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16)

말글눈2003.05.29
조회517

16. 중매


그렇게 다 끝난 줄 알고 있는데 갑자기 신애한테서 휴대폰이 걸려 왔다.
선생님한테 예쁘고 얌전한 처녀 하나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어떠고 자시고 얘기할 필요도 없다. 신애하고 또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정말 예쁘고 참한 처녀인지는 그 다음 문제다. 신애와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의 관계가 아직도 꺼림칙해서 여자라도 하나 소개해 주고 정리하려는 신애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도 좋다. 다시 만날 핑계만 있다면 물불을 안 가릴 기분인 것이다.
제 친구 언닌데요 지금 방송국 분장실에서 근무하고 있구요. 나이는 서른 둘. 나이가 좀 많지만 선생님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겠어요? 거기다 분장사라는 직업이 미술하고도 좀 통하잖아요? 한번 만나 보세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마음에 들고 안 드는 건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를 차마 할 수가 없다. 한시바삐 신애를 만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선생님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여의도 방송국 근처의 일식집에서 만났을 때 신애가 또 그 소리를 강조한다. 예쁘고 얌전하다는 아가씨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숙녀는 약속시간에 5분쯤 늦는 것이 예의라면서요?
문영이 문득 시계를 보자 신애가 변명을 해 준다. 문영은 미지의 늙은 아가씨 때문에 시계를 본 것이 아니다. 신애가 언제쯤 자리를 뜰 것인가 그것이 걱정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가씨는 정확히 5분 늦게 나타났다. 참한 건 알 수 없어도 예쁘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골고루 균형이 잡혀 있고 살결도 뽀얗다. 저만한 인물을 가지고 왜 여태 시집을 못 갔을까 궁금하다. 아가씨의 이름은 이숙경이라고 한다. 무척 평범한 이름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신애가 중간에서 애를 쓰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나누는 이야기는 밋밋하기만 하다. 회와 식사가 나왔다. 문영은 잘 됐다 싶어 얼른 국산 양주 한 병을 시킨다. 신애도 맥주를 시키더니 숙경과 나누어 마신다. 그제서야 조금씩 분위기가 잡힌다. 문영이 묻는다.
흔한 직종은 아닌데 어쩌다 분장일을 하게 됐어요?
숙경이 배시시 웃는다.
그 사연을 털어놓자면 좀 창피한데요. 사실은 탈렌트를 하겠다고 방송국 근처에서 얼씬거리다가 그렇게 됐어요. 처음에는 월급도 없이 그냥 실습생처럼 따라다니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방송국 안에 있으면 탈렌트를 할 기회가 많을 것 같아서 눌러앉고 만 거죠. 그런데 정식 직원은 됐지만 아직 탈렌트는 못하고 나이만 먹었어요. 그 바람에 시집도 못 가구요.
솔직하게 털어놓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문영이 다시 묻는다.
아직도 그 꿈은 못 버리고 있나요?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거의 포기상태죠. 새파란 영계들이 우글우글한데 저 같은 노처녀한테 기회가 오겠어요?
신애가 옆에서 오금을 박는다.
아줌마 역이나 할머니 역도 있잖아?
요것이 까불고 있어.
그리고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사실 탈렌트가 될 기회는 많이 있었어요. 아는 피디들도 많이 있고 그래서 출연을 좀 시켜 달라고 부탁하면 안 들어줄 처지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건 순 다방이나 술집 종업원 아니면 가정부 같은 역만 주는 거예요. 사극에서는 대사 한마디 없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청하게 서 있는 궁녀 역이나 주구요. 이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래서 몇 번 출연을 해 보다가 그만둬 버렸지 뭐예요. 속으로는 천둥이 잦다 보면 소나기가 온다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하고 잔뜩 칼을 갈면서 말예요. 그렇게 후딱 10년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결혼하자고 따라다니는 남자도 몇 명 있었지만 유명해지기 전에는 절대 결혼 안 한다고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 기회도 놓쳐 버리구요.
우선 솔직하고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든다.
숙경이 화장실에 갔을 때 문영이 그렇게 말하자 신애가 반색을 한다.
어머,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앞으로 잘해 보세요. 참 좋은 언니에요.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점이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 잘해 볼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다. 탈렌트를 하겠다고 10년 세월을 기다렸다는 대목은 징그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 올드미스와 사귀는 동안에는 계속 신애도 만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그날의 맞선은 세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 준 셈이다.
문영은 그 후로 2주일에 한 번꼴로 서울에 올라와 숙경을 만났다.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판에 박은 듯 언제나 똑같았다. 방송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강변에 나가 바람을 쏘이거나 호프집에 가서 2차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숙경을 택시에 태워 보낸 다음 자신은 영등포역으로 가 밤기차를 타고 내려가면 그만이다. 여름이 다 가도록 그 모양이었다. 문영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여자를 어디로 끌고다니며 즐겁게 해 줘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숙경이라는 올드미스하고는 그런 생심이 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이라든가 욕정 같은 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문영의 관심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신애를 끌어내느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 중매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신애를 끌어낸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신애도 불러내서 같이 식사나 합시다.
문영이 한번은 큰맘 먹고 얘기를 꺼냈더니 숙경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한마디로 잘라 버린다.
어른들 데이트하는 데 어린애가 왜 껴요? 그리고 그 애도 지금 데이트하느라고 정신 없다구요.
그러더니 본론으로 들어간다.
제가 다음 주 목요일부터 휴가거든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바닷가에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기습공격을 당한 셈이다.
둘이 같이요?
말을 해 놓고는 아차 싶다. 이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금방 가시돋친 반격이 돌아온다.
그럼, 저 혼자 가면서 시간 좀 낼 수 있냐고 했겠어요?
아이구, 이거 미안합니다. 내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요. 좋아요, 갑시다. 어차피 나도 이번 여름에 바다 구경을 못했으니까요. 어디가 좋겠어요?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갈 때니까 동해안이 좋겠죠? 경포대 어때요?
경포대는 너무 번잡하잖아요? 화진포라고 가 봤어요?
화진포요? 처음 듣는데요.
경포대에서 휴전선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용하고 아담한 해수욕장이 나와요. 옛날에 가 봤는데 정말 맘에 들더군요.
어디든 좋아요. 단 둘이 같이 가서 지낸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럼, 목요일에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죠.
참 그리구요.
또 무슨 부탁이 나오려나 긴장하는데 싱거운 소리를 한다.
지금부터는 저한테 말씀 놓으세요. 나이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나고, 서로 만난 지도 오래 됐잖아요?
그래요? 그러지 뭐.
그렇게 해서 구색이 갖추어진 셈이다.
말도 놓기로 하고 해수욕장에도 같이 가게 됐으니 이제 약혼한 사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문영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다. 결혼까지 가게 돼도 무방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선 숙경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좋고 인물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아무리 올드미스라지만 자신처럼 40이 넘은 홀아비나 다름이 없는 노총각한테 시집올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 홀아비 생활에 지칠 때도 되었다. 늦게나마 자식이라도 하나 낳게 된다면 뭔가 달라져도 달라질 것이다. 거기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마력적인 유혹이 있다. 신애다. 숙경과 같이 살게 된다면 신애가 형부네 집처럼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다. 문영으로서는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평생 동안 신애를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까짓 거 해치워 버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숙경이 또 보챈다.
아직도 멀었어요?
진짜 다 왔어. 저기 소나무 숲하고 모래사장이 보이지? 바로 저기야.
화진포에 도착한 것이다.
신애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그 별장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인지 찡하고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혹시 신애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와 있어본들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가족들과 함께 왔거나 아니면 애인이라는 녀석과 함께일 것이다. 백사장에는 막바지 여름햇볕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꽤 북적거린다.
어디가 좋을까?
기왕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잡아요. 저기 저 하얀 건물 어때요? 호텔인가요?
차를 앞에 대고 보니 호텔은 아니고 콘도다. 문영은 다행이다 싶다.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호텔이라면 공연히 주눅이 들고 쑥스럽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객실 두 개짜리 방을 잡아 들었다. 숙경은 우선 창으로 달려가 바다를 보면서 연신 탄성을 지른다.
어머, 바다예요! 바다를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어요. 저기 좀 보세요. 진짜 요트도 있네요. 정말 그림 같지 않아요?
문영에게는 어린애 같은 그런 점이 또 마음에 든다. 숙경이 재촉을 한다.
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요. 곧 해가 지게 생겼어요. 그 전에 바다에 들어갔다 와야지요.
바닷물은 차갑고 물쐐기들이 따끔따끔 쏘아댄다. 여름이 끝나간다는 증거다. 문영은 튜브에 숙경을 태우고 파도를 탔다. 속없이 들뜨고 즐거워진다. 여자와 함께 바닷물 속에 들어와 본 적이 한번도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엄지발가락에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앙징맞은 숙경의 발을 보자 맹렬하게 만지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것이다. 신애의 허벅지를 훔치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못 만질 것도 없다. 튜브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어물쩍 숙경의 발을 잡아 본다. 짜릿한 쾌감이 손을 통해 전해진다. 그냥 깨물어 주고 싶다. 숙경은 아무 짬도 모르고 깔깔거리기만 한다. 물속에서, 수영복 안에서 그 물건이 또 속없이 빳빳하게 발기한다. 어서 밤만 되어라. 내 틀림없이 이 여자를 짓이겨 줄 것이다. 단단히 결심을 하는데도 그 물건은 도무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문영은 튜브를 밀어 주는 척하며 여자의 종아리를 잡아 본다. 매끄럽고 부드럽고 탄력이 있다. 숙경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다.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허벅지를 만져 본다.
아이 간지러워요.
숙경은 그러면서도 문영의 손을 치우지 않는다. 이쯤 되면 더 망설일 것도 없다. 문영은 대담하게 숙경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물장구를 치면서 구석구석을 주무른다. 여자가 수영복을 입었건만 침대에서 안아 보는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극적이다. 문영은 속으로 안타깝게 소리친다. 어서 밤만 되어라, 밤만.
저, 취했나봐요.
방에 들어오자 숙경이 문영의 팔에 매달리며 비틀거린다. 숙경은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두 병 마셨다.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문영도 취하기는 마찬가지다.
저 좀 누워야겠어요.
숙경이 침대에 가서 벌렁 드러눕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그러나 막상 여자가 침대에 드러눕고 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지금까지 항상 여자가 시작했지 자신이 시작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시작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바로 눈앞에 젊고 싱싱한 여자가 모든 것을 내맡기고 누워 있는 것이다. 문영은 숙경의 곁에 걸터앉았다. 신애 때와는 달리 거침없이 여자의 허벅지 안으로 손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신애 생각이 난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고 숨이 가쁘다. 팬티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무성한 숲을 파고 드는데 갑자기 숙경이 무드를 깨 버린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문영은 화들짝 놀란다.
응?
무드를 좀 잡아야지요. 우선 불부터 끄고 키스부터 시작해서 적당히 달아오르거든 옷을 벗고… 영화도 못 봤어요?
알았어.
경험은 적지만 그 정도라면 못할 것도 없다.
문영은 불을 껐다. 노란 스탠드 불빛으로 물든 방 안에는 음탕한 기운이 밀려든다. 몸을 포개고 입술을 겹치자 숙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영의 목을 끌어안는다. 노골적이고 격렬한 입맞춤이다. 문영은 한손으로 숙경을 안은 채 한손으로는 허벅지 사이를 사정없이 주물렀다. 마치 신애에게 못해 봤던 분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숙경이 신음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문영을 밀어내고는 급하게 옷을 벗기 시작한다. 문영도 서둘러 옷을 벗었다. 지난날 역전의 노장인 정숙과 화영으로부터 충실하게 학습을 한 기본 테크닉이 있다. 여자의 두 다리를 활짝 벌려 놓고 우거진 수풀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다.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차마 시도할 수 없는 게 오럴 섹스다.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여자의 질에 혀를 들이대고 물고 빠는 행위는 결코 아름답거나 상쾌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필요하면 해야 한다. 여자를 흥분시키는 최고의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숙경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다급하게 소리지른다.
빨리 들어와요. 죽을 것 같아요, 빨리요.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 몸을 묻어 본 것이 참으로 얼마 만인가. 반갑고 뿌듯하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희열이 온몸을 떨리게 한다. 숙경은 그보다 더한 것 같다. 두 다리를 문영의 허벅지에 감고 엉덩이를 격렬하게 펄떡이면서 거의 몸부림을 친다. 문영은 더 참지 못하고 어느 순간에 통쾌하게 사정을 해 버린다. 그러나 몸놀림을 그치지 않는다. 정숙과 화영으로부터 전수받은 신사의 도리라는 것이다. 비로소 밑에 깔려 금방 숨이 넘어갈 듯한 숙경의 표정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숙경은 계속 비명을 지른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다. 문득 명색이 처녀라면서 언제 이렇게 숙달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당초 숫처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다. 그때 숙경이 결정타를 날린다. 절정에 올랐는지 문영의 목을 으스러지도록 꽉 끌어안고 몸을 떨면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아 성훈씨, 너무 좋아. 성훈씨, 너무 사랑해. 나 죽을 것 같아. 아아 성훈씨.
이튿날 아침을 먹으면서 숙경이 수줍게 미소지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저, 어젯밤에 정말 숨넘어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 테크닉은 다 어디서 배웠어요?
숫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숙경이는 나보다 한 수 위던데, 뭐.
아이, 말도 안 돼요. 전 아무것도 모른단 말예요. 물론 숫처녀라는 건 아니지만요.
어젯밤 절정에서 엉뚱한 남자의 이름을 외친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
선생님하고 전 찰떡 궁합처럼 잘 맞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문영은 그냥 웃기만 한다. 숙경이 좀 쑥스러웠는지 화제를 바꾼다.
참, 옥천에 산장을 지었다면서요?
산장은 무슨. 그냥 오두막이야.
신애 말 들으니까 완전히 호화별장이라던데요, 뭐.
30평짜리 호화별장도 있나?
깊은 산속에서는 30평도 호화별장이라고 할 수 있죠, 뭐. 언제 구경시켜 주실 거예요?
언제든지.
그럼, 여기서 하룻밤 더 자고 옥천으로 가요.
지금은 안 돼.
왜요?
문영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생각해 낸다.
당분간 서울에 있어야 돼.
왜요?
친구가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도와줘야 하거든.
그래요? 그럼, 언제 구경시켜 주실래요?
가을쯤. 단풍이 끝내 주거든.
그것도 좋겠네요. 그런데 정말 거기서 사실 거예요?
살 생각이니까 집을 지었지.
그림만 그리면서요?
농사도 짓고.
하긴 화가니까 도시에 살지 않아도 아무 지장이 없겠네요. 선생님 부자라면서요?
신애가 그래?
예. 재산이 전부 얼마나 되는데요?
얼마 안 돼. 신애가 잘 몰라서 그런 거야.
그 얼마 안 되는 게 어느 정도냐구요?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실례야.
전 도시 체질이라 산속에서 사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떡하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농삿일도 배우고 일을 만들어서 서울로 왔다 갔다 하면 견딜 만할 거야.
문영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더 묵었다. 물속에 들어가서는 아예 드러내 놓고 숙경의 온몸 구석구석을 떡주무르듯이 주물렀다. 그리고 밤에는 또 알고 있는 모든 테크닉과 성의를 구사해서 숙경을 반쯤 죽여 놓았다. 숙경한테 이미 정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대단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서울에 돌아와 숙경과 헤어지고 신애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대뜸 둘 사이가 어떻게 돼 가느냐고 묻는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참이다.
지금 니 단골 까페에서 전화하는 거야. 숙경이 문제로 너하고 상의할 일이 있는데 잠깐 나올 수 있니?
아이 그럼요, 제가 중매쟁인데 모른 척할 수 있나요. 총알같이 달려갈게요.
이제 문영에 대한 경계심 같은 건 완전히 털어 버린 모양이다. 다 숙경이라는 여자 덕이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얼굴이 환해졌어요. 역시 연애가 좋긴 좋은 모양이죠?
카페에 들어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신애가 친숙하게 농담부터 던진다.
문영이 보기에 얼굴이 환해진 건 오히려 신애 쪽이다. 자그마하고 호리호리한 건 여전하지만 얼굴에는 핏기가 오르고 광채가 난다. 애인 녀석과 섹스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고 공연히 슬퍼진다. 그러나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문영은 그 동안 숙경과 지냈던 일, 화진포에 가서 있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어린애 앞에 두고 이런 얘기하긴 참 뭣하지만…….
선생님은 아직도 제가 어린애로 보여요? 그럼 진지한 대화가 안 되죠. 무슨 일인데 그래요? 솔직하게 다 말씀해 보세요.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니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얘긴데…….
숙경이 절정에서 엉뚱한 남자 이름을 부르더라는 얘기를 시작하자 갑자기 또 발기가 되면서 목소리가 어눌해진다. 묘한 쾌감이다. 그런데 신애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다.
두 분이서 정말 재미가 좋으셨군요?
재미가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그래, 그 언니한테 숫처녀를 기대하셨나요?
숫처녀까지는 아니지만…….
요즘은 중3짜리도 애인이 없으면 노처녀라고 하는 세상이에요. 그 언니 나이가 몇 살인데 애인이 없었겠어요? 또 애인이 있었으면 당연히 섹스도 즐겼을 거 아녜요? 절정에 올랐을 때 남자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구요. 선생님하고는 처음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 애인 이름이 나올 수도 있는 거죠, 뭐. 물론 듣는 쪽에서는 기분이 나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 가서는 선생님 이름을 부를 거 아녜요?
문영은 너도 그러느냐고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나한테는 충격이었어. 그런 대목에서 충격을 안 받았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지. 결혼해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 너 같으면 그런 여자와 같이 살 수 있겠니?
설마 결혼하고 나서도 그러겠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그러면? 또 그 남자를 못 잊어서 몰래 만나기라도 한다면?
설마요.
그 설마에 내 인생을 걸 수는 없는 일 아니니?
그건 그렇지만요.
그렇지만요 뭐야? 일단 결혼을 해 보고 또 그 버릇이 나오거든 그때 가서 이혼하면 된다 그런 얘기냐?
아이, 그런 건 아니구요.
니 말대로 그 나이에 애인이 있을 수도 있고 섹스를 즐길 수도 있어. 하지만 새로 만난 사람 앞에선 감추는 게 예의야. 안 그래?
물론 감추기 위해서 노력했겠죠. 하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무리 흥분을 해도 그렇지. 그런 걸 보고 조신하지 못하다고 하는 거야. 한마디로 주책이 없다는 거지.
신애는 더 할말이 없는지 가만히 한숨을 쉰다.
그것 말고도 또 있어. 자꾸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고 캐묻는데 정말 정떨어지더라.
그랬어요?
아무리 궁금해도 면전에서 그런 걸 묻는 건 큰 실례 아니냐?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속물근성이 그대로 드러난 거야. 거기다 자기는 도시 체질이라 산속에서는 살 수 없는데 어떡하면 좋으냐고 그런 소리까지 하더라. 산속에서 살 수 없으면 같이 못 사는 거지, 뭐. 안 그래?
믿어지지가 않아요. 얌전하고 낭만적이고 소박한 언니로 알고 있었는데.
낭만적인 건 모르겠는데 소박하고는 거리가 먼 여자야, 참하지도 않고.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나한테는 그 여자를 직접 만나서 얘기할 용기가 없어. 그 여자가 무서워졌어. 그러니까 내 대신 니가 얘길 좀 전해 줘. 나한테 들은 얘기 그대로 전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이야.
선생님, 그러지 말고 제 부탁을 한번만 들어주세요.
무슨 부탁?
그 언니하고 이렇게 끝내지 마시고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어떤 사람을 한 번 만나 보고 판단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잖아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랬어. 난 이숙경이라는 여자한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
그러니까 재확인해 보자는 거예요. 인생만사가 삼시세판이라는데 두 번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아녜요? 그 언니가 선생님 앞에서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만나 봐요.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거든 그때 그만둬도 되잖아요?
문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숙경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지만 신애를 다시 한번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거기다 금방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펄떡거리는 숙경의 육체에 대한 미련도 있다. 문영은 인심을 쓰는 척 결정을 내린다.
좋아, 중매쟁이의 충고를 듣기로 하지. 하지만 그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면 그땐 정말 끝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