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투데이... 25

송수민20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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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에 녹화된 자신의 춤을 보는 현주는 진지하게 동작 하나 하나를 살피며 봤다.

옆에서 부분부분 잘 못된 곳을 지적해 주며 고쳤던 부분들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교수님의 설명이 현주는 이제야 이해 가는 것 같았다.
현주는 이제 모든 동작들을 익힌 상태에서, 앞으론 어떻게 표현하려는 동작들마다에 감정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갖게 만들 것인 가를 생각하며 테이프를 보았다.

 

*

 

고속도로를 달리는 민혁의 차에서는 음악 소리만 들릴 뿐, 정민은 민대로 민혁은 민혁 대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 상태로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

 

"뭐, 정이사와는 이미 넌지시 말을 했지만.. 무현이도 장가갈 나이가 됐고, 지나가  마침 옆에서 보살펴 주게 되었으니, 사적으론 너희 둘이 진지하게들 사귀어 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알았니?"

채현의 포크가 접시에 강하게 부딪혔다.

갑작스런 아빠의 말에 채현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아빠와 엄마..
그리고 무현을 차례대로 보았다.

"저의 애가 부족하죠, 회장님."

억지스런 웃음소리를 함께 하며 대답하는 말을 듣는 채현은 더 기가 막혔다.

"무슨 말을.. 내 어릴 때부터 쭉 봐왔지만, 재원이지. 지나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지나야, 똑똑하고 야무지죠. 보기에도 그런데요.."

오가는 부모들간의 이야기보다는 과연 오빠가 이제 어떻게 나올까가 궁금했던 채현은 오빠를 쳐다봤다.

그러나 전혀 게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묵묵하게 식사하고 있는 오빠를 보고 있자니, 채현은 답답해 왔다.

예전의 오빠라면 벌써 아빠에게 한 마디 하고 일어나서 나갔어야 했건만,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너무나도 태연하게 보였다.  

"아니, 애들 서로 무슨 말들이 이미 오고 간 건가? "

이 회장도 무현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이상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게요. 이 녀석도 전혀 무반응인데요? 저도 아무 말 하지 않았거든요, 회장님."

정이사가 좋아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으로 이회장과 눈을 마주했다.

"아빠, 처음부터 이런 자리로 부르신 거였어요?"

채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갑작스런 채현의 차가운 말투에 순간적으로 식탁의 분위기가 다운되었다.

"이런 말씀 하실려고 부르신거냐구요."

채현의 눈이 아빠를 향했다.

"이 녀석, 지금 무슨 태도야?"

"여보, 채현이 오늘 시험 끝났다잖아요. 맘놓고 식구들끼리 저녁 먹는 줄 알고 나왔다가 이런 말들이 오가니깐, 불편스러워서 그런거죠.

얘, 넌 아무리 예민해져서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정이사님 가족들도 계신데..이러면 안돼지."

채현은 엄마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하려던 말을 꾹 참았다.

"그래도 그렇지. 저 녀석이 어리광만 늘어서.."

이회장이 다시 표정을 고쳤다.

"괜히 저희가 오히려 죄송스럽네요. 가족 식사에 공연히 함께 하게되서.."

정이사가 말했다.

"아니, 아니. 첨부터 오늘 식사는 함께 하기로 했던 거고, 내가 우리 딸에게 미리 말을 안 했던 것뿐이네."

채현은 또 다시 오빠를 쳐다봤다.

여전히 무반응의 오빠가 이젠 미워 보였다.

 

 

*

교수실을 나오면서 현주는 녹화 테이프를 가방에서 다시 한번 꺼내서 보았다.

왠지 지금까지는 가지지 못했던 마음이 생겨나자, 현주는 이제 대회 준비에만 남은 시간을 다 받치며 열심히 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현주야!"

현주는 뒤돌아보았다.

"놓고 가면, 어째."

 

주민이  휴대폰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아직 이게 정말 내 것인가 해서 그런가 봐요."

주민이 건네는 휴대폰을 받으며 현주가 웃었다.

"그럼, 그냥 내가 가질 걸 그랬나?"

주민이 장난치듯 말했다.

"연습이 힘들겠지만, 시험도 끝내고 마무리 들어가는 거라 한편으론 맘이 편하지?"
"네."
"그래, 내일 보자."
"들어가세요."

현주는 주민이 교수실로 뛰어 들어가는 걸보고 난 뒤에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전화기를 보며, 현주는 플립을 열어 괜한 번호 한두 개를 누르다가 그만 두고는 가방에 전화기를 넣었다.

 

*

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자, 민혁은 두 손으로 깊게 쓸어보았다.
저기 멀리 백사장을 따라 걷는 정민의 뒤를 보며, 민혁은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가슴으로 맞이하는 바다 바람이 민은 시원했다.
때 맞춰 온 것처럼 점차 붉어져 가는 하늘까지도 맘에 꼭 들었다.
민은 목까지 가득하게 차 버린 답답함을 이 바다에 모두 던져버리고 가고 싶었다.

 

민혁은 갑작스레 들리는 외침에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바다에 몸을 던지듯 파도에 가까이 서서 두 손을 입으로 모으고 소리 지르는 민을 보며 민혁은 뛰어가려다 그만 두고, 그대로 모래밭에 앉아서 민을 지켜보았다.


민은 목청껏 소리내었다.
바다가 삼키고 있는 해처럼 마음속에서 계속 번뇌하는 일들과 생각을 저 해에 담아 함께 바다에 묻고 싶었다.


*

 

정이사부부의 차도 바로 입구에 도착하자, 이회장은 인사를 받고 차에 탔다.

"난, 오빠랑 함께 갈게요."
"그래라, 그럼."

채현은 그대로 서서 차가 출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차가 떠나자, 채현은 오빠를 쳐다보며 섰다.

무현은 차가 도착하자, 운전석으로 돌아가서 타고, 채현이도 차에 탔다.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래? 그럼, 몰랐던 일.. 처음 듣게 되는 사람이었어.. 조금전의 오빠가?"

채현의 목소리가 점차 올라갔다.

"몰랐어. 이렇게 까지 오빠가 변했는지.. 그럼, 내일 당장이라도 정지나하고 약혼하라 하면, 오빠 그대로 하겠구나."

무현은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오빠!"

채현은 아무리 빈정대는 말투로 말해도 전혀 반응이 없는 무현을 향해 소리 질렀다.

무현이 핸들을 급하게 돌리며 차를 급정지 시켰다.

채현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뒤로 제쳐졌다.

"너가 이 정도면 오빤. 오빠는 어떻겠니. 뛰어 나오고 싶은 마음 들 정도로 참기 힘들었지만, 어쩌지 못했어.

왜? 묻고 싶겠지.. 오빤.. 다시 집으로 들어올 때, 다 버렸다. 내 생각, 내 의지.. 모두 버리고 돌아왔어.

이제 날 살아가게 하는.. 이 세상의 존재로 남을 수 있게 하는 건. 이무현이란 아버지의 아들로써만 살기로 했다."

"오빠.."

"그만 하자."

 

무현은 다시 핸들을 꺾으며 도로로 진입했다.

채현은 오빠의 대답에서 할 말을 잃었다.

단순하게 정략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오빠에게 싫으면 싫다고 아빠에게 말하란 말만 하려고 했던 단순한 화냄이 오빠에게서 듣지 말아야할 말까지 듣게 만든 요인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어.. 채현은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

 

방으로 들어 온 채현은 바닥으로 가방을 떨어트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가 이 정도면 오빤. 오빠는 어떻겠니. 뛰어 나오고 싶은 마음 들 정도로 참기 힘들었지만, 어쩌지 못했어. 왜? 묻고 싶겠지.. 오빤.. 다시 집으로 들어올 때, 다 버렸다. 내 생각, 내 의지.. 모두 버리고 돌아왔어. 이제 날 살아가게 하는.. 이 세상의 존재로 남을 수 있게 하는 건 이무현이란 아버지의 아들로써만 살아가기로 했다.]

채현은 계속해서 맴도는 오빠의 말에 멍한 마음을 어떻게 추수러야 할지 몰랐다.

왜..그렇게 아빠를 미워하는지.. 또 아빠를 그토록 미워하면서도 아버지의 아들로써만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지..채현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 버린 것 같은 오빠에게서 예전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게 아닌지 겁이 났다.

 

*

 

"소리치고 나니, 시원하든?"

바다가 점점 뒤로 멀어지자, 민혁이 민에게 물었다.

"응."

민은 차 밖으로 얼굴을 내 밀고 점점 희미해지는 바다 내음을 마지막으로 한껏 깊은 심호흡으로 들이쉬어 가슴에 담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한번 오기가 힘들어.."
"민혁아, 고맙다."
"뭐가, 고마운데."
"다."
"또 답답해 져서 저 바다에 뭐든 내 던지고 싶어지면 말해. 그때도 꼭 동행해 줄테니깐."

민은 민혁이 자신을 꽤 뚫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민혁의 입가에 남은 여운의 웃음을 보며, 민도 저절로 평온한 마음이 되었다.


*

 

현주는 엘리베이터가 서자, 열린 문으로 나왔다.

아파트 출입문 입구 계단 아래로 서 있는 채현이 보이자, 현주는 걸음을 빨리 했다.

"들어오라니깐, 고집은.."

현주는 채현의 바로 뒤에서 말을 하며 다가섰다.

"맛난 저녁 먹고, 산책이라도 하시려고 내려 오셨나요, 아가씨?"

현주는 편안하게 웃어 보였다.

"쉬고 있는데 나오란 거 아닌가 몰라."

채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현주는 채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냥.. 밤바람 좀 쐬려고 내려오다 보니깐, 너희 집 쪽까지 내려 왔더라구."
"그랬구나. 가족 외식은 어땠어? "

현주는 채현에게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맛있는 거 먹었어. 그리고 그냥 그랬어."
"..어."

현주는 그냥 그랬다는 채현의 말에 또 오빠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어떤 계기로 변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어 지는지 아니?"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말하는 채현을 보고 있는 현주는 쉽게 채현의 말이 이해되지 못했다. 

"오빠가.. 이제 아빠의 아들로써 살아가겠다고 하더라..? 좋은,... 건가?"

채현은 씁쓸한 웃음을 함께 했다.

현주는 생각했다.
무현오빠가 변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좋은 게 아닌지.. 그렇게 방황하던 오빠가 이제, 아버지 회사도 나가고, 또.. 좋지 않았던 부자간의 사이에서 이젠 아버지의 아들로써 살아가겠다고 오빠가 말했다면, 그 말에 가장 좋아해야 할 사람은 채현이가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그 말을 하는 채현은 그런 오빠 때문에 더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주는 도무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채현아.. 무슨 말이야, 응?"

 

현주는 답답했다.

"아냐. 그냥 한 소리야."

 

채현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 채현!"
"가자, 그만. 나도 집에 들어가 봐야지. 산책을 너무 오래 했다. 내려오면서 참.. 천천히 걸었거든."

현주는 억지로 바꾸려는 채현을 보고, 하는 수 없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아파트 입구까지 함께 걸었지만, 채현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현주도 구지 일부러 어떤 말이든 해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갈게."

 

입구 상가쯤이 되자, 채현이 현주에게 말했다.

"그래."
"연습 열심히 하는지, 내가 불시에 찾아가 본다..? 알았지?"
"어."

현주는 채현을 향해 끄덕였다.

"너, 대회 끝나면 어디라도 같이 가자. 내가 멋진 곳으로 한 번 찾아볼게."

돌아서서 곧장 난 길로 올라가는 채현의 뒷모습을 보며 현주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현주 역시 맘이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