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이 유난히 맑다고 느낀 크리스마스 이브, 다홍은 은수가 출근하는 소리를 듣고는 겨우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괜히 숨어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방문에는 은수가 쓴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함께 보낼 것. 받고 싶은 선물 있다면 문자 보내도 좋아.”
다홍은 포스트잇을 떼서 책상에 붙여두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은수 부모님은 일주일간 태국에 골프 여행가신다며 골프 가방을 들고 나오셨다. 차까지 배웅해 드리고 들어오면서 다홍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은수네 집에 살면 다홍은 마치 자신이 공주님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끔씩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꼬집어주곤 했다.
방학을 해서 한가한 민경이 크리스마스 선물 사게 나오라고 해서 백화점으로 갔다.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어서 일단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가로 올라가니 역시나 곳곳마다 사람들이 줄 서 있어서 밥 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서 선배 선물을 사줘야 하냐? 우리 준용선배는 선물 생각도 안하던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
“글쎄... 사람들한테 치여서 머리가 몽롱하다. 초밥이나 먹을까?”
둘은 초밥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홍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어머, 다홍언니 맞죠? 민경언니도 오랜만이예요.”
보라였다. 학생때와는 다르게 화장도 진해졌고 머리가 많이 길어서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가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야. 선물사러 왔어?”
“네. 아니어도 은수선배님한테서 언니 소식 들었어요.”
“은수선배한테서?”
“네. 저랑은 선배님이 가끔 만나거든요. 선배님이 제 얘길 안하셨나봐요? 아... 맞다. 언니 공부한다고 선배님도 자주 못본다고 했지. 참.”
보라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혼자 묻고 답하고 호들갑이었다.
“점심먹었니?”
“아뇨. 저도 같이 먹을까요? 전 약속한 친구한테 바람맞아서 지금 한두 시간 더 기다려야 하거든요.” 주문을 하고 다홍은 여행코스를 프린트한 것을 꺼내 민경에게 보여주었다.
“충청도 어때? 전라도로 내려가서 올때는 동해로 올라오면 일출도 볼 수 있고.”
“넘 멀지 않을까? 일단 보자.”
민경이 종이를 받아서 읽으려는데 보라가 빼앗아 가듯 민경의 손에서 종이를 가져갔다.
“어디 놀러가세요? 어머, 언니 이 코스는 별로다. 나 여행사 있잖아요. 우리 여행사에서 나온 상품 중에 외도, 해금강부터 해서 정동진 일출까지 다 볼 수 있는 거 있는데 함 보실래요? 일단 제 명함 받아두세요.”
다홍은 보라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누리여행사 대리 권보라. 학교다닐 때부터 활기가 넘치더니만 결국 적성에 맞게 여행사에 들어갔나보다.
“언니네가 여행가신다면 제가 특별히 가이드 해드릴 수도 있어요. 노 팁으로. 그런데 몇 명 가실거예요?”
“네 명.”
“네 명은 좀 적다. 15명이 기준인데 다른 팀들이랑 같이 가셔도 돼죠? 그럼 일단 이 팜플렛 함 보세요.”
보라는 가방에서 팜플렛을 여러장 꺼내더니 민경과 다홍 앞에 펼쳐주고는 스케줄 표를 확인하는 듯 다이어리를 펴 들었다.
민경은 다홍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싸인을 보냈지만 다홍도 거절할 마땅한 구실이 없어서 팜플렛을 훑어보고만 있었다.
“여자들만 넷인가요? 방을 짜야해서요.”
“아니, 남자 둘 여자 둘.”
민경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보라는 갑자기 눈이 커졌다.
“어머, 그럼 은수선배님도 같이 가시는 거예요? 아이참. 선배님은 왜 말을 안했지? 내가 알아서 잘해줬을텐데.. 언니, 고민하지 마세요. 은수선배님도 아마 제게 맡기면 더 좋아할 거예요. 지난번에도 선배님이 여행다녀와서 제게 선물까지 하셨어요. 잘 다녀왔다구요.”
다홍은 은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마 3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커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굳이 자신이 그간의 은수의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도 노력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니어도 자꾸 은수선배를 갖다 붙이는 보라에게 더 자세히 물어보면 더더욱 기세등등해질 것 같아서 다시 팜플렛으로 눈을 돌렸다.
“이 상품은 매진된 인기상품인데 특별히 제가 힘써서 언니네 넣어 드릴게요. 오늘 바로 신청하세요. 아님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요.”
다홍과 민경은 보라가 내미는 신청서를 채우면서도 잘하고 있는 짓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보라에게 홀린 듯 준용과 은수 것도 다 채워 주었다.
“어머, 언니 아직도 은수선배님네 집에 얹혀 사세요?”
다홍은 보라의 어휘 선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무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었어. 돈은 언제까지 내야 하는거지?”
“30일 출발이니까 29일까지는 계좌이체해주시면 돼요. 언니가 백수니까 특별히 언니 팀은 20% DC해드릴께요.”
다홍은 인심쓰는 척하는 보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할인해 준다는 말에 민경이 기뻐해서 또 참아야 할 것 같았다.
보라는 신청서를 다 챙겨넣고는 초밥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민경은 다홍이 예민해질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다홍 역시 우동 국물을 마셔가며 초밥을 맛나게 먹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나중에 다홍언니 시험 되면 그때 맛난 거 사주세요.”
다홍은 점심 먹은 것이 다 체하는 기분이었지만, 또각거리며 계산대로 걸어가는 보라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민경도 어이가 없는지 다홍을 마주보다가 팜플렛을 챙겨 들었다.
“야, 오늘 공짜 점심 먹은건데 좋게 생각하자.”
민경의 속삭임에 다홍도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언니, 쇼핑하는데 따라 다녀도 돼죠?”
대답이 필요없는 질문이라는 건 누구다 다 알고 있다. 보라는 다홍과 민경의 중간에 서서 마치 둘을 데리고 다니는 엄마처럼 둘의 팔짱을 꼈다.
“언니는 은수선배님꺼 뭐 살거예요?”
“글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머, 그래요? 제 생각엔 넥타이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지난번에 보니까 선배님 넥타이 많이 신경쓰시던데.”
“그러니?”
벌써 보라는 다홍과 민경을 끌고 남성복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다홍과 보라는 동시에 큐빅이 박힌 하늘색 넥타이를 집었다.
“어머, 언니도 이게 마음에 드세요? 저도 이게 한 눈에 쏙 들어오던데. 선배님은 피부가 희기 때문에 이런 색이 잘 어울릴 거예요.”
민경이 준용의 넥타이를 고르는 동안에 보라는 넥타이 핀을 골라왔다.
“언니가 넥타이 사니까 저는 뭐 넥타이 핀이나 살까 해요. 이거 어때요, 언니?”
다홍은 넥타이핀보다 옆에 있는 가격표가 더 신경쓰였다. 21만원. 정말 사려는 것일까?
“누구주려고? 은수선배?”
“네, 당연하죠. 별로인가요?”
“아니. 예쁘긴 한데 너무 비싸지 않니?”
“선배님 정도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넥타이를 고르다 말고 민경도 왔다.
“은수선배 복 터졌네. 하나는 넥타이, 하나는 넥타이 핀. 보라야, 우리 준용선배꺼는 없니?”
“준용선배에게는 언니가 있잖아요.”
“은수선배에게는 다홍이가 있는데?”
“글쎄요.. 그런가요?”
보라의 애매모호한 대답이 거슬렸다. 다홍은 왜 보라가 은수에게 그런 선물을 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포장한 선물을 받아 가방에 넣고 보라는 다시 팔짱을 꼈다.
“오늘 은수선배님이랑 만나실거죠? 저도 같이 가도 돼죠?”
“보라는 남자친구 없어?”
“없어요. 전 일편단심이거든요. 호호”
일편단심인 여자들이 왜 은수 주변엔 이렇게나 많은지.. 보라는 민경과 다홍을 데리고 이리저리 옷을 사는데 끌고 다녔다. 날씬하고 예쁘니 모든 옷이 다 잘 어울리는데도 보라는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입어보고는 다시 벗어두고를 반복했다. 민경은 이미 지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라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다홍도 민경 옆에 앉았다.
“우리가 뭐하는 짓이라니? 어린 거한테 질질 끌려다니고.”
“그러게. 다 이쁘구만 웬만하면 그냥 사지.”
다홍의 전화벨이 울렸다. 은수다.
“뭐하고 있었어?”
“백화점요. 보라 만나서 끌려다니는 중.”
“선물 뭐 받고 싶은지 생각해봤어?”
“아니요. 그런거 생각할 힘도 없어요.”
“저런.. 그럼 안되는데. 나 두 시간만 있으면 퇴근인데 백화점으로 갈까?”
“그러세요.”
보라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다홍에게로 달려왔다.
“은수선배님이죠? 저도 좀 바꿔주세요.”
다홍이 수화기를 넘기자 보라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예전의 간드러진 코맹맹이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 선배니임~. 네. 보라예요. 호호호.........선배님 선물있는데 언제 오세요?......네네... 맛있는 저녁 사주실거죠? 호호호.....그럼 이따 뵈어요~”
보라는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서는 다홍에게 전화기를 되돌려주었다.
“선배님 두시간 뒤에 백화점으로 오신대요. 저보고도 저녁 같이 먹자고 하시네요.”
어련하시겠니.
“언니, 이 옷 어때요? 선배님이 좋아하실까요?”
그런 질문.... 다홍은 당혹스러웠다. 왜 보라가 은수의 눈을 의식해 옷을 사려는거지.
“예뻐. 이제 그거 살거지?”
민경은 포기한 듯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대강 사라는 눈치를 주었다.
휴게실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아픈 다리를 쉬고 있는데 민경은 탁자에 엎드려 잠이 들어 버렸다. 백화점을 4시간이 넘게 헤매고 다녔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다홍은 부츠를 벗어 옆에 두고 맨발로 휴게실을 걸어 다녔다. 카펫의 까실함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언니, 저 궁금한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죠?”
“뭔데?”
“음..... 언니는 왜 은수선배를 힘들게만 해요?”
“내가?”
“그렇잖아요. 말도 없이 외국으로 훌 날라버리고는 은수선배님 많이 힘들게 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또 나타나서는 선배님 집에 들어앉아서 마음 흔들리게 하고. 언니 없어지고 힘들었던 거 겨우 정리가 다 되었는데 나타나서 또 흔들어놨잖아요.”
“선배가 그래? 정리가 다 되었다고?”
“그럼요. 그래서 선배님 저랑도 술 많이 마셨어요. 언니 이제 선배님 발목 그만 잡아요. 언니는 은수선배를 애틋하게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면서 이용해 먹을 건 다 이용해 먹고. 아닌가요? 웬만한 여자들 같으면 선배님 집에 들어오라고 한다고 들어가겠어요?”
다홍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신의 행동이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몰랐었다. 어쩌면 다홍 역시 알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질끈 눈을 감고 은수네로 들어갔던 것인데 아픈 상처를 찔린 기분이었다.
민경이 잠을 깨는 바람에 대화는 끊어졌다. 다홍은 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일 없었던 듯 민경과 동아리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수다를 떠는 보라가 무서워졌다. 예전의 밥사달라, 술사달라 따라다니며 조르던 철부지 보라가 아니었다.
다홍 Story +18
아침햇살이 유난히 맑다고 느낀 크리스마스 이브, 다홍은 은수가 출근하는 소리를 듣고는 겨우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괜히 숨어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방문에는 은수가 쓴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함께 보낼 것. 받고 싶은 선물 있다면 문자 보내도 좋아.”
다홍은 포스트잇을 떼서 책상에 붙여두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은수 부모님은 일주일간 태국에 골프 여행가신다며 골프 가방을 들고 나오셨다. 차까지 배웅해 드리고 들어오면서 다홍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은수네 집에 살면 다홍은 마치 자신이 공주님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끔씩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꼬집어주곤 했다.
방학을 해서 한가한 민경이 크리스마스 선물 사게 나오라고 해서 백화점으로 갔다.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어서 일단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가로 올라가니 역시나 곳곳마다 사람들이 줄 서 있어서 밥 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서 선배 선물을 사줘야 하냐? 우리 준용선배는 선물 생각도 안하던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
“글쎄... 사람들한테 치여서 머리가 몽롱하다. 초밥이나 먹을까?”
둘은 초밥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홍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어머, 다홍언니 맞죠? 민경언니도 오랜만이예요.”
보라였다. 학생때와는 다르게 화장도 진해졌고 머리가 많이 길어서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가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야. 선물사러 왔어?”
“네. 아니어도 은수선배님한테서 언니 소식 들었어요.”
“은수선배한테서?”
“네. 저랑은 선배님이 가끔 만나거든요. 선배님이 제 얘길 안하셨나봐요? 아... 맞다. 언니 공부한다고 선배님도 자주 못본다고 했지. 참.”
보라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혼자 묻고 답하고 호들갑이었다.
“점심먹었니?”
“아뇨. 저도 같이 먹을까요? 전 약속한 친구한테 바람맞아서 지금 한두 시간 더 기다려야 하거든요.”
주문을 하고 다홍은 여행코스를 프린트한 것을 꺼내 민경에게 보여주었다.
“충청도 어때? 전라도로 내려가서 올때는 동해로 올라오면 일출도 볼 수 있고.”
“넘 멀지 않을까? 일단 보자.”
민경이 종이를 받아서 읽으려는데 보라가 빼앗아 가듯 민경의 손에서 종이를 가져갔다.
“어디 놀러가세요? 어머, 언니 이 코스는 별로다. 나 여행사 있잖아요. 우리 여행사에서 나온 상품 중에 외도, 해금강부터 해서 정동진 일출까지 다 볼 수 있는 거 있는데 함 보실래요? 일단 제 명함 받아두세요.”
다홍은 보라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누리여행사 대리 권보라. 학교다닐 때부터 활기가 넘치더니만 결국 적성에 맞게 여행사에 들어갔나보다.
“언니네가 여행가신다면 제가 특별히 가이드 해드릴 수도 있어요. 노 팁으로. 그런데 몇 명 가실거예요?”
“네 명.”
“네 명은 좀 적다. 15명이 기준인데 다른 팀들이랑 같이 가셔도 돼죠? 그럼 일단 이 팜플렛 함 보세요.”
보라는 가방에서 팜플렛을 여러장 꺼내더니 민경과 다홍 앞에 펼쳐주고는 스케줄 표를 확인하는 듯 다이어리를 펴 들었다.
민경은 다홍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싸인을 보냈지만 다홍도 거절할 마땅한 구실이 없어서 팜플렛을 훑어보고만 있었다.
“여자들만 넷인가요? 방을 짜야해서요.”
“아니, 남자 둘 여자 둘.”
민경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보라는 갑자기 눈이 커졌다.
“어머, 그럼 은수선배님도 같이 가시는 거예요? 아이참. 선배님은 왜 말을 안했지? 내가 알아서 잘해줬을텐데.. 언니, 고민하지 마세요. 은수선배님도 아마 제게 맡기면 더 좋아할 거예요. 지난번에도 선배님이 여행다녀와서 제게 선물까지 하셨어요. 잘 다녀왔다구요.”
다홍은 은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마 3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커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굳이 자신이 그간의 은수의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도 노력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니어도 자꾸 은수선배를 갖다 붙이는 보라에게 더 자세히 물어보면 더더욱 기세등등해질 것 같아서 다시 팜플렛으로 눈을 돌렸다.
“이 상품은 매진된 인기상품인데 특별히 제가 힘써서 언니네 넣어 드릴게요. 오늘 바로 신청하세요. 아님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요.”
다홍과 민경은 보라가 내미는 신청서를 채우면서도 잘하고 있는 짓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보라에게 홀린 듯 준용과 은수 것도 다 채워 주었다.
“어머, 언니 아직도 은수선배님네 집에 얹혀 사세요?”
다홍은 보라의 어휘 선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무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었어. 돈은 언제까지 내야 하는거지?”
“30일 출발이니까 29일까지는 계좌이체해주시면 돼요. 언니가 백수니까 특별히 언니 팀은 20% DC해드릴께요.”
다홍은 인심쓰는 척하는 보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할인해 준다는 말에 민경이 기뻐해서 또 참아야 할 것 같았다.
보라는 신청서를 다 챙겨넣고는 초밥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민경은 다홍이 예민해질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다홍 역시 우동 국물을 마셔가며 초밥을 맛나게 먹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나중에 다홍언니 시험 되면 그때 맛난 거 사주세요.”
다홍은 점심 먹은 것이 다 체하는 기분이었지만, 또각거리며 계산대로 걸어가는 보라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민경도 어이가 없는지 다홍을 마주보다가 팜플렛을 챙겨 들었다.
“야, 오늘 공짜 점심 먹은건데 좋게 생각하자.”
민경의 속삭임에 다홍도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언니, 쇼핑하는데 따라 다녀도 돼죠?”
대답이 필요없는 질문이라는 건 누구다 다 알고 있다. 보라는 다홍과 민경의 중간에 서서 마치 둘을 데리고 다니는 엄마처럼 둘의 팔짱을 꼈다.
“언니는 은수선배님꺼 뭐 살거예요?”
“글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머, 그래요? 제 생각엔 넥타이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지난번에 보니까 선배님 넥타이 많이 신경쓰시던데.”
“그러니?”
벌써 보라는 다홍과 민경을 끌고 남성복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다홍과 보라는 동시에 큐빅이 박힌 하늘색 넥타이를 집었다.
“어머, 언니도 이게 마음에 드세요? 저도 이게 한 눈에 쏙 들어오던데. 선배님은 피부가 희기 때문에 이런 색이 잘 어울릴 거예요.”
민경이 준용의 넥타이를 고르는 동안에 보라는 넥타이 핀을 골라왔다.
“언니가 넥타이 사니까 저는 뭐 넥타이 핀이나 살까 해요. 이거 어때요, 언니?”
다홍은 넥타이핀보다 옆에 있는 가격표가 더 신경쓰였다. 21만원. 정말 사려는 것일까?
“누구주려고? 은수선배?”
“네, 당연하죠. 별로인가요?”
“아니. 예쁘긴 한데 너무 비싸지 않니?”
“선배님 정도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넥타이를 고르다 말고 민경도 왔다.
“은수선배 복 터졌네. 하나는 넥타이, 하나는 넥타이 핀. 보라야, 우리 준용선배꺼는 없니?”
“준용선배에게는 언니가 있잖아요.”
“은수선배에게는 다홍이가 있는데?”
“글쎄요.. 그런가요?”
보라의 애매모호한 대답이 거슬렸다. 다홍은 왜 보라가 은수에게 그런 선물을 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포장한 선물을 받아 가방에 넣고 보라는 다시 팔짱을 꼈다.
“오늘 은수선배님이랑 만나실거죠? 저도 같이 가도 돼죠?”
“보라는 남자친구 없어?”
“없어요. 전 일편단심이거든요. 호호”
일편단심인 여자들이 왜 은수 주변엔 이렇게나 많은지.. 보라는 민경과 다홍을 데리고 이리저리 옷을 사는데 끌고 다녔다. 날씬하고 예쁘니 모든 옷이 다 잘 어울리는데도 보라는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입어보고는 다시 벗어두고를 반복했다. 민경은 이미 지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라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다홍도 민경 옆에 앉았다.
“우리가 뭐하는 짓이라니? 어린 거한테 질질 끌려다니고.”
“그러게. 다 이쁘구만 웬만하면 그냥 사지.”
다홍의 전화벨이 울렸다. 은수다.
“뭐하고 있었어?”
“백화점요. 보라 만나서 끌려다니는 중.”
“선물 뭐 받고 싶은지 생각해봤어?”
“아니요. 그런거 생각할 힘도 없어요.”
“저런.. 그럼 안되는데. 나 두 시간만 있으면 퇴근인데 백화점으로 갈까?”
“그러세요.”
보라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다홍에게로 달려왔다.
“은수선배님이죠? 저도 좀 바꿔주세요.”
다홍이 수화기를 넘기자 보라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예전의 간드러진 코맹맹이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 선배니임~. 네. 보라예요. 호호호.........선배님 선물있는데 언제 오세요?......네네... 맛있는 저녁 사주실거죠? 호호호.....그럼 이따 뵈어요~”
보라는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서는 다홍에게 전화기를 되돌려주었다.
“선배님 두시간 뒤에 백화점으로 오신대요. 저보고도 저녁 같이 먹자고 하시네요.”
어련하시겠니.
“언니, 이 옷 어때요? 선배님이 좋아하실까요?”
그런 질문.... 다홍은 당혹스러웠다. 왜 보라가 은수의 눈을 의식해 옷을 사려는거지.
“예뻐. 이제 그거 살거지?”
민경은 포기한 듯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대강 사라는 눈치를 주었다.
휴게실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아픈 다리를 쉬고 있는데 민경은 탁자에 엎드려 잠이 들어 버렸다. 백화점을 4시간이 넘게 헤매고 다녔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다홍은 부츠를 벗어 옆에 두고 맨발로 휴게실을 걸어 다녔다. 카펫의 까실함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언니, 저 궁금한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죠?”
“뭔데?”
“음..... 언니는 왜 은수선배를 힘들게만 해요?”
“내가?”
“그렇잖아요. 말도 없이 외국으로 훌 날라버리고는 은수선배님 많이 힘들게 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또 나타나서는 선배님 집에 들어앉아서 마음 흔들리게 하고. 언니 없어지고 힘들었던 거 겨우 정리가 다 되었는데 나타나서 또 흔들어놨잖아요.”
“선배가 그래? 정리가 다 되었다고?”
“그럼요. 그래서 선배님 저랑도 술 많이 마셨어요. 언니 이제 선배님 발목 그만 잡아요. 언니는 은수선배를 애틋하게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면서 이용해 먹을 건 다 이용해 먹고. 아닌가요? 웬만한 여자들 같으면 선배님 집에 들어오라고 한다고 들어가겠어요?”
다홍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신의 행동이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몰랐었다. 어쩌면 다홍 역시 알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질끈 눈을 감고 은수네로 들어갔던 것인데 아픈 상처를 찔린 기분이었다.
민경이 잠을 깨는 바람에 대화는 끊어졌다. 다홍은 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일 없었던 듯 민경과 동아리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수다를 떠는 보라가 무서워졌다. 예전의 밥사달라, 술사달라 따라다니며 조르던 철부지 보라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