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푸르른 5월로 접어드는 계절의 한가로운 오후.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분좋은 공기는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으로 감미로운 향기마저 배어난다. 여기도, 저기도 N극과 S극의 자석처럼 꼭 붙어있는 쌍쌍의 남녀들.. 데이트하기 좋은 온도의 오늘 같은 날은 역시나 철썩 달라붙은 커플들의 세상인 듯 하다. 영주는 지금 약속장소를 향하고 있다. 언뜻보면 그냥 걷는 것 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보자면 그녀의 신발에 스프링이라도 붙은 듯 통통 튀어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큼한 미풍이 영주의 머리칼을 스친다. 어제 새로 산 라임 빛 트렌치 코트도 마음에 들고 화장도 잘 먹었다. 오늘은 그와의 세번째 데이트.. 대학생활 3년만에 처음으로 사귄 귀한 남자친구이기에 그녀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난 어쩜 이렇게 남자복이 없을까?' 또는 '이러다 남자손한번 못잡고 죽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의 한숨을 입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영주에게도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훤칠한 키와 멋진 몸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웃을 때마다 미간에 잡히는 매력적인 주름이 예술인 남자. 그의 미소를 떠올리자 영주의 가슴이 다시한번 싸하게 벅차오른다. 그 남자를 만나려고 지금껏 남자가 없었던 게지. 이렇듯 꿈길을 걷고 있는 영주를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헌데 이건 다분히 의도적인 충돌이다. "뭐야?" 영주가 뒤돌아 소리친다. 그리고 한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영주외에도 몇몇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외모의 남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모를 광채와 깊은 향기가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다. 머리칼로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본 영주는 잠시 멈칫한다. "죄송합니다."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사과를 하며 돌아선다. 하지만 순간적 최면이라도 걸린걸까? 영주의 발걸음은 한동안을 움직이지 못한 채 방황하고만다. 눈빛도 멍해져 버린 듯 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을 확인한 영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발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하지만 그 사람.. 그 묘한 사람은 걸음을 옮기는 영주의 뒷모습까지 묵묵히 바라보더니 다시 돌아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입술이 묘하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은 쓸쓸하고.. 또 슬프다.
"어떡해! 늦겠다.." 잠시 지체됐던 탓에 영주의 발걸음은 한층 가속이 붙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상상하기만 해도 영주의 마음은 울렁울렁이다. 하지만 한 순간 영주의 발걸음이 다시 주춤하고 멈춘다. 궂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영주는 순간 우뚝 서 버렸다. 아니,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마저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한동안을 이리저리 방황하듯 서성이던 영주는 시간을 재차 확인하더니 그제서야 천천히 전진을 시작한다. 이제 곧 약속장소.. 영주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저지한다. "여자는 절대 마음을 다 보여주어선 안돼." 영주는 주문이라도 외듯 중얼거리며 세번째 벤치를 주시한다. 하얀 벤치 위, 크림빛 스웨터를 걸친 매끄런 얼굴의 남자.. 왼쪽다리를 꼬고 앉아 이쪽으로 여유있게 손을 흔들고 있는 저 남자.. 저 멋진 남자가 진정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저 남자가 내 남자란 말이지? 그의 실루엣이 영주의 눈이 비치는 순간부터 영주의 심장박동은 한층 더 빨라지고 만다. 숨막히게 기분좋은 심장의 리듬.. 영주도 그에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생긋.. 영주의 입가에도 눈부신 미소가 번져나간다. 역시나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찌할 수가 없나보다. 한 걸음, 두걸음.. 영주는 여전히 앉아있는 그를 향해 조심스런 걸음을 계속한다. 네걸음, 다섯걸음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앞. "언제 왔어?' 영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묻는다. "어.. 한 10분됐나?" 남자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끼섞인 표정으로 대답한다. 영주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 순간 그의 미간에 매력적인 주름이 살짝 잡혔다. 영주는 다시금 벅차오르는 가슴을 참지 못하고 남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디갈까?" 하고 묻는다. 그 물음은 지독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흘러나와 영주조차 당황한다. "글쎄.." 남자는 대답을 미뤄둔 채 두 팔을 뻗어 영주의 허리를 감싼다. "뭐야." 영주는 그를 떼놓으려는 듯, 허리를 살짝 비틀다 열없이 얼굴만 새빨개져 버린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고 영주를 더욱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영주의 가슴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댄다. 마치 영주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야.." 영주는 난감한 듯 그의 어깨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반항에 무너질 그가 아니다. 그는 더욱 강하게 영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10분 늦은 벌이야." 하며 영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는 듯한 그의 숨결이 영주의 가슴가득 퍼져온다. 역시 여자는 10분 늦는게 정답이야. 영주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비밀스런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어린시절 깊고 깊게 묻어 두었던 추억.. 하지만 아무리 묻고 파묻어도 어쩔 수 없이 번져나오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왜 오늘따라 그 친구가 이렇게도 그리운 걸까? 영주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친구의 머리를 가슴깊이 껴안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다시 한번 그의 뜨거운 숨결이 가슴 속 깊이 퍼져오고.. 영주의 기억은 어느 새 그 아련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Past years>
1. 전설의 영주
올해 고등학생이 된 영주는 막 등교준비를 마쳤다. 새 교복, 새 가방.. 모든 것이 새롭다. 오늘부터 새로운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다. 영주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등을 가다듬는다. 귀를 살짝 덮는 커트머리와 늘씬하게 뻗은 다리.. 영주에게서는 왠지모를 중성적 매력이 물씬 풍긴다. 영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그땐.." 3명의 언니들 틈에서 자란 영주는 인형놀이를 좋아했다. 예쁜치마가 갖고 싶어 떼를 쓰고, 언니들에게 머리를 땋아달라고 조르던 아주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중학생시절까지도.. 그 날이 오기전까지 영주는 여느 여중생과 다름 없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 날 낮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리고 입 속에 있던 껌이 머리에 덕지덕지 붙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단발머리를 싹둑 잘라내지 않았다면.. 어쩜 오늘의 영주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리를 자른 다음날이었다. 잘라 낸 머리칼에 대한 영주의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그 날.. 영주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영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그들도 당황하였으리라. 그냥 넋을 잃고 말았더랬다. 그도 그럴것이 머리를 자르는 순간 영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귀밑 3센티미터의 반듯한 단발머리 소녀대신 일본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미소년이 별안간 등장했다고 상상해보라. 바로 그날, 그녀의 숨겨져 있던 중성적 매력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그러고보면 영주에겐 분명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쭉쭉 뻗는 팔다리도 그러하거니와 영주를 보면 어떤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머릿결.. 아기같은 피부결..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영주의 눈동자가 그것이다. 깊고 촉촉한 그 눈빛이 이상하게 보는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영주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감돈다. 영원처럼 고독하고 깊은 바다의 빛..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며 사춘기라는 열병에 고통을 겪게 되는 족속이 여중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여학교라는 울타리속에 갇힌 수감자들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울타리 속에서 이성을 찾을 수 없을 시 그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조금 왜곡되고 만다. 그들의 열정은 이성과 닮은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미림여중생들의 열정은 자연스레 영주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단짝이던 현정이도, 민지도 영주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져버렸다. 등굣길 곳곳에서 여중생들이 튀어나와 편지를 주고 도망가기도했다. 화장실만 다녀와도 영주의 책상위엔 늘 간식거리가 쌓여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받은 초컬릿박스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이며 생일이라도 되는 날이면 연예인을 방불케하는 선물더미를 풀어보느라 몇일간 정신이 없었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이 낯선반응에 당혹스러워 하던 영주였다. 하지만 사랑받는 기쁨을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게다가 소녀들이 영주에게 원한 것은 단 하나, 영주가 그들의 우상으로서 그저 존재해 주는 것.. 그 뿐이었다. 소녀들은 영주의 왕국을 만들어주었고 영주가 그 왕국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영주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했다.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의 마력, 그 달콤함이란.. 결국 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주는 소녀들위에 군림했고 소녀들은 그의 통치에 열광했다. 소녀들은.. 영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대가또한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영주는 노력했다. 중학시절 내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소녀들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아래.. 그 무서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점차 그들의 기호에 완벽히 부합하는 이성상으로 다듬어진 영주.. 그러니 누구라도 영주의 눈빛에 가슴이 설레지 않은 이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미림여중37회 졸업식에선 다시 없을 진풍경이 펼쳐졌으니.. 수십개의 현수막이 눈물을 흘렸고 꽃이란 꽃은 일찌감치 동이 나버려 웃돈을 줘도 살 수 없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수많은 후배들의 눈물과 숨막힐 듯한 꽃다발속에서 막을 내렸던 영주의 전성시대. 영주는 졸업식을 끝으로 그녀의 왕국에서 물러났고, 그렇게 영주는 미림여중의 전설이 되었다.
2. 새로운 왕국
이제 고등학생이 된 영주...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주는 또 여고에 배정을 받은 것이다. "고딩들한테도 먹히려나?" 거울 속 영주는 불과 몇 주전 중학교 시절의 모습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중학생때의 교복보다 한층 성숙함이 묻어나는 다갈색 교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영주는 거울속 자신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선화여고의 교문 앞. 영주는 역사적인 무언가를 바라보듯 멈칫 교정을 둘러보더니 교문안쪽으로 한걸음 발을 들여놓는다. 교문앞을 지키고 선 주임과 선도부원들의 시선이 일순 영주에게 꽃혀버린다. 하지만 영주는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지나치며 나른한 걸음을 계속한다. 영주의 걸음걸음에 맞추어 시간이 멈추는 듯, 그녀가 스치는 공기만큼은 현실 세계로 부터 분리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감성마저 끌어들이는 영주의 무게감 있는 아우라. 영주는 선도부원들만이 아닌 주변 선화여고생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따갑게 느끼며 고개를 아래로 꺽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건물 3층에서 유독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영주의 반은 2반이다. 1년간 영주가 몸담고 있어야 할 곳.. 영주는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저기서 영주를 흘긋 거리는 몇몇의 소녀들과 눈빛이 마주쳤다. 그녀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다가도 다시한번 영주 돌아보기를 반복중이다. 결국 고딩들에게도 먹히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영주왕국이 탄생할 것인가? "쿡!" 영주는 괜히 웃음이 난다. 영주의 웃음에 몇몇의 소녀들이 더 영주를 돌아본다. 영주는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얼마전에 샀던 소설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영주는 요즘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에 푹 빠져있다. "저기.." 순간 누군가 영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예?" 영주는 흠짓 놀라며 그 누군가를 돌아본다. 돌아보기를 반복하던 몇몇 소녀들의 시선도 집중되었다. 그곳엔 아담한 체구에 무척 착해뵈는 여자애가 영주에게 잠깐 나와보라는 손짓을 하고있다. 어리둥절한 영주는 일단 그 아이를 따라 교실문을 나선다. 여자애는 말도없이 앞장서 얼마를 걷더니 결국 인적 없는 작은 공터에서 멈춰선다. 영주도 걸음을 멈추었다. "희선언니가 불러달래서요." 그제서야 입을 연 여자애는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뜨고만다. "뭐지?" 영주는 아직도 어리둥절한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순간 낮은 발자국 소리가 공터를 고요히 울리기 시작하고.. 저기서 영주를 향해 다가오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의 앞에 멈춰선 그녀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매력적인, 굉장한 미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무말도 않은 채 영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만 짓고 있다. 영주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떨구어 버린다. "너.. 혹시.. 나 모르겠니?" 여학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영주는 고개를 들어 그 미녀를 찬찬히 살펴본다. 기대와 긴장감으로 뒤섞인 표정의 그녀. '그래! 어쩐지 낯이 익다했지..' 희선.. 민희선. 영주의 중학교 시절 미림여중 얼짱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희선이다. "희선.. 선배님?" 영주의 한 마디에 희선의 얼굴가득 웃음꽃이 피어난다. "아는구나.." 영주를 바라보던 희선의 얼굴이 곧 붉게 물들어버린다. "근데 무슨일로.." 영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희선에게 묻는다. "어.. 다른게 아니고.." 희선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눈빛에 다시 한번 발그레해진다. "그게.. 나랑 자매하자구." "자매요?" "어.. 모르니? 우리학교는 자매맺는 전통이 있거든. 나는 너랑 맺고 싶어서.. 미리 말해두는거야." "아.." 영주는 뜬금없는 요구에 어색한 미소만 머금고 있다. "알겠니?" 희선이 긍정의 답변을 요구한다. 하지만 영주는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특정인물과 이런식으로 얽매이는 것. 이것은 영주의 왕국에선 철저히 금기시 되는 일이다. "왜? 싫니?" 갑자기 희선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새어나온다. 영주는 깜짝 놀라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며 희선을 진정시킨다. 아무래도 보통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듯 싶다. "답해줘. 할건지 말건지.." 하지만 난감한 영주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어서!" 이제 거의 악에 가까운 희선의 목소리에선 살기마저 느껴진다. "아, 예..할게요. 그렇게 해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영주... 결국 천하의 영주가 엽기녀에게 두손을 들고 말았다.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희선은 쉬는시간에 2학년 5반으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직 희선을 찾아가지 않은 터다. 괜시리 머리 한 쪽이 욱씬욱씬 신경이 쓰인다. '그래.. 별 일이야 있겠어? 밥이나 먹자!' 하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금기사항을 깨버린 것이다. 뭔가 잘못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버렸다. '에잇! 첫날부터 이게 뭐람...' 숟가락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밥을 먹고 있는 영주.. "저.."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영주는 화들짝 뒤를 돌아본다. "저.. 희선언니가.." 아침에 찾아왔던 그 아이다. 안그래도 침울해있던 영주는 급기야 짜증이 솟구치고 만다. "뭐야! 또 뭔데!" 영주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선 떨리는 손가락으로 뒷문을 가리킨다. 거기서 희선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영주는 고개를 한번 떨구고는 천천히 일어나 희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희선은 자신의 앞에 우뚝 멈춰선 영주를 올려다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너.. 오늘 한번도 나 안찾아왔지?" "전.." "그래! 첨부터 모든 걸 기대할 순 없으니까.." 희선은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자.. 이거." 하며 영주에게 폰하나를 건낸다. "저.. 폰 있는데요?" "이건 내 전용폰이야! 내가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오라구! 화장실 갈때두.. 청소할때두.. 항상 소지하구 있으라구! 알겠지? 아! 그리구 마지막으로 오늘 방과후에 시간 비워 놓도록 해." 서둘러 자기 할 말만 마친 희선은 용건이 끝나다는 듯 팽그르르 돌아서더니 시녀하나를 끼고 횅하니 가버린다. "어라?" 희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간다. "쳇!" 팽팽하기만 하던 영주의 긴장이 일순 맥없이 풀려버린다. 느낄 수 있었다. 아닌척 하지만 떨리던 희선의 손.. 영주의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그녀의 초조한 표정.. 영주가 모를리 없다. 희선의 모습은 몇 년간 경험해왔던 수많은 여자애들과 조금도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희선이 건내준 폰을 한동안 바라보던 영주의 입가에 알수없는 회심의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사람 잘못봤어. 민희선!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5교시가 마쳤다. [드르르르르, 드를르르] 그리고 종이 치기가 무섭게 희선이 준 폰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폰주인이나 폰이나 똑같구만..." 영주는 한동안 촛점을 잃은 눈빛으로 폰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그 폰을 집어들고는 희선의 반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영주가 걷는동안에도 폰은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다. "작작좀 하시지!" 집착녀.. 자기감정을 속이지 못하는 여자.. 희선이라는 여자는 그런 여자다. 그러나 그런 여자일 수록 다루기는 더욱 쉬운 법! 영주는 희선의 반에 다다라 창문넘어로 교실을 들여다 본다. 희선이 보인다.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끝도 없이 눌러대고 있는 희선. 그러다 도저히 못참겠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앞문을 향해 걸어나온다. "엇!" 한순간 희선과 창밖의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푸른빛이 감도는 영주의 눈동자.. 희선의 걸음이 잠시 멈칫한다. 잔뜩 흐리던 희선의 얼굴은 순식간에 반짝반짝 개어버린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희선은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잰걸음으로 교실문을 나와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으로 따질기세를 취한다. "너! 왜 전화 안받어!" "왔잖아." 낮지만 결코 함부로 할 수 없을 목소리.. 영주는 목소리에서마저 푸른빛을 자아내고 있다. 딱딱한 검은색도, 가벼운 노란색도 아닌 깊고 부드러운 푸른 빛이 영주의 목소리를 감싸고 있다. "그래두.." 팽팽하던 희선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바람이 빠져버린다. "이건.. 필요없어. 폰두갠 너무 부담스럽단 말야.." 영주가 폰을 희선에게 건내준다. "그럼.. 연락은.." "앞으론 내 폰으로 전화해, 그럼 받을 테니까.. 니 폰 줘볼래? 희선은 폰을 건내려다 말고.. 깜짝 놀란 듯 "왜..왜?" 하고 묻는다. "내 번호 찍어주게.." "아..아냐.. 그냥 불러줘. 내가 찍을게." "010 342...." 희선이 가만가만 영주의 번호를 찍고 있다. 불과 한시간전과 판이하게 다른 희선의 모습. 그녀는 이미 영주에게 길들여져 버렸다. "어, 수업시작하겠다. 나 그만 가볼게." 영주는 아무말 없는 희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왔던 길을 돌아선다. 영주가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희선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유유히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영주의 뒷모습에 넋을 잃고 만다. 희선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폰을 바라본다. 희선의 폰에는 이미 영주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 부터 희선의 전화번호 목록에서 자리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번호..
희선이 영주를 처음 보았던 건 중학교 2학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보드라운 분홍빛 피부에 귀를 살짝덮은 갈색머리를 흩날리며 희선의 앞을 쓱 지나치던 아이.. 갈색머리아래 반쯤 가려져 있던 그 아이의 눈동자가 언뜻 희선을 바라봤었다. 빨려들듯한 그 푸른 눈동자.. 봄내음처럼 향긋하게 사라져가던 그 아이의 비누냄새도.. 잊을 수 없지.. 얼마 후 전교적으로 유명해져 버린 그 아이.. 언제나 촉촉히 젖은 듯, 슬픈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아이가.. 영주였다. 무엇이든 좋은 건 독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희선이었기에 영주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기다렸다. 누군가 영주를 소유하기 전에 독점할 수 있는 timing.. 멋진 것을 독점하려면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통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일어나서 도망치기전에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역시 안될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고개숙이지 않는 희선에게도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있었다. 영주의 눈빛만 봐도 이렇게 다리가 풀려버리는데 무슨 힘으로 그를 묶을 수 있겠는가. 그저 그가 바라봐주기만을.. 오직 자신만을 통치해주기를.. 그 통치에 열광할 수 있는 영광을 바라는 수 밖에.. 희선은 꿈을 꾸듯 영주의 번호를 바라본다. '이제.. 영주번호를 누를 수 있어..' 영주의 눈빛에 달구어진 희선의 붉은 볼이 좀처럼 식을 것 같지 않다.
모든 수업이 마치고.. 영주는 교문 앞에 서서 희선을 기다린다. 이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여고생들은 모두 한번쯤 영주를 흘끔거리며 지나간다. 달뜬 여고생들의 깨알같은 속삭임.. "어머.. 쟤 뭐야? 우리 학교 애야?" "일학년 인가봐! 저런 애가 우리학교라니.." "어머, 어머.. 웬일이야! 쟤, 내가 찍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비스듬히 교문 옆에 기대선 영주는 그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무심히 흘려버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진다. '내 밥..' 저 멀리서 희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희선은 먼 발치에서부터 영주를 발견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영주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얘들아, 먼저 갈래? 난 얘랑 할 말이 있어서.." 희선은 양 옆에 끼고 있던 시녀들에게 한껏 뽐내듯 작별인사를 하고는 영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별루.." 영주가 가볍게 고개를 들어 희선에게 답한다. 순간 영주의 갈색머리가 찰랑하며 빛이 났다. '영주가.. 영주가 오직 날 위해 여기 서 있다.’ 언제나 눈이 부신 아이.. 지배하고 싶지만.. 도저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반말.. 괜찮아?" 말이 없는 희선에게 영주가 가볍게 묻는다. "어..응 좋아.." 희선의 목소리에 가는 떨림이 느껴진다. 오전의 독기는 씼은 듯이 사라져 버린 목소리다. 그녀의 감정은 이미 영주에게 낱낱이 노출되어버렸다. "그럼.. 그냥 희선이라구 불러두 돼?" "응. 괜찮아.." "희선아." 영주가 희선의 이름을 부른다. 두근..! 희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져 버린다. 영주 Win! 상황은 이미 역전된 지 오래다. 영주는 슬쩍 희선을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땅만 쳐다보고 있는 청순한 희선의 모습.. 이쁘긴 정말 이쁘다. "참! 오늘 시간 비워 놓으라구했지!" 영주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희선에게 묻는다. "왜? 뭐 바쁜 일이라도.." 희선의 표정에 서운한 기운이 스친다. "오늘은 좀 그래.. 엄마도 좀 편찮으시고 해서.." "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희선의 목소리에 풀이 죽어버린다. 오늘.. 자랑하고 싶었다. 그 기집애한테 영주를 꼭 자랑하고 싶었는데..
어느덧 버스 정류장이다. "나, 여기서 버스 타.." 희선이 영주를 올려다 보며 말한다. "너두 버스타? 중학교 땐 매일 집에서 데리러 오더니.." 그런 걸 다 알고 있었다니.. 뜻밖의 관심에 감동받은 듯 희선의 표정이 밝아진다. "응, 두 코스면 집인걸 뭐.." 어느덧 버스한대가 정류장에 멈춰 선다. "이 버스 아니야?" 영주가 묻는다. "어.. 그래. 나 갈게. 낼 봐!" 희선이 후다닥 버스를 탔다. 창 밖으로 영주가 보인다. 영주는 희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영주의 푸른 눈동자.. 희선은 왠지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마음이 아려온다. [따라라라라라] 순간 희선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저, 김기산데요.. 아가씨 어디세요? "이제부터 오지 마요. 나 오늘부터 버스 타고 다닐 테니까." 희선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본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여전히 희선을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눈.. 영주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엄마! 사과!" 영주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집어 던지고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다. "왔나!" 아프다던 영주엄마가 쌩쌩하게 걸어나온다. "가쓰나, 앉아 있는 꼬라지 좀 봐라! 다리 몬 오무리나!" 경상도 아줌마의 거친 말투! 엄마는 사내 같은 영주가 늘 못마땅하다. "아.. 냅두라!" 영주도 엄마와의 대화에선 말투가 돌변한다. 영주는 냉장고로 향하더니, 터질듯하게 익은 사과하나를 꺼내 들곤 쇼파로 쓰러진다. "아~ 좋다!" 드디어 영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애써 연출할 필요도 없으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영주가 되는 시간이다. 영주는 더듬더듬 리모콘을 집어들어 TV를 켜고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와작 베어먹는다. “잘~한다! 고등학생이 됐으면 이제 공부 쫌 해야 되는 거 아이가?" 엄마가 슬슬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아.. 고만 좀 해라고!” “고만하긴 뭘 고만해! 딴 아들은 지금 공부한다고 난린데 니는 이게 뭐꼬!” 영주의 얼굴이 굳어버린다. “저봐라. 저봐라.. 꼬라지는 똑 머시마같이 해갖고! 내 니만 보면 미친다 미쳐!” “이씨~ 짜증나 죽겠네!” 영주는 벌떡 일어나 교복을 벗어 던지더니,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와버린다.
홍대 앞.. 희선은 약속장소에서 홀로 은경을 기다리고 있다. '정은경'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희선의 라이벌이었다. 희선과는 달리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까만 눈이 매력적인 그녀는 인도여자를 연상케하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이다. 은경과 희선은 어딜가나 붙어다녔지만 늘 서로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이 붙어다닐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통하는 것이 있었느니.. 그것은 남자보다도 여자가 좋다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은경이 전보다 더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높이 쳐들고 희선의 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이다?" 은경이 먼저 인사를 한다. "어.. 그래." "근데.. 니가 그렇게 자랑하던 애는 어딨니?" 은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짓꿎게 묻는다. "어.. 오늘 못 나왔어.. 일이 있어서.." "어머..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나? 얘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왔는 지 아니?" 은경의 옆에는 껄렁한 힙합매니아 한 명이 거만한 포즈로 자리를 잡고있다. 새하얀 두건에 야구모자를 뒤집어 쓴 합합매니아는 왼쪽눈을 머리카락으로 완벽히 가린채 오른쪽눈만으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다. 하지만 4명은 족히 들어갈 힙합바지는 엉덩이에 걸쳤는지 한없이 흘러내려와 답답하고 어지러운 느낌마저 감돈다. 영주.. 우리 영주만 있었다면.. 희선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 어디라도 들어가자!" 은경은 갑자기 힙합매니아의 팔짱을 끼더니 앞장 서 걷기 시작한다. 그들 뒤에 남겨진 희선은 참담한 기분으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른다. 나오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뿐이다. [따라랄라라] 순간 희선의 폰이 울려퍼진다. 이 번호는..처음으로 발신된 영주의 번호다. “여..보세요?” 희선은 목까지 차오르는 멍울을 삼키며 전화를 받는다. 곧 영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야?”
은경 힙합매니아.. 그리고 희선이 들른 곳은 한 호프집.. 은경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힙합매니아는 다리를 꼬고앉아 담배를 꼬나물더니 담배까지 피워댄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희선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자.. 뭐 좀 시키자.." 은경이 들뜬 목소리로 메뉴판을 집어든다. "일단 병맥하나씩 하구. 과일하나하자." "그래, 그래!" 희선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야, 너 갑자기 왜그래?" 은경은 급작스런 희선의 심경 변화가 당황스럽다는 듯, 희선의 이마에 열을 재는 시늉을 한다. "뭐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역시나 희선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영주야..." 한 순간, 호프집을 가득 매우는 향긋한 영주의 기운.. 희선 일당들의 눈 앞에 영주가 멋적게 섰다. 교복을 입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영주. 청바지에 흰색 티와 회색 점퍼를 입고 비니를 썼을 뿐인데 영주의 존재감은 호프집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영주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훤칠한 키에 매끈한 몸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아기같은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인 저 푸른 눈동자... ‘영주는 누가 뭐래도 지존이야.. 나의 영주..’ 눈물이 핑 도는 희선의 옆에 영주가 자리를 잡았다. 희선의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으로 멍멍해져 버렸다. 영주가 희선을 흘긋 보며 장난스레 싱긋 웃어 보인다. 희선도 수줍은 미소로 영주에게 답을 한다. "니가... 영주니?"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눈빛을 한 은경이 영주에게 묻는다. "아, 예.. 반갑습니다." 은경의 눈빛이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마냥 희번득거린다. 영주는 은경에게 인사를 하며 옆에 앉은 힙합매니아를 바라본다. 온갖 폼을 잡으며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힙합 매니아의 자세가 영주의 등장에 왠지 불편해 보인다. "너.. 혹시 나 몰라?" 한동안 매니아를 의식하던 영주가 매니아에게 묻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매니아에게 집중되었다. "모.. 모르겠는데? 왜 알아야 해?" 매니아는 당혹감을 감추듯 퉁명스레 답한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감출 수가 없는가 보다. 저 아이는 분명... 호연이다. 영주의 중학교 시절 언젠가 영주에게 편지를 건내고 도망가던 여린아이였다. 늘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홀로 다니던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영주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기로 한다. 드디어 맥주파티가 벌어졌다. 호연이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하지만 은경은 이제 호연이에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희선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영주에게 자꾸 술을 권한다. "아.. 저 술이 약해서.." "어헛! 선배가 주는데 마셔야지!" "저.. 그럼 한잔만.." "원샷! 무조건 원샷이닷!" 영주는 눈을 딱 감고 맥주 한 잔을 꿀떡꿀떡 들이킨다. 그 사이 은경은 재빨리 영주의 폰으로 자신의 폰에 전화를 건다. "야, 한잔은 너무 박하다. 한잔 더! 한잔 더!" 은경은 신이나서는 영주의 옆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곧 희선이 돌아왔다. "희선이 왔다." 영주는 헤죽 희선을 맞이한다. "어? 영주 술마셨어?" "어.. 한잔." 영주가 또 싱긋 웃으며 희선을 바라본다. 술이 약한 영주는 겨우 한잔에 두 볼이 빨개져서는 희선을 보고 자꾸자꾸 웃는다. 멋있는데다 귀엽기까지.. 희선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영주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아~ 아푸다." 그렇게 한동안 혼자서 생글거리던 영주는 희선의 어깨에 기대는가 싶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희선은 깜짝 놀라 자기의 어깨에 기대 잠든 영주를 바라본다. 아무리 아무리 봐도 사랑스러운 사람... 희선의 가슴이 어느 때 보다도 벅차오른다. "너, 앞으로 영주한테 술 마시라고 하기만 해!" 희선이 은경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은경은 쳇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희선은 다시 곤히 잠든 영주를 바라본다. '내가 지켜줄게. 영주야. 영원히..'
그날 밤.. 밤 늦게 귀가한 영주는 엄마의 호된 꾸지람을 견뎌내고 침대속으로 기어들었다. "아.. 피곤해.." 그렇게 영주의 무거워진 눈꺼풀이 스르르 감길 즈음.. [따라라라라] 영주의 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영주가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어머, 영주자니?" 희선이다. "응.." "미안해.. 그리구 오늘 고마웠어.. 와줘서.." "어.." "잘자. 영주야.." "어.." 영주는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힘겹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따라라라] 영주의 전화가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씨.." 잠자는 시간이 방해 받는 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영주이기에 짜증이 솟구치고만다. "또. 왜!" 영주가 전화를 받아든다. "영주니?" 하지만 이건.. 희선의 목소리가 아니다. "누구세요?" "어머.. 섭섭하다, 얘.. 나! 은경이." "아.." "벌써 자니?" "아.. 이제 잘려구요." "음.. 낼 잠깐 볼 수 있을까?" "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중요한 이야기라서.. 희선이에 대한.." 뭔가 꼬인다는 느낌.. 영주가 대답을 미룬다. "그럼 낼 보는 걸루 알고 있을게. 잘자라." 전화를 끊은 영주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7시, 홍대정문앞, Room 커피숍에서 보자~ 혼자와야 해!] 2교시 후 쉬는시간.. 은경의 문자에 영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저기.." 바로 그 때 성희가 영주를 조심스레 부른다. 뒷문에 붉은 볼을 하고서 영주를 바라보는 희선이 눈에 들어온다. 영주가 희선에게 다가간다. "왜?" "어.. 오늘 끝나고 뭐해?"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은경의 문자가 걸린다. "어.. 오늘은 진짜 집에 들어가봐야하는데.." 영주가 어물어물 말한다. "그..래? 왜?" 희선이 싸늘하게 묻는다. "말했잖아. 엄마 몸 안좋으시다구. 어젠 제대로 못챙겨줬으니깐.." 거짓말을 하자니, 영주는 볼이 괜히 화끈거리는 느낌이다. "알겠어. 할 수 없지 뭐.. 그럼 내일봐." 희선이 힘없이 돌아선다.
방과 후.. 영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한다. "어, 여기.." 커피숍을 터벅터벅 들어서자마자, 은경의 얼굴이 까무잡잡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예 안녕하세요?" 영주가 어색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한다. "앉어. 뭐 마실래?" 은경은 영주에게 메뉴판을 내민다. "저.. 코코아요." "큭 귀엽긴.." 은경은 혼자 큭큭거리며, 코코아 한잔과 카페라떼 한 잔을 주문한다. "저, 근데 무슨 일로.." 영주는 자신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는 은경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어.. 그래.." 은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영주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그게 말이야.. 희선이에 대한 이야긴데.." "네.." "희선이 조심하라구.." "네?" 은경은 갑자기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려준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영주에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조심하란말이야. 걔.. 무서운 애야." "그게 무슨.." "넌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봐왔었거든.."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코코아와 카페라떼가 나오고, 은경은 잠시 말을 멈춘다. 영주는 묵묵히 컵 가득 담긴 휘핑크림을 스푼으로 휘젓기 시작한다. "집착이 얼마나 심한지.. 옛날에 걔 인형 좀 만졌다고 절교한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더랬어." 은경은 그 순간이 생각난다는 듯 쿡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근데, 그건 장난이지 뭐.. 내가 정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 하나 말해줄까?" 영주는 푸른 눈동자로 은경을 응시한다. 영주의 눈빛에 은경은 잠시 멍하니 넋을 놓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있었어. 옛날에 걔가 정말 집착하던 애가 하나 있었다? 근데 어느 날 걔가 전학을 가게 된거야. 그걸 안 순간 그 집에 찾아가서 이사가면 죽어버릴거라면서 면도칼을 꺼낸거지... 그때 걔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셨는지.." "그래서요?' "근데.. 어쩔 수 있겠어? 걔는 치를 떨면서 떠났구. 희선인 그 날 정말로 손목을 그은거야." 영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다. "다행히 동맥을 비켜가서 살긴 했지만 말야. 몇번을 죽었을지 모르는애야. 걔가." 영주는 거의 절망스런 표정으로 은경을 바라본다. "그러니깐 조심하란 말야. 너한테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말야." 영주는 시선을 떨군다. "근데 좀 어렵겠더라.. 희선이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너무 깊게 빠져들었더라구.." 은경은 한 숨을 푹 쉬며 영주를 쳐다본다. "니가 우리 학교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영주는 조용히 코코아를 한모금 들이킨다. "혹시라도 희선이 때문에 힘든 거 있음 나한테 연락해. 언제라도 상담해 줄테니." 은경은 방긋 웃으며 한 손으로 영주의 볼을 살짝 감싼다. 하지만 영주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들 뿐이다. 그렇게 은경과 헤어진 영주는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다. 희선이란 애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날카로운 유릿조각으로 산산조각 나 버릴 아이다. 영주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어디서 오는거니?" 집 앞에 당도할 즈음, 어디선가 싸늘한 희선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주가 고개를 돌린다. 그 곳에.. 희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가 왜.." "집에 일찍 들어간다며." "어.." 영주의 등허리에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 갔다온거야?" "좀 일이 있었어." "은경이랑?" 영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희선을 바라본다. "다 봤어. 너네 둘이 커피숍에 앉아있는 거." "그게.." "은경이, 이 나쁜 기집애." 희선의 눈에 말도 못할 독기가 서려있다. 아니, 독기를 넘은 광기가.. 그리고 희선은 말문이 막힌 영주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알어.. 넌 잘못없다는거. 그 년이 문제지. 내꺼는 뭐든지 뺏어가는 년이거든!" 희선은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폰을 꺼내든다. "어.. 나 희선이.." 희선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은경과의 통화를 시작한다. "그래! 다 알어. 앞으로 또 이런 일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할지.. 니가 모를리는 없을테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선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오기 시작한다. "앞으로 우리 영주한테 한번만 더 연락해봐. 평생 후회하게 해 줄테니..그리구 말이야.. 오늘부로 우리 사이는 끝이야." 희선은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영주를 돌아본다. 영주는 얼어붙은 듯 꼼짝않고 서서 희선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다. 희선은 그런 영주에게 한걸음 두걸음 다가서더니 영주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안는다. "영주야.. 항상 내 옆에 있어줘. 난.. 너만 있으면 돼."
3. 추억과의 재회
[머해? 안졸려? 나 배고파..] 희선의 문자다. 희선은 도대체 수업을 듣기나 하는 건지. 하루에도 수십통의 문자를 날린다. [나두] 영주는 간결하게 한 마디를 보낸다. 역시 점점 희선을 상대하기가 버거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감정기복이 워낙 심한 희선인지라 함부로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업시간이 마쳤다. "저기.."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어.. 알겠어.." 영주가 익숙한 듯 일어선다. 입학 후 하루도 빠짐없이 영주의 등을 두드리는 성희.. 영주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재빨리 뒷걸음질치며 자리를 피하는 여린아이다. 역시나 뒷문에는 희선이 서 있다. "왜?" 영주가 느린걸음으로 희선앞에 선다. "이거.." 희선이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내민다. "뭐야?" "배고프다며.." 희선은 붉어진 얼굴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어.. 너두 배고프댔지.." "난 괜찮아.. 많이 먹어.. 그리구 내일 콘서트 안갈래? 나 티켓이 생겼는데.." "내일? 내일은.. 좀 그런데.." "왜?" 희선의 목소리톤이 한층 높아진다. "어.. 그날이야.." 영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희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럼 할 수 없지..머.." 희선은 재빨리 돌아서서 가버린다. 희선은 그런 종류의 말을 듣기 싫어한다. 영주에게도 그날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너두 먹어.." 영주는 초코바하나를 꺼내 멀찍이 서 있는 성희에게 건내준다. "괘..괜찮아.." "왜.. 먹어." 영주가 성희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당황한 성희의 얼굴이 붉어진다.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성희만 보면 영주는 안쓰런 마음이 앞선다. "고마워.." 성희가 작은 손을 내밀어 초코바를 받아든다. "너.. 귀찮지 않아?" 영주가 묻는다. "아.. 괜찮아." "거짓말.. 하루이틀도 아니구.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뭐냐?" 영주의 말에 성희의 코끝이 빨개진다. 곧이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성희는 조용히 엎드려 버린다. 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와! 같이 먹자 영주!" 짝궁 지윤이 과자봉지로 달려들어 과자봉투를 북 뜯어낸다. "좋겠다 영주 넌~ 먹을 게 떠나지를 않네!" 지윤이 과자를 와작와작 씹어대며 말한다. 선머슴처럼 괄괄한 성격의 지윤은 누구보다 편한 친구다. "많이 먹어라.." 영주는 한마디를 하고는 그냥 엎드려 버린다.
[딩동댕동] 수업시간이다. 성희는 아직 엎드려 있다. 영주의 마음이 편치않다. [너, 이제 성희한테 심부름좀 그만 시켜라.] 결국 영주가 희선에게 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희선에게선 답이 없다. 영주는 수업을 듣는다. 국사시간.. 이 시간엔 늘 졸음이 쏟아진다. [땡땡땡] 쉬는시간.. "졸려.." 영주는 쓰러지듯 책상으로 엎드려버린다. 헌데 '톡톡' 익숙한 손이 조심스레 영주의 등을 두드린다. "뭐야!" 영주가 짜증을 내며 돌아본다. 성희가 죄라도 지은 듯 한 폼으로 특유의 뒷걸음질을 친다. 그리고 뒷문에는 역시나 희선이 서 있다. 영주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희선에게 다가간다. "또 뭐! 내가 잘 때는 건드리지 말랬잖아!" 영주는 쌓여왔던 짜증이 폭발하듯 소리친다. "왜! 성희한테 또 심부름 시켜서 화나니?" "뭐?" "왜, 좀 시키면 어때? 성희가 나보다 좋니? 그렇게 안돼 보였어?" 희선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얘기하자." 영주가 희선을 진정시킨다. "뭔데! 지금 얘기해! 하라구!" 희선이 눈물을 글썽이며 악을 쓴다. "그만.. 미안. 그만해.. 나중에 연락할게." 영주가 희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진정시킨다. 영주의 손길에 잔뜩 곤두서 있던 희선의 가시가 누그러지고 만다. 무서우리만치 예민한 희선이. 그녀의 예리한 신경세포가 두렵다. 영주는 훌쩍이는 희선을 교실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반으로 들어선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영주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희선이 그 난리를 피우고 갔으니 당연하다. 머리가 아프다. 역시 희선은 버겁다. 영주는 터벅터벅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아이들은 애써 모른 척 영주의 시선을 피해주고 있다. 한데.. 유독 한 아이의 거침없는 시선이 느껴진다. 영주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란듯이 영주를 관망하고 있는 눈빛.. 영주가 그 시선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영주의 푸른눈빛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니, 오히려 영주를 조롱하고 있다. 그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눈빛에 결국 영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만다. '이규원' 알 수 없는 아이다. 창백한 피부에 화장이라도 한 듯 눈밑이 붉은아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와 늘씬한 몸매로 모두의 시선을 한껏 받으면서도 그 시선을 즐기지는 않는 소녀. 그녀의 냉소어린 눈빛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그녀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늘 주변의 다른 소녀들을 유치한 애들의 무리로 전락시켜버리곤 했다. 중학교 시절을 거쳐 고등학교로 진학한 지금 이 순간까지 이토록 영주를 철저히 무시하는 이가 있었더가? 어떤 말도.. 괴롭힘도 없었지만 영주는 규원의 그 눈빛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존심이 상해버린다. 싫다. 규원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싫다. 하지만 더욱 싫은 건.. 언제부터인가 그런 규원을 동경하게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이다.
방과 후.. 영주는 교문앞에서 희선을 기다리고 있다. 토라진 희선을 다독이기 위해선 함께 영화라도 한편 봐줘야 한다. 쏟아지는 여고생들.. 모두들 한번 쯤 영주를 흘긋거리며 지나간다. 영주는 이미 이 학교의 유명인사다. 저기서 희선이 걸어오고 있다. 상기된 표정.. 영주와의 데이트에 벌써부터 설레는 모양이다. "많이 기다렸니?" 희선이 밝은 목소리로 영주에게 묻는다. "아니.." "그 놈의 가가멜이 어찌나 종례를 오래하는지 말야.." 희선은 흥분한 목소리로 영주를 붙잡고 재잘재잘이다. 영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긴다. 희선은 영주팔에 팔짱을 끼고는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걸음을 걸었을까.. 순간 누군가 영주와 희선을 슥 지나친다. 영주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규원이다. 규원이 잠시 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규원의 눈과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짠한 느낌이 영주의 온몸을 진동한다. 언제부턴가 느낀 것이지만.. 규원의 눈빛은 결코 낯설지가 않다.
"으악!" 눈을 뜬 영주는 튕기듯 침대에서 뛰쳐나온다.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전 날 한참이나 잠을 못 이룬 채 뒤척인 까닭이다. "엄마! 왜 안깨웠는데!" "가쓰나.. 나도 인제 일났다!" 엎친데 덮친격.. 오늘따라 엄마도 늦잠이다. 영주는 간신히 세수만 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교복위에 걸친 점퍼가 박쥐날개처럼 펄럭인다. 늦으면 안된다. 오리걸음에 뜀뛰기 그리고 엎드려 뻗쳐.. 힘든 건 둘째치고 그거 완전 체면 구기는 일이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자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더! '쎄입!' 다행이다. 단 몇초를 남겨두고 영주는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머리는 뒤집어지고 점퍼는 어깨뒤로 넘어가 있는 꼴이라니.. 긴장이 풀린 영주는 힘빠진 다리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긴다. "야." 몇 걸음을 걸었을까. 누군가 뒤에서 영주를 부른다. 낯선 목소리.. 영주가 덤덤히 뒤를 돌아본다. '이규원'.. 특유의 여유로운 자태로 서 있는 규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규원은 그렇게 멈춰선 영주에게 한걸음 두걸음 다가오더니 영주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한다. "엉망이군.." 규원의 말투와 행동은 마치 엉망인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영주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규원의 행동에 당황하기도 하거니와 황송함마저 느껴지는 건 뭐람. "왜 안오나 했더니.. 오늘 늦었었구나?" 규원이 영주의 눈을 흘긋 바라보며 말한다. 영주를 기다렸다는 뜻일까.. 어쨌든 처음이다. 이렇게 또렷한 규원의 목소리를 듣는 건.. "칠칠치 못하긴.." 규원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뒤로 넘어간 영주의 점퍼를 가지런히 정렬해 벌어진 지퍼를 쭉 채워버린다. 이런 걸 데자부라고 하는 것일까.. 이 상황.. 영주에게 낯설지가 않다. 언젠가 분명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더랬다. 그게.. 언제였더라. "이제 사투리는 다 고쳤더라?" 순간 영주가 놀란 눈으로 규원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규원의 냉소어린 눈동자에도 감정이라는 것이 엿보였다. 낯익은 규원의 눈빛.. "너.. 나 알지.." 영주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규원은 흔들림 없이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다. "규원.. 이규원.." 드디어 기억을 막고 있던 코르크 마개가 뻥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왜 이제껏 몰랐던 걸까? 혹 그것은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던가? 영주는 기억의 골 저 편에 가려져 있던 어린시절의 추억 한토막을 떠올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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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부산에서 막 서울로 이사 온 영주는 참 작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놀던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영주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아이가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눈 밑이 붉었던 아이.. 영주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작은 심장이 발랑발랑 뛰었더랬다. 그래서 그 아이가 영주에게 처음 다가왔을때 어찌할 바를 몰라 푸른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당황해 마지 않았다. 그 아이는 영주의 사투리 한 마디 한 마디에 하하하 웃으며 영주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영주는 그 아이가 백마탄 왕자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주러 온 영주만의 왕자님이라고.. 둘은 단짝이 되었다. 매일 같이 그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것이 꿈만 같을 정도로 기뻤다. 매일 밤 그 아이를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잠이 들었고..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온 힘을 다해 골목을 달렸다. 그럴때면 그 아이는.. 잔뜩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는 영주를 세워두고 칠칠치 못하다며 지퍼를 채워주곤 했다. 영주는 그게 좋아서 매일같이 지퍼를 열고 그 아이를 향해 달렸다. 영주는 그 아이가 그렇게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이들이 그 아이를 놀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에워싸고 하는 소리는 남자같은 여자, 호모라는 것이었다. 그럴리가 없었다. 그 아이는 영주의 왕자님이었다. 여자일리가 없었다. 영주는 그 자리를 도망쳤다. 그 후.. 영주는 그 아이를 피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더 이상 그 아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외톨이가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다시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아이가 전학을 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영주는 달렸다. 가지말라며 소리치며 그 아이를 향해 마구 달렸다. 그 아이는 뒤를 돌아 영주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울며 그 아이를 붙잡았다. 미안하다고.. 제발 가지 말라고 붙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영주에게 칠칠치 못하다고 중얼거리며 조용히 지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돌아선 그 아이는 더 이상 영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
"이제야 알아본거니?" 규원이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기억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먼지쌓인 어린시절의 기억따위에 얽매여 있던 감정이건만.. 그 감정은 조금도 변형되지도 않은 채, 그 때의 그 느낌 그대로.. 이렇게 가슴을 뛰게하니 말이다.
수학시간.. 영주는 창가의 규원을 바라보고 있다. 햇살에 살짝 비친 규원의 모습.. 칠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펜을 들고 필기를 시작한다. 살짝 고개를 떨군 탓에 까만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역시 그녀의 분위기는 깊이가 다르다. 아름답다. 그 날 이후에도 영주와 규원이 사이의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거기까지였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행동하는 규원이.. 하지만 영주의 마음은 이미 송두리째 흔들려버렸다. 이렇게 멀찍이서 규원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쩌릿하게 아려온다. 시큰시큰 눈물이 날것도 같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 하나씩 뽑아~" 오늘은 새로이 자리배치를 하는 날이다. 방법은 제비뽑기.. 각자 자신이 뽑은 번호의 자리로 배치를 받는다. 쪽지를 뽑은 영주는 번호를 확인한다. "33번..."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의 자리는 어느 곳일까.. 영주의 관심은 온통 규원이 뽑은 자리번호에 쏠려버린다. "자, 내일부터는 각자 바뀐자리에 앉는거야!" 반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다. "야! 니가 33번이야?" 누군가 영주를 쿡 찌르며 묻는다. 새침떼기에다 공주병으로 알아주는 수연이다. "어.. 왜?" "응.. 낼 보자구~" 수연이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새로운 짝인가 보군.."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토해낸다.
다음날.. 영주는 교실로 들어서 새로 배정받은 33번 자리에 가방을 던져놓고 자리를 잡는다. 규원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규원의 자리는 어디일까.. 영주는 턱을 괴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이 푸르다. 가벼운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린다. 어린시절의 한 토막.. 이 맘때의 추억.. 영주는 눈을 감는다. '덜컥' 순간 의자를 빼는 소리와 함께 옆자리가 채워짐을 느낀다. 영주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안녕." 건조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된 음성.. 규원의 눈이 영주를 바라보고 있다. 영주는 너무 놀라 인삿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너.." 규원은 짧은 미소를 짓고는 곧 책상정리를 시작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쨌든 영주와 규원은 다시 한번 이렇게 재회하게 되었다.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꼭 그 시절.. 꼬마 영주의 설렘처럼.. "먹을래?"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뒤지던 규원이 영주에게 밀크캐러멜하나를 내민다. "고..마워." 영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때도 그랬었다. 규원은 매일같이 사탕이나 캐러멜같은 주전부리를 호주머니가득 넣어와서 영주에게 건내주곤 했었다. "어떻게.. 지냈어?" 한참을 망설이던 영주는 그 동안 규원에게 품어왔던 질문을 던진다. 규원은 캐러멜을 입에 쏙 집어넣고는 얼마간 우물거리다, "어.. 잘 지냈어." 하고 짧게 답한다. "그렇구나.." 영주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 많이 변했지?" 규원이 묻는다. "어.." "머리두 많이 길었구.." "어.." "맞아. 인정해. 못 알아볼 만두 해." 영주가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근데 그거 알어?" 규원이 영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뭐?" 영주는 바짝 긴장한다. "너두 만만치 않게 변했다는 거..." 하긴.. 영주의 외모에도 정말 괄목상대한 변화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시절 영주는 규원이보다 머리하나는 작았다. 부드러운 갈색머리는 어깨선을 넘었었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규원의 손을 꼭 잡으며 언제나 규원을 올려다 보았었다. 하지만 그 시절 푸른 눈동자만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저.." 누군가 영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영주가 돌아본다. 성희가 수줍은 얼굴로 서 있고 역시나 뒷문에서는 희선이가 서 있다. 영주는 습관처럼 일어나 희선에게 다가간다. "왜?" "어.. 오늘 수업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갈래?" "왜?" 무심히 물음을 반복하는 영주.. "이유가 꼭 필요한거니? 그래?" 결국 희선의 목소리가 고조되기 시작한다. 양미간이 찌푸려지고 하얀 이마에 핏대가 선다. "희선아." "뭐야. 넌 매일 이런식이야." 희선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여나온다. 끝이 없는 희선과의 실랑이.. 영주는 마냥 피하고 싶을 뿐이다. "영주야!" 순간 누군가 영주의 등을 툭 친다. 규원이다. 희선의 날카로운 눈이 경계하듯 규원을 쏘아본다. 하지만 규원은 희선의 시선따위 아랑곳 않은 채, "오늘 남아서 조별 숙제 하는 거 알지?" 이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유유히 희선을 스쳐 교실문을 나선다. "숙제.. 있었어?" 그제야 희선의 목소리가 한풀 꺾인다. "어.." "진작 말을 하지.." 희선은 힘겹게 분을 삭힌다. "알겠어. 할 수 없지.. 그리구 이거.." 희선이 무언가를 슥 내민다. "뭐야?" "반지.." "응?" "몰랐지? 오늘 우리 만난 지 100일 된거.." "아.." "그냥.. 기념으로 샀어." 희선이 쓸쓸히 돌아선다. 그런 희선의 뒷모습에 영주의 마음도 싸하게 아파온다. 희선은 진심으로 영주에게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은 희선을 거짓으로 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소독약이 따가울까봐 상처를 방치하면 곪고 곪아서 더 큰 상처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주는 선물을 들고 터벅터벅 자리로 돌아온다. 마음이 철근을 심은 듯 무겁다. "걔 갔어?" 어느 새 돌아온 규원이 옆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어.." "너, 뭐하는 거냐?" 규원의 말투에 차가운 기운이 서려있다. "응?" 영주는 당황한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영주의 눈동자는 어린시절의 여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쟤랑 뭐하는 거냐구." 영주는 말을 잃는다. "쟤는 너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넌 아니지?" "아니.. 난.." "그런데.. 왜 그러는건데? 왜 괜히 애꿎은 사람마음 설레게 만드는 거냐구." 영주는 시선을 떨구고 만다. "왜.. 나 어렸을 때, 그랬었잖아.. 너처럼.. 머리도 짧게 자르구.." "응.." 영주의 뺨이 붉어진다. "내가 왜 그랬었는지 아니?" "왜 그랬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용한 점쟁이가 그랬데..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남자처럼 키워야 죽지 않는다고.. 그래서 엄마가 죽자고 나를 남자처럼 키웠지." "그랬었구나.." "힘들었어.. 어린 나이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끔은 죽고 싶을만큼..." 영주는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의 눈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다. "그래서.. 중학교때부터 괜찮아진거야?" "응.. 그때서야 비로서 내 정체성을 발견한거지. 머리도 기르고.. 날 괴물보듯 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드디어 내 삶을 찾은 느낌.. 아니?" "그랬구나.."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너두 니 정체성을 찾으라구.. 계속 그러다.. 잘못하면 죽도록 힘들어질지도 모르니까." 영주는 규원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그런 감정.. 왠지 알 것 같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할 고민이었지만.. 영주도 그랬었다. 여느 여중, 여고생들처럼.. 소소한 수다를 알콩달콩 떨어보고도 싶었고.. 좋아하는 남자이야기에 설레는 마음을 서로 부채질하는 여우들의 무리속에 자연스레 끼어보고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은 결코 영주를 흡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영주에게 보이지 않는 담을 쌓아놓았고 영주는 늘 그 주위를 겉돌 수 밖에 없었다. 가끔.. 아니 늘.. 영주는 혼자였다. 수많은 여자애들이 영주의 주위를 에워쌌지만, 그것은 격리였다. 언제부턴가 영주는 자기안의 독방에 갇혀 버렸다. '나의 정체성..' 영주는 그렇게 멍하니 넋을 놓아버린다.
다음 쉬는시간.. [공터로 나와] 희선의 문자다. 영주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공터엔 희선이 팔짱을 끼고 독기어린 얼굴로 서 있다. 영주가 희선의 앞에 멈춰선다. "나, 아무래도 기분나뻐.." "희선아.." "나는 선물도 사고.. 계획도 다 세웠는데.." "미안해.." "말해봐! 넌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지? 신경도 안썼지? 응? 응?" 영주는 입을 다문다. "씨.. 짜증나. 너 뭐야.. 나 갖고 노니? 응? 말해! 말해!" 영주는 안타까운 눈으로 희선을 바라본다. "죽어버릴거야.. 나 죽어버릴거라구!" 희선은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희선아!" 영주는 희선의 어깨를 가만히 감싼다. "놔!" 희선은 영주를 뿌리치며 도망치듯 뛰어가버린다. 영주는 홀로 공터에 남겨졌다. 공허함과 쓸쓸함이 미친듯 밀려온다. 그리고 가슴으로 규원을 애타게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
교실로 돌아온 영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규원은 그런 영주를 흘긋 보더니 독서에 열중한다. "규원아.." 한동안 묵묵히 말이 없던 영주가 규원을 부른다. "어.." 규원이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니가.. 도와줄래?" 순간 규원의 눈이 영주를 쏘듯이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동자엔 어렴풋한 서러움이 깃들여 있는 것도 같다. "그래.." 마침내 규원이 답한다. 방과후, "나가자." 규원이 영주를 잡아끈다. "자, 팔짱껴." 건물을 나서던 규원이 영주에게 팔한짝을 쭉 내민다. "응?" "행동부터 바꿔야지. 이건 기본행동준칙이야." 영주가 어색하게 규원의 팔짱을 낀다. 여자애에게 팔짱이라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것이 어딜가나 눈에 띠는 두 인물이 의외의 만남을 가진것이다.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신경쓰지마. 사람들은 참 간사해서 어떤 변화든 금방 익숙해져 버리거든." 영주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규원이 영주가 낀 팔에 힘을 꼭 주며 말한다. "여자들의 소소한 장난에 한번 맛들이면 다시 빠져나가기 힘들걸?" 규원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교문에 당도한 지점..그 곳에서 희선이 보인다. 희선이 친구와 교문을 나서다 힐긋 이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영주의 몸이 잔뜩 긴장한다. 규원도 영주의 긴장감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희선을 주시한다. 헌데.. 신기하게도 희선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교문을 나서는 것 아닌가? 게다가 희선의 얼굴에서 수줍은 미소마저 느꼈던 건 영주만의 착각일까? "야." 규원이 속삭이듯 영주를 부른다. "어..어." 영주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걸음을 옮긴다. 영주의 팔을 감싼 규원의 체온이 새삼 느껴진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심장이 뛰는걸까? 영주는 왠지 모를 이 떨림을 훅하는 한숨과 함께 뱉어낸다. "오늘은 내가 기념으로다가 저녁쏜다." 규원이 웃으며 영주를 끌어당긴다. 영주는 어느새 희선을 까맣게 잊고 규원의 이끌림을 기분좋게 따른다. 규원과 함께 있으면 영주는 어쩐지 어릴 적 수줍은 소녀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규원은 그리 고급스럽진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사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하하하" 맛있는 저녁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여자친구와 이렇게 소소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언제였던가?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실한 모습으로 누군가와 함께 해 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레스토랑을 나온 규원은 영주에게 팔 한쪽을 내민다. 영주는 웃으며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규원의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긴다. "잠깐 너 앞으로 좀 걸어가봐!" 갑자기 규원이 영주를 앞으로 밀어낸다. "왜?" "글쎄." 영주는 좀 무안한 표정으로 희선을 앞질러 걷기 시작한다. "이것봐, 이것봐." 규원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도리도리흔들고 있다. "왜 그러냐?" "너 걸음걸이가 완전 남자야 남자! 터벅터벅 그게 뭐야. 나보고 배워라." 규원이 보란 듯 멋진 워킹을 선보인다. 완벽한 몸매가 연출하는 환상적 워킹.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규원이다. "이야! 너 장난아니다. 남자들이 뿅가겠는데?" "잔말말고 따라나 하셔!" 규원은 영주의 걸음걸이를 보며 이것저것 지적하기 시작한다. "허리 펴고. 고개좀 들어..다리 모으고. 11자로 걸어라니까." 영주는 규원의 충고에 따라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영주는 꽤 진지한 표정이다. 하지만 어색하게 엉덩이를 샐룩거리는 영주의 자태는 무언가 기괴한 느낌이다. "풋!" 영주를 바라보던 규원이 웃음을 터트린다. 영주가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이 배를 잡고 웃고 있다. "뭐야!" 무안함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영주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하하하.." 서늘한 바람이 영주의 갈색머리칼을 스친다. 규원의 옷깃을 스친다. 웃음소리가 스쳐지나간다. 가슴속이 시원하다. 뻥 뚫린 듯 개운하다.
4. 나의 데미안
그 날 이후 영주의 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갔다. 귀를 살짝 덮던 머리가 목을 덮고 어깨선에 닿을 무렵까지 영주의 옆엔 늘 규원이 있었다. "야, 오늘 쇼핑이나 하러갈까?" 영주가 규원을 꼬드긴다. "또? 저번주에 원피스 샀잖아." "예쁜거 봐뒀단 말이야." "못말리겠군.." 잘 다듬어진 눈썹, 붉은 립글로스를 탐스럽게 바른 입술..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 이 인물이 진정 영주란 말인가? 몇 달 전 사내같던 영주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진 듯 하다. 규원에게서 한달간 특훈을 거친 후 손짓과 말투 대화의 화제마저도 80%여성화 된 영주. 아직은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아 언뜻언뜻 사내의 기질이 엿보일 때도 있지만 예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참으로 괄목상대한 변화이다. 물론 영주의 변화는 몇몇 여학우들을 침울하게 만든 계기도 했지만 역시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영주의 눈빛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던 여자애들이었건만 어느새 영주에게 생리대를 빌리러 오거나 찜질방에 가자고 조르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변화가 영주는 행복하기만 하다. 여자애들의 세계에 입성한 느낌. 어딘가 소속되어 있다는 이 편안함. 영주는 여자의 세계에 무섭게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근데.. 나 궁금한게 있어." 영주가 은근한 말투로 규원에게 묻는다. "뭔데?" "우리 짝 바꿀때 말이야.." "어.." "너 사실 내 짝 아니었지?" 영주의 물음에 규원은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이다. "말해봐! 나 항상 그게 궁금했다구." "너 데미안 읽어봤어?" "데미안?" "읽어봐.. 답은 거기 있으니까." 규원은 가끔 이렇게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곤 한다. 이럴때면 왠지모를 거리감이 느껴지는 영주.. 아무리 친해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무언가 자신만의 비밀창고를 간직한 듯한 규원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섭섭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언젠가 어떤 생각에 깊고 깊게 빠져있는 규원의 눈빛을 본 적이 있다. 그 순간 영주는 왠지 모를 슬픔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규원의 그 생각을 공유하고 싶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무작정 규원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싶었다. 그 날 영주는 서점에 들러 데미안을 한 권 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렵고 복잡한 말들만 가득한 것 같았다. 마치 규원의 정신세계를 언뜻 엿보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자리를 바꾸어 결국 짝이 되는 대목만은 영주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함께 하고 싶은 의지.. 규원과 자신의 의지가 인력처럼 서로를 끌어 당겼던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크로머이야기에 영주는 잠시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주었던 데미안.. 크로머이야기에 무섭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희선이. 그 날 100일 사건 이후 희선은 단 한번도 영주를 찾지 않았던 것이다. 영주는 그것을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희선은 결코 그런 일 하나로 영주를 포기할 아이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영주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아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희선은 더 이상 영주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며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못 본 척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건 영주에게 있어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그건 누군가의 도움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누군가.. 영주의 데미안..
어느 새 겨울이 다가왔다. 오늘따라 쌀쌀한 공기가 교실을 휙휙 휘젓는다. 쉬는시간.. 졸음에 겨운 아이들은 목도리를 둘둘 감고, 카라를 목까지 여미고는 책상에 엎드리기 시작한다. 졸음 대장 영주도 예외없이 책상으로 고꾸라진다. "추워.." 영주가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옆자리의 규원도 책상으로 엎드린다. "춥다." 곧 그녀의 팔이 영주의 팔짱을 꼭 끼며 영주에게 바짝 붙는다. 영주의 팔 가득 규원의 온기가 느껴진다. 익숙한 그녀의 향기.. 샴푸냄새.. 그리고 그녀만의 온도에 영주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한다. 늘 영주의 곁에 있는 규원이지만 이 아이에겐 뭔가 묘한 느낌이 있다.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그녀의 분위기.. 말투.. 그리고 가끔씩 미치도록 슬퍼보이는 눈빛.. 영주는 때때로 규원에게 이런 설렘을 느낀다. '나의 데미안." 영주는 그녀를 데미안이라고 부른다. 규원에게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늘 영주의 마음속에 데미안으로 각인되어 있다. 규원에게 있어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영주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혼란을 주는 이 아이.. 영주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나 전화번호 바꿨어." "또?" 규원은 벌써 세번째 전화번호를 바꾸고 있다. 사실 규원은 굉장히 인기가 많다. 규원이 그런 쪽으로는 입밖에 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영주는 그런 사실도 까맣게 몰랐더랬다. 왜 이렇게 자주 전화번호를 바꾸는 지는 두번째 전화번호를 바꿀 무렵 알게 되었다. 그것도 다른 친구들의 말을 통해 듣게 되었다. 주변의 남학생들 중 규원을 사모하는 무리들이 만나자고, 좋아한다고 그렇게 문자와 전화를 쏟아붓는 모양이었다. 영주는 그것이 속상했다. 왜 그런말을 직접 듣지 못했는지. 영주와 규원의 사이에 무언가 벽이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나 친구 아니야?" 드디어 영주가 규원에게 섭섭한 마음을 비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규원이 뜬금 없다는 듯 묻는다. "넌 왜 그렇게 숨기는게 많은 거야?' "뭘 숨겼는데?" "보통 친구들은 안 그래. 남자문제가 있으면 서로 상의도 하고 그러지." "아.. 남자문제?" 규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며 "나 그런 거 없는데?" 하고 말한다. "다 들었어. 너 주변에 그렇게 남자가 많다면서." 영주의 섭섭한 마음이 한층 고조된다. "어. 남자는 많아. 그런데 남자문제는 없다고.." "폰 번호를 바꿀 정도면서.." "귀찮으니까 그렇지. 받기 싫은데 자꾸 보내니까 귀찮아서 바꾼건데 뭐." 규원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설명한다. "그래도 섭섭해. 그런 말이라도 좀 해 주면 안되는거니?" "훗!" 순간 규원이 웃는다. "뭐야! 지금 이게 웃겨?" 영주가 속이 상해서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진다. "너.. 지금 진짜 기집애같은거 알어?" 규원의 말에 영주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절대로 이런 영주가 아니었다. 사소한 것을 이런식으로 따지고 드는 행위는 지금껏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냐?" 영주는 고개를 홱 돌리며 황급히 교실을 나선다. 혼란스럽다.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규원에게 집착하고 있는 걸까? 지금껏 늘 집착의 대상이 되어왔던 영주다. 헌데 지금 이렇게 역전되어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집착이란..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인 듯 하다. 저 밑바닥까지 참담해지는 느낌. 방과 후, 영주는 규원에게 인사도 않고 교실을 빠져나간다. 규원이 얄밉다.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장난스레 넘겨버리는 그 아이의 태도가 무척이나 화가난다. "야." 순간 부드러운 손이 영주의 어깨를 감싼다. 고개를 돌리자 규원이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거 놔." 영주는 다시 정면을 향하며 차갑게 말한다. "못놔." 영주를 감싼 규원의 팔에 더욱 힘이 가해진다. "놔라구." 영주가 팔을 비튼다. "미안해." 규원이 영주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조용히 잦아드는 규원의 목소리는 영주의 잔뜩 상한 감정을 마비시킬 만큼 아득하고 진실하게 들려온다. 영주는 다시 규원을 바라본다. "그냥.. 니가 신경 쓸게 아니라서 말 안한건데.. 니가 속상했다면.. 이제 다 말할게." "다 말해." 영주가 코맹맹이 소리로 쐐기를 박듯 말한다. "그래 이제 내 전화랑 문자 니가 다 받어." 규원이 웃으며 자신의 폰을 영주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뭐야! 지금 매니저로 부리겠다는 거야?" "하하하." 영주의 말에 규원이 웃는다. 영주도 규원을 따라 웃는다. 어느새 답답하던 감정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버렸다. 역시 규원을 미워하는 건 무리인 듯 하다.
오늘도 늘 그렇듯, 영주는 규원의 팔짱을 끼고 교문을 나서는 중이다. "야 사투리 좀 써봐." 뜬금없이 규원이 영주에게 떼를 쓰듯 말한다. "뭔 사투리!" "너 어렸을 때 잘 썼잖아." 규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말한다. "참나, 그게 언젯 적 이야긴데." 영주는 코웃음을 친다. "그 때 너 진짜 귀여웠는데." "정말?" "장난아니었지." "맞나. 진짜가!" 규원의 말에 영주가 은근슬쩍 사투리를 섞는다. "아! 너 방금 사투리로 말한거지!" "맞다! 지금도 귀엽나?" "야, 고만해라. 이제 징그럽다 야!" 규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강력하게 저지한다. "머라하노 이제부터 사투리만 쓸끼다. 두고봐라." 영주가 질 수 없다는 듯 반기를 든다. "하하하." 규원은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영주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다. "규원아." 그 순간 어떤 굵은 목소리가 규원을 부른다. 그 목소리에 영주와 규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20미터쯤 뒤에 한 남자애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 남자는 규원이 돌아서자 재빠르게 규원의 옆으로 달려와 봉투하나를 내민다. "뭐야?" "읽어봐." 영주가 그 남자를 찬찬히 살펴본다. 훤칠한 키에 약간 마른 몸매. 그리고 구리빛 피부에 건강해 보이는 표정을 한 것이 무척 매력적으로 보인다. "뭔데." "어.. 그냥.. 적어본건데." 남자가 안어울리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규원은 봉투를 받아든다. "아 그리구 이것두."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내민다. "뭐야." 규원이 감정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어.. 선물." "이건 됐구. 이건 읽어볼게. 잘가라." 규원은 봉투하나만 받아들고 미련없이 돌아서 걷는다. 영주가 흘끔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여전히 싱글거리고 서 있다. 봉투를 받아 준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누구니?" 영주가 조용히 묻는다. "아.. 등굣길에 몇번 말을 걸더니 또 찾아오고 이러네?" "잘 생겼던데.." 영주의 중얼거림에 규원이 놀란 듯 영주를 쳐다본다. "그래?" "저 정도면 잘생긴 거 아냐?" 영주가 되묻는다. "글쎄.." 규원이 말끝을 흐린다. 왠지 기분이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다. "야.. 편지 좀 보자!" 영주가 더 호들갑을 떤다. "뭘 봐. 버릴건데." "버릴 걸 왜 받냐?" 영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묻는다. "안 받으면 끝까지 따라와서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 규원은 날카롭게 받아치며 편지를 찢어버린다. "야.. 너 왜그래.." 영주가 놀란 듯 조심스레 묻는다. "아냐.. 놀러가자." 규원은 정면을 보며 걸음을 빨리한다. 얼굴이 좀 붉어진 건가? 영주는 규원의 눈치를 살피며 규원의 팔을 꼭 붙든다. 근데 이건 무슨 기분일까? 남자에게 매몰찬 규원의 모습이 왜 이렇게도 안심이 되는걸까? 영주는 묘한 승리감을 느끼며 규원의 빠른걸음을 열심히 따르기 시작한다.
5. 비극
"야, 100원씩 내놔봐라." 영주반의 대표 깜찍이 보경이 모금함을 들고 교실을 한창 순회중이다. "뭐야, 벌써 100일 된거야? 아직 안깨졌나보네?" "무슨 소리야! 우린 결혼할 거라구!" "역시 깜찍한 애들은 남자도 잘사귀는군.." 영주는 약간 부러움이 섞인 말투로 중얼거린다. "부러워?" 규원이 그런 영주를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 묻는다. "부럽지! 난 아직 남자랑 손도 못잡아봤는데." 규원은 말없이 책을 꺼내든다. "야. 너는?" 영주가 궁금하다는 듯 규원에게 묻는다. "뭐가." "넌 남자 사겨봤어?" "어." 규원이 덤덤하게 대답한다. "진짜루?" 영주가 깜짝 놀란듯 묻는다. "어 한번." "언제? 어땠어?" "중학교때 잠깐. 그냥 그랬어." 규원의 대답은 서운할 정도로 간략간략 단답형이다. "참.. 넌 아는 남자 많지." 영주의 서운한 말투에 규원이 영주를 바라본다. "치.. 나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은 없냐?" 영주가 칭얼거리듯 말하더니 부끄럽다는 듯 엎드려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규원은 다시 독서를 시작한다. 늘 어느 순간 자기안에 빠져들고 마는 규원.. 가끔은 그런 규원의 속이 참으로 궁금하다.
다음 날. "소개팅 해 볼래?" 규원에 영주에게 가볍게 묻는다. 두근! 아직 남자를 만나본 적 없는 영주는 심장이 콩닥대기 시작한다. "에이~ 너 어제 내말이 신경쓰여서 그러는거야?" 영주가 흥분을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묻는다. "할거냐, 말거냐?" 규원이 다시한번 묻는다. 괜히 튕기다가는 기회가 날아가 버릴것만 같다. "어떤..앤데?" 결국 영주는 들뜬 목소리로 질문을 한다. "어.. 그냥 아는 애. 해 볼래?" "어.. 모르겠어.." 하지만 영주의 표정은 이미 흥분으로 휩싸여버렸다. 그런 영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규원은 영주의 폰에 번호하나를 찍어둔다. "이재원이라구.. 내가 아는 애 친군데.. 꽤 괜찮아. 연락하라고 할테니까 알아서 만나라." 영주는 빨개진 두 볼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여보인다. 남자라..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새로 산 빨간색 니트와 브라운 컬러의 스커트에 감색 부츠를 신고는, 밤색 목도리를 두르고 몸에 피트되는 까만 코트를 걸쳐본다. "어때 괜찮아?" 영주는 규원이 앞에서 패션쇼를 펼쳐보인다. "어.. 잘 어울리네.." 영주는 왠지 침울해보이는 규원의 눈빛에도 아랑곳않고 이것저것 다른 아이템을 끝없이 펼쳐보이는 중이다. 재원이라는 아이에게 내일 저녁에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남자의 연락이라니.. 영주는 벌써부터 콩닥되는 심장과 함께 잔뜩 흥분되어 있다. "그래.. 이걸 입고 가겠어!" 영주는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쁘다.. 그나저나 옛날 한영주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규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듯한 조용한 말투로 영주에게 말한다. "아.. 나 너무 떨리는 거 있지!" "어쨌든 잘 되길 빌게."
다음날, 약속시간을 앞두고 영주는 규원과 네일손질을 받고 있다. 핑크빛으로 장식된 영주의 손톱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곧 약속시간.. 영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으악! 늦겠다. 빨리 뛰어가야겠어." "뭐야? 아직 30분이나 남았잖아." 규원이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래두.. 처음 만나는데 늦으면 기분나빠하지 않을까?" "바보." "뭐라구?" "무조건 10분 늦게가." 규원이 단호하게 말한다. "10분?"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남자는 항상 조바심나게 만들어야 하는거야. 뭘 그렇게 미리 서두르고 그래?" "그런건가?" 영주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오늘의 소개팅 장소는 분위기 있는 커피숍이다. 영주는 규원의 조언대로 정확시 10분 늦게 도착했다. 두근두근.. 영주의 심장은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뛰고 있다. "여기.." 누군가 손을 흔든다. 한 눈에 들어오는 미소년.. 꽃미남이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어울릴 얼굴이다. 빛나는 피부에 부드러운 머릿결.. 선해보이는 눈매.. 영주가 꿈꿔오던 바로 그 이상형이 아닌가! 영주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안녕?" 미소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첫인사를 건낸다. "어.. 안녕." 영주도 인사에 답을 한다. 목소리떨림을 자동제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규원이 한테 얘기 들었어. 둘이 둘도 없는 친구라며?" "어..응." 규원은 어쩜 이런 사람도 다 알고 있을까? 이 순간 규원의 친구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너.. 눈이 참 예쁘구나." 미소년이 영주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하..하하.. 고마워." 영주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고 웃는다. 그렇게 시간은 어떻게 지나간 것인지 모를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재원이는 영주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재밌었어. 다음에 또 보자." 재원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영주에게 말한다. "어.. 응." 영주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그 날 밤 영주는 재원이의 생각에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규원아!" 영주는 교실문을 들어서자 마자 규원을 꼭 붙든다. "어.. 왜?" 규원이 무심히 답한다 "야! 나 어제 소개팅 했잖아!" 영주는 규원의 반응에 실망스럽다는 듯 툴툴거린다. "어.. 어땠어?" 규원의 물음에 영주의 표정은 금새 화색이 돈다. "고마워 규원아.." 영주는 규원을 꼭 껴안는다. "괜찮았나 보네?" "딱 내 이상형!" "그래? 잘해봐라.." "고마워.. 넌 어쩜 그런 애도 다 아니? 신기하다 야." 하지만 규원은 왠지모를 어색한 미소만 지어보인다.
"이상해.." 얼마 후 영주가 울상인 표정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왜?" "재원이 한테 연락이 안와..분명 또 보자고 그랬는데.." "오겠지.." "헤어진 이후 한번도 안왔어." 영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그래?" "아깐 자존심도 접고 내가 문자도 넣었는데 답도 없구.." "올거야.. 바쁜가보다.." "그런걸까?" "당연하지." 규원이 영주를 안심시킨다. "하긴.. 걔가 내 눈보고 예쁘다 그랬는데.흐흐." "그랬어?" "응!" 영주가 아이처럼 웃는다. "그래. 일단 기다려봐." "알았어." 영주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먼저 문자넣고 그런짓 하지마." "왜?" "내가 그랬지! 남자는 항상 조바심나게 만들어야 한다구. 절대 니 맘을 보여주지 말란 말야." 영주는 기대와 조바심이 범벅된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은 간만에 따스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규원아! 이것봐!" 얼마 후 영주가 부산스레 규원을 부른다. "뭐?" "니 말이 맞았어. 선생님한테 잠시 폰을 뺏꼈었다나봐.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구 그러더라.히히.." "거봐 내가 뭐랬어." 규원이 미소를 지어보인다. "내일 또 보재.. 내일은 또 뭘 입지?" 영주는 재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터질듯한 환호를 지른다.
산뜻한 하늘빛 코트를 입은 영주는 눈처럼 흰 벙어리 장갑을 끼고 룰루랄라 약속장소로 향하는 중이다. 오늘은 영화을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남자와 함께 보는 영화가 될 것이다.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극장 앞..영주는 약속장소에 10분이나 일찍 오고 말았다. '이런.. 여자가 이렇게 일찍 오면 안되는데..' 영주는 희선의 조언을 떠올리며 재원이가 올 때까지 잠시 몸을 숨기기로 결심한다. 나중에 재원이가 오면 그제서야 도착했다는 듯 연기를 펼칠 작정이다. '호..호..' 날씨가 꽤 쌀쌀하다. 하지만 영주는 설레는 가슴때문인지 추위도 잊은 채 재원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저기서 재원이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 멋지다. 영주의 온 몸이 뿌듯함으로 가득차는 느낌이다. 영주는 도착한 재원이의 뒷통수를 보며 시간을 재기 시작한다. 딱 5분만 있다 나타날 작정이다. 그런데 재원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영주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분명하렷다. '뭐라고 대답하지?' 영주는 가벼운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어..규원아. 나.." 어라? 규원이라니..영주는 귀를 기울인다. "어.. 아직 안왔어." 영주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뭐야.. 나 언제까지 만나야 하냐구. 재미도 없는데.." 영주의 눈빛이 촛점을 잃고 만다. "소개팅하면 이 영화 같이 봐주기로 해놓구 치사하게 이런게 어딨냐? 이 영화는 꼭 너랑 보고 싶었는데.."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됐어. 더 이상은 안돼! 그래도 내가 너니까 이 정도 한거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뭐? 으이구, 내가 졌다 그래. 참으로 대단한 우정이셔!" 영주는 그대로 돌아서 버린다.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를 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가 싶더니 또 금새 뒤죽박죽 엉켜버린다.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 사악한 장난질을.. '규원이가.. 어떻게 규원이가 나에게..' 영주는 떨리는 손으로 규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규원." "어.. 영주야. 데이트는 잘 하고 있어?" 파렴치하고 가식적인 물음이다. 나쁜년.. 영주의 감정이 성난 폭풍처럼 고개를 쳐든다. "지금 어디니? 나 좀 볼래?"
어둑한 골목에서 영주와 규원이 만났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내가 그렇게 우스워?" "니가 원했잖아." 규원의 눈빛도 번득인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그래서 사람을 매수해?" "니가 상처받을까봐.." "그딴 변명하지마! 나쁜년.. 너같은 걸 친구라고 붙어다닌 내가 등신이지! 내 뒤에서 둘이 얼마나 웃었겠어 그래!" 영주는 규원의 말을 자르며 꽥 소리를 질렀다. 그 날 밤 영주는 규원의 사악한 장난만큼 진저리나는 증오의 말들을 한 없이 퍼부어 주었다.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더 이상은 규원의 얼굴도.. 목소리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그 날 이후.. 영주는 규원과는 단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규원은 그런 영주의 방어벽 넘어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어린 시절 철저히 외면당하던 그 때의 규원이처럼.. 규원은 한없는 외로움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쓸쓸함을 홀로 삭혔다. 영주는 그런 규원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규원을 받아들이기엔 영주의 자존심이라는 상처가 너무나도 아프고 쓰라렸다.
12월.. 선화여고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많은 남학생들이 여고의 문을 마음껏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전교생들은 아침부터 손님들을 맞을 준비에 한창 분주하다. 몇 주간 준비했던 전시물들과 갖은 기량들을 뽐내기 위해 하나같이 꽃단장중이다. "축제가 시작되었구나." 영주가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그나저나 넌 규원이랑 끝까지 말안해?" 지윤이 답답한 표정으로 묻는다. "걔 이야긴 꺼내지 말랬지?" 영주가 싸늘히 대답한다.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사이라니까!" 지윤이 입을 삐쭉 내밀다가 차가운 영주의 시선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 짧게 쳐버린 컷트머리.. 사내같은 말투.. 영주는 다시 예전의 영주로 완벽히 돌아간 모습이다. "야.. 무대로 집합! 댄스배틀 시작됐다!" 축제는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드디어 선화여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댄스배틀타임이 되었다. 각 고등학교의 내놓라는 대표주자들만이 도전한다는 댄스배틀은 각 학교의 자존심이 걸린 축제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자,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댄스배틀타임이 돌아왔습니다!" 선화여고의 명물인 회장언니의 개회사와 함께 댄스배틀이 시작되었다. 과연 댄스의 신이라고 불리는 대표주자들은 엄청난 기량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남성 5인조의 현란한 B-boy들, 가창력까지 갖춘 혼성 3인조 그룹.. 감탄사와 함성이 한시도 떠날 줄을 모를 지경이다. 영주도 자리를 잡고 앉아 열심히 댄스배틀을 관람중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멀찍이 홀로 앉은 규원의 모습이 영주의 눈에 들어왔다. 영주는 애써 규원을 외면하며 댄스에 집중한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선화여고의 댄스팀이 등장했다. 여성 4인조 그룹.. 현란한 브리트니의 노래가 터져나오고 이 여성4인조의 춤사위가 시작된다. 헌데.. 갑자기 관중의 함성이 급격히 사그라들고 만다. 곳곳에서 키드키득 비웃는 소리만이 터져나올 뿐이다. 연습은 한건지.. 몸치들의 향연인지.. 선화여고생들은 민망한 얼굴을 둘 곳이 없어 난감할 따름이다. 브리트니의 overprotected만이 쩌렁쩌렁 울릴 뿐 어느 누구하나 이 음악에 자연스레 몸을 싣는 무희가 없다. 급기야 선화여고생들의 항의로 음악이 꺼지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켠다. "아.. 선화여고 명물들이 어디로 다 숨어버린거죠? 자, 우리 선화여고의 진정한 열정을 보여 주실 분! 지금 빨리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선화여고생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적합한 인물을 발굴해내기에 혈안이 되기 시작한다. "이규원! 이규원!" 갑자기 어떤 남학생이 이규원을 목청껏 외치고 있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된다. "선화여고의 이규원 춤을 보고 싶습니다! 엄청납니다!" 관중들은 잠시 술렁이는가 싶더니, "이규원! 이규원!" 을 합창하기 시작한다. 영주는 의외의 상황에 눈이 동그래져 규원이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규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그 자태, 그 표정 그대로 동요하지도 않는다. 다른 규원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지만 어느 순간 모두의 이목은 규원에게 집중되어버린다. 순간 규원이 고개를 돌려 영주의 눈을 응시한다. 영주는 흠짓 규원의 시선을 피하고 만다. 그리고 영주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규원은 이미 천천히 무대를 오르고 있었다. "자! 이규원씨? 우리 선화여고의 진정한 열정을 보여줍시다!" 관중들은 무서울 정도로 숨을 죽이고.. 어둠속에서 조명이 켜졌다. 곧 폭풍같은 음악이 울려퍼지는가 싶더니 규원의 몸이 그 폭풍속에 몸을 맡긴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 갸냘픈 몸에서 결코 구현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태풍처럼 터져나오는 몸의 음성.. 보는 것만으로 오감이 쓰라리듯 진동하는 느낌.. 미칠듯이 섹시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어떤 남성댄서들 보다도 강렬한.. 그녀는 오선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선율하나하나를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남학생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유연한 허리와 냉소어린 눈빛.. 남학생 뿐 아닌 모든 관중들은 함성을 지를 기력조차 잃은 채 그녀의 춤사위에 완전히 넋을 잃어버린다. 영주조차도 할 말을 잃은 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규원의 낯선 모습에 완벽히 매료되어버렸다. 그리고 노래의 클라이막스.. 마지막 남은 혼을 불사르는 듯 무한대의 춤사위를 펼쳐보이던 규원의 눈이 어딘가 온전히 고정되어버린다. 규원의 눈은.. 영주에게 집중되어있다.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영주를 흘끔거릴 정도로 규원은 마치 영주만을 위해 춤을 추 듯 마지막 열정을 그렇게 노래에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영주는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하니 규원을 바라보다 음악이 끝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규원은 곧 무대를 나서고.. 그제서야 관람객들은 최면에서 풀린 듯 미친 듯 함성과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규원. 이규원!" 관중의 반 이상이 기립을 하고 이규원을 외친다. 하지만 규원은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규원아.." 영주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규원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둠이 깔린 운동장.. 저 멀리서 그림자처럼 규원의 실루엣이 보인다. "규원아!" 영주가 규원을 부른다. 규원이 뒤를 돌아본 것같다. 영주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규원을 향해 달린다. 그녀의 눈빛과 몸짓은 영주에 대한 진심을 슬프도록 절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진심이 절절히 영주의 가슴에 전달 된 느낌이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후회와 미안한 감정이 영주의 가슴속에서 터져나올듯 휘몰아쳤다. 빨리 규원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다 나의 잘못이라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아지경 속에서 달리던 영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규원의 실루엣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영주를 기다리지 않았다. 영주의 단추를 채워주지도 않았고 따스한 눈빛도 보내주지 않은 채 싸늘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게 규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규원은 그 후로 다시는..학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규원에 대한 사람들의 추측과 소문들... 중학교때부터 무용을 전공했다. 거의 국가대표급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무용에서 손을 땠다.. 규원에 관한 소문만이 그렇게 무성했을 뿐, 그 이후 규원을 본 사람은 없었다. 선화여고의 전설... 규원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영주는 과거의 파란만장했던 추억을 그렇게 더듬으며 설명하기 힘든 아련한 감정에 빠져들고 만다. "영주야, 너 갑자기 왜 그래?" 남자친구는 영주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며 씰룩씰룩 푸념을 한다. "아니야! 갑자기 나도 모르게 옛날생각이 나서.." 영주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남자친구를 톡톡 어르기 시작한다. "뭐야.. 남자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영주는 눈동자를 굴리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뭐야? 너 죽는다!" 남자친구는 영주의 머리에 꿀밤을 놓는다. "아얏! 농담이야!" 영주가 큭큭거리며 웃는다. "에잇! 이리와~ 다른남자 생각은 못하게 만들어 주겠어!" 남자친구는 영주의 얼굴을 감싸며 키스를 하려는 시늉을 한다. "야, 왜이래! 사람들 봐!" 영주는 빨개진 얼굴로 남자친구를 밀어낸다.
길 저편, 영주커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여자가 서 있다. 한 순간 시간을 확인한 여자는 화들짝 놀란 듯 또각또각 가던 길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까페.. "미안!" 까페의 문이 벌컥 열리며 아까 그 여자가 뛰어들어온다. 까만 미니스커트에 쇼트한 블루자켓을 걸친..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 바로 민희선이다. "니가 늘 그렇지 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희선을 바라보는 규원.. "그런데, 우리 자기야 표정이 왜 이렇게 안좋아? 무슨 일 있었니?" "어.." "뭐야! 뭔데!" "우연히 보고 말았어.. 영주.." 희선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진다. "어머, 너두 봤냐? 나 방금 봤잖아. 뭐니? 걔.. 길거리에서 애정행각 장난 아니더라?" 규원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다. 희선은 그제야 규원의 굳은 표정을 깨달았는지, "설마.. 나보다 걔가 더 좋았던 건 아니지? 응? 응?" 하며 규원의 대답을 재촉한다. 규원은 머그컵을 들어 따끈한 핫쵸코를 한모금 마신다. "왜.. 그 때 공터에서.. 니가 영주만 놔 주면 죽도록 사랑해준다구 했잖아! 그 때 너한테 반해버리긴 했지만, 큭.." 규원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머그컵을 내려놓는다. "근데 난 아직 그게 맘에 걸려! 아무래도 넌 영주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희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더니, 곧 사랑이 가득담긴 눈빛으로 턱을 괴고는 규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넌, 어쩜 이렇게 잘생겼니? 큭!" 누가봐도 여자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외모의 규원.. 규원은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본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저 많은 사람들 중 어딘가 영주도 있을 것이다..
<규원이 이야기>
나는.. 내가 싫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를 증오했다. 나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어린시절.. 엄마가 사주는 수십벌의 치마를 칼로 찢어발겼다. 엄마도 나를 포기했고.. 나는 홀로 남자로 자랐다. 그리고.. 나는 한 꼬마를 사랑했다. 꿈같은 나의 첫사랑... 늘 말이 없던 그 꼬마를 위해 내가 가장 처음 준비한 것은 딸기 캐러멜이었다. 내가 캐러멜을 내밀자 얼굴이 새빨개진 꼬마는, '아이다.' 라며 작은 손을 내저었다. '아이다? 아니다면 아니다지 아이다가 뭐냐? 하하하...' 특유의 사투리와 귀여운 억양으로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들었던 그 꼬마... 꼬마는 캐러멜로 불룩해진 볼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꼬마의 푸른 눈동자.. 나를 올려다보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언제나 내 가슴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곤 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 꼬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꼬마도 결국 나를 떠났다. 내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 나를 버렸다. 꼬마의 푸른 눈동자가 싸늘히 나를 피할 때마다 나는 꺼질듯한 상실감에 몸을 떨었따. 어린시절의 사랑이 우습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 아픔이 죽음까지 갈거라고 생각할 만큼 괴로웠다. 죽도록 원망했지만 절대로 미워할 수 없었던 나의 첫사랑..
중학생이 되던 해, 나는 무용의 길에 입문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했던 무용실.. 그것만으로도 난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함께 뛰어다닐 수 있는 그 순간을 나는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두번째 사랑을 만났다. 새하얀 피부에 첫사랑을 닮은 아이였다. 참으로 여린 그 아이.. 그 아이는 나를 볼 때면 늘 아기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에 매혹된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아이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어느 저녁, 단 둘만 남은 무용실에서 나는 그 아이에게 짧은 키스와 함께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곁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로부터 몇일이 지났을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와 그 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우리를 피했다. 그 아이도 혼자가 되었고, 나도 혼자가 되었다. 나는 혼자라는것에 대한 두려움따윈 없었다. 어차피 난 늘 혼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아인.. 그토록 약했던 그 아이는 날이 갈수록 여위어갔다. 가슴이 아팠지만 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로인한 죽음.. 그녀의 부존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죽었고 나는 무너졌다. 한없이 한없이 무너져 일어나고 싶은 의지조차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 하지만 바보같은 나는.. 다시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의 첫사랑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가끔씩 나를 끝없는 혼란에 빠뜨렸다. 겉으론 강한 척 하지만 내 앞에선 한없이 여려지는 그 아이에게 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속지않아.. 그 아이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아이다. 이미 나를 버렸던 사람이니까.. 기대란거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실수는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거짓으로 그 아이를 대했다. 그 아이가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으니까.. 그 빌어먹을 우정이란 선을 죽어라고 지켰다. 친구라는 탈이라도 쓰고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우정이란 거.. 그 지독한 우정을 이유로 그 아인 다시 날 버렸다. 상처투성이로 너덜거리는 내 마음은 너무나도 지쳐버렸다. 지독한 외로움도 더 이상은 싫었다. 한없이 무너져 가던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고.. 결국 그녀를 떠나버렸다.
한영주..
그 아인.. 가끔 내 생각을 할까? 아픈 추억이라도 나를 그리워해준다면.. 나는 행복할테다.
핑크빛 우정(업글)
이제 막 푸르른 5월로 접어드는 계절의 한가로운 오후.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분좋은 공기는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으로 감미로운 향기마저 배어난다. 여기도, 저기도 N극과 S극의 자석처럼 꼭 붙어있는 쌍쌍의 남녀들.. 데이트하기 좋은 온도의 오늘 같은 날은 역시나 철썩 달라붙은 커플들의 세상인 듯 하다.
영주는 지금 약속장소를 향하고 있다. 언뜻보면 그냥 걷는 것 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보자면 그녀의 신발에 스프링이라도 붙은 듯 통통 튀어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큼한 미풍이 영주의 머리칼을 스친다. 어제 새로 산 라임 빛 트렌치 코트도 마음에 들고 화장도 잘 먹었다.
오늘은 그와의 세번째 데이트.. 대학생활 3년만에 처음으로 사귄 귀한 남자친구이기에 그녀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난 어쩜 이렇게 남자복이 없을까?' 또는 '이러다 남자손한번 못잡고 죽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의 한숨을 입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영주에게도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훤칠한 키와 멋진 몸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웃을 때마다 미간에 잡히는 매력적인 주름이 예술인 남자. 그의 미소를 떠올리자 영주의 가슴이 다시한번 싸하게 벅차오른다. 그 남자를 만나려고 지금껏 남자가 없었던 게지.
이렇듯 꿈길을 걷고 있는 영주를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헌데 이건 다분히 의도적인 충돌이다.
"뭐야?"
영주가 뒤돌아 소리친다. 그리고 한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영주외에도 몇몇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외모의 남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모를 광채와 깊은 향기가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다. 머리칼로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본 영주는 잠시 멈칫한다.
"죄송합니다."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사과를 하며 돌아선다. 하지만 순간적 최면이라도 걸린걸까? 영주의 발걸음은 한동안을 움직이지 못한 채 방황하고만다. 눈빛도 멍해져 버린 듯 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을 확인한 영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발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하지만 그 사람.. 그 묘한 사람은 걸음을 옮기는 영주의 뒷모습까지 묵묵히 바라보더니 다시 돌아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입술이 묘하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은 쓸쓸하고.. 또 슬프다.
"어떡해! 늦겠다.."
잠시 지체됐던 탓에 영주의 발걸음은 한층 가속이 붙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상상하기만 해도 영주의 마음은 울렁울렁이다. 하지만 한 순간 영주의 발걸음이 다시 주춤하고 멈춘다. 궂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영주는 순간 우뚝 서 버렸다. 아니,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마저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한동안을 이리저리 방황하듯 서성이던 영주는 시간을 재차 확인하더니 그제서야 천천히 전진을 시작한다.
이제 곧 약속장소.. 영주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저지한다.
"여자는 절대 마음을 다 보여주어선 안돼."
영주는 주문이라도 외듯 중얼거리며 세번째 벤치를 주시한다. 하얀 벤치 위, 크림빛 스웨터를 걸친 매끄런 얼굴의 남자.. 왼쪽다리를 꼬고 앉아 이쪽으로 여유있게 손을 흔들고 있는 저 남자.. 저 멋진 남자가 진정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저 남자가 내 남자란 말이지? 그의 실루엣이 영주의 눈이 비치는 순간부터 영주의 심장박동은 한층 더 빨라지고 만다. 숨막히게 기분좋은 심장의 리듬.. 영주도 그에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생긋.. 영주의 입가에도 눈부신 미소가 번져나간다. 역시나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찌할 수가 없나보다. 한 걸음, 두걸음.. 영주는 여전히 앉아있는 그를 향해 조심스런 걸음을 계속한다. 네걸음, 다섯걸음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앞.
"언제 왔어?'
영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묻는다.
"어.. 한 10분됐나?"
남자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끼섞인 표정으로 대답한다. 영주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 순간 그의 미간에 매력적인 주름이 살짝 잡혔다. 영주는 다시금 벅차오르는 가슴을 참지 못하고 남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디갈까?"
하고 묻는다. 그 물음은 지독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흘러나와 영주조차 당황한다.
"글쎄.."
남자는 대답을 미뤄둔 채 두 팔을 뻗어 영주의 허리를 감싼다.
"뭐야."
영주는 그를 떼놓으려는 듯, 허리를 살짝 비틀다 열없이 얼굴만 새빨개져 버린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고 영주를 더욱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영주의 가슴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댄다. 마치 영주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야.."
영주는 난감한 듯 그의 어깨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반항에 무너질 그가 아니다. 그는 더욱 강하게 영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10분 늦은 벌이야."
하며 영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는 듯한 그의 숨결이 영주의 가슴가득 퍼져온다. 역시 여자는 10분 늦는게 정답이야. 영주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비밀스런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어린시절 깊고 깊게 묻어 두었던 추억.. 하지만 아무리 묻고 파묻어도 어쩔 수 없이 번져나오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왜 오늘따라 그 친구가 이렇게도 그리운 걸까?
영주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친구의 머리를 가슴깊이 껴안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다시 한번 그의 뜨거운 숨결이 가슴 속 깊이 퍼져오고.. 영주의 기억은 어느 새 그 아련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Past years>
1. 전설의 영주
올해 고등학생이 된 영주는 막 등교준비를 마쳤다. 새 교복, 새 가방.. 모든 것이 새롭다. 오늘부터 새로운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다. 영주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등을 가다듬는다. 귀를 살짝 덮는 커트머리와 늘씬하게 뻗은 다리.. 영주에게서는 왠지모를 중성적 매력이 물씬 풍긴다. 영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그땐.."
3명의 언니들 틈에서 자란 영주는 인형놀이를 좋아했다. 예쁜치마가 갖고 싶어 떼를 쓰고, 언니들에게 머리를 땋아달라고 조르던 아주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중학생시절까지도.. 그 날이 오기전까지 영주는 여느 여중생과 다름 없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 날 낮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리고 입 속에 있던 껌이 머리에 덕지덕지 붙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단발머리를 싹둑 잘라내지 않았다면.. 어쩜 오늘의 영주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리를 자른 다음날이었다. 잘라 낸 머리칼에 대한 영주의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그 날.. 영주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영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그들도 당황하였으리라. 그냥 넋을 잃고 말았더랬다. 그도 그럴것이 머리를 자르는 순간 영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귀밑 3센티미터의 반듯한 단발머리 소녀대신 일본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미소년이 별안간 등장했다고 상상해보라. 바로 그날, 그녀의 숨겨져 있던 중성적 매력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그러고보면 영주에겐 분명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쭉쭉 뻗는 팔다리도 그러하거니와 영주를 보면 어떤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머릿결.. 아기같은 피부결..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영주의 눈동자가 그것이다. 깊고 촉촉한 그 눈빛이 이상하게 보는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영주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감돈다. 영원처럼 고독하고 깊은 바다의 빛..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며 사춘기라는 열병에 고통을 겪게 되는 족속이 여중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여학교라는 울타리속에 갇힌 수감자들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울타리 속에서 이성을 찾을 수 없을 시 그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조금 왜곡되고 만다. 그들의 열정은 이성과 닮은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미림여중생들의 열정은 자연스레 영주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단짝이던 현정이도, 민지도 영주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져버렸다. 등굣길 곳곳에서 여중생들이 튀어나와 편지를 주고 도망가기도했다. 화장실만 다녀와도 영주의 책상위엔 늘 간식거리가 쌓여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받은 초컬릿박스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이며 생일이라도 되는 날이면 연예인을 방불케하는 선물더미를 풀어보느라 몇일간 정신이 없었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이 낯선반응에 당혹스러워 하던 영주였다. 하지만 사랑받는 기쁨을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게다가 소녀들이 영주에게 원한 것은 단 하나, 영주가 그들의 우상으로서 그저 존재해 주는 것.. 그 뿐이었다. 소녀들은 영주의 왕국을 만들어주었고 영주가 그 왕국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영주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했다.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의 마력, 그 달콤함이란..
결국 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주는 소녀들위에 군림했고 소녀들은 그의 통치에 열광했다. 소녀들은.. 영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대가또한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영주는 노력했다. 중학시절 내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소녀들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아래.. 그 무서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점차 그들의 기호에 완벽히 부합하는 이성상으로 다듬어진 영주.. 그러니 누구라도 영주의 눈빛에 가슴이 설레지 않은 이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미림여중37회 졸업식에선 다시 없을 진풍경이 펼쳐졌으니.. 수십개의 현수막이 눈물을 흘렸고 꽃이란 꽃은 일찌감치 동이 나버려 웃돈을 줘도 살 수 없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수많은 후배들의 눈물과 숨막힐 듯한 꽃다발속에서 막을 내렸던 영주의 전성시대. 영주는 졸업식을 끝으로 그녀의 왕국에서 물러났고, 그렇게 영주는 미림여중의 전설이 되었다.
2. 새로운 왕국
이제 고등학생이 된 영주...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주는 또 여고에 배정을 받은 것이다.
"고딩들한테도 먹히려나?"
거울 속 영주는 불과 몇 주전 중학교 시절의 모습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중학생때의 교복보다 한층 성숙함이 묻어나는 다갈색 교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영주는 거울속 자신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선화여고의 교문 앞. 영주는 역사적인 무언가를 바라보듯 멈칫 교정을 둘러보더니 교문안쪽으로 한걸음 발을 들여놓는다. 교문앞을 지키고 선 주임과 선도부원들의 시선이 일순 영주에게 꽃혀버린다. 하지만 영주는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지나치며 나른한 걸음을 계속한다.
영주의 걸음걸음에 맞추어 시간이 멈추는 듯, 그녀가 스치는 공기만큼은 현실 세계로 부터 분리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감성마저 끌어들이는 영주의 무게감 있는 아우라. 영주는 선도부원들만이 아닌 주변 선화여고생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따갑게 느끼며 고개를 아래로 꺽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건물 3층에서 유독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영주의 반은 2반이다. 1년간 영주가 몸담고 있어야 할 곳.. 영주는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저기서 영주를 흘긋 거리는 몇몇의 소녀들과 눈빛이 마주쳤다. 그녀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다가도 다시한번 영주 돌아보기를 반복중이다. 결국 고딩들에게도 먹히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영주왕국이 탄생할 것인가?
"쿡!"
영주는 괜히 웃음이 난다. 영주의 웃음에 몇몇의 소녀들이 더 영주를 돌아본다. 영주는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얼마전에 샀던 소설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영주는 요즘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에 푹 빠져있다.
"저기.."
순간 누군가 영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예?"
영주는 흠짓 놀라며 그 누군가를 돌아본다. 돌아보기를 반복하던 몇몇 소녀들의 시선도 집중되었다. 그곳엔 아담한 체구에 무척 착해뵈는 여자애가 영주에게 잠깐 나와보라는 손짓을 하고있다. 어리둥절한 영주는 일단 그 아이를 따라 교실문을 나선다. 여자애는 말도없이 앞장서 얼마를 걷더니 결국 인적 없는 작은 공터에서 멈춰선다. 영주도 걸음을 멈추었다.
"희선언니가 불러달래서요."
그제서야 입을 연 여자애는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뜨고만다.
"뭐지?"
영주는 아직도 어리둥절한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순간 낮은 발자국 소리가 공터를 고요히 울리기 시작하고.. 저기서 영주를 향해 다가오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의 앞에 멈춰선 그녀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매력적인, 굉장한 미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무말도 않은 채 영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만 짓고 있다. 영주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떨구어 버린다.
"너.. 혹시.. 나 모르겠니?"
여학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영주는 고개를 들어 그 미녀를 찬찬히 살펴본다. 기대와 긴장감으로 뒤섞인 표정의 그녀.
'그래! 어쩐지 낯이 익다했지..'
희선.. 민희선. 영주의 중학교 시절 미림여중 얼짱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희선이다.
"희선.. 선배님?"
영주의 한 마디에 희선의 얼굴가득 웃음꽃이 피어난다.
"아는구나.."
영주를 바라보던 희선의 얼굴이 곧 붉게 물들어버린다.
"근데 무슨일로.."
영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희선에게 묻는다.
"어.. 다른게 아니고.."
희선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눈빛에 다시 한번 발그레해진다.
"그게.. 나랑 자매하자구."
"자매요?"
"어.. 모르니? 우리학교는 자매맺는 전통이 있거든. 나는 너랑 맺고 싶어서.. 미리 말해두는거야."
"아.."
영주는 뜬금없는 요구에 어색한 미소만 머금고 있다.
"알겠니?"
희선이 긍정의 답변을 요구한다. 하지만 영주는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특정인물과 이런식으로 얽매이는 것. 이것은 영주의 왕국에선 철저히 금기시 되는 일이다.
"왜? 싫니?"
갑자기 희선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새어나온다. 영주는 깜짝 놀라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며 희선을 진정시킨다. 아무래도 보통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듯 싶다.
"답해줘. 할건지 말건지.."
하지만 난감한 영주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어서!"
이제 거의 악에 가까운 희선의 목소리에선 살기마저 느껴진다.
"아, 예..할게요. 그렇게 해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영주... 결국 천하의 영주가 엽기녀에게 두손을 들고 말았다.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희선은 쉬는시간에 2학년 5반으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직 희선을 찾아가지 않은 터다. 괜시리 머리 한 쪽이 욱씬욱씬 신경이 쓰인다.
'그래.. 별 일이야 있겠어? 밥이나 먹자!'
하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금기사항을 깨버린 것이다. 뭔가 잘못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버렸다.
'에잇! 첫날부터 이게 뭐람...'
숟가락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밥을 먹고 있는 영주..
"저.."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영주는 화들짝 뒤를 돌아본다.
"저.. 희선언니가.."
아침에 찾아왔던 그 아이다. 안그래도 침울해있던 영주는 급기야 짜증이 솟구치고 만다.
"뭐야! 또 뭔데!"
영주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선 떨리는 손가락으로 뒷문을 가리킨다. 거기서 희선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영주는 고개를 한번 떨구고는 천천히 일어나 희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희선은 자신의 앞에 우뚝 멈춰선 영주를 올려다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너.. 오늘 한번도 나 안찾아왔지?"
"전.."
"그래! 첨부터 모든 걸 기대할 순 없으니까.."
희선은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자.. 이거."
하며 영주에게 폰하나를 건낸다.
"저.. 폰 있는데요?"
"이건 내 전용폰이야! 내가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오라구! 화장실 갈때두.. 청소할때두.. 항상 소지하구 있으라구! 알겠지? 아! 그리구 마지막으로 오늘 방과후에 시간 비워 놓도록 해."
서둘러 자기 할 말만 마친 희선은 용건이 끝나다는 듯 팽그르르 돌아서더니 시녀하나를 끼고 횅하니 가버린다.
"어라?"
희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간다.
"쳇!"
팽팽하기만 하던 영주의 긴장이 일순 맥없이 풀려버린다. 느낄 수 있었다. 아닌척 하지만 떨리던 희선의 손.. 영주의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그녀의 초조한 표정.. 영주가 모를리 없다. 희선의 모습은 몇 년간 경험해왔던 수많은 여자애들과 조금도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희선이 건내준 폰을 한동안 바라보던 영주의 입가에 알수없는 회심의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사람 잘못봤어. 민희선!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5교시가 마쳤다.
[드르르르르, 드를르르]
그리고 종이 치기가 무섭게 희선이 준 폰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폰주인이나 폰이나 똑같구만..."
영주는 한동안 촛점을 잃은 눈빛으로 폰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그 폰을 집어들고는 희선의 반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영주가 걷는동안에도 폰은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다.
"작작좀 하시지!"
집착녀.. 자기감정을 속이지 못하는 여자.. 희선이라는 여자는 그런 여자다. 그러나 그런 여자일 수록 다루기는 더욱 쉬운 법! 영주는 희선의 반에 다다라 창문넘어로 교실을 들여다 본다. 희선이 보인다.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끝도 없이 눌러대고 있는 희선. 그러다 도저히 못참겠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앞문을 향해 걸어나온다.
"엇!"
한순간 희선과 창밖의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푸른빛이 감도는 영주의 눈동자.. 희선의 걸음이 잠시 멈칫한다. 잔뜩 흐리던 희선의 얼굴은 순식간에 반짝반짝 개어버린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희선은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잰걸음으로 교실문을 나와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으로 따질기세를 취한다.
"너! 왜 전화 안받어!"
"왔잖아."
낮지만 결코 함부로 할 수 없을 목소리.. 영주는 목소리에서마저 푸른빛을 자아내고 있다. 딱딱한 검은색도, 가벼운 노란색도 아닌 깊고 부드러운 푸른 빛이 영주의 목소리를 감싸고 있다.
"그래두.."
팽팽하던 희선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바람이 빠져버린다.
"이건.. 필요없어. 폰두갠 너무 부담스럽단 말야.."
영주가 폰을 희선에게 건내준다.
"그럼.. 연락은.."
"앞으론 내 폰으로 전화해, 그럼 받을 테니까.. 니 폰 줘볼래?
희선은 폰을 건내려다 말고.. 깜짝 놀란 듯
"왜..왜?"
하고 묻는다.
"내 번호 찍어주게.."
"아..아냐.. 그냥 불러줘. 내가 찍을게."
"010 342...."
희선이 가만가만 영주의 번호를 찍고 있다. 불과 한시간전과 판이하게 다른 희선의 모습. 그녀는 이미 영주에게 길들여져 버렸다.
"어, 수업시작하겠다. 나 그만 가볼게."
영주는 아무말 없는 희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왔던 길을 돌아선다. 영주가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희선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유유히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영주의 뒷모습에 넋을 잃고 만다. 희선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폰을 바라본다. 희선의 폰에는 이미 영주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 부터 희선의 전화번호 목록에서 자리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번호..
희선이 영주를 처음 보았던 건 중학교 2학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보드라운 분홍빛 피부에 귀를 살짝덮은 갈색머리를 흩날리며 희선의 앞을 쓱 지나치던 아이..
갈색머리아래 반쯤 가려져 있던 그 아이의 눈동자가 언뜻 희선을 바라봤었다. 빨려들듯한 그 푸른 눈동자.. 봄내음처럼 향긋하게 사라져가던 그 아이의 비누냄새도.. 잊을 수 없지..
얼마 후 전교적으로 유명해져 버린 그 아이.. 언제나 촉촉히 젖은 듯, 슬픈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아이가.. 영주였다.
무엇이든 좋은 건 독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희선이었기에 영주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기다렸다. 누군가 영주를 소유하기 전에 독점할 수 있는 timing.. 멋진 것을 독점하려면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통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일어나서 도망치기전에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역시 안될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고개숙이지 않는 희선에게도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있었다. 영주의 눈빛만 봐도 이렇게 다리가 풀려버리는데 무슨 힘으로 그를 묶을 수 있겠는가. 그저 그가 바라봐주기만을.. 오직 자신만을 통치해주기를.. 그 통치에 열광할 수 있는 영광을 바라는 수 밖에..
희선은 꿈을 꾸듯 영주의 번호를 바라본다.
'이제.. 영주번호를 누를 수 있어..'
영주의 눈빛에 달구어진 희선의 붉은 볼이 좀처럼 식을 것 같지 않다.
모든 수업이 마치고..
영주는 교문 앞에 서서 희선을 기다린다. 이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여고생들은 모두 한번쯤 영주를 흘끔거리며 지나간다. 달뜬 여고생들의 깨알같은 속삭임..
"어머.. 쟤 뭐야? 우리 학교 애야?"
"일학년 인가봐! 저런 애가 우리학교라니.."
"어머, 어머.. 웬일이야! 쟤, 내가 찍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비스듬히 교문 옆에 기대선 영주는 그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무심히 흘려버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진다.
'내 밥..'
저 멀리서 희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희선은 먼 발치에서부터 영주를 발견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영주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얘들아, 먼저 갈래? 난 얘랑 할 말이 있어서.."
희선은 양 옆에 끼고 있던 시녀들에게 한껏 뽐내듯 작별인사를 하고는 영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별루.."
영주가 가볍게 고개를 들어 희선에게 답한다. 순간 영주의 갈색머리가 찰랑하며 빛이 났다.
'영주가.. 영주가 오직 날 위해 여기 서 있다.’
언제나 눈이 부신 아이.. 지배하고 싶지만.. 도저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반말.. 괜찮아?"
말이 없는 희선에게 영주가 가볍게 묻는다.
"어..응 좋아.."
희선의 목소리에 가는 떨림이 느껴진다. 오전의 독기는 씼은 듯이 사라져 버린 목소리다. 그녀의 감정은 이미 영주에게 낱낱이 노출되어버렸다.
"그럼.. 그냥 희선이라구 불러두 돼?"
"응. 괜찮아.."
"희선아."
영주가 희선의 이름을 부른다. 두근..! 희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져 버린다. 영주 Win! 상황은 이미 역전된 지 오래다. 영주는 슬쩍 희선을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땅만 쳐다보고 있는 청순한 희선의 모습.. 이쁘긴 정말 이쁘다.
"참! 오늘 시간 비워 놓으라구했지!"
영주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희선에게 묻는다.
"왜? 뭐 바쁜 일이라도.."
희선의 표정에 서운한 기운이 스친다.
"오늘은 좀 그래.. 엄마도 좀 편찮으시고 해서.."
"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희선의 목소리에 풀이 죽어버린다. 오늘.. 자랑하고 싶었다. 그 기집애한테 영주를 꼭 자랑하고 싶었는데..
어느덧 버스 정류장이다.
"나, 여기서 버스 타.."
희선이 영주를 올려다 보며 말한다.
"너두 버스타? 중학교 땐 매일 집에서 데리러 오더니.."
그런 걸 다 알고 있었다니.. 뜻밖의 관심에 감동받은 듯 희선의 표정이 밝아진다.
"응, 두 코스면 집인걸 뭐.."
어느덧 버스한대가 정류장에 멈춰 선다.
"이 버스 아니야?"
영주가 묻는다.
"어.. 그래. 나 갈게. 낼 봐!"
희선이 후다닥 버스를 탔다.
창 밖으로 영주가 보인다. 영주는 희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영주의 푸른 눈동자.. 희선은 왠지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마음이 아려온다.
[따라라라라라]
순간 희선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저, 김기산데요.. 아가씨 어디세요?
"이제부터 오지 마요. 나 오늘부터 버스 타고 다닐 테니까."
희선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본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여전히 희선을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눈.. 영주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엄마! 사과!"
영주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집어 던지고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다.
"왔나!"
아프다던 영주엄마가 쌩쌩하게 걸어나온다.
"가쓰나, 앉아 있는 꼬라지 좀 봐라! 다리 몬 오무리나!"
경상도 아줌마의 거친 말투! 엄마는 사내 같은 영주가 늘 못마땅하다.
"아.. 냅두라!"
영주도 엄마와의 대화에선 말투가 돌변한다. 영주는 냉장고로 향하더니, 터질듯하게 익은 사과하나를 꺼내 들곤 쇼파로 쓰러진다.
"아~ 좋다!"
드디어 영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애써 연출할 필요도 없으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영주가 되는 시간이다. 영주는 더듬더듬 리모콘을 집어들어 TV를 켜고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와작 베어먹는다.
“잘~한다! 고등학생이 됐으면 이제 공부 쫌 해야 되는 거 아이가?"
엄마가 슬슬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아.. 고만 좀 해라고!”
“고만하긴 뭘 고만해! 딴 아들은 지금 공부한다고 난린데 니는 이게 뭐꼬!”
영주의 얼굴이 굳어버린다.
“저봐라. 저봐라.. 꼬라지는 똑 머시마같이 해갖고! 내 니만 보면 미친다 미쳐!”
“이씨~ 짜증나 죽겠네!”
영주는 벌떡 일어나 교복을 벗어 던지더니,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와버린다.
홍대 앞..
희선은 약속장소에서 홀로 은경을 기다리고 있다.
'정은경'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희선의 라이벌이었다. 희선과는 달리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까만 눈이 매력적인 그녀는 인도여자를 연상케하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이다. 은경과 희선은 어딜가나 붙어다녔지만 늘 서로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이 붙어다닐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통하는 것이 있었느니.. 그것은 남자보다도 여자가 좋다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은경이 전보다 더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높이 쳐들고 희선의 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이다?"
은경이 먼저 인사를 한다.
"어.. 그래."
"근데.. 니가 그렇게 자랑하던 애는 어딨니?"
은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짓꿎게 묻는다.
"어.. 오늘 못 나왔어.. 일이 있어서.."
"어머..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나? 얘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왔는 지 아니?"
은경의 옆에는 껄렁한 힙합매니아 한 명이 거만한 포즈로 자리를 잡고있다. 새하얀 두건에 야구모자를 뒤집어 쓴 합합매니아는 왼쪽눈을 머리카락으로 완벽히 가린채 오른쪽눈만으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다. 하지만 4명은 족히 들어갈 힙합바지는 엉덩이에 걸쳤는지 한없이 흘러내려와 답답하고 어지러운 느낌마저 감돈다. 영주.. 우리 영주만 있었다면.. 희선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 어디라도 들어가자!"
은경은 갑자기 힙합매니아의 팔짱을 끼더니 앞장 서 걷기 시작한다. 그들 뒤에 남겨진 희선은 참담한 기분으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른다. 나오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뿐이다.
[따라랄라라]
순간 희선의 폰이 울려퍼진다. 이 번호는..처음으로 발신된 영주의 번호다.
“여..보세요?”
희선은 목까지 차오르는 멍울을 삼키며 전화를 받는다. 곧 영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야?”
은경 힙합매니아.. 그리고 희선이 들른 곳은 한 호프집.. 은경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힙합매니아는 다리를 꼬고앉아 담배를 꼬나물더니 담배까지 피워댄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희선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자.. 뭐 좀 시키자.."
은경이 들뜬 목소리로 메뉴판을 집어든다.
"일단 병맥하나씩 하구. 과일하나하자."
"그래, 그래!"
희선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야, 너 갑자기 왜그래?"
은경은 급작스런 희선의 심경 변화가 당황스럽다는 듯, 희선의 이마에 열을 재는 시늉을 한다.
"뭐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역시나 희선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영주야..."
한 순간, 호프집을 가득 매우는 향긋한 영주의 기운.. 희선 일당들의 눈 앞에 영주가 멋적게 섰다. 교복을 입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영주. 청바지에 흰색 티와 회색 점퍼를 입고 비니를 썼을 뿐인데 영주의 존재감은 호프집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영주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훤칠한 키에 매끈한 몸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아기같은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인 저 푸른 눈동자...
‘영주는 누가 뭐래도 지존이야.. 나의 영주..’
눈물이 핑 도는 희선의 옆에 영주가 자리를 잡았다.
희선의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으로 멍멍해져 버렸다. 영주가 희선을 흘긋 보며 장난스레 싱긋 웃어 보인다. 희선도 수줍은 미소로 영주에게 답을 한다.
"니가... 영주니?"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눈빛을 한 은경이 영주에게 묻는다.
"아, 예.. 반갑습니다."
은경의 눈빛이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마냥 희번득거린다. 영주는 은경에게 인사를 하며 옆에 앉은 힙합매니아를 바라본다. 온갖 폼을 잡으며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힙합 매니아의 자세가 영주의 등장에 왠지 불편해 보인다.
"너.. 혹시 나 몰라?"
한동안 매니아를 의식하던 영주가 매니아에게 묻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매니아에게 집중되었다.
"모.. 모르겠는데? 왜 알아야 해?"
매니아는 당혹감을 감추듯 퉁명스레 답한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감출 수가 없는가 보다.
저 아이는 분명... 호연이다. 영주의 중학교 시절 언젠가 영주에게 편지를 건내고 도망가던 여린아이였다. 늘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홀로 다니던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영주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기로 한다.
드디어 맥주파티가 벌어졌다. 호연이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하지만 은경은 이제 호연이에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희선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영주에게 자꾸 술을 권한다.
"아.. 저 술이 약해서.."
"어헛! 선배가 주는데 마셔야지!"
"저.. 그럼 한잔만.."
"원샷! 무조건 원샷이닷!"
영주는 눈을 딱 감고 맥주 한 잔을 꿀떡꿀떡 들이킨다. 그 사이 은경은 재빨리 영주의 폰으로 자신의 폰에 전화를 건다.
"야, 한잔은 너무 박하다. 한잔 더! 한잔 더!"
은경은 신이나서는 영주의 옆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곧 희선이 돌아왔다.
"희선이 왔다."
영주는 헤죽 희선을 맞이한다.
"어? 영주 술마셨어?"
"어.. 한잔."
영주가 또 싱긋 웃으며 희선을 바라본다. 술이 약한 영주는 겨우 한잔에 두 볼이 빨개져서는 희선을 보고 자꾸자꾸 웃는다. 멋있는데다 귀엽기까지.. 희선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영주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아~ 아푸다."
그렇게 한동안 혼자서 생글거리던 영주는 희선의 어깨에 기대는가 싶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희선은 깜짝 놀라 자기의 어깨에 기대 잠든 영주를 바라본다. 아무리 아무리 봐도 사랑스러운 사람... 희선의 가슴이 어느 때 보다도 벅차오른다.
"너, 앞으로 영주한테 술 마시라고 하기만 해!"
희선이 은경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은경은 쳇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희선은 다시 곤히 잠든 영주를 바라본다.
'내가 지켜줄게. 영주야. 영원히..'
그날 밤..
밤 늦게 귀가한 영주는 엄마의 호된 꾸지람을 견뎌내고 침대속으로 기어들었다.
"아.. 피곤해.."
그렇게 영주의 무거워진 눈꺼풀이 스르르 감길 즈음..
[따라라라라]
영주의 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영주가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어머, 영주자니?"
희선이다.
"응.."
"미안해.. 그리구 오늘 고마웠어.. 와줘서.."
"어.."
"잘자. 영주야.."
"어.."
영주는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힘겹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따라라라]
영주의 전화가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씨.."
잠자는 시간이 방해 받는 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영주이기에 짜증이 솟구치고만다.
"또. 왜!"
영주가 전화를 받아든다.
"영주니?"
하지만 이건.. 희선의 목소리가 아니다.
"누구세요?"
"어머.. 섭섭하다, 얘.. 나! 은경이."
"아.."
"벌써 자니?"
"아.. 이제 잘려구요."
"음.. 낼 잠깐 볼 수 있을까?"
"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중요한 이야기라서.. 희선이에 대한.."
뭔가 꼬인다는 느낌.. 영주가 대답을 미룬다.
"그럼 낼 보는 걸루 알고 있을게. 잘자라."
전화를 끊은 영주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7시, 홍대정문앞, Room 커피숍에서 보자~ 혼자와야 해!]
2교시 후 쉬는시간.. 은경의 문자에 영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저기.."
바로 그 때 성희가 영주를 조심스레 부른다. 뒷문에 붉은 볼을 하고서 영주를 바라보는 희선이 눈에 들어온다. 영주가 희선에게 다가간다.
"왜?"
"어.. 오늘 끝나고 뭐해?"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은경의 문자가 걸린다.
"어.. 오늘은 진짜 집에 들어가봐야하는데.."
영주가 어물어물 말한다.
"그..래? 왜?"
희선이 싸늘하게 묻는다.
"말했잖아. 엄마 몸 안좋으시다구. 어젠 제대로 못챙겨줬으니깐.."
거짓말을 하자니, 영주는 볼이 괜히 화끈거리는 느낌이다.
"알겠어. 할 수 없지 뭐.. 그럼 내일봐."
희선이 힘없이 돌아선다.
방과 후.. 영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한다.
"어, 여기.."
커피숍을 터벅터벅 들어서자마자, 은경의 얼굴이 까무잡잡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예 안녕하세요?"
영주가 어색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한다.
"앉어. 뭐 마실래?"
은경은 영주에게 메뉴판을 내민다.
"저.. 코코아요."
"큭 귀엽긴.."
은경은 혼자 큭큭거리며, 코코아 한잔과 카페라떼 한 잔을 주문한다.
"저, 근데 무슨 일로.."
영주는 자신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는 은경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어.. 그래.."
은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영주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그게 말이야.. 희선이에 대한 이야긴데.."
"네.."
"희선이 조심하라구.."
"네?"
은경은 갑자기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려준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영주에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조심하란말이야. 걔.. 무서운 애야."
"그게 무슨.."
"넌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봐왔었거든.."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코코아와 카페라떼가 나오고, 은경은 잠시 말을 멈춘다. 영주는 묵묵히 컵 가득 담긴 휘핑크림을 스푼으로 휘젓기 시작한다.
"집착이 얼마나 심한지.. 옛날에 걔 인형 좀 만졌다고 절교한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더랬어."
은경은 그 순간이 생각난다는 듯 쿡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근데, 그건 장난이지 뭐.. 내가 정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 하나 말해줄까?"
영주는 푸른 눈동자로 은경을 응시한다. 영주의 눈빛에 은경은 잠시 멍하니 넋을 놓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있었어. 옛날에 걔가 정말 집착하던 애가 하나 있었다? 근데 어느 날 걔가 전학을 가게 된거야. 그걸 안 순간 그 집에 찾아가서 이사가면 죽어버릴거라면서 면도칼을 꺼낸거지... 그때 걔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셨는지.."
"그래서요?'
"근데.. 어쩔 수 있겠어? 걔는 치를 떨면서 떠났구. 희선인 그 날 정말로 손목을 그은거야."
영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다.
"다행히 동맥을 비켜가서 살긴 했지만 말야. 몇번을 죽었을지 모르는애야. 걔가."
영주는 거의 절망스런 표정으로 은경을 바라본다.
"그러니깐 조심하란 말야. 너한테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말야."
영주는 시선을 떨군다.
"근데 좀 어렵겠더라.. 희선이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너무 깊게 빠져들었더라구.."
은경은 한 숨을 푹 쉬며 영주를 쳐다본다.
"니가 우리 학교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영주는 조용히 코코아를 한모금 들이킨다.
"혹시라도 희선이 때문에 힘든 거 있음 나한테 연락해. 언제라도 상담해 줄테니."
은경은 방긋 웃으며 한 손으로 영주의 볼을 살짝 감싼다. 하지만 영주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들 뿐이다.
그렇게 은경과 헤어진 영주는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다. 희선이란 애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날카로운 유릿조각으로 산산조각 나 버릴 아이다. 영주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어디서 오는거니?"
집 앞에 당도할 즈음, 어디선가 싸늘한 희선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주가 고개를 돌린다. 그 곳에.. 희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가 왜.."
"집에 일찍 들어간다며."
"어.."
영주의 등허리에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 갔다온거야?"
"좀 일이 있었어."
"은경이랑?"
영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희선을 바라본다.
"다 봤어. 너네 둘이 커피숍에 앉아있는 거."
"그게.."
"은경이, 이 나쁜 기집애."
희선의 눈에 말도 못할 독기가 서려있다. 아니, 독기를 넘은 광기가..
그리고 희선은 말문이 막힌 영주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알어.. 넌 잘못없다는거. 그 년이 문제지. 내꺼는 뭐든지 뺏어가는 년이거든!"
희선은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폰을 꺼내든다.
"어.. 나 희선이.."
희선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은경과의 통화를 시작한다.
"그래! 다 알어. 앞으로 또 이런 일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할지.. 니가 모를리는 없을테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선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오기 시작한다.
"앞으로 우리 영주한테 한번만 더 연락해봐. 평생 후회하게 해 줄테니..그리구 말이야.. 오늘부로 우리 사이는 끝이야."
희선은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영주를 돌아본다. 영주는 얼어붙은 듯 꼼짝않고 서서 희선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다. 희선은 그런 영주에게 한걸음 두걸음 다가서더니 영주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안는다.
"영주야.. 항상 내 옆에 있어줘. 난.. 너만 있으면 돼."
3. 추억과의 재회
[머해? 안졸려? 나 배고파..]
희선의 문자다. 희선은 도대체 수업을 듣기나 하는 건지. 하루에도 수십통의 문자를 날린다.
[나두]
영주는 간결하게 한 마디를 보낸다. 역시 점점 희선을 상대하기가 버거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감정기복이 워낙 심한 희선인지라 함부로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업시간이 마쳤다.
"저기.."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어.. 알겠어.."
영주가 익숙한 듯 일어선다. 입학 후 하루도 빠짐없이 영주의 등을 두드리는 성희.. 영주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재빨리 뒷걸음질치며 자리를 피하는 여린아이다. 역시나 뒷문에는 희선이 서 있다.
"왜?"
영주가 느린걸음으로 희선앞에 선다.
"이거.."
희선이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내민다.
"뭐야?"
"배고프다며.."
희선은 붉어진 얼굴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어.. 너두 배고프댔지.."
"난 괜찮아.. 많이 먹어.. 그리구 내일 콘서트 안갈래? 나 티켓이 생겼는데.."
"내일? 내일은.. 좀 그런데.."
"왜?"
희선의 목소리톤이 한층 높아진다.
"어.. 그날이야.."
영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희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럼 할 수 없지..머.."
희선은 재빨리 돌아서서 가버린다. 희선은 그런 종류의 말을 듣기 싫어한다. 영주에게도 그날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너두 먹어.."
영주는 초코바하나를 꺼내 멀찍이 서 있는 성희에게 건내준다.
"괘..괜찮아.."
"왜.. 먹어."
영주가 성희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당황한 성희의 얼굴이 붉어진다.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성희만 보면 영주는 안쓰런 마음이 앞선다.
"고마워.."
성희가 작은 손을 내밀어 초코바를 받아든다.
"너.. 귀찮지 않아?"
영주가 묻는다.
"아.. 괜찮아."
"거짓말.. 하루이틀도 아니구.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뭐냐?"
영주의 말에 성희의 코끝이 빨개진다. 곧이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성희는 조용히 엎드려 버린다. 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와! 같이 먹자 영주!"
짝궁 지윤이 과자봉지로 달려들어 과자봉투를 북 뜯어낸다.
"좋겠다 영주 넌~ 먹을 게 떠나지를 않네!"
지윤이 과자를 와작와작 씹어대며 말한다. 선머슴처럼 괄괄한 성격의 지윤은 누구보다 편한 친구다.
"많이 먹어라.."
영주는 한마디를 하고는 그냥 엎드려 버린다.
[딩동댕동]
수업시간이다. 성희는 아직 엎드려 있다. 영주의 마음이 편치않다.
[너, 이제 성희한테 심부름좀 그만 시켜라.]
결국 영주가 희선에게 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희선에게선 답이 없다. 영주는 수업을 듣는다. 국사시간.. 이 시간엔 늘 졸음이 쏟아진다.
[땡땡땡]
쉬는시간..
"졸려.."
영주는 쓰러지듯 책상으로 엎드려버린다. 헌데 '톡톡' 익숙한 손이 조심스레 영주의 등을 두드린다.
"뭐야!"
영주가 짜증을 내며 돌아본다. 성희가 죄라도 지은 듯 한 폼으로 특유의 뒷걸음질을 친다. 그리고 뒷문에는 역시나 희선이 서 있다. 영주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희선에게 다가간다.
"또 뭐! 내가 잘 때는 건드리지 말랬잖아!"
영주는 쌓여왔던 짜증이 폭발하듯 소리친다.
"왜! 성희한테 또 심부름 시켜서 화나니?"
"뭐?"
"왜, 좀 시키면 어때? 성희가 나보다 좋니? 그렇게 안돼 보였어?"
희선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얘기하자."
영주가 희선을 진정시킨다.
"뭔데! 지금 얘기해! 하라구!"
희선이 눈물을 글썽이며 악을 쓴다.
"그만.. 미안. 그만해.. 나중에 연락할게."
영주가 희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진정시킨다. 영주의 손길에 잔뜩 곤두서 있던 희선의 가시가 누그러지고 만다. 무서우리만치 예민한 희선이. 그녀의 예리한 신경세포가 두렵다.
영주는 훌쩍이는 희선을 교실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반으로 들어선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영주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희선이 그 난리를 피우고 갔으니 당연하다. 머리가 아프다. 역시 희선은 버겁다.
영주는 터벅터벅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아이들은 애써 모른 척 영주의 시선을 피해주고 있다. 한데.. 유독 한 아이의 거침없는 시선이 느껴진다. 영주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란듯이 영주를 관망하고 있는 눈빛.. 영주가 그 시선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영주의 푸른눈빛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니, 오히려 영주를 조롱하고 있다. 그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눈빛에 결국 영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만다.
'이규원'
알 수 없는 아이다. 창백한 피부에 화장이라도 한 듯 눈밑이 붉은아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와 늘씬한 몸매로 모두의 시선을 한껏 받으면서도 그 시선을 즐기지는 않는 소녀. 그녀의 냉소어린 눈빛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그녀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늘 주변의 다른 소녀들을 유치한 애들의 무리로 전락시켜버리곤 했다.
중학교 시절을 거쳐 고등학교로 진학한 지금 이 순간까지 이토록 영주를 철저히 무시하는 이가 있었더가?
어떤 말도.. 괴롭힘도 없었지만 영주는 규원의 그 눈빛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존심이 상해버린다. 싫다. 규원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싫다. 하지만 더욱 싫은 건.. 언제부터인가 그런 규원을 동경하게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이다.
방과 후..
영주는 교문앞에서 희선을 기다리고 있다. 토라진 희선을 다독이기 위해선 함께 영화라도 한편 봐줘야 한다. 쏟아지는 여고생들.. 모두들 한번 쯤 영주를 흘긋거리며 지나간다. 영주는 이미 이 학교의 유명인사다.
저기서 희선이 걸어오고 있다. 상기된 표정.. 영주와의 데이트에 벌써부터 설레는 모양이다.
"많이 기다렸니?"
희선이 밝은 목소리로 영주에게 묻는다.
"아니.."
"그 놈의 가가멜이 어찌나 종례를 오래하는지 말야.."
희선은 흥분한 목소리로 영주를 붙잡고 재잘재잘이다. 영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긴다. 희선은 영주팔에 팔짱을 끼고는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걸음을 걸었을까.. 순간 누군가 영주와 희선을 슥 지나친다. 영주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규원이다. 규원이 잠시 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규원의 눈과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짠한 느낌이 영주의 온몸을 진동한다. 언제부턴가 느낀 것이지만.. 규원의 눈빛은 결코 낯설지가 않다.
"으악!"
눈을 뜬 영주는 튕기듯 침대에서 뛰쳐나온다.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전 날 한참이나 잠을 못 이룬 채 뒤척인 까닭이다.
"엄마! 왜 안깨웠는데!"
"가쓰나.. 나도 인제 일났다!"
엎친데 덮친격.. 오늘따라 엄마도 늦잠이다. 영주는 간신히 세수만 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교복위에 걸친 점퍼가 박쥐날개처럼 펄럭인다. 늦으면 안된다. 오리걸음에 뜀뛰기 그리고 엎드려 뻗쳐.. 힘든 건 둘째치고 그거 완전 체면 구기는 일이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자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더!
'쎄입!'
다행이다. 단 몇초를 남겨두고 영주는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머리는 뒤집어지고 점퍼는 어깨뒤로 넘어가 있는 꼴이라니.. 긴장이 풀린 영주는 힘빠진 다리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긴다.
"야."
몇 걸음을 걸었을까. 누군가 뒤에서 영주를 부른다. 낯선 목소리.. 영주가 덤덤히 뒤를 돌아본다.
'이규원'.. 특유의 여유로운 자태로 서 있는 규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규원은 그렇게 멈춰선 영주에게 한걸음 두걸음 다가오더니 영주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한다.
"엉망이군.."
규원의 말투와 행동은 마치 엉망인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영주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규원의 행동에 당황하기도 하거니와 황송함마저 느껴지는 건 뭐람.
"왜 안오나 했더니.. 오늘 늦었었구나?"
규원이 영주의 눈을 흘긋 바라보며 말한다. 영주를 기다렸다는 뜻일까.. 어쨌든 처음이다. 이렇게 또렷한 규원의 목소리를 듣는 건..
"칠칠치 못하긴.."
규원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뒤로 넘어간 영주의 점퍼를 가지런히 정렬해 벌어진 지퍼를 쭉 채워버린다. 이런 걸 데자부라고 하는 것일까.. 이 상황.. 영주에게 낯설지가 않다. 언젠가 분명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더랬다. 그게.. 언제였더라.
"이제 사투리는 다 고쳤더라?"
순간 영주가 놀란 눈으로 규원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규원의 냉소어린 눈동자에도 감정이라는 것이 엿보였다. 낯익은 규원의 눈빛..
"너.. 나 알지.."
영주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규원은 흔들림 없이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다.
"규원.. 이규원.."
드디어 기억을 막고 있던 코르크 마개가 뻥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왜 이제껏 몰랐던 걸까? 혹 그것은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던가? 영주는 기억의 골 저 편에 가려져 있던 어린시절의 추억 한토막을 떠올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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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부산에서 막 서울로 이사 온 영주는 참 작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놀던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영주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아이가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눈 밑이 붉었던 아이.. 영주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작은 심장이 발랑발랑 뛰었더랬다. 그래서 그 아이가 영주에게 처음 다가왔을때 어찌할 바를 몰라 푸른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당황해 마지 않았다. 그 아이는 영주의 사투리 한 마디 한 마디에 하하하 웃으며 영주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영주는 그 아이가 백마탄 왕자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주러 온 영주만의 왕자님이라고..
둘은 단짝이 되었다. 매일 같이 그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것이 꿈만 같을 정도로 기뻤다. 매일 밤 그 아이를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잠이 들었고..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온 힘을 다해 골목을 달렸다. 그럴때면 그 아이는.. 잔뜩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는 영주를 세워두고 칠칠치 못하다며 지퍼를 채워주곤 했다. 영주는 그게 좋아서 매일같이 지퍼를 열고 그 아이를 향해 달렸다. 영주는 그 아이가 그렇게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이들이 그 아이를 놀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에워싸고 하는 소리는 남자같은 여자, 호모라는 것이었다. 그럴리가 없었다. 그 아이는 영주의 왕자님이었다. 여자일리가 없었다. 영주는 그 자리를 도망쳤다.
그 후.. 영주는 그 아이를 피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더 이상 그 아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외톨이가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다시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아이가 전학을 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영주는 달렸다. 가지말라며 소리치며 그 아이를 향해 마구 달렸다. 그 아이는 뒤를 돌아 영주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울며 그 아이를 붙잡았다. 미안하다고.. 제발 가지 말라고 붙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영주에게 칠칠치 못하다고 중얼거리며 조용히 지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돌아선 그 아이는 더 이상 영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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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아본거니?"
규원이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기억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먼지쌓인 어린시절의 기억따위에 얽매여 있던 감정이건만.. 그 감정은 조금도 변형되지도 않은 채, 그 때의 그 느낌 그대로.. 이렇게 가슴을 뛰게하니 말이다.
수학시간..
영주는 창가의 규원을 바라보고 있다. 햇살에 살짝 비친 규원의 모습.. 칠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펜을 들고 필기를 시작한다. 살짝 고개를 떨군 탓에 까만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역시 그녀의 분위기는 깊이가 다르다. 아름답다.
그 날 이후에도 영주와 규원이 사이의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거기까지였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행동하는 규원이.. 하지만 영주의 마음은 이미 송두리째 흔들려버렸다. 이렇게 멀찍이서 규원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쩌릿하게 아려온다. 시큰시큰 눈물이 날것도 같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 하나씩 뽑아~"
오늘은 새로이 자리배치를 하는 날이다. 방법은 제비뽑기.. 각자 자신이 뽑은 번호의 자리로 배치를 받는다. 쪽지를 뽑은 영주는 번호를 확인한다.
"33번..."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의 자리는 어느 곳일까.. 영주의 관심은 온통 규원이 뽑은 자리번호에 쏠려버린다.
"자, 내일부터는 각자 바뀐자리에 앉는거야!"
반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다.
"야! 니가 33번이야?"
누군가 영주를 쿡 찌르며 묻는다. 새침떼기에다 공주병으로 알아주는 수연이다.
"어.. 왜?"
"응.. 낼 보자구~"
수연이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새로운 짝인가 보군.."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토해낸다.
다음날..
영주는 교실로 들어서 새로 배정받은 33번 자리에 가방을 던져놓고 자리를 잡는다. 규원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규원의 자리는 어디일까.. 영주는 턱을 괴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이 푸르다. 가벼운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린다. 어린시절의 한 토막.. 이 맘때의 추억.. 영주는 눈을 감는다.
'덜컥'
순간 의자를 빼는 소리와 함께 옆자리가 채워짐을 느낀다. 영주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안녕."
건조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된 음성.. 규원의 눈이 영주를 바라보고 있다. 영주는 너무 놀라 인삿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너.."
규원은 짧은 미소를 짓고는 곧 책상정리를 시작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쨌든 영주와 규원은 다시 한번 이렇게 재회하게 되었다.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꼭 그 시절.. 꼬마 영주의 설렘처럼..
"먹을래?"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뒤지던 규원이 영주에게 밀크캐러멜하나를 내민다.
"고..마워."
영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때도 그랬었다. 규원은 매일같이 사탕이나 캐러멜같은 주전부리를 호주머니가득 넣어와서 영주에게 건내주곤 했었다.
"어떻게.. 지냈어?"
한참을 망설이던 영주는 그 동안 규원에게 품어왔던 질문을 던진다. 규원은 캐러멜을 입에 쏙 집어넣고는 얼마간 우물거리다,
"어.. 잘 지냈어."
하고 짧게 답한다.
"그렇구나.."
영주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 많이 변했지?"
규원이 묻는다.
"어.."
"머리두 많이 길었구.."
"어.."
"맞아. 인정해. 못 알아볼 만두 해."
영주가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근데 그거 알어?"
규원이 영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뭐?"
영주는 바짝 긴장한다.
"너두 만만치 않게 변했다는 거..."
하긴.. 영주의 외모에도 정말 괄목상대한 변화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시절 영주는 규원이보다 머리하나는 작았다. 부드러운 갈색머리는 어깨선을 넘었었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규원의 손을 꼭 잡으며 언제나 규원을 올려다 보았었다. 하지만 그 시절 푸른 눈동자만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저.."
누군가 영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영주가 돌아본다. 성희가 수줍은 얼굴로 서 있고 역시나 뒷문에서는 희선이가 서 있다. 영주는 습관처럼 일어나 희선에게 다가간다.
"왜?"
"어.. 오늘 수업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갈래?"
"왜?"
무심히 물음을 반복하는 영주..
"이유가 꼭 필요한거니? 그래?"
결국 희선의 목소리가 고조되기 시작한다. 양미간이 찌푸려지고 하얀 이마에 핏대가 선다.
"희선아."
"뭐야. 넌 매일 이런식이야."
희선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여나온다. 끝이 없는 희선과의 실랑이.. 영주는 마냥 피하고 싶을 뿐이다.
"영주야!"
순간 누군가 영주의 등을 툭 친다. 규원이다. 희선의 날카로운 눈이 경계하듯 규원을 쏘아본다. 하지만 규원은 희선의 시선따위 아랑곳 않은 채,
"오늘 남아서 조별 숙제 하는 거 알지?"
이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유유히 희선을 스쳐 교실문을 나선다.
"숙제.. 있었어?"
그제야 희선의 목소리가 한풀 꺾인다.
"어.."
"진작 말을 하지.."
희선은 힘겹게 분을 삭힌다.
"알겠어. 할 수 없지.. 그리구 이거.."
희선이 무언가를 슥 내민다.
"뭐야?"
"반지.."
"응?"
"몰랐지? 오늘 우리 만난 지 100일 된거.."
"아.."
"그냥.. 기념으로 샀어."
희선이 쓸쓸히 돌아선다. 그런 희선의 뒷모습에 영주의 마음도 싸하게 아파온다. 희선은 진심으로 영주에게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은 희선을 거짓으로 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소독약이 따가울까봐 상처를 방치하면 곪고 곪아서 더 큰 상처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주는 선물을 들고 터벅터벅 자리로 돌아온다. 마음이 철근을 심은 듯 무겁다.
"걔 갔어?"
어느 새 돌아온 규원이 옆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어.."
"너, 뭐하는 거냐?"
규원의 말투에 차가운 기운이 서려있다.
"응?"
영주는 당황한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영주의 눈동자는 어린시절의 여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쟤랑 뭐하는 거냐구."
영주는 말을 잃는다.
"쟤는 너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넌 아니지?"
"아니.. 난.."
"그런데.. 왜 그러는건데? 왜 괜히 애꿎은 사람마음 설레게 만드는 거냐구."
영주는 시선을 떨구고 만다.
"왜.. 나 어렸을 때, 그랬었잖아.. 너처럼.. 머리도 짧게 자르구.."
"응.."
영주의 뺨이 붉어진다.
"내가 왜 그랬었는지 아니?"
"왜 그랬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용한 점쟁이가 그랬데..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남자처럼 키워야 죽지 않는다고.. 그래서 엄마가 죽자고 나를 남자처럼 키웠지."
"그랬었구나.."
"힘들었어.. 어린 나이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끔은 죽고 싶을만큼..."
영주는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의 눈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다.
"그래서.. 중학교때부터 괜찮아진거야?"
"응.. 그때서야 비로서 내 정체성을 발견한거지. 머리도 기르고.. 날 괴물보듯 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드디어 내 삶을 찾은 느낌.. 아니?"
"그랬구나.."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너두 니 정체성을 찾으라구.. 계속 그러다.. 잘못하면 죽도록 힘들어질지도 모르니까."
영주는 규원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그런 감정.. 왠지 알 것 같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할 고민이었지만.. 영주도 그랬었다.
여느 여중, 여고생들처럼.. 소소한 수다를 알콩달콩 떨어보고도 싶었고.. 좋아하는 남자이야기에 설레는 마음을 서로 부채질하는 여우들의 무리속에 자연스레 끼어보고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은 결코 영주를 흡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영주에게 보이지 않는 담을 쌓아놓았고 영주는 늘 그 주위를 겉돌 수 밖에 없었다. 가끔.. 아니 늘.. 영주는 혼자였다. 수많은 여자애들이 영주의 주위를 에워쌌지만, 그것은 격리였다. 언제부턴가 영주는 자기안의 독방에 갇혀 버렸다.
'나의 정체성..'
영주는 그렇게 멍하니 넋을 놓아버린다.
다음 쉬는시간..
[공터로 나와]
희선의 문자다. 영주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공터엔 희선이 팔짱을 끼고 독기어린 얼굴로 서 있다. 영주가 희선의 앞에 멈춰선다.
"나, 아무래도 기분나뻐.."
"희선아.."
"나는 선물도 사고.. 계획도 다 세웠는데.."
"미안해.."
"말해봐! 넌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지? 신경도 안썼지? 응? 응?"
영주는 입을 다문다.
"씨.. 짜증나. 너 뭐야.. 나 갖고 노니? 응? 말해! 말해!"
영주는 안타까운 눈으로 희선을 바라본다.
"죽어버릴거야.. 나 죽어버릴거라구!"
희선은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희선아!"
영주는 희선의 어깨를 가만히 감싼다.
"놔!"
희선은 영주를 뿌리치며 도망치듯 뛰어가버린다. 영주는 홀로 공터에 남겨졌다. 공허함과 쓸쓸함이 미친듯 밀려온다. 그리고 가슴으로 규원을 애타게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
교실로 돌아온 영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규원은 그런 영주를 흘긋 보더니 독서에 열중한다.
"규원아.."
한동안 묵묵히 말이 없던 영주가 규원을 부른다.
"어.."
규원이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니가.. 도와줄래?"
순간 규원의 눈이 영주를 쏘듯이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동자엔 어렴풋한 서러움이 깃들여 있는 것도 같다.
"그래.."
마침내 규원이 답한다.
방과후,
"나가자."
규원이 영주를 잡아끈다.
"자, 팔짱껴."
건물을 나서던 규원이 영주에게 팔한짝을 쭉 내민다.
"응?"
"행동부터 바꿔야지. 이건 기본행동준칙이야."
영주가 어색하게 규원의 팔짱을 낀다. 여자애에게 팔짱이라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것이 어딜가나 눈에 띠는 두 인물이 의외의 만남을 가진것이다.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신경쓰지마. 사람들은 참 간사해서 어떤 변화든 금방 익숙해져 버리거든."
영주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규원이 영주가 낀 팔에 힘을 꼭 주며 말한다.
"여자들의 소소한 장난에 한번 맛들이면 다시 빠져나가기 힘들걸?"
규원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교문에 당도한 지점..그 곳에서 희선이 보인다. 희선이 친구와 교문을 나서다 힐긋 이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영주의 몸이 잔뜩 긴장한다. 규원도 영주의 긴장감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희선을 주시한다. 헌데.. 신기하게도 희선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교문을 나서는 것 아닌가? 게다가 희선의 얼굴에서 수줍은 미소마저 느꼈던 건 영주만의 착각일까?
"야."
규원이 속삭이듯 영주를 부른다.
"어..어."
영주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걸음을 옮긴다. 영주의 팔을 감싼 규원의 체온이 새삼 느껴진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심장이 뛰는걸까? 영주는 왠지 모를 이 떨림을 훅하는 한숨과 함께 뱉어낸다.
"오늘은 내가 기념으로다가 저녁쏜다."
규원이 웃으며 영주를 끌어당긴다. 영주는 어느새 희선을 까맣게 잊고 규원의 이끌림을 기분좋게 따른다. 규원과 함께 있으면 영주는 어쩐지 어릴 적 수줍은 소녀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규원은 그리 고급스럽진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사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하하하"
맛있는 저녁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여자친구와 이렇게 소소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언제였던가?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실한 모습으로 누군가와 함께 해 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레스토랑을 나온 규원은 영주에게 팔 한쪽을 내민다. 영주는 웃으며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규원의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긴다.
"잠깐 너 앞으로 좀 걸어가봐!"
갑자기 규원이 영주를 앞으로 밀어낸다.
"왜?"
"글쎄."
영주는 좀 무안한 표정으로 희선을 앞질러 걷기 시작한다.
"이것봐, 이것봐."
규원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도리도리흔들고 있다.
"왜 그러냐?"
"너 걸음걸이가 완전 남자야 남자! 터벅터벅 그게 뭐야. 나보고 배워라."
규원이 보란 듯 멋진 워킹을 선보인다. 완벽한 몸매가 연출하는 환상적 워킹.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규원이다.
"이야! 너 장난아니다. 남자들이 뿅가겠는데?"
"잔말말고 따라나 하셔!"
규원은 영주의 걸음걸이를 보며 이것저것 지적하기 시작한다.
"허리 펴고. 고개좀 들어..다리 모으고. 11자로 걸어라니까."
영주는 규원의 충고에 따라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영주는 꽤 진지한 표정이다. 하지만 어색하게 엉덩이를 샐룩거리는 영주의 자태는 무언가 기괴한 느낌이다.
"풋!"
영주를 바라보던 규원이 웃음을 터트린다. 영주가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이 배를 잡고 웃고 있다.
"뭐야!"
무안함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영주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하하하.."
서늘한 바람이 영주의 갈색머리칼을 스친다. 규원의 옷깃을 스친다. 웃음소리가 스쳐지나간다. 가슴속이 시원하다. 뻥 뚫린 듯 개운하다.
4. 나의 데미안
그 날 이후 영주의 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갔다. 귀를 살짝 덮던 머리가 목을 덮고 어깨선에 닿을 무렵까지 영주의 옆엔 늘 규원이 있었다.
"야, 오늘 쇼핑이나 하러갈까?"
영주가 규원을 꼬드긴다.
"또? 저번주에 원피스 샀잖아."
"예쁜거 봐뒀단 말이야."
"못말리겠군.."
잘 다듬어진 눈썹, 붉은 립글로스를 탐스럽게 바른 입술..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 이 인물이 진정 영주란 말인가? 몇 달 전 사내같던 영주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진 듯 하다. 규원에게서 한달간 특훈을 거친 후 손짓과 말투 대화의 화제마저도 80%여성화 된 영주. 아직은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아 언뜻언뜻 사내의 기질이 엿보일 때도 있지만 예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참으로 괄목상대한 변화이다.
물론 영주의 변화는 몇몇 여학우들을 침울하게 만든 계기도 했지만 역시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영주의 눈빛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던 여자애들이었건만 어느새 영주에게 생리대를 빌리러 오거나 찜질방에 가자고 조르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변화가 영주는 행복하기만 하다. 여자애들의 세계에 입성한 느낌. 어딘가 소속되어 있다는 이 편안함. 영주는 여자의 세계에 무섭게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근데.. 나 궁금한게 있어."
영주가 은근한 말투로 규원에게 묻는다.
"뭔데?"
"우리 짝 바꿀때 말이야.."
"어.."
"너 사실 내 짝 아니었지?"
영주의 물음에 규원은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이다.
"말해봐! 나 항상 그게 궁금했다구."
"너 데미안 읽어봤어?"
"데미안?"
"읽어봐.. 답은 거기 있으니까."
규원은 가끔 이렇게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곤 한다. 이럴때면 왠지모를 거리감이 느껴지는 영주.. 아무리 친해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무언가 자신만의 비밀창고를 간직한 듯한 규원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섭섭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언젠가 어떤 생각에 깊고 깊게 빠져있는 규원의 눈빛을 본 적이 있다. 그 순간 영주는 왠지 모를 슬픔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규원의 그 생각을 공유하고 싶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무작정 규원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싶었다.
그 날 영주는 서점에 들러 데미안을 한 권 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렵고 복잡한 말들만 가득한 것 같았다. 마치 규원의 정신세계를 언뜻 엿보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자리를 바꾸어 결국 짝이 되는 대목만은 영주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함께 하고 싶은 의지.. 규원과 자신의 의지가 인력처럼 서로를 끌어 당겼던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크로머이야기에 영주는 잠시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주었던 데미안..
크로머이야기에 무섭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희선이.
그 날 100일 사건 이후 희선은 단 한번도 영주를 찾지 않았던 것이다. 영주는 그것을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희선은 결코 그런 일 하나로 영주를 포기할 아이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영주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아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희선은 더 이상 영주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며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못 본 척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건 영주에게 있어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그건 누군가의 도움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누군가.. 영주의 데미안..
어느 새 겨울이 다가왔다. 오늘따라 쌀쌀한 공기가 교실을 휙휙 휘젓는다.
쉬는시간.. 졸음에 겨운 아이들은 목도리를 둘둘 감고, 카라를 목까지 여미고는 책상에 엎드리기 시작한다. 졸음 대장 영주도 예외없이 책상으로 고꾸라진다.
"추워.."
영주가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옆자리의 규원도 책상으로 엎드린다.
"춥다."
곧 그녀의 팔이 영주의 팔짱을 꼭 끼며 영주에게 바짝 붙는다. 영주의 팔 가득 규원의 온기가 느껴진다. 익숙한 그녀의 향기.. 샴푸냄새.. 그리고 그녀만의 온도에 영주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한다.
늘 영주의 곁에 있는 규원이지만 이 아이에겐 뭔가 묘한 느낌이 있다.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그녀의 분위기.. 말투.. 그리고 가끔씩 미치도록 슬퍼보이는 눈빛.. 영주는 때때로 규원에게 이런 설렘을 느낀다.
'나의 데미안."
영주는 그녀를 데미안이라고 부른다. 규원에게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늘 영주의 마음속에 데미안으로 각인되어 있다. 규원에게 있어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영주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혼란을 주는 이 아이.. 영주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나 전화번호 바꿨어."
"또?"
규원은 벌써 세번째 전화번호를 바꾸고 있다. 사실 규원은 굉장히 인기가 많다. 규원이 그런 쪽으로는 입밖에 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영주는 그런 사실도 까맣게 몰랐더랬다. 왜 이렇게 자주 전화번호를 바꾸는 지는 두번째 전화번호를 바꿀 무렵 알게 되었다. 그것도 다른 친구들의 말을 통해 듣게 되었다. 주변의 남학생들 중 규원을 사모하는 무리들이 만나자고, 좋아한다고 그렇게 문자와 전화를 쏟아붓는 모양이었다. 영주는 그것이 속상했다. 왜 그런말을 직접 듣지 못했는지. 영주와 규원의 사이에 무언가 벽이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나 친구 아니야?"
드디어 영주가 규원에게 섭섭한 마음을 비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규원이 뜬금 없다는 듯 묻는다.
"넌 왜 그렇게 숨기는게 많은 거야?'
"뭘 숨겼는데?"
"보통 친구들은 안 그래. 남자문제가 있으면 서로 상의도 하고 그러지."
"아.. 남자문제?"
규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며
"나 그런 거 없는데?"
하고 말한다.
"다 들었어. 너 주변에 그렇게 남자가 많다면서."
영주의 섭섭한 마음이 한층 고조된다.
"어. 남자는 많아. 그런데 남자문제는 없다고.."
"폰 번호를 바꿀 정도면서.."
"귀찮으니까 그렇지. 받기 싫은데 자꾸 보내니까 귀찮아서 바꾼건데 뭐."
규원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설명한다.
"그래도 섭섭해. 그런 말이라도 좀 해 주면 안되는거니?"
"훗!"
순간 규원이 웃는다.
"뭐야! 지금 이게 웃겨?"
영주가 속이 상해서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진다.
"너.. 지금 진짜 기집애같은거 알어?"
규원의 말에 영주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절대로 이런 영주가 아니었다. 사소한 것을 이런식으로 따지고 드는 행위는 지금껏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냐?"
영주는 고개를 홱 돌리며 황급히 교실을 나선다.
혼란스럽다.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규원에게 집착하고 있는 걸까? 지금껏 늘 집착의 대상이 되어왔던 영주다. 헌데 지금 이렇게 역전되어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집착이란..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인 듯 하다. 저 밑바닥까지 참담해지는 느낌.
방과 후, 영주는 규원에게 인사도 않고 교실을 빠져나간다. 규원이 얄밉다.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장난스레 넘겨버리는 그 아이의 태도가 무척이나 화가난다.
"야."
순간 부드러운 손이 영주의 어깨를 감싼다. 고개를 돌리자 규원이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거 놔."
영주는 다시 정면을 향하며 차갑게 말한다.
"못놔."
영주를 감싼 규원의 팔에 더욱 힘이 가해진다.
"놔라구."
영주가 팔을 비튼다.
"미안해."
규원이 영주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조용히 잦아드는 규원의 목소리는 영주의 잔뜩 상한 감정을 마비시킬 만큼 아득하고 진실하게 들려온다. 영주는 다시 규원을 바라본다.
"그냥.. 니가 신경 쓸게 아니라서 말 안한건데.. 니가 속상했다면.. 이제 다 말할게."
"다 말해."
영주가 코맹맹이 소리로 쐐기를 박듯 말한다.
"그래 이제 내 전화랑 문자 니가 다 받어."
규원이 웃으며 자신의 폰을 영주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뭐야! 지금 매니저로 부리겠다는 거야?"
"하하하."
영주의 말에 규원이 웃는다. 영주도 규원을 따라 웃는다. 어느새 답답하던 감정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버렸다. 역시 규원을 미워하는 건 무리인 듯 하다.
오늘도 늘 그렇듯, 영주는 규원의 팔짱을 끼고 교문을 나서는 중이다.
"야 사투리 좀 써봐."
뜬금없이 규원이 영주에게 떼를 쓰듯 말한다.
"뭔 사투리!"
"너 어렸을 때 잘 썼잖아."
규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말한다.
"참나, 그게 언젯 적 이야긴데."
영주는 코웃음을 친다.
"그 때 너 진짜 귀여웠는데."
"정말?"
"장난아니었지."
"맞나. 진짜가!"
규원의 말에 영주가 은근슬쩍 사투리를 섞는다.
"아! 너 방금 사투리로 말한거지!"
"맞다! 지금도 귀엽나?"
"야, 고만해라. 이제 징그럽다 야!"
규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강력하게 저지한다.
"머라하노 이제부터 사투리만 쓸끼다. 두고봐라."
영주가 질 수 없다는 듯 반기를 든다.
"하하하."
규원은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영주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다.
"규원아."
그 순간 어떤 굵은 목소리가 규원을 부른다. 그 목소리에 영주와 규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20미터쯤 뒤에 한 남자애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 남자는 규원이 돌아서자 재빠르게 규원의 옆으로 달려와 봉투하나를 내민다.
"뭐야?"
"읽어봐."
영주가 그 남자를 찬찬히 살펴본다. 훤칠한 키에 약간 마른 몸매. 그리고 구리빛 피부에 건강해 보이는 표정을 한 것이 무척 매력적으로 보인다.
"뭔데."
"어.. 그냥.. 적어본건데."
남자가 안어울리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규원은 봉투를 받아든다.
"아 그리구 이것두."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내민다.
"뭐야."
규원이 감정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어.. 선물."
"이건 됐구. 이건 읽어볼게. 잘가라."
규원은 봉투하나만 받아들고 미련없이 돌아서 걷는다. 영주가 흘끔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여전히 싱글거리고 서 있다. 봉투를 받아 준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누구니?"
영주가 조용히 묻는다.
"아.. 등굣길에 몇번 말을 걸더니 또 찾아오고 이러네?"
"잘 생겼던데.."
영주의 중얼거림에 규원이 놀란 듯 영주를 쳐다본다.
"그래?"
"저 정도면 잘생긴 거 아냐?"
영주가 되묻는다.
"글쎄.."
규원이 말끝을 흐린다. 왠지 기분이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다.
"야.. 편지 좀 보자!"
영주가 더 호들갑을 떤다.
"뭘 봐. 버릴건데."
"버릴 걸 왜 받냐?"
영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묻는다.
"안 받으면 끝까지 따라와서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
규원은 날카롭게 받아치며 편지를 찢어버린다.
"야.. 너 왜그래.."
영주가 놀란 듯 조심스레 묻는다.
"아냐.. 놀러가자."
규원은 정면을 보며 걸음을 빨리한다. 얼굴이 좀 붉어진 건가? 영주는 규원의 눈치를 살피며 규원의 팔을 꼭 붙든다. 근데 이건 무슨 기분일까? 남자에게 매몰찬 규원의 모습이 왜 이렇게도 안심이 되는걸까? 영주는 묘한 승리감을 느끼며 규원의 빠른걸음을 열심히 따르기 시작한다.
5. 비극
"야, 100원씩 내놔봐라."
영주반의 대표 깜찍이 보경이 모금함을 들고 교실을 한창 순회중이다.
"뭐야, 벌써 100일 된거야? 아직 안깨졌나보네?"
"무슨 소리야! 우린 결혼할 거라구!"
"역시 깜찍한 애들은 남자도 잘사귀는군.."
영주는 약간 부러움이 섞인 말투로 중얼거린다.
"부러워?"
규원이 그런 영주를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 묻는다.
"부럽지! 난 아직 남자랑 손도 못잡아봤는데."
규원은 말없이 책을 꺼내든다.
"야. 너는?"
영주가 궁금하다는 듯 규원에게 묻는다.
"뭐가."
"넌 남자 사겨봤어?"
"어."
규원이 덤덤하게 대답한다.
"진짜루?"
영주가 깜짝 놀란듯 묻는다.
"어 한번."
"언제? 어땠어?"
"중학교때 잠깐. 그냥 그랬어."
규원의 대답은 서운할 정도로 간략간략 단답형이다.
"참.. 넌 아는 남자 많지."
영주의 서운한 말투에 규원이 영주를 바라본다.
"치.. 나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은 없냐?"
영주가 칭얼거리듯 말하더니 부끄럽다는 듯 엎드려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규원은 다시 독서를 시작한다. 늘 어느 순간 자기안에 빠져들고 마는 규원.. 가끔은 그런 규원의 속이 참으로 궁금하다.
다음 날.
"소개팅 해 볼래?"
규원에 영주에게 가볍게 묻는다. 두근! 아직 남자를 만나본 적 없는 영주는 심장이 콩닥대기 시작한다.
"에이~ 너 어제 내말이 신경쓰여서 그러는거야?"
영주가 흥분을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묻는다.
"할거냐, 말거냐?"
규원이 다시한번 묻는다. 괜히 튕기다가는 기회가 날아가 버릴것만 같다.
"어떤..앤데?"
결국 영주는 들뜬 목소리로 질문을 한다.
"어.. 그냥 아는 애. 해 볼래?"
"어.. 모르겠어.."
하지만 영주의 표정은 이미 흥분으로 휩싸여버렸다. 그런 영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규원은 영주의 폰에 번호하나를 찍어둔다.
"이재원이라구.. 내가 아는 애 친군데.. 꽤 괜찮아. 연락하라고 할테니까 알아서 만나라."
영주는 빨개진 두 볼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여보인다. 남자라..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새로 산 빨간색 니트와 브라운 컬러의 스커트에 감색 부츠를 신고는, 밤색 목도리를 두르고 몸에 피트되는 까만 코트를 걸쳐본다.
"어때 괜찮아?"
영주는 규원이 앞에서 패션쇼를 펼쳐보인다.
"어.. 잘 어울리네.."
영주는 왠지 침울해보이는 규원의 눈빛에도 아랑곳않고 이것저것 다른 아이템을 끝없이 펼쳐보이는 중이다. 재원이라는 아이에게 내일 저녁에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남자의 연락이라니.. 영주는 벌써부터 콩닥되는 심장과 함께 잔뜩 흥분되어 있다.
"그래.. 이걸 입고 가겠어!"
영주는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쁘다.. 그나저나 옛날 한영주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규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듯한 조용한 말투로 영주에게 말한다.
"아.. 나 너무 떨리는 거 있지!"
"어쨌든 잘 되길 빌게."
다음날, 약속시간을 앞두고 영주는 규원과 네일손질을 받고 있다. 핑크빛으로 장식된 영주의 손톱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곧 약속시간.. 영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으악! 늦겠다. 빨리 뛰어가야겠어."
"뭐야? 아직 30분이나 남았잖아."
규원이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래두.. 처음 만나는데 늦으면 기분나빠하지 않을까?"
"바보."
"뭐라구?"
"무조건 10분 늦게가."
규원이 단호하게 말한다.
"10분?"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남자는 항상 조바심나게 만들어야 하는거야. 뭘 그렇게 미리 서두르고 그래?"
"그런건가?"
영주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오늘의 소개팅 장소는 분위기 있는 커피숍이다. 영주는 규원의 조언대로 정확시 10분 늦게 도착했다. 두근두근.. 영주의 심장은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뛰고 있다.
"여기.."
누군가 손을 흔든다. 한 눈에 들어오는 미소년.. 꽃미남이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어울릴 얼굴이다. 빛나는 피부에 부드러운 머릿결.. 선해보이는 눈매.. 영주가 꿈꿔오던 바로 그 이상형이 아닌가! 영주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안녕?"
미소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첫인사를 건낸다.
"어.. 안녕."
영주도 인사에 답을 한다. 목소리떨림을 자동제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규원이 한테 얘기 들었어. 둘이 둘도 없는 친구라며?"
"어..응."
규원은 어쩜 이런 사람도 다 알고 있을까? 이 순간 규원의 친구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너.. 눈이 참 예쁘구나."
미소년이 영주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하..하하.. 고마워."
영주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고 웃는다.
그렇게 시간은 어떻게 지나간 것인지 모를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재원이는 영주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재밌었어. 다음에 또 보자."
재원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영주에게 말한다.
"어.. 응."
영주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그 날 밤 영주는 재원이의 생각에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규원아!"
영주는 교실문을 들어서자 마자 규원을 꼭 붙든다.
"어.. 왜?"
규원이 무심히 답한다
"야! 나 어제 소개팅 했잖아!"
영주는 규원의 반응에 실망스럽다는 듯 툴툴거린다.
"어.. 어땠어?"
규원의 물음에 영주의 표정은 금새 화색이 돈다.
"고마워 규원아.."
영주는 규원을 꼭 껴안는다.
"괜찮았나 보네?"
"딱 내 이상형!"
"그래? 잘해봐라.."
"고마워.. 넌 어쩜 그런 애도 다 아니? 신기하다 야."
하지만 규원은 왠지모를 어색한 미소만 지어보인다.
"이상해.."
얼마 후 영주가 울상인 표정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왜?"
"재원이 한테 연락이 안와..분명 또 보자고 그랬는데.."
"오겠지.."
"헤어진 이후 한번도 안왔어."
영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그래?"
"아깐 자존심도 접고 내가 문자도 넣었는데 답도 없구.."
"올거야.. 바쁜가보다.."
"그런걸까?"
"당연하지."
규원이 영주를 안심시킨다.
"하긴.. 걔가 내 눈보고 예쁘다 그랬는데.흐흐."
"그랬어?"
"응!"
영주가 아이처럼 웃는다.
"그래. 일단 기다려봐."
"알았어."
영주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먼저 문자넣고 그런짓 하지마."
"왜?"
"내가 그랬지! 남자는 항상 조바심나게 만들어야 한다구. 절대 니 맘을 보여주지 말란 말야."
영주는 기대와 조바심이 범벅된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은 간만에 따스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규원아! 이것봐!"
얼마 후 영주가 부산스레 규원을 부른다.
"뭐?"
"니 말이 맞았어. 선생님한테 잠시 폰을 뺏꼈었다나봐.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구 그러더라.히히.."
"거봐 내가 뭐랬어."
규원이 미소를 지어보인다.
"내일 또 보재.. 내일은 또 뭘 입지?"
영주는 재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터질듯한 환호를 지른다.
산뜻한 하늘빛 코트를 입은 영주는 눈처럼 흰 벙어리 장갑을 끼고 룰루랄라 약속장소로 향하는 중이다. 오늘은 영화을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남자와 함께 보는 영화가 될 것이다.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극장 앞..영주는 약속장소에 10분이나 일찍 오고 말았다.
'이런.. 여자가 이렇게 일찍 오면 안되는데..'
영주는 희선의 조언을 떠올리며 재원이가 올 때까지 잠시 몸을 숨기기로 결심한다. 나중에 재원이가 오면 그제서야 도착했다는 듯 연기를 펼칠 작정이다.
'호..호..'
날씨가 꽤 쌀쌀하다. 하지만 영주는 설레는 가슴때문인지 추위도 잊은 채 재원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저기서 재원이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 멋지다. 영주의 온 몸이 뿌듯함으로 가득차는 느낌이다. 영주는 도착한 재원이의 뒷통수를 보며 시간을 재기 시작한다. 딱 5분만 있다 나타날 작정이다. 그런데 재원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영주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분명하렷다.
'뭐라고 대답하지?'
영주는 가벼운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어..규원아. 나.."
어라? 규원이라니..영주는 귀를 기울인다.
"어.. 아직 안왔어."
영주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뭐야.. 나 언제까지 만나야 하냐구. 재미도 없는데.."
영주의 눈빛이 촛점을 잃고 만다.
"소개팅하면 이 영화 같이 봐주기로 해놓구 치사하게 이런게 어딨냐? 이 영화는 꼭 너랑 보고 싶었는데.."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됐어. 더 이상은 안돼! 그래도 내가 너니까 이 정도 한거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뭐? 으이구, 내가 졌다 그래. 참으로 대단한 우정이셔!"
영주는 그대로 돌아서 버린다.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를 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가 싶더니 또 금새 뒤죽박죽 엉켜버린다.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 사악한 장난질을..
'규원이가.. 어떻게 규원이가 나에게..'
영주는 떨리는 손으로 규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규원."
"어.. 영주야. 데이트는 잘 하고 있어?"
파렴치하고 가식적인 물음이다. 나쁜년.. 영주의 감정이 성난 폭풍처럼 고개를 쳐든다.
"지금 어디니? 나 좀 볼래?"
어둑한 골목에서 영주와 규원이 만났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내가 그렇게 우스워?"
"니가 원했잖아."
규원의 눈빛도 번득인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그래서 사람을 매수해?"
"니가 상처받을까봐.."
"그딴 변명하지마! 나쁜년.. 너같은 걸 친구라고 붙어다닌 내가 등신이지! 내 뒤에서 둘이 얼마나 웃었겠어 그래!"
영주는 규원의 말을 자르며 꽥 소리를 질렀다. 그 날 밤 영주는 규원의 사악한 장난만큼 진저리나는 증오의 말들을 한 없이 퍼부어 주었다.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더 이상은 규원의 얼굴도.. 목소리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그 날 이후.. 영주는 규원과는 단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규원은 그런 영주의 방어벽 넘어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어린 시절 철저히 외면당하던 그 때의 규원이처럼.. 규원은 한없는 외로움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쓸쓸함을 홀로 삭혔다. 영주는 그런 규원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규원을 받아들이기엔 영주의 자존심이라는 상처가 너무나도 아프고 쓰라렸다.
12월.. 선화여고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많은 남학생들이 여고의 문을 마음껏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전교생들은 아침부터 손님들을 맞을 준비에 한창 분주하다. 몇 주간 준비했던 전시물들과 갖은 기량들을 뽐내기 위해 하나같이 꽃단장중이다.
"축제가 시작되었구나."
영주가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그나저나 넌 규원이랑 끝까지 말안해?"
지윤이 답답한 표정으로 묻는다.
"걔 이야긴 꺼내지 말랬지?"
영주가 싸늘히 대답한다.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사이라니까!"
지윤이 입을 삐쭉 내밀다가 차가운 영주의 시선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 짧게 쳐버린 컷트머리.. 사내같은 말투.. 영주는 다시 예전의 영주로 완벽히 돌아간 모습이다.
"야.. 무대로 집합! 댄스배틀 시작됐다!"
축제는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드디어 선화여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댄스배틀타임이 되었다. 각 고등학교의 내놓라는 대표주자들만이 도전한다는 댄스배틀은 각 학교의 자존심이 걸린 축제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자,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댄스배틀타임이 돌아왔습니다!"
선화여고의 명물인 회장언니의 개회사와 함께 댄스배틀이 시작되었다. 과연 댄스의 신이라고 불리는 대표주자들은 엄청난 기량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남성 5인조의 현란한 B-boy들, 가창력까지 갖춘 혼성 3인조 그룹.. 감탄사와 함성이 한시도 떠날 줄을 모를 지경이다.
영주도 자리를 잡고 앉아 열심히 댄스배틀을 관람중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멀찍이 홀로 앉은 규원의 모습이 영주의 눈에 들어왔다. 영주는 애써 규원을 외면하며 댄스에 집중한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선화여고의 댄스팀이 등장했다. 여성 4인조 그룹.. 현란한 브리트니의 노래가 터져나오고 이 여성4인조의 춤사위가 시작된다.
헌데.. 갑자기 관중의 함성이 급격히 사그라들고 만다. 곳곳에서 키드키득 비웃는 소리만이 터져나올 뿐이다. 연습은 한건지.. 몸치들의 향연인지.. 선화여고생들은 민망한 얼굴을 둘 곳이 없어 난감할 따름이다. 브리트니의 overprotected만이 쩌렁쩌렁 울릴 뿐 어느 누구하나 이 음악에 자연스레 몸을 싣는 무희가 없다. 급기야 선화여고생들의 항의로 음악이 꺼지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켠다.
"아.. 선화여고 명물들이 어디로 다 숨어버린거죠? 자, 우리 선화여고의 진정한 열정을 보여 주실 분! 지금 빨리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선화여고생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적합한 인물을 발굴해내기에 혈안이 되기 시작한다.
"이규원! 이규원!"
갑자기 어떤 남학생이 이규원을 목청껏 외치고 있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된다.
"선화여고의 이규원 춤을 보고 싶습니다! 엄청납니다!"
관중들은 잠시 술렁이는가 싶더니,
"이규원! 이규원!"
을 합창하기 시작한다. 영주는 의외의 상황에 눈이 동그래져 규원이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규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그 자태, 그 표정 그대로 동요하지도 않는다. 다른 규원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지만 어느 순간 모두의 이목은 규원에게 집중되어버린다. 순간 규원이 고개를 돌려 영주의 눈을 응시한다. 영주는 흠짓 규원의 시선을 피하고 만다. 그리고 영주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규원은 이미 천천히 무대를 오르고 있었다.
"자! 이규원씨? 우리 선화여고의 진정한 열정을 보여줍시다!"
관중들은 무서울 정도로 숨을 죽이고.. 어둠속에서 조명이 켜졌다. 곧 폭풍같은 음악이 울려퍼지는가 싶더니 규원의 몸이 그 폭풍속에 몸을 맡긴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 갸냘픈 몸에서 결코 구현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태풍처럼 터져나오는 몸의 음성.. 보는 것만으로 오감이 쓰라리듯 진동하는 느낌.. 미칠듯이 섹시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어떤 남성댄서들 보다도 강렬한.. 그녀는 오선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선율하나하나를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남학생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유연한 허리와 냉소어린 눈빛.. 남학생 뿐 아닌 모든 관중들은 함성을 지를 기력조차 잃은 채 그녀의 춤사위에 완전히 넋을 잃어버린다.
영주조차도 할 말을 잃은 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규원의 낯선 모습에 완벽히 매료되어버렸다. 그리고 노래의 클라이막스.. 마지막 남은 혼을 불사르는 듯 무한대의 춤사위를 펼쳐보이던 규원의 눈이 어딘가 온전히 고정되어버린다. 규원의 눈은.. 영주에게 집중되어있다.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영주를 흘끔거릴 정도로 규원은 마치 영주만을 위해 춤을 추 듯 마지막 열정을 그렇게 노래에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영주는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하니 규원을 바라보다 음악이 끝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규원은 곧 무대를 나서고.. 그제서야 관람객들은 최면에서 풀린 듯 미친 듯 함성과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규원. 이규원!"
관중의 반 이상이 기립을 하고 이규원을 외친다. 하지만 규원은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규원아.."
영주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규원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둠이 깔린 운동장.. 저 멀리서 그림자처럼 규원의 실루엣이 보인다.
"규원아!"
영주가 규원을 부른다. 규원이 뒤를 돌아본 것같다. 영주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규원을 향해 달린다. 그녀의 눈빛과 몸짓은 영주에 대한 진심을 슬프도록 절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진심이 절절히 영주의 가슴에 전달 된 느낌이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후회와 미안한 감정이 영주의 가슴속에서 터져나올듯 휘몰아쳤다. 빨리 규원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다 나의 잘못이라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아지경 속에서 달리던 영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규원의 실루엣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영주를 기다리지 않았다. 영주의 단추를 채워주지도 않았고 따스한 눈빛도 보내주지 않은 채 싸늘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게 규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규원은 그 후로 다시는..학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규원에 대한 사람들의 추측과 소문들... 중학교때부터 무용을 전공했다. 거의 국가대표급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무용에서 손을 땠다.. 규원에 관한 소문만이 그렇게 무성했을 뿐, 그 이후 규원을 본 사람은 없었다.
선화여고의 전설... 규원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영주는 과거의 파란만장했던 추억을 그렇게 더듬으며 설명하기 힘든 아련한 감정에 빠져들고 만다.
"영주야, 너 갑자기 왜 그래?"
남자친구는 영주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며 씰룩씰룩 푸념을 한다.
"아니야! 갑자기 나도 모르게 옛날생각이 나서.."
영주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남자친구를 톡톡 어르기 시작한다.
"뭐야.. 남자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영주는 눈동자를 굴리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뭐야? 너 죽는다!"
남자친구는 영주의 머리에 꿀밤을 놓는다.
"아얏! 농담이야!"
영주가 큭큭거리며 웃는다.
"에잇! 이리와~ 다른남자 생각은 못하게 만들어 주겠어!"
남자친구는 영주의 얼굴을 감싸며 키스를 하려는 시늉을 한다.
"야, 왜이래! 사람들 봐!"
영주는 빨개진 얼굴로 남자친구를 밀어낸다.
길 저편, 영주커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여자가 서 있다. 한 순간 시간을 확인한 여자는 화들짝 놀란 듯 또각또각 가던 길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까페..
"미안!"
까페의 문이 벌컥 열리며 아까 그 여자가 뛰어들어온다. 까만 미니스커트에 쇼트한 블루자켓을 걸친..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 바로 민희선이다.
"니가 늘 그렇지 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희선을 바라보는 규원..
"그런데, 우리 자기야 표정이 왜 이렇게 안좋아? 무슨 일 있었니?"
"어.."
"뭐야! 뭔데!"
"우연히 보고 말았어.. 영주.."
희선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진다.
"어머, 너두 봤냐? 나 방금 봤잖아. 뭐니? 걔.. 길거리에서 애정행각 장난 아니더라?"
규원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다. 희선은 그제야 규원의 굳은 표정을 깨달았는지,
"설마.. 나보다 걔가 더 좋았던 건 아니지? 응? 응?"
하며 규원의 대답을 재촉한다. 규원은 머그컵을 들어 따끈한 핫쵸코를 한모금 마신다.
"왜.. 그 때 공터에서.. 니가 영주만 놔 주면 죽도록 사랑해준다구 했잖아! 그 때 너한테 반해버리긴 했지만, 큭.."
규원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머그컵을 내려놓는다.
"근데 난 아직 그게 맘에 걸려! 아무래도 넌 영주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희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더니, 곧 사랑이 가득담긴 눈빛으로 턱을 괴고는 규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넌, 어쩜 이렇게 잘생겼니? 큭!"
누가봐도 여자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외모의 규원.. 규원은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본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저 많은 사람들 중 어딘가 영주도 있을 것이다..
<규원이 이야기>
나는.. 내가 싫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를 증오했다.
나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어린시절.. 엄마가 사주는 수십벌의 치마를 칼로 찢어발겼다. 엄마도 나를 포기했고.. 나는 홀로 남자로 자랐다.
그리고.. 나는 한 꼬마를 사랑했다. 꿈같은 나의 첫사랑...
늘 말이 없던 그 꼬마를 위해 내가 가장 처음 준비한 것은 딸기 캐러멜이었다. 내가 캐러멜을 내밀자 얼굴이 새빨개진 꼬마는, '아이다.' 라며 작은 손을 내저었다.
'아이다? 아니다면 아니다지 아이다가 뭐냐? 하하하...'
특유의 사투리와 귀여운 억양으로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들었던 그 꼬마... 꼬마는 캐러멜로 불룩해진 볼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꼬마의 푸른 눈동자.. 나를 올려다보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언제나 내 가슴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곤 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 꼬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꼬마도 결국 나를 떠났다. 내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 나를 버렸다. 꼬마의 푸른 눈동자가 싸늘히 나를 피할 때마다 나는 꺼질듯한 상실감에 몸을 떨었따.
어린시절의 사랑이 우습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 아픔이 죽음까지 갈거라고 생각할 만큼 괴로웠다. 죽도록 원망했지만 절대로 미워할 수 없었던 나의 첫사랑..
중학생이 되던 해, 나는 무용의 길에 입문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했던 무용실.. 그것만으로도 난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함께 뛰어다닐 수 있는 그 순간을 나는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두번째 사랑을 만났다. 새하얀 피부에 첫사랑을 닮은 아이였다. 참으로 여린 그 아이.. 그 아이는 나를 볼 때면 늘 아기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에 매혹된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아이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어느 저녁, 단 둘만 남은 무용실에서 나는 그 아이에게 짧은 키스와 함께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곁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로부터 몇일이 지났을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와 그 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우리를 피했다. 그 아이도 혼자가 되었고, 나도 혼자가 되었다. 나는 혼자라는것에 대한 두려움따윈 없었다. 어차피 난 늘 혼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아인.. 그토록 약했던 그 아이는 날이 갈수록 여위어갔다. 가슴이 아팠지만 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로인한 죽음.. 그녀의 부존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죽었고 나는 무너졌다. 한없이 한없이 무너져 일어나고 싶은 의지조차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
하지만 바보같은 나는.. 다시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의 첫사랑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가끔씩 나를 끝없는 혼란에 빠뜨렸다. 겉으론 강한 척 하지만 내 앞에선 한없이 여려지는 그 아이에게 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속지않아.. 그 아이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아이다. 이미 나를 버렸던 사람이니까.. 기대란거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실수는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거짓으로 그 아이를 대했다. 그 아이가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으니까.. 그 빌어먹을 우정이란 선을 죽어라고 지켰다. 친구라는 탈이라도 쓰고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우정이란 거.. 그 지독한 우정을 이유로 그 아인 다시 날 버렸다.
상처투성이로 너덜거리는 내 마음은 너무나도 지쳐버렸다. 지독한 외로움도 더 이상은 싫었다. 한없이 무너져 가던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고.. 결국 그녀를 떠나버렸다.
한영주..
그 아인.. 가끔 내 생각을 할까? 아픈 추억이라도 나를 그리워해준다면.. 나는 행복할테다.
죽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