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이발소 한 켠에 하얀 가운의 이발사 아저씨(마치 70년대 같은 스타일)가 콧노래를 흥겨이 불며 진태의 뒷머리를 면도기로 밀고 있다. 면도기의 찌잉 하는 시끄러운 소리만이 이발소 안의 한가로운 정적을 깨는 가운데, 슬며시 이발소 문이 열리며, 생머리의 지혜가 손에 베이지색 야구모자를 하나 들고서 진태를 보고 미소지으며 들어온다.
진태 역시 거울로 지혜를 발견하곤 쑥쓰러운 듯한 미소를 짓는다.
지혜 : (진태 곁에 다가와) 다 자른거야?
진태: 그런거 같은데...
이발사 아저씨 : (갑자기 면도기를 멈추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거의 다 됐습니다, 아가씨. 남자친구분을 군대 보내는 가 보죠? (쇼맨십 발휘하듯 팔을 돌려 쇼파를 가르키며) 저기 소파에서 아주 잠깐만 기다리시면 곧 남자친구분의 멋진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게 되겠습니다.
지혜: (수줍게 웃는다) 네.
# 이발소 문 밖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아까 그 모자를 눌러 쓴 진태와 지혜가 나온다.
진태 :(모자를 살짝 들어, 손으로 짦게 깎은 머리를 쓱 쓰다듬는다) 많이 이상해?
지혜: (고개 저으며) 아니..... (또박또박)멋있어.
진태: 진짜지? (너스레를 떨 듯 ) 근데 갑자가 왜이리 시원하냐?
지혜 : (픽 웃으며) 처음이라 그렇지, 조금만 있으면 괜찮을꺼야, 기차시간 놓치겠다. 빨리 가자.
진태: (지혜 손을 힘껏 잡으며) 그래 가자.
# 달리는 기차 안
차창 밖으로 논, 밭, 나즈막한 산들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자리에 나란히 않아 손을 꼭 잡은채, 지혜가 진태의 어깨에 머릴 기대고 있다. 진태는 내내 창밖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고, 지혜는 발 아래 바닥만 응시한다.
잠시 후, 지혜가 입을 연다.
지혜: (여전히 바닥만 응시하며) 우리 처음에 소개팅했던거 생각나?
진태: (고개를 지혜에에 돌리며 장난스레 웃는다) 구으럼! 남자친구 한번도 사귄 적 없는 여자얘가 나온데서, 왠 머리 땋은 조선여인이 나오려나 했었지, 암.
진태 : (장난스럽게 숨넘어가는 소리로) 우와, 은영이,우,우,말도 안돼, 오 , 노, 난 걔 무서워.
지혜 : 괜히 그래, 너. 은영이 앞에서도 그렇게 얘기해봐. 경섭이랑 은영이랑 둘이 같이 덤빌껄?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진태 : (웃음을 멈추고) 소개팅을 너랑 하지 않았더라도, 난 너만 봤을껄,...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하자나, (다짐하 듯) 우린 그러지 말자.
첫사랑이란 말에 지혜의 얼굴이 잠시 굳는다.
# 입소장 입구
많은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 여자친구들로 붐비는 가운데 진태와 지혜가 마주보고 서있다. 그 옆에 진태의 세련된 부모님이 애처롭지만 미소를 잃지않고 서있다.
진태: 나 , 그만 들어갈께. 조심해서 가.
지혜: (눈물 글썽이며 또박또박 한단어씩 힘주어 말한다) 난 걱정마, 너 몸 잘 챙기고 , 건강 조심해야 해.
힘들어도 꾹 참고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한다.)
진태: (지혜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그래, 알았다니까, 걱정마, 니가 더 걱정이다.
진태가 부모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 걸어간다. 지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갑자기 진태를 쫓아가 손을 잡는다. 꼭 껴안았다가 둘이 이마를 맞댄다.
지혜 : 편지 자주 할께, 답장 꼭 써.
진태; 그래, 전화도 할께, 그만 가라.
진태가 다시 뒤돌아서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묻힌다.
지혜가 하염없이 서서 사라진 진태의 뒷모습을 쫓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 지혜의 방 안 , 밤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던 지혜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몸을 일으켜 침대 밑 깊숙한 곳에서 먼지 앉은 상자 하나를 꺼낸다. 크게 '랠리'라고 적힌 상자를 열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까만 쌍안경이 들어잇다.
조심스럽게 그 쌍안경을 꺼내 잠시 어루만지다가 곧 다시 상자에 넣어 큰 쇼핑백속에 넣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 놓은 후,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그 때 문 밖에서 낑낑 대며 문 긁는 소리가 난다.
지혜 : (다시 일어나며) 우리 눈이, 아직 안잤어?
문을 열자 하얀 말티스가 기다린 듯 들어온다.
지혜: ( 품에 안고 다시 침대에 누우며) 오늘만 언니랑 자, 대신. 엄마 아시면 또 쫓겨나니까 조용히 자야돼.
# 햇살이 비추는 지혜 방안, 아침.
가벼운 반바지 차림의 지혜가 급히 책상위의 쇼핑백을 들고 나간다.
# 현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지혜가 베낭을 매고, 한 손에 그 쇼핑백을 든 채, 엄마와 눈이에게 인사하고 현관을 나선다. 매우 좋은 날씨다. 뒤에서 눈이의 캉캉 짖는 소리가 들린다.
# 붐비는 서울역
지혜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안자마자 핸드폰을 건다.
지혜: 여보세요? 현주니? 그래, 나 지금 기차 탔거든, 한 5시쯤 도착할꺼 같아. 아니, 잠깐 어디 좀 들렸다 갈께, 아니, 오래 안걸릴꺼야, 응 그래,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께, 그래, 응응, 이따 봐.
지혜가 전화 끊자마자, 이번엔 옆칸에 앉은 화장만 진한 어려보이는 여자가 핸드폰을 건다.
여자: (시끄러운 톤의 경상도 사투리로)응, 민주냐? 내다 그래, 왜, 직금막 탔다. 갸? 말도 마라, 완전히 끝내버렸제, 어째, 그래도 내도 할만큼은 했제, 솔직히 걔 성격 많이 안좋은거 니도 잘 알잖아. 응? 아니다 2달 갔제. 그 정도면 내가 오래 참은기재, 알고 보니 별로 볼꺼두 없더만, 으응 그러니까 오늘 니가 철이 오빠 좀 불러도, 전화 니가 해, 먼저, 뭐 어때? 가스나야, 친구 위한 긴데, 그 정도도 니는 몬해주나? 그래 알았다. 니만 믿는다, 오이야그래, 이따 다시 전화할께.
지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픽 웃고만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지혜 앞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아무 말없이 귤을 까서 옆의 할아버지 앞에 넣는다. 할아버지 오물오물 맛있게 드신다. 지혜 그 모습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지혜 나레이션: 이젠......................
진짜 널 잊어야 할 때가 된 거 같아, 미안해.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 얘랑 저 할머
니, 할아버지처럼 늙어가고 싶어. 내게 열병처럼 첫사랑을 앓게 했던 너, 지금 듣고 있니?
#김광민 피아노 연주곡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 가 흐르며 카메라 화면이 창 밖으로 나와 넓게 펼쳐진 논밭 위를 아주 빠르게 새처럼 날아가다 낯선 거리 위로 내려 앉는다.
그 거리엔 <대구약국>이란 간판이 크게 붙은 약국과 그 옆으로 <두리 동물병원>이란 간판이 붙은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 거리 (낮)
까만 단발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녀시절 지혜가 품에 힘없어 보이는 새끼시절 눈이를 안고 동물병원으로 급히 걸어온다.
# 동물병원안
햇살이 환히 안을 비추고 잇어서 매우 밝은 느낌이다. 한쪽 벽에선 작은 에어컨이 ' 붕'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초등학생인 도빈이 강아지 한마리를 데리고 놀고 있다가 지혜가 들어오자 일어나 그 강아지를 다른 강아지들이 놀고있는 우리 속에 넣는다.
지혜 : 저기, 의사선생님 어디 가셨니?
도빈: (발랄한 대구 사투리로 빠르게) 예, 고모는요, 잠깐 요 앞 슈퍼집 개 봐주러 갔거든예, 그 개가 새끼 난지가 얼마 안돼서요, 집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거든요, 아마 정서불안 증세인거 같아예.
(다가와 눈이를 쓰다듬는다) 야 말티스 맞지예? 힘이 없네에, 말티스는 워낙 겁도 많고 정도 많아서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에, 혹시 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예?
지혜: (어린 다빈의 사투리 억양에 잠시 웃다가) 아니, 요즘은 내가 매일 같이 있었어, 근데, 이사오느라, 차를 오래 타서 그런가봐, (안쓰러운 듯) 우리 눈이 선생님 조금만 기다리자.
도빈: 야 이름이 넌이예요? 넌아, 니 차멀미 했나부재? 억수로 힘들었겠네.
그 때 문이 열리며 정도많고 성깔도 있어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자 수의사가 까만 왕진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헤어스타일도 숏커트에 양끝이 치켜올라간 듯한 안경을 썼다.
엄마: 그래, 새로 사무실 열고 일 많은거야 좋긴 하지만, 이제 연세도 생각하셔야 하는데...
(혼잣말로) 보약을 좀 지어볼까?
지혜: 그래도 아빠 사업 진짜 하고 싶어하셨자나.
엄마: 그래, 그러니 우리 세식구 몽땅 그 정든 서울 떠나 대구까지 왔지, 이사 올 때 엄마 동네 친구들이 왜 다 나이들어 멀리 가냐구 난리였잖니.
지혜: (웃으며) 엄마 이제 심심해서 어떻해.
엄마: 그러게 (같이 웃는다, 그러다 지혜를 보며 안쓰러운 듯) 엄마보다 지혜 너 친구들 없어서 심심하지?
지혜: 개학하면 새로 사귀여야지, 화영이랑도 계속 연락하고.
엄마: 그래, 친구야 또 사귀면 되는거고, 서울 친구들도 또 가서 보면 되는거지, 너 개학이 22일 이랬나? 한 20일 정도밖에 안 남앗네, 참, 좀 알아봐서 여기 학원이라도 다닐래?
지혜: 아니, 일단 개학하고 적응 좀 되면.(화제 바꾸듯) 언닌 전화 왔었어?
엄마 : 아니, 이따 시간 맞춰서 우리가 해보자, 캐나다랑 여기라 10시간 정도 차이랬지? (한숨) 그래도 지연이야 워낙 똑 뿌러지는 성격이니까 별 걱정은 안해. 걔야 어려서부터 이쁘지, 똑똑하지, 지일 지가 다 알아서 척척 햇지뭐, 걱정시킨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지혜: (수긍하듯 미소 지으며 혼잣말)으응...
엄마: (지혜를 한번 쓱 보고) 그래도 지혜 너만은 못해, 너처럼 정많고 착한 동생이 어딨어. 언니한테 뭐든 다 양보하고, 고건 그저 자기 잘난 줄만 알았지.
지혜: 왜, 그래도 난 언니처럼 똑똑하고 잘나봤음 좋겟어.
그 때 눈이가 낑낑대며 부엌으로 들어온다.
지혜: (일어나 눈이를 안으며)어머, 눈이 깻네? 밥먹고 약 먹자.
엄마: (찡그리며 약간 호들갑스럽게) 야휴, 얘, 식탁에선 안지마, 털 떨어져, 밑에서 먹여, 밑에서.
# 이른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해가 벌써 환히 떴다. 대구의 여름답게 벌써 해가 뜨거울 기미가 보인다.
담이 낮은 집들이 쭉 이어진 넓직한 골목 정경이 하늘위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지나는 차, 사람 하나없이 조용한 이른 아침이다.
동진이가 골목 끝에 약수터로 이어진 언덕길을 꺾어져 내려온다. 하얀 박스형 면티에 헐렁한 남방을 걸쳤다. 어깨엔 큰 천체망원경통을 매고 있다.
그 때 지혜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츄리닝 후드 원피스 차림으로 현관을 열고 나온다.
담이 낮아서 골목 밖에서도 지혜네 마당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마침 걸어오던 동진이가 지혜를 발견한다. 그리고 지혜네 대문앞을 지나는데 신문이 둘둘 말린채 대문 틈사이 밑에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띈다.
그 때 마침 대문 안쪽에서 지혜는 우유주머니에서 품에 우유를 꺼내들고, 다음엔 뭔가를 찾듯 대문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동진 : ( 담너머에서 신문을 쑥 내밀며) 여기.
지혜: (눈이 동그래지며 머뭇거리다 받아든다.)
둘은 잠시 어색하게 서로 바라본다.
지혜 : (동진이의 얼굴을 살피면서) 원래 이 때쯤 신문 넣는 거예요?
동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린다
지혜: 아, 그렇구나, 이사온지 얼마 안되서 잘 몰랐어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안녕히 가세요.
동진이 물끄러미 뒤돌아 가는 지혜를 바라보다 다시 가던 길로 걸어가고, 지혜 들어가는 척하다 뒤돌아 그 모습을 담 너머로 바라본다. 저만치 가던 동진이 갑자기 발을 헛디뎠는지 앞으로 넘어지며 옆에 세워진 양철통을 손으로 치는 바람에 통이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진다. 어느 집 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컹컹 짖어댄다.
그 해 여름에서 겨울(2)
# 허름한 이발소 안
한가로운 이발소 한 켠에 하얀 가운의 이발사 아저씨(마치 70년대 같은 스타일)가 콧노래를 흥겨이 불며 진태의 뒷머리를 면도기로 밀고 있다. 면도기의 찌잉 하는 시끄러운 소리만이 이발소 안의 한가로운 정적을 깨는 가운데, 슬며시 이발소 문이 열리며, 생머리의 지혜가 손에 베이지색 야구모자를 하나 들고서 진태를 보고 미소지으며 들어온다.
진태 역시 거울로 지혜를 발견하곤 쑥쓰러운 듯한 미소를 짓는다.
지혜 : (진태 곁에 다가와) 다 자른거야?
진태: 그런거 같은데...
이발사 아저씨 : (갑자기 면도기를 멈추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거의 다 됐습니다, 아가씨. 남자친구분을 군대 보내는 가 보죠? (쇼맨십 발휘하듯 팔을 돌려 쇼파를 가르키며) 저기 소파에서 아주 잠깐만 기다리시면 곧 남자친구분의 멋진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게 되겠습니다.
지혜: (수줍게 웃는다) 네.
# 이발소 문 밖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아까 그 모자를 눌러 쓴 진태와 지혜가 나온다.
진태 :(모자를 살짝 들어, 손으로 짦게 깎은 머리를 쓱 쓰다듬는다) 많이 이상해?
지혜: (고개 저으며) 아니..... (또박또박)멋있어.
진태: 진짜지? (너스레를 떨 듯 ) 근데 갑자가 왜이리 시원하냐?
지혜 : (픽 웃으며) 처음이라 그렇지, 조금만 있으면 괜찮을꺼야, 기차시간 놓치겠다. 빨리 가자.
진태: (지혜 손을 힘껏 잡으며) 그래 가자.
# 달리는 기차 안
차창 밖으로 논, 밭, 나즈막한 산들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자리에 나란히 않아 손을 꼭 잡은채, 지혜가 진태의 어깨에 머릴 기대고 있다. 진태는 내내 창밖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고, 지혜는 발 아래 바닥만 응시한다.
잠시 후, 지혜가 입을 연다.
지혜: (여전히 바닥만 응시하며) 우리 처음에 소개팅했던거 생각나?
진태: (고개를 지혜에에 돌리며 장난스레 웃는다) 구으럼! 남자친구 한번도 사귄 적 없는 여자얘가 나온데서, 왠 머리 땋은 조선여인이 나오려나 했었지, 암.
지혜: 머야, 나오기 싫은데 나왔다는거야 그럼?
잔태: 어쩌면,,, (지혜가 눈을 흘기자) 아니, 장난이야, 장난, 더 좋았다구,
지혜: 사실은 나 그 때 소개팅 안 나갈뻔 햇다
진태: 진짜?
지혜: 사실은 나, 은영이 대신 대타로 떠밀려서 나간거야, 은영이가 경섭이랑 다시 만나기로 했다면서 하도 애원하길래 " 좋아, 그럼 나가서 재밌는 영화나 보구 맛난거나 실컷 먹자 " 그러구 나간거야. (웃으며) 안그랬음, 너 은영이랑 소개팅 했을껄?
진태 : (장난스럽게 숨넘어가는 소리로) 우와, 은영이,우,우,말도 안돼, 오 , 노, 난 걔 무서워.
지혜 : 괜히 그래, 너. 은영이 앞에서도 그렇게 얘기해봐. 경섭이랑 은영이랑 둘이 같이 덤빌껄?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진태 : (웃음을 멈추고) 소개팅을 너랑 하지 않았더라도, 난 너만 봤을껄,...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하자나, (다짐하 듯) 우린 그러지 말자.
첫사랑이란 말에 지혜의 얼굴이 잠시 굳는다.
# 입소장 입구
많은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 여자친구들로 붐비는 가운데 진태와 지혜가 마주보고 서있다. 그 옆에 진태의 세련된 부모님이 애처롭지만 미소를 잃지않고 서있다.
진태: 나 , 그만 들어갈께. 조심해서 가.
지혜: (눈물 글썽이며 또박또박 한단어씩 힘주어 말한다) 난 걱정마, 너 몸 잘 챙기고 , 건강 조심해야 해.
힘들어도 꾹 참고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한다.)
진태: (지혜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그래, 알았다니까, 걱정마, 니가 더 걱정이다.
진태가 부모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 걸어간다. 지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갑자기 진태를 쫓아가 손을 잡는다. 꼭 껴안았다가 둘이 이마를 맞댄다.
지혜 : 편지 자주 할께, 답장 꼭 써.
진태; 그래, 전화도 할께, 그만 가라.
진태가 다시 뒤돌아서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묻힌다.
지혜가 하염없이 서서 사라진 진태의 뒷모습을 쫓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 지혜의 방 안 , 밤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던 지혜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몸을 일으켜 침대 밑 깊숙한 곳에서 먼지 앉은 상자 하나를 꺼낸다. 크게 '랠리'라고 적힌 상자를 열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까만 쌍안경이 들어잇다.
조심스럽게 그 쌍안경을 꺼내 잠시 어루만지다가 곧 다시 상자에 넣어 큰 쇼핑백속에 넣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 놓은 후,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그 때 문 밖에서 낑낑 대며 문 긁는 소리가 난다.
지혜 : (다시 일어나며) 우리 눈이, 아직 안잤어?
문을 열자 하얀 말티스가 기다린 듯 들어온다.
지혜: ( 품에 안고 다시 침대에 누우며) 오늘만 언니랑 자, 대신. 엄마 아시면 또 쫓겨나니까 조용히 자야돼.
# 햇살이 비추는 지혜 방안, 아침.
가벼운 반바지 차림의 지혜가 급히 책상위의 쇼핑백을 들고 나간다.
# 현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지혜가 베낭을 매고, 한 손에 그 쇼핑백을 든 채, 엄마와 눈이에게 인사하고 현관을 나선다. 매우 좋은 날씨다. 뒤에서 눈이의 캉캉 짖는 소리가 들린다.
# 붐비는 서울역
지혜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안자마자 핸드폰을 건다.
지혜: 여보세요? 현주니? 그래, 나 지금 기차 탔거든, 한 5시쯤 도착할꺼 같아. 아니, 잠깐 어디 좀 들렸다 갈께, 아니, 오래 안걸릴꺼야, 응 그래,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께, 그래, 응응, 이따 봐.
지혜가 전화 끊자마자, 이번엔 옆칸에 앉은 화장만 진한 어려보이는 여자가 핸드폰을 건다.
여자: (시끄러운 톤의 경상도 사투리로)응, 민주냐? 내다 그래, 왜, 직금막 탔다. 갸? 말도 마라, 완전히 끝내버렸제, 어째, 그래도 내도 할만큼은 했제, 솔직히 걔 성격 많이 안좋은거 니도 잘 알잖아. 응? 아니다 2달 갔제. 그 정도면 내가 오래 참은기재, 알고 보니 별로 볼꺼두 없더만, 으응 그러니까 오늘 니가 철이 오빠 좀 불러도, 전화 니가 해, 먼저, 뭐 어때? 가스나야, 친구 위한 긴데, 그 정도도 니는 몬해주나? 그래 알았다. 니만 믿는다, 오이야그래, 이따 다시 전화할께.
지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픽 웃고만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지혜 앞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아무 말없이 귤을 까서 옆의 할아버지 앞에 넣는다. 할아버지 오물오물 맛있게 드신다. 지혜 그 모습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지혜 나레이션: 이젠......................
진짜 널 잊어야 할 때가 된 거 같아, 미안해.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 얘랑 저 할머
니, 할아버지처럼 늙어가고 싶어. 내게 열병처럼 첫사랑을 앓게 했던 너, 지금 듣고 있니?
#김광민 피아노 연주곡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 가 흐르며 카메라 화면이 창 밖으로 나와 넓게 펼쳐진 논밭 위를 아주 빠르게 새처럼 날아가다 낯선 거리 위로 내려 앉는다.
그 거리엔 <대구약국>이란 간판이 크게 붙은 약국과 그 옆으로 <두리 동물병원>이란 간판이 붙은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 거리 (낮)
까만 단발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녀시절 지혜가 품에 힘없어 보이는 새끼시절 눈이를 안고 동물병원으로 급히 걸어온다.
# 동물병원안
햇살이 환히 안을 비추고 잇어서 매우 밝은 느낌이다. 한쪽 벽에선 작은 에어컨이 ' 붕'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초등학생인 도빈이 강아지 한마리를 데리고 놀고 있다가 지혜가 들어오자 일어나 그 강아지를 다른 강아지들이 놀고있는 우리 속에 넣는다.
지혜 : 저기, 의사선생님 어디 가셨니?
도빈: (발랄한 대구 사투리로 빠르게) 예, 고모는요, 잠깐 요 앞 슈퍼집 개 봐주러 갔거든예, 그 개가 새끼 난지가 얼마 안돼서요, 집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거든요, 아마 정서불안 증세인거 같아예.
(다가와 눈이를 쓰다듬는다) 야 말티스 맞지예? 힘이 없네에, 말티스는 워낙 겁도 많고 정도 많아서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에, 혹시 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예?
지혜: (어린 다빈의 사투리 억양에 잠시 웃다가) 아니, 요즘은 내가 매일 같이 있었어, 근데, 이사오느라, 차를 오래 타서 그런가봐, (안쓰러운 듯) 우리 눈이 선생님 조금만 기다리자.
도빈: 야 이름이 넌이예요? 넌아, 니 차멀미 했나부재? 억수로 힘들었겠네.
그 때 문이 열리며 정도많고 성깔도 있어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자 수의사가 까만 왕진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헤어스타일도 숏커트에 양끝이 치켜올라간 듯한 안경을 썼다.
고모: 아구, 더버라, 와이리 덥노? (그러다가 지혜를 발견하곤) 아이구, 어서 오세요, 오래 기다렸어예? 미얀네.
지혜: 아니예요. (눈이를 약간 들어보이며) 얘가 아파서요.
고모: 그래예, 그래그래 어디보자, (들고있던 가방을 개 침대위에서 열고 작은 후레쉬 등을 꺼내며 ) 입 안 검사를 먼저 해봐야제.
도빈도 바로 옆에서 열심히 들여다본다. 지혜가 눈이를 침대에 눕히자 싫은 듯 힘없이 낑씽 댄다.
고모: (눈이 입을 후레쉬로 들여다보며) 이름이 머지예?
도빈: (재빨리 끼여들며) 넌이. 이 누나네가 이사오느라 차를 오래 타서 그렇데. 고모, 스트레스성 강아지 질환 맞재?
고모 : (핀잔하듯) 봐라, 정신사납다. 니는 저 옆에 가서 거즈나 한봉지 가져와라.
다빈이 약간 풀 죽은듯 옆으로 간다.
고모 : ( 계속 진찰하며) 참 말 많지예, 누가 의사아들내미 아니랠까비, 쟈가 요즘 의학용어 갖다 붙이기 선수가 다 됐네. (도빈이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추며 지혜를 향해 ) 근데, 별 말도 안되는 엉터리 용어뿐이고...
지혜, 고모 같이 웃는다.
고모 : 말투 보니까 설서 왔나보네예.
지혜: 네.
도빈: (다시 끼여들며) 누나 진짠겨? 내두 설 몇번 가봤는데예, 육삼빌딩이랑, 롯데월드랑.
고모: 심한 건 아니고, 피곤해서 탈수증세가 좀 있네에, 일단 주사 한대 맞히고 낼다시 와봐야겠네예 ( 일어나 주사를 챙기며) 봐라, 근데 도빈이 너, 와 사투리가 더 심해졌노? (놀리듯) 인쟈, 설가도 사람들이 니 말은 하나 몬알아 듣겠다.
도빈: (약오르는듯) 와 그라노, 엄마,아빠, 형도 다 잘만 알아듣느데, 고모만 자꾸 그런다.
고모: 봐라, 이 누나도 알아듣기 힘들낀데.
도빈: 아니다, 아까도 내랑 얘기만 잘 했다, 그치요? 누나?
지혜: (웃으며) 응,그래.
고모: 암튼, 이 고모 빼고 지 가족 아무두 안쓰는데, 왜 니만 그래 쓰노? 이 고모가 그래 좋나?
도빈 화난 듯 의자에 쿵 앉으며 고갤 숙이고 허공에 발을 찬다
고모: (도빈을 힐끗 보고 웃으며 눈이에게 주사를 놓는다) 근데 어디로 이사왔어예? 이 동네라면 내가 다 잘 아는데.
지혜: 저기 XX 대 가기 직전에요, <피터팬>제과점 골목 아세요?
고모: 아, 거기, 잘 알쟤, 그 골목 끝에 언덕길로 계속 올라가면 약수터 있지예, 이 동네 사람들 많이 가거든예, 내도 운동삼아 자주 가고. 앞으로 눈이 데리고 글로 산책도 다니고 하믄 좋겠네.
# 동물병원 문밖
문이 열리며, 지혜가 눈이를 안고 인사하며 나온다. 고모 , 도빈이 함께 문을 열고 서서 인사하고 다시 들어간다.
# 다시 동물병원 안
고모: (슬쩍 도빈을 보며) 도빈아, 설 누나 예쁘제?
도빈:응,...그래도 미연이 누나만큼은 아니다.
고모: (살살 약올리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끌며) 미연이 누나도 사투리는 안쓰제.
도빈: (매우 약올라서) 아 와자꾸 성가스게 그라노? 고모은 안쓰나? 내짝슬기도 쓰고, 생님도 쓰고,울 반 아들 다 쓰고, 태권도 생님이랑 바이올린 생님이랑 다 쓴다, 엄마아빠형도 안그라는데 고모만 자꾸 놀린다!
그 때 병원 안쪽에 유리벽으로 막아 놓은 의료기구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큰 키의 동진이가 성큼성큼 걸어나온다.
고모: (놀란 눈으로) 어구, 동진이 니 지금까지 거기서 잔긴가?
동진 : 네 (괜히 도빈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모: 소파에서 자기 불편하지도 않드나?
동진: (이번엔 갑자기 우리속에 강아지를 한마리 꺼내 번쩍 들어올리고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괜찮아 요.
고모: (혀차며) 그란께, 내 머랫나, 별관측하러 다니는 거두 좋지만, 좀 쉬엄쉬엄해라, 니, 부모님들이 워낙 조용하셔서 그러제, 니도 이제 곧 고3이데이.
도빈: 형, 내도 한번 데려가 준다고 약속햇데이, 내도 높은데서 천체망원경 졈 함 보여도고.
동진: 그래, 임마. (강아지를 바로 우리에 넣고 주머니에 손을 꽂는다)
고모: (확인하듯) 니 의대 자신 있는기제?
동진: (못들은척 문을 향하며) 갈께요.
고모: 그래, 알았다, 이 고모말은 잔소리다 그거제, 집으로 가나?
동진: 네 (문 열고 나가며) 갈께요.
# 다시 동물병원 밖
맞은편 정류장에서 지혜가 눈이를 안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가 오자 탄다.
동진은 병원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지혜를 태운 버스가 가 버리자 자신도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 지혜네 집
집안에 왠지 적막함이 느껴지는 조용한 풍경.
지혜, 엄마 둘이서 부엌 식탁에서 저녁식사 중이다.
엄마: ( 젓가락 질을 멈추고 한숨 쉬며) 아빠는 오늘도 몇시쯤이나 들어오시려나 모르겠다.
지혜: 오늘도 많이 늦으신데요?
엄마: 그래, 새로 사무실 열고 일 많은거야 좋긴 하지만, 이제 연세도 생각하셔야 하는데...
(혼잣말로) 보약을 좀 지어볼까?
지혜: 그래도 아빠 사업 진짜 하고 싶어하셨자나.
엄마: 그래, 그러니 우리 세식구 몽땅 그 정든 서울 떠나 대구까지 왔지, 이사 올 때 엄마 동네 친구들이 왜 다 나이들어 멀리 가냐구 난리였잖니.
지혜: (웃으며) 엄마 이제 심심해서 어떻해.
엄마: 그러게 (같이 웃는다, 그러다 지혜를 보며 안쓰러운 듯) 엄마보다 지혜 너 친구들 없어서 심심하지?
지혜: 개학하면 새로 사귀여야지, 화영이랑도 계속 연락하고.
엄마: 그래, 친구야 또 사귀면 되는거고, 서울 친구들도 또 가서 보면 되는거지, 너 개학이 22일 이랬나? 한 20일 정도밖에 안 남앗네, 참, 좀 알아봐서 여기 학원이라도 다닐래?
지혜: 아니, 일단 개학하고 적응 좀 되면.(화제 바꾸듯) 언닌 전화 왔었어?
엄마 : 아니, 이따 시간 맞춰서 우리가 해보자, 캐나다랑 여기라 10시간 정도 차이랬지? (한숨) 그래도 지연이야 워낙 똑 뿌러지는 성격이니까 별 걱정은 안해. 걔야 어려서부터 이쁘지, 똑똑하지, 지일 지가 다 알아서 척척 햇지뭐, 걱정시킨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지혜: (수긍하듯 미소 지으며 혼잣말)으응...
엄마: (지혜를 한번 쓱 보고) 그래도 지혜 너만은 못해, 너처럼 정많고 착한 동생이 어딨어. 언니한테 뭐든 다 양보하고, 고건 그저 자기 잘난 줄만 알았지.
지혜: 왜, 그래도 난 언니처럼 똑똑하고 잘나봤음 좋겟어.
그 때 눈이가 낑낑대며 부엌으로 들어온다.
지혜: (일어나 눈이를 안으며)어머, 눈이 깻네? 밥먹고 약 먹자.
엄마: (찡그리며 약간 호들갑스럽게) 야휴, 얘, 식탁에선 안지마, 털 떨어져, 밑에서 먹여, 밑에서.
# 이른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해가 벌써 환히 떴다. 대구의 여름답게 벌써 해가 뜨거울 기미가 보인다.
담이 낮은 집들이 쭉 이어진 넓직한 골목 정경이 하늘위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지나는 차, 사람 하나없이 조용한 이른 아침이다.
동진이가 골목 끝에 약수터로 이어진 언덕길을 꺾어져 내려온다. 하얀 박스형 면티에 헐렁한 남방을 걸쳤다. 어깨엔 큰 천체망원경통을 매고 있다.
그 때 지혜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츄리닝 후드 원피스 차림으로 현관을 열고 나온다.
담이 낮아서 골목 밖에서도 지혜네 마당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마침 걸어오던 동진이가 지혜를 발견한다. 그리고 지혜네 대문앞을 지나는데 신문이 둘둘 말린채 대문 틈사이 밑에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띈다.
그 때 마침 대문 안쪽에서 지혜는 우유주머니에서 품에 우유를 꺼내들고, 다음엔 뭔가를 찾듯 대문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동진 : ( 담너머에서 신문을 쑥 내밀며) 여기.
지혜: (눈이 동그래지며 머뭇거리다 받아든다.)
둘은 잠시 어색하게 서로 바라본다.
지혜 : (동진이의 얼굴을 살피면서) 원래 이 때쯤 신문 넣는 거예요?
동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린다
지혜: 아, 그렇구나, 이사온지 얼마 안되서 잘 몰랐어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안녕히 가세요.
동진이 물끄러미 뒤돌아 가는 지혜를 바라보다 다시 가던 길로 걸어가고, 지혜 들어가는 척하다 뒤돌아 그 모습을 담 너머로 바라본다. 저만치 가던 동진이 갑자기 발을 헛디뎠는지 앞으로 넘어지며 옆에 세워진 양철통을 손으로 치는 바람에 통이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진다. 어느 집 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컹컹 짖어댄다.
동진이 금새 일어나 발목을 약간 돌려보더니, 다시 태연히 걸어간다.
지혜 자꾸 웃음을 터뜨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