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천국을 꿈꾸는 분홍색지옥에서 나는 죽다. (2)

빨간 노트북200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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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노로그 (크레파스의 기억)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씩 조금씩 파쇄되어 가지만 퍼즐 맞추듯 하나 하나 꿰어 맞추다 보면 내 영혼과 정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수 있을까?  추억이라기 보다는 이제는 어렴풋하고 아스라이 흐린 영상들이 기억상실화 되어 아픔같이 내맘에 박혀져 있다. 왜 그랬던건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던 건지 앞도 뒤도 없이 싹둑 가위 자른듯한 알수없는 기억의 영상만이 남은 그리움의 아픔이여...이젠 그주변에 보이던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이땅에 이미 존재하지 않음의 쓸쓸함 때문일까?

 어릴때 검은색 바탕의 보드지같은 것에 퇴색된 여러규격의 흑백사진을 보면 정말 이런 순간이 있었던 거 맞는데... 그리고 어릴때도 그 앨범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거 맞는데, 지금 이순간은 그순간이 있었는지 느껴지지가 않으니, 별안간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것일까?

 

 나는 누구였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무슨 생각을 가진 사람이였을까?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고등학교 일학년때 자아정립과 진로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눈을 뜨기 시작한 순간 외에는 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마치 물고기가 뻐끔뻐끔 숨을 쉬듯 안이하게, 사니까 사는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것임에 틀림없다.

 

 내 어린날의 시야에는, 내가 구르고 뛰고 할수 있을만큼 운동장같이 넓게 생각되던 작은 안방에, 아버지와 언니, 오빠, 엄마가 천정높이의 상형문자가 도안체처럼 크게 박혀있는 병풍을 배경으로, 나는 아빠무릎에, 언니와 오빠는 엎드려 무언가 보고 있다. 커다란 라디오가 보이고 엄마는 뜨게질을 하고 있다.

가족의 한가한 오후저녁의 스냅사진정도 이리라.  어린 눈에도 이사진이 늘 맘에 들었다.  따뜻함이 무언진 몰라도 어린맘에도 느껴졌을까?  

 

 언니는 내옆에서 치마를 양쪽으로 높이 올려 마치 나비날개처럼 펴고 있지만 웃음이 없는 찡그린 얼굴이다.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얼굴. 그옆에서 난 득의 만만하게 못생긴 얼굴로 이빨도 채 안난것 같은데 의자를 붙들고 버티고 선채 웃고 있다. 푸시시한 머리에 푸석거리게 울다 웃었는 건지...기저귀를 찼다. 둥그렇게 튀어나온 엉덩이. 통통하고 짧은 아기다리....

 

 동그란 양산에 마치 "땡볕"이란 영화에 나오는 배우의 파마머리에, 나중 몇십년후에 봐도 똑같은 느낌의 아름다운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비비안 리같기도 하고, 그시대엔 다 그런가 했지만, 우리엄마가 미인이였단것은 훨씬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다. 중학교때 가정방문 오신 선생님께서 "어머니가 아주 미인이시구나" 하셔서 그제야 알았다.  우리엄마니까 그렇게 생긴사람이 우리 엄마인줄 만 알았을 뿐, 어린 눈에는 그냥 주관과 객관의 기준이 명확치 않았었음이다.

 

 아버지도 오빠도 남달리 곱상하고 잘생긴 분들임을 나중에 안것도 마찬가지 비슷한 절차였다. 그냥 오빠니까 오빠고 아빠니까 아빠의 얼굴이였을뿐.. 내가 좋아하는 내 아빠의 얼굴로서, 제일 좋은 익숙한 아빠의 얼굴일뿐...

 

 엄마가 뽀뽀해주던  기억, 입술에 뽀뽀해주던 기억이 확실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그 기억만큼은 너무 좋은데, 난 엄마에게 뽀뽀한번 해드린적이 없다.  못된 딸년같으니...

아버진 발을 내밀게 해서는 발바닥에 뽀뽀를 늘 해주셨다.

"발 ~!" 하면 쏘옥 발바닥을 들어올려 내밀던 기억까지 .... 나는데 왜 꼭 아닌듯이 마치 몇년만 지나면 아예 기억이 사라져 버릴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들까? 

 

  동그란 찹쌀떡을 저녁에 들어오실때면 꼭 사오시는데, 콩 섞인게 있으면 껍질은 안먹고 손가락으로 팥앙금만 후벼서 동그랗게 파먹던 기억도 있다. 특히 계피가루 입힌걸 좋아했다.

 

 날 늘 업어주던 언니가 있었는데, 내가 너무 보채는게 미웠나보다. 뭔지 모르게 아팠다.. 나중에 엄마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게 머리를 빗는것 땜에 늘 싱강일 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 언니는 날 업고는 나의 엉덩일 뒤에서 꼬집곤 했다.  난 그래서 또 아마 징징 울었던것 같다. 말은 못하고...

 

 작은 마루가 있었는데 그위에서 늘 떨어졌다.. 공포의 마루.

자전거에도 늘 치여서 무릎이 성할날이 없이 깨졌던 기억도 있네... 왜 그렇게 치였을까?  집안이 떠나가라 울던 기억들.

 

 늘 사과반쪽을 잘라서 수저로 긁어서 주시던 엄마, 난 많이 아팠던 기억뿐이다. 늘 죽을 먹었고, 찢은 김치 가닥을 물에 씻어 장조림 국물에 담갔다 수저에 올려놓아주시던 엄마...아픈게 늘 무서웠다.  어린마음에도 그게 젤 싫었던 기억, 병원에 늘 엄마손,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던 기억,  늘 아픈주사를 맞던 기억, 그게 마이신이란 것을 지금도 외우고 있다.  하루는 막 아픈데도 자리에서 못일어나고 병원도 안간다고 버티었던거 같은데,  잠시 자다가 눈을 떴는데 의사선생님이 귀신처럼 들어오시는걸 보구 울음으로뿐이 항거할수 없었던 기억도 있다.

 

 무당이였는지, 내가 눈을 떴다 감았다해도 누가 내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꿈인지 무엇이였는지 도저히 지금도 알길 없는데, 엄마께서도 기억을 못하셨다.  무당인지 칼을 들고 내머리에 식칼을 들어올리고 내리고 하는 악몽을 꾸었는건지...

할머니께서 무당을 불러오신거라고 나중에 고모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도 난 그 순간이 꿈이였는지 그녀가 의식을 행했던것을 기억하는건 지는 알 수가 없다.

 

방문이 스르르 열리고 빠꼼히 열고 머리를 내민 언니의 말,,

" 꾀병하고 있어~"  혓바닥을 쪼옥 내민다. 

아, 나는 왜 이것을  어떻게 여지껏 기억하고 있는걸까?

이것도 이젠 아스라해지는데... 이젠 잊기로 하자.  어릴땐 이것도 가끔 생각날때 마다 섭섭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언니가 그럴수 뿐이 없었던 그 입장이 가엾을 뿐이지..

 

학교에 늘 약을 보온통에 담아가지고 오시던 엄마, 늘 어린날의 기억은 장기결석에 병과 나를 동일시 하던 기억뿐이다.

그후에도 거의 고교 일학년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하고 어떤해에 한번 그 악몽같은 느낌이 가끔 느껴지면 괴롭고 숨이 막힐거 같았다. 이젠 사라졌지만...

엄지손가락 같은게 머리속에서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 듯한 그 괴로운 이미지 같은것이 ....

 

 누가 맞고 있었다.  난 마음으로는 가엾지만 그게 불쌍해 하는 감정이란거 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말리거나 할수 있는 생각도 미쳐 갖지 못할 만큼, 그시절의 아이들은 영악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쌍한 언니가 할머니께 맞고 있다는 것을 저녁에 책상위에 걸터 앉아 놀면서 들었다. "할머닌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거 같다. 그리고 할머니께 매를 맞는 가엾은 J언니.... 집안이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어딘지 경직되어 있음을 어린 마음 나름대로 기억한다.

 

 그것은 큰 사건이였다.  친언니가 외할머니 보고 싶다고 징징댔다고 나 업어주던 언니가 바깥채에 세들어 사는 분께 돈을 꾸어서, 기차를 타고 언니를 데려다 준 사건이였던 것이다.

나중에 세세히 들어 안것이지만 그때는 어렴풋이 언니가 없어졌다가 찾았다는것 같은 느낌 뿐이였다.

 

 김장을 하는날, 큰 다라이에 하얀 무가 잔뜩 담겨져 있었다.

언니와 나는 마치 사람형상처럼 생긴것을 골라서 방으로 가져와서는 인형놀이도 하던  아늑한 기억이 너무나 그립다.

 

 하지만 내 마음의 깊은곳에 상처처럼 남아있는것....

언니가 엄마에게 매를 맞고 있는 장면....아프다... 그것이 우리의 불행의 시작이였을까?  거의 같이 뒹구르다시피 엄마는 절규하듯 혼을 내고 있었다.  언니가 그렇게 별나게 창피했을까?

 

어린맘에 언니가 만화가게에 가서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짓을 했던것은 맞다... 그러나 엄마가 그렇게 혼내는 것을 처음 목격하였고 너무나 아팠다... 지금 생각이지만 엄마는 본인의 아픔에 사로잡혀 있었던것은 아니였을까? 

 

요즘 시대였다면 자식교육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지만...

가엾은 엄마... 자식 사랑법의 왜곡과 교육방법의 오류였음을

엄마도 늦게 나이드시고는 아셨을꺼다...

 

다시 아픈 마음이지만.... 언니는 아직 살아있고, 엄마는 돌아가셨다... 불쌍한 엄마....엄마가 나쁜 엄마라고 한들, 내가 엄마를 원망하였지만, 난 엄마가 가엾다.  잠시라도 엄마에게 못되게 한것이 너무나 슬프고 자학스럽다.  고해를 해도 풀수 없는 내마음의 상처.. 나의 죄....

 

 그림을 잘 그렸던 언니, 언니의 크레파스 통은 언제나 별별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도화지에 어린눈으로서는 환상적인 문양과 색으로 왕관을 만들어 오려서는, 동네 친구들에게 전부 씌워 떼를 지어 골목을 뛰어 다니면서 신났던 언니,

 

 나도 같이 덩달아 따라 돌아다녔지만, 언니에 비해 재주도 없고 몸치라 운동감각도 없어서 줄넘기, 공기놀이, 뜀박질등 잡기엔 하나도 능하지 못했던 나는, 언니에겐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는 내가 깍두기대우나 받아야 하니까 처치곤란인 귀찮은 존재였음에 틀림 없다.

 

 언니는 나의 우상이였다.

공부빼고는 다 잘하니까 난 그런 마음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부터 공부 못하는 언니를 모두 대접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후로 난 언니가 늘 날 미워한다는걸 느꼈고, 언니입장에선 내가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보았을것이다...  어려운 시절의 잘못된 가치로 인한 희생타가 언니였다. 그리고 몸까지 약하다고 생각되는 막내인 나는 늘 식구들에게 특별대우를 받았으니...

 

 우리 형제는 혼나면 마루모퉁이에 가만히 꼼짝없이 서있기였는데, 그것이 내겐 최대의 치욕이였다.  그런데 한번은 오빠에게 밖에서 소리치고 울며 대들었다고, 억울한 가운데 아빠께 마당에서 몇대 종아릴 맞았다. 그때 얼마나 아프고 슬펐던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오빠가 내목을 졸랐다. 아 맞아,,, 목 졸랐던거 맞아... "어떻게 했었더라" 하는 순간 기억이 나네... 그래서 억울했던것이다.. 난 어린맘에도 오빠의 행위는 처음 보는 비열한 행위였고, 그것을 따지고자 소리를 질렀던 건데, 아빠는 나만 혼내셨다... 얼마나 억울 했던지... 그게 아마 그때부터 아들과 딸의 차별대우에 대한 반항심이 시작되는 순간이였을 것 같다.

 

 아빠도 나의 성깔을 슬슬 감지하시고 따끔하게 혼을 내신것이였으리라... 그때부터 나는 아마도 자부심 강하고 젤 혼자 잘났고 고집세고 욕심꾸러기로 자라기 시작했던거 같다.

 

 공부를 아마도 어른들 보시기엔 잘했던거 같다. 성적표를 한장도 안버리시고 모아두시고 편지도 써주신것들을 나중에 스크랩해두었을 정도니까 부모님들의 극진한 사랑은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내가 대학교 이학년때부터 인 것 같다.  아빠라는 호칭에서 아버지란 호칭으로 바꾼것은.... 존대보다도 더 늦게 고친것이 아버지에 대한 칭호였다...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단것은  나름대로 어떤 의식도 중요한것이라 생각해서 결정한것으로서, 그해 새해 일월일일부터 오빠에겐 존대를, 아버지껜 정식으로 호칭을 바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엄마....

엄마는 돌아가실때까지도 절대로 어머니라고 부를수 없었다.

남의 엄마 같아서... 아이를 낳아도, 나는 엄마라는 호칭이 좋았다.  원래 좀 응석기가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라고 하면 거리감이 있을꺼 같은 생각이 있었다.  그리운 엄마.... 이제는 다시 어디에도 없는 나의 엄마.....엄마는 혹시 내가 어머니라고 안불러서 섭섭하시진 않으셨을까?

사진속의 예쁜 우리엄마만이 존재할 뿐이다...나도 모르게 사진만이라도 반가워 엄마얼굴을 손으로 쓰다 듬게 된다.

아... 목소리.. 녹음해 둔 몇개의 비디오테잎 들에 있다....

 

하지만 두려워서 볼수가 없는것 또한 숨길수 없다... 눈물이란

이럴때 흘릴수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