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보리를 구분할 줄 아세요?

김정미200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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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강산이 두번 바뀐 날이다

유수같은게 세월이라더니...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이렇듯 생생하거늘...

꿈 많았던 어린시절을 지나,  그래도 희망의 일곱빛깔 풍선을 하늘 높이 날리던 학창시절도 지나

졸업을 하고 봄도 무르익어가고 녹음도 짙어가는 봄날

오라는 곳도 없고 갈데도 없이 백수의 나날이 계속되어지기만 하던 괴로운 봄날.

졸업을 하고 두어달의 백수생활로 나의 꿈의 눈높이는 낮을 데로 낮아져 버리고 말았다

어디든 가리라...그곳이 지옥끝이 될 지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눈높이를 낮추니 여기저기서  직장중매(?)가 마구 들어온다

지도에도 쉽게 띄지 않는 남쪽의 어느 농촌마을이 그 곳이었다

지명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고,  물론 근처까지 가 본 적도 없는,  거의 모험에 가까운 마을.

기차를 타고,  다시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또 얼마나 달렸을까

이른 아침에 떠난  여행길이  어느 낯선 마을에 나를 떨어뜨려놓고 해는 지고 말았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몇채 되지도 않는 집들.

비포장된 신작로엔 먼지만이 날리고.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으며,

사방을 둘러봐도 벌판, 또 벌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이곳에서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

이곳이 꿈 많았던 처녀의 유배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직장, 낯선 사투리들.

앞 뒤를 둘러 보아도, 아래 위를 훑어 보아도 한점의 정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는 이 마을에.

정미란 여자 드디어 날개를 접고 새생활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창가에 턱 괴고 앉자 생각에 잠긴다

" 저 먼지 뽀얗게 일으키며 사라지는 버스를 타면 내 그리운 곳에 닿을 수 있을텐데..."

어느날 직장으로 전화 한통화가 걸려왔다

"성함이 김 정미님 되십니까?"  "그런데요"

"혹시 생년월일이 ...되시나요?  종교는 ...교 이고,  학교는 ...에 나오시고  맞나요?"

"맞긴 한데요? 그곳이 어디시죠?"  "여긴 경찰섭니다"

낯선 곳에서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 있는 나에게 경찰서에서 전화까지 해서 놀리다니요

장난꾸러기 경찰관이 신원조회를 그렇게 한 모양이다

하루 하루가 적막강산이고, 고독하고 , 답답하고, 심심하고, 숨막히고...

무슨 표현으로 갑자기 닥친 이 환경과 나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으리요

익숙한 것에서의 완벽한 결별이라고 표현할까

친한 친구들과,  익숙한 문화와,  정든 모든 것들에 완벽한 결별이었으니.

집보다 논밭이 더 많고, 사람보다 가축들이 더 많은 이 곳에 무엇으로 정을 붙일 수 있으리요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심정이 이럴까...청령포에 갇혀 지내던 단종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

석양을 받으며 논뚝길을 걸어 퇴근을 하면 신발위로 메뚜기들이 팔짝 팔짝 뛰어오름도 적응이 않된다

이쁜 구두도 어느새 뽀오얗게 먼지가 먼저 신고식을 하고

한껏 멋을 낸 옷도 농촌 분위기엔 전혀 빛을 발할 수 없었으니...

 

그렇게 한 두어달 지낸 어느날,

드디어 정미의 역사상,  결코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지금까지의 유배지의 고생담은 뒤에 이어질 사건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못함이고

호사스런 푸념정도로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한 사건 하나 터지고 말았다

이야기의 진심어린 의도는,

 나의 실수담을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라도 이제는 조금이라도 마음 가벼워지고 싶고

손해를 끼쳐드린 주인께 다시 깊은 사죄를 드리고픈 마음에서 인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곳도 예외는 아니게 젊은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일손이 부족하여

우리가 농촌 봉사활동차 출동을 한 것이다

제목은 "보리 베기"였으니...

농사에 문외한이던 처녀가 낫을 들고 아이들과 보리를 베러 나선 것이다

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낫질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끝도 없는 황금 벌판...온 천지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보리들 천지이다

"얘들아,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들 한번 해 보자  보람이 있을거다"

나는 그 때 정말 몰랐다

제목답게 저 벌판의 황금 물결이 전부 보리인 줄만 알았다

그 속에 절반은 밀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밀이 있다고 한들 수확기가 보리보다 늦게는 보름정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어찌 알 턱이

있으리요

나는 자신있게 큰 소리로 아이들에게 명령을 했다

"너희들 조심해서 저 보리들을 모두 베어라" 

열심히 일하는 아이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모처럼의 보람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나 비록 고향이 농촌이었긴 하지만 일찌기 산촌에서 자란 터,

벼와 보리, 그리고 밀을 구별할 수 있을리가 없다

겨우 옥수수나 감자등과 친숙한 촌 사람 아닌 촌사람으로서 드디어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으니.

우린 정말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구슬같은 땀방울을 사정없이 쏟아내면서...

해는 서서히 저물고 드디어 저 끝간데 없는 황금의 벌판은 어느새 황랑한 들판이 되었고

서 있던 곡식들은 피곤했던지 모두 드러누워 버렸다

 

이제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나보다 머리가 더 좋을테니까

"밀과 보리를 한꺼번에 다 추수해 버리면 어떡합니까?"

밀 주인 사색이 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고

윗분들 미안함의 차원을 넘어선 당황의 빛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어정쩡한 도시처녀(?) 그저 죽여주십사 고개 숙이고 있고

영문모를 아이들 눈알만 대굴 대굴 굴리고...

절대로 이순간 농촌들판을 밀레의 "이삭줍는..."모습으로 상상하지 마시길...오히려 그 반대였으니.

아직 적응도 못된 직장에서 이처럼 큰 실수를 저질러 놓았으니 이를 어쩌리요

나도 할 말이 없는건 아니다  애초 작업 시작전에 밀과 보리를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을 숙지시켜주던지.

보리만 베라는 뉘앙스라도 풍겼다면 그 "만"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버스는 이미 지나가 버린걸.

이미 베어버린 밀을 다시 갖다 붙일 수도 없는 일.

봉사활동 차원에서 한 일에 너무 노여움을 표할 수도 없는 일.

일 지시자는 경험도 없는 도시 처녀니.

막걸리 한사발에 마음을 풀고 이 일은 일단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정작 당사자인 나는 삼년간 그 곳을 오가면서...그 보리밭을 오가면서...

이 노래 하나만은 결코 부를 수는 없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살아간다

"정미씨~ 이젠 밀과 보리를 구분할 줄 아시겠죠?"

"노우~"

참 뻔뻔한 아줌맙니다 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