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는 은수를 향해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처럼 달려가 힘껏 포옹했다.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은수 역시 보라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고는 떼어놓았다. 은수는 유명한 장어구이집에 예약해놨다고 옮기자고 해서 은수의 차를 타게 되었다. 보라가 당연한 듯 앞자리에 앉아서 다홍은 민경과 뒷자리로 갔다. 보라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은수에게 터치를 하고 은수를 챙겨주었다.
장어구이가 지글거리며 맛있는 냄새를 풍겨내자 은수는 상추에다 고추냉이를 찍은 장어를 올려서 다홍에게 주었다.
“먹어봐. 이렇게 먹으면 비린내 안나고 먹을만 할거야.”
다홍이 받아들기 무섭게 보라는 또 콧소리를 내며 은수에게 졸랐다.
“선배니~임, 저는 안주세요?”
다홍은 남자 앞에서는 목소리가 달라지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들 답답한 동물인지 보라의 그런 애교에 넘어가 뒤늦게 합류한 준용 마저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라와 연신 건배를 해댔다.
“아참, 선배님 선물 있는데, 다홍언니 선물부터 열어보세요.”
다홍도 그제서야 생각난 듯 가방에서 넥타이 상자를 꺼내 은수에게 주었다. 은수를 다홍을 향해 웃었지만 다홍은 무표정하게 장어만 뒤집었다. 은수가 넥타이를 바꿔 매자 마자 보라는 넥타이핀을 꽂아 준다며 은수에게 안기다시피 했다.
“둘이 맞춰서 샀냐? 보라야, 내꺼는 없냐?”
“선배님은 나중에요. 은수선배님, 마음에 드세요?”
다홍은 보라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홍에게 차갑게 비난할 때와는 다른 너무나 사랑스런 표정으로 은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선물 받아도 될지 모르겠는걸..”
“당연히 돼죠. 선배님, 지난번에 제게 선물주신 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준용이 보라의 말을 그냥 지나쳐 들을 리 없었다.
“선물? 무슨 선물?”
“지난번에 우리 병원서 단체여행갔을 때 보라가 많이 신경써 줬거든. 그래서 직원들끼리 돈모아서 선물 하나 했는데..”
“다 선배님이 앞장서서 해주신 덕분이죠뭐.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하나요.”
보라는 굳이 은수와의 관계가 깊은 것처럼 보이려고 은수의 말을 잘랐다.
“우리 술 한병 더 마실까요?”
다홍은 술병에 남은 술을 자기 잔에 따르고는 호출벨을 눌렀다. 민경은 다홍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이 간다.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보라의 칼날처럼 매서운 말을 다 들어버렸다. 다홍에게는 상처가 클텐데 내색하지 않고 분위기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다홍은 보라와도 건배를 하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보라 역시 생각했던 다홍의 반응이 아니라 의외였다. 예전의 다홍같으면 보라의 지나친 행동에 화를 냈거나, 먼저 간다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다홍은 기분이 좋은지 준용과도 민경과도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라이브카페로 자리를 옮겨서도 다홍은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하며 신이 난 것 같았다.
“자, 여러분, 제 노래 잘 들으셨습니까? 크리스마스라 빈자리가 없군요. 오늘처럼 특별한 날엔 특별무대가 준비되어야겠죠? 오늘 저희 사장님께서 팍팍 인심 쓰셨네요. 무대에서 노래하시는 모든 분께 고급 양주 한병씩 드린답니다. 응응 30년산이라고 하면 대충 짐작가시죠? 신청하실 분 무대 옆 카운터에 이름과 부르실 곡명 남겨주세요.”
가수는 다시 이어서 노래를 한 곡 더 불렀다. 몇 명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려고 신청하는 것 같았다. 보라도 카운터로 가서 적어두고 왔다.
“너 양주 타면 여기서 다 뜯어야 되는거 알지?”
준용은 보라의 손까지 잡아가며 양주를 노렸다. 세 명이 앞서 노래를 부르고는 사장님이 직접 증정하는 양주를 받아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권보라씨, 사랑보다 깊은 상처, 나와주십시오.”
가수가 보라를 호명하자 보라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앞으로 나갔다. 전주가 울리자 보라는 뒤를 돌아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했다.
“이 노래는 듀엣곡으로 부른 노래더라구요. 저도 같이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은수선배님, 나와주세요.”
테이블을 꽉 채운 손님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에 은수는 당황했다. 그러나 준용과 다홍이 양주를 외치며 떠미는 바람에 앞으로 나갔다.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내가 원한 너였기에..........”
보라와 호흡을 맞춰 노래하는 은수는 아주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홍과 함께 있을 땐 늘 다홍을 신경쓰느라 자신의 기분을 따르지 못했을텐데 보라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은수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 마냥 신이 난 모습이었다. 다홍은 보라의 KO승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보라가 나타난 이후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패한 것을 인정하고 나니 갑자기 속이 펑 뚫리는 것 같이 시원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눈물이 흘러서 누가 볼까봐 얼른 손으로 닦아내고는 노래하는 선남선녀를 향해 환호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양주를 받아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는 보라를 향해 다홍은 하이파이브까지 해가며 즐거워했다.
“둘 다 노래 잘하네. 오늘 양주 주는 거 알고 연습하고 온 사람들 같잖아.”
준용의 농담에 다홍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남몰래 연습한거 아냐? 덕분에 우리는 양주 한 병 맛보게 생겼네. 땡쓰.”
목이 타들어가는 양주의 독함에 인상을 쓰면서도 다홍은 석 잔이나 마셨다.
“괜찮아?”
민경의 걱정스런 물음에도 다홍은 끄덕없다는 듯이 한 잔 더 받았다. 보라 역시 질세라 다홍과 건배를 하며 독한 양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보라가 술에 취한 듯 움직임이 흐느적거렸다. 카페를 나와 은수의 차에 보라를 태웠다.
“선배는 보라 데려다 주고 오세요. 전 민경이네랑 먼저 집에 갈게요. 같이 안가도 괜찮죠?”
“우리가 보라랑 같은 방향이니까 택시 타고 가면서 내려주면 돼.”
민경은 다홍이 오늘 유난히 밝게 보이려 애썼던 것이 마음에 걸려 은수와 함께 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홍은 단혼하게 거절했다.
“선배는 술 안마셨으니까 차로 데려다주면 금방 가잖아. 너희도 어차피 택시타더라도 돌아야 하는데 뭘. 선배, 부탁해요.”
“준용아, 다홍이 데려다주고 들어가. 이다홍, 나 집에 가기 전에 잠들지 마.”
은수는 돌아서서 택시를 타러 가는 다홍을 잡고 싶었지만 보라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일단 출발했다.
택시를 타려다 말고 다홍은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보이자 달려가서 커피를 사왔다.
“술 마신 다음에 먹는 커피가 제일 맛난거 알지?”
“괜찮겠어?”
민경은 다홍이 걱정이 되었지만 다홍은 빨대로 커피속의 거품을 휘젓으며 되물었다.
“뭐가?”
“은수선배 보라와 함께 보내도 괜찮겠냔 말이야. 어차피 집도 같은데 너도 같이 따라가지 그랬어?”
“뭐하러. 선배가 다 알아서 잘할텐데. 나도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단다. 준용선배, 여행갈 때 봅시다. 나 먼저 들어간다.”
민경과 준용이 말릴 사이도 없이 다홍은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이모는 주무시는지 1층 거실 불만이 환하게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다홍은 샤워를 하고 불을 끄고는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방안이 답답한 것 같아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겨울바람이 곧 후덥지근한 방을 식혀주었지만 창문을 닫지 않았다. 한참만에 은수의 차가 차고에 들어오는 소리, 뒤이어 타박거리며 정원을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홍은 은수가 씻고 나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잠이 들지 못했다. 똑똑.. 조심스런 노크소리가 들렸다. 다시 똑 똑... 대답하지 않았다.
“나 들어간다.”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은수가 문틈으로 서서히 나타났다. 은수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나갈 생각을 않고 창가에 기대어 섰다. 보라에 대해 할말이 많을텐데 다홍 자존심에 묻지는 않을 것이다.
“안자는거 다 알아. 일어나 봐.”
“자고있어요.”
은수는 돌아누워 자는 척 하던 다홍이 볼멘 소리로 대답하자 피식 웃었다.
“그럼 자다가 깨면 열어봐. 책상 위에 크리스마스 선물 있어. 잘자, 고집쟁이.”
은수가 나가고 다홍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책상위의 스탠드 불을 켰다. 리본까지 묶어서 예쁘게 포장된 상자였다. 안에는 하트모양의 메달 안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앙증맞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다홍의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다. 그의 선물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막상 받고 보니 고민이 되었다. 보라 말처럼 은수가 다홍의 존재로 인해 힘들다면, 다홍이 이 집에서 나가는게 맞는데 자꾸만 핑계거리를 찾아 그의 곁에서 머물고만 싶었다. 그의 마음을 확신하고 싶지만 자신으로 인해 그의 행복이 다치는 것 같아 두려웠다. 다홍은 목걸이통을 닫아서 상자 안에 다시 넣었다.
고민하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든 다홍을 은수는 아침부터 깨웠다. 눈썰매타러 가야한다는 것이다.
“젊은 녀석이 그렇게 술에 약해서야... 얼른 해장하고 눈썰매타러 가자.”
“선배는 30대가 되어서도 눈썰매가 타고 싶어요?”
다홍은 침대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은수를 쏘아주었지만 은수는 이미 창문까지 열어놓고는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기세로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난 60대가 되어도 눈썰매 탈 생각인데. 얼른 일어나.”
다홍이 겨우 일어나서 앉자, 은수는 다홍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금속의 차가움에 몸을 떨며 다홍이 눈을 번쩍 떴다.
“이거 일초라도 안하고 있으면 바로 키스해 버릴테니까 딴 생각 마.”
은수는 목걸이를 걸어주고는 상자를 들고 나가버렸다. 다홍은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밤새 고민한 것을 알기라도 하듯 은수가 걸어주고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하고 다녀야 한다. 아니, 적어도 은수와 헤어지는 그 날까지는 그렇게 연결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다.
에버랜드는 겨울이 무색할 만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눈썰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단 몇 초간의 슬로프를 내려오는 재미를 위해 몇 십분간 줄을 서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은수와 다홍은 바지 끝이 눈에 젖어 축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탔다.
“피곤하니?”
“그건 괜찮은데 조금 추워요.”
“커피 한잔 할까?”
커피를 기다리며 은수는 장갑을 벗어 다홍의 빨갛게 언 손을 감싸쥐었다. 다홍은 순간 착각인 듯 했다. 은수가 다홍의 볼에 입맞춤을 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드니 은수가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더 따뜻해졌지?”
“몰라요.”
“하하 거봐. 즉석 난로라니까.”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은수는 전과는 다르게 한 손은 다홍의 손을 잡고 있었다. 걸을 때도 손을 잡고, 공연을 보면서도 손을 잡고.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도 잠시도 다홍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홍이 손을 빼내려 하자 더욱 세게 잡았다.
다홍 Story +19
보라는 은수를 향해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처럼 달려가 힘껏 포옹했다.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은수 역시 보라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고는 떼어놓았다. 은수는 유명한 장어구이집에 예약해놨다고 옮기자고 해서 은수의 차를 타게 되었다. 보라가 당연한 듯 앞자리에 앉아서 다홍은 민경과 뒷자리로 갔다. 보라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은수에게 터치를 하고 은수를 챙겨주었다.
장어구이가 지글거리며 맛있는 냄새를 풍겨내자 은수는 상추에다 고추냉이를 찍은 장어를 올려서 다홍에게 주었다.
“먹어봐. 이렇게 먹으면 비린내 안나고 먹을만 할거야.”
다홍이 받아들기 무섭게 보라는 또 콧소리를 내며 은수에게 졸랐다.
“선배니~임, 저는 안주세요?”
다홍은 남자 앞에서는 목소리가 달라지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들 답답한 동물인지 보라의 그런 애교에 넘어가 뒤늦게 합류한 준용 마저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라와 연신 건배를 해댔다.
“아참, 선배님 선물 있는데, 다홍언니 선물부터 열어보세요.”
다홍도 그제서야 생각난 듯 가방에서 넥타이 상자를 꺼내 은수에게 주었다. 은수를 다홍을 향해 웃었지만 다홍은 무표정하게 장어만 뒤집었다. 은수가 넥타이를 바꿔 매자 마자 보라는 넥타이핀을 꽂아 준다며 은수에게 안기다시피 했다.
“둘이 맞춰서 샀냐? 보라야, 내꺼는 없냐?”
“선배님은 나중에요. 은수선배님, 마음에 드세요?”
다홍은 보라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홍에게 차갑게 비난할 때와는 다른 너무나 사랑스런 표정으로 은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선물 받아도 될지 모르겠는걸..”
“당연히 돼죠. 선배님, 지난번에 제게 선물주신 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준용이 보라의 말을 그냥 지나쳐 들을 리 없었다.
“선물? 무슨 선물?”
“지난번에 우리 병원서 단체여행갔을 때 보라가 많이 신경써 줬거든. 그래서 직원들끼리 돈모아서 선물 하나 했는데..”
“다 선배님이 앞장서서 해주신 덕분이죠뭐.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하나요.”
보라는 굳이 은수와의 관계가 깊은 것처럼 보이려고 은수의 말을 잘랐다.
“우리 술 한병 더 마실까요?”
다홍은 술병에 남은 술을 자기 잔에 따르고는 호출벨을 눌렀다. 민경은 다홍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이 간다.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보라의 칼날처럼 매서운 말을 다 들어버렸다. 다홍에게는 상처가 클텐데 내색하지 않고 분위기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다홍은 보라와도 건배를 하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보라 역시 생각했던 다홍의 반응이 아니라 의외였다. 예전의 다홍같으면 보라의 지나친 행동에 화를 냈거나, 먼저 간다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다홍은 기분이 좋은지 준용과도 민경과도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라이브카페로 자리를 옮겨서도 다홍은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하며 신이 난 것 같았다.
“자, 여러분, 제 노래 잘 들으셨습니까? 크리스마스라 빈자리가 없군요. 오늘처럼 특별한 날엔 특별무대가 준비되어야겠죠? 오늘 저희 사장님께서 팍팍 인심 쓰셨네요. 무대에서 노래하시는 모든 분께 고급 양주 한병씩 드린답니다. 응응 30년산이라고 하면 대충 짐작가시죠? 신청하실 분 무대 옆 카운터에 이름과 부르실 곡명 남겨주세요.”
가수는 다시 이어서 노래를 한 곡 더 불렀다. 몇 명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려고 신청하는 것 같았다. 보라도 카운터로 가서 적어두고 왔다.
“너 양주 타면 여기서 다 뜯어야 되는거 알지?”
준용은 보라의 손까지 잡아가며 양주를 노렸다. 세 명이 앞서 노래를 부르고는 사장님이 직접 증정하는 양주를 받아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권보라씨, 사랑보다 깊은 상처, 나와주십시오.”
가수가 보라를 호명하자 보라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앞으로 나갔다. 전주가 울리자 보라는 뒤를 돌아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했다.
“이 노래는 듀엣곡으로 부른 노래더라구요. 저도 같이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은수선배님, 나와주세요.”
테이블을 꽉 채운 손님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에 은수는 당황했다. 그러나 준용과 다홍이 양주를 외치며 떠미는 바람에 앞으로 나갔다.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내가 원한 너였기에..........”
보라와 호흡을 맞춰 노래하는 은수는 아주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홍과 함께 있을 땐 늘 다홍을 신경쓰느라 자신의 기분을 따르지 못했을텐데 보라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은수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 마냥 신이 난 모습이었다. 다홍은 보라의 KO승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보라가 나타난 이후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패한 것을 인정하고 나니 갑자기 속이 펑 뚫리는 것 같이 시원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눈물이 흘러서 누가 볼까봐 얼른 손으로 닦아내고는 노래하는 선남선녀를 향해 환호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양주를 받아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는 보라를 향해 다홍은 하이파이브까지 해가며 즐거워했다.
“둘 다 노래 잘하네. 오늘 양주 주는 거 알고 연습하고 온 사람들 같잖아.”
준용의 농담에 다홍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남몰래 연습한거 아냐? 덕분에 우리는 양주 한 병 맛보게 생겼네. 땡쓰.”
목이 타들어가는 양주의 독함에 인상을 쓰면서도 다홍은 석 잔이나 마셨다.
“괜찮아?”
민경의 걱정스런 물음에도 다홍은 끄덕없다는 듯이 한 잔 더 받았다. 보라 역시 질세라 다홍과 건배를 하며 독한 양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보라가 술에 취한 듯 움직임이 흐느적거렸다. 카페를 나와 은수의 차에 보라를 태웠다.
“선배는 보라 데려다 주고 오세요. 전 민경이네랑 먼저 집에 갈게요. 같이 안가도 괜찮죠?”
“우리가 보라랑 같은 방향이니까 택시 타고 가면서 내려주면 돼.”
민경은 다홍이 오늘 유난히 밝게 보이려 애썼던 것이 마음에 걸려 은수와 함께 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홍은 단혼하게 거절했다.
“선배는 술 안마셨으니까 차로 데려다주면 금방 가잖아. 너희도 어차피 택시타더라도 돌아야 하는데 뭘. 선배, 부탁해요.”
“준용아, 다홍이 데려다주고 들어가. 이다홍, 나 집에 가기 전에 잠들지 마.”
은수는 돌아서서 택시를 타러 가는 다홍을 잡고 싶었지만 보라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일단 출발했다.
택시를 타려다 말고 다홍은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보이자 달려가서 커피를 사왔다.
“술 마신 다음에 먹는 커피가 제일 맛난거 알지?”
“괜찮겠어?”
민경은 다홍이 걱정이 되었지만 다홍은 빨대로 커피속의 거품을 휘젓으며 되물었다.
“뭐가?”
“은수선배 보라와 함께 보내도 괜찮겠냔 말이야. 어차피 집도 같은데 너도 같이 따라가지 그랬어?”
“뭐하러. 선배가 다 알아서 잘할텐데. 나도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단다. 준용선배, 여행갈 때 봅시다. 나 먼저 들어간다.”
민경과 준용이 말릴 사이도 없이 다홍은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이모는 주무시는지 1층 거실 불만이 환하게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다홍은 샤워를 하고 불을 끄고는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방안이 답답한 것 같아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겨울바람이 곧 후덥지근한 방을 식혀주었지만 창문을 닫지 않았다. 한참만에 은수의 차가 차고에 들어오는 소리, 뒤이어 타박거리며 정원을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홍은 은수가 씻고 나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잠이 들지 못했다. 똑똑.. 조심스런 노크소리가 들렸다. 다시 똑 똑... 대답하지 않았다.
“나 들어간다.”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은수가 문틈으로 서서히 나타났다. 은수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나갈 생각을 않고 창가에 기대어 섰다. 보라에 대해 할말이 많을텐데 다홍 자존심에 묻지는 않을 것이다.
“안자는거 다 알아. 일어나 봐.”
“자고있어요.”
은수는 돌아누워 자는 척 하던 다홍이 볼멘 소리로 대답하자 피식 웃었다.
“그럼 자다가 깨면 열어봐. 책상 위에 크리스마스 선물 있어. 잘자, 고집쟁이.”
은수가 나가고 다홍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책상위의 스탠드 불을 켰다. 리본까지 묶어서 예쁘게 포장된 상자였다. 안에는 하트모양의 메달 안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앙증맞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다홍의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다. 그의 선물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막상 받고 보니 고민이 되었다. 보라 말처럼 은수가 다홍의 존재로 인해 힘들다면, 다홍이 이 집에서 나가는게 맞는데 자꾸만 핑계거리를 찾아 그의 곁에서 머물고만 싶었다. 그의 마음을 확신하고 싶지만 자신으로 인해 그의 행복이 다치는 것 같아 두려웠다. 다홍은 목걸이통을 닫아서 상자 안에 다시 넣었다.
고민하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든 다홍을 은수는 아침부터 깨웠다. 눈썰매타러 가야한다는 것이다.
“젊은 녀석이 그렇게 술에 약해서야... 얼른 해장하고 눈썰매타러 가자.”
“선배는 30대가 되어서도 눈썰매가 타고 싶어요?”
다홍은 침대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은수를 쏘아주었지만 은수는 이미 창문까지 열어놓고는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기세로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난 60대가 되어도 눈썰매 탈 생각인데. 얼른 일어나.”
다홍이 겨우 일어나서 앉자, 은수는 다홍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금속의 차가움에 몸을 떨며 다홍이 눈을 번쩍 떴다.
“이거 일초라도 안하고 있으면 바로 키스해 버릴테니까 딴 생각 마.”
은수는 목걸이를 걸어주고는 상자를 들고 나가버렸다. 다홍은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밤새 고민한 것을 알기라도 하듯 은수가 걸어주고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하고 다녀야 한다. 아니, 적어도 은수와 헤어지는 그 날까지는 그렇게 연결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다.
에버랜드는 겨울이 무색할 만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눈썰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단 몇 초간의 슬로프를 내려오는 재미를 위해 몇 십분간 줄을 서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은수와 다홍은 바지 끝이 눈에 젖어 축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탔다.
“피곤하니?”
“그건 괜찮은데 조금 추워요.”
“커피 한잔 할까?”
커피를 기다리며 은수는 장갑을 벗어 다홍의 빨갛게 언 손을 감싸쥐었다. 다홍은 순간 착각인 듯 했다. 은수가 다홍의 볼에 입맞춤을 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드니 은수가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더 따뜻해졌지?”
“몰라요.”
“하하 거봐. 즉석 난로라니까.”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은수는 전과는 다르게 한 손은 다홍의 손을 잡고 있었다. 걸을 때도 손을 잡고, 공연을 보면서도 손을 잡고.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도 잠시도 다홍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홍이 손을 빼내려 하자 더욱 세게 잡았다.
“난 안놔줄건데.”
“왜요?”
“또 허튼 생각할까봐 이다홍의 뇌를 세뇌시켜 버릴려구. 이다홍은 장은수 애인이다.. 이렇게말이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애인....이라는 말 가슴 벅차다.
“치이...”
다홍은 마음과는 다르게 입을 삐죽하면서도 은수의 손을 마주잡았다. 크리스마스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