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기원전 25세기에 만든 금동귀걸이가 평남 강동군 순창리에서 나왔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백제에서는 전남 나주군 신촌리에서 금동관이, 무령왕능에서는 많은 왕관 장식품이 나왔다. 신라에서는 574년 황룡사의 장륙상을 조성하는데 여기에 도금하는데 쓰인 금은 1만 198푼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천마총, 황남대총에서도 찬란한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금장식품이 출토되어 과연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 불러도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금은 워낙 귀한 물건이어서 금 빛나는 재료를 찾던 중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다루어 왔던 청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유기의 기원은 멀리 기원전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금빛을 내는 식기나 수저 등이 출토되는 시기를 상한연대로 잡아야 한다. 그러면 무령왕릉과 안압지에서 수저가 출토되는 것을 보아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현대합금의 제조 방식은 유기를 만드는 수치를 사용할 경우 제련 과정에서 부서집니다. 또 유기 또한 수치를 초과할 경우 금이 가고 부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현대 과학도 하지 못하는 합금 과정이 바로 유기 제조 과정입니다.』
(시대에 따른 제조과정)
고대의 황동은 현대 금속의 의미로서가 아닌 동으로 합금한 금속을 말한다.
삼국시대에도 신라에 철유전(鐵鍮典)이라는 유기전담기관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의 놋그릇은 동 1근에 주석 2∼4냥 4돈을 넣은 것으로 이것은 곧 주석이 11 %∼22 % 함유된 것을 뜻한다. 이때는 주로 주조와 절삭가공법으로 유기를 만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식기와 제기등은 동과 주석만을 합금한 동합금으로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구리에 주석의 함량을 높이면 청동은 붉은 색에서 주석이 11∼25 % 들어가면 불그스레한 금빛을 띠게 된다. 이 빛깔이 우리의 색감에 맞아 놋쇠로 쓰게 되었다. )
고려시대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함으로써 금속공예의 수준을 한껏 높였으며, 놋쇠가 평민층까지 확산되어 각종 생활용기 및 농악기나 불교용)가 놋쇠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주석의 함량이 규격화하게 되었다.놋쇠로 만든 생활도구를 유기라고 한다. 놋쇠는 구리에다 주석을 려은 합금이며 청동기 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이다.
전통적 의미의 놋쇠는 동 1근(지금의 600g)에 상납4냥반(약 168.7g)을 배합한 우리나라 특유의 재료이며, 일명 유철(鍮鐵)이라고도 한다. 유기를 놋쇠 또는 통쇠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7대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황동 유기'라고 하며,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을 '백동유기'라 한다.
질이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 제작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다. 방짜기법이란 동과 석(錫)(향동(響銅))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 제품 제작기법이다. 이런 기법으로 만든 것을 유기를 방짜유기라 한다. 방짜유기는 질 좋은 놋쇠로서 특히 소리가 맑아 징, 꽹과리, 대야, 양푼, 식기, 수저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그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일일이 두드려서 만들던 방짜기법대신 손쉬운 주물(鑄物)기법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 비율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물틀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방법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확한 합금 비유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기법의 놋쇠와 주물유기는 구분해야 하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통틀어 일반적으로 유기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짜기법으로 만든 놋쇠 대신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 생산하던 합금쇠를 퉁쇠라고 해서 전통적인 놋쇠와 엄밀히 구분했다. 8 ·15 이전만 해도 방짜기법을 만든 것만을 최고로 쳤다
(조선 시대의 유기 제작 지역 및 방법)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유기 생산을 장려하여 17세기에는 개성(開城)과 안성(安城)에서 유기 공업이 성행하였다. 6, 25 전까지는 개성, 안성을 비롯하여 김천, 남원, 운봉, 전주, 홍성, 박천, 평양, 사리원, 정주, 서울 등지에서 놋그릇을 많이 만들었다.조선말기에는 안성유기가 유명해졌다.
영조때의 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 기집조(器什條)에, "통속적으로 놋그릇을 중요시하여 사람들은 반드시 밥, 국, 나물, 고기까지 일체의 식탁용기로 녹그릇을 사용한다. 심지어는 요강, 세수대야까지도 놋쇠로 만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양반가를 비롯하여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실생활 용구로서의 놋 제품이 얼마나 널리 대중화 되었는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나라의 놋그릇 제작방법은 경기도 안성지방에서 만들었던 주물제작법(鑄物製作法),
평안북도 정주 납청(納淸)지방에서 만들었던 방짜제작법(方字製作法),
구리에 주석을 넣은 주동(鑄銅)을 녹여 틀에 부어 만드는 유기를 주물유기(鑄物鍮器)라 하여 경기도 안성(安城), 경상북도 경주(慶州), 충청북도 충주(忠州), 전라북도 이리(裡里) 등지에서 주로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곳은 개성과 안성지방이다.
안성지방에서는 식기류와 반상기 및 제향에 필요한 제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용구를 많이 만들었는데, 안성의 주물유기는 제작기교가 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합금이 우수하여 '안성마춤'이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북쪽의 산간지방에서는 놋동이, 놋양푼, 놋요강, 놋버치, 놋상등 비교적 큰 것들을 만들어 썼으며,
중부지방에서는 안성지방을 중심으로 반상기(飯床器)와 제기(祭器)등의 작은 식기류를 주로 만들어 썼다.
또 농사일을 주업으로 했던 남쪽의 함양과 김천지방에서는 우수한 농악기를 만들어 썼다. .
놋그릇의 본산지였던 납청(평북 정주)에서는 양대(방짜)유기점은 놋점, 주물 유기점은 퉁점이라고 구분해서 불렀으며 또 놋쇠로 만든 그릇은 놋성기(成器), 퉁쇠로 만든 그릇은 퉁성기라고 구분해서 불렀다.
방짜유기는 놋점에서도 사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귀했고 값도 월등히 비쌌다.
붓배기:
붓배기는 식기와 같은 주물품으로, 그 공정은 부리(용해, 조형, 제품 주조)와 가질(표면 가공)로 나누어진다. 우선 동을 흑연도가니에 넣어 녹인 다음 적당량의 주석을 넣어 녹인다. 한편 갯토(해변의 보드라운 흙)를 써서 거푸집을 만든다. 주조코자 하는 기물의 본인 번기(番器)의 모양을 만들어 암틀과 수틀을 만든다. 암틀은 갯토판 위에 번기와 틀을 놓고 잘 떨어지도록 송탄가루를 번기 위에 뿌린 후 갯토를 넣어 가장자리부터 다져서 완성한다. 이 암틀 만들기가 끝나면 뒤엎고 그 위에 수틀을 올려놓고 암틀을 만들 때와 같은 순서로 수틀을 만든다. 다 만들어 수틀을 들어 올려 엎어놓고 수틀에 붙어 있는 번기를 떼어낸다. 암틀과 수틀 위는 쇳물이 잘 흐르도록 그을음을 칠한다. 두 틀을 합쳐서 고정시킨 다음 도가니에서 녹인 쇳물을 틀의 유구(주입구)에 부어 넣는다. 이렇게 주조한 주물은 표면이 거칠어 그릇의 안팎을 깨끗이 깎고 다듬어야 하는데 이 일을 가질이라 한다. 돌아가며 깍도록 만든 가질틀 끝에 그릇에 맞는 머리목을 끼우고 머리목에 그릇을 끼워 고정시킨 후 가질칼을 그릇에 대어 발로 회전 속도를 조절하면서 깎는다. 다음에 쇠기름에 고운 기와가루를 섞어 걸레에 묻혀 가질틀에 대고 돌리면 광이 난다.
방자:
방자유기는 대야와 같은 단조품으로, 그 공정은 부리(용해, 주괴 주조), 네핌(동판 단조, 순도리 절단), 우김(예비 성형), 제질(순도리 절단), 벼림(완성 성형), 가질(표면 가공)로 세분화되어 있고 11명이 한 조가 되어 작업한다. 부리작업은 흑연도가니에 동합금(놋)을 넣고 용해하여 바둑(주괴)을 주조하는 것이다. 이 때 동합금은 구리 1근에 주석 4.5냥 즉 Cu-22%Sn 합금이다. 원래 구리에 대한 주석의 함량이 높아지면 경도가 커져 단조할 수 없으나 주석이 18 %에서 25 %까지는 600 ℃ 안팎에서 단조가 가능한 구역이 있는데 옛 장인들은 경험적으로 이를 알아내었다. 평북 정주 납청에서 사용한 흑연도가니의 용량은 75∼100 kg으로 추정되며, 도가니 주위에 숯불을 피워 1,100∼1,500 ℃에서 녹인다. 도가니를 꺼내어 쇠물을 물판(주형)에 부어 만들고자 하는 기물의 크기로 만든다. 이렇게 만든 주괴(鑄塊)를 단조하여 일정한 두께로 만들고 필요한 크기만큼 절단하는 것이 네핌작업이다. 모루 위에 달궈진 소재를 놓고 망치꾼들이 쳐서 그릇 모양으로 우그러뜨리는 것이 우김질이다. 이때는 네핌질을 마친 소재 세 개를 한꺼번에 달궈 하나씩 겹쳐가면서 우김질을 한다. 우김질된 바둑은 그릇 모양으로 겹쳐지는데 이를 하나씩 떼어내는 것을 냄질이라 하며 떼어낸 하나를 우개리라고 한다. 우개리를 불에 달궈 모양을 바로 잡는 작업을 닥침질이라 한다. 다음으로 순도리를 절단하는 작업을 제질이라 하며 이 작업을 끝내고서 원하는 강도를 얻기 위하여 달궈서 찬물에 담그는 담금질을 한다. 담금질을 하면 그릇의 모양이 뒤틀리는데 이를 망치로 바로 잡아주는 작업을 벼림질이라 한다. 끝으로 겉면을 깎아내는 가질작업을 한다. 마무리를 할 때는 그릇의 뒷면에 메자국을 그대로 남겨 두기도 하고 동심원을 새기기도 한다. 당시 11명이 한 조가 되어 작업을 하는데 1인당 연간 제품 생산량은 16.36∼21.81톤이어서 거의 요즈음의 생산량과 맞먹어 당시의 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놋그릇을 만드는 과정
사진 왼쪽 위 / 방짜 쇠를 두드리고 궁글리는데 쓰는 여러 연장들.
왼쪽 중간 / 완성된 그릇을 ‘검사’하는 무형 문화재 한상춘씨.
오른쪽 아래 / 방짜 쇠를 두드리고 달구고 궁글리는 모습.
전라남도 순천지방에서 만들고 있는 반방짜제작법(半方字製作法) 한상춘씨
▶ 흠잡을 데 없이 꼭 들어맞는 ‘안성맞춤’
주물 유기는 원료를 도가니에 녹여서 틀에 붓는 것으로, 안성에서 아직도 전통 제조법으로 유기를 만드는 유기장 김근수씨의 작업 과정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부질간의 부질작업(주물 작업)을 끝내고, 다음에는 가질간의 가질작업(깍기 작업), 마지막으로 광간의 광내기로 제품을 완성시킨다.
*경기도 안성지방의 주물 유기장인 김근수(金根洙)씨는, "해방 이전의 장인들은 경험에 의해 유기 성분을 상쇠, 중쇠, 하쇠로 나누고 상질의 쇠인 놋쇠는 유철(鍮鐵), 중간질은 청철(靑鐵)로 불렀다." 라고 말한다. 이는 주석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았을 뿐더러 가격이 비싸 맞춤 반상기만 유철로 주조하여 상류층으 수요에 맞추었고 서민층을 위한 대량 공급품은 청철 및 주철을 사용하였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식기나 악기 이외의 유기들은 동과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녹여서 주조하였다.
경기도 안성지방의 주물 유기장인 김근수(金根洙)
비록 작업 도중 튄 불똥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을 쓰지 못하지만 그의 메질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1948년 월남한 이후 지금까지 방자유기(方字鍮器) 와 더불어 살아온 그는 지금도 고집스럽게 놋그릇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기는 놋쇠 또는 통쇠라고도 하며 구리와 주석을 7대 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방자유기(方 字鍮器),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 동유기(黃銅鍮器)라고 하며,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을 백동유기(白銅鍮器)라 합니다.
그에게는 한국전쟁 이후의 놋그릇 파동이나, 스테인리스, 알미늄의 보급으로 인해 놋그릇이 외면당 하는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장문을 닫고 호떡장사, 공사판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면서 그는 오기와 놋그릇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그 시기를 버텨왔습니다.
유기장 이봉주, 그는 무형의 전통이 결코 저절로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유기장 -이봉주
문헌상 기록
[격고요론(格古要論)]에는, "유석(鍮石)이란 자연동으로 품질이 정교한 것을 말한다. 노감석(爐甘石)을 연성(煉成)하여 이루어진 것을 유(鍮)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주서종박물고변(五州書種博物考辯)]에는, "유는 동에 주석을 넣은 것이며 놋쇠라고 한다. 이것을 만들려면 동 1근에 주석 4냥을 합치면 된다." 라고 하였다.
최방이란 사람은 "동 1근과 노감석 1근을 녹이면 유석이 된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유(鍮)는 페르시아어로 아연으 원광을 뜻하는 "tutiya"에서 중국음인 "tiou"로 바뀐 글자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란 유석으로 만든 모든 기물을 일컬으며 노감석, 황동, 두석(豆錫), 진유(眞鍮)등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들이다. 그러나 고대의 황동은 현대 금속의 의미로서가 아닌 동으로 합금한 금속을 말한다.
이규경(李圭景)이 1834년에 펴낸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는
'향동(청동)은 우리 나라의 놋쇠이다. 놋쇠 1근을 만들려면 구리 1근에 주석 4냥을 넣으며 납은 섞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 조성은 Cu-20%Sn 청동 합금이다. [우리말큰사전]이나 [국어대사전] 또는 물상교과서에 놋쇠는 구리와 아연의 합금이라 적혀 있으나 이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다.
유기의 수수께끼..?
▶ 유기 양푼에 채소 씻으면 벌레가 스스로 사라져 조상들이 유기를 아꼈던 까닭은 또 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미나리 같은 야채를 씻을 때, 일부러 유기 양푼을 찾아 썼다. 이렇게 하면 야채에 붙어 있는 거머리나 벌레가 유기가 뿜어내는 강한 기운 때문에 다 씻겨나갔다. 유기 양푼이 없을 때는 작은 놋수저라도 그 속에 넣어서 씻기도 했다. 말하자면 유기는 해충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도구로도 쓰인 셈이다.
같은 밥 주발이라고 해도 유기는 남자용, 여자용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바닥에 굴리면 금방이라도 구를 듯하게 생긴 동글동글한 모양의 옥바리 주발은 여자용이고, 펑퍼짐한 모양의 연엽 주발은 남자용이다. 무심코 보아 넘기면 같은 주발인데도 조상들은 이렇듯 주발에까지 법도를 세웠던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런 모양을 사용했던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천원지방(天圓地方), 음양의 철학을 충실히 따랐던 조상들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농약 등 이 묻은 유해한 식품을 담아두면 유기의 삭아버린다.
▶ O-157등, 세균이 살균 되는 작용을 합니다.(얼마전 모 TV에서 시험한 결과임)
※ 병원성대장균인 O-157 H7은 동물의 장관내에서 증식하는 대장균으로서 사람에게 설사를 유발하고 경우에 따라서 장출혈등과 복통·경련 및 의식장해를 일으킵니다.
※ 병원성대장균 O-157에 의한 식중독은 최근 미국, 일본등지에서 수만명이상의 환자가 발생 하여 20명이상이 사망한 바 있으며 일반적으로 5살미만의 소아에 가장 많이 발생됩니다.
※ O-157대장균에 의한 식중독은 세균이 증식하기 적합한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가장 많이 발 생하나 간혹 겨울에도 발생할 수도 있으니 항상 주위를 기울여야 하며, 주원인 식품은 사람 이나 동물의 변에 오염된 식품 및 우물물등 매우 다양합니다.
※ 세균성식중독의 경우에는 많은량의 균을 섭취하지 아니하면 식중독이 발생되지 아니하나 O-157의 경우에는 소량으로 서도 식중독을 일으킬수도 있으나 열에 약하여 75℃에서 1 분에 사멸됩니다.
※ 병원성대장균 O-157식중독의 잠복기는 4∼8일정도로서 증상은 복통과 물같은 설사를 주증 상으로 하나 경우에 따라서 많은 양의 혈변을 동반한 설사도 있으며 일주일 후에는 장출혈 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금님이 드셨다던 평상식, ‘신선로’
고급스러우면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궁중요리는 바로 신선로이다. 신선로는 원래 음식 이름이 아닌 화통이 붙은 냄비 이름을 일컫는다. 임금님이 드셨던 평상식에 불과하다고 전해지지만 화려함과 풍부한 영양은 다른 요리에 비할 데가 없다.
신선로 틀 안에는 건강식으로만 이루어진 다양한 재료들이 보인다. 미나리 초대, 대구전, 석이버섯을 다져 부쳐 낸 전, 표고버섯, 새우, 계란 지단 등이 오색을 맞추며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다. 위에는 호두, 밤, 은행 등의 견과류와 고기 완자가 고명으로 사용되었다. 고기와 다시마, 표고버섯 등을 푹 삶아 우려 낸 육수의 깔끔한 맛이 절정을 이룬다. 한미리 요리의 특징은 재료로 버섯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사이사이 놓여진 자연송이의 향이 그 맛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1천 년의 영화를 누렸던 유기가 우리네 곁에서 멀어져간 데는 사연이 있다.
1. 떠올리기는 싫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제 치하. 일제는 놋그릇에 쓰이는 황동을 군수용으로 쓰느라 유기 그릇을 아예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나중에는 한 술 더 떠 여염집 부엌에 있는 놋그릇까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모조리 거두어갔다. 조상들의 빼어난 솜씨가 배어 있는 아름다운 우리네 놋그릇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2.동족상잔 6.25는 우리의 가치와 삶, 세계관을 뒤흔들었다. 사람 사는 격을 갖추기보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혼란 속에서 무거운 놋쇠 그릇보다 가벼운 양은 그릇이 더 간편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난방 방식이 재래식 아궁이에서 연탄 화덕으로 바뀌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3.썩지 않고 평생을 써도 녹슬지 않는다. 하지만 연탄이 뿜어내는 유독 가스가 놋그릇을 금세 산화시켜 변색이 되는 바람에, 간수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놋그릇마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유기 세척법
-100% 토마토 주스
*30분정도 담궈 놨다가 씻으면 깨끗해 진다
-놋그릇 푸른녹 헝겊에 초산 묻혀 닦으면 깨끗 *구리나 놋 제품은 조금만 소홀히 방치해도 곧잘 푸른 녹이 슬곤 하는데, 이 푸른 녹은 헝겊에 초산을 먹여 닦으면 깨끗하게 닦인다. 스푼, 젓가락, 포크, 나이프 등은 소다수(뜨거운 물 1ℓ에 소다 3큰술을 넣는다)에 하룻밤 정도 담가 두면 세세한 곳까지 일일이 닦지 않아도 반짝반짝 윤이 난다.
현대 과학에 도전하는 유기(鍮器) 의 제작과정
현대 과학에 도전하는 유기(鍮器) 의 제작과정
우리 나라 사람은 옛날부처 금을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기원전 25세기에 만든 금동귀걸이가 평남 강동군 순창리에서 나왔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백제에서는 전남 나주군 신촌리에서 금동관이, 무령왕능에서는 많은 왕관 장식품이 나왔다. 신라에서는 574년 황룡사의 장륙상을 조성하는데 여기에 도금하는데 쓰인 금은 1만 198푼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천마총, 황남대총에서도 찬란한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금장식품이 출토되어 과연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 불러도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금은 워낙 귀한 물건이어서 금 빛나는 재료를 찾던 중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다루어 왔던 청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유기의 기원은 멀리 기원전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금빛을 내는 식기나 수저 등이 출토되는 시기를 상한연대로 잡아야 한다. 그러면 무령왕릉과 안압지에서 수저가 출토되는 것을 보아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현대합금의 제조 방식은 유기를 만드는 수치를 사용할 경우 제련 과정에서 부서집니다. 또 유기 또한 수치를 초과할 경우 금이 가고 부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현대 과학도 하지 못하는 합금 과정이 바로 유기 제조 과정입니다.』
(시대에 따른 제조과정)
고대의 황동은 현대 금속의 의미로서가 아닌 동으로 합금한 금속을 말한다.
삼국시대에도 신라에 철유전(鐵鍮典)이라는 유기전담기관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의 놋그릇은 동 1근에 주석 2∼4냥 4돈을 넣은 것으로 이것은 곧 주석이 11 %∼22 % 함유된 것을 뜻한다. 이때는 주로 주조와 절삭가공법으로 유기를 만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식기와 제기등은 동과 주석만을 합금한 동합금으로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구리에 주석의 함량을 높이면 청동은 붉은 색에서 주석이 11∼25 % 들어가면 불그스레한 금빛을 띠게 된다. 이 빛깔이 우리의 색감에 맞아 놋쇠로 쓰게 되었다. )
고려시대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함으로써 금속공예의 수준을 한껏 높였으며, 놋쇠가 평민층까지 확산되어 각종 생활용기 및 농악기나 불교용)가 놋쇠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주석의 함량이 규격화하게 되었다.놋쇠로 만든 생활도구를 유기라고 한다. 놋쇠는 구리에다 주석을 려은 합금이며 청동기 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이다.
전통적 의미의 놋쇠는 동 1근(지금의 600g)에 상납4냥반(약 168.7g)을 배합한 우리나라 특유의 재료이며, 일명 유철(鍮鐵)이라고도 한다. 유기를 놋쇠 또는 통쇠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7대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황동 유기'라고 하며,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을 '백동유기'라 한다.
질이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 제작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다. 방짜기법이란 동과 석(錫)(향동(響銅))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 제품 제작기법이다. 이런 기법으로 만든 것을 유기를 방짜유기라 한다. 방짜유기는 질 좋은 놋쇠로서 특히 소리가 맑아 징, 꽹과리, 대야, 양푼, 식기, 수저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그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일일이 두드려서 만들던 방짜기법대신 손쉬운 주물(鑄物)기법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 비율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물틀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방법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확한 합금 비유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기법의 놋쇠와 주물유기는 구분해야 하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통틀어 일반적으로 유기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짜기법으로 만든 놋쇠 대신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 생산하던 합금쇠를 퉁쇠라고 해서 전통적인 놋쇠와 엄밀히 구분했다. 8 ·15 이전만 해도 방짜기법을 만든 것만을 최고로 쳤다
(조선 시대의 유기 제작 지역 및 방법)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유기 생산을 장려하여 17세기에는 개성(開城)과 안성(安城)에서 유기 공업이 성행하였다. 6, 25 전까지는 개성, 안성을 비롯하여 김천, 남원, 운봉, 전주, 홍성, 박천, 평양, 사리원, 정주, 서울 등지에서 놋그릇을 많이 만들었다.조선말기에는 안성유기가 유명해졌다.
영조때의 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 기집조(器什條)에, "통속적으로 놋그릇을 중요시하여 사람들은 반드시 밥, 국, 나물, 고기까지 일체의 식탁용기로 녹그릇을 사용한다. 심지어는 요강, 세수대야까지도 놋쇠로 만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양반가를 비롯하여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실생활 용구로서의 놋 제품이 얼마나 널리 대중화 되었는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나라의 놋그릇 제작방법은 경기도 안성지방에서 만들었던 주물제작법(鑄物製作法),
평안북도 정주 납청(納淸)지방에서 만들었던 방짜제작법(方字製作法),
구리에 주석을 넣은 주동(鑄銅)을 녹여 틀에 부어 만드는 유기를 주물유기(鑄物鍮器)라 하여 경기도 안성(安城), 경상북도 경주(慶州), 충청북도 충주(忠州), 전라북도 이리(裡里) 등지에서 주로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곳은 개성과 안성지방이다.
안성지방에서는 식기류와 반상기 및 제향에 필요한 제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용구를 많이 만들었는데, 안성의 주물유기는 제작기교가 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합금이 우수하여 '안성마춤'이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북쪽의 산간지방에서는 놋동이, 놋양푼, 놋요강, 놋버치, 놋상등 비교적 큰 것들을 만들어 썼으며,
중부지방에서는 안성지방을 중심으로 반상기(飯床器)와 제기(祭器)등의 작은 식기류를 주로 만들어 썼다.
또 농사일을 주업으로 했던 남쪽의 함양과 김천지방에서는 우수한 농악기를 만들어 썼다. .
놋그릇의 본산지였던 납청(평북 정주)에서는 양대(방짜)유기점은 놋점, 주물 유기점은 퉁점이라고 구분해서 불렀으며 또 놋쇠로 만든 그릇은 놋성기(成器), 퉁쇠로 만든 그릇은 퉁성기라고 구분해서 불렀다.
방짜유기는 놋점에서도 사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귀했고 값도 월등히 비쌌다.
붓배기:
붓배기는 식기와 같은 주물품으로, 그 공정은 부리(용해, 조형, 제품 주조)와 가질(표면 가공)로 나누어진다. 우선 동을 흑연도가니에 넣어 녹인 다음 적당량의 주석을 넣어 녹인다. 한편 갯토(해변의 보드라운 흙)를 써서 거푸집을 만든다. 주조코자 하는 기물의 본인 번기(番器)의 모양을 만들어 암틀과 수틀을 만든다. 암틀은 갯토판 위에 번기와 틀을 놓고 잘 떨어지도록 송탄가루를 번기 위에 뿌린 후 갯토를 넣어 가장자리부터 다져서 완성한다. 이 암틀 만들기가 끝나면 뒤엎고 그 위에 수틀을 올려놓고 암틀을 만들 때와 같은 순서로 수틀을 만든다. 다 만들어 수틀을 들어 올려 엎어놓고 수틀에 붙어 있는 번기를 떼어낸다. 암틀과 수틀 위는 쇳물이 잘 흐르도록 그을음을 칠한다. 두 틀을 합쳐서 고정시킨 다음 도가니에서 녹인 쇳물을 틀의 유구(주입구)에 부어 넣는다. 이렇게 주조한 주물은 표면이 거칠어 그릇의 안팎을 깨끗이 깎고 다듬어야 하는데 이 일을 가질이라 한다. 돌아가며 깍도록 만든 가질틀 끝에 그릇에 맞는 머리목을 끼우고 머리목에 그릇을 끼워 고정시킨 후 가질칼을 그릇에 대어 발로 회전 속도를 조절하면서 깎는다. 다음에 쇠기름에 고운 기와가루를 섞어 걸레에 묻혀 가질틀에 대고 돌리면 광이 난다.
방자:
방자유기는 대야와 같은 단조품으로, 그 공정은 부리(용해, 주괴 주조), 네핌(동판 단조, 순도리 절단), 우김(예비 성형), 제질(순도리 절단), 벼림(완성 성형), 가질(표면 가공)로 세분화되어 있고 11명이 한 조가 되어 작업한다. 부리작업은 흑연도가니에 동합금(놋)을 넣고 용해하여 바둑(주괴)을 주조하는 것이다. 이 때 동합금은 구리 1근에 주석 4.5냥 즉 Cu-22%Sn 합금이다. 원래 구리에 대한 주석의 함량이 높아지면 경도가 커져 단조할 수 없으나 주석이 18 %에서 25 %까지는 600 ℃ 안팎에서 단조가 가능한 구역이 있는데 옛 장인들은 경험적으로 이를 알아내었다. 평북 정주 납청에서 사용한 흑연도가니의 용량은 75∼100 kg으로 추정되며, 도가니 주위에 숯불을 피워 1,100∼1,500 ℃에서 녹인다. 도가니를 꺼내어 쇠물을 물판(주형)에 부어 만들고자 하는 기물의 크기로 만든다. 이렇게 만든 주괴(鑄塊)를 단조하여 일정한 두께로 만들고 필요한 크기만큼 절단하는 것이 네핌작업이다. 모루 위에 달궈진 소재를 놓고 망치꾼들이 쳐서 그릇 모양으로 우그러뜨리는 것이 우김질이다. 이때는 네핌질을 마친 소재 세 개를 한꺼번에 달궈 하나씩 겹쳐가면서 우김질을 한다. 우김질된 바둑은 그릇 모양으로 겹쳐지는데 이를 하나씩 떼어내는 것을 냄질이라 하며 떼어낸 하나를 우개리라고 한다. 우개리를 불에 달궈 모양을 바로 잡는 작업을 닥침질이라 한다. 다음으로 순도리를 절단하는 작업을 제질이라 하며 이 작업을 끝내고서 원하는 강도를 얻기 위하여 달궈서 찬물에 담그는 담금질을 한다. 담금질을 하면 그릇의 모양이 뒤틀리는데 이를 망치로 바로 잡아주는 작업을 벼림질이라 한다. 끝으로 겉면을 깎아내는 가질작업을 한다. 마무리를 할 때는 그릇의 뒷면에 메자국을 그대로 남겨 두기도 하고 동심원을 새기기도 한다. 당시 11명이 한 조가 되어 작업을 하는데 1인당 연간 제품 생산량은 16.36∼21.81톤이어서 거의 요즈음의 생산량과 맞먹어 당시의 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놋그릇을 만드는 과정
사진 왼쪽 위 / 방짜 쇠를 두드리고 궁글리는데 쓰는 여러 연장들.
오른쪽 아래 / 방짜 쇠를 두드리고 달구고 궁글리는 모습.
전라남도 순천지방에서 만들고 있는 반방짜제작법(半方字製作法) 한상춘씨
▶ 흠잡을 데 없이 꼭 들어맞는 ‘안성맞춤’
주물 유기는 원료를 도가니에 녹여서 틀에 붓는 것으로, 안성에서 아직도 전통 제조법으로 유기를 만드는 유기장 김근수씨의 작업 과정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부질간의 부질작업(주물 작업)을 끝내고, 다음에는 가질간의 가질작업(깍기 작업), 마지막으로 광간의 광내기로 제품을 완성시킨다.
*경기도 안성지방의 주물 유기장인 김근수(金根洙)씨는, "해방 이전의 장인들은 경험에 의해 유기 성분을 상쇠, 중쇠, 하쇠로 나누고 상질의 쇠인 놋쇠는 유철(鍮鐵), 중간질은 청철(靑鐵)로 불렀다." 라고 말한다. 이는 주석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았을 뿐더러 가격이 비싸 맞춤 반상기만 유철로 주조하여 상류층으 수요에 맞추었고 서민층을 위한 대량 공급품은 청철 및 주철을 사용하였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식기나 악기 이외의 유기들은 동과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녹여서 주조하였다.
경기도 안성지방의 주물 유기장인 김근수(金根洙)
비록 작업 도중 튄 불똥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을
쓰지 못하지만 그의 메질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1948년 월남한 이후 지금까지 방자유기(方字鍮器)
와 더불어 살아온 그는 지금도 고집스럽게 놋그릇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기는 놋쇠 또는 통쇠라고도 하며 구리와 주석을 7대 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방자유기(方
字鍮器),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
동유기(黃銅鍮器)라고 하며,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을 백동유기(白銅鍮器)라 합니다.
그에게는 한국전쟁 이후의 놋그릇 파동이나, 스테인리스, 알미늄의 보급으로 인해 놋그릇이 외면당
하는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장문을 닫고 호떡장사, 공사판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면서
그는 오기와 놋그릇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그 시기를 버텨왔습니다.
유기장 이봉주, 그는 무형의 전통이 결코 저절로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유기장 -이봉주
문헌상 기록
[격고요론(格古要論)]에는, "유석(鍮石)이란 자연동으로 품질이 정교한 것을 말한다. 노감석(爐甘石)을 연성(煉成)하여 이루어진 것을 유(鍮)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주서종박물고변(五州書種博物考辯)]에는, "유는 동에 주석을 넣은 것이며 놋쇠라고 한다. 이것을 만들려면 동 1근에 주석 4냥을 합치면 된다." 라고 하였다.
최방이란 사람은 "동 1근과 노감석 1근을 녹이면 유석이 된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유(鍮)는 페르시아어로 아연으 원광을 뜻하는 "tutiya"에서 중국음인 "tiou"로 바뀐 글자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란 유석으로 만든 모든 기물을 일컬으며 노감석, 황동, 두석(豆錫), 진유(眞鍮)등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들이다. 그러나 고대의 황동은 현대 금속의 의미로서가 아닌 동으로 합금한 금속을 말한다.
이규경(李圭景)이 1834년에 펴낸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는
'향동(청동)은 우리 나라의 놋쇠이다. 놋쇠 1근을 만들려면 구리 1근에 주석 4냥을 넣으며 납은 섞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 조성은 Cu-20%Sn 청동 합금이다. [우리말큰사전]이나 [국어대사전] 또는 물상교과서에 놋쇠는 구리와 아연의 합금이라 적혀 있으나 이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다.
유기의 수수께끼..?
▶ 유기 양푼에 채소 씻으면 벌레가 스스로 사라져
조상들이 유기를 아꼈던 까닭은 또 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미나리 같은 야채를 씻을 때, 일부러 유기 양푼을 찾아 썼다. 이렇게 하면 야채에 붙어 있는 거머리나 벌레가 유기가 뿜어내는 강한 기운 때문에 다 씻겨나갔다. 유기 양푼이 없을 때는 작은 놋수저라도 그 속에 넣어서 씻기도 했다. 말하자면 유기는 해충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도구로도 쓰인 셈이다.
같은 밥 주발이라고 해도 유기는 남자용, 여자용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바닥에 굴리면 금방이라도 구를 듯하게 생긴 동글동글한 모양의 옥바리 주발은 여자용이고, 펑퍼짐한 모양의 연엽 주발은 남자용이다. 무심코 보아 넘기면 같은 주발인데도 조상들은 이렇듯 주발에까지 법도를 세웠던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런 모양을 사용했던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천원지방(天圓地方), 음양의 철학을 충실히 따랐던 조상들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농약 등 이 묻은 유해한 식품을 담아두면 유기의 삭아버린다.
▶ O-157등, 세균이 살균 되는 작용을 합니다.(얼마전 모 TV에서 시험한 결과임)
※ 병원성대장균인 O-157 H7은 동물의 장관내에서 증식하는 대장균으로서 사람에게 설사를유발하고 경우에 따라서 장출혈등과 복통·경련 및 의식장해를 일으킵니다.
※ 병원성대장균 O-157에 의한 식중독은 최근 미국, 일본등지에서 수만명이상의 환자가 발생
하여 20명이상이 사망한 바 있으며 일반적으로 5살미만의 소아에 가장 많이 발생됩니다.
※ O-157대장균에 의한 식중독은 세균이 증식하기 적합한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가장 많이 발
생하나 간혹 겨울에도 발생할 수도 있으니 항상 주위를 기울여야 하며, 주원인 식품은 사람
이나 동물의 변에 오염된 식품 및 우물물등 매우 다양합니다.
※ 세균성식중독의 경우에는 많은량의 균을 섭취하지 아니하면 식중독이 발생되지 아니하나
O-157의 경우에는 소량으로 서도 식중독을 일으킬수도 있으나 열에 약하여 75℃에서 1
분에 사멸됩니다.
※ 병원성대장균 O-157식중독의 잠복기는 4∼8일정도로서 증상은 복통과 물같은 설사를 주증
상으로 하나 경우에 따라서 많은 양의 혈변을 동반한 설사도 있으며 일주일 후에는 장출혈
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금님이 드셨다던 평상식, ‘신선로’
신선로 틀 안에는 건강식으로만 이루어진 다양한 재료들이 보인다. 미나리 초대, 대구전, 석이버섯을 다져 부쳐 낸 전, 표고버섯, 새우, 계란 지단 등이 오색을 맞추며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다. 위에는 호두, 밤, 은행 등의 견과류와 고기 완자가 고명으로 사용되었다. 고기와 다시마, 표고버섯 등을 푹 삶아 우려 낸 육수의 깔끔한 맛이 절정을 이룬다. 한미리 요리의 특징은 재료로 버섯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사이사이 놓여진 자연송이의 향이 그 맛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1천 년의 영화를 누렸던 유기가 우리네 곁에서 멀어져간 데는 사연이 있다.
1. 떠올리기는 싫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제 치하. 일제는 놋그릇에 쓰이는 황동을 군수용으로 쓰느라 유기 그릇을 아예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나중에는 한 술 더 떠 여염집 부엌에 있는 놋그릇까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모조리 거두어갔다. 조상들의 빼어난 솜씨가 배어 있는 아름다운 우리네 놋그릇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2.동족상잔 6.25는 우리의 가치와 삶, 세계관을 뒤흔들었다. 사람 사는 격을 갖추기보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혼란 속에서 무거운 놋쇠 그릇보다 가벼운 양은 그릇이 더 간편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난방 방식이 재래식 아궁이에서 연탄 화덕으로 바뀌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3.썩지 않고 평생을 써도 녹슬지 않는다. 하지만 연탄이 뿜어내는 유독 가스가 놋그릇을 금세 산화시켜 변색이 되는 바람에, 간수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놋그릇마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유기 세척법
-100% 토마토 주스
*30분정도 담궈 놨다가 씻으면 깨끗해 진다
-놋그릇 푸른녹 헝겊에 초산 묻혀 닦으면 깨끗

*구리나 놋 제품은 조금만 소홀히 방치해도 곧잘 푸른 녹이 슬곤 하는데, 이 푸른 녹은 헝겊에 초산을 먹여 닦으면 깨끗하게 닦인다. 스푼, 젓가락, 포크, 나이프 등은 소다수(뜨거운 물 1ℓ에 소다 3큰술을 넣는다)에 하룻밤 정도 담가 두면 세세한 곳까지 일일이 닦지 않아도 반짝반짝 윤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