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을 깁스와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삼촌의 모습은 희극적이었다. 콧뼈가 내려앉은데다 어깨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은 조금도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고통은커녕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헤죽헤죽 웃기까지 한다. 숙모가 이상해서 물어본다. 당신, 통증은 없어요? 왜 없어, 이렇게 복날 개패듯이 얻어맞고 통증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게. 그런데 왜 아프다는 소리는 안 하고 웃기만 해요? 조카한테 맞은 것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래요? 그게 아니야. 드디어 소원성취를 한 것이 하도 기분 좋아서 그런 거야. 소원성취라뇨? 내가 문영이 자식을 죽어라 하고 쫓아다니면서 약을 바싹바싹 올린 이유가 뭔데?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렸던 거야. 끝내 참을 수 없게 되면 언젠가는 터지는 때가 오게 돼 있거든.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 그럼, 치료비 뜯어 내자고 일부러 당했단 말예요? 이런 답답한 여편네 같으니. 치료비가 문제야 지금? 전치 16주 진단이 나왔어. 전치 16주면 꼼짝없이 구속감이란 말이야. 거기에다 존속상해죄를 더하면 최소한도 5년은 교도소 신세를 지게 돼 있어. 지가 돈을 안 토해 내고 배겨? 자신만만한 삼촌과는 달리 숙모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두들겨 팬 인간이 순순히 돈을 내놓을 리가 없다. 거기다 돈이 있으니 비싼 변호사를 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5년은커녕 한 두어 달만 살고 집행유예로 나올 게 뻔하다. 경찰 남편과 살다 보니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남편도 그 정도는 훤히 알고 있으니 무슨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뭉텅이로 굴러 들어오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 숙모는 유일하게 깁스와 붕대가 감겨 있지 않은 남편의 얼굴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을 붙인다. 당신, 뭐 특별하게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먹고 싶은 거야 많지만 돈이 어디 있어? 말만 해요, 친구한테 돈 좀 빌렸어요. 어, 그거 잘 됐다. 안 그래도 초밥이 먹고 싶었는데 그것 좀 사다 줘. 이놈의 병원 음식이 꼭 유치장 음식 같아서 입을 댈 수가 있어야지. 같은 시간, 화진포 모텔에서는 신애의 누드가 거의 다 완성돼 가고 있었다. 문영은 연신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다. 방 안이 덥지도 않은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땀이 솟는 것이다. 신애가 지루해서 몸을 비튼다. 움직이지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다리에 쥐가 났단 말예요. 좀 쉬었다 해요. 한 시간만 참아, 그 안에 끝낼 테니까.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왜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난 지금 쫓기는 신세야. 급하지 않을 수 있니? 아무리 쫓겨도 그렇죠. 모델 콘디션도 생각해 주셔야죠. 그럼, 30분만 쉬었다 하자. 그러지 말고 나가서 저녁을 먹고 와요. 선생님은 배도 고프지 않으세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신애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선생님, 오늘 왜 그렇게 열심이세요? 제가 보기에 무서울 정도예요. 말했잖아. 언제 또 도망쳐야 할지 모르니까 그 전에 완성시키려는 거야.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무슨 소리냐? 그림이 끝나는 대로 절 집에 보내 주실 거 아녜요? 그야 물론이지. 그럼, 더 이상 도망칠 일이 없잖아요? 제가 납치당한 게 아니라고 말할 거니까요. 하지만 삼촌 문제가 남아 있잖아? 그거야 돈 좀 집어 주고 끝낼 수 있다면서요? 글쎄, 그렇긴 하지만……. 아유, 걱정도 팔자셔 정말. 이걸로 두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 셈이네요. 가서 축배나 들어요. 신애는 식당에 들어가자 물어보지도 않고 회와 양주를 시킨다. 그리고 종업원이 돌아서기도 전에 또 새우튀김과 양념구이를 시킨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잔치할 일이 생겼니? 잔치할 일은 아니지만 기념할 만한 일은 생겼잖아요? 누드는 완성되고 전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도 산장으로 돌아가서 고독을 즐기게 되고… 모든 것이 다 정상으로 돌아왔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멀쩡한 처녀를 납치해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그런데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끝나게 되었으니 축하할 만도 하다. 삼촌이 얼마나 다쳤는지 궁금하지만 그쪽은 어차피 돈으로 해결이 날 일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신애의 육체에 대한 추억과 새로운 누드 한 장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을 왜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했는지 생각하면 허탈하기만 하다. 넌 아무것도 걱정이 안 되니? 왕성한 식욕을 보이면서 맛있게 먹고 마시는 신애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문영이 묻는다. 걱정할 일이 뭐가 있어요? 부모님한텐 뭐라고 변명할 거야? 변명이 아니고 사죄를 해야겠죠. 제가 그만 눈이 멀어 가지고 선생님을 따라 팔도강산 유람을 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럼 엄마 아빠가 뭐라고 하시겠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좋아, 부모님은 그렇다 치고 니 남자친구한텐 뭐라고 할 거야? 마찬가지죠 뭐.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래도 내가 좋다면 계속 사귀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선생님, 인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벌써 몇천 년 전부터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왔지만 세상이 달라진 게 뭐가 있어요?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종사하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것, 이것이 진리에요. 아직도 감이 안 잡히세요? 문영은 어린애한테 설교를 듣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상한다. 감이 안 잡히느냐고 하는 말투도 거슬린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론을 펼칠 만한 자신도 없다. 사실 그 자신도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된다든가 하는 문제를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럴 때는 그저 마시고 취하는 게 장땡이다. 문영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단숨에 잔을 비운다. 잠깐 필름이 끊어졌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욕실이다. 문영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식당에서 어떻게 모텔까지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샤워를 하러 들어왔다가 욕조 난간에 기대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고민할 일은 아니다.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그뿐인 것이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 벗어 놓은 옷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대강 짐작이 간다. 둘이서 샤워를 한 다음 신애는 나가고 자신은 잠이 든 것이다. 침대에는 신애가 곤히 잠들어 있다. 아무 대책없이 알몸을 내던져 놓은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다. 문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처음으로 보기 싫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숙이나 화영이나 숙경이 함부로 옷을 벗어 던졌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다. 그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좀 가려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신애마저 그 대목에 와 버리고 만 것이다. 문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내가 왜 이럴까. 허벅지 한번을 만져 보고 싶어 그렇게 숨이 넘어갈 뻔했던 아이가 벌써 싫어지다니. 여자 쪽의 잘못인가 아니면 남자 쪽의 잘못인가.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쉽게 싫증을 느낀다면 그놈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평생을 같이 사는 남자와 여자는 그럼 짐승이란 말인가. 문영은 신애를 내려다본다. 지금까지는 살짝 엿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던 엽기적인 나체다. 우유를 들이부은 것 같은 뽀얀 살결, 부풀다 만 것 같은 앙징맞은 젖가슴, 거무스름한 한 줌의 음모 속에 숨어 있는 발그레한 골짜기, 갸름하고 매끈하게 뻗어 내려간 허벅지와 종아리, 엄지에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깨물어 주고 싶도록 작고 예쁜 발.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홑이불이라도 덮어 주고 싶을 정도로 민망한 모습이다. 문영은 비로소 깨닫는다. 신애가 얘기한 것처럼 사랑이란 것이 결국은 성욕 그 자체였다는 것을. 성욕이 동하지 않으면 이 아름다운 나체도 한낱 민망스러운 육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욕은 파도와 같아서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여자와 정사를 끝낼 때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자학을 하지만 언제나 그때뿐이다. 성욕이란 정말 더러운 것이다. 적어도 문영의 경험에서는 그렇다. 그 사실이 금방 입증된다. 신애가 잠결에 꿈틀하면서 등을 보이고 옆으로 돌아눕자 그 더러운 욕망에 다시 발동이 걸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너나 나나 참 불쌍한 인생이다 그런 연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몸을 눕히고 뒤에서 신애를 가만히 안아 준 것이 불찰이었다. 신애의 말랑말랑한 엉덩이가 배에 닿자 지금까지 축 늘어져 있던 그 물건이 벌떡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참으로 맹랑한 물건이다. 주인의 의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이 저 혼자 혈압을 높이고 빳빳하게 일어나 전투태세를 취한다. 이런 빌어먹을……. 문영은 혀를 차면서 얼른 돌아누웠다. 그러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빳빳하게 일어난 물건은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이윽고 주인의 의식까지도 욕망으로 치닫게 한다. 누가 시켜서 한 짓도 아니고 누가 말려서 될 일도 아니다. 자연 그 자체다. 정말 신경질이 난다. 그러나 해결책은 한 가지뿐이다. 문영은 화장실에 가서 자위행위를 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막상 몸을 일으키자 생각이 바뀐다. 눈앞에 여자를 놔 두고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다. 창피한 생각도 든다. 그래 이번 한 번만이다, 딱 한 번만이다, 마지막 기념으로 한 번만 안아 보고 내일은 아무 미련없이 집으로 돌려 보낸다, 그리고는 깨끗이 잊어버리는 거다. 문영은 신애를 끌어당겨 반듯하게 눕힌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엽고 신선하다. 음모만 드러내 놓고 있지 않으면 그야말로 천사 같다고 할 만하다. 가만히 상체를 기울여 입술을 포갠다. 그러자 뜻밖의 반응이 온다. 신애가 잠결에 아이 하면서 문영의 얼굴을 밀어 버린 것이다. 잠결에 하는 짓이지만 문영은 염치가 없어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래서 어차피 잠들어 있으니 전희니 뭐니 다 생략해 버리고 곧장 밀고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잠든 여자를 어떻게 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냥 다리를 벌려 놓고 밀어넣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해 보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삽입이 잘 안 되는 것이다. 몇 번을 시도해 본 끝에야 요령을 터득한다. 신애의 두 무릎을 구부려 놓고 엉덩이를 약간 들어올리자 간신히 삽입이 된다. 전초전에서 시간을 잡아먹어 그런지 몸과 마음이 급하다. 신애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맹렬하게 몸을 놀린다. 아는지 모르는지 신애는 몸을 내맡긴 채 눈도 뜨지 않는다. 참으로 재미없는 섹스다. 내가 이래선 안 되는데… 숨결이 높아지면서도 그런 생각이 스친다. 돈을 2천만원이나 들여 납치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오로지 섹스를 위해서 한 짓이 되고 말았다. 이것 말고는 다른 무엇이 없었단 말인가. 화가 난다. 신애의 육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어 더욱 화가 난다. 이윽고 팔다리가 빳빳하게 굳으면서 사정이 이루어진다. 굉장히 큰일을 해낸 것 같은데 신애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한숨과 함께 몸을 떼어내자 그제서야 끙 소리와 함께 옆으로 돌아눕는다. 이렇게 멋대가리없는 섹스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화가 난다. 끝까지 눈을 뜨지 않는 신애한테 화가 나고, 그런 여자의 사타구니에 사정을 하기 위해서 헐떡거린 자신한테 화가 난다. 이게 무엇인가. 왜 이래야 하는가. 끈적끈적한 점액을 뒤집어 쓰고 축 늘어진 자신의 물건을 내려다본다. 창피하고 비참한 느낌이다. 에이 씨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온다. 샤워나 하자. 문영은 공연히 식식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신애가 잠에서 깨어난다. 신애는 비틀비틀 걸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난다. 문영이 샤워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 밤중에 무슨 짓인가 싶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1시다. 문득 이상해서 사타구니를 만져 본다. 끈적끈적한 점액이 묻어 있다. 비로소, 자는 동안에 문영이 자신을 덮치고 사정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간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 휴지를 찾아 깨끗이 닦아낸다. 이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돌아서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영의 바지 주머니에서 삐죽하게 나와 있는 휴대폰이 눈에 들어온다. 욕실에서는 계속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신애는 얼른 집에다 전화를 건다. 꼭두새벽인데도 엄마가 금방 전화를 받는다.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엄마, 그냥 듣기만 해. 나 오늘 아니면 내일은 돌아갈 거야.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할 거니까……. 잘 있으니까 이렇게 전화를 하지. 정말 아무 염려 말라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엄마한테 미안해. 만나서 얘기할게. 끊어. 신애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제자리에 꽂아 둔다. 욕실에서는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사타구니가 끈적거리는 것 같아 좀 씻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다시 침대로 가 시트를 덮고 잠을 청한다. 욕실 물소리는 계속 들린다. 문영이 샤워를 틀어 놓은 채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서 들여다보고 싶지만 몸이 나른해서 그나마도 귀찮다. 그냥 자기로 한다. 그리고 문을 쾅쾅 두들기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것은 아침 7시였다. 커튼 밖으로 환한 햇볕이 눈이 부시다. 누구세요? 모텔 종업원이지 싶어서 그냥 시트로 몸을 감고 일어난다. 밖에서는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문을 열자 사람들이 우루루 밀고 들어온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동호와 이형사다. 엄마는 딸을 부둥켜안고 우선 울음부터 터뜨린다. 그 자식 어디 있어? 동호가 소리를 지른다. 이형사는 방안을 둘러보다 욕실의 물소리를 듣는다. 핸들을 돌려 보니 안에서 잠겨 있다. 야, 문 열어! 빨리! 동호가 주먹으로 욕실 문을 쾅쾅 치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신애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호가 있는 힘을 다해 발길로 걷어차자 욕실 문이 벌컥 젖혀진다. 문영은 욕조 안에 반듯하게 누운 채 샤워 물줄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마치 샤워를 틀어 놓고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다. 온몸이 석회를 뒤집어 쓴 것처럼 하얗게 핏기가 없다. 이형사가 문영의 코와 경동맥에 손가락을 대 본다. 왜 그래요? 어떻게 된 거예요? 신애가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이형사가 가로막는다. 죽었어. 여자들은 보지 말아요. 자네도 나가고. 아니, 자넨 112 신고 좀 해 줘. 알겠어요. 동호가 나간 다음 이형사는 욕실 문을 닫고 차분하게 현장을 살펴본다. 욕실 바닥에는 깨진 유리컵의 잔해가 흩어져 있고 문영의 오른손에도 한 조각이 쥐어져 있다. 샤워를 틀어 놓은 채 그것으로 자해를 한 것이다. 잔뜩 쪼그라든 음경이 반쯤 잘려 있고 아직도 조금씩 피가 흘러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핏자국은 샤워 물줄기에 씻겨 금방 연분홍색으로 희석이 되어 배수구로 사라진다. 신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형사는 혀를 찬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나 신애와 통화했다는 연락을 받고 이동통신에 가서 위치추적을 하는 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상황은 이미 끝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곳을 잘랐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오자 창가에 세워 둔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요염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는 신애의 누드다. 이형사는 가까이 가서 좀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림을 참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부둥켜안고 있는 신애를 돌아본다. 벌거벗은 몸에 시트를 걸치고 있는 여자의 나체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이렇게 좋은 여자를 두고 왜 자신의 물건을 잘라야 했을까. 면도칼도 아닌 유리조각으로 그것을 자를 때 얼마나 아팠을까. 이형사는 다시 그 생각을 하며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부신 햇볕과 함께 파란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거기에서는 지난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인간들만이 이상한 일을 저지른다. ♣♣♣
[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27) -완결-
27. 순결의 끝
온몸을 깁스와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삼촌의 모습은 희극적이었다. 콧뼈가 내려앉은데다 어깨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은 조금도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고통은커녕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헤죽헤죽 웃기까지 한다. 숙모가 이상해서 물어본다.
당신, 통증은 없어요?
왜 없어, 이렇게 복날 개패듯이 얻어맞고 통증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게.
그런데 왜 아프다는 소리는 안 하고 웃기만 해요? 조카한테 맞은 것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래요?
그게 아니야. 드디어 소원성취를 한 것이 하도 기분 좋아서 그런 거야.
소원성취라뇨?
내가 문영이 자식을 죽어라 하고 쫓아다니면서 약을 바싹바싹 올린 이유가 뭔데?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렸던 거야. 끝내 참을 수 없게 되면 언젠가는 터지는 때가 오게 돼 있거든.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
그럼, 치료비 뜯어 내자고 일부러 당했단 말예요?
이런 답답한 여편네 같으니. 치료비가 문제야 지금? 전치 16주 진단이 나왔어. 전치 16주면 꼼짝없이 구속감이란 말이야. 거기에다 존속상해죄를 더하면 최소한도 5년은 교도소 신세를 지게 돼 있어. 지가 돈을 안 토해 내고 배겨?
자신만만한 삼촌과는 달리 숙모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두들겨 팬 인간이 순순히 돈을 내놓을 리가 없다. 거기다 돈이 있으니 비싼 변호사를 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5년은커녕 한 두어 달만 살고 집행유예로 나올 게 뻔하다. 경찰 남편과 살다 보니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남편도 그 정도는 훤히 알고 있으니 무슨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뭉텅이로 굴러 들어오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 숙모는 유일하게 깁스와 붕대가 감겨 있지 않은 남편의 얼굴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을 붙인다.
당신, 뭐 특별하게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먹고 싶은 거야 많지만 돈이 어디 있어?
말만 해요, 친구한테 돈 좀 빌렸어요.
어, 그거 잘 됐다. 안 그래도 초밥이 먹고 싶었는데 그것 좀 사다 줘. 이놈의 병원 음식이 꼭 유치장 음식 같아서 입을 댈 수가 있어야지.
같은 시간, 화진포 모텔에서는 신애의 누드가 거의 다 완성돼 가고 있었다. 문영은 연신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다. 방 안이 덥지도 않은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땀이 솟는 것이다. 신애가 지루해서 몸을 비튼다.
움직이지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다리에 쥐가 났단 말예요. 좀 쉬었다 해요.
한 시간만 참아, 그 안에 끝낼 테니까.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왜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난 지금 쫓기는 신세야. 급하지 않을 수 있니?
아무리 쫓겨도 그렇죠. 모델 콘디션도 생각해 주셔야죠.
그럼, 30분만 쉬었다 하자.
그러지 말고 나가서 저녁을 먹고 와요. 선생님은 배도 고프지 않으세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신애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선생님, 오늘 왜 그렇게 열심이세요? 제가 보기에 무서울 정도예요.
말했잖아. 언제 또 도망쳐야 할지 모르니까 그 전에 완성시키려는 거야.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무슨 소리냐?
그림이 끝나는 대로 절 집에 보내 주실 거 아녜요?
그야 물론이지.
그럼, 더 이상 도망칠 일이 없잖아요? 제가 납치당한 게 아니라고 말할 거니까요.
하지만 삼촌 문제가 남아 있잖아?
그거야 돈 좀 집어 주고 끝낼 수 있다면서요?
글쎄, 그렇긴 하지만…….
아유, 걱정도 팔자셔 정말. 이걸로 두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 셈이네요. 가서 축배나 들어요.
신애는 식당에 들어가자 물어보지도 않고 회와 양주를 시킨다. 그리고 종업원이 돌아서기도 전에 또 새우튀김과 양념구이를 시킨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잔치할 일이 생겼니?
잔치할 일은 아니지만 기념할 만한 일은 생겼잖아요? 누드는 완성되고 전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도 산장으로 돌아가서 고독을 즐기게 되고… 모든 것이 다 정상으로 돌아왔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멀쩡한 처녀를 납치해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그런데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끝나게 되었으니 축하할 만도 하다. 삼촌이 얼마나 다쳤는지 궁금하지만 그쪽은 어차피 돈으로 해결이 날 일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신애의 육체에 대한 추억과 새로운 누드 한 장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을 왜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했는지 생각하면 허탈하기만 하다.
넌 아무것도 걱정이 안 되니?
왕성한 식욕을 보이면서 맛있게 먹고 마시는 신애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문영이 묻는다.
걱정할 일이 뭐가 있어요?
부모님한텐 뭐라고 변명할 거야?
변명이 아니고 사죄를 해야겠죠. 제가 그만 눈이 멀어 가지고 선생님을 따라 팔도강산 유람을 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럼 엄마 아빠가 뭐라고 하시겠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좋아, 부모님은 그렇다 치고 니 남자친구한텐 뭐라고 할 거야?
마찬가지죠 뭐.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래도 내가 좋다면 계속 사귀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선생님, 인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벌써 몇천 년 전부터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왔지만 세상이 달라진 게 뭐가 있어요?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종사하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것, 이것이 진리에요. 아직도 감이 안 잡히세요?
문영은 어린애한테 설교를 듣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상한다. 감이 안 잡히느냐고 하는 말투도 거슬린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론을 펼칠 만한 자신도 없다. 사실 그 자신도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된다든가 하는 문제를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럴 때는 그저 마시고 취하는 게 장땡이다. 문영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단숨에 잔을 비운다.
잠깐 필름이 끊어졌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욕실이다. 문영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식당에서 어떻게 모텔까지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샤워를 하러 들어왔다가 욕조 난간에 기대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고민할 일은 아니다.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그뿐인 것이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 벗어 놓은 옷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대강 짐작이 간다. 둘이서 샤워를 한 다음 신애는 나가고 자신은 잠이 든 것이다. 침대에는 신애가 곤히 잠들어 있다. 아무 대책없이 알몸을 내던져 놓은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다. 문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처음으로 보기 싫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숙이나 화영이나 숙경이 함부로 옷을 벗어 던졌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다. 그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좀 가려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신애마저 그 대목에 와 버리고 만 것이다. 문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내가 왜 이럴까. 허벅지 한번을 만져 보고 싶어 그렇게 숨이 넘어갈 뻔했던 아이가 벌써 싫어지다니. 여자 쪽의 잘못인가 아니면 남자 쪽의 잘못인가.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쉽게 싫증을 느낀다면 그놈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평생을 같이 사는 남자와 여자는 그럼 짐승이란 말인가.
문영은 신애를 내려다본다. 지금까지는 살짝 엿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던 엽기적인 나체다. 우유를 들이부은 것 같은 뽀얀 살결, 부풀다 만 것 같은 앙징맞은 젖가슴, 거무스름한 한 줌의 음모 속에 숨어 있는 발그레한 골짜기, 갸름하고 매끈하게 뻗어 내려간 허벅지와 종아리, 엄지에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깨물어 주고 싶도록 작고 예쁜 발.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홑이불이라도 덮어 주고 싶을 정도로 민망한 모습이다.
문영은 비로소 깨닫는다. 신애가 얘기한 것처럼 사랑이란 것이 결국은 성욕 그 자체였다는 것을. 성욕이 동하지 않으면 이 아름다운 나체도 한낱 민망스러운 육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욕은 파도와 같아서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여자와 정사를 끝낼 때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자학을 하지만 언제나 그때뿐이다. 성욕이란 정말 더러운 것이다. 적어도 문영의 경험에서는 그렇다. 그 사실이 금방 입증된다. 신애가 잠결에 꿈틀하면서 등을 보이고 옆으로 돌아눕자 그 더러운 욕망에 다시 발동이 걸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너나 나나 참 불쌍한 인생이다 그런 연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몸을 눕히고 뒤에서 신애를 가만히 안아 준 것이 불찰이었다. 신애의 말랑말랑한 엉덩이가 배에 닿자 지금까지 축 늘어져 있던 그 물건이 벌떡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참으로 맹랑한 물건이다. 주인의 의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이 저 혼자 혈압을 높이고 빳빳하게 일어나 전투태세를 취한다.
이런 빌어먹을…….
문영은 혀를 차면서 얼른 돌아누웠다. 그러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빳빳하게 일어난 물건은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이윽고 주인의 의식까지도 욕망으로 치닫게 한다. 누가 시켜서 한 짓도 아니고 누가 말려서 될 일도 아니다. 자연 그 자체다. 정말 신경질이 난다. 그러나 해결책은 한 가지뿐이다. 문영은 화장실에 가서 자위행위를 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막상 몸을 일으키자 생각이 바뀐다. 눈앞에 여자를 놔 두고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다. 창피한 생각도 든다. 그래 이번 한 번만이다, 딱 한 번만이다, 마지막 기념으로 한 번만 안아 보고 내일은 아무 미련없이 집으로 돌려 보낸다, 그리고는 깨끗이 잊어버리는 거다. 문영은 신애를 끌어당겨 반듯하게 눕힌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엽고 신선하다. 음모만 드러내 놓고 있지 않으면 그야말로 천사 같다고 할 만하다. 가만히 상체를 기울여 입술을 포갠다. 그러자 뜻밖의 반응이 온다. 신애가 잠결에 아이 하면서 문영의 얼굴을 밀어 버린 것이다. 잠결에 하는 짓이지만 문영은 염치가 없어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래서 어차피 잠들어 있으니 전희니 뭐니 다 생략해 버리고 곧장 밀고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잠든 여자를 어떻게 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냥 다리를 벌려 놓고 밀어넣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해 보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삽입이 잘 안 되는 것이다. 몇 번을 시도해 본 끝에야 요령을 터득한다. 신애의 두 무릎을 구부려 놓고 엉덩이를 약간 들어올리자 간신히 삽입이 된다. 전초전에서 시간을 잡아먹어 그런지 몸과 마음이 급하다. 신애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맹렬하게 몸을 놀린다. 아는지 모르는지 신애는 몸을 내맡긴 채 눈도 뜨지 않는다. 참으로 재미없는 섹스다. 내가 이래선 안 되는데… 숨결이 높아지면서도 그런 생각이 스친다. 돈을 2천만원이나 들여 납치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오로지 섹스를 위해서 한 짓이 되고 말았다. 이것 말고는 다른 무엇이 없었단 말인가. 화가 난다. 신애의 육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어 더욱 화가 난다. 이윽고 팔다리가 빳빳하게 굳으면서 사정이 이루어진다. 굉장히 큰일을 해낸 것 같은데 신애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한숨과 함께 몸을 떼어내자 그제서야 끙 소리와 함께 옆으로 돌아눕는다. 이렇게 멋대가리없는 섹스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화가 난다. 끝까지 눈을 뜨지 않는 신애한테 화가 나고, 그런 여자의 사타구니에 사정을 하기 위해서 헐떡거린 자신한테 화가 난다.
이게 무엇인가. 왜 이래야 하는가. 끈적끈적한 점액을 뒤집어 쓰고 축 늘어진 자신의 물건을 내려다본다. 창피하고 비참한 느낌이다. 에이 씨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온다. 샤워나 하자. 문영은 공연히 식식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신애가 잠에서 깨어난다. 신애는 비틀비틀 걸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난다. 문영이 샤워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 밤중에 무슨 짓인가 싶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1시다. 문득 이상해서 사타구니를 만져 본다. 끈적끈적한 점액이 묻어 있다. 비로소, 자는 동안에 문영이 자신을 덮치고 사정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간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 휴지를 찾아 깨끗이 닦아낸다. 이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돌아서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영의 바지 주머니에서 삐죽하게 나와 있는 휴대폰이 눈에 들어온다. 욕실에서는 계속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신애는 얼른 집에다 전화를 건다. 꼭두새벽인데도 엄마가 금방 전화를 받는다.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엄마, 그냥 듣기만 해. 나 오늘 아니면 내일은 돌아갈 거야.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할 거니까……. 잘 있으니까 이렇게 전화를 하지. 정말 아무 염려 말라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엄마한테 미안해. 만나서 얘기할게. 끊어.
신애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제자리에 꽂아 둔다. 욕실에서는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사타구니가 끈적거리는 것 같아 좀 씻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다시 침대로 가 시트를 덮고 잠을 청한다. 욕실 물소리는 계속 들린다. 문영이 샤워를 틀어 놓은 채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서 들여다보고 싶지만 몸이 나른해서 그나마도 귀찮다. 그냥 자기로 한다.
그리고 문을 쾅쾅 두들기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것은 아침 7시였다. 커튼 밖으로 환한 햇볕이 눈이 부시다.
누구세요?
모텔 종업원이지 싶어서 그냥 시트로 몸을 감고 일어난다. 밖에서는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문을 열자 사람들이 우루루 밀고 들어온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동호와 이형사다. 엄마는 딸을 부둥켜안고 우선 울음부터 터뜨린다.
그 자식 어디 있어?
동호가 소리를 지른다. 이형사는 방안을 둘러보다 욕실의 물소리를 듣는다. 핸들을 돌려 보니 안에서 잠겨 있다.
야, 문 열어! 빨리!
동호가 주먹으로 욕실 문을 쾅쾅 치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신애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호가 있는 힘을 다해 발길로 걷어차자 욕실 문이 벌컥 젖혀진다.
문영은 욕조 안에 반듯하게 누운 채 샤워 물줄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마치 샤워를 틀어 놓고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다. 온몸이 석회를 뒤집어 쓴 것처럼 하얗게 핏기가 없다. 이형사가 문영의 코와 경동맥에 손가락을 대 본다.
왜 그래요? 어떻게 된 거예요?
신애가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이형사가 가로막는다.
죽었어. 여자들은 보지 말아요. 자네도 나가고. 아니, 자넨 112 신고 좀 해 줘.
알겠어요.
동호가 나간 다음 이형사는 욕실 문을 닫고 차분하게 현장을 살펴본다. 욕실 바닥에는 깨진 유리컵의 잔해가 흩어져 있고 문영의 오른손에도 한 조각이 쥐어져 있다. 샤워를 틀어 놓은 채 그것으로 자해를 한 것이다. 잔뜩 쪼그라든 음경이 반쯤 잘려 있고 아직도 조금씩 피가 흘러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핏자국은 샤워 물줄기에 씻겨 금방 연분홍색으로 희석이 되어 배수구로 사라진다. 신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형사는 혀를 찬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나 신애와 통화했다는 연락을 받고 이동통신에 가서 위치추적을 하는 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상황은 이미 끝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곳을 잘랐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오자 창가에 세워 둔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요염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는 신애의 누드다. 이형사는 가까이 가서 좀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림을 참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부둥켜안고 있는 신애를 돌아본다. 벌거벗은 몸에 시트를 걸치고 있는 여자의 나체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이렇게 좋은 여자를 두고 왜 자신의 물건을 잘라야 했을까. 면도칼도 아닌 유리조각으로 그것을 자를 때 얼마나 아팠을까. 이형사는 다시 그 생각을 하며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부신 햇볕과 함께 파란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거기에서는 지난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인간들만이 이상한 일을 저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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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