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와 하숙집 주인의 차별과 머나 먼 이국땅에서 살아 가는 서글픔과 외로움과 엄마에 대한 그리움 기타 등등으로 그녀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간것이 아니라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트레쓰를 풀 길이 없어
바케트 쩍 하니 배 갈라 놓고 앉은 자리에서 버터를 척척 발라 하루 이틀만에 버터 한 통씩을 다 먹어 치워 댔던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살던 방은 무지 무지하게 큰데 그 벽면에 떡하니 스페인 사람 처럼 생긴 여자가 기묘한 표정과 시선을 하고 그윽하게 쳐다 보는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이 초상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벌건 대낮에 봐도 무서운데 안 그래도 외로움과 추위에 잠을 뒤척이던 그녀가 시선을 딱 마주치는것이 바로 그 오묘하고도 그윽한 표정의 여인이었던것이다...
이쯤 되니 ...초이의 스트레쓰는 날로 날로 더해 갔고..
너무 추운 나머지 이불을 몇 겹이나 덥고 그것도 모자라 신발까지 신고 자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지 해결책으로 함께 살기로 결심을 했다..
서로 외로움도 달래주고 한국 음식도 해 먹고 ...남의 눈치 안 보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듯한 생각 같아서 너무나 좋았다...
부동산을 통해서 원룸 (스튜디오) 를 하나 구했다..
원룸이라 각자의 공간은 없었지만 왠만한 살림살이에 가재 도구가 다 갖춰져 있어 살기에 부족한 점은 없었다...
시골이라 그다지 비싸진 않았다..
하숙집 보단 비쌌지만 둘이서 돈을 반씩 내니 크게 비싸게 쳐지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의 궁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우리가 그랬을까..이해 안 되는게 천지 투성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건데 둘중 하나만 똑똑했으면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안 살았을건데 둘다 얼빵했기 때문에 그 얼빵이 서로 상승 효과를 나타내 두배의 얼빵함이 아니라 혼자 있을때보다 네배의 얼빵함이 발휘 된것 같다
그렇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가난해야만 했었다..
왜?
유학생이 안 가난하면 이상하잖아....
사실 그 당시 우리는 그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며 살 이유가 없는 애들이었다
학비는 미리 한국에서 내고 왔기 때문에 기껏 우리가 쓰는 돈이라고 해 봐야 식비와 집세뿐이었는데..
거긴 시골이라 집세가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고
또 프랑스란 나라는 그리 물가가 비싼 나라가 아니다..
되려 생필품은 우리 나라 보다 싸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치나 멋을 부리는 애들이냐....
전혀 아니다..
그 당시만 해도 '샤넬'이니 '구찌'니 하는 명품들을 아는 애들은 다 알았다..
파리에서 더러 그런 명품들을 하나씩 사모으는 애들을 보고서 나는 뭐 그런 상표도 있구나..하고 알게 되었을 정도로 그런것엔 무관심했다...
나는 프랑스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에 맞는 화장품이 없을거야...하고 동네 화장품에 가서 그 당시 내가 쓰던 '드봉' 화장품을 종류대로 바리 바리 싸들고 프랑스까지 간 아이고 초이는 동네 슈퍼에서 니베아 크림 하나 사가지고 얼굴에 철떡 철떡 바르면 그게 끝인 애였다...
그런 초이를 보고 '어머~ 얘..얼굴에 니베아 크림 바르면 어떡하니...' 하면서 드봉 화장품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그런 우리가 옷 한 벌 ,화장품 하나 안 사면서 프랑스에서 버티면서 '가난' 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의무감에 시달렸다...
아니..어쩌면 가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멋있잖아....
그때는 그게 낭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던것 같고 ..또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 한테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한푼이라도 아껴써야 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기도 했던것 같기도 하고....
뭐 여하간에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최대 '지출원'인 식비를 아낄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그런데 먹는건 줄이는데 한계가 있다..
사실 프랑스에 제일 싼것중의 하나가 쌀이다..
그 싸디 싼 쌀을 놔두고..우리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식비를 줄이기 위한 극약 처방으로 수제비만 먹기로 했다....
아줌마가 된 지금 생각하면 수제비 만들어 먹는게 어디 예사 일인가...차라리 밥 해 먹는게 쉽지...
그런데 우리는 가난해야만 했고 가난한 사람은 수제비를 먹어야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수제비를 뜨기 시작했다..
수제비 역시 그녀의 코치 아래 반죽은 내가 떴다..(나중에 초이의 고백에 따르면 그 당시 힘든 부분은 다 나를 시켰다고 한다)
나야 수제비 먹어나 봤지 생전 반죽이라고 해 봤나...어딜..
근데 그녀가 그랬다...
수제비의 생명은 '반죽' 이라고...
너무 질어도 안 되며 너무 되어도 안된다...
치대고 또 치대서 반죽 속의 물기가 겉까지 다 융합이 될때까지 계속 치대면서 밀가루를 뿌려 주어야 한다는것이었다...
멍청한 애들 특징이 또 시키면 시키는대로 죽을 똥 살똥 한다는 점이다..
나는 마치 도기를 만드는 사람이 기술을 사사 받듯..장인 정신을 가지고 반죽을 치대고 또 치댔다..
그리하여..또 하나의 타이틀..
반죽의 여왕으로 등극되었다..
지금도 나는 누가 수제비 반죽 치대는걸 보곤 꼭 잘낸체를 해야 한다..
'에헤~ 이 사람아..수제비의 생명은 반죽이야,반죽.. 그걸 그렇게 대충 해서 쓰나.."
그 말은 맞다..
내가 배우기는 제대로 배운것이다..
귀찮다고 반죽을 제대로 안 하면 수제비는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열심히 치대고 치대서 초이가 '잘했다' 고 칭찬을 해 주면 마음이 글케 뿌듯할수 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우리가 뭐 수제비 만들러 프랑스 까지 간건 아니잖아..?
수제비의 여왕이 되다....
이어서 계속....
추위와 하숙집 주인의 차별과 머나 먼 이국땅에서 살아 가는 서글픔과 외로움과 엄마에 대한 그리움 기타 등등으로 그녀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간것이 아니라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트레쓰를 풀 길이 없어
바케트 쩍 하니 배 갈라 놓고 앉은 자리에서 버터를 척척 발라 하루 이틀만에 버터 한 통씩을 다 먹어 치워 댔던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살던 방은 무지 무지하게 큰데 그 벽면에 떡하니 스페인 사람 처럼 생긴 여자가 기묘한 표정과 시선을 하고 그윽하게 쳐다 보는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이 초상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벌건 대낮에 봐도 무서운데 안 그래도 외로움과 추위에 잠을 뒤척이던 그녀가 시선을 딱 마주치는것이 바로 그 오묘하고도 그윽한 표정의 여인이었던것이다...
이쯤 되니 ...초이의 스트레쓰는 날로 날로 더해 갔고..
너무 추운 나머지 이불을 몇 겹이나 덥고 그것도 모자라 신발까지 신고 자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지 해결책으로 함께 살기로 결심을 했다..
서로 외로움도 달래주고 한국 음식도 해 먹고 ...남의 눈치 안 보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듯한 생각 같아서 너무나 좋았다...
부동산을 통해서 원룸 (스튜디오) 를 하나 구했다..
원룸이라 각자의 공간은 없었지만 왠만한 살림살이에 가재 도구가 다 갖춰져 있어 살기에 부족한 점은 없었다...
시골이라 그다지 비싸진 않았다..
하숙집 보단 비쌌지만 둘이서 돈을 반씩 내니 크게 비싸게 쳐지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의 궁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우리가 그랬을까..이해 안 되는게 천지 투성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건데 둘중 하나만 똑똑했으면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안 살았을건데 둘다 얼빵했기 때문에 그 얼빵이 서로 상승 효과를 나타내 두배의 얼빵함이 아니라 혼자 있을때보다 네배의 얼빵함이 발휘 된것 같다
그렇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가난해야만 했었다..
왜?
유학생이 안 가난하면 이상하잖아....
사실 그 당시 우리는 그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며 살 이유가 없는 애들이었다
학비는 미리 한국에서 내고 왔기 때문에 기껏 우리가 쓰는 돈이라고 해 봐야 식비와 집세뿐이었는데..
거긴 시골이라 집세가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고
또 프랑스란 나라는 그리 물가가 비싼 나라가 아니다..
되려 생필품은 우리 나라 보다 싸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치나 멋을 부리는 애들이냐....
전혀 아니다..
그 당시만 해도 '샤넬'이니 '구찌'니 하는 명품들을 아는 애들은 다 알았다..
파리에서 더러 그런 명품들을 하나씩 사모으는 애들을 보고서 나는 뭐 그런 상표도 있구나..하고 알게 되었을 정도로 그런것엔 무관심했다...
나는 프랑스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에 맞는 화장품이 없을거야...하고 동네 화장품에 가서 그 당시 내가 쓰던 '드봉' 화장품을 종류대로 바리 바리 싸들고 프랑스까지 간 아이고 초이는 동네 슈퍼에서 니베아 크림 하나 사가지고 얼굴에 철떡 철떡 바르면 그게 끝인 애였다...
그런 초이를 보고 '어머~ 얘..얼굴에 니베아 크림 바르면 어떡하니...' 하면서 드봉 화장품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그런 우리가 옷 한 벌 ,화장품 하나 안 사면서 프랑스에서 버티면서 '가난' 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의무감에 시달렸다...
아니..어쩌면 가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멋있잖아....
그때는 그게 낭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던것 같고 ..또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 한테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한푼이라도 아껴써야 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기도 했던것 같기도 하고....
뭐 여하간에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최대 '지출원'인 식비를 아낄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그런데 먹는건 줄이는데 한계가 있다..
사실 프랑스에 제일 싼것중의 하나가 쌀이다..
그 싸디 싼 쌀을 놔두고..우리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식비를 줄이기 위한 극약 처방으로 수제비만 먹기로 했다....
아줌마가 된 지금 생각하면 수제비 만들어 먹는게 어디 예사 일인가...차라리 밥 해 먹는게 쉽지...
그런데 우리는 가난해야만 했고 가난한 사람은 수제비를 먹어야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수제비를 뜨기 시작했다..
수제비 역시 그녀의 코치 아래 반죽은 내가 떴다..(나중에 초이의 고백에 따르면 그 당시 힘든 부분은 다 나를 시켰다고 한다)
나야 수제비 먹어나 봤지 생전 반죽이라고 해 봤나...어딜..
근데 그녀가 그랬다...
수제비의 생명은 '반죽' 이라고...
너무 질어도 안 되며 너무 되어도 안된다...
치대고 또 치대서 반죽 속의 물기가 겉까지 다 융합이 될때까지 계속 치대면서 밀가루를 뿌려 주어야 한다는것이었다...
멍청한 애들 특징이 또 시키면 시키는대로 죽을 똥 살똥 한다는 점이다..
나는 마치 도기를 만드는 사람이 기술을 사사 받듯..장인 정신을 가지고 반죽을 치대고 또 치댔다..
그리하여..또 하나의 타이틀..
반죽의 여왕으로 등극되었다..
지금도 나는 누가 수제비 반죽 치대는걸 보곤 꼭 잘낸체를 해야 한다..
'에헤~ 이 사람아..수제비의 생명은 반죽이야,반죽.. 그걸 그렇게 대충 해서 쓰나.."
그 말은 맞다..
내가 배우기는 제대로 배운것이다..
귀찮다고 반죽을 제대로 안 하면 수제비는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열심히 치대고 치대서 초이가 '잘했다' 고 칭찬을 해 주면 마음이 글케 뿌듯할수 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우리가 뭐 수제비 만들러 프랑스 까지 간건 아니잖아..?
여하간..
수제비 뜯어 넣는거 ..이것도 기술이다..
쫀득 쫀득하게 찰 되어진 반죽을 손가락을 민첩하게 놀려 쭉쭉 얄핏하게 늘려 펄펄 끓는 국물에 넣어야 한다.
처음엔 잘 못 뜯어 넣어 두껍고 뭉텅했다...
그런데 자꾸하다 보니 이것도 기술이 늘었다...
그 재빠른 손놀림으로 휘리릭 반죽을 뜯으면 예술처럼 얄핏하고 쫀득쫀득 하고 맛나는 수제비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삼개월 내내 수제비만 먹으며..또 하나의 여왕에 등극했다...
이름하여 '수제비의 여왕'....
우리는 한꺼번에 반죽을 많이 해서 일회 식사 양만큼 반죽을 떼어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끼니 때마다 다시만 내어 수제비를 뜯어 넣었다...
아침에 수제비를 먹고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 와서 수제비를 먹고 (학교 바로 앞이 집이었다) 저녁때 하교 하고 저녁으로 수제비를 먹었다....
하루 이틀..사흘 나흘 ..정도가 아니라.. 입에서 밀가루 냄새가 폴폴 올라 올때까지 수제비를 먹었다...
그렇게 하니 우리는 정말 가난한것 같았다...
한국에서 왜 송금 해 달라는 말을 안 하냐고 전화가 오곤했다...
'괜찮아 ..돈 많아'
이렇게 말을 하면서 우리는 자아 연민에 빠져 밤이면 꺼이 꺼이 울며 수제비를 떴다..
이 얼마나 불쌍한 노릇인가..
멀리 타국에 와서 너무나 가난해서 우리는 이렇게 수제비만 먹고 살지 않는가...
그러나 그 댓가로 한국에 있는 가족이 송금해 주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에 두 띠방한 소녀들은 서로를 위로 했다..
'우리는 이렇게 먼곳에 와서 가족들에게 안해도 될 고생을 시키는구나..우리가 먹는거라도 아껴야 우리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지 않겠니...' 하면서...
그러나...
그 시각 한국에선 ..
우리만 빼고 모든 식구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