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에A와 EPL, 무엇이 달랐나?

맨이야200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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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 3개의 클럽을 진출시키며 유럽축구의 패권을 거머쥐려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가 유일한 대항마였던 이탈리아 세리에A의 AC밀란에 왕좌를 내줬다. AC밀란은 통산 7회 우승의 위업과 더불어 이탈리아 리그에 11번째 우승을 안겨 스페인 리그와 최다 우승 동률을 이루게 했다. 유럽의 왕좌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이탈리아 축구와 잉글랜드 축구, 세리에A와 EPL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 힘겨웠던 밀란, 잘나갔던 EPL

세리에A와 EPL, 무엇이 달랐나? 카카와 제라드의 엇갈린 명암

사실 대회 내내 순항한 것은 EPL 클럽들이었고, 정상을 차지한 AC 밀란은 줄곧 고전한 입장이었다. 시즌 초 '칼치오 폴리(이탈리아 축구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자국 리그에서 승점 감점 처분을 받은 밀란은 3차 예선 경기부터 치러야 했다. 세르비아의 강호 레드 스타와의 예선 경기부터 진땀승이었다. 릴, AEK, 안더레흐트 등 비교적 약체들과 상대한 조별리그도 쉽지 않았다. 릴, AEK를 상대로 충격적인 패전을 당했고, 안더레흐트와의 경기도 쉽지 않았다. 조 1위로 16강에 오른 것도 다른 클럽들이 서로간의 대전에서 승점 관리에 실패한 도움이 있었다.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오른 셀틱, 이빨 빠진 독일 강호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전에서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지 못했다.

반면 잉글랜드 클럽들은 본선에 오른 BIG4(맨유, 첼시, 리버풀, 아스널)가 모두 조별리그 1위로 16강에 올랐고, 아스널이 PSV에인트호벤과의 16강에서 패한 것 외에 나머지 3팀은 준결승전까지 순조롭게 올라섰다. 맨유는 이탈리아 강호 AS로마를 7-1로 대파하며 강력함을 과시했고, 첼시는 스페인 강호 발렌시아를 제압하며 끈끈함을 보였다.

▲ AC밀란, EPL을 제치고 유럽 정상에 오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지목되던 맨유와 첼시는 자국 리그와 FA컵 대회, 챔피언스리그 를 병행하는 강행군 속에 지쳐 쓰러졌다. 결승전은 리버풀과 AC 밀란의 대결이 됐다. 잉글랜드 클럽 가운데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자랑하는 리버풀과 이탈리아 클럽 가운데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AC 밀란의 결승전 격돌은 2년만의 재회로 일찌감치 관심을 모았다.

2004/2005 시즌, 리버풀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0-3의 열세를 3-3으로 따라잡은 뒤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펼쳐진 올 시즌 결승전 역시 분위기는 리버풀의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를 주도한 리버풀은 마무리 능력 부재에 울었고, 열세에 있던 밀란은 '골 냄새를 맡는데 천부적인 골잡이' 필리포 인자기의 연속 골로 승기를 부여잡았다. '노장 군단' AC 밀란의 풍부한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이 일궈낸 위대한 승리였음에 분명하지만 행운이 따른 승리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승부의 축을 기울게 한 인자기의 선제골은 예측불허의 의외성이란 요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물론 인자기는 언제나 그런 의외의 골을 만들어온 위대한 골잡이다. 카카의 패스를 이어받아 리버풀 수비의 배후를 찌른 두번째 골은 완벽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밀란의 우승 자체가 밀란이 -준결승에 3팀을 올려놓고도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EPL클럽들보다 분명한 우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밀란에게 패한 맨유의 경우 준결승전 당시 빠듯한 경기 일정 속에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인한 전력 공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첼시와 밀란은 직접 맞대결을 펼쳐보지 않아 성적표만으로 단순 비교를 하기엔 무리가 있다.

▲ 이탈리아 축구와 잉글랜드 축구의 차이

일반적으로 EPL은 속도를 중시하는 파워게임을 즐기고, 세리에A는 공간을 중시하는 두뇌게임을 즐긴다. (그렇다고 EPL를 머리를 쓰지 않고, 세리에A가 느리다는 얘기는 아니다.) 두 리그의 경향 차이는 두 리그에서 보여지는 미드필드 플레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터프한 수비력을 갖춘 미드필더의 존재는 어디서나 사랑 받지만 EPL의 경우 역동적인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동시에 세우는 것을 즐기며, 세리에A는 조율에 능한 수비형 미드필더와 공격 전개를 전담하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역할을 분담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EPL의 중원 선수들은 굉장히 활동폭이 넓고 운동량이 많으며 스피드가 요구된다. 반면 세리에A의 중원 선수들은 속력면에서 떨어지지만 맡은 자리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점유하고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이 일품이다.

EPL클럽들은 밀란을 상대하기 위해 기존에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배치하던 전술에 변화를 줬다. 맨유는 밀란과의 준결승 대결에서 캐릭, 스콜스, 플레쳐 3명을 중원에 배치했고(긱스가 스콜스의 자리에 서기도 했다),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챠비 알론소, 마스체라노, 제라드(마스체라노가 수비를 전담하고 알론소가 조율, 제라드가 공격을 전담)를 중원에 함께 내세웠다. 이들은 활발하게 위치를 바꾸는 EPL 중원의 특성과 더불어 적절히 역할을 분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탈리아 축구과 가장 유사한 전술을 쓴다는 무리뉴 감독의 첼시는 세리에A와 EPL의 절충점에서 중원의 역할분담을 시행 중이다.)

밀란을 상대로 중원에 변화를 준 맨유와 리버풀

하지만 미드필더 숫자를 늘리면 공격수의 숫자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밀란과 맨유, 리버풀은 모두 원톱으로 나선 최전방 공격수가 고립되며 공격 작업이 여의치 않았는데, 여기서 차이를 가른 것이 바로 카카의 존재였다. 볼을 운반할 뿐 아니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능력까지 두루 갖춘 카카의 활약이 골의 차이로 드러났다. 맨유와 리버풀에서 이 역할을 맡은 스콜스와 제라드는 중앙 미드필더 역할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였으나 최전방 공격수의 바로 뒤에 있을 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선수는 아니다. EPL은 여전 롱 볼의 성향이 짙으며 선수단 전원의 역동성과 활동량을 중시하는 탓에 스피드를 중시하는 선수들을 중용해왔다. 때문에 카카나 호나우지뉴와 같은(EPL에는 유독 브라질 선수들의 진출 사례가 적기도 하다) 최고의 2선 공격수들이 입지를 다지지 못하고 있다.

AS로마가 맨유에게 완패를 당했을 때 드러났듯이 다소 정적인 세리에A 클럽들은 EPL의 빠른 측면 공세에 허점을 노출해왔다. '빗장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 축구의 수비는 '그물망'을 쳐서 상대 공격수를 낚아내는데, 힘과 속력을 앞세운 EPL 공격수들의 저돌성은 종종 이러한 그물망을 흐트러트리는데 능하다. 세리에A가 중원에서 강점을 보인다면 EPL은 측면에서 강점을 보이는 것이다. 이탈리아 수비진 역시 이 같은 타입의 공격을 막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밀란의 측면 수비를 맡은 레프트백 마렉 얀쿨로프스키와 라이트백 마시모 오도는 신체조건이 뛰어나고 힘과 속력을 두루 겸비해 EPL 공격수들에 대한 대응력이 뛰어났다.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활약한 경험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 젠나로 가투소는 이들 측면 수비수들과 연계해 EPL 측면 공격을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밀란의 약점을 상쇄한 카카

밀란 역시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도르프는 컨디션의 기복이 컸다. 중원에서 조율자 피를로와 공격자 카카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한 세도르프의 활약 여부에 따라 밀란의 경기력은 크게 요동쳤다. 세도르프가 부진할 경우 카카 역시 힘을 받지 못했고, 피를로의 조율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올 시즌 밀란은 질라르디노의 부진과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인 올리베이라, 인자기의 부상에 이적생 호나우두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1경기를 소화해 뛸 수 없는 상황으로 공격진의 활약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때문에 밀란은 올 시즌 실점율 면에서 안정적인 편이었으나 득점의 대부분을 카카의 개인 능력에 의존해야 했다. 카카는 세도르프가 봉쇄당한 와중에도 기어코 골을 뽑아내며 10골을 퍼부어 득점왕에 올랐다.

양국 축구의 차이점을 늘어놓았으나 서로가 보완점을 직시하고 있었던 한 해였다. 다가올 2007/2008시즌을 대비하는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클럽들의 행보는 더욱 바빠질 것이다. 끝내 유럽 타이틀을 놓친 잉글랜드, 유벤투스가 돌아오는 이탈리아. 여기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양강의 부진으로 고배를 든 스페인까지 대대적인 전력강화 작업을 펼칠 전망이다. 유럽 축구 삼국지는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