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3/1운동을했다고? 장난하십니까?

김현갑200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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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운동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의병, 열사들이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로 우리 민족의 저항 기반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자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잠적하여 독립운동을 재개할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원칙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과 대결하였던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에 속해 있던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미국, 일본, 영국 등 승전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모든 피압박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피압박 약소민족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원칙을 해석,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우리의 민족 지도자들도 이 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미국에 이민한 재미교포들이 이에 호응하여 재미한인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李承晩)을 대표로 선출,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자결권과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이승만은 미국에 의해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대표로 파리에 갈 수 없었다. 이러한 소식이 동경에서 [朝日新聞]에 보도되자 재일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이를 걸머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파리 강화회의 개최와 민족자결론이 현지에서 보도되자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을 중심으로 김규식(金奎植)을 민족대표로 파리에 파견하였다. 또한 국내와 일본, 시베리아 등에 대표를 파견하여 각계 각층의 사회 지도층과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실천을 계획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일제의 고의적인 은폐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곧바로 전달될 수 없었으나 일본 유학생들의 귀국으로 인한 홍보와 재미, 재중 동포들의 활동을 통하여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차츰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국내외적으로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킨 것은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한일 유학생들간에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 [조선유학생학우회]등의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친목과 학술 연구를 표방하면서 내면으로는 애국사상의 고취에 노력하였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보도된 재미교포들의 독립운동 노력에 자극되어 비밀리에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이 결과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1919년 1월에는 우리의 독립을 일본 정부 및 각국 공사관 등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대표를 국내에 귀국시켜 최린(崔麟),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등 독립 지도자들과 접촉시켜 국내에서도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들은 2월 8일 오후 2시에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경찰을 동원하여 현장을 습격하고 대표자 10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유학생 전원은 귀국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귀국한 학생들은 곧 국내 운동에 참가케 되며 이들의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된 이래 독립 쟁취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고종(高宗)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국민들 사이에 의문을 품게 하였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차츰 퍼지게 되었다. 이에 전국민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이 크게 비등하여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붕서(崩逝)와 그 독살의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철시(撤市)하고 가무음곡(歌舞飮曲)을 중지하였으며 남녀 학생들은 일제히 흑색상장(黑色喪章)을 달고 3일간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대한문(大漢門) 앞에는 통곡하는 국민이 줄을 이었으며 각 지방에서도 곳곳마다 망곡(望哭)을 하고 조의를 표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고종을 위하여 순사(殉死)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독립의지를 품고 있던 우리 민족은 민족자결론의 소식을 듣고 동요하던 판국인데 고종의 붕서로 슬픔과 분노가 함께 폭발하였다. 이에 독립운동을 일으킬 조건이 무르익었던 것이며 더욱이 3월 3일로 정해진 고종의 인산(因山)을 위하여 많은 지방민이 서울로 모여든 것은 3·1거사에 좋은 기회를 주었다.

 

더욱이 국권상실 이후 잠적하였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교육기관과 종교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던 독립운동 계획은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단체가 통합, 거사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2월 25일부터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 대표들이 선정되었다.

 

그리하여 천도교 측의 손병희(孫秉熙)등 15인, 기독교 이승훈(李昇薰)등 16인, 불교 한용운(韓龍雲)등 2인, 민족 대표 33인이 결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지방에 있던 4인을 제외한 29인이 서울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 시각에 파고다 공원에서는 서울 중학교 이상 각급 학교 학생 4∼5천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식이 끝난 후 밖에서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과 합세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영향으로 서울의 각 곳에서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서울뿐 아니라 북부지방의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원산, 선천 등지에서도 같은 날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이어 다음날에는 경기도 개성, 충남 예산에서 전개되었으며, 4일에는 전라도 옥구, 8일에는 대구, 10일에는 전라도 광주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1운동은 3월 중순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3월 상순에는 주로 북부 지역과 부(府), 군청 소재지 등에서 발생하였으나 중순 이후부터는 중부와 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산간 벽지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리고 참여 계층도 학생, 교사, 종교 지도자, 학교 졸업자 등의 지식인과 함께 노동자, 하급 관리, 양반, 유생 등 대다수가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3.1운동의 전국적 특징은 첫째, 계급 계층간, 종교단체간 연대 투쟁, 둘째, 시위의 조직화, 지속화 현상 및 지역에 따라 각종 비밀결사, 결사대 등의 조직으로 시위 준비로 이끌어 갔다. 셋째, 고립 분산된 초기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활권 중심으로 지역별 연계 투쟁을 모색하였다. 이(里) 단위, 면(面) 단위 연계 및 군(郡) 단위 연계까지 나타났다.

 

3·1만세독립운동은 고흥지방에서도 일어났다. 고흥지방에는 3월초 천도교인(天道敎人) 송우섭(宋牛燮)을 통하여 독립 선언서가 전달되었다. 기독교인 오석주(吳錫柱 금산)와 목치숙(睦致淑 고흥)은 4월초에 같은 신도인 손재곤(孫在坤), 최세진(崔世珍), 조병학(曺秉鶴), 이석완(李錫琓) 등과 함께 4월 14일을 기하여 고흥읍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신의구(申義求)는 광주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향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만들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목치숙은 기독교 신자인 정환태(丁歡泰), 신성휴(申聖休), 박기욱(朴基煜), 박학준(朴學俊) 등을 찾아가 3·1만세운동에 참여를 요청하여 동의를 얻었다. 오석주는 한익수(韓益洙), 황보익(黃保翌), 황재연(黃在淵) 등을 만나 찬동을 얻었다.

 

그러나 3월 14일 이전 일부에서는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일본 경찰은 주민들의 동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석주 등은 전일 읍내에 머물면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운동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거사일인 14일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니 사람이 모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사 계획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목치숙 등 7명이 일본 헌병분대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만세운동 주동자들은 일단 거사를 중지하고 시기를 기다리기로 하는 한편, 전기 선언서의 일부를 고흥군청을 비롯한 광주 지방법원 순천지원, 순천 헌병대 등에 익명으로 우송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의 계획이 결국 일본 관헌에게 알려져 관계자들은 검속당하고 태극기, 선언서 등은 압수되었다. 한편 이를 전후하여 도양, 금산, 봉래, 점암, 포두, 도화, 남양, 동강 등 각 면에서는 수시로 산발적인 만세 운동이 있었다. 금산면 등 해상에서는 어선에 태극기를 올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2.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군경에 의한 잔혹한 탄압으로 이 운동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즉, 전국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헌병, 경찰 2개 사단의 정규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한 일제는 시위 운동자에 대한 대량 학살(虐殺)과 피검자에 대한 참혹(慘酷)한 고문으로 한민족을 탄압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수원군 재암리의 경우(4월15일) 동네 주민을 강제로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사살하였으며,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러 시신을 불태웠다. 당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이나 되었고 피검자만도 46,948명에 달했다고 한다. 고흥지방의 3·1만세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투옥된 인물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자료가 확인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흥지방 3·1운동과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일제식민지 시대 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등에 연루된 의사의 활동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목홍석(睦洪錫) : 자는 치숙(致淑)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인범(仁範)의 아들로 기미년(己未年 1919) 독립운동 때 거사하여 고흥군 관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7년의 중형을 받고 투옥, 가혹한 고문 끝에 보석 중 병사하였다.

  ◆ 오석주(吳錫柱) : 중구(中九)의 아들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고흥 읍내의 예수교인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7년의 중형을 받았다.

  ◆ 신의구(申義求) : 응모(應模)의 아들로 광주 숭일중학교 재학중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고흥에 돌아와 목치숙, 오석주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협의로 1년 6개월의 형을 치렀다.

  ◆ 신천휴(申千休) : 영구(永求)의 아들로 3·1독립만세운동을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서민호(徐珉濠) : 화일(和日)의 아들로 3·1운동이 전개된 후 "반도목탁(半島木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6개월형을 마치고, 다시 조선어학회 사건에 가담한 죄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 활약하였다.

 

3.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났던 한·일학생간의 집단 충돌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119개교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독립을 외치면서 총궐기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민족해방운동으로서 흔히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식민지 시대 3대 민족해방운동의 하나로 손꼽힌다.

 

식민지 시대의 학생운동은 이미 2·8독립선언, 3·1운동, 6·10만세운동 등을 통하여 학생층이 민중운동의 전위임을 과시한 바 있었다. 그것은 한말이래 신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서 신지식을 형성하게 된 이들 학생층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갖는 모순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또 노동자, 농민, 기타 다른 사회계층보다 상대적으로 조직화되기 쉬웠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학생운동은 1920년대 후반 조직적인 모습을 띠게 전개되었고, 이것이 마침내 1929년 거대한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즉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한 한·일 학생간의 집단 충돌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한말부터 1920년대까지의 학생운동의 역사가 축적된 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3·1운동은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양시켰으며 일제의 무단폭압통치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치적 배경은 우선 3·1운동 및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고양되었고, 그 결과 일제의 무단폭압정치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 측에서도 1910년대의 무단 통치를 통하여 조선의 사회경제 구조를 식민지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어느 정도 마쳤기 때문에 더 이상 무단통치를 지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일제는 '개량적인 통치방식'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이른바 '문화정치'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통해 총독부 관제의 폐지, 헌병·경찰 제도의 폐지, 일반 교원과 관리의 제도폐지, 관제개혁,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제한적 허용, 산업개발 등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책들은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허구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문화정치'의 진정한 의도는 '개량적인 통치 방식'을 통해 민족 운동의 분열을 유도하는데 있었다.

 

일제는 1920년의 지방제도 개정을 통하여 면 협의회, 부 협의회 등을 설치함으로써 일부 지주와 예속 부르조아지를 친일 세력으로 포섭하는 등 1910년대 극소수에 지나지 않던 친일 세력을 크게 늘림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기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제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에게 언론사나 반일적이지 않은 단체의 설립을 허가하고 온건한 '문화운동'을 부분적으로 지원하는 등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방향을 보다 개량주의적이고 타협주의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유화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편으로는 친일세력의 포섭, 부르조아 민족 운동에 대해서는 경찰력까지 동원하여 강력히 탄압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여전히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주의 운동 등에 대해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역시 강력히 탄압하였다.

 

일제의 이와 같은 이율 배반적인 '문화정치'는 오히려 일제의 식민지 지배 구조의 모순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던 학생측으로 하여금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의 길로 나서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일제는 1910년 이후 식민지 조선 통치의 기본 방침이던 '직접통치'와 그것을 위한 '동화정책'을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여기서 조선민족을 일본민족에 동화시킨다는 '동화정책'이란 곧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방침 위에서 모든 정책은 수행되었고, 특히 교육은 '동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분야였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기서 학생들의 '민족차별 교육과 식민지 노예 교육의 철폐'를 주장하는 외침이 나오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은 이와 같은 국내에서의 민족 해방운동의 동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본 군 출신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한 분은 다음과 같다.

 

◆ 김재용(金在瑢 일명 士彬) : 부사 언공(彦恭)의 후손으로 과역면 분촌리에서 태어났다. 김재용은 광주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김재용은 이 운동의 선봉에 나서 맨주먹으로 왜놈의 총칼과 맞서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형공 제880호, 제881호) 혐의로 5년9개월의 형을 받고 투옥된 후 병보석으로 출옥 되었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27세의 꽃다운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공을 기리는 사적비가 모교 과역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 있다.

애국의사 金在瑢之碑(과역면 과역리)

 

◆ 김삼석(金三錫) : 익명은 삼룡(三龍), 자는 기정(基正)으로 월파·추형(月波·秋炯)의 아들로 풍양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 고등보통학교 재학중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선전책으로 활약하면서 전국 각 학교를 찾아가 은밀히 학생운동을 선전 주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형공 제176호, 제177호) 위반 혐의로 1년 6월의 형을 마쳤다.

 

◆ 조용옥(趙龍玉) : 성범(性範)의 아들로 봉래면 백양리 사정에서 태어났다. 부산 제2상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된 다음해 1930년 1월 13일 이 학교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에 가담 동월 14일 맹휴(盟休)를 단행했으며 풍양면 출신 동창 임종호(林鐘浩)와 같이 호남 학우회지(湖南學友會誌)를 발간 배본했다. 내선공학체(內鮮共學制)를 철폐하라! 일본 만행 물러가라! 노예교육을 분쇄하자! 라고 외쳤다. 이때 가담한 용의자로 부산 경찰서에 구금됐다가 석방된 후 동맹휴학 2년만에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일본 동경 신숙정에 있는 동아상업학교에 편입했다. 4학년 재학시 귀가하여 나로도 주재소 순경에게 체포되어 고흥경찰서 경유, 여수경찰서로 이감 다시 순천 검찰지청으로 압송했다.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혐의로 연루된 10여명중 전기 임종호는 광주 형무소로 이감되고 그는 예심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구금되었다. 1년만에 석방됐다.

◆ 박철웅(朴哲雄) : 학준(學俊)의 아들로 남양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30년 1월 21일 전주 신흥학교 졸업반인(당시 학생회장) 그는 시위계획이 미연에 탄로되자 동지 김우영(金宇泳) 이외 수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당시 배은희 목사 2남인 배운석과 같이 격문을 지하실에서 등사하여 일부는 기전여학교로 또 일부는 전주 고등보통학교로 배부하고 거사일 다가교를 건너 시위에 들어가자 일본 기마대는 학생들을 구타 연행했다. 그는 주동자인 배운석과 함께 전주 형무소에서 4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4. 사회단체의 독립운동

 

한일합방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크게 다음과 같다. 합방 직후로부터 3·1운동에 이르는 약 10년간으로 개인적인 순절, 순국과 아울러 조직적인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된 시기이다. 대개 유림과 의병이 그 중심체를 이루고 있었다.

 

3·1독립 운동 이후 신간회(新幹會)의 해체에 이르기까지의 10여년간으로 민주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사상적 배경을 지니고 작파(作派), 작당(作黨)하여 정치적 극한 투쟁을 하였던 조직적인 정치, 사회단체와 민족이 문화적, 경제적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독립에의 길로 접근하려던 조직적인 사회, 문화단체가 공존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시기로 대개 근대적 서구식 교육을 받은 청장년 지식층이 그 중심체였다. 이 모든 단체가 거의 비밀결사(秘密結社)로 이루어진 것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문화정책 표방으로 일부의 사회단체와 문화단체는 일제의 인가하에 결성되었으며, 정치 단체로서는 신간회만이 일제의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비밀결사와 약화,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융성과 상호 견제, 사건 취재의 단일체계 등」 아래 인가된 단체로서 발족하였던 것이다. 이들 단체는 일제의 포악한 탄압과 중·일 전쟁 및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황국신민화운동(皇國臣民運動), 내선일체운동(內鮮一體運動)으로서 미구에 해체됨을 면치 못하였으나 민족독립운동사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독립의 군부, 광복단, 조선 국권 회복단이 합방 직전에 조직 된 신민회와 아울러 대표적 단체로 두각을 나타냈다.

 

1924년∼25년경 대개 조선노동총연맹 , 한양청년연맹, 경성청년연합회의 3개 단체로 통합을 보았으며 이들은 곧 다시 조선공산당과 춘경원 공산당으로 연합되었고 1927년에는 신간회로 합류되어 근우회 (여성단체)와 아울러 대표적 단체를 이루게 되었다.

1913년 9월 임병찬(任炳瓚), 이용순(李溶淳), 전용규(田鏞圭)등 유림과 의병 출신 인사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결사로서 서울에 독립 의군부 중앙 순무 총장을, 각도에는 도순무 총장, 군수, 향장 등을 배치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 내각 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내고 국민의 국권회복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곧 일헌에 검거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이 단체의 영수는 임병찬으로 그 산하에 허다한 의병장과 의병 출신이 있었으며 시천교계(侍天敎系)의 이중묵(李重默), 안태준(安泰俊), 태신교주(太神敎主) 여영조(呂永祚), 일진회원(一進會員) 김두선(金斗善), 전 왕세자사(王世子師) 윤돈구(尹敦求), 전 궁내부관(宮內府官) 이명상(李明翔)등 각계의 저명 인사와 신규식(申奎植), 윤이병(尹履炳) 등 수많은 유생이 이 결사의 구성원이었다.

 

1913년 채기중, 한훈, 김상옥, 김동순 등이 경상도 풍기(豊基 : 榮州)에서 대한 광복단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 헌병과 내통하는 악질부호(惡質富豪)를 습격하여 광복 운동의 거사금을 마련하다가 대구 박상진, 김경태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정하고, 1916년에 노백인, 김좌진, 박성태 등이 참가하여 다시「광복단」이라 개칭하였다.

수백명의 단원을 확보한 이들은 대한독립 국권을 광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일본을 구축하기로 맹세하고 노백인 등을 상해로, 김좌진 등을 만주로, 각각 파견하여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관을 맺었다.

 

1919년 초에 일헌(日憲)의 습격을 받아 채기중, 박상진, 장두환 등 간부가 피살되고 많은 단원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단(團)의 활동이 한때 정체되었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해외와 각지에 산재하던 단원이 다시 모이고 임시정부의 후원으로 무장을 갖추고, 김상옥, 한훈, 김동순 등 20여명으로 암살행동반(暗殺行動班)을 조직하고 단체를 회복하다가 1920년 8월에 총독암살음모사건으로 다시 단원이 피체(被逮)되자 해산되고 말았다.

이 광복단의 중요활동은 1917년 10월의 광복회사건, 1920년 8월의 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광복회 명의로 전국 각지의 부호에게 국권회복 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통고문을 보낸 사건으로 의병대장 허위의 제자로 판사 시험에 합격한 박상진과 채기중이 주도하였던 일이었다.

 

이 통고문의 우편이 일헌병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수사 검거되기 시작하여 많은 단원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검거 도중인 11월에 순국한 허위와의 약속 30만원의 출자를 배반한 부호 장영원이 3차의 기도 끝에 피살됨으로써 이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 사건에 뒤이어 광복단은 총독암살을 기도하였다. 이 계획은 1920년 8월에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작성되었으며, 이 때 총독을 살해하고 민족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표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상옥 등의 암살 행동반 공작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고, 한훈 등은 투옥되고 김상옥은 상해로 탈출하였다.

 

일제식민지시대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인물은 너무나 많다. 3·1만세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에 의해 검거된 고흥지방의 인물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박창규(朴敞圭) : 태흡(台翕)의 아들로 도양읍 관리에서 출생. 50세에 뜻한 바 있어 보성군 조성면으로 이주. 보성군과 고흥군 일부 지역을 활동무대로 삼아 민족운동을 교회를 통하여 추진해 오던 중 1940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신사참배 거부, 일본 국체변혁 음모죄 등을 적용. 1944년 5월까지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장종국(張宗局) : 정상(廷相)의 아들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될 당시 과역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자랑"이란 제하로 금수강산 13도의 노래를 창작하고, 또 "조선의 눈물과 웃음"이란 제하에 조선의 혼이 담긴 유인물을 유포하여 독립 사상가로 지목. 동년 8월 왜경에 체포되어 1년의 실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이상문(李相汶) : 영대(永大)의 아들로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시 고려독립당원으로 항일투쟁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협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東京勁草 書房刊, 赤道下의 朝鮮人叛亂 참조)


출처 : [기타] http://www.goheung.go.kr/sub_a/1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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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종교라는것이 이렇게까지 타락 할 수가 있는거구나 싶습니다...?

 

네이버에 기독교의 역사왜곡 과 한기총의 역사왜곡  검색하니 꽤  많이 나오더군요

 

그중에서 기독교분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일제 시대에.. 우린 독립운동했다라는 그에 따른 반박글 올려드립니다

 

1.황사영을 시켜 나라는 진멸해도 된다는 사랑의 논리를 설파하고 순교하게 하심....

  

또 들으니 그 나라 왕이 나이 어려 아직 왕비를 맞지 않았다 하니 만약 종실(宗室)의 딸 하나를 골라 공주라 하여 시집을 보내어 왕비를 삼는다면 왕은 사위가 되고 이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자연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요 또한 몽고를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중하다 했으니 이 나라를 전멸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진대 ....

(황사영 백서란 프랑스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프랑스 군대를 동원하여 정부를 갈아엎어달라는 청원을 기술하였기에 반역죄로 처형당한것임.....)

이건 절대 반역이 아니라 순교라고 우기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심.....

  

  

2. 선교사들에게 금광, 벌목,철도부설권을 독점하게하여 기독원국의 국부충당과 선교자금을 확충하게 하심...

  

  

미국 선교사 알렌은 첫 발전소 계획을 세우고 그 이권이득 ,미국 기업체들로부터 전화 및 수도시설을 끌어들여 이득. ...평북도 운산금광의 채굴권 팔아 넘겨 당시 1500만 달러의 국부유출.
알렌은 ‘을미사변’전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민비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이노우에의 제의에 따라 리조왕실의 안전을 일본침략군에게 맡기도록 설복함으로써 일제를 도와줌.


언더우드는  석유와 석탄 등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이득.

마펫은 압록강 주변의 산림 채벌권을 얻어 거대한 목재 재벌.

선교사 리젠드르는  1백만 달라의 자본을 투하하여 고진동과 대유동, 수안과 강릉 등   굴지의 광산들에서 ‘채굴권’을 틀어 쥐고 금, 은을 비롯한 지하자원을 약탈해 갔으며 수많은 공장들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조선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  

미국 선교사 해리스는.. 소생은 자기의 직무상 한국재류의 모든 선교사와 일본에 호의를 가지고… 실은 통감정치의 가장 열심있는 지지자임을 고백합니다 라는 글을 냈고

미국 선교사 호기스는 1908년 10월 조선통감부를 찾아가 정치의 불간섭을 선서하고 광주의 구세군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 개입한다는 것을 구실로 그 관영을 해산하여 일제의 통치체제 수립을 도와줌.

미국 선교사 존스는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제도에 순종할 것을 설교.

헐버트는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

평양주재 미국 선교사 불레비는 ‘조선 교회는 일제의 침략세력을 미워하는 죄를 회개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원수도 사랑하는 무맥한 순종을 설교.

  

아~ 복음의 씨앗을 내려주신 이분들의 발자취를 기념하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랍고 복된 일이구낭~~~



3. 삼일운동당시에 목사님들의 안전도모....

  

예수님은 33인중 기독교인사 13명의 목사와 3명의 전도사는 2달전부터 동참연락을 받았음에도  기도하느라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2월 28일 밤이  되서야  서명하시게 했다....

더구나, 그후 16명의 목사들은 모두 친일파로 변절했으니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탄이 절로 나올뿐이다...

  

더구나 기독교계의 돈을 낭비하지 않도록 이승훈 목사를 들어쓰시면서  성전건축하려고 모았던 헌금 95만원을 거사자금으로 책정한 천도교에게서 5000원을 빌리게 하시고 아직도 안갚은 목사님들을 축복하신다.....

.....할렐루야...아멘......  

  

  

4.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끔 인도하셨다....

  

독립운동가들은 고향과 처자식을 버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면서  타지에서 쓰레기죽으로 연명하면서 종교적 보루인  대종교(97%), 사상적 보루인 사회주의(95%)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게 하심으로써 미국을 역사하여 기독교계 인사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하셨다.....

  

당시 김구 여운형선생께서는 중국인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한 반면에

이승만 서재필등은 월급 385달러, 롤스로이스 승용차를 굴리면서 독립운동을 할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예처럼 일하면서 독립자금 헌납한 동포들의 주급은 2달라)

광복군 조직대에도 돈줄을 쥐고 있게 함으로써
비리로 인하여 24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탄핵되었던
이승만장로님을 다시금 대통령에 취임할수 있도록 역사하셨다.......
놀라운 예수님의 역사이다....할렐루야!!!!

  

  

5. 친일의 길을 인도하심으로서 (도륙당한 천도교와는 정반대로)

    기독교계의 융성을 이끌어주셨다...

  

조선 장로호 비행기도 바치고  젊은이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하시게 함....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國民精神總動員 朝鮮耶蘇敎長老會 聯盟,일명  精動 長老會總會聯盟)
소속 목사들(총 206명)


강두송/강병철/강석진/강신명/강헌집/강흥수/경환/계일승/고득순/고려위/고봉윤/
곽진근/권오균/권중여/김경덕/김광수/김교영/김규언/김기현/김기형/김길창/김낙영/
김내흥/김대업/김두헌/김득주/김리현/김만곤/김만일/김범진/김병률/김봉아/김석진/
김석창/김석흥/김선환/김성준/김성찬/김성호/김세영/김수영/김영서/김영환/김영후/
김용삼/김용출/김우필/김윤찬/김은석/김응순/김의문/김이철/김인빈/김재철/김정묵/
김정오/김정칠/김제각/김진국/김창립/김천덕/김치근/김태호/김하원/김혁동/김현정/
김형관/김형모/김형숙/김홍식/김화식/김희섭/나기환/목영석/문신규/문재린/문재희/
민영률/박경희/박동환/박례헌/박병호/박봉로/박상철/박선택/박순석/박승준/박영기/
박용희/박응률/박태선/방경수/방학성/배운환/배창교/백낙원/백남철/백일선/변봉조/
사칠현/서명준/서성일/서재곤/손창헌/송재찬/송형칠/송화익/신봉정/신영욱/신후식/
심문태/심상민/안봉진/양윤묵/양찬언/염학기/오경신/오기주/오용갑/오응식/용희창/
우연석/유상봉/유창세/유흥렬/윤석귀/윤원삼/윤주한/윤하영/윤하영/이경즙/이계수/
이권찬/이규을/이기방/이남규/이도봉/이동희/이문주/이병식/이보식/이상백/이수현
이승길/이영은/이영태/이영희/이우항/이운목/이운형/이윤의/이정로/이정심/이주석
이지양/이창규/이창섭/이창철/이태학/이학인/이홍필/이희영/이희정/임척호/장기순
장병윤/장애경/장운경/장인호/전기형/전수창/전필순/정규삼/정기헌/정순모/정재면
정재순/정진률/정헌주/조두현/조승익/조승제/조승환/조택수/조희상/조희염/주영신
주형옥/지군일/지문상/최광훈/최병준/최봉주/최상섭/최성주/최익순/최지화/한경직
한익동/함종흡/허담/허덕화/홍우석/홍종섭/홍택기/황주옥


이 단체의 국가·황민·교회에 대한 방침....

국가에의 봉공

1) 대동아전쟁 목적 완수에 협력함과 동시에 사상의 완벽을 기할 것.
2) 시국의 진전에 즉웅하여 여러 교회 및 여러 단체를 전시체제화하여 국가적 요청에
     청헌(請獻)할 것.
3) 징병 의무 및 정신을 높이 강조하여 신도에게 철저하게 할 것.
4) 총후 봉공의 목적으로 다음 사항을 장려할 것.
   황군 상이 장병 및 유가족의 위문, 군사원호 사업, 국민저축의 실시, 귀금철류의 헌납
   전시 생활지도와 절약 운동, 전시 근로 봉사, 매월 정액의 국방헌금, 신사참배 및 전승기원의 여행


황민의 동성

5) 각 신도의 가정마다 대마(大麻)를 봉재하고 황도정신을 철저히 할 것.
6)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충군애국의 정신과 경신숭조의 정신을 함양할 것.
7) 아국(我國)의 순풍미속을 존중하고 질실(質實) 강직한 기풍을 길러 견인 지구의 공고한 의지를 연성할 것.    
8) 신도(信徒)의 황민동성의 실을 거두기 위하여 황국 고전 및 국체의존에 관한 지도 교본을 편찬할 것.
9) 각 소(所)에 동성회를 개최하고 교사(목사) 및 신도의 동성에 노력하며 특히 황국 문화의 연구 지도를 도모할 것.


교회의 필신

10) 기독교 교사(목사)로서의 교양을 높이고 솔선 수범하여 세상의 사표가 되는 실을 거두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실시할 것. 현 교사의 신학적 재교육운동, 교사양성 기관의 정비
11) 일본기독교를 확립하기 위하여 특히 전문가로서 일본교학의 연찬에 노력하고 일본적 신학을 수립시킬 것.
12) 말세·심판·재림 등은 세상적·물질적 해설을 고쳐 그것을 종교적·심령적으로 해설할 것.
13)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그 적당한 해석 교본을 편찬할 것.
14) 전시에 있는 반도 교화의 실을 거두기 위하여 신앙 부흥 및 전도 진흥의 구체적 방법을 강구할 것.
15) 신도필휴·신찬미가·기도문 및 예전 요의(要義) 등을 편찬할 것.
16) 국어(일본어) 상용을 극력 장려할 것.
17) 예배당은 신축 또는 개축할 경우 일본적 양식을 고려할 것.
18) 예배 혹은 집회 양식에 대하여는 연구를 진행하여 될 수 있는 한 일본적 풍습을 채용할 것



김활란 여사님(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의 은혜로운 강연

  

태평양전쟁으로 징용, 징병, 정신대 동원을  지지하는 강연과 기고...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25)


  

6. 두번씩이나 양들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게 하심으로서 옥체를 보전하사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개신교의 횃불이 되게 인도하심...

  

이선교 목사님의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 에 나옴.

6.25 때 서울 사수를 주장하다 신도들 냅두고 먼저 도망(도망 안친놈만 쪼다만듬) 유엔군이 북진하자 평양에 까지 가서 집회하다가 중공군이 내려오자 시민들에게는 알려주지도 않고 먼저 토끼도록 역사하심....(예수님도 토끼신적 있으므로 죄가 안됨)

   자유당 때에는 프린스턴 선배인 이승만 대통령과도 섭섭치 않는 관계를 유지하였고 당시 많은 지도자 목사들도 자유당 정권의 선거에 장로대통령이라고 김영삼대통령에게 그런 것같이 충성을 맹세.

눈치없는 지도자 목사들을 인도하사  4.19가 내일 모레인데 3.15선거가 공명선거였다고 성명을 내도록 역사하심......

   5.16  한달후  김활란 이대 총장, 정일권씨 등과 더불어 미국까지 가서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외치게 인도하셨으며 ...

   박정희 정권과도 섭섭치 않은 관계를 유지하게 하시면서  조찬기도회에서  박대통령을 모세같은 지도자가 되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하게 하심....

그시각 그자리에서  박정희씨는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어도 사랑으로 다~ 용서하심...

5.18 학살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호텔에서 모인 기도모임에서 "전두환을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도록 영빨을 주심....할렐루야!!!

  

7. 역사의 유적지들을 보전하도록 인도하심....

  

선교사들의  휴양지였던  지리산 노고단 왕시루봉의 별장 폐허터 10만평을 기독교 유적지로지정되어 국고로 국립공원내 위락시설을  복원토록 역사하심.....

당시의 시설물은 영빈관(호텔), 강당(2층 높이, 33평), 발전실, 상점, 진료실, 목공소, 주택 등 58동인데, 33.5평, 33평, 31.6평 등의 규모가 큰 건물도 있었다.

자재들은 누가 지고 날랐을까?
선교사님들은 산꼭대기까지 가마타고 올라가시는 은혜를 베풀음....
그 가마는 물론 이방인(?)들이  들게 하셨다...

제암리감리교회에서 죽임을 당한자들은 천도교인들이 대다수였음에도 기독교성지로 탈바꿈시킴.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서 천주교인 5명을 숨겨주다 같이 처형당한 스님 5명의 위패대신에 천주교 성지라는 비석을 세워 위로해주심.....

단군상이나 불상들은 혐오스럽고 기분 나쁘니까  뽀개도 된다는 사랑의 용서를 노골화하심....

  

8. 여러부류의 젊은 여신도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상납을  수시로 받을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