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흐릿한 물체로 밖에 인지 되지 않는 리더가 그녀의 얼굴 근처에 서 그만의 독특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는 등 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라도 내가 병에 걸린거라 면... 눈이 갈수록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라면... 만약에... 그렇다면...
리더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씁쓸한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됐어. 우리 회사는... 건강한 사람을 원해.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며칠 휴가를 줄테니... 건강 진단서를 받아와. 만일... 일시적인 것이 아니 라면... 사내 규정상..."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구한 일자리인데... 아니... 그보다 진짜 리더의 말대로 눈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면...
그녀는 그날 오후부터 휴가아닌 휴가를 얻어 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 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동네 근처에 있는 작은 병원에 다녔 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희귀한 사례라고만 말하며 병명조차 알아 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번을 망설인 끝에 결국 어제서야 종합병원에 가게 되었다. 수많은 검 사와 진찰을 받고 나서야 바로 오늘 오전 10시에 결과를 들으러 오라고 했다.
안락의자가 포근해서 그런지 그녀의 격앙됐던 감정이 점차 수그러들며 어릴적 생각이 났다. 참으로 자상했던 아버지의 얼굴하며 언제나 웃음 으로 자신을 대해 주던 어머니의 미소까지도... 그러나 이렇게 괴롭고 힘들 때... 그들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추스릴 수 없는 묘한 감정 에 서글픔만이 밀려왔다.
그녀는 볼에 흐르던 눈물 한방울을, 떨리는 손을 들어 훔치고는 외출복 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도로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무표 정한 얼굴로 씩씩대며 직장으로 향하는 일단의 푸른색 작업복을 걸친 사내들만 간간이 눈에 들어 올 뿐... 자신같이 헝크러진 머리에 고민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갈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도로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었 다. 종합 병원 의사와 약속한 10시가 되려면 아직도 3시간이나 남아 있 었기에 그녀는 무작정 거리를 걷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흐릿하고 몹시 흔들렸지만 거의 한평생을 보낸 거리라 그런지 걷는 것에는 아무 꺼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병원으로 향하는... 끝이 없을 것 같이 느껴지는 도로로 첫발을 내디뎠 다.
그녀의 동네는 그녀가 7살이 될때만 해도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인심이 넘쳐 이웃끼리도 서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도와 주었고 모든 거리의 사람들도 한 가족처럼 친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삭막하고 쓸쓸한 냉기 만이 감도는 퇴락한 거리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않아 굳게 닫혀 있는 을씨년한 건물하며 조금만 어두워지면 살기로 뒤덮혀 버리는 흉포한 인간들의 천국이 된 것이었다.
모처럼 아침의 조용한 거리를 걷는 그녀로서는 20여년전 바로 그 거리 처럼 느끼고만 싶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뭇사람의 표정들이 왠지 지치고 억압되어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아무래도 좋았다. 모처럼 얼굴을 내비친 태양하며 바쁜 일상에서 일탈해 혼자 기쁜 상상만 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서서히 그녀의 따뜻한 가슴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쳐들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아마도 내 눈은 얼마 안가 회복할 것이고 이 아 름다운 풍경들과 거리의 모습들... 모두 모두, 앞으로 30년 아니 50년이 라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30분 정도 길을 걷다보니 그녀가 어렸을 적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작 은 개울이 나왔다. 지금이야 냇가 정도 밖에 안돼지만 그 당시만해도 그 녀의 눈에는 거대한 강... 아니 바다 보다도 넓게 생각됐었다.
자신은 여자 해적 선장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해적 선원... 약간 왈가닥이 었던 그녀는 날이 저무는 지도 모르고 그 맑은 냇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며 장난치며 어울려 놀았었다.
지금은 돌이키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그녀는 한없이 안타깝 기만 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즐거운 추억의 한 끝자락이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냇가 언저리에 무릎을 꿇고 오른 손으로 물을 한줌 움켜 쥐었다. 그러나 코끝에 스치는 향기는 이미 어릴적 그 풋풋하고 상큼한 물내음 이 아니었다. 한 여름날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향긋하고도 약간 비릿하기도 한 그런 내음이 그리웠다.
눈이 점점 더 시려왔다. 그녀 가슴속에 있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절망으 로 바뀌기 전에 병원으로 어서 가고 싶었다. 가서... 가서... 결국 확인 을 하고 말 것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난 시절의 상념을 가슴속에 고이 묻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찰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종합 병원 앞에 다다랐다. 누구나 그 렇지만 병원에 들어설 때면 움츠리게 마련이다. 비록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병문안을 올 때 조차도...
그녀는 가슴을 쭉 펴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눈이 시렸다. 눈을 몇번 꿈뻑거리며 2층에 위치한 안과로 향했다.
"저... 오늘... 검사 결과가..."
하얀 가운에 날카로운 인상이 더해져 한없이 차갑게만 보이는 젊은 의사 가 그녀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그녀 머리 위에 안타깝게 걸려있는 벽시계 를 쳐다 보았다.
"10시까지... 오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9시밖에 안됐는데..."
생긴 것 만큼이나 쌀쌀한 말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그녀는 어색하 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러면... 밖에서 기다릴까요?"
젊은 의사는 냉정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자신 앞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쇼파에 앉기를 권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걸터 앉자 젊은 의사는 인터 폰을 들어 웅얼거리는 소리로 통화를 했다.
있는대로 귀를 기울여도 그가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부터는 귀도 잘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 그렇게 생각되 었는 지도 몰랐다. 오감의 하나가 서서히 마비 되어간다면... 분명 다른 쪽이 발달될텐데...
"이윤미씨... 본인 맞죠?"
젊은 의사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서... 설마... 결과가...
"자, 이리로 따라 오세요." "저... 결과가...어떻게...?"
그녀는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미 문에 반쯤 발을 걸쳐 놓은 젊 은 의사에게 물었다. 젊은 의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답 했다.
"약간... 심각해서... 한번 더 검사를 해야겠어요. 저를 따라 오시죠." "심각하다면... 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진료실에 자그맣게 울려퍼졌다. 그러나 젊은 의 사는 자신이 알바 아니라는 듯 사무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 설마... 내가...'
그녀는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으며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병실 복도 를 지나 빨간 등이 켜?있는 수술실 앞에 다다랐다.
"의사 선생님... 검사를 하신다면서... 왜 수술실에..." "하여간 들어오세요. 금방 끝납니다."
생전 처음 수술실로 들어서는 그녀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느닷없이 소 름이 돋았다. 연이어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아름다웠던 추억들... 슬펐던 기억들이 시계로 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머리속에 스쳤다.
젊은 의사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고는 그녀가 수술실로 들어 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습관처럼 심호흡을 크게 한번하고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종합 병원 로비에는 환자들과 문병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중앙에 놓인 커다란 멀티비젼에서 흘러 나오는 뉴스를 쳐다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2099년 4월 10일 정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몇달전 발생한 신종 무타제닉 바이러스 k-303의 전염성을 보고 받으신 영명하신 우리 총통 각하께서는 오늘 새벽 대신들의 비상 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긴급 명령 제5호를 발동하여 종합 병원 단위 이상의 의사들은 각자 의 재량으로... 무조건... 보균자에 대하여 안락사를 시킨 후 환자들을 해부하여... 항체와 항원... 감염경로를 밝혀 백신 개발에 이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 바이러스의 특징은... 감염이 되면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며... 며칠후 귀까지 멀고....... 우리는 총통 각하의 뛰어나신 영도력에...... 무조건 적으로 따라야 하며...]
그녀의 마지막 외출
그녀의 마지막 외출
아침 햇살에 그녀는 눈을 떴다. 머리맡에 시계를 흐릿한 시선으로 쫓아
가보니 긴바늘은 12를, 작은 바늘은 6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6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습관적으로 화장실에 달려
갔다.
"늦었어. 이런... "
서둘러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움켜 쥐고 왼쪽으로 틀었다. 봄이라고는 하
지만 이상기후라 제법 쌀쌀해서 그런지 찬물은 그야말로 얼음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냉수의 온도가 체온보다 현저히 낮음을 느끼고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하얀 세면대에 튀기는 물줄기 하나가 그녀의 볼
에 휘감아 왔다.
"맞아... 내가...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 어차피 회사도..."
머리속에 요즈음 일어난 일들이 문득 떠올라 저절로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두손을 얼굴에 대고 조그만 정사각형 무늬가 어지러이 박혀 있는
화장실 타일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너무들... 해... 너무들..."
한참을 그렇게 앉아 흐느끼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천천히 일어나 회색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왜 이렇게 뿌해? 응?"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거울의 앞면을 훔쳐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그녀
의 얼굴은 여전히 안개처럼 흐려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
려 화장실을 살펴보았다.
20년이 넘게 보아온 화장실의 내부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초점이 어긋난 카메라 렌즈
처럼 시선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아냐... 그럴리가 없어. 이건 일시적인 거야. 내가... 왜 눈이 멀어야
돼? 난... 평생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강한 부정을 하듯 세차게 머리까지 흔들며 중얼거렸지만 그녀의 목소리
는 한없이 떨리기만 했다.
"휴우..."
그녀는 허탈한 심정에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화장실을 나와 조그마한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며칠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윤미씨... 이 보고서... 한시간 내에 작성해서 내 책상 위에 놔둬."
5년째...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성심, 성의껏 일을 해오던 회
사의 리더가 그녀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녀는 늘상 해오던 일인지라 아
무 생각없이 리더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들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
왔다.
자신의 생명줄과 같은 낡은 컴퓨터를 켜고 갸날픈 손가락을 뻗어 서류
를 펼쳤다. 처음에는 리더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서류를 아무리
쳐다봐도 하얀 종이만이 어른 거릴 뿐 어떤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
다.
그러나... 그간 보아왔던 리더의 성격상 자신에게 농담도... 또 실없는
행동도 할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를 숙여 서류를 자세히 훑어 보
기 시작했다.
안면근육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시신경에 온통 집중을 하니 검은 글자
들이 지렁이 마냥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악!"
그녀는 너무 놀라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났다.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퍼
진 그녀의 외마디는 사무실 직원 하나하나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에 충
분했다.
"왜그래? 뭐야?"
리더는 뭐가 그리 기분이 안 좋은지 인상을 찢어진 휴지처럼 구기며 그
녀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다급해진 그녀는 어쩔줄 몰라
멍하니 서있었다.
"왜 그러냐니까?"
리더가 바로 코앞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의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제 눈... 이... 갑... 갑자기..."
그녀는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의미없이 뇌까렸다.
"조금만 쉬면 괜찮아 질거예요. 잠시만... 쉬었다... 서류를 마저 끝내
고... 또..."
여전히 흐릿한 물체로 밖에 인지 되지 않는 리더가 그녀의 얼굴 근처에
서 그만의 독특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는 등
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라도 내가 병에 걸린거라
면... 눈이 갈수록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라면... 만약에... 그렇다면...
리더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씁쓸한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됐어. 우리 회사는... 건강한 사람을 원해.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며칠 휴가를 줄테니... 건강 진단서를 받아와. 만일... 일시적인 것이 아니
라면... 사내 규정상..."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구한 일자리인데... 아니...
그보다 진짜 리더의 말대로 눈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면...
그녀는 그날 오후부터 휴가아닌 휴가를 얻어 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
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동네 근처에 있는 작은 병원에 다녔
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희귀한 사례라고만 말하며 병명조차 알아
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번을 망설인 끝에 결국 어제서야 종합병원에 가게 되었다. 수많은 검
사와 진찰을 받고 나서야 바로 오늘 오전 10시에 결과를 들으러 오라고
했다.
안락의자가 포근해서 그런지 그녀의 격앙됐던 감정이 점차 수그러들며
어릴적 생각이 났다. 참으로 자상했던 아버지의 얼굴하며 언제나 웃음
으로 자신을 대해 주던 어머니의 미소까지도... 그러나 이렇게 괴롭고
힘들 때... 그들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추스릴 수 없는 묘한 감정
에 서글픔만이 밀려왔다.
그녀는 볼에 흐르던 눈물 한방울을, 떨리는 손을 들어 훔치고는 외출복
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도로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무표
정한 얼굴로 씩씩대며 직장으로 향하는 일단의 푸른색 작업복을 걸친
사내들만 간간이 눈에 들어 올 뿐... 자신같이 헝크러진 머리에 고민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갈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도로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었
다. 종합 병원 의사와 약속한 10시가 되려면 아직도 3시간이나 남아 있
었기에 그녀는 무작정 거리를 걷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흐릿하고 몹시 흔들렸지만 거의 한평생을 보낸
거리라 그런지 걷는 것에는 아무 꺼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병원으로 향하는... 끝이 없을 것 같이 느껴지는 도로로 첫발을 내디뎠
다.
그녀의 동네는 그녀가 7살이 될때만 해도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인심이 넘쳐 이웃끼리도 서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도와 주었고 모든 거리의 사람들도 한 가족처럼 친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삭막하고 쓸쓸한 냉기
만이 감도는 퇴락한 거리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않아
굳게 닫혀 있는 을씨년한 건물하며 조금만 어두워지면 살기로 뒤덮혀
버리는 흉포한 인간들의 천국이 된 것이었다.
모처럼 아침의 조용한 거리를 걷는 그녀로서는 20여년전 바로 그 거리
처럼 느끼고만 싶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뭇사람의 표정들이 왠지 지치고
억압되어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아무래도 좋았다. 모처럼 얼굴을 내비친 태양하며 바쁜 일상에서 일탈해
혼자 기쁜 상상만 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서서히 그녀의 따뜻한
가슴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쳐들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아마도 내 눈은 얼마 안가 회복할 것이고 이 아
름다운 풍경들과 거리의 모습들... 모두 모두, 앞으로 30년 아니 50년이
라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30분 정도 길을 걷다보니 그녀가 어렸을 적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작
은 개울이 나왔다. 지금이야 냇가 정도 밖에 안돼지만 그 당시만해도 그
녀의 눈에는 거대한 강... 아니 바다 보다도 넓게 생각됐었다.
자신은 여자 해적 선장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해적 선원... 약간 왈가닥이
었던 그녀는 날이 저무는 지도 모르고 그 맑은 냇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며 장난치며 어울려 놀았었다.
지금은 돌이키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그녀는 한없이 안타깝
기만 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즐거운 추억의 한
끝자락이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냇가 언저리에 무릎을 꿇고 오른 손으로 물을 한줌 움켜 쥐었다.
그러나 코끝에 스치는 향기는 이미 어릴적 그 풋풋하고 상큼한 물내음
이 아니었다. 한 여름날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향긋하고도 약간 비릿하기도 한 그런 내음이 그리웠다.
눈이 점점 더 시려왔다. 그녀 가슴속에 있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절망으
로 바뀌기 전에 병원으로 어서 가고 싶었다. 가서... 가서... 결국 확인
을 하고 말 것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난 시절의 상념을 가슴속에
고이 묻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찰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종합 병원 앞에 다다랐다. 누구나 그
렇지만 병원에 들어설 때면 움츠리게 마련이다. 비록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병문안을 올 때 조차도...
그녀는 가슴을 쭉 펴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눈이 시렸다. 눈을
몇번 꿈뻑거리며 2층에 위치한 안과로 향했다.
"저... 오늘... 검사 결과가..."
하얀 가운에 날카로운 인상이 더해져 한없이 차갑게만 보이는 젊은 의사
가 그녀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그녀 머리 위에 안타깝게 걸려있는 벽시계
를 쳐다 보았다.
"10시까지... 오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9시밖에 안됐는데..."
생긴 것 만큼이나 쌀쌀한 말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그녀는 어색하
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러면... 밖에서 기다릴까요?"
젊은 의사는 냉정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자신 앞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쇼파에 앉기를 권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걸터 앉자 젊은 의사는 인터
폰을 들어 웅얼거리는 소리로 통화를 했다.
있는대로 귀를 기울여도 그가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부터는 귀도 잘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 그렇게 생각되
었는 지도 몰랐다. 오감의 하나가 서서히 마비 되어간다면... 분명 다른
쪽이 발달될텐데...
"이윤미씨... 본인 맞죠?"
젊은 의사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서... 설마... 결과가...
"자, 이리로 따라 오세요."
"저... 결과가...어떻게...?"
그녀는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미 문에 반쯤 발을 걸쳐 놓은 젊
은 의사에게 물었다. 젊은 의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답
했다.
"약간... 심각해서... 한번 더 검사를 해야겠어요. 저를 따라 오시죠."
"심각하다면... 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진료실에 자그맣게 울려퍼졌다. 그러나 젊은 의
사는 자신이 알바 아니라는 듯 사무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 설마... 내가...'
그녀는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으며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병실 복도
를 지나 빨간 등이 켜?있는 수술실 앞에 다다랐다.
"의사 선생님... 검사를 하신다면서... 왜 수술실에..."
"하여간 들어오세요. 금방 끝납니다."
생전 처음 수술실로 들어서는 그녀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느닷없이 소
름이 돋았다. 연이어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아름다웠던 추억들...
슬펐던 기억들이 시계로 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머리속에 스쳤다.
젊은 의사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고는 그녀가 수술실로 들어
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습관처럼 심호흡을 크게 한번하고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종합 병원 로비에는 환자들과 문병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중앙에
놓인 커다란 멀티비젼에서 흘러 나오는 뉴스를 쳐다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2099년 4월 10일 정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몇달전 발생한
신종 무타제닉 바이러스 k-303의 전염성을 보고 받으신 영명하신 우리
총통 각하께서는 오늘 새벽 대신들의 비상 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긴급 명령 제5호를 발동하여 종합 병원 단위 이상의 의사들은 각자
의 재량으로... 무조건... 보균자에 대하여 안락사를 시킨 후 환자들을
해부하여... 항체와 항원... 감염경로를 밝혀 백신 개발에 이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 바이러스의 특징은... 감염이 되면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며... 며칠후
귀까지 멀고....... 우리는 총통 각하의 뛰어나신 영도력에...... 무조건
적으로 따라야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