하고 다니렴.”
어머니는 흡족한 듯 말씀하셔서 다홍도 만족스러운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목걸이 선물을 받아보긴 처음이다.
어머니가 쉰다며 들어가시자 민영은 은수의 방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그곳만이 다홍을 피해 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책 보려구? 니가 부탁한 책 책상위에 있어. 난 다홍이랑 상의할게 있거든.”
그렇지만 민영은 먼저 올라가지 않고 은수가 뽑아온 자료를 보며 다홍과 여행코스를 상의할 동안 옆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둘이 여행가?”
“뭐 그럴 일이 있어. 다홍이 니가 꼼꼼하게 읽어보고 결정해. 우리는 다들 바쁘니까 니가 제일 한가하다고 니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으니까.”
“그럼 나중에 뒷말하기 없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대신 재미없으면 니가 재롱떨어야 한다는 거 잊지마.”
다홍은 민영의 눈초리에 살이 따가웠다.
“선배, 그만 올라가봐요. 언니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구만.”
다홍은 먼저 일어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은수는 민영과 있을 동안 방문을 열어두었다. 둘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 기집애, 대체 언제 너희집에서 나갈거래? 시험칠때까지 있기로 한거 아니었어?”
“니가 상관할 일 아니야.”
“왜 같이 여행을 가는건데? 너 그러다 쟤가 너한테 엉겨붙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것도 니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왜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병원 사람들이 너 우렁각시랑 언제 결혼하냐고 나한테 물어대더라. 쟤가 우렁각시면 난 평강공주다. 치.”
“강민영, 아쉽게도 난 바보온달이 아닌데 어쩌냐? 너무 늦기 전에 집에 가라.”
“너 이상해진거 알지? 예전에는 우리 친구들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그 동아리 나가고 부터는 어린애들하고 어울려다니고. 너도 공중보건의를 했어야 했어.”
“난 아직도 우리 친구들 좋아해. 하지만 그런 거랑은 달라. 걔들은 내 동생들 같아. 난 동아리 후배들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니까 함부로 말하지마.”
민영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은수 어머니께 다소곳하고 애교넘치게 작별인사하고는 나갔다.
아침을 늦게 먹고 이모를 도와 청소를 하는데 은수 어머니가 같이 백화점 가자고 했다. 다홍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은수 어머니는 중국 갈 때 입을 옷이 없다며 핑계댔다. 딸을 캐나다로 시집보낸 후로 딸이랑 쇼핑가는 것이 부러웠던 은수 어머니는 다홍의 팔짱을 끼고는 마치 친 모녀처럼 백화점을 누비고 다녔다.
은수 어머니가 자꾸만 옷을 사줘서 부담스러웠지만 너무나 해맑게 좋아하셔서 다홍도 더 이상 사양할 수만은 없었다.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VIP라운지로 가서 차를 마시는데 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논문 자료를 뽑아서 책상위에 그냥 올려놓고 갔다고 가져다 달라는 것이다. 서둘러 집에 와서 은수가 말한 자료를 챙겨 나가려는데 은수 어머니가 다홍을 잡았다.
“그래도 은수 직장인데 예쁘게 입고 가야 하지 않겠니? 그 옷은 너무 학생같다. 오늘 산 코트랑 스커트 입고 가. 부츠는 내가 꺼내 놓을께. 예전에 은수랑 백화점 갔을 때 사놓은게 있거든.”
다홍이 옷을 갈아입고 오자 이모는 이미 부츠를 다 닦아 놓으셨다. 어머니는 부츠를 들어 보이며 다홍을 향해 웃었다.
“나 너무 주책이라고 욕하지 마라. 너 주려고 샀다가 계속 넣어놓고는 이제야 준단다. 내가 정신이 이렇다니깐.”
“언제 사셨어요?”
“지지난 주엔가 은수랑 같이 백화점에 갔더니 이 녀석이 내가 신발 사는 동안 계속 여자 구두를 보고 있더라구. 그래서 내가 하나 사줄까 했더니 이 녀석이 냉큼 ‘230 사이즈요.’ 하더라구. 그래서 생각해보니 다홍이 밖에 없는거야. 사실, 민영이도 키가 커서 그런지 발도 크더라구. 어때? 이쁘지?”
그의 어머니는 다홍이 부츠를 신을 동안 계속 서서 보셨다.
“딱 맞네. 역시 내 눈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니깐. 이모, 어때? 젊은 애들한테 어울리는 걸로 잘 골랐지?”
“네, 사모님. 다홍이한테 잘 어울리네요. 어찌 그리 잘 맞추셨어요?”
“이모도 아들 있으니 알게 되겠지만, 내 속으로 낳은 아들이라서 그런지 엄마는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금새 알겠더라구. 안그래 다홍이? 우리 은수가 다홍이 좋아하는거 맞지?”
다홍의 뺨이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었다. 다홍은 웃고 있는 두 분을 남겨두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은수의 고백을 아마 받는다 해도 이보단 더 감격스럽지 못할 것이리라.
병원에 도착해서 전화하니 은수는 로비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다가와서 환자가 밀려 바쁘다는 것이다.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가운을 입은 의사 둘이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다홍에게 인사했다.
“혹시 장은수선생 우렁각시 아니세요? 성함이 주홍이던가..다홍이던가..”
다홍은 그들이 은수와 아는 사이로 보여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다홍입니다...그런데 어떻게 절 알아보셨어요?”
“저희야 뭐 매일 뵙는걸요. 장선생 책상에 사진 있어요. 그 방 갈때마다 봤으니까 이제 남같지가 않더라구요. 실물은 처음뵙는데 실물도 예쁘시네요.”
“사진이라구요?”
다홍은 자기 사진이 언제 은수 손에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네. 아마 몇 년 된 것 같은데요. 그 사진 올려진지. 요즘 장선생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거든요. 그래서 병원에서는 다홍씨를 우렁각시라고 부릅니다. 아참, 저희는 장선생과는 동기구요. 저는 김상기, 이 친구는 윤동일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선배가 뭘 좀 갖다 달라고 해서..”
그러자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오~ 장은수 수 쓰는거 봐라. 원장님한테 완전히 도장찍어 버릴려고 작정하셨구만.”
“네?”
다홍이 궁금해 하자 윤동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해주었다.
“우리 병원 원장님이 장선생을 사위로 맞이하고 싶으셔서 계속 닥달하셨나봐요. 그래서 오늘 원장님 회진 날인거 알고 일부러 다홍씨 부른 거 같은데요. 좀 있으면 원장님 이 앞을 지나가실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개의 구두굽 소리가 났다. 한무리의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기러기 떼처럼 몰려왔다.
“원장님 나오셨습니까?”
김상기가 인사를 하자 그 무리의 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어머, 다홍씨가 여긴 웬일이예요?”
그 무리의 앞쪽에 있던 민영이 다홍을 알아보았다.
“민영씨도 다홍씨 알아요?”
김상기의 물음에 민영은 대답도 않고 다홍에게로 다가갔다.
“선배가 부탁해서 뭣 좀 가지고 왔어요. 언니도 여기서 일하세요?”
민영은 다홍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뒤를 돌아 선두에 걸어오던 원장이라는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아빠, 얘가 장선생네 집에 사는 그 기집애라구요.”
원장이 헛기침을 하자 민영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좀 전의 차가운 이미지로 돌아왔다.
“그래. 장선생이 애인이라고 하고 다닌다던데 결혼할 사인가?”
민영과는 다르게 중후한 멋이 뿜어나오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네, 원장님. 주례는 원장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홍은 뒤를 돌아보았다. 은수가 어느새 다홍의 뒤에 와서 대신 대답했다. 원장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할말이 없을 때마다 헛기침을 하는 것이 습관인가 보다.
“원장님, 그럼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환자가 밀려서요.. 가자.”
은수는 보란 듯이 다홍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 많은 시선들을 뒤로 하고 자신의 진료실로 데려갔다. 곧이어 김상기와 윤동일이 진료실로 들어섰다.
“장선생, 비책이라고 하던게 이거였냐? 우리 대장님 완전 물먹은 소 되었더라. 퉁퉁 불어서는. 다홍씨 앞으로 장선생 병원생활 힘들겠는데요. 어쩌죠?”
다홍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환자 안봐요?”
은수가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자, 다홍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오늘 일은 끝났습니다. 너희들도 술 한잔 하려고 기다린 거 맞지? 다들 나갑시다.”
상기와 동일도 방에 들렀다 온다고 나가서 은수와 둘만 남았다. 다홍은 그들이 말해 주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다. 책상 한켠에 작은 액자가 보였다.
“뭐 찾아?”
“사진요... 이 사진 어떻게 구했어요?”
동아리 총회하던 날 준용이 카메라 새로 샀다며 찍어 준 것이다.
“준용이가 기증했지. 왜? 마음에 안들어?”
“너무 통통하게 나왔어요. 호빵같이.”
“젖살이 덜 빠져서 그런거지. 이때가 더 귀엽고 좋은데.”
은수는 다홍의 손에서 액자를 가져가서는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선배, 이 사진 무슨 의미예요?”
다홍이 진지하게 물어서 은수도 언젠가 한번은 진지하게 말할 때를 기다렸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로비에서 기다리니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이다홍, 궁금한게 많겠지만 지금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나가자. 차츰차츰 대답해 줄게. 됐지?”
“그럼 한가지만 더요. 선배도 민영 언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민영이는 좋은 친구라고. 오늘 일은 어쩔 수 없이 민영이에게 상처가 되겠지만 내가 확실하게 내 감정을 밝히지 않으면 민영이와는 친구사이로도 못 지내게 되지 않겠니?”
상기와 동일은 타고난 술꾼들이었다. 물론 은수가 다홍의 술까지 마셔대느라 남들보다 2배는 더 마신 탓도 있겠지만 주신이라던 은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장은수, 오늘 약한 모습 아니냐? 한의과대학 주신이 이 정도로 얼굴이 붉어지면 쓰겠냐?”
상기의 놀림에 은수는 같이 건배를 하고 한 잔 더 마시려다가 다홍이 손을 잡는 바람에 멈추었다.
“그만마셔요.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체했나봐요.”
모두 다홍이 은수를 보호하기 위해 한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척했다.
“이런, 다홍씨 그럼 안돼죠. 장은수, 뭐하냐? 얼른 마님 모시고 들어가봐라.”
은수도 친구들이 순순히 보내줄 때 얼른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대리운전을 불러 다홍과 뒷자리에 탔다. 집앞에 도착할 때까지 은수는 다홍의 손을 꼭잡고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대리운전 기사가 차를 세우자 은수는 눈을 떠서 술집을 나올때 비틀거리던 모습과는 다르게 똑바로 서서 걸었다. 어서 술자리를 끝내고 싶어 많이 취한 척 했나보다. 계산을 하고 다홍이 열쇠로 대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더니 조용히 다홍의 손을 잡고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어른들이 깨실까봐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둘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갔다. 다홍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은수가 다홍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잘자요, 선배.”
은수는 다홍을 끌어당겨 꼬옥 끌어안았다. 은수의 얼굴이 키스를 하려고 다가오자 다홍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생각했던 마주침은 없었다. 눈을 뜨니 은수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한거야? 혹시 키스?”
“몰라요. 놔줘요.”
다홍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다음에. 다음에 근사하고 멋진 곳에서. 첫키스니까.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아가씨.”
은수는 다홍을 다시 한번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다홍은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빙그레 웃던 은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은수가 샤워하고 들어가는지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다홍도 씻으러 가야하는데 이놈의 심장은 고장이 났는지 자꾸만 쿵쾅거려서 침대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다홍 Story +17
은수는 다홍이 문을 열고 들어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문앞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나갈 때에도 스스로를 자제시켜야 했다. 아마 은수가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했다면 다홍은 맥없이 주저앉아 울었을지 모른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은수에게 기대어 울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음날 은수를 보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은수는 아직도 다홍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려는 자신의 몸이 미련스러웠다. 다홍은 지금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어 은수가 손만 뻗으면 금방 쓰러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홍의 자존심이 다칠 것이다. 다른 사람처럼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주고 힘들 때 가만히 안아줄 수 있는 사이가 어서 되길 바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다홍을 바라보기만 했다.
은수는 출근하려다 방문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다시는 그렇게 연락 안되는 일 없을 거예요. 설마 버스가 사고난다해도 저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옵니다요. 불사조 이다홍!!! 어제 일은 너그러이 용서를...^^>
아침에 학원가면서 붙여놓고 갔나보다. 은수는 싱긋 미소지으며 포스트잇을 접어 주머니안에 넣었다. 은수의 처방이 제대로 약효를 발휘했나 보다. 다홍은 금새 밤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애교까지 부려가며 은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시험이 코 앞에 다가왔다. 마지막 일주일은 수업이 없이 특강으로만 진행되는 터라 다홍은 조금 일찍 들어왔다. 은수의 어머니는 다홍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 미안해서 어쩌지? 이번에는 은수 아빠 출장이 좀 길 것 같아서 말이야. 다홍이 학생 시험치는 것도 못보게 생겼네. 그래도 아침에 내가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어머니. 저 혼자 가도 되는걸요.”
“시험은 서울로 치기로 한거야?”
“사실 아직 고민이예요. 서울이 경쟁률은 좀 낮은데 그래도 뭐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몰리니까..”
“기왕이면 큰 물에서 놀아야지. 서울로 봐. 서울에서 되면 계속 여기있으면 되잖아. 나도 딸 하나 더 얻은 것 같아서 좋은데. 어쨌거나 시험 잘 보고 나 돌아올때 멋진 선물 사올께.”
언제나처럼 한마디 한마디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시는 분이다. 다홍은 은수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치는 날 다홍은 설사가 나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새벽부터 일어나 잠을 설쳤다. 은수도 덩달아 일어나서는 약을 가지고 와서 먹였다. 예민한 성격이라 습관처럼 시험볼때는 그런 것이다. 시험보는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다홍이 마치고 혼자 갈 수 있다고 한사코 먼저 가라고 했지만 은수는 주차를 시켜놓고 기다렸다.
시험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다홍이 차에 올랐다. 은수는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아 차를 몰았다.
“낙지볶음 먹을까? 매운거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는데.”
침묵을 깨는 은수의 말에 그제서야 다홍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래요.”
힘없이 대답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보기에도 매워 보이는 시뻘건 낙지볶음이 나오자 은수는 다홍의 밥 위에 낙지를 집어서 올려 주었다.
“이거 무조건 다 먹고 가야돼. 안그럼 밀린 방세 받을거야.”
다홍은 은수 손에서 숟가락을 받아 한 입 가득 넣었다. 매웠다. 시험지에 걸린 인생도 매웠지만 낙지도 매웠다. 호호 불어가며 밥 한 그릇과 낙지를 다 먹었다.
매운 입을 불어가며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은수는 거북이 운전을 하며 조심스레 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민경과 준용이 맥주를 사들고 은수네로 왔다. 처음 다홍이 은수네 집에 와서 놀랐던 것처럼 민경과 준용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홍이 말처럼 모델하우스네요. 우리 넘 촌스러운가? 하하”
준용은 소파에 앉아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집 구경을 했다.
“이제 다홍이 시험도 끝났는데 발표날 때까지 무조건 놀아야지. 뭐하고 놀거야?”
“글쎄... 일단은 대구 가서 부모님 만나고, 그 다음엔 여행을 가볼까 생각중이야.”
“여행 좋다. 나도 여행가고 싶다.”
민경이 부러워하자 준용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그럼 우리도 가자. 형 휴가 받을 수 있죠?”
“나야 뭐 괜찮지.”
“좋아. 그럼 우리 12월 마지막주에 같이 여행가요. 가서 새해 일출 보고 돌아오면 되니까. 어때?”
준용의 말에 다들 거수로 찬성을 표시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여행이지만 각자의 가슴에 설레임을 안겨 주었다.
은수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날 은수와 함께 강민영이 왔다. 민영은 은수 어머니에게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애교를 떨고 있었다. 학원에 갔던 다홍이 들어오자 어머니는 선물을 꺼내 놓으셨다.
“민영이는 올 줄 모르고 선물을 준비 못했는데 어쩌지? 다홍이는 이번에 시험을 봐서 수고했다고 주는 선물이야. 풀어봐.”
다홍은 소파에 앉으며 선물을 풀어보았다. 커다란 아쿠아마린이 박힌 목걸이다.
“태국은 이게 유명하더라구. 젊은 사람들이 사길래 나도 하나 했지. 마음에 드니?”
“네. 감사합니다. 너무 예뻐요.”
그러자 민영은 다홍의 손에서 목걸이를 빼앗아 가듯 가져가서는 이리저리 보더니 목에 걸어봤다.
“어머니~, 너무 예뻐요. 저도 나중에 사주실거죠? 꼭 사주세요.”
“그래그래. 너도 사주마. 은수야, 다홍이 목에 한번 걸어줘봐라. 어떤지 보게.”
민영은 마지못해 은수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다홍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는 은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민영은 눈치챘다.
“다홍이는 살결이 희니까 이런 색 보석도 잘 어울리는구나. 비싼거 아니니까 편하게 하고 다니렴.”
어머니는 흡족한 듯 말씀하셔서 다홍도 만족스러운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목걸이 선물을 받아보긴 처음이다.
어머니가 쉰다며 들어가시자 민영은 은수의 방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그곳만이 다홍을 피해 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책 보려구? 니가 부탁한 책 책상위에 있어. 난 다홍이랑 상의할게 있거든.”
그렇지만 민영은 먼저 올라가지 않고 은수가 뽑아온 자료를 보며 다홍과 여행코스를 상의할 동안 옆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둘이 여행가?”
“뭐 그럴 일이 있어. 다홍이 니가 꼼꼼하게 읽어보고 결정해. 우리는 다들 바쁘니까 니가 제일 한가하다고 니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으니까.”
“그럼 나중에 뒷말하기 없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대신 재미없으면 니가 재롱떨어야 한다는 거 잊지마.”
다홍은 민영의 눈초리에 살이 따가웠다.
“선배, 그만 올라가봐요. 언니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구만.”
다홍은 먼저 일어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은수는 민영과 있을 동안 방문을 열어두었다. 둘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 기집애, 대체 언제 너희집에서 나갈거래? 시험칠때까지 있기로 한거 아니었어?”
“니가 상관할 일 아니야.”
“왜 같이 여행을 가는건데? 너 그러다 쟤가 너한테 엉겨붙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것도 니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왜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병원 사람들이 너 우렁각시랑 언제 결혼하냐고 나한테 물어대더라. 쟤가 우렁각시면 난 평강공주다. 치.”
“강민영, 아쉽게도 난 바보온달이 아닌데 어쩌냐? 너무 늦기 전에 집에 가라.”
“너 이상해진거 알지? 예전에는 우리 친구들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그 동아리 나가고 부터는 어린애들하고 어울려다니고. 너도 공중보건의를 했어야 했어.”
“난 아직도 우리 친구들 좋아해. 하지만 그런 거랑은 달라. 걔들은 내 동생들 같아. 난 동아리 후배들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니까 함부로 말하지마.”
민영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은수 어머니께 다소곳하고 애교넘치게 작별인사하고는 나갔다.
아침을 늦게 먹고 이모를 도와 청소를 하는데 은수 어머니가 같이 백화점 가자고 했다. 다홍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은수 어머니는 중국 갈 때 입을 옷이 없다며 핑계댔다. 딸을 캐나다로 시집보낸 후로 딸이랑 쇼핑가는 것이 부러웠던 은수 어머니는 다홍의 팔짱을 끼고는 마치 친 모녀처럼 백화점을 누비고 다녔다.
은수 어머니가 자꾸만 옷을 사줘서 부담스러웠지만 너무나 해맑게 좋아하셔서 다홍도 더 이상 사양할 수만은 없었다.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VIP라운지로 가서 차를 마시는데 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논문 자료를 뽑아서 책상위에 그냥 올려놓고 갔다고 가져다 달라는 것이다. 서둘러 집에 와서 은수가 말한 자료를 챙겨 나가려는데 은수 어머니가 다홍을 잡았다.
“그래도 은수 직장인데 예쁘게 입고 가야 하지 않겠니? 그 옷은 너무 학생같다. 오늘 산 코트랑 스커트 입고 가. 부츠는 내가 꺼내 놓을께. 예전에 은수랑 백화점 갔을 때 사놓은게 있거든.”
다홍이 옷을 갈아입고 오자 이모는 이미 부츠를 다 닦아 놓으셨다. 어머니는 부츠를 들어 보이며 다홍을 향해 웃었다.
“나 너무 주책이라고 욕하지 마라. 너 주려고 샀다가 계속 넣어놓고는 이제야 준단다. 내가 정신이 이렇다니깐.”
“언제 사셨어요?”
“지지난 주엔가 은수랑 같이 백화점에 갔더니 이 녀석이 내가 신발 사는 동안 계속 여자 구두를 보고 있더라구. 그래서 내가 하나 사줄까 했더니 이 녀석이 냉큼 ‘230 사이즈요.’ 하더라구. 그래서 생각해보니 다홍이 밖에 없는거야. 사실, 민영이도 키가 커서 그런지 발도 크더라구. 어때? 이쁘지?”
그의 어머니는 다홍이 부츠를 신을 동안 계속 서서 보셨다.
“딱 맞네. 역시 내 눈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니깐. 이모, 어때? 젊은 애들한테 어울리는 걸로 잘 골랐지?”
“네, 사모님. 다홍이한테 잘 어울리네요. 어찌 그리 잘 맞추셨어요?”
“이모도 아들 있으니 알게 되겠지만, 내 속으로 낳은 아들이라서 그런지 엄마는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금새 알겠더라구. 안그래 다홍이? 우리 은수가 다홍이 좋아하는거 맞지?”
다홍의 뺨이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었다. 다홍은 웃고 있는 두 분을 남겨두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은수의 고백을 아마 받는다 해도 이보단 더 감격스럽지 못할 것이리라.
병원에 도착해서 전화하니 은수는 로비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다가와서 환자가 밀려 바쁘다는 것이다.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가운을 입은 의사 둘이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다홍에게 인사했다.
“혹시 장은수선생 우렁각시 아니세요? 성함이 주홍이던가..다홍이던가..”
다홍은 그들이 은수와 아는 사이로 보여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다홍입니다...그런데 어떻게 절 알아보셨어요?”
“저희야 뭐 매일 뵙는걸요. 장선생 책상에 사진 있어요. 그 방 갈때마다 봤으니까 이제 남같지가 않더라구요. 실물은 처음뵙는데 실물도 예쁘시네요.”
“사진이라구요?”
다홍은 자기 사진이 언제 은수 손에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네. 아마 몇 년 된 것 같은데요. 그 사진 올려진지. 요즘 장선생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거든요. 그래서 병원에서는 다홍씨를 우렁각시라고 부릅니다. 아참, 저희는 장선생과는 동기구요. 저는 김상기, 이 친구는 윤동일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선배가 뭘 좀 갖다 달라고 해서..”
그러자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오~ 장은수 수 쓰는거 봐라. 원장님한테 완전히 도장찍어 버릴려고 작정하셨구만.”
“네?”
다홍이 궁금해 하자 윤동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해주었다.
“우리 병원 원장님이 장선생을 사위로 맞이하고 싶으셔서 계속 닥달하셨나봐요. 그래서 오늘 원장님 회진 날인거 알고 일부러 다홍씨 부른 거 같은데요. 좀 있으면 원장님 이 앞을 지나가실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개의 구두굽 소리가 났다. 한무리의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기러기 떼처럼 몰려왔다.
“원장님 나오셨습니까?”
김상기가 인사를 하자 그 무리의 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어머, 다홍씨가 여긴 웬일이예요?”
그 무리의 앞쪽에 있던 민영이 다홍을 알아보았다.
“민영씨도 다홍씨 알아요?”
김상기의 물음에 민영은 대답도 않고 다홍에게로 다가갔다.
“선배가 부탁해서 뭣 좀 가지고 왔어요. 언니도 여기서 일하세요?”
민영은 다홍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뒤를 돌아 선두에 걸어오던 원장이라는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아빠, 얘가 장선생네 집에 사는 그 기집애라구요.”
원장이 헛기침을 하자 민영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좀 전의 차가운 이미지로 돌아왔다.
“그래. 장선생이 애인이라고 하고 다닌다던데 결혼할 사인가?”
민영과는 다르게 중후한 멋이 뿜어나오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네, 원장님. 주례는 원장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홍은 뒤를 돌아보았다. 은수가 어느새 다홍의 뒤에 와서 대신 대답했다. 원장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할말이 없을 때마다 헛기침을 하는 것이 습관인가 보다.
“원장님, 그럼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환자가 밀려서요.. 가자.”
은수는 보란 듯이 다홍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 많은 시선들을 뒤로 하고 자신의 진료실로 데려갔다. 곧이어 김상기와 윤동일이 진료실로 들어섰다.
“장선생, 비책이라고 하던게 이거였냐? 우리 대장님 완전 물먹은 소 되었더라. 퉁퉁 불어서는. 다홍씨 앞으로 장선생 병원생활 힘들겠는데요. 어쩌죠?”
다홍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환자 안봐요?”
은수가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자, 다홍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오늘 일은 끝났습니다. 너희들도 술 한잔 하려고 기다린 거 맞지? 다들 나갑시다.”
상기와 동일도 방에 들렀다 온다고 나가서 은수와 둘만 남았다. 다홍은 그들이 말해 주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다. 책상 한켠에 작은 액자가 보였다.
“뭐 찾아?”
“사진요... 이 사진 어떻게 구했어요?”
동아리 총회하던 날 준용이 카메라 새로 샀다며 찍어 준 것이다.
“준용이가 기증했지. 왜? 마음에 안들어?”
“너무 통통하게 나왔어요. 호빵같이.”
“젖살이 덜 빠져서 그런거지. 이때가 더 귀엽고 좋은데.”
은수는 다홍의 손에서 액자를 가져가서는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선배, 이 사진 무슨 의미예요?”
다홍이 진지하게 물어서 은수도 언젠가 한번은 진지하게 말할 때를 기다렸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로비에서 기다리니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이다홍, 궁금한게 많겠지만 지금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나가자. 차츰차츰 대답해 줄게. 됐지?”
“그럼 한가지만 더요. 선배도 민영 언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민영이는 좋은 친구라고. 오늘 일은 어쩔 수 없이 민영이에게 상처가 되겠지만 내가 확실하게 내 감정을 밝히지 않으면 민영이와는 친구사이로도 못 지내게 되지 않겠니?”
상기와 동일은 타고난 술꾼들이었다. 물론 은수가 다홍의 술까지 마셔대느라 남들보다 2배는 더 마신 탓도 있겠지만 주신이라던 은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장은수, 오늘 약한 모습 아니냐? 한의과대학 주신이 이 정도로 얼굴이 붉어지면 쓰겠냐?”
상기의 놀림에 은수는 같이 건배를 하고 한 잔 더 마시려다가 다홍이 손을 잡는 바람에 멈추었다.
“그만마셔요.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체했나봐요.”
모두 다홍이 은수를 보호하기 위해 한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척했다.
“이런, 다홍씨 그럼 안돼죠. 장은수, 뭐하냐? 얼른 마님 모시고 들어가봐라.”
은수도 친구들이 순순히 보내줄 때 얼른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대리운전을 불러 다홍과 뒷자리에 탔다. 집앞에 도착할 때까지 은수는 다홍의 손을 꼭잡고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대리운전 기사가 차를 세우자 은수는 눈을 떠서 술집을 나올때 비틀거리던 모습과는 다르게 똑바로 서서 걸었다. 어서 술자리를 끝내고 싶어 많이 취한 척 했나보다. 계산을 하고 다홍이 열쇠로 대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더니 조용히 다홍의 손을 잡고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어른들이 깨실까봐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둘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갔다. 다홍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은수가 다홍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잘자요, 선배.”
은수는 다홍을 끌어당겨 꼬옥 끌어안았다. 은수의 얼굴이 키스를 하려고 다가오자 다홍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생각했던 마주침은 없었다. 눈을 뜨니 은수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한거야? 혹시 키스?”
“몰라요. 놔줘요.”
다홍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다음에. 다음에 근사하고 멋진 곳에서. 첫키스니까.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아가씨.”
은수는 다홍을 다시 한번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다홍은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빙그레 웃던 은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은수가 샤워하고 들어가는지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다홍도 씻으러 가야하는데 이놈의 심장은 고장이 났는지 자꾸만 쿵쾅거려서 침대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