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비극의 십자군

개독시러200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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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한분이 또 살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는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와 줄 방법이 없는만큼 그 분들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단, 그들을 그런상황으로 몰고간 이 나라의 미친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원망 스러울 뿐 입니다.

 

문득 중세역사를 읽고 있다가 십자군이야기가 눈에 띄어 가져와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세 소년 십자군들이 신앙의 열정으로 에루살렘으로 출발하였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의 간교로 결국에는 노예로 팔려가 버리면서 끝났다는 실제 이야기 입니다

 

순수한 신앙으로 갔던 아니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지금 되풀이 되고 있다는 거지요.

지금 이 사회에서 소년십자군은 누구이며 교활한 상인은 누구인지 다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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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파와의 전쟁 중에 십자군 전도는 프랑스 북부와 독일 일부의 지방에서 일상 생활이 되었다. 열띤 설교들은 이미 경건한 신앙심과 반사제주의, 또 예루살렘에 대한 우려로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종교적 열의가 별난 일이 아닌, 오히려 존경받던 세계에서 이런 긴장은 종종 기묘하고 충격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보통 '소년 십자군'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소년 십자군은 소년들로 구성된 군대도 아니었고 십자군도 아니었다. 심지어 단일한 사건도 아니며, 여러 건의 민중 봉기와 무리들을 뭉뜽그려 묘사하는 말에 불과하다. 그 중심에는 가난의 신성함에 대한 중세의 뿌리깊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정직함으로 성직자들이나 세속의 영주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1차 십자군이 탄생할 때에 '민중 십자군'이 발생했던 것 역시 이런 생각의 영향이었다. 그 후 강력한 십자군들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낀 기독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지에서 승리를 거두도록 뜻한 자들은 힘없는 평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 말씀에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하지 않던가?(마태5:5)

소년 십자군은 주체가 교화나 왕, 귀족이 아니라 민중이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십자군과는 달리 그에 대해 기록을 남긴 참가자도 없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외부인들(주로 그들의 이동 경로에 있었던 수도원의 연대기 작가들)이 전하는 이야기 뿐이다. 따라서 소년 십자군이 정확히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또 어떻게 끝이 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212년 초, 쾰른의 니콜라스라는 소년이 십자군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그 중심이 되었는지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곧 라인란트를 휩쓸었다는 것이다. 니콜라스는 예루살레으로 가서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하늘의 명에 따라 남쪽으로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바다가 갈라져 자기를 팔레스티나까지 걸어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곧 수천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니콜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도시에서도시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열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어린이, 청소년, 여자, 노인, 가난한 사람, 교구사제, 심지어 도둑까지도 그들의 일행에 합류했다. 어디에 가나 사람들이 그들을 영웅으로서 칭송하며 선물과 음식, 돈을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성직자들이 이 '십자군'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 시샘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교회가 후원하는 십자군은 이미 여러 차례 성묘를 되찾는 데 실패하지 않았나? 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모를 정도로 성직자들은 눈이 멀었다는 말인가?

니콜라스의 무리는 남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많은 이들이 합류했지만 떨어져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1212년7월에 그들은 마침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숨막히는 무더위에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이 경이로운 사건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몇 군데에서 비삿한 움직임이 발생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움직임은 프랑스의 방돔 부근에 있는 작은 도시 클루아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에티엔이라는 열두 살의 양치기 소년이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순례자의 복장을 한 예수가 그에게 빵을 달라고 해서 빵을 주자, 프랑스 왕에게 전달하라고 편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는 중세에 그리 드물지 않은 현상이었으나, 그리스도가 직접 전해준 적은 별로 없었다. 에티엔은 파리를 향해 길을 떠났다. 곧 다른 양치기들이 그의 뒤를 따랐고, 이어 다른 어린이들의 무리와 하급 성직자들, 또 니콜라스의 십자군과 유사한 사람들이 합류했다. 도시를 통과하며 그들은 "주님이시여 기독교를 찬양하소서!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돌려주조저!"라고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그들은 마침내 파리에 도착했고 에티엔은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마 '예수의 십자가'를 되찾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도록 십자군을 이끌고 동방으로 진격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필리프는 에티엔에게 편지를 전달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독일의 소년 십자군과는 달리 프랑스의 참가자들은 자신들을 십자군이 아니라 전달자라고 생각했으므로, 편지가 무사히 전달되자 대부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몸이 건장한 몇몇 사람들은 알비 십자군에 참가했다.

라인란트의 무리들은 8월 초에 롬바르디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각기 다른 항구로 향했다. 니콜라스를 따르는 무리는 8월 25일 제노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바다는 갈라지지도 않았고 그들이 물위로 걸어갈 수 있게 해주지도 않았다. 일부는 다른 항구를 찾아 계속 이동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들 '십자군'의 대집단이 마르세유로 갔는데 그곳에서 성지까지 그들을 공짜로 태워주겠다는 두 명의 악랄한 상인들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배가 향한 곳은 알렉산드리아였고 승객들은 이집트의 노예 시장에 팔려갔다. 한편 일부는 로마로 갔는데, 인노켄티우스 3세는 그들의 열의를 칭찬하고 그들을 서약(어차피 효력은 없었으나)에서 풀어주었다. 니콜라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제 5차 십자군에 참가해서 서약을 환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소년 십자군은 치욕스러운 결말을 맞이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그들의 여정은 험난했다. 전에 그들을 칭송하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이제 그들을 욕하고 조롱했다. 기부도 받을 수 없었으니 식량도 문제가 되었다. 더 이상 여햏을 계속할 수 없어서 도중에 눌러앉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제노바의 명가들 중 몇 가문이 이들 중도 탈락한 순례자들의 후손임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