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2권 - 3. 마라토너

LoveHolic200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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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토너

흔히들 인간에게 무한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마라톤을
가장 아름다운 운동 중에 하나로 꼽으며
스포츠의 꽃이라 부른다.
하지만 마라톤은 그 기원부터
인간의 생명을 요구했다.
상구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6시에 일어났다.
옆자리에선 여동생 상아가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면서 잠들어 있었다. 상구는 잠든 상아의 얼
굴을 들여다보았다.
상아는 하루게 다르게 야위어 가고 있다. 불
과 한 달 전만 해도 먼저 일어나 비록 찬은 없
지만 아침밥을 차려 준다며 법석을 떨었는데.
오천만 원이면.
상구는 하나뿐인 여동생 상아를 살리기 위
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
히 그 동안 은행강도 같은 것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
도 그런 짓을 해 가지고서는 상아를 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행여 상아가 일어날까 조심스레 출근 준비
를 했다.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와 조심스레 옷
을 갈아입는데 상아가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오빠, 벌써 일어났네. 오늘은 내가 먼저 일
어나 아침 차려 주려고 했는데. 오빠, 미안해.”
졸음이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상아가 중얼
거렸다. 하루하루 초췌해 가는 상아의 얼굴을
보니 상구는 가슴 한 자락이 찌르르르 울려왔다.
“자식 걱정은. 너나 몸조리 잘해. 밥 걸르지
말고. 오늘 오빠가 퇴근할 때 너 좋아하는 파인
애플 사올 테니까.”
“애들처럼 파인애플은. 오빠, 오늘도 뛸 생각
이에요?”
“그럼! 뛰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누가 좋은 걸 모르나. 잘 먹지도 못하면서
뛰니까 그러지.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해?”
“상아야, 나는 걱정 마. 원래부터 오빠는 통
뼈잖아. 너 귀찮더라도 꼭 점심 찾아먹어라.
약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알았어! 무슨 일 생기면 주인 아줌마에게
부탁하고, 연탄가스 조심하고, 낯선 사람은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게.”
“짜식이 내가 할 말을 지가 다하네.”
상구는 청마루에 앉아 운동화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가을이라 그런지 아직은 아침 날씨
가 제법 쌀쌀했다. 상구는 점퍼의 지퍼를 올리
고 빨간 녹이 슬어 바삭거리는 철대문을 열고
나섰다.
“오빠, 잘 다녀와요!”
상아가 청마루로 상체를 내밀고 나뭇가지처
럼 야윈 손을 흔들었다. 마주 보며 손을 흔들
지만 마음은 손처럼 가볍지 않았다.
이제 고작 열여덟인데.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조금만 더 하면
오빠 고생 시키지 않고 장학금 받으며 대학 갈
수 있다고.
찌린내 나는 골목을 빠져 나가다 보니 코끝
이 찡해 왔다. 매일 아침마다 느끼는 감정이지
만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 나와 그나마 제법 큰 길로 나온
상구는 숨을 고르며 시계를 보았다. 마을 버스
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잔뜩 움츠린 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가면
대략 40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상구는 늘 뛰
어다녔다.
어제 기록은 7분 32초였다. 상구는 오늘은 7
분 30초 안에 도착하리라 마음먹고 뛰기 시작
했다. 내리막을 뛰어가는 것은 오르막을 뛰는
것만큼이나 체력 소모가 컸다.
차를 피해야 하는 데다 커브가 심하고, 증가
하는 가속도를 조정해야 하니 평지에서 달리
는 것보다 두 배는 더 힘들었다. 아침을 안 먹
은 빈 속이어서 속이 비록 허하지만 기분은 더
없이 상쾌했다.
“상구야, 출근하니?”
트럭을 몰고가며 동네 형이 아는 척했다. 상
구는 손을 가볍게 들어서 답례를 했다.
이 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구를
알았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더 없이 좋은
이웃이었다.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 먹으려 했
고 남의 근심 걱정은 덜어 주려 했다.
뛰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이 보였다. 상구
는 구멍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빠지려
는 숨을 몰아쉬었다. 기록을 체크해 보니 7분
28초였다. 지금까지 잰 기록 중에서 제일 좋은
기록이었다.
“아침 날씨가 선선하지.”
가게 주인 아줌마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네, 기온 차가 심해서 감기 조심하셔야겠어
요. 아주머니는 천식기가 조금 있잖아요.”
“그렇잖아도 조심하고 있는데 상구 총각이
걱정까지 해 주니 올 가을은 끄떡없겠는데.”
아주머니가 두 팔을 뽀빠이처럼 들어올리며
말했다.
상구는 싱긋 웃으며 냉장고에서 그날 들어
온 신선한 우유를 하나 꺼내 마셨다. 상구에게
는 그 우유가 어떤 보약보다도 값진 아침 식사
였다. 처음에는 우유값도 아까워 절약했으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보름 전부터 사 먹기
시작했다.
지하철은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갈아탄 전철에서도 상항
은 마찬가지였다. 상구는 지하철 안에서 선 채
로 눈을 감고서 휴식을 취했다.
전철이 안산역에 멈추자 수많은 사람들이
공장으로 출근하기 위해서 내렸다. 지하도를
나오자 분주한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몰
려갔다.
상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김 계
장에게 인사했다. 술고래로 유명한 김 계장은
어제도 한잔 했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오늘도 뛰어서 가려고? 오늘은 피곤한 것
같은 같이 버스 타고 가지 그래?”
“피곤하기는요. 전 괜찮습니다. 저는 뛰는
게 좋은데요, 뭐.”
상구는 꾸벅 인사를 하곤 뛰기 시작했다. 역
에서 상구가 일하고 있는 공장까지는 버스로
약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버스가 돌아가
는 거리를 감안한다 하더라라도 7, 8km는 족
히 되리라. 상구는 그 거리를 매일 뛰어서 출
근한다.
공장 동료들은 처음에는 약간 이상한 놈 취
급했지만 상구는 개의치 않았다. 상구로선 버
스비도 절약할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좋
은 기회인 것이다.
상구는 달리면서 가끔 버스 안을 들여다보
았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힘겨운 고개짓을.
공장 사람들은 아무도 상구가 아침마다 느
끼는 기분을 몰랐다. 얼굴에 부딪히는 상쾌한
바람, 떨어지는 가로수잎이 밟힐 때의 그 감
촉, 이마 위로 드리워진 차가운 하늘, 발 아래
밟히는 단단한 아침을.
달리다 보니 비록 숨은 찼지만, 이 아침에
깨어 있다는 자부심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상구가 빠르게 달려가자 살아온 날들이 상구
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스쳐 지나갔다.
상구는 시골 마당가의 감나무를 보았다. 허
공을 사르던 빨간 감들.아버지의 닭들이 전염
병에 걸려 맥없이 쓰러져 갈 때에도, 농협 빚
을 시달리던 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피를 토
하던 그날 밤도, 저수지에 몸을 던져 퉁퉁 불
은 어머니를 이불에 싸 가지고 집안으로 들이
던 그 밤에도 감나무는 하늘가에 그렇게 작은
불꽃으로 매달려 있었다.
구슬피 통곡하던 상아 앞에서 약한 오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상구는 매번 감나무에 매
달린 빨간 감만 넋놓고 바라보았다.
어머니마저 야산에 묻던 가을 상구는 고등
학교 이학년이었고, 상아는 중학교 2학년이었
다.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쁜 야생화를 재배해 수출할 꿈을 꾸던
상구는, 그 꿈을 잠자리 날개에 고스란히 실어
멀리 띄워 보냈다.
상구는 상아와 함께 서울로 왔다. 사글세 방
을 얻어 놓고 상구는 공장에 다녔고, 상아는
학교에 다녔다. 상아는 오빠의 마음을 아는지
공부를 잘해 줬고, 상구는 대학생이 되어 있을
상아를 상상하며 잔업이며 야간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해서 돈을 모았다.
통장에 돈은 불어갔고, 상아는 가을 하늘처
럼 티없이 자라났다. 상구에겐 더없이 행복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난 여름
부터 상아는 자주 두통을 호소하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상구는 상아를 데리고 병원을
전전했다. 여러 개의 병원을 돌아다닌 결과 상
아의 병명이 밝혀졌다.
상구로서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희귀한
병이었다. 의사는 흔치 않은 병이라 국내에서
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미국에 건너가
서 전문가에게 가족의 골수를 이식하는 수술
을 할 경우 살아남을 확율은 반 정도 된다는
것이었다.
상아가 살아남을 확율은 50%. 상구로서는 당
장이라도 미국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수술비를 포함하여 제반 경
비가 오천만 원만 원 가량 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상구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구에게는 오백만 원도 엄청나게 큰돈이었
다. 그런데 오천만 원이라니. 상구는 파랗던 세
상이 일순간에 시꺼멓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절망
한치 앞도 분별하기 힘든 시꺼먼 절망뿐이었다.
매일 저녁 상아가 잠든 뒤에 상구는 신께 빌
었다. 상아를 살려 주시고 나에게 그 병을 내
려달라고. 밤새 몸부림 치며 기도를 했지만 신
은 아무런 응답도 내려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아에게 비밀로 했으나 눈치 빠
른 상아는 이내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곤
밝게 웃으며 상구를 오히려 위로했다. 오빠를
놔 두고 결코 혼자 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 걱
정 말라며.
상아의 미소는 상구에게 용기를 주었다. 최
선을 다해서 살다 보면 어딘가에 분명 또다른
탈출구가 있을 것 같았다.
저만치 공장이 보였다. 상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
다. 공장 정문으로 들어서며 시계를 보았다.
24분 48초. 잡념에 시달린 때문인지 기록이
저조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8시 32분이었다. 작
업 시간보다 18분 일찍 온 것이다. 세수하고
나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으 뒤 다리 근육을 풀
었다. 8시 50분이 되자 스피커에서 음악소리
가 요란하게 울려 나왔다. 그와 함께 메인 스위
치가 켜지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구는 자신의 라인으로 갔다. 특별한 기술
이 없는 상구가 하는 일은 박스를 포장하고 나
르는 단순 노동이었다.
박 조장이 라인 식구들을 모아 놓고 새로 들
어온 아르바이트생을 소개시켜 줬다. 박 조장
은 상구에게 일을 가르쳐 주라며 말쑥한 대학
생을 배당해 주었다.
상구가 머쓱해 있는데 대학생이 먼저 와서
싹싹하게 인사를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부유해 보이는 집안의 자제 같았다. 상구는 잠
시 상아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좋았
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박 조장이 작업 개시를 알렸다. 상구는 대학
생에게 공장에서 만들어진 전자제품을 포장하
는 방법과 이동 중에 주의할 점을 대략 알려
주었다. 그리곤 묵묵히 일을 했다.
상구는 대학생에게 반감을 느꼈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신분이 다른 데서 오는, 이쪽은 생
계를 위해서 일하는데 저쪽은 심심풀이로 일
을 한다는 차이에서 오는, 일종의 적대감이었다.
일을 하다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대학생은
서툴지만 일은 열심히 하려 했다. 아줌마들이
대학생에게 간간이 말을 붙였다. 나이는 예상
했던 대로 상구와 동갑이었다. 그는 해외 여행
경비에 보태기 위해서 일주일 가량 일을 하기
로 했다는 것이었다.
해외 여행이라. 예전에는 부유층만 다녔으나
지금은 많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을 상구 역
시 잘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도 툭하면 보
여 주는 것이 해외 풍경이니까.그만큼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건지도 모른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씩 다녀 왔다는 해외
여행. 언론에서는 한 해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
이 공항을 빠져 나갔고 외국에서 얼마씩 쓰고
왔다고 떠들어대지만 상구에게는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상구 주변 사람들 중
에서 아직 해외 여행을 갔다온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으니까.
하지만 상구가 그 대학생을 멀리 하는 것은
해외 여행을 간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호화
여행이 아닌 배낭 여행이라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많이 나갔다 오는 게 좋다는 것쯤은
상구 역시 잘 알았다.
상구가 대학생이 묻는 말 이외에는 단 한 마
디도 먼저 붙이지 않는 것은 상아 때문이었다.
여동생이 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여행 간
다는 대학생을 붙잡고 웃고 떠들고 싶은 마음
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보이지 않는 적대감이 그들로 하여금
그 대학생을 멀리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담배피고, 그들의 얘기자리
에 끼지 못했다. 하지만 일할 시간이 되면 묵
묵히 열심히 일했다. 보다못한 상구가 다음 시
간에 가서 말을 걸었다. 말을 해보니, 좋은 사
람같아 보였다. 대학생이라고 자랑하는 빛도
안 보이고, 오히려 상구가 일에 한해서 선배라
고, 선배대접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이는 동갑이며, 이름은 일한이라고 했다.
아까 멀리서 들은대로 집안사정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금 벌기 위해 한 일
주일 정도 일한다는 것이었다. 상구는 이 대목
에서 그의 여유에 대한 질투를 느꼈지만, 잠시
뿐이었다. 그 일한이라는 사람은 자기들보다
더욱 성실히 일했다. 덕분에 상구도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서글서글한 성
격에 상구는 그와 금새 친해졌다.
저녁 여섯시가 되자 박 조장이 잔업 의향을
물어 왔다. 상구는 서슴지 않고 손을 들었다.
밤 아홉시까지 일하면 칠천 원을 더 벌 수 있
었다.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잔업과 특근을 하
면 그 돈만 해도 자그마치 삼십만 원 가량 됐
다.
상구와 함께 일을 하던 일한이라는 대학생
은 먼저 약속이 있다며 정시에 퇴근을 했다.
상구는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는 대학생의 뒷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생애
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저 대학생처럼
칠천 원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서 살아 보고 싶었다.
대학생이 빠져 나가서 그런지 매일 하는 잔
업인데도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일주일 동안은 매일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그에게는 훌쩍 떠날 자유가 있
으나 상구에게는 자유가 없으므로.공장 천장
이 유난히 높아 보였다.
마침내 시끄러운 음악이 멈추고 웅웅거리는
기계음도 멎었다. 상구는 세면가로 가서 깨끗
이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공장 안에서 부품을 조립하던 어린 아가씨
들이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나왔다. 상구는 그
들 틈에 섞여 공장문을 나섰다.
상구는 길게 늘어지려는 몸을 추스려 다시
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노동에 지친 긴 그
림자를 끌고서 드문드문 켜 있는 가로등을 벗
삼아 달렸다. 상아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은
조바심에 속력을 높였지만 역의 모습은 좀처
럼 나타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서 동네 역에서 내린 아침
에 우유를 산 가게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샀
다. 통조림을 옆구리에 끼고서 마을버스가 달
리는 길을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상구는 발 밑을 살피며 달렸다. 산동네로 이
어진 소방도로는 콘크리트가 군데군데 패여
있어 발 밑을 조심해서 달려야만 했다. 자칫하
다가는 발을 접찔릴 수도 있었다. 발이라도 삐
는 날에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극도
로 조심해야만 했다.
상구는 가슴속 깊은 곳에 목표가 하나 있었
다. 그것은 바로 한 달 뒤에 열리는 마라톤 대
회의 우승이다. 사실 상구는 그 동안 한번도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 본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마라톤 선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상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오
로지 상금 때문이었다.
우승 상금은 미화로 7만불이었다. 대충 오천
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그 돈이면 상아의 수
술비로 충분했다. 의사는 확율은 50%라고 했
지만 상구 생각에는 수술만 하면 곧바로 나을
것 같았다. 아니, 반드시 나을 거라고 믿었다.
상구는 달리기 선수는 아니었지만 달리기라
면 자신 있었다. 어릴 적에도 10리가 넘는 학
교 길은 뛰어다니곤 했었다.
아니, 상구에게는 달리기에 자신 있고 없고
를 떠나서 선택은 오로지 하나뿐이 없었다. 무
슨 일이 있어도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해서 상
금을 타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상구, 자신에
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믿었다.
꾸불꾸불 이어진 골목 앞에서 상구는 숨을
돌렸다. 이제 고통스런 하루가 끝난 것이었다.
상구는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려는 육신을 끌
고서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아는 책을 읽고 있었다. 상구는 마치 야유
회라도 갔다온 사람처럼 상아에게 웃음을 띄
웠다. 마루에다 내려놓으려고 보니 파인애플
통조림이 땀으로 반들거렸다. 상구는 상아 몰
래 통조림에 묻은 땀을 닦았다.
부엌에서 상아가 상을 차리는 동안 상구는
웃도리를 벗고 몸을 씻었다. 하루하루 말라가
는 동생.신발이 도리어 커졌다며 멋쩍게 웃던
상아의 미소가 세수대야에 아른거렸다.
상야야,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너의 건강을
찾아 줄 테니까.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그동안 상구는 그
일한이라는 대학생과 친해졌다. 상구의 입장
에선 처음으로 만나보는 같은 또래의 대학생
이었다. 일말의 호기심과 기대감도 갖게 되었
다. 마지막 날, 그 대학생은 상구에게 자기가
술 사겠다고 했다. 당연히 거절해야했지만, 처
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학생과의 술자
리는 가고 싶었다. 마음 한쪽 구석으로는 대학
생을 만나, 말로만 듣던 좋은곳에서 술 마실
것은 기대감도 거절을 못하게 했다.
강남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실 상구는 태어
나서 처음으로 강남에 갔다. 사석에서 처음만
난 일한은 공장에서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상구는 괜히 위축이 되는 기분이었다. 일한이
가 데리고 간 술집은 상구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이이었다. 반포에 있는 스마일이라는
작은 실내 포장마차였다. 아나고 회가 맛있다
며 거기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스마일이란 술
집은 자기들이 먹는 술집보다 다를 바 없었다.
이모라고 불리는 친절한 아주머니들... 좁은
테이블과 의자들... 다양한 연령의 손님이 얼
큰하게 취했있는 분위기...
상구는 약간 놀랐다. 적어도 대학생은 맥주
만 먹고, 까페만 가는 줄 알았는데... 일한은
여기 단골인지, 주인 아주머니들과 친해보였
다. 아주머니들은 친근하게 안주와 소주를 갔
다 주었다. 말대로 안주들은 참 맛있었다.
일한이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저쪽 테이블
을 향해 말을 걸었다.
“준성아, 아직도 술이니?
오늘 윤이는 웬일이냐? 오늘은 술 안먹는데
니....”
그 테이블에는 대학생같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언뜻 들어보니,
많은 고민이 있어보였다. 술로 그 고민을 해결
해보려는 사람들 같았다. 상구는 언뜻 그들의
사치한 고민에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알코
올 기운이 오름에 따라 생각도 바뀌었다. 사람
은 사람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자기 생각에는
그 고민이 가장 괴롭게 느껴지는 것으로... 또
그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는다고... 이들은 술
에서 그것을 찾고 있지만, 나는 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점에서 상구는 그들 대학생에 대
해 일말에 우월감까지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
지니, 술이 맛있어졌다. 오래간만에 취할때까
지 마셔본 술이었다.
헤어질때 연락처 교환을 했지만, 상구는 다
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렸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상구는 달
린다는 것에 더욱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
다. 평범한 대학생들과의 만남이 그것을 심화
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가졌
던 열등감의 해소의 일환일 수도 있었다. 그
대학생들은 좋은 사람같았다. 상구는 소위말
하는 계층이나 계급은 물질적 분류보다 서로
에게 지니게 되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대학생들도 평
소에 자기가 지녔던 이미지와 너무 판이하게
달랐다.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아니면 노동
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그들은 결코 이
두 부류로 분류못할 단지 평범한 대학생들이
었다. 하지만 상구는 그들과 본질적인 이질감
을 느꼈다. 여하튼 이들과의 만남은 상구에게
있어서 달리는 것의 의미를 더 확대시키는 계
기였다.
상구는 일한의 빈 자리로 인하여 한동안 허
전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공장 안을 울리는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듯,
기계가 자동으로 움직이듯 모든 것들이 시간
과 함께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상구는 직장과
가정으로 쉴새없이 달렸다. 돈과 체력을 비축
하기 위해 회식 자리도 빠져 가며 오로지 달렸
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영화를 보러 가는 사
람들 사이로,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사랑을 나
누는 연인과 한잔 술에 취해서 천하를 쥔 듯이
호령하는 취객의 곁을 지나서, 오로지 마라톤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 사이에도 상아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담당 의사는 수술 시기를 미루
면 미룰수록 성공 확율 또한 떨어진다며 안타
까워 했다. 상구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을 느꼈다. 하루하루 미라처럼 말라가는 상아
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졌다.
상구는 일요일에 모처럼 특근을 나가지 않
았다. 상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낭에
물통에 넣고 집을 나섰다. 동네 약수터에 가서
물통에 물을 채웠다.
잠실에 차를 타고 도착하니 아침 여덟시 반
이었다. 날씨는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고 아주
선선했다. 장거리를 뛰기에는 아주 적합한 날
씨였다.
상구는 몸을 천천히 풀었다. 이 주 앞으로
다가온 시합을 앞두고 완주를 해 보기 위해서
였다. 코스는 한강 고수부지의 자전거 도로로
잡았다.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왕복해 볼 작정
이었다. 집을 나서면서 이 정도 코스면 21km
는 족히 될 거라고 계산해 놓은 곳이 있었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정확히 아홉시에 출발
했다. 등에 비록 배낭을 맸지만 몸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휴일 아침을 맞아 조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뛰다 보니 강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어 왔다.
상구는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한강을 끼고
서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
이번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늦어도 2
시간 7분 안에는 들어와야 했다. 출전 선수들
의 기록을 살펴보고 상구가 내린 결론이었다.
42.195km를 2시간 7분 안에 완주하려면 1km
를 3분 안에 뛰어야 했다. 10분쯤 달리다가 상
구는 목표를 바꿨다.
일단 기록보다도 완주에 의미를 두는 게 여
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완주만 할 수 있
다면 여러 명이서 뛰는 시합 때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들이 스쳐 지나가고 차들이 빠른 속
도로 지나갔다. 상구는 멀리 보이는 63빌딩을
향해 달렸다. 달리다 간간이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반환점인 63빌딩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넘게 뛴 것 같은데
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21km 정도는 출퇴
근할 때 자주 뛰어 봤던 거리였다.
반환점을 돌아서 한참 달리다 보니 체력에
한계가 느껴졌다. 물통을 자주 꺼내서 조금씩
마셨지만 체력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
다. 출발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등에
지고 있는 배낭이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던져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영조 선수가 이야기했듯이 여기서부터는
정신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구는 초라한
방에 누워 있을 상아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
서 앞을 향해 달렸다.
35km는 넘어선 것 같았다. 머릿속은 뛰어
야 되겠다는 느낌뿐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상
구는 기계적으로 손발을 놀렸다. 강바람이 점
점 강하게 느껴졌다. 괴로웠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상구는 계속해서 뛰었다. 달리는 마
라톤 선수를 보면서 무척 괴로울 거라는 생각
은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었다.
가장 힘들다는 40Km를 넘어선 것 같았다.
출발 지점이 저만치 보였다. 상구는 이를 악물
고 막판 스퍼트를 했다. 관중들의 환호성도 박
수도 없었다. 스타트 라인에 발을 디딘 상구는
잔디밭으로 가서 벌렁 누웠다.
숨이 차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완주를
했다는, 마침내 해냈다는 기쁨이 고무풍선처
럼 텅 빈 것만 같은 뱃속으로 서서히 들어찼
다. 그것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다. 시합 때도
오늘 정도로만 뛰어 준다면 우승을, 아니 상아
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상구는 한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섰다. 세상
이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시꺼멓게 보였다. 손
상된 체력은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상
구는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가루가 되어 전신이 부서져 내릴 것처
럼 괴로웠지만 부지런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
했다.
한시라도 빨리 상아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이 주일만 있으면 수술을 받을 수 있
으니, 괴롭더라도 참으라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집으로 돌아가니 상아가 깜짝 놀라며 상구
를 맞았다. 상구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상아야! 내가 오늘 완주했어.”
상구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
다. 상아는 오빠의 한 마디를 듣고서 모든 상
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빠가 하고 싶어하는
말까지도.
상아는 상구의 손을 꼭 잡았다. 고깃국 한번
제대로 끓여 주지 못했는데 그 먼 거리를 뛰어
준 오빠가 더없이 고마웠다. 상아는 오빠가 마
라톤에서 우승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다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오빠가, 최선을 다해서 자
신을 살리려고 하는 오빠가 더없이 자랑스러
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아도 상구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
다. 마라톤 코스를 한 번 완주하고 나서 체력
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 쉬어
야 한다는 것을.
상구는 시합을 일주일 남겨 놓고 접수를 했
다. 접수를 하러 나가면서 박 조장에게 살짝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와 보니 공장내에 파다
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상구가 왜 마라톤대
회에 나가야 하는지 그 이유까지 정확히 꿰뚫
어 보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은 상구를 마라토너라 불렀다.
그들은 상구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기도 했으
며 삶은 계란이나 우유 등을 몰래 작업복에 넣
어 주며‘화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상구는 사흘 가까이 완주를 한 후유증으로
절뚝거려야 했다. 몸이 서서히 회복되는 기미
가 보이자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 같은 라인에
배치된 동료들은 상구는 힘든 일에서 빼 주었
다. 한 사람이 빠지면 그들이 그 만큼 더 힘들
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상구였기에 처음에는 극
구 만류했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굴복
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서 충분하지는 못하
지만 그런 대로 휴식을 취하다 보니 몸의 회복
속도도 빨라졌다.
시합을 나흘 남겨 놓은 날이었다. 잔업이 끝
나고 집에 가려는데 평소에 짠돌이로 소문난
박 조장이 상구를 몰래 불렀다. 박 조장은 그
를 데리고 보신탕집으로 데려 갔다.
“여동생이 많이 아프다며? 달리 도와 줄 건
없고.이거나 많이 먹어. 그리고 꼭 일등해, 알
았지?”
상구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
다. 어느 누구보다도 박 조장네 살림살이를 잘
아는 상구였다. 박 조장이 짠돌이로 소문난 것
은 성품이 그래서가 아니라 가정 형편이 어려
워서였다.
박 조장은 삼 형제 중 둘째였다. 중풍에 걸
려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를 모시고 세 자녀 교
육시키려면 단돈 십 원도 아껴 써야 하는 처지
였다.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으라고 했지만
상구는 목이 메어서 고기를 삼킬 수가 없었다.
시합이 이틀로 다가왔다. 퇴근하려는 상구
주변으로 같은 라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철이 엄마가 선물꾸
러미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뭔가 풀
어 보았다.
운동화였다.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지만 감
히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구는 고맙다는 말 대
신에 운동화를 쓰다듬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우승해서 상금 타면 한 턱 내라고!”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데 누군가 등짝을 치면서 말했다. 그 순간, 참
고 참았던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상구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반드시 우승
으로 보답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시합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같은 라인 사
람들의 배려로 상구는 오전 일만 한 뒤에 집으
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아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살금살금 대
문을 들어섰다. 상아는 방문을 열어 놓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상아의 모습이었따. 상아는 더없이 경건
한 표정을 짓고서 입술을 달짝거렸다. 상구는
기도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마당에 둘어섰다.
그날 저녁 상구는 상아와 함께 나란히 잠자
리에 누웠다. 잠을 푹 자야 하는데 긴장한 때
문인지 좀처럼 잠이 쏟아지지 않았다. 낮에 기
도하던 상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상아야, 너 오늘 누구에게 기도했니?”
“오빠 봤구나. 아빠랑 엄마에게.우리 오빠를
지켜 달라고 기도했어. 오빠, 난 괜찮으니까
내일 무리하지 마, 알았지?”
“상아야, 걱정 마! 오빠는 내일 반드시 우승
할 거야. 그래서 네 병을 고쳐 줄 거야.”
“고마워, 오빠! 난 오빠 맘 알어. 난 몸은 비
록 아프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오빠, 내일 뛰다가 힘들면 그만둬. 알았지?”
“그래.”
“내가 오빠 추리닝에서 부적을 붙여 놨어.”
“부적? 네가 어디서 그걸 구했어?”
“응, 주인 아줌마에게 부탁했어. 용하다는
무당이 있다길래 오빠가 걱정돼서 한 장 구했
어. 오빠를 지켜 줄 거야.”
“상아야, 내 걱정 마! 뛰다 힘들면 그만 둘
테니까.”
상구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마음에 없
는 말을 했다.
잡념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렸다. 상구는 깜짝 놀
라서 일어났다. 불을 켜 보니 상아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창
백했다.
“상아야, 정신 차려! 괜찮니?”
흔들어 보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시
계를 보았다.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구는
상아를 들쳐 업고 뛰었다. 차를 잡아타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주치의는 병원에 없었다. 상아의 진료카드
를 유심히 읽던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상아에게 포도당 주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곤
주치의가 출근할 때까지 응급실에서 기다리라
는 것이었다.
상아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신음을 내뱉
었다. 상구는 상아 곁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병실 창으로 부윰한 햇살이 비쳤다. 시합 시간
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언제 다시 돌아올
지 모르는 기횐데. 상아 곁을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없을 이 기회을 놓쳐 버릴 수도
없고.
상구는 상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갈등했
다. 밤새 신음을 토하며 헛소리를 하던 상아가
열이 조금 내렸는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
렸다.
“오빠, 몇 시야?”
“의식이 좀 드니? 조금만 참아. 의사 선생님
이 곧 오실 거야.”
“오빠 그 동안 노력 많이 했잖아. 나 걱정 말
고 시합에 나가 봐. 일등 같은 거 안 해도 돼.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뛰어 줘. 상아가 지켜보
고 있을 테니까.”
상구는 상아의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 기
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상아의 생명은 살릴 길이 없었다.
상아야, 조금만 참아! 오빠가 꼭 우승할 테
니까.
상구는 간호원에게 상아를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곤 병원을 나와서 집으
로 향했다. 잠은 제대로 못 자서 컨디션이 그
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계제가 아
니었다.
출발 시간은 열시였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
아 있지 않았다. 상구는 집에서 추리닝으로 갈
아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그 위에다 점퍼를 걸
치고 잠실 주경기장으로 향했다.
출발 지점인 잠실 주경기장 안은 수많은 사
람들로 붐볐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들, 방
송국 사람들, 응원 나온 사람들로 메인 스타디
움은 시끌벅적했다.
상구는 점퍼를 벗어 가방에다 넣었다. 부적
을 달아놓았다는 추리닝 앞을 내려다보니 노
란 실로‘오빠 화이팅!’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
었다. 다른 선수들이 우습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상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았다. 상구는 675번
이었다. 옷핀으로 두 장의 번호표를 앞뒤에다
붙였다.
이윽고 출발시간이 되었다. 상구는 일반인
출전자였으므로 선수들로부터 150m 후방에서
출발해야 했다. 상구의 앞쪽에는 전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건각들이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략 200여명쯤 되어 보였다.
상구는 출발 재미삼아 참가한 4천명의 시민
사이에 껴서 출발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
다. 상구의 옆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도
있었고, 국민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느긋해 보였다. 어차피 참가에 의의
를 둔 그들이었기에 뛰다가 피곤하면 천천히
걸어가면 될 터였다.
긴장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상구는 길게 심
호흡을 했다. 짧은 순간,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서 땀 흘렸던 수많은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수술을 무사히 끝마친 상아의 환히 웃는 모습
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탕!
마침내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그 소리와 동
시에 8천 개가 넘는 다리가 일제히 앞을 향해
서 나아갔다. 상구는 스피드를 내서 일단 유명
선수들과 함께 합류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전력 질주를 해서 상구는 선두 그룹에 뛰어
들었다. 그들은 상구를 슬쩍 돌아보았을 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텔레비전에 한번 나오
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촌놈으로 여기는 눈
치였다.
상구는 마라톤 코스를 표시하는 파란 줄만
보고 뛰었다. 앞쪽에 방송 차량이 보였다. 상
아를 비롯해서 자기를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
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
다. 상구는 그들을 위해서 앞으로 나섰다.
카메라가 상구를 비췄다. 상구는 자신을 지
켜보고 있을 이들을 향해 슬쩍 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카메라는 순식간에 상구를 스쳐 지나
갔다. 렌즈가 비추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강력한 우승후보인 케냐 선수가 뛰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저 앞에
10km 표지판이 보였다. 상구 앞에서 뛰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송 차량이 앞서 가고
가끔씩 헬기가 상공을 날아갈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20여 미터쯤 뒤쪽에서 열
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뛰어오고 있었다. 신
문과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던 국내외의 유
명 선수들이었다. 상구는 그들과 합류해서 뛸
까 하다가 방심하다가는 우승을 놓칠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선두를 유지하기로
작정했다.
마라톤 해설자로 나온 김병국은 머리가 혼
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카메라맨은 계속해서
낯선 젊은이를 비추고 있었다. 전혀 마라톤 선
수 같지 않은 촌스러운 사내를. 참가번호 576
번이 달릴 때마다 연도에 선 많은 시민들이 의
아한 눈길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마라톤 중계 해설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
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경력도 있는 데다 한국
육상협회 이사로 재임하고 있으니 당연한 요
구였다. 김병국은 흔쾌히 방송사의 제의를 수
락했고 그 날부터 참가선수 개개인에 대한 자
료를 수집하며 우승 후보자를 뽑아 놓았다.
김병국은 한 달 동안 두시간 반가량 생방송
으로 진행되는 마라톤 대회의 해설을 위해 틈
틈이 자료를 모았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려
하다 보니 추리고 추렸음에도 불구하고 자료
가 가방으로 하나 가득이었다. 이 정도 자료면
두 시간 아닌 이십이라도 계속해서 떠들어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덟시에 방송국에 도착한 김병국은 아나운
서를 비롯한 스텝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
를 나눴다. 같이 이야기를 주고 받을 아나운서
는 그전에도 여러 번 마라톤 중계를 같이 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날씨도 쾌
청했고 개인적으로 몸 컨디션도 좋았다. 기분
같아서는 선수들과 같이 뛰어 보고 싶을 정도
였다.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김병국은 방속국 스튜디오 안에서 아나운서
와 함께 수신되어 오는 화면을 보며 해설을 해
나갔다. 준비해 온 선수 개개인의 기록을 소개
해 주면서 오늘 우승 후보를 조심스레 점쳤다.
3km를 지나면서 전혀 뜻하지 않은 선수가
카메라에 비쳤다. 김병국은 낯선 얼굴에 적이
당황하다가 참가번호를 보고 일반 참가 선수
라는 것을 알았다. 김병국은 이내 평정을 되찾
을 수 있었다.
“마라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한 시민이 선
두 대열에 합류했군요. 한국 마라톤이 오늘날
처럼 세계 강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저런 분
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
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발력이 빠른 아나운서가 말을 붙였다.
“네에, 그렇죠. 외국의 경우를 보면 한 도시
에서 마라톤이 개최되면은 도시 사람들이 굉
장히 많이 참가를 해요. 그래서 마라톤 대회를
축제 분위로 만들죠. 오늘 많은 분들이 참가했
지만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가했으면 좋겠어
요.”
미리 준비해 온 자료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
만 그런 대로 받아 넘길 수 있었다. 피디가 잘
했다고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카메라는 다시 마라톤 현장으로 넘겨졌다.
한국의 건각들이 세계의 건각들과 나란히 달
리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675번이 다시 화면에 비춰진 것은 8km 지
점이었다. 이번엔 675번이 선두였다. 김병국
은 삐쩍 마른 사내가 대단한 체력을 지녔다고
내심 감탄했다. 조만간 지쳐 뒤로 처지겠지만
일반 참가자로써 저 정도 뛸 수 있다는 건 참
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김병국은 저런 페이스라면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점쳤는데 675번은 예상을 뒤집고 계속
선두를 유지했다. 카메라는 자주 그를 비쳤다.
675번에 대해서 아는 자료가 없기에 675번이
화면에 나오면 김병국은 아나운서와 함께 가
벼운 농담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자 김병국은 짜증이
났다. 매끄럽게 해설을 하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방해자가 생긴 것이었다. 김병국은 울컷
치솟는 짜증을 누르고 열심히 준비해 온 자료
를 주고 받으며 아나운서와 이야기를 주고 받
았다.
15km를 넘어섰지만 675번은 여전히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준비해 온 기록을 비교해 보았
다. 15km까지는 세계 기록보다 30초가 빨랐
다. 김병국은 675번을‘이상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한 청년 덕분에 다른 선수들
의 기록도 세계 기록보다 27초 가량 빨랐다.
곧 뒤로 처지겠지.
김병국은 달리는 사내의 엉성한 폼을 보며
생각했다. 손발을 놀리는 폼이나 보폭, 호흡하
는 방법으로 봐서는 마라톤을 전혀 모르는 사
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라톤에 대단한 소
질이 있어 보였다. 대단히 강한 심장과 대단히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라톤은 과학이었다. 예전에는 뚝
심만 좋으면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었지만 이
제는 달랐다. 과학적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다
면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지닌 선수라 하더라
고 세계 기록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80년대
이후에 자리잡아 가고 있는 보편화된 논리였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다시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라톤 경기의 반쯤 되는 20km를 지
났지만‘이상한 청년’은 여전히 선두를 달리
고 있었다. 기록을 비교해 보니 20km까지의
구간 기록은 세계 기록보다 1분이나 빨랐다.
오늘은 시합 전날일 거야.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김병국은 화면에 가득 비친 사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충혈된 두 눈, 꽉 다문 입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몸짓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 화이팅!’
가슴에 노란 실로 새겨진 글자가 클로즈업
됐다.
저 청년은 왜 달리고 있는 걸까?
문득, 강한 의혹이 김병국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나운서가 뭐라고 말을 붙였으나
김병국은 잡념에 시달리느라고 제대로 듣질
못했다.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네, 그렇죠.”
김병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동
문서답이었는지 아나운서가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김병국은 피디를 보았다. 피디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에프디가 카메
라가 마라톤 현장을 비출 때 종이 쪽지를 가지
고 와 아나운서 앞으로 내밀었다. 아나운서가
재빨리 눈으로 훑은 뒤 읽어 나갔다.
“네 지금, 방송국에는 675번을 단 선수가 누
구냐는 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
니다. 참가자 명단을 금방 입수했는데 그곳에
는 이렇게 쓰여져 있군요. 성명은 최상구, 나
이는 21세, 직업은 태양 전자 직원.이상입니
다. 다른 자료가 입수되는 대로 알려 드릴 것
을 약속드리며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화면은 선전으로 바뀌었다. 김병국은 그제
서야 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김피디! 김피디 어디 갔어?”
부장급인 아나운서는 상기된 얼굴로 피디를
찾았다. 하지만 피디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전이 끝나고 다시 중계가 이어졌다. 현장
모니터를 보니 675번이 여전히 선두였다. 에
프디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메모지를 내밀었
다. 아나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메라는 마
라톤 현장에서 방송국으로 옮겨졌다. 아나운
서가 메모지를 읽어 나갔다.
“네, 지금 또다른 중계차가 675번 최상구 선
수의 공장으로 나가 있다는군요. 잠시 연결해
서 최상구 선수에 대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
눠 보겠습니다. 김하운 리포터!”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자 준비되어 있던
모니터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김병
국은 마라톤 우승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이렇
게 방송국에서 발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김병국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미모의 리
포터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특근을 하고
있는 열악한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일을 하고
있던 한 아줌마에게 최상구 선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쥬. 상구 청년이 지금 선두라면서유.
저희들도 시방 라디오로 중계를 듣고 있구만
유. 상구 청년이 꼭 우승해야 할 텐디.”
아주머니는 눈시울을 찍으며 말꼬리를 흐렸
다. 리포터가 재빨리 물었다.
“아니, 왜 꼭 우승해야 하죠? 그럴 만한 사
연이라도 있나요?”
“있구 말구유! 상구 여동생이 지금 몹쓸 병
에 걸려 있구만유. 상구 청년은 동생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대회에 참가했어라. 꼭 우승
해서 여동생의 병을 고쳐 주겄다고.”
“최상구 선수에게 다른 가족은 없나요?”
“야! 여동생이 상구 청년에겐 유일한 혈육이
구만유.”
“그럼 지금 최상구 선수는 여동생을 위해서
눈물 겨운 혈투를 벌이고 있는 거로군요. 최상
구 선수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
다. 이상, 최상구 선수의 공장에서 알려 드렸
습니다. 다시 마이크를 방송국으로 연결하겠
습니다. 김하운이었습니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내용이
었다. 카메라맨은 다시 카메라를 클로즈업시
켜‘오빠, 화이팅!’이란 글씨를 비쳤다. 카메
라는 다시 헬기로 옮겨졌다. 헬기에서 내려다
본 거리에는 놀랄 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
다. 최상구 선수의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로 개미떼처럼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김병국은 현장으로 연결된 모니터를 보았
다. 최상구는 30km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도 속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30km까지의 구간 기록은 세계 기록보다 2분
이나 빨랐다.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50년을 마라톤과 함께 해 온 김병국이었지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카메라는 중계 도중에 다시 병원으로 연결
했다. 중환자실에서 링겔을 꽂고 있는 최상아
양의 모습이 비춰졌다. 간호원은 최상구 선수
가 최상아 양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줬다.
김병국은 간호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목
안에 물컹한 것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최상구
선수가 뛰는 걸 중단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빠
르게 스쳤다. 하지만 김병국은 강한 전류에 감
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앙다물고
달리고 있는 최상구 선수의 깡마른 얼굴을 들
여다보는 것 외에는.
카메라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서울역 앞에
서는 기차를 타려던 수많은 시민들이 텔레비
전 앞에 모여 있었다. 탑승하라는 방송이 연신
울렸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상구 선수 화이팅!”
아기를 업은 시골스런 아줌마가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화이팅’을 외쳤다. 카메라가
돌아가며 여러 사람을 비췄다. 최상구의 역주
를 지켜보며 몰래 눈시울을 닦는 사람이 반이
넘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여동생을 위해 불사르고
있는 한 청년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헬
기가 시내를 비췄지만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움직이는 차량도 몇
대 되지 않았다.
카메라는 이번에는 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
졌다. 그곳에서는 대대적인 응원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기된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으
샤 으샤! ’를 외치며 최상구를 응원하고 있었
다. 하지만 하나가 된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울음이 뒤섞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
는 눈물을 흘리면서 최상구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다시 현장으로 카메라는 옮겨졌다. 카메라
는 더 이상 유명 선수들을 비추지 않았다. 카
메라는 오직 최상구 선수에게만 고정되어 있
었다. 김병국은 입술을 꽉 다물고 달리는‘마
라토너‘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파란 힘줄
이 불끈 솟아 있었다.
김병국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최
상구 선수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고 있
는지를. 그는 지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달
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중지시켜야 해! 안 돼.
들뜬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김병국
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상구는 35km 구간을 지났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발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지
만 계속해서 달렸다. 창자는 터질 듯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창자는 끊어지는 듯했고 팔
과 다리는 마비되어서 자신의 육신처럼 느껴
지지 않았다. 마치 쇠덩어리를 달고 달리는 기
분이었다.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뭐라고 외
쳤지만 무슨 소린지 웅웅거리기만 할 뿐이었
다. 상구는 주저 않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느꼈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더 이상의 고
통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멈추면 상아는 죽어. 상아를 살리기 위
해선 멈추면 안돼 어머니, 아버지 저에게 힘을
주세요.
도로를 밟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송곳 위
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리
고 있는데 한 선수가 상규 앞으로 나섰다. 세
계 기록 보유자인 케냐 선수였다.
상구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뒤로 한번 처지
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상아야!
상구는 마음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
쳐 불렀다. 그리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
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핏물이 입안으로 스며
들었다. 상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핏
물이 앞섶을 적셨다.
케냐 선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40km를 넘어서며 그를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상구는 속력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이제 남은 것은 2.195km였다. 조금만 더 참으
면 상아가 살아날 수 있다는 어렴풋이 생각이
들었다.
달리다 보니 연도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땅이 심하게 출렁거렸
다. 나무도 움직였고 도로변의 쓰레기통도 움
직였다. 상구는 쓰러지려는 몸의 중심을 가까
스로 바로잡았다.
케냐 선수와의 처절한 선두 다툼에서 최상
구 선수가 이김에 따라서 그의 승리를 의심하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냐 선수와의 거리
가 순식간에 30미터 이상 벌어지자 스튜디오
안은 물론이고 거리도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김병국은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며 최상
구 선수의 사투를 지켜보았다. 힘겨운 싸움을
치러 보았기에 최상구가 얼마나 어려운 싸움
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아내가 믿는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최상
구 선수를 조금만 더 지켜 달라고. 만일 기도만
들어 준다면 당신을 평생 모시겠노라고.
마음속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어?”
아나운서의 다급한 외침에 김병국은 눈을
번쩍 떴다. 최상구가 비틀비틀거리더니 옆으
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거품이 흘
러내렸다. 최상구 선수의 의식이 줄 끊어진 연
처럼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끝났어! 모두.
김병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현장으로 달려
가서 그가 더 이상 뛰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했
다는 후회감이 스며들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지더니 요란한 박수소리
가 났다. 눈을 떠 보니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
다. 최상구 선수가 놀랍게도 다시 일어나고 있
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다시 달렸다. 연도의
시민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울렸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했다. 다시 옆
으로 맥으로 나가자빠졌다. 누가 보더라도 그
가 더 이상 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
만 최상구 선수는 불사신처럼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공동묘지에서 다시 살아난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다시 달렸으나 이번에는 반대
방향이었다. 달려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시민 한 명이 그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었다.
최상구 선수는 몸을 비틀거리며 달리다 이
번에는 연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앞으로 쓰
러졌다.
방송 차량과 함께 달리던 구급차가 달려왔
다. 그를 들것에 실으려는 순간, 그는 용수철
처럼 벌떡 일어났다. 간호원의 손을 뿌리치고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연도의 시민들이 처절한 광경에 모두들 눈
물을 터뜨렸다. 가로수에다 자신의 머리를 박
으면서 오열하는 중년신사의 모습도 비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시민들이 울먹이며
‘최상구! 최상구!’를 외쳐 보았지만 그는 도로
에 쓰러져 일어설 줄 몰랐다. 김병국은 카메라
가 비추는 코앞의 잠실 주경기장을 넋놓고 바
라보았다.
상구는 전신에 마비증상이 오는 것을 느꼈
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이불처럼 포근하게 느
껴졌다.
상아야, 기다려. 오빠는 결코 쓰러지지 않아.
널 기어코 살리고 말 거야. 너도 나처럼 마음
껏 달릴 수 있게.
가슴 안쪽에 실로 박아 놓은 부적이 느껴졌
다. 한순간, 자신을 응원하고 있을 이웃 사람
들과 공장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상
구는 다시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메인스타디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환히 웃는 상아의 얼굴이 상구를 인
도했다.
- 오빠 힘들면 그만둬. 무리하지 말고.
- 걱정 마, 상아야! 오빠는 할 수 있어.암,
할 수 있고 말고.
잠실 주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환호성도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상아의 웃는 얼굴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트랙을 한바퀴 돌고 결승 테
이프를 끊으면 되는 것이었다. 상구는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몸에서 이상하게도 힘이 솟구
쳤다. 앞에 하얀 테이프가 보였다. 상구는 테
이프를 끊고 나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박수소리도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았지
만 사람들의 표정은 침통할 뿐이었다. 뒤를 돌
아보았다. 분명히 금방 끊은 결승선 테이프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상구는 옆에
서 있는 카메라 기자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장내
방송이 울렸다.
“신사 숙녀 여려분, 대단히 애석한 속보입니
다. 처음부터 놀라운 투혼으로 선두를 유지하
던 최상구 선수가 41.4km 지점에서 쓰러져 병
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습니다. 최상구 선수
는 여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렀
던 진정한 마라토너였습니다. 우리 모두 최상
구 선수의 명복을 빌면서 이 시대 최고의 마라
토너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그 순간, 상구는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
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을.그
들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느 대회의 우승자도 감히 받지 못한 열
렬한 박수를 보냈다.
상아의 환히 웃는 얼굴이 주경기장 위로 드
리워졌다.
그로부터 육 개월 뒤 잠실 주경기장 관리인
유씨는 텅 빈 경기장을 찾은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육상협회 이사인 김병국 씨였
고 동행한 아가씨는 처음 보는 스무 살 남짓한
아가씨였다.
김병국 씨가 층계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아가씨는 추리닝 차림으로 천천히 트랙
을 돌았다. 이제는 달릴 정도로 몸이 건강해
보였다.
관리인 유씨는 김병국씨에게 몇달 사이에
밤마다 발생했던 이상한 얘기해 대해 불평하
듯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벌써 여러명이 수위 자리를
그만 두었어요..
밤마다 텅빈 경기장에서 누군가가 헉헉되며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누군가는 그 소리가 여기서 죽은 젊은 마라토
너의 혼령이라고도 하던데요...”
김병국씨는 그 얘기를 믿는지 않믿는지 조
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들어보세요. 들리지 않나요? 저 발
자국 소리와 숨소리가.”
아가씨가 김병국 씨에게 다가가서 말하자
김병국 씨는 빈 트랙을 돌아보며 따뜻한 목소
리로 대답했다.
“들었구나. 그래, 바로 네 오빠가 달리는 소
리야. 아니, 이제는 네 오빠가 아니라 우리 모
두의 친구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결승점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뛰는 젊은 마라토너. 최상
구 선수가 못 달린 거리를 우리 모두가 대신
가 줘야 해. 그는 우리 모두의 분신이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