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열려오는 또 다른 나날 9

푸른바다2003.05.07
조회321

                      새롭게 열려오는 또 다른 나날  9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 류시화 -

 

  

   이삿짐 싸는 일을 나는 싫어한다. 언제나 가족들이 이사할 집을 미리 정했으며
이사를 마친 후 동생들이 나를 새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이 버릇은
여전하여 언제나 아내가 이사를 완결 지었다. 요즘이야 전문 이삿짐 용역회사에서
완벽하게 해결해 주지만 예전의 이삿짐 꾸리기란 상당한 고역이 따르는 귀찮은 일
이었다.
  

그런데 지금 살고있는 집은 내가 먼저 성화를 부리며 재촉 재촉하여 급히 서둘
만큼 신명나게 이사를 했다. 마당 너른 집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과수나무들과
빨리 상면하기 위해 신명을 부린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읍내에 살았다. 읍내에서 좀 떨어진 시골 친구네 집에라도 놀러
가면 친구네 집 마당에 철 따라 갖가지 과일들을 따먹는 재미에 그 친구네 집이 그
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앵두, 자두, 살구, 철 따라 지천으로 매달린 감이며 대추
사과 배 등이 먹을 것 귀한 시절에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많은 과수나무
들이 나를 유혹했고 그 나무들의 주인인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아마 마당 너른 집에서 저런 과수나무들을 내 손으로 꼭 심어보리라 하는 욕망은 어릴 때 자란 꿈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임자가 되리라. 우리도 집 마당에 과일나무를 심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절실하게 한 나의 야무진 꿈이었다.

  

   많은 종류의 나무를 심으면 철 따라 과일이 열릴 것이고, 그 나무들이 꽃 피고
열매 맺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 아닌가. 그런 상상 속에 꿈
꾸던 집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게 왔으니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 귀찮은 이
사에 내가 신명을 부린 이유다.

 

   지난봄에 친구가 우리 집 뒤란을 생쥐 곳간 더나들 듯 하여 "너 뒤란은 왜 그리
들락거리니?" 하고 물어보았지만 씩 웃음만 가볍게 흘릴 뿐이다. 친구가 가고 난
뒤 뒤란을 둘러  보았다. " "아! 이 놈 때문이구나." 내가 가볍게 여긴 두릅나무에서
올라온 새순을 몽땅 따갔다. "짜식 두고보자 내년에는 너 몫까지 돌아갈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깜박 잊었던 두릅의 맛깔스런 향이 그리워졌다.

 

   뒷집에서 엄나무 나물을 한 접시 보내왔다. 우리마을에는 집집마다 울타리 곁에
엄나무를 심어 놓았다. 모두가 큰 나무들이다. 어린 나무는 없고 오래된 엄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가만 살펴보면 마당 안이 아니라 모두가 대문 밖에서 자라고 있다.

   엄나무는 두릅나무과인데 온몸에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다. 아주 무섭게 생긴 나무여서 그 가지를 꺾어 문설주 위에 걸어 놓으면 잡 귀신을 쫓아낸다 하는 벽사의 의미
를 갖고 있는 주술적인 나무다. 가시가 엄하게 생겨서 엄나무인데 음나무라고도 한
다. 
  

   온몸에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를 누가 정다운 눈길로 보겠는가. 그래서 귀신도
엄나무를 보면 피해 간다하는 벽사의 뜻이 담긴 나무인 것이다.
   동경 달 밝은 밤 거닐다 집으로 돌아 온 처용이 아내의 밀애 현장을 발견하고
부른 노래가 "처용가"이다. 처용은 아랍계의 귀화인이라 알려져 있다. 수염이 텁숙
부리인 그의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상당히 무섭게 보였나보다. 그래서 처용의 얼굴
을 그린 그림이 민간에서 벽사의 그림으로 널리 쓰였다.
   차차 그 풍습은 변하여 처용보다 더 무서운 나무, 엄나무로 대체 되어 문설주에
걸리어 잡귀를 막아주는 나무가 된 것이다. 그 무서운 엄나무에서 봄이 오면 시골밥상의 주인이 되는 개두릅이 난다. 
  

   개두릅은 엄나무의 새순이다. 잎은 팔손이나무 잎처럼 쫙 피어 자라는데 아이
손바닥을 펼쳐 놓은 것 같다. 그 잎과 줄기를 삶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무쳐
먹기도 한다. 향이 너무 좋아 겨우내 씁쓸해진 입맛을 단번에 향긋하게 돌려놓는
나물이다.
   그 무서운 가시 많은 엄나무에서 봄이면 새순이 올라와 봄의 향을 전해주는 나
무를 나는 지난해에 베어내 버렸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별스레 싫어하는 나무는 두릅나무나 엄나무처럼 가시가 많은 나무와 옻나
무와 옻나무처럼 흡사하여 구별이 불가능한 붉나무가 있다. 옻나무를 싫어하는 것
은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길에서 보물찾기하다 숲에서 오른 옻 독 때문에 일그러
진 친구의 얼굴을 보고 나서이다. 가히 공포적인 얼굴로 등교한 그 친구의 얼굴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옻이 오르면 얼굴은 붉게 부어 오르고 진물이 나는 등 호된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때부터 산에라도 가기라도 하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움츠
린 채 걸어며 눈은 항상 옻나무나 그 비슷한 붉나무만 보여도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옻나무는 우리네 일상에서 귀히 여겨지고 있는 이로운
나무인 것이다. 옻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은 전통 목공예에는 없어서는 안 될 고급
도료로 사용되며 새순은 나물로 먹는 특별한 건강식이며 나무도 닭요리에 긴히 쓰
이는 재료이다.
  
   옻독은 위장에서는 소화제가 되고 심장에서는 청혈제가 되며 폐에서는 살충제가
되어 결핵균을 비롯한 각종 균들을 박멸하는데 옻독에 의해 한 번 소멸된 암균은
되살아나지 않을 정도로 그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늦가을 단풍철이 되면 옻나무의 진가가 나타난다. 진한 선홍색으로 가을산을 붉
게 물들이는 찬란한 자태의 옻나무와 붉나무의 단풍은 보는 사람들의 넋을 앗아갈
정도로 요염하고 화려함의 극치로 단풍이 든다. 겉만 보고 속을 보지 않는 나무가 옻나무나 엄나무인 것이다. 사람도 겉멋에 물든 사람과 알찬 사람의 값어치가 어떠한가 엄나무와 옻나무에서 배운다.

  

   나무 한 그루의 가치는 얼마쯤 될까? 산림청이 최근 캐나다의 산림자원 평가서
를 기준으로 나무의 금전적 가치를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한 그루의 나무가 50년
간 자랄 경우 3,400만 원어치의 물을 재생산하며, 6,700만 원에 해당하는 대기오염
물질 제거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잘 가꾸어진 1헥타르의 숲은 연간 16톤의 탄산가스를 흡수하고 12
톤의 산소를 방출한다고 한다. 큰 나무 한 그루가 성인 네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양의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기능 외에도 소음방지, 기상 완화, 생물
족 보존 등의 환경적 가치와 문학, 예술 등에 미치는 문화적 가치까지 더한다면 돈
으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셈이다. 숲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시작된다.
  
   우리 집에 없는 은행나무를 오늘 시골 장에서 한 그루 샀다. 가을이면 노란색이
이제 내 마음에 물들 것을 기대하며 은행나무 한 그루에 노란 희망 한 아름 안고
나는 은행나무 심으러간다.

                 

                                                  2003, 05, 07                푸 른 바 다   새롭게 열려오는 또 다른 나날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