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문영은 신애 아버지가 보내 준 봉고차로 해질 무렵 화진포에 도착했다. 여름내 바글거렸을 사람들은 간데없고 텅 빈 모래밭에는 조용히 파도만 부서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 슬프도록 적막하고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그렇게 수다스럽던 아이들도 그 적막한 풍경에 압도되어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자 신애가 분위기를 깬다. 너 이런 데서 마르고 닳도록 살고 싶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주일, 아니 3일만 지나도 서울 보고 싶어서 난리칠 게 뻔하지. 어쨌든 오늘은 신애 덕분에 기분 좀 내 보자. 방갈로는 바다와 모래밭에 면해 있는 소나무 숲을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새하얀 건물벽과 초록색 지붕이 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건물이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흘러 나왔다. 어머, 이뻐라.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사는 집 같다 얘. 야, 이건 장난이 아니네. 방갈로가 아니라 완전히 호화별장이잖아? 이거 니네 방갈로 맞아? 혹시 누구한테 하룻밤 빌려 가지고 뻥치는 건 아니겠지? 마음대로 생각해. 신애는 그냥 웃기만 한다. 방갈로에는 머리가 히끗히끗한 관리인 부부가 거창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촛불까지 밝혀 놓은 식탁은 고급 일식집 손님상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뻑적지근했다. 생선회에다 튀김, 양념구이, 매운탕 초밥까지 일식집에서 구경할 수 있는 음식은 모조리 올라와 있었다. 정말 굉장한 저녁상이었다. 이거 어디 호텔 같은 데서 요리사를 불러다 차린 거 아니야? 서울에서 이렇게 먹자면 백만원도 더 나오겠다 그지? 신애 니네 아버지 무슨 사업 하시니? 혹시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재벌 아니야? 맘대로 생각하고 어서들 먹기나 해. 신애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럼, 조폭 두목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단 말이지?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수다를 떨면서 행복하게 음식에 덤벼들었다. 우리 빨리 먹고 해변에 나가서 캠프 파이어 하자. 한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신애가 또 웃는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 밤에 나갔다간 총 맞아 죽어. 바로 요 앞이 휴전선이란 거 몰라? 총을 쏜단 말이야? 그럼, 이런 데서 어떻게 해수욕장을 해? 해수욕철 두 달 동안만 개방하고 그 다음부턴 완전 출입금지야. 그런 게 어디 있어? 해변가에 나가면 정말 총을 쏜단 말이야? 정말인지 아닌지 그럼 한번 나가 볼래? 김새네. 무슨 해수욕장이 이래. 우리가 무슨 무장공비냐? 해변가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저녁 식탁은 금방 술판으로 바뀐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서 양주와 맥주를 꾸역꾸역 꺼내 왔다. 문영한테 양해 따위를 구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문영도 이러니 저러니 잔소리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말을 들어먹을 아이들도 아니거니와 결국 학교 선생도 아니고 한 다리 건넌 미술학원 강사인 것이다. 우리 사랑하는 선생님한테 한잔 먼저 따라 올리겠나이다. 한 아이가 그러면서 양주병을 치켜들자 다른 아이가 정색을 하고 그것을 빼앗았다. 이 또라이야, 선생님이 사모하는 아가씨가 따로 있는데 니가 왜 객석에서 설쳐?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얘들아 안 그러니?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양주병은 신애한테 건너갔다. 이것들이 벌써 눈치를 챘구나 싶어 문영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난감했다. 그러나 신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빤히 문영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술을 따른다. 우리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선생님한테 달렸으니 이 술 한잔 받으시고 더욱더 사랑해 주세요. 야 사랑만 해 주면 어떡해? 더욱더 분발노력해야지. 아이들이 또 웃음을 터뜨린다. 문영이 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다른 아이가 얼른 다시 잔을 채운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문영을 놀리기 시작한다. 선생님, 신애 정말 좋아하시죠? 괜찮으니까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털어놓기만 할 게 아니라 아예 사랑을 고백하세요. 신애도 싫다고 안 할 거예요. 그럼, 연애가 시작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만들 해. 보다 못해 신애가 나서지만 아이들은 이 좋은 안주거리를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다. 문영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지. 문영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아이들은 조용해진다. 신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왜 좋아하게 됐는지 신애의 어떤 점이 좋은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우선 나이를 따져 봐라. 신애하고 나하고는 자그마치 스물두 살 차이다. 한 아이가 초를 치고 나선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데 그까짓 나이가 무슨 문제가 돼요? 신애가 대학도 졸업하고 다 큰 어른이라면 나이 차이쯤은 극복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야. 그리고 본인한테는 실례가 되는 소리지만 신애 몸매를 좀 봐라. 요즘은 중학생도 이렇게 빈약하진 않아.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킬킬거린다. 너희들이 남자라고 가정하고 한번 생각해 봐. 신애한테서 여자를 느낄 수 있겠니? 섹스어필을 느낄 수 있겠느냐구? 그 문제는 한바탕 웃어 제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대강 식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맥주잔을 채운 다음 그 안에다 양주잔을 집어넣는다. 문영에게도 한 잔이 돌아왔다. 문영은 그것이 말만 들었던 폭탄주라는 것을 알았다. 난생 처음 구경하는 광경이다. 자, 원샷이야! 한 아이가 소리치자 모두들 꿀꺽 꿀꺽 단숨에 컵을 비운다. 문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술꾼들이다. 한두 명쯤은 술을 못 마신다고 사양할 법도 한데, 이건 완전히 프로급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 여덟밖에 안 되는 어린것들이 언제 이렇게 술을 배웠단 말인가. 문영은 새삼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걸 느낀다. 어려서부터 고생만 하느라고 세상 물정에 그만큼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술만 잘 마시는 게 아니다. 하는 짓도 남자들의 술자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가끔씩 밖에 나가 담배도 피우고 들어오면서 거나하게 취해 벌써부터 술주정을 하는 아이도 있다. 집중공격을 당한 문영도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은 술이 약하신 모양이에요. 약한 건 아니고 꽤 마시는 편인데, 이런 양주는 자주 못 마셔 봐서 그런지 빨리 취하는구나. 그럼, 그 동안은 소주만 마셨단 말예요? 가난한 화가가 당연하지. 양주가 좀 비싸니? 그럼, 이번 기회에 왕창 한번 취해 보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그 동안 수없이 들었던 질문도 다시 나온다. 선생님, 왜 지금까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세요? 안 한 게 아니고 못한 거라니까. 이런 가난한 화가한테 시집올 여자가 어디 있니?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그럼, 애인은요? 그런 거 없어. 그럼, 지금까지 연애도 못해 봤어요? 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리 선생님이 어디로 봐서 연애도 못해 봤겠니?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드세요. 여자애들이 낯을 가리지 않고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노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싱그럽고 즐겁다. 거기다 술까지 취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10년 넘게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내왔지만 이렇게 술을 마시며 본격적으로 노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하지만 처음에는 좀 심하다 싶더니 자신도 취하니까 자연스럽고 귀엽기만 하다. 거기다, 할 소리는 아니지만, 다 큰 여자애들이라 섹시하기도 하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거칠고 빠른 괴상한 곡이다. 아이들이 우르르 거실로 몰려 나간다. 펄쩍펄쩍 뛰고 비틀고 흔들어 대는 광란의 춤판이 벌어진다. 문영도 끌려 나간다. 어려서부터 춤은커녕 제대로 놀아 볼 기회도 없었던 문영한테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간이다. 건성으로 팔과 다리를 흔들어 보긴 하지만 막대기처럼 뻣뻣하기만 하고 쑥스러워 도망을 치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뚝 그치더니 음악이 바뀐다. 문영도 그것이 블루스라는 정도는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둘씩 짝을 짓는다. 그리고 신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문영에게 다가오더니 한 손을 잡고 한 손은 문영의 어깨에 올려 놓는다. 문영은 엉거주춤 신애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블루스는 대학시절 축제 같은 때 여학생한테 이끌려 두어 번 추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여학생 구두코를 밟으며 그냥 따라만 다닌 거지 스탭이 어떻게 되는지 알 리가 없다. 신애도 그 점을 눈치챈 모양이다. 술에 취해 약간 꼬부라진 소리로 속삭인다. 긴장을 풀고 그냥 따라만 오세요. 그리고 여자 허리는 꼭 끌어안는 게 예의라는 거 잊지 말구요. 문영은 시키는 대로 한다. 너무 가냘퍼서 허리라고 할 것도 없는 자그마한 육체가 쏘옥 품에 안긴다. 신애가 또 속삭인다. 너무 빈약해서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너무 빈약해서 죄송하다구요. 가슴도 없고 히프도 없고 꼭 나무젓가락을 안고 있는 것 같죠? 나무젓가락이면 어떠냐. 난 지금 너무나 황홀하다. 정말예요? 정말이야. 아까 애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니 성적 매력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를 안고 있는데 황홀하다는 건 그럼 뭐예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니까. 순결하고 예쁘고 신비하고 영리하고, 그런 여잘 안고 있는데 황홀하지 않을 수 있니? 어머, 제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어요. 이번엔 제가 황홀해질 차례군요. 신애가 문영의 가슴에 포옥 안긴다. 그러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문영의 물건이 불끈 발기를 시작한 것이다. 문영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문영은 당황해서 얼른 엉덩이를 뒤로 뺀다. 그러자 신애가 허리를 잡아 당기며 야단을 친다. 이런 매너가 어디 있어요? 허리 펴요. 그, 그게 아니고… 소변이 좀 마려워서……. 음악이 곧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요. 허리 펴라니까요. 참 한심한 일이다. 이 자그마하고 빈약한 어린 여자애와 접촉했는데 발기를 하다니. 엉덩이를 뒤로 뺄 수도 없는데 신애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몸을 밀착시킨다. 주먹만큼이나 불룩 튀어나온 그 부분이 분명히 느껴질 텐데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몸을 비벼 댄다. 문영은 문득 신애의 숨결이 가빠진다는 것을 느낀다. 이 아이도 문영과 마찬가지로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음악이 바뀐다. 문영은 얼른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식탁에 앉았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그 물건은 속절없이 아직도 빳빳하게 발기한 채다. 블루스곡이 조금만 더 끌었어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문영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술을 마신다. 필름은 거기서 끊어졌다.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잠을 깼다. 문영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사타구니를 꽉 움켜쥔 채 밖으로 뛰쳐 나갔다. 화실이 아니었다. 은은한 핑크색 조명으로 물들어 있는 낯선 거실이었다. 비로소 간밤에 춤추고 술을 마시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급한 건 소변이었다. 문영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화장실이 아니었다. 너댓명의 아이들이 가로 세로 늘어져 자고 있었다. 다음 방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가서야 화장실이 나타났다. 문영은 부르르 몸을 떨며 개운하게 볼일을 보고 세수를 했다. 정신이 든다. 아이들한테 끌려 나가 춤을 추던 생각이 났다. 신애를 끌어안고 발기가 돼서 고통스러워했던 생각도 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곯아떨어진 것이 분명한데 머리는 맑고 속도 쓰리지 않았다. 그래서 비싼 술이 좋은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냉수라도 마시려고 주방을 찾는데 방문 하나가 한 뼘쯤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조금 전에 급하게 닫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을 닫아 주려고 손을 뻗치다가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서 허옇게 드러나 있는 여자아이의 허벅지였다. 술에 취하고 춤에 지쳐 잠옷을 갈아 입을 짬도 없이 그냥 쓰러져 잠이 들었을 것이다. 스커트가 밀려 올라가 허리에 걸쳐 있고 그 밑으로 두 가닥의 허벅지가 아무 대책없이 드러나 있었다. 문영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차마 손잡이를 놓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가만히 다시 문을 열었다. 그 허벅지의 주인이 어쩐지 신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문영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방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역시 신애였다. 어스름 속에서 작고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허벅지는 차라리 애처로워 보였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체해도 육체적으로는 아직 어린애인 것이다. 문영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소리없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들킬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이 아이들은 지난밤에 고래처럼 퍼마셨고 지금은 떠메 가도 모를 만큼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짓을 하려는 걸까. 문영은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무슨짓을 하고 싶어서 무릎을 꿇고 앉았을까. 결코 섹스는 아니었다. 아무리 외롭고 궁하다고 하지만 잠들어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어떻게 할 만큼 막 돼먹은 인간은 아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 작은 여자아이를 오래 전부터 한번 안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만져 보고 싶었을 뿐이다. 촉감. 그렇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그 촉감을 즐기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본질적으로 성욕의 발로라고 해도 죄가 될 일은 아니다. 프로이드는 갓난아이가 엄마 젖을 빠는 행동까지도 성욕으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 문영은 가만히 손을 뻗어 신애의 다리를 만져 보았다. 깨물어 주고 싶도록 작고 귀여운 발을 거쳐 갸름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종아리에서 허벅지 깊은 곳까지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허벅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비로소 온몸에 열기가 돌며 사타구니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섹스를 할 때의 절정보다도 더 달콤하고 짜릿한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머릿속까지 울리고 금방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신애가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눕지 않았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문영은 서두르지 않고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소변이 급해서 허둥대던 것처럼 급히 화장실에 들어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자위행위는 짧고 격렬하면서도 통쾌했다. 처음 여자를 안아 보았을 때와 같은 다급하면서도 토해 내는 것과 같은 뜨거운 사정이 뒤따랐다. 그리고는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나른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동이 트고 있었다. 앞에총을 한 군인 둘이 모래밭에 발자국이 나 있는지를 살피면서 해변을 순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영은 벌써 몇 시간째 방갈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 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몸과 마음에 칙칙하게 달라붙어 있는 욕망의 찌꺼기를 그렇게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총을 든 군인 때문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문영은 섹스 뒤에는 언제나 참담한 후회와 허탈감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이상한 체질이다. 자위행위는 한결 더하다. 내가 왜 또 그 짓을 했을까. 두 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자괴와 죄책감 때문에 송곳 같은 것으로 가슴을 마구 난자하고 싶어진다. 중3 때 처음으로 자위행위를 경험하면서 그 버릇이 생겼다. 손가락과 사타구니에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는 더러운 느낌. 그것은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그래서 어디론지 깊이 깊이 숨어 버리고 싶은 참담한 느낌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딱지를 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한 쾌감 뒤에는 반드시 죽고 싶을 정도의 환멸이 뒤따른다. 문영이 이해하고 있는 섹스의 본질은 그렇다. 때로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도 하고 주먹으로 자신의 턱을 올려쳐 보기도 하지만 다시 기회가 생기면 그 욕망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신애의 허벅지를 만지게 된 것도 똑같은 본능의 반복일 것이다. 문영은 그 어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무조건 빌고 또 빌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할 테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 달라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다. 어젯밤 선생님이 제 일착으로 따운된 거 아세요? 신애가 물었다. 아이들은 10시가 지나서야 꾸역꾸역 일어나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글쎄, 너희들 춤추는 걸 구경하면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거기서 필름이 끊어졌군요? 그런 모양이지. 그럼, 저희들이 선생님 번쩍 들어다 방에 눕혀 드린 것도 기억 못하시겠네요? 그랬어? 그때 선생님이 잔뜩 취해 가지고 저희들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필름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알아. 뭐라고 그랬는데? 이 세상의 모든 부정한 계집년들은 모조리 지옥으로 가라. 순결한 여자들만 남고 모조리 가라. 설마. 너희들이 지어낸 소리겠지? 저희들이 그런 소릴 뭐하러 지어내요? 그럼, 취중에 괜히 해 본 소리겠지. 아녜요, 취중에 진담이 나온다고 그러잖아요? 저희들이 듣기엔 꼭 무슨 사연이 있는 소리 같던데요? 있긴 뭐가 있어. 부정한 여자는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가 어때서? 백번 옳은 소리잖아? 여자가 아니고 계집년이라고 그랬단 말예요. 선생님, 혹시 옛날 애인한테 배신당한 일 있으세요? 너희들 자꾸 이렇게 오바하면 나 혼자 서울로 가 버린다. 아이들이 일제히 에이 하고 소리 지르더니 와글와글 문영을 놀린다. 나, 정말 간다. 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 나온다. 다시 그 얘기를 꺼내는 아이는 없었다. 문영과 아이들은 한 무더기가 되어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서로서로 기대앉아 쪽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입시를 코앞에 두고 정신없이 쫓겨 왔던 아이들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누려 보는 사치다. 신애가 바싹 붙어 앉더니 문영의 어깨에다 머리를 기대 왔다. 문영은 모른 척하고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마치 당신이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나도 당신하고 있으면 이렇게 아주 맘이 편해, 그러니까 앞으로 더욱더 잘해 보자구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도 간밤에 자신의 허벅지를 애무했던 손길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두고 텔레파시라고 했던가. 그때 해변 쪽에서 휘익 하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순찰을 돌던 초병들이 난데없는 아가씨들을 발견하고 후끈 달아 오른 것이다. 아이들도 일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리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오빠! 나 오늘 시간 많아. 생각 있으면 이리 올라와 봐. 빨리! 신애 혼자만 문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의 감정표현이 이렇게 대담해졌다는 게 놀랍다. 아니면 둘 사이가 정말 이상하게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영으로서는 아무런 확신도 없고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신애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마치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말한다. 아 참, 어젯밤 블루스 추던 것 기억나세요? 블루스? 생각 안 나는데. 난 이미 거기서부터 필름이 끊어졌거든. 에이, 거짓말.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정말이야. 엉덩이를 뒤로 쑥 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거 정말 기억 안 나세요? 그렇다니까. 그 독한 양주를 좀 마셨니? 에이, 김새. 그럼, 괜히 저 혼자만 흥분했잖아요. 왜 흥분을 해? 아녜요. 그런 게 있었어요. 문영은 다시 가슴이 뛴다. 이 아이는 어젯밤 그 모든 걸 다 알고 몸을 밀착시켜 왔던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자라다 만 것 같은 작은 아이한테 벌써부터 성적인 욕구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강사의 관심을 잡아 두려고 한 짓인지 알 수가 없다. 블루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문영의 물건은 정말 대책없이 발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방갈로를 떠난 것은 12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더 놀다 가자고 아우성을 쳤지만 문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 의견이 정 그렇다면 나 혼자 돌아갈 테니까 실컷들 놀다 와. 난 빨리 가서 푹 좀 쉬고 내일 수업 준비를 해야겠어. 놀 때 왕창 놀았으면 공부할 때 왕창 공부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서울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것은 문영과 신애뿐이었다. 봉고차는 문영을 화실까지 태워다 줬다. 잘 가. 내일 만나자. 문영이 차에서 내리자 신애가 따라 내렸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숙녀한테 차라도 한잔 대접해서 보내야 하는 거 아녜요? 너, 피곤하지 않아?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요. 기사가 기다리잖아? 기다리라고 월급받는데요, 뭐. 알았다, 들어가자. 신애가 커피를 끓이고 두 사람은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번 여행, 재미있었어요? 신애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물었다. 재미는 있었는데, 왜 웃는 거냐? 선생님이 너무 순진해서 말예요. 다시 말하자면 촌스러웠다는 얘기구나? 그런 얘긴 아녜요. 술 마시는 거, 춤 추는 거, 여자애들 사이에서 공연히 수줍어 하는 거…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순진했어요. 마치 때묻지 않은 소년처럼요. 선생님은 영원한 소년이에요. 영원한 소년?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칭찬이죠. 선생님 나이에 그만큼 순진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세요? 니가 인생을 얼마나 살아 봤다고 그런 소릴 해? 꼭 버스가 뒤집어져 봐야만 교통사고가 어떤 건지 알게 되나요? 인생을 많이 안 살아 봤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구요.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는 소리도 이미 어린 여자아이의 차원을 넘어서 성숙한 여인 같다. 문영은 용기를 내서 새삼스럽게 신애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귀엽고 의젓하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다. 그렇게 숨이 넘어갈 듯한 흥분 속에서 아랫도리를 비벼대고 허벅지를 애무했지만 그런 흔적은 간 데 없고 한없이 순결해 보이기만 한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보세요? 신애가 다시 생글거리며 묻는다. 널 소녀로 봐야 할지 여자로 봐야 할지 헷갈려서 그런다. 생긴 건 영락없는 소년데 말하는 걸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애 늙은이 같아서 말이다. 그건 선생님 고정관념 때문이에요. 무슨 고정관념? 고3짜리는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고정관념 말예요. 그렇지 않아요. 알 것 다 알아요. 다만 사회통념상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죠. 무엇을 다 알아? 물어 놓고 문영은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알았다 알았어. 앞으로는 너희들을 어린애가 아닌 완성된 한 인격체로서 존중해 줄 거야. 그럼, 됐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솔직하게 무얼? 선생님은 결혼도 안 하고 애인도 없어요, 맞죠? 맞아, 그래서? 본능적으로 여자가 그리울 거예요. 그런데 아홉 명이나 되는 다 큰 여자애들을 가르치면서 여자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요.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선생님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녜요. 여자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참아 내는 선생님의 노력, 선생님의 순수성에 존경을 표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어쩌잔 얘긴가. 참으로 고약한 입장에 몰리고 말았다. 이 아이가 혹시 간밤에 자기 허벅지를 만진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럭 겁이 나는 대목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보다 더 창피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미리 고백을 해 버리고 용서를 구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쩐지 용서를 해 줄 것도 같다. 이 아이의 말투가 그렇다. 거기다 가장 은밀한 부분을 만져 보았다는 어떤 친밀감, 유대감 같은 것이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숨이 가빠진다. 또 만지고 싶다. 으스러지도록 힘껏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아이는 바로 눈 앞에 있다. 무방비 상태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는 툭 터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래서 어쩌잔 얘긴가. 이 아이를 잡아먹고 나서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애인 관계를 가질 것인가. 아무것도 대책이 서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러면서도 이 불끈거리는 욕망을 어쩌면 좋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문영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이 어려운 사태를 해결한다. 자,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그만 가 봐라. 내일 보자. 제가 있어서 뭔가 불편하세요? 니가 아니고 너 하는 얘기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대화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4)
4. 방갈로
아이들과 문영은 신애 아버지가 보내 준 봉고차로 해질 무렵 화진포에 도착했다. 여름내 바글거렸을 사람들은 간데없고 텅 빈 모래밭에는 조용히 파도만 부서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 슬프도록 적막하고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그렇게 수다스럽던 아이들도 그 적막한 풍경에 압도되어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자 신애가 분위기를 깬다.
너 이런 데서 마르고 닳도록 살고 싶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주일, 아니 3일만 지나도 서울 보고 싶어서 난리칠 게 뻔하지. 어쨌든 오늘은 신애 덕분에 기분 좀 내 보자.
방갈로는 바다와 모래밭에 면해 있는 소나무 숲을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새하얀 건물벽과 초록색 지붕이 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건물이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흘러 나왔다.
어머, 이뻐라.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사는 집 같다 얘.
야, 이건 장난이 아니네. 방갈로가 아니라 완전히 호화별장이잖아?
이거 니네 방갈로 맞아? 혹시 누구한테 하룻밤 빌려 가지고 뻥치는 건 아니겠지?
마음대로 생각해.
신애는 그냥 웃기만 한다.
방갈로에는 머리가 히끗히끗한 관리인 부부가 거창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촛불까지 밝혀 놓은 식탁은 고급 일식집 손님상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뻑적지근했다. 생선회에다 튀김, 양념구이, 매운탕 초밥까지 일식집에서 구경할 수 있는 음식은 모조리 올라와 있었다. 정말 굉장한 저녁상이었다.
이거 어디 호텔 같은 데서 요리사를 불러다 차린 거 아니야?
서울에서 이렇게 먹자면 백만원도 더 나오겠다 그지?
신애 니네 아버지 무슨 사업 하시니? 혹시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재벌 아니야?
맘대로 생각하고 어서들 먹기나 해.
신애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럼, 조폭 두목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단 말이지?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수다를 떨면서 행복하게 음식에 덤벼들었다.
우리 빨리 먹고 해변에 나가서 캠프 파이어 하자.
한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신애가 또 웃는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 밤에 나갔다간 총 맞아 죽어. 바로 요 앞이 휴전선이란 거 몰라?
총을 쏜단 말이야? 그럼, 이런 데서 어떻게 해수욕장을 해?
해수욕철 두 달 동안만 개방하고 그 다음부턴 완전 출입금지야.
그런 게 어디 있어? 해변가에 나가면 정말 총을 쏜단 말이야?
정말인지 아닌지 그럼 한번 나가 볼래?
김새네. 무슨 해수욕장이 이래. 우리가 무슨 무장공비냐?
해변가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저녁 식탁은 금방 술판으로 바뀐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서 양주와 맥주를 꾸역꾸역 꺼내 왔다. 문영한테 양해 따위를 구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문영도 이러니 저러니 잔소리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말을 들어먹을 아이들도 아니거니와 결국 학교 선생도 아니고 한 다리 건넌 미술학원 강사인 것이다.
우리 사랑하는 선생님한테 한잔 먼저 따라 올리겠나이다.
한 아이가 그러면서 양주병을 치켜들자 다른 아이가 정색을 하고 그것을 빼앗았다.
이 또라이야, 선생님이 사모하는 아가씨가 따로 있는데 니가 왜 객석에서 설쳐?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얘들아 안 그러니?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양주병은 신애한테 건너갔다. 이것들이 벌써 눈치를 챘구나 싶어 문영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난감했다. 그러나 신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빤히 문영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술을 따른다.
우리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선생님한테 달렸으니 이 술 한잔 받으시고 더욱더 사랑해 주세요.
야 사랑만 해 주면 어떡해? 더욱더 분발노력해야지.
아이들이 또 웃음을 터뜨린다.
문영이 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다른 아이가 얼른 다시 잔을 채운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문영을 놀리기 시작한다.
선생님, 신애 정말 좋아하시죠?
괜찮으니까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털어놓기만 할 게 아니라 아예 사랑을 고백하세요.
신애도 싫다고 안 할 거예요. 그럼, 연애가 시작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만들 해.
보다 못해 신애가 나서지만 아이들은 이 좋은 안주거리를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다. 문영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지.
문영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아이들은 조용해진다.
신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왜 좋아하게 됐는지 신애의 어떤 점이 좋은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우선 나이를 따져 봐라. 신애하고 나하고는 자그마치 스물두 살 차이다.
한 아이가 초를 치고 나선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데 그까짓 나이가 무슨 문제가 돼요?
신애가 대학도 졸업하고 다 큰 어른이라면 나이 차이쯤은 극복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야. 그리고 본인한테는 실례가 되는 소리지만 신애 몸매를 좀 봐라. 요즘은 중학생도 이렇게 빈약하진 않아.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킬킬거린다.
너희들이 남자라고 가정하고 한번 생각해 봐. 신애한테서 여자를 느낄 수 있겠니? 섹스어필을 느낄 수 있겠느냐구?
그 문제는 한바탕 웃어 제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대강 식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맥주잔을 채운 다음 그 안에다 양주잔을 집어넣는다. 문영에게도 한 잔이 돌아왔다. 문영은 그것이 말만 들었던 폭탄주라는 것을 알았다. 난생 처음 구경하는 광경이다.
자, 원샷이야!
한 아이가 소리치자 모두들 꿀꺽 꿀꺽 단숨에 컵을 비운다. 문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술꾼들이다. 한두 명쯤은 술을 못 마신다고 사양할 법도 한데, 이건 완전히 프로급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 여덟밖에 안 되는 어린것들이 언제 이렇게 술을 배웠단 말인가. 문영은 새삼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걸 느낀다. 어려서부터 고생만 하느라고 세상 물정에 그만큼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술만 잘 마시는 게 아니다. 하는 짓도 남자들의 술자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가끔씩 밖에 나가 담배도 피우고 들어오면서 거나하게 취해 벌써부터 술주정을 하는 아이도 있다. 집중공격을 당한 문영도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은 술이 약하신 모양이에요.
약한 건 아니고 꽤 마시는 편인데, 이런 양주는 자주 못 마셔 봐서 그런지 빨리 취하는구나.
그럼, 그 동안은 소주만 마셨단 말예요?
가난한 화가가 당연하지. 양주가 좀 비싸니?
그럼, 이번 기회에 왕창 한번 취해 보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그 동안 수없이 들었던 질문도 다시 나온다.
선생님, 왜 지금까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세요?
안 한 게 아니고 못한 거라니까. 이런 가난한 화가한테 시집올 여자가 어디 있니?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그럼, 애인은요?
그런 거 없어.
그럼, 지금까지 연애도 못해 봤어요?
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리 선생님이 어디로 봐서 연애도 못해 봤겠니?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드세요.
여자애들이 낯을 가리지 않고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노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싱그럽고 즐겁다. 거기다 술까지 취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10년 넘게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내왔지만 이렇게 술을 마시며 본격적으로 노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하지만 처음에는 좀 심하다 싶더니 자신도 취하니까 자연스럽고 귀엽기만 하다. 거기다, 할 소리는 아니지만, 다 큰 여자애들이라 섹시하기도 하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거칠고 빠른 괴상한 곡이다. 아이들이 우르르 거실로 몰려 나간다. 펄쩍펄쩍 뛰고 비틀고 흔들어 대는 광란의 춤판이 벌어진다. 문영도 끌려 나간다. 어려서부터 춤은커녕 제대로 놀아 볼 기회도 없었던 문영한테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간이다. 건성으로 팔과 다리를 흔들어 보긴 하지만 막대기처럼 뻣뻣하기만 하고 쑥스러워 도망을 치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뚝 그치더니 음악이 바뀐다. 문영도 그것이 블루스라는 정도는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둘씩 짝을 짓는다. 그리고 신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문영에게 다가오더니 한 손을 잡고 한 손은 문영의 어깨에 올려 놓는다. 문영은 엉거주춤 신애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블루스는 대학시절 축제 같은 때 여학생한테 이끌려 두어 번 추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여학생 구두코를 밟으며 그냥 따라만 다닌 거지 스탭이 어떻게 되는지 알 리가 없다. 신애도 그 점을 눈치챈 모양이다. 술에 취해 약간 꼬부라진 소리로 속삭인다.
긴장을 풀고 그냥 따라만 오세요. 그리고 여자 허리는 꼭 끌어안는 게 예의라는 거 잊지 말구요.
문영은 시키는 대로 한다. 너무 가냘퍼서 허리라고 할 것도 없는 자그마한 육체가 쏘옥 품에 안긴다. 신애가 또 속삭인다.
너무 빈약해서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너무 빈약해서 죄송하다구요. 가슴도 없고 히프도 없고 꼭 나무젓가락을 안고 있는 것 같죠?
나무젓가락이면 어떠냐. 난 지금 너무나 황홀하다.
정말예요?
정말이야. 아까 애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니 성적 매력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를 안고 있는데 황홀하다는 건 그럼 뭐예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니까. 순결하고 예쁘고 신비하고 영리하고, 그런 여잘 안고 있는데 황홀하지 않을 수 있니?
어머, 제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어요. 이번엔 제가 황홀해질 차례군요.
신애가 문영의 가슴에 포옥 안긴다. 그러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문영의 물건이 불끈 발기를 시작한 것이다. 문영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문영은 당황해서 얼른 엉덩이를 뒤로 뺀다. 그러자 신애가 허리를 잡아 당기며 야단을 친다.
이런 매너가 어디 있어요? 허리 펴요.
그, 그게 아니고… 소변이 좀 마려워서…….
음악이 곧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요. 허리 펴라니까요.
참 한심한 일이다. 이 자그마하고 빈약한 어린 여자애와 접촉했는데 발기를 하다니. 엉덩이를 뒤로 뺄 수도 없는데 신애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몸을 밀착시킨다. 주먹만큼이나 불룩 튀어나온 그 부분이 분명히 느껴질 텐데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몸을 비벼 댄다. 문영은 문득 신애의 숨결이 가빠진다는 것을 느낀다. 이 아이도 문영과 마찬가지로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음악이 바뀐다. 문영은 얼른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식탁에 앉았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그 물건은 속절없이 아직도 빳빳하게 발기한 채다. 블루스곡이 조금만 더 끌었어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문영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술을 마신다. 필름은 거기서 끊어졌다.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잠을 깼다. 문영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사타구니를 꽉 움켜쥔 채 밖으로 뛰쳐 나갔다. 화실이 아니었다. 은은한 핑크색 조명으로 물들어 있는 낯선 거실이었다. 비로소 간밤에 춤추고 술을 마시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급한 건 소변이었다. 문영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화장실이 아니었다. 너댓명의 아이들이 가로 세로 늘어져 자고 있었다. 다음 방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가서야 화장실이 나타났다. 문영은 부르르 몸을 떨며 개운하게 볼일을 보고 세수를 했다. 정신이 든다. 아이들한테 끌려 나가 춤을 추던 생각이 났다. 신애를 끌어안고 발기가 돼서 고통스러워했던 생각도 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곯아떨어진 것이 분명한데 머리는 맑고 속도 쓰리지 않았다. 그래서 비싼 술이 좋은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냉수라도 마시려고 주방을 찾는데 방문 하나가 한 뼘쯤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조금 전에 급하게 닫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을 닫아 주려고 손을 뻗치다가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서 허옇게 드러나 있는 여자아이의 허벅지였다. 술에 취하고 춤에 지쳐 잠옷을 갈아 입을 짬도 없이 그냥 쓰러져 잠이 들었을 것이다. 스커트가 밀려 올라가 허리에 걸쳐 있고 그 밑으로 두 가닥의 허벅지가 아무 대책없이 드러나 있었다. 문영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차마 손잡이를 놓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가만히 다시 문을 열었다. 그 허벅지의 주인이 어쩐지 신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문영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방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역시 신애였다. 어스름 속에서 작고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허벅지는 차라리 애처로워 보였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체해도 육체적으로는 아직 어린애인 것이다. 문영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소리없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들킬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이 아이들은 지난밤에 고래처럼 퍼마셨고 지금은 떠메 가도 모를 만큼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짓을 하려는 걸까. 문영은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무슨짓을 하고 싶어서 무릎을 꿇고 앉았을까. 결코 섹스는 아니었다. 아무리 외롭고 궁하다고 하지만 잠들어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어떻게 할 만큼 막 돼먹은 인간은 아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 작은 여자아이를 오래 전부터 한번 안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만져 보고 싶었을 뿐이다. 촉감. 그렇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그 촉감을 즐기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본질적으로 성욕의 발로라고 해도 죄가 될 일은 아니다. 프로이드는 갓난아이가 엄마 젖을 빠는 행동까지도 성욕으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 문영은 가만히 손을 뻗어 신애의 다리를 만져 보았다. 깨물어 주고 싶도록 작고 귀여운 발을 거쳐 갸름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종아리에서 허벅지 깊은 곳까지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허벅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비로소 온몸에 열기가 돌며 사타구니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섹스를 할 때의 절정보다도 더 달콤하고 짜릿한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머릿속까지 울리고 금방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신애가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눕지 않았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문영은 서두르지 않고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소변이 급해서 허둥대던 것처럼 급히 화장실에 들어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자위행위는 짧고 격렬하면서도 통쾌했다. 처음 여자를 안아 보았을 때와 같은 다급하면서도 토해 내는 것과 같은 뜨거운 사정이 뒤따랐다. 그리고는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나른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동이 트고 있었다. 앞에총을 한 군인 둘이 모래밭에 발자국이 나 있는지를 살피면서 해변을 순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영은 벌써 몇 시간째 방갈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 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몸과 마음에 칙칙하게 달라붙어 있는 욕망의 찌꺼기를 그렇게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총을 든 군인 때문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문영은 섹스 뒤에는 언제나 참담한 후회와 허탈감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이상한 체질이다. 자위행위는 한결 더하다. 내가 왜 또 그 짓을 했을까. 두 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자괴와 죄책감 때문에 송곳 같은 것으로 가슴을 마구 난자하고 싶어진다. 중3 때 처음으로 자위행위를 경험하면서 그 버릇이 생겼다. 손가락과 사타구니에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는 더러운 느낌. 그것은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그래서 어디론지 깊이 깊이 숨어 버리고 싶은 참담한 느낌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딱지를 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한 쾌감 뒤에는 반드시 죽고 싶을 정도의 환멸이 뒤따른다. 문영이 이해하고 있는 섹스의 본질은 그렇다. 때로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도 하고 주먹으로 자신의 턱을 올려쳐 보기도 하지만 다시 기회가 생기면 그 욕망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신애의 허벅지를 만지게 된 것도 똑같은 본능의 반복일 것이다. 문영은 그 어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무조건 빌고 또 빌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할 테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 달라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다.
어젯밤 선생님이 제 일착으로 따운된 거 아세요?
신애가 물었다. 아이들은 10시가 지나서야 꾸역꾸역 일어나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글쎄, 너희들 춤추는 걸 구경하면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거기서 필름이 끊어졌군요?
그런 모양이지.
그럼, 저희들이 선생님 번쩍 들어다 방에 눕혀 드린 것도 기억 못하시겠네요?
그랬어?
그때 선생님이 잔뜩 취해 가지고 저희들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필름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알아. 뭐라고 그랬는데?
이 세상의 모든 부정한 계집년들은 모조리 지옥으로 가라. 순결한 여자들만 남고 모조리 가라.
설마. 너희들이 지어낸 소리겠지?
저희들이 그런 소릴 뭐하러 지어내요?
그럼, 취중에 괜히 해 본 소리겠지.
아녜요, 취중에 진담이 나온다고 그러잖아요? 저희들이 듣기엔 꼭 무슨 사연이 있는 소리 같던데요?
있긴 뭐가 있어. 부정한 여자는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가 어때서? 백번 옳은 소리잖아?
여자가 아니고 계집년이라고 그랬단 말예요. 선생님, 혹시 옛날 애인한테 배신당한 일 있으세요?
너희들 자꾸 이렇게 오바하면 나 혼자 서울로 가 버린다.
아이들이 일제히 에이 하고 소리 지르더니 와글와글 문영을 놀린다.
나, 정말 간다.
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 나온다. 다시 그 얘기를 꺼내는 아이는 없었다. 문영과 아이들은 한 무더기가 되어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서로서로 기대앉아 쪽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입시를 코앞에 두고 정신없이 쫓겨 왔던 아이들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누려 보는 사치다. 신애가 바싹 붙어 앉더니 문영의 어깨에다 머리를 기대 왔다. 문영은 모른 척하고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마치 당신이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나도 당신하고 있으면 이렇게 아주 맘이 편해, 그러니까 앞으로 더욱더 잘해 보자구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도 간밤에 자신의 허벅지를 애무했던 손길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두고 텔레파시라고 했던가. 그때 해변 쪽에서 휘익 하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순찰을 돌던 초병들이 난데없는 아가씨들을 발견하고 후끈 달아 오른 것이다. 아이들도 일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리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오빠! 나 오늘 시간 많아. 생각 있으면 이리 올라와 봐. 빨리!
신애 혼자만 문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의 감정표현이 이렇게 대담해졌다는 게 놀랍다. 아니면 둘 사이가 정말 이상하게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영으로서는 아무런 확신도 없고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신애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마치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말한다.
아 참, 어젯밤 블루스 추던 것 기억나세요?
블루스? 생각 안 나는데. 난 이미 거기서부터 필름이 끊어졌거든.
에이, 거짓말.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정말이야.
엉덩이를 뒤로 쑥 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거 정말 기억 안 나세요?
그렇다니까. 그 독한 양주를 좀 마셨니?
에이, 김새. 그럼, 괜히 저 혼자만 흥분했잖아요.
왜 흥분을 해?
아녜요. 그런 게 있었어요.
문영은 다시 가슴이 뛴다. 이 아이는 어젯밤 그 모든 걸 다 알고 몸을 밀착시켜 왔던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자라다 만 것 같은 작은 아이한테 벌써부터 성적인 욕구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강사의 관심을 잡아 두려고 한 짓인지 알 수가 없다. 블루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문영의 물건은 정말 대책없이 발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방갈로를 떠난 것은 12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더 놀다 가자고 아우성을 쳤지만 문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 의견이 정 그렇다면 나 혼자 돌아갈 테니까 실컷들 놀다 와. 난 빨리 가서 푹 좀 쉬고 내일 수업 준비를 해야겠어. 놀 때 왕창 놀았으면 공부할 때 왕창 공부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서울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것은 문영과 신애뿐이었다. 봉고차는 문영을 화실까지 태워다 줬다.
잘 가. 내일 만나자.
문영이 차에서 내리자 신애가 따라 내렸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숙녀한테 차라도 한잔 대접해서 보내야 하는 거 아녜요?
너, 피곤하지 않아?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요.
기사가 기다리잖아?
기다리라고 월급받는데요, 뭐.
알았다, 들어가자.
신애가 커피를 끓이고 두 사람은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번 여행, 재미있었어요?
신애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물었다.
재미는 있었는데, 왜 웃는 거냐?
선생님이 너무 순진해서 말예요.
다시 말하자면 촌스러웠다는 얘기구나?
그런 얘긴 아녜요. 술 마시는 거, 춤 추는 거, 여자애들 사이에서 공연히 수줍어 하는 거…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순진했어요. 마치 때묻지 않은 소년처럼요. 선생님은 영원한 소년이에요.
영원한 소년?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칭찬이죠. 선생님 나이에 그만큼 순진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세요?
니가 인생을 얼마나 살아 봤다고 그런 소릴 해?
꼭 버스가 뒤집어져 봐야만 교통사고가 어떤 건지 알게 되나요? 인생을 많이 안 살아 봤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구요.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는 소리도 이미 어린 여자아이의 차원을 넘어서 성숙한 여인 같다. 문영은 용기를 내서 새삼스럽게 신애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귀엽고 의젓하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다. 그렇게 숨이 넘어갈 듯한 흥분 속에서 아랫도리를 비벼대고 허벅지를 애무했지만 그런 흔적은 간 데 없고 한없이 순결해 보이기만 한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보세요?
신애가 다시 생글거리며 묻는다.
널 소녀로 봐야 할지 여자로 봐야 할지 헷갈려서 그런다. 생긴 건 영락없는 소년데 말하는 걸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애 늙은이 같아서 말이다.
그건 선생님 고정관념 때문이에요.
무슨 고정관념?
고3짜리는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고정관념 말예요. 그렇지 않아요. 알 것 다 알아요. 다만 사회통념상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죠.
무엇을 다 알아?
물어 놓고 문영은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알았다 알았어. 앞으로는 너희들을 어린애가 아닌 완성된 한 인격체로서 존중해 줄 거야. 그럼, 됐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솔직하게 무얼?
선생님은 결혼도 안 하고 애인도 없어요, 맞죠?
맞아, 그래서?
본능적으로 여자가 그리울 거예요. 그런데 아홉 명이나 되는 다 큰 여자애들을 가르치면서 여자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요.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선생님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녜요. 여자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참아 내는 선생님의 노력, 선생님의 순수성에 존경을 표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어쩌잔 얘긴가. 참으로 고약한 입장에 몰리고 말았다. 이 아이가 혹시 간밤에 자기 허벅지를 만진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럭 겁이 나는 대목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보다 더 창피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미리 고백을 해 버리고 용서를 구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쩐지 용서를 해 줄 것도 같다. 이 아이의 말투가 그렇다. 거기다 가장 은밀한 부분을 만져 보았다는 어떤 친밀감, 유대감 같은 것이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숨이 가빠진다. 또 만지고 싶다. 으스러지도록 힘껏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아이는 바로 눈 앞에 있다. 무방비 상태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는 툭 터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래서 어쩌잔 얘긴가. 이 아이를 잡아먹고 나서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애인 관계를 가질 것인가. 아무것도 대책이 서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러면서도 이 불끈거리는 욕망을 어쩌면 좋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문영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이 어려운 사태를 해결한다.
자,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그만 가 봐라. 내일 보자.
제가 있어서 뭔가 불편하세요?
니가 아니고 너 하는 얘기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대화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 5편에 계속..
사랑은 밀어내김과 당김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