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님. 어제 찾으셨던 책들. 책상 위에 목록으로 정리해서 올려놓았습니다." "고마워요."
무현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곧은 자세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지나를 향해 대답하며, 방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점심은 나가서 같이 하도록 하죠."
무현은 지나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그 말만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무현의 방을 돌아다보며, 어두운 눈빛과 함께 입을 꼭 다물었다.
*
"엄마, 말이 돼? 지금이 어떤 시댄데.. 결혼 상대자를 부모가 정해서 따르라고 해..?"
채현은 엄마의 뒤를 쫓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니가, 결혼해? 그리고 혼담이 오간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그만 할래?" "그런게 아니면 엄만, 그럼. 아빠가 그냥 한 말 같다는 거야?"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현이가 순순히 니 아빠 말 듣고 따라 갈 거 같애?" "오빠가.. 따르면.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하면 엄마.." "그렇다면 무현이도 지나가 싫지만은 않은 거잖니. 엄만, 지나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다른 이유로해서 오빠가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 한거라면.. 그러면..엄마." "다른 이유가 어딨어? 맘 잡고 이제 부모 속 안 썩이겠다는 거지. 너도 이제 좀 그만 억지 부리구. 아니, 방학이라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올래?" "엄마!"
채현은 답답했다.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자, 엄마의 방문을 세게 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방으로 올라온 채현은 어떻게 해야 오빠를 도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으로 방을 서성였다. 오빠가 그렇게 못한다면.. 채현은 자신이 나서서라도 이번 일을 막고 싶었다. 정략결혼이라니.. 채현은 상상 할 수 없던 일을 오빠가 하게 되었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
이젠 조금만 움직여도 흐르는 땀이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연습실 안의 공기가 무척이나 더웠다.
현주는 물론 김교수도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이젠 내가 좀 쉬자고 해야겠는데?"
현주는 교수님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젊긴 젊구나. 젊음이 좋지. 지금부터 3시까지 쉬자. 가장 더울 때 뛰어 다니는 것도 고통이니.."
김교수가 벗었던 웃옷을 손에 걸치며 레슨 실을 나갔다.
현주는 표정이 풀렸다.
덥고 지친 몸을 바닥에 그대로 뉘이며 천장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등이 바닥에 닿자, 열기의 몸이 바닥에 흡수되어 차가움이 전해졌다.
현주는 거칠게 몰아 쉬던 숨이 진정되기 시작할 때쯤 아득하게 들리는 소리에 숨을 멈추고 집중해서 소리를 쫓았다.
그리곤 바로 일어나 구석에 놓인 가방을 향해 쓸어 질 듯 빠르게 기어가서 전화기를 꺼냈다.
"여..보...세요."
현주는 매끄럽지 못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현주니? 연습하다가 받은 거 구나."
전화박스 안의 민은 미안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누..구.."
현주는 누군지 몰라 물었다.
"정민입니다. 김현주양."
민은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어머, 민이 오빠군요."
현주는 반쯤 엎드려진 몸을 바로 세워 고쳐 앉으며 받았다.
"한창 연습하겠구나 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걸었는데, 받았구나."
"지금 쉬는 시간이에요."
현주가 밝게 웃었다.
"그래..?"
민은 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다른 한 손은 입가를 만지작 거리게 되었다.
"오빠, 바쁘지 않으면 시원한 거 먹으러 같이 갈래요?"
현주가 벌떡 일어나며 가방을 집어들었다.
"정말? 좋지. 그럼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민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
현주는 걸어나오면서 긴 머리를 대강 끈으로 묶어 정리했다.
열려진 문으로 나오자, 강한 햇빛이 내리 쬐고 있었다.
현주는 계단 아래 이미 와 있는 정민을 확인하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오빠!"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민이 현주가 두 발을 딛으면서 땅으로 발소리를 크게 내며 부르자, 뒤를 돌아보았다.
"오빤, 방학인데.. 어디 안 가요? 참, 민혁이 오빤요? " "어, 오늘 논문 준비하는 선배하고 부산으로 학회에 갔어." "오빠도 같이 가지 그랬어요. 겸사 겸사 바다도 보고." "내가 갈 입장이 못되는 곳이라 그랬어. 그리고 난 바다 몇일 전에 봤는데?" "정말요? 언제 누구랑 어디로 갔던 거에요?"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는 현주를 보며 민이 웃었다.
"음.. 시험끝나는 날에.. 민혁이랑.."
민도 현주의 질문에 맞추어 대답하며 즐거워했다.
*
민혁은 선배가 교수님과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호텔 로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서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바다경치에 민혁이 저절로 창가로 걸어갈 때, 창 앞으로 지나가는 여자에게 민혁은 시선을 멈췄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자를 어디에서 본듯했기 때문이었다.
"민혁아!"
민혁은 선배가 뒤에서 불러 잠시 고개를 돌려 알았다고 신호를 보낸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여자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시선을 옮겼지만, 보이지 않았다. 민혁은 프론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왠지 찜찜했다.
*
"지금 들어가서 연습하면, 언제 끝나는 거야?" "몰라요. 교수님이 그만 하자고 하실 때까지니깐.." "열심히 해." "오빠도 공부 열심히 해요. 그리고 오늘 빙수 맛있게 먹었어요." "나도 빙수 맛있게 먹었어. 앞으로 나도 그렇게 먹어야 겠드라."
현주는 빙그레 웃었다.
"갈게요, 그럼."
현주가 계단을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민은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는 현주를 보고 나서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민은 또 한번 저절로 웃음 담은 미소를 지었다.
*
호텔 방 테라스 밖으로 슬리퍼를 신고 나간, 민혁은 밤이 되자 크게 들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안전 대에 양팔을 길게 옆으로 뻗으며 손등 위로 턱을 괴었다.
바람에 몇 개의 머리카락이 눈을 가릴 정도로 날리자, 민혁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우며 일어 선 뒤 뒷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빼어 번호를 눌렀다.
"어디긴.. 싱겁게 어딘지는 왜 물어보라고 그래? 집이겠지."
채현은 누운 체로 민혁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 부산? 갑자기 부산은 왜 갔어?"
채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랬구나. 일 때문이지만, 그래도 좋겠네. 바다도 보고."
"올래? 모레 올라 갈 거거든. 나? 할 일이야.. 없지, 별..루."
민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좋아, 아..! 우선 먼저 잠깐만.. "
민혁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팔을 뻗을 수 있는 만큼까지 최대로 늘리며 수화기에 바다 소리를 담기 위해 애 썼다.
"치.. 들리긴 무슨 소리가 들려. 글세.. 정말 갈까? 근데, 혼자 가기는 그렇잖어. 현주도 안되고, 민이 오빤 오빠랑 다르게 공부하느냐고 시간 없을테고."
채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였다.
"준이랑 올래? 사진 찍으러 오라면서 꼬셔볼까, 그럼?"
민혁은 번뜩 생각난 듯 했다.
"누..구? 준이오빠?"
채현의 눈이 반짝이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내가 준이한테 전화해보고, 올 수 있다고 하면, 너한테 전화해서 같이 시간 정하라고 할게. 알았어. 어."
민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
방학으로 조용했기 때문에 복도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자, 준은 걸음에 신경을 쓰며 걸었다. 흐르는 음악소리가 점차 가까이에서 들리자, 준은 걸음을 더 천천히 했다.
레슨실 안.
한창 연습중인 현주가 보이자, 준은 창유리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유심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현주가 움직일 때마다 무용복의 레이스가 나풀댈 때면 준은 숨도 죽이게 되었다.
(연재) 투데이... 26
"실장님. 어제 찾으셨던 책들. 책상 위에 목록으로 정리해서 올려놓았습니다."
"고마워요."
무현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곧은 자세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지나를 향해 대답하며, 방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점심은 나가서 같이 하도록 하죠."
무현은 지나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그 말만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무현의 방을 돌아다보며, 어두운 눈빛과 함께 입을 꼭 다물었다.
*
"엄마, 말이 돼? 지금이 어떤 시댄데.. 결혼 상대자를 부모가 정해서 따르라고 해..?"
채현은 엄마의 뒤를 쫓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니가, 결혼해? 그리고 혼담이 오간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그만 할래?"
"그런게 아니면 엄만, 그럼. 아빠가 그냥 한 말 같다는 거야?"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현이가 순순히 니 아빠 말 듣고 따라 갈 거 같애?"
"오빠가.. 따르면.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하면 엄마.."
"그렇다면 무현이도 지나가 싫지만은 않은 거잖니. 엄만, 지나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다른 이유로해서 오빠가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 한거라면.. 그러면..엄마."
"다른 이유가 어딨어? 맘 잡고 이제 부모 속 안 썩이겠다는 거지. 너도 이제 좀 그만 억지 부리구. 아니, 방학이라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올래?"
"엄마!"
채현은 답답했다.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자, 엄마의 방문을 세게 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방으로 올라온 채현은 어떻게 해야 오빠를 도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으로 방을 서성였다.
오빠가 그렇게 못한다면.. 채현은 자신이 나서서라도 이번 일을 막고 싶었다.
정략결혼이라니.. 채현은 상상 할 수 없던 일을 오빠가 하게 되었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
이젠 조금만 움직여도 흐르는 땀이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연습실 안의 공기가 무척이나 더웠다.
현주는 물론 김교수도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이젠 내가 좀 쉬자고 해야겠는데?"
현주는 교수님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젊긴 젊구나. 젊음이 좋지. 지금부터 3시까지 쉬자. 가장 더울 때 뛰어 다니는 것도 고통이니.."
김교수가 벗었던 웃옷을 손에 걸치며 레슨 실을 나갔다.
현주는 표정이 풀렸다.
덥고 지친 몸을 바닥에 그대로 뉘이며 천장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등이 바닥에 닿자, 열기의 몸이 바닥에 흡수되어 차가움이 전해졌다.
현주는 거칠게 몰아 쉬던 숨이 진정되기 시작할 때쯤 아득하게 들리는 소리에 숨을 멈추고 집중해서 소리를 쫓았다.
그리곤 바로 일어나 구석에 놓인 가방을 향해 쓸어 질 듯 빠르게 기어가서 전화기를 꺼냈다.
"여..보...세요."
현주는 매끄럽지 못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현주니? 연습하다가 받은 거 구나."
전화박스 안의 민은 미안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누..구.."
현주는 누군지 몰라 물었다.
"정민입니다. 김현주양."
민은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어머, 민이 오빠군요."
현주는 반쯤 엎드려진 몸을 바로 세워 고쳐 앉으며 받았다.
"한창 연습하겠구나 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걸었는데, 받았구나."
"지금 쉬는 시간이에요."
현주가 밝게 웃었다.
"그래..?"
민은 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다른 한 손은 입가를 만지작 거리게 되었다.
"오빠, 바쁘지 않으면 시원한 거 먹으러 같이 갈래요?"
현주가 벌떡 일어나며 가방을 집어들었다.
"정말? 좋지. 그럼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민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
현주는 걸어나오면서 긴 머리를 대강 끈으로 묶어 정리했다.
열려진 문으로 나오자, 강한 햇빛이 내리 쬐고 있었다.
현주는 계단 아래 이미 와 있는 정민을 확인하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오빠!"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민이 현주가 두 발을 딛으면서 땅으로 발소리를 크게 내며
부르자, 뒤를 돌아보았다.
"땀 때문에 세수 좀 하고 나오느냐고 좀 늦었어요."
현주가 맨 얼굴을 두 손으로 비볐다.
정민은 현주의 그런 행동을 귀엽게 보았다.
"벌써부터 이러니.. 한 여름엔 어쩐데요, 오빠."
"그러게."
"그래도 도서관은 에어컨 틀어주죠?"
현주의 샘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정민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어머!"
"왜?"
현주가 갑자기 걷던 걸음을 멈추고 섰다.
"전화기.. 휴대폰을 또 안 들고 나왔지, 뭐에요."
현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가지러 갈래?"
정민이 고개를 뒤편으로 돌렸다.
"아뇨, 뭐. 그 사이 전화 오겠어요..어디? 오늘 오빠 전화가 첨 이였는걸요.
그냥 가요."
현주가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정민은 앞서는 현주를 바로 따라 걸으며 교문을 나갔다.
*
전화기 멜로디 소리가 빈 레슨 실에 울렸다.
준은 다시 재다이얼을 누르고 귀에 전화기를 댄 후에 다른 한 손으론 테이블에 놓인 접시 위의 음식들을 포크로 이것저것 찍기만 했다.
"레슨 중인가..?"
준은 혼잣말을 했다.
"아직까지 하는 거야? 누군데.. 한번 안 받으면 끝이라던 사람이 전화기를 붙잡고 있네, 아주..?
누구야? "
준이 통화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가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시선을 주며 맞은편 의자에 여자가 앉았다.
"음식 시켜 놓고, 화장실 가는 건 또 어느 나라 매너냐?"
준은 괜시리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서 앞에 놓인 빈 접시로 음식을 적당히 포크로 덜어보았다.
"이거 또다시 내 라이벌 생긴 거 아냐?"
여자는 접시로 시선을 떨구며 지나가는 말처럼 하기 위해 입에 음식을 덜었다.
"라이벌?"
준은 입으로 들어가던 음식을 가득 물며, 고개를 들고 그 말에 어이없어 했다.
"오빠의 어떤, 또 다른 뉴 페이스의 추종자가 나타났나 해서지."
여자는 준의 표정과 말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준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어이없는 웃음을 짓다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만 좀, 내 속 태워 오빠."
여자는 단단히 결심에 찬 얼굴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준은 포크를 탁자로 내려놓았다.
"알았어, 알았다구, 오빠. 안 그럴게.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
여자는 준의 행동에 안절부절못하면서 준이 놓은 포크를 다시 준의 손에 쥐어주며 괜한 말했다는 질린 듯한 얼굴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늘 얘기하지.
이성으로 내 맘을 가져가는 여자 이외에는 절대로 사람 안 사귄다구.
이런 오해들 할까봐 안 본다고 했잖아. 니 감정이 편안하게 날 오빠로 볼 수 있게 될 때까진 연락하지 마라.
아! 아마 그 사이에 혹시라도 내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그것도 허락되지 않겠지만. 조심해서 들어가라."
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갔다.
여자는 자신을 탓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
"팥은 조금만 넣어주시고요, 대신에 우유는 많이 해서 주세요."
"저도 같이 빙수로 주세요."
주문하는 현주를 보며, 민은 재밌어 했다.
"그럼, 팥빙수가 아니잖아."
"음.. 언젠가부터 이렇게 먹었거든요.? 팥 맛이 강하지 않으니깐, 훨씬 좋더라구요. 다들 오빠가 지금 말한 것처럼 말해요, 그게 무슨 팥빙수냐구. 그래도 난 이렇게 먹는 게 가장 맛있어요."
민은 진지하게 설명하는 현주가 귀엽게 보였다.
"대회가 언제야?"
"으.. 이제 몇 주 안 남았어요."
현주는 두 눈을 찡긋했다.
"더운데 고생이 많네, 정말."
"오늘은 교수님이 먼저 쉬자고 하시더라구요. 3시까지가 쉬는 시간이에요."
민은 얼른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오빤, 방학인데.. 어디 안 가요? 참, 민혁이 오빤요? "
"어, 오늘 논문 준비하는 선배하고 부산으로 학회에 갔어."
"오빠도 같이 가지 그랬어요. 겸사 겸사 바다도 보고."
"내가 갈 입장이 못되는 곳이라 그랬어. 그리고 난 바다 몇일 전에 봤는데?"
"정말요? 언제 누구랑 어디로 갔던 거에요?"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는 현주를 보며 민이 웃었다.
"음.. 시험끝나는 날에.. 민혁이랑.."
민도 현주의 질문에 맞추어 대답하며 즐거워했다.
*
민혁은 선배가 교수님과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호텔 로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서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바다경치에 민혁이 저절로 창가로 걸어갈 때, 창 앞으로 지나가는 여자에게 민혁은 시선을 멈췄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자를 어디에서 본듯했기 때문이었다.
"민혁아!"
민혁은 선배가 뒤에서 불러 잠시 고개를 돌려 알았다고 신호를 보낸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여자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시선을 옮겼지만, 보이지 않았다.
민혁은 프론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왠지 찜찜했다.
*
"지금 들어가서 연습하면, 언제 끝나는 거야?"
"몰라요. 교수님이 그만 하자고 하실 때까지니깐.."
"열심히 해."
"오빠도 공부 열심히 해요. 그리고 오늘 빙수 맛있게 먹었어요."
"나도 빙수 맛있게 먹었어. 앞으로 나도 그렇게 먹어야 겠드라."
현주는 빙그레 웃었다.
"갈게요, 그럼."
현주가 계단을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민은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는 현주를 보고 나서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민은 또 한번 저절로 웃음 담은 미소를 지었다.
*
호텔 방 테라스 밖으로 슬리퍼를 신고 나간, 민혁은 밤이 되자 크게 들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안전 대에 양팔을 길게 옆으로 뻗으며 손등 위로 턱을 괴었다.
바람에 몇 개의 머리카락이 눈을 가릴 정도로 날리자, 민혁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우며 일어 선 뒤 뒷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빼어 번호를 눌렀다.
"어디긴.. 싱겁게 어딘지는 왜 물어보라고 그래? 집이겠지."
채현은 누운 체로 민혁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 부산? 갑자기 부산은 왜 갔어?"
채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랬구나. 일 때문이지만, 그래도 좋겠네. 바다도 보고."
"올래? 모레 올라 갈 거거든. 나? 할 일이야.. 없지, 별..루."
민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좋아, 아..! 우선 먼저 잠깐만.. "
민혁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팔을 뻗을 수 있는 만큼까지 최대로 늘리며 수화기에 바다 소리를 담기 위해 애 썼다.
"치.. 들리긴 무슨 소리가 들려. 글세.. 정말 갈까? 근데, 혼자 가기는 그렇잖어. 현주도 안되고, 민이 오빤 오빠랑 다르게 공부하느냐고 시간 없을테고."
채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였다.
"준이랑 올래? 사진 찍으러 오라면서 꼬셔볼까, 그럼?"
민혁은 번뜩 생각난 듯 했다.
"누..구? 준이오빠?"
채현의 눈이 반짝이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내가 준이한테 전화해보고, 올 수 있다고 하면, 너한테 전화해서 같이 시간 정하라고 할게. 알았어. 어."
민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
방학으로 조용했기 때문에 복도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자, 준은 걸음에 신경을 쓰며 걸었다.
흐르는 음악소리가 점차 가까이에서 들리자, 준은 걸음을 더 천천히 했다.
레슨실 안.
한창 연습중인 현주가 보이자, 준은 창유리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유심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현주가 움직일 때마다 무용복의 레이스가 나풀댈 때면 준은 숨도 죽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준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몸을 급하게 벽으로 기대어 서며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