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일기, 하나 ...

바이올렛2003.05.05
조회13,703

남편의 일기, 하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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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간격으로 점점 높아가는 수돗물소리 ...

9시 뉴스를 보다 슬쩍 훔쳐본 주방쪽엔 울 마누라 ... 마치 기계처럼 정확한 동선으로 저녁 뒷설겆이를 하고있다.


음~ 음...

보아하니 저 여자 ... 지금 무지 화가 났다.

 

TV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베란다로 서럽도록 하얀 빛깔의 헹주를 한바가지 담아 말없이 널고있는 뒷모습은 ... 한겨울에나 만나는 냉기가 품어져나오는게 ... 정말이지 냉동고의 얼음조각이 따로 없다.

 

머리끝에 쏠린 화를 발꿈치에도 담아 표를 내는건지 ... 어째 오늘따라 걸음걸이를 따라다니는 발소리의 무게가 예사로 심상치도 않다.

 

울 마누라 ...

두 눈 쫘~악 내리깔고 안 그래도 작은 입술, 모시조개마냥 힘주고 꽉 다물고 있는 얼굴을 보면 ... 왠일인지 10여년을 더 지켜보고 살았어도 그때마다 매번 저 여자만의 독특한 카리스마 앞에서 ... 아직도 사실은 쪼매 겁이 난다.

 

음~ 음 ...

곁눈질로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마누라를 훔쳐보면서... 쫓겨나간 베란다에 앉아 피우는 담배 한가치가 다 타들어가도록 심각하게 ... 오늘의 주제를 애써 찾아보려 했다.

 

오늘따라 별스럽게도 생글거리는 얼굴로... 내가 좋아하는 생선매운탕 맛깔나게 저녁상에 내어놓을 때만 해도 ... 기분 정말 해피했는데 ...

 

성질대로 하면... 소리 한번 팍 질러 기선제압을 먼저 한 다음에

" 오늘은 또 주제가 머~꼬? "

이렇게 윽박질러서라도 지금의 궁금증을 풀고싶지만...

저 여자 ...

길 가다 실수로 똥통에 빠져도 절대로 지가 먼저 성질부릴 그런 성격이 아니란걸 알기땜에 ... 오늘은 진짜 머리가 아파온다.

 

음~음 ...

할 수 없다.

뭐 한 놈이 먼저 성낸다고 ...

뉴스 다 끝나고, 스포츠뉴스 시작할 때 까지도 저렇게 계속 입다물고 있으면 더 이상 나도 참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여자들 부어터진 얼굴 감추느라 눈 쫘~악 내리깔고 공포 분위기 조성할때 보면 ... 마치 오늘 처음 만난듯한 그런 낯설음을 솔직히 숨길수가 없다.

 


" 냉장고에 뭐 시원한거 없나?~~ "

 


흐~음 ...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를 겨우 삼키며 억지로 한마디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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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도마질하던 바쁜 소리를 멈춘 마누라 ...

예쁜 쟁반에 오렌지쥬스 한 잔과 참외 몇 조각 예의상 들이밀고는 말 한마디 안하고 아들놈 방으로 사라진다.

시리도록 차가운 하얀 참외의 속살에서 마누라의 마음에 담고있는 오뉴월의 서릿발같은 침묵을 오래도록 느껴야 했다.

 

뭔 가 있기는 있는데 ...

오늘따라 더 안돌아가는 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리 크게 잘 못한게 없음이 더 미칠 노릇이다.

 

 

아들놈 방에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어!!~~~ 

저 노래는 ...

 

역시 그렇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울 마누라 오늘 화가 단단히 났단다.

 

패티페이지의 노래 ...

예전에 한번 농담삼아 내가 그랬지.

노래 중간에 나오는 강아지 소리는, 당신 열 받는 일 있는 날 ...

그 강아지 소리를 미운 남편 지껄이는 소리를 대신해서 들으라고 ...

 

미치겠구만.

벌써 다섯번을 들었는데도 기세로 봐서는 아직 대여섯번은 더 들을 모양이다.

흐~~흠~~~~흠 ...

저 놈의 강아지 소리는 오늘따라 왜 이리도 찔리는 소리로 친근하게도 귓가에 날아드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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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살았다!!

오늘따라 너무 이쁜 마누라 친구 경아씨 ...

살얼음같은 분위기를 깨어준 사랑의 메세지를 들고 아들놈 방으로 잽싸게 수화기를 가져다줬다.

" 경아씨, 전화 ... "

 

아직도 눈에 힘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사무적으로 수화기를 받아드는 마누라의 표정이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 어째 좀 마음이 짠~해진다.

 

재털이를 비우러 주방쪽 쓰레기 봉투를 찾는데 ... 아들놈 열려진 문 틈으로 마누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 두 마디 가만가만 새어나온다.

 

" 그러니까, 있을 때 잘 해라! "


" 카네이션 달아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싶어도 지금 내게는 다 마음 뿐이야. "


" 나쁜 할망구, 몇 년만 더 사셨어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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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흠...흠 ...

그랬었구나!!!

몇 술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녁 숟가락 놓고 일어서더니만 ...

 

어~~~~

그거 농담이었는디 ...

마누라 밥먹다 가슴에 비수 꽃고 일어서게 만든 그 말 ... 정말 사심없는 농담 이었는데 ...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놈이 카네이션 만들어야 된댔다.

그러면서 아들놈이 그런다.

" 아빠 엄마는 카네이션 안만들어요? "

아들놈 말꼬리 미처 내리기도 전에 내가 그랬었다.

" 너거 엄마는 만들어봐야 고마 부칠 때도 없을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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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야!

우둔한 머리는 둘째치고라도 정말 눈치가 곰발바닥인 이 주둥아리 ...

저 마누라 ...

배 아프다고 오래도록 화장실에 자리잡고 앉아있더니 ...

속으로 잠겨드는 울음 참으며 또 혼자서 눈물 꽤나 삼켰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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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밀려드는 죄스러움같은 심한 갈증에 생수를 반통이나 그냥 병째로 마시고 돌아서려다보니 ... 냉장고 제일 안쪽 문짝에 어디서 본듯한 술병이 하나 얌전히 자리잡고 있다.

핑크빛이 유난히 짙은 ...

키 작은 그 술병을 한번 들었다 그 자리에 다시 놓자니 ... 왠 까닭인지

맛있게 먹었던 생선매운탕이 갑자기 명치 끝에서 쳇기로 만져질 것만 같다.

 


음~~ 음 ....

담배사러 간다고 슬리퍼만 끌고는 늦은 시간 집을 나섰다.

 


저 여자 ...

다들 잠 든 시간

거실에 내놓은 컴 앞에 앉아 해드셋 둘러쓰고 ... 숨 죽이며 참았던 울음 그제야 쏟아내어 놓으리라 ...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몇천원짜리 싸구려 포도주 ... 소주잔에 혼자 처량하게 채워가면서 ...

 


아고고~~~~~

울 마누라 오늘 진짜 많이 마음 다쳤나보다.

패티페이지의 강아지소리가 여기 엘리베이트 입구까지 잘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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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빨래를 하는지, 세수를 하는지 ...

목욕탕에서 흘러나오는 마누라의 마음같은 물소리를 들으며

늦게까지 TV 앞에 앉아있던 아들놈 등짝밀어 간만에 아들놈과 동침할 준비를 마쳤다.

" 어~ 아빠 ... 엄마께 쫓겨나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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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아들놈, 대충 우스개 소리로 입막음하고

아직도 물소리 그치지않은 목욕탕앞을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었다.

 

차가운 냉기 한아름 묻어나오는 냉장고 문을 열고는

조금전에 큰 맘 먹고 준비해온 비싼 와인 한 병을 슬며시 김치통 옆에 조심스레 뉘여 놓았다.

 

울 마누라 ...

열 받으면 잇몸을 다 만나도록 이빨을 아주 별스럽게도 오래도록 닦는다.

퉁퉁~~ 소리는 못 내지만 목욕탕 문앞에 얌전히 솔이 부드러운 새 칫솔도 하나 내려놓았다.

 

흐~~흠~ 흠 ..

그러고보니 장모님 산소에 다녀온지도 언제인지 별로 기억이 없구만.

요번 어버이 날에는 모처럼 가족나들이 삼아 장모님 산소에나 다녀와야 겠다.

아들놈 방문 단단히 잠그고 돌아서는데 이제야 목욕탕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에궁~~

마누라 이제야 납시나 보다 ...

10여년 같이 보듬고 살며 애용했던 텔레파시를 이번에도 그녀에게 다시 한번 보내본다.

 


" 마누라~~ "

" 너무 과음하지 말고 ... 고마 기분 풀릴만큼 몇 잔만 마시고 편히 자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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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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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사는 모습을 남편의 시각에서 글로 한번 옮겨 보았습니다.

 

마누라의 모습에서 다듬지 않은 제 성격이 참으로 고스란히 묻어나는군요.

 

다만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제 맘을 남편이 알아 ... 그렇게 해줬음 하는 저의 희망사항을 부질없지만 이렇게라도 대신해 봅니다.

 

곧 어버이 날이 오는군요.

 

울 남편 ...

 

제 소망대로 장모님 산소에나 가자고 나서면

 

아마도 너무 기쁜 맘이 커서라도 몸살을 한번 할것만 같으네요.

 

큰돈 안드는 전화기 멀리하지 마시구 ... 님들 ...  내일은 부모님께 안부전화 한 통씩 ... 잊지마십시오.

 

ㅎㅎㅎ

 

 

* 바이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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