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완전범죄 만들기 여름이 다가오려는지 며칠간 쨍쨍 내려 쬐던 햇빛에 사람들의 짜증이 극도에 다다르던 오후... 그래도 서늘한 바람이 간혹 불어 오는 도심 속 의 조용한 공원, 낡은 벤치 위에 형민이 꾸벅, 꾸벅 졸며 앉아 있었다. 그는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정신을 차릴 때 뜨는 눈망울에는 매서운 기운이 한껏 감돌고는 했다. 이윽고 형민은 잠 이 완전히 깼는지 두 팔을 벌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젠장할... 날은 덥고 할 일은 없고 미치겠구만. 이거 원..." 형민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쓰벌... 라이터가..." 라이터를 조금전 공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변기 위에 얹어 놓고 나온 것 같았다. 형민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내고는 움직이 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억지로 일어나 조금전 자신이 갔던 화장실 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럽고 퀘퀘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장실로 들어가 라이터를 찾아 보았지만 그새 누가 가져 갔는지 눈에 띄지를 않았다. "싸구려 라이터라도... 남의 물건인데... 어떤 강아지가 말도 않고 집어 갔지?" 몹시 성격이 급한듯, 형민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마구 해대며 화장 실 안을 쳐다 보았다. 잠시후 화장실 중 한 곳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 리더니 볼일을 끝낸 상규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형민은 다짜고짜 그에 게 다가가 물었다. "불 있수?" "예?" 시원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서던 상규는 형민의 뜬금없는 말에 잠시 당황하며 되물었다. "불이라니요? 무슨..." "아니 이거 보면 몰라요? 담배 좀 피게... 라이터 말이요. 라이터..." 다소 거칠어진 형민의 말투에 상규는 움찔하며 셔츠 안주머니에서 라이 터를 꺼내 형민에게 건냈다. 형민은 마치 자기 것을 돌려 받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받아 들더니 담배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상규는 멀뚱히 서서 그런 그를 한동안 유심히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조금 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김형민씨 아니신가요?" 형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얼굴을 바짝 들더니 상규에게 이상하 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김형민이긴 한데... 어떻게 내 이름을...?" 상규의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형민의 손을 와락 잡으며 큰 소리로 얘 기했다. "야, 임마. 나 모르겠어? 상규야... 최상규라고...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 네 짝이던... " "어? 아... 그러고 보니..." ********************* 달이 무척 밝은 밤하늘 아래, 강이 훤히 내다 보이는 다리 근처에 위치 한 허름한 포장 마차에서 형민과 상규는 홍합을 안주로 술을 마시고 있 었다. 상규는 연신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고 형민은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벌개진 얼굴로 상규가 권해준 술잔을 받았다. "아무튼... 이게 얼마만이냐? 중학교 졸업 이후로... 10년은 넘은 것 같 은데? 그간 뭐하고 지냈냐?" "훗... 그냥 저냥 살았지. 되는 대로..." 형민의 심드렁한 말에 상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되는... 대로라... 흠..." 상규가 형민의 말을 곱씹자 형민은 상규에게 잔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너는 어찌 살았냐? 결혼은 했고? 중학교때도 공부 잘하던 네놈이 니... 지금쯤 돈 많이 벌고 출세했겠지." "하. 하. 하. 중학교 때는 중학교 때고... 간신히 삼류대학 나와서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 산다. 사실 군에서 제대 한지도 얼마 안돼. 조금 늦게 갔거든?" "그렇구나. 훗... 네 말맞다나... 꽤나 평범하구나." 둘은 한동안 술을 홀짝였다. 형민은 취기가 다소 오른 듯 과장된 몸짓으 로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사실... 한달 전에 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2년만에..." "뭐라고? 아니 왜?" "훗... 내 직업이 뭔지 아냐? 좋은 말로는 흥신소 사장이고 나쁜 말로는 해결사야." 형민의 말에 상규는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면... 네가 하는 일이 잘못되서... 감옥에 갔던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왜, 궁금하냐?" "호기심이야 가지... 네가 말해 줄 수 있는 얘기라면..." 상규는 형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민은 자신 앞에 놓 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흠... 해결사란 직업...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잖니? 외국 처럼 탐정이란 멋들어진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어느날 사 무실로 어떤 여자가 전화를 했더라고. 마흔살쯤 되보이는 목소리의 아줌 마였는데...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는 자기 딸을 좀 감시해 달라는 거였어. 너도 알다 시피 누구를 감시해 달라는 건 대개 불륜 현장을 잡는 부부간이 많은 데... 좀 독특한 사건 의뢰더라고... 나야 뭐 돈만 많이 준다면 별의 별짓 다 하는 놈이니까 상관 없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상규는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게... 감시를 하며 그 아줌마한테 딸의 행적에 대해 전화로 보고를 하 곤 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자기 딸을 나보고 겁탈해 달라는 거야. 나 는 처음에 그 아줌마 정신이 어떻게 됐나 의심했지. 돈이면 아무짓이나 하는 나이긴 하지만... 사실 어떻게 그런 짓을 내게 의뢰할 수 있겠니? 하지만 해결사 세계의 철칙은 첫째, 고객 신분 보장, 둘째, 사건 의뢰의 이유를 묻지 말것, 셋째, 일이 잘못되도 절대 남에게 발설하지 말것...이 니까 나는..." "훗... 프로 의식이 대단하다. 너..." 형민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아무튼... 나는 처음에 사양하다가 그 아줌마가 제시하는 수고비에 넘어가서..." "넘어가서?" "이것 저것 생각지도 않고 그냥 겁탈해 버렸지. 사실 그 아줌마 딸... 무척 미인이었거든? 아줌마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딸이 그 정도면 어 머니도 젊었을 때 꽤나 미인이었을 거야. 하여간 내가 그동안 그녀를 감 시해왔으니 겁탈할 기회를 잡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지.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따라가다가 칼을 들이대고 한적한 숲속으로 끌고가 그 짓을 해버렸는데... 이야... 정말 반항, 엄청 많이 하더라. 배 와 허벅지를 몇번이나 때려서야 겨우... 그짓이 가능했는데... 하기야 난 그럴수록 더욱 흥분했지만 말이야. 하. 하. 하." 상규는 얼굴을 한번 찡그리더니 못마땅한 듯 나무랐다. "너... 변태구나. 더욱이.. 어떻게 그런 짓을..." "짜식아, 난 철저한 프로라니까. 사건 의뢰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하는 거 고... 풋, 그런데 그녀 정말 처녀였어. 일이 끝난 뒤 울고 불고 하는데... 정말 귀엽기만 하더라." "미친놈." "하. 하. 하. 나보고 뭐라해도 좋아. 어쨌거나 그녀의 가녀린 몸매하며 오 동통한 가슴... 그리고 특히, 왼쪽 손목에 조그맣게 새겨진 'W'란 문신이 꽤나 섹시하게 보이더란 말이야." "그런데... 왜 감옥에 들어간거야?" 형민은 상규의 물음에 술을 한잔 더 들이키고 혀꼬부진 목소리로 대답 했다. "쓰벌... 재수없게 내가 그녀와 그짓을 하는 걸 본 사람이 있었어. 일이 다 끝나고 옷을 입는데... 경찰이 달려 오더니만... 대충 짐작이 가지? 처음에는 경찰에 가서 모든 걸 불어 버릴까도 생각했는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난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진 사람이라... 큭큭. 나 혼자 죄를 뒤집어 썼지. 생각해 보면 그녀와의 그짓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였는지도 몰라. 하. 하. 하." ".........." 상규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한참동안 형민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뜬금 없는 말을 건냈다. "저... 한가지 물어 보겠는데. 화려한 네 과거 경력을 듣고 나니 갑자기 상의하고 싶어서 말이야..." "뭔데? 아무거나 다 물어봐라. 내가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상담해 주 지." 형민의 능글스러운 목소리에 상규는 주위를 한번 '휘'둘러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거든? 후~ 단도직입적으 로 말하면... 얼마전에 꽃뱀한테 당했어." "꽃뱀? 아니 그러면 여자와 하룻밤 자고서... 그 여자한테 협박을 당하고 있단 말이지? 돈을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불어 버리겠다... 뭐 이런거?" "휴우~ 그런셈이지. 그것도 처녀가 아닌 유부녀한테..." "병신." "그래, 내가 생각해도 병신이야. 그나저나... 한, 두번 돈도 주고 달래도 봤는데 영 말을 듣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자기 뜻대로 조금만 안 돼면 계속 협박하고 그러는데 말이야." 형민은 상규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다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했다. "흠... 사실 그런 애들은 돈이 떨어지면 계속 협박한다고. 네 처지를 자세히 들어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가는데... 아마 경찰에 알릴 수도 없는 형편 이겠지?" "그러니까 말이야. 어쩌지?" "가장 좋은 방법은 죽여버리는 건데..." "죽인다고?" 상규가 화들짝 놀라며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형민도 얼떨결에 상규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완전범죄를 만들기 위해서는 4무(無)와 1유(有)의 조건이 있지. 즉, 무증거, 무목격자, 무연고, 무양심에 유부재증명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네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와 목격자가 없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아무 관계도 아니어야 하며 또 범죄를 저지른 뒤 자신의 양심에 전혀 꺼리길게 없어야 한다는 말이야. 물론 사건이 일어 났을 때 그 장 소에 없었다는 부재증명, 곧 알리바이가 확실해야 하고 말이야." "그렇겠군. 그래서?" "그런데 너는 다른건 어떻게 조작한다 해도 무연고와 무양심이 안될 것 같아. 이미 그 꽃뱀과 관계가 있으니 경찰에서 조사하면 금새 발각될 거 고... 예전의 네 소심한 성격을 보아 평생 양심에 걸려 괴로워 하며 살 것이 분명하니..." "하긴..." 형민의 친절한 설명에 상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민은 다시 곰곰히 생 각하더니 얘기했다. "내가 대신 처리해 줄까? 그 일 말이야." "진짜?" 상규가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형민을 쳐다보자 형민은 다소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이런 얘기하기는 좀 뭐한데... 사실... 요즘 돈이 좀 궁하거든? 그러니 적당한 수고비만 준다면 다신 그년이 네 앞에 안 나타나도록 처리해주지. 까짓거, 나는 이제부터 막나가며 살기로 작정한 놈인데 뭐..." "돈이야... 당연히 줘야겠지만... 처리를 해 준다는건? 어떻게?" 형민은 상규에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돈만 많이 준다면 죽여 줄 수도 있어.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야." "뭐라고? 아니.. 그러다가... 혹시..." "걱정마. 내 입이 무겁다는 건 아까 들어서 알잖아? 끝내 말을 안하고 감옥가서 살다가 온 거 보면 몰라?" 상규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을 했다. 형민은 그런 상규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못참겠다는 듯 물었다. "어쩔거야?" "흠... 좋아.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넉넉잡아 일주일. 네가 그 여자 연락처만 내게 가르쳐 주고..." "그래 결심했다. 돈은 네가 확실히 그 여자를 죽였다는 걸 확인하고 줄 테니... 일주일 후 바로 여기서 이 시간에 만나기로 하자. 그 여자는 매 일 같이 내게 연락을 하니 만약 일주일 안에 그 여자와 연락이 끊기면 네가 그 여자를 죽였다는 것을 믿고 돈을 주마." 형민은 상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좋아. 계약한 거야. 그런 뜻에서... 자, 건배!" 둘은 밝은 표정으로 술잔을 부딪쳤다. ********************* 상규를 기다리다 지친 형민은 초조한 듯 포장마차에 앉아 술잔을 홀짝 이고 있었다. 일주일전 약속한 시간에서 한시간이나 넘었는데도 상규는 오지 않고 있었다. 형민은 기다리다가 왠지 속았다는 기분에 험악한 얼 굴이 되서 술을 연거퍼 들이 부었다. "강아지... 기껏 여자를 죽여 줬더니... 약속을 안 지키네? 이거... 이러다 안 나타나면 나만 헛짓한 꼴 되는 거 아냐?" 속이 몹시 타는 듯 술 몇잔을 더 마시는데 상규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 와 형민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형민은 잔뜩 인상을 쓰며 상규에게 얘 기했다. "야, 약속 시간을 지켜야 할 것 아냐? 왜 늦었어?" "미안하다. 미안해.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참, 그나저나 어찌됐니?" 형민은 그나마 상규가 온 것에 안심을 하며 한껏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말했다. "그 여자에게서 요새 연락 안오지? 깨끗하게 처리했다.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며칠... 그 여자 주위를 맴돌며 조사를 하고 계획 을 짰는데... 매일 새벽마다 습관적으로 등산을 하더라고. 그걸 이용해서 산행길에 그냥 절벽에서 밀어서... 아마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도 않았을 걸? 워낙 외진 곳에 떨어 뜨려 버렸으니... 하. 하. 하." "정말 뒷탈 없이 끝냈지?" "걱정 말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했어. 나만 믿으라고." "잘됐구나. 어쩐지 요새 전혀 연락이 안 오더라니. 수고했다. 자, 오늘 밤은 거하게 술이나 먹자고..." 상규가 술을 따르자 형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 은?" "걱정마, 자식아. 가져왔으니..." 상규는 형민이 앞에 지갑을 펴보이며 얘기했다. 형민은 한껏 기분이 좋 아져 만면에 미소를 띠며 상규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 ********************* "우와... 취한다. 이거... 끄윽~ 너무 먹은 것 같은데? 네... 가 하도 먹이는 바람에... 꺼억..." 상규의 두팔에 의지한 채 형민이 비틀거리며 어둡고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다. "형민아. 도저히 더 못가겠다. 여기서 좀 쉬다 가자." 도심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길가에 털썩 주저 앉으며 상규가 말했다. 형민은 희멀건한 눈으로 상규를 따라 바닥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가 어디야? 흠... 왠 기찻길이 다 보이고? 아... 내 자취집 근처인가? 딸꾹..." 상규가 형민에게 담배를 한대 권하고 자신도 한대 불을 붙여 입에 물었 다. 형민은 한모금을 채 다 피지 못하고 담배를 떨어 뜨리며 그 자리에 서 잠이 들고 말았다. 상규는 그런 형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거리더니 미친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흑...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네가 며칠전 죽인 그 여자는... 네가 2년 전에 겁탈한 아가씨의 어머니... 아니 새어머니야. 그러니까 네 게 자기 의붓딸을 겁탈해 달라고 의뢰한 바로 그 여자라고... 무슨 소리 인지 알아? 네가 겁탈한 그녀, 윤미는 바로 내가 5년동안 사귀던 애인 인... 둘 사이에는 결혼까지 약속한... 크윽... 너를 만난날...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네 과거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 문신 얘기를 듣고서... 난... 너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더구나. 설마 네가 겁탈한 여자가 혹시... 윤미... 흑... 흑... 야, 이 새끼야. 그녀 왼쪽 손목에 있던 문신은 'W'자가 아니라 '3'자를 네가 옆으로 기울여 본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군대를 간 '3'년 동안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겠다는 맹세의 표시로... 그녀가 그곳에 문신을 해 넣은 거란 말이다. 흑... 이년전... 내가 군에 있을 때 그녀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집안 일 때문에 그녀가 어리석게도 자살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네가 죽인 그 여자가... 윤미 아버지가 말기 암환자로 곧 죽게 되니까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윤미에게 해꼬지를 해달라고 했던 거야. 순진한 그녀는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정신이 나가거나... 자살... 흑... 결국 그 못된 새어머니의 의도대로 자살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자, 이제 알만하지? 너는 스스로 네 무덤을 판 셈이야. 이제 내 원수는 너밖에 안 남은 셈이니... 너를 어떻게 해줄까? 응? 이... 강아지야...!" 상규는 널부러져 술에 취해 정신 없이 자고 있는 형민을 등에 간신히 업고는 으슥한 기찻길로 걸어 가더니 형민의 머리를 철로 위에 베개하 고 누이고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 너는 그 여자를 죽이기 위해 조사를 하는 동안 나는 너를 몰래 따 라 다니며 윤미의 자살 진위를 다시금 확인하고 너를 죽일 방법을 연구 했지. 넌 언제나 이 기찻길을 지나 집으로 향했고... 거의 매일 술에 취 해 다니더구나. 아무튼 조금 있으면 기차가 지나갈 시간이야. 그러면 네 머리통은 기차 바퀴에 깔려... 완전히... 풋~ 네 얘기대로 완전범죄의 요건은 현재로서는 다 갖춰진 셈이다. 네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술에 취한 사람이 기찻길에 누워 자다가 변을 당했 다고 생각할 거고 또 지금 이곳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 에... 더욱이 너와 나는 표면적으로는 아무 연고도 없으니... 그리고 내가 오늘 약속에 늦은 이유도...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거 든. 지금 나는 지방 출장 중이야. 가는 도중 잠시 돌아 오긴 했지만 톨 게이트 표며 또 휴게소의 주유소 영수증도 전부 있으니... 지금 네가 죽는 것을 확인하고 떠나도 출장지에는 시간 안에 갈 수 있지. 겨우 몇십분 늦은 셈이 되는 거니 차가 막혔다고 하면 아무도 의심 안 하거든? 마지막으로... 내 양심에... 꺼리끼는 건... 푸훗... 우습게도 전혀 없구 나. 사랑하는 내 연인을 겁탈한 너나... 또 그걸 시킨 년이나... 당연히 죽어 마땅하니... 오히려 평생 기쁜 마음으로 살 것 같아.... 다만, 다만... 흑... 흑.. 흑... 불쌍한 건 먼저 죽어버린 윤미와... 그녀를 그리워 하며 영원히 혼자 살아갈... 나뿐인 것 같구나. 흑... 흑.. 흑... 윤미야... 흑... 흑..." 상규의 흐느낌이 조용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가운데 멀리서 고속 기차의 기적 소리만이 고즈넉하게 메아리쳐 들릴 뿐이었다.
완전범죄 만들기
[펌글]완전범죄 만들기
여름이 다가오려는지 며칠간 쨍쨍 내려 쬐던 햇빛에 사람들의 짜증이
극도에 다다르던 오후... 그래도 서늘한 바람이 간혹 불어 오는 도심 속
의 조용한 공원, 낡은 벤치 위에 형민이 꾸벅, 꾸벅 졸며 앉아 있었다.
그는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정신을 차릴 때
뜨는 눈망울에는 매서운 기운이 한껏 감돌고는 했다. 이윽고 형민은 잠
이 완전히 깼는지 두 팔을 벌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젠장할... 날은 덥고 할 일은 없고 미치겠구만. 이거 원..."
형민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쓰벌... 라이터가..."
라이터를 조금전 공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변기 위에 얹어 놓고
나온 것 같았다. 형민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내고는 움직이
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억지로 일어나 조금전 자신이 갔던 화장실
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럽고 퀘퀘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장실로 들어가 라이터를
찾아 보았지만 그새 누가 가져 갔는지 눈에 띄지를 않았다.
"싸구려 라이터라도... 남의 물건인데... 어떤 강아지가 말도 않고 집어
갔지?"
몹시 성격이 급한듯, 형민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마구 해대며 화장
실 안을 쳐다 보았다. 잠시후 화장실 중 한 곳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
리더니 볼일을 끝낸 상규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형민은 다짜고짜 그에
게 다가가 물었다.
"불 있수?"
"예?"
시원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서던 상규는 형민의 뜬금없는 말에 잠시
당황하며 되물었다.
"불이라니요? 무슨..."
"아니 이거 보면 몰라요? 담배 좀 피게... 라이터 말이요. 라이터..."
다소 거칠어진 형민의 말투에 상규는 움찔하며 셔츠 안주머니에서 라이
터를 꺼내 형민에게 건냈다. 형민은 마치 자기 것을 돌려 받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받아 들더니 담배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상규는 멀뚱히 서서 그런 그를 한동안 유심히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조금 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김형민씨 아니신가요?"
형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얼굴을 바짝 들더니 상규에게 이상하
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김형민이긴 한데... 어떻게 내 이름을...?"
상규의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형민의 손을 와락 잡으며 큰 소리로 얘
기했다.
"야, 임마. 나 모르겠어? 상규야... 최상규라고...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 네 짝이던... "
"어? 아... 그러고 보니..."
*********************
달이 무척 밝은 밤하늘 아래, 강이 훤히 내다 보이는 다리 근처에 위치
한 허름한 포장 마차에서 형민과 상규는 홍합을 안주로 술을 마시고 있
었다. 상규는 연신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고 형민은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벌개진 얼굴로 상규가 권해준 술잔을 받았다.
"아무튼... 이게 얼마만이냐? 중학교 졸업 이후로... 10년은 넘은 것 같
은데? 그간 뭐하고 지냈냐?"
"훗... 그냥 저냥 살았지. 되는 대로..."
형민의 심드렁한 말에 상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되는... 대로라... 흠..."
상규가 형민의 말을 곱씹자 형민은 상규에게 잔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너는 어찌 살았냐? 결혼은 했고? 중학교때도 공부 잘하던 네놈이
니... 지금쯤 돈 많이 벌고 출세했겠지."
"하. 하. 하. 중학교 때는 중학교 때고... 간신히 삼류대학 나와서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 산다. 사실 군에서 제대 한지도 얼마 안돼. 조금 늦게
갔거든?"
"그렇구나. 훗... 네 말맞다나... 꽤나 평범하구나."
둘은 한동안 술을 홀짝였다. 형민은 취기가 다소 오른 듯 과장된 몸짓으
로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사실... 한달 전에 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2년만에..."
"뭐라고? 아니 왜?"
"훗... 내 직업이 뭔지 아냐? 좋은 말로는 흥신소 사장이고 나쁜 말로는
해결사야."
형민의 말에 상규는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면... 네가 하는 일이 잘못되서... 감옥에 갔던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왜, 궁금하냐?"
"호기심이야 가지... 네가 말해 줄 수 있는 얘기라면..."
상규는 형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민은 자신 앞에 놓
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흠... 해결사란 직업...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잖니? 외국
처럼 탐정이란 멋들어진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어느날 사
무실로 어떤 여자가 전화를 했더라고. 마흔살쯤 되보이는 목소리의 아줌
마였는데...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는 자기 딸을 좀 감시해 달라는 거였어. 너도 알다
시피 누구를 감시해 달라는 건 대개 불륜 현장을 잡는 부부간이 많은 데...
좀 독특한 사건 의뢰더라고... 나야 뭐 돈만 많이 준다면 별의 별짓 다
하는 놈이니까 상관 없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상규는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게... 감시를 하며 그 아줌마한테 딸의 행적에 대해 전화로 보고를 하
곤 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자기 딸을 나보고 겁탈해 달라는 거야. 나
는 처음에 그 아줌마 정신이 어떻게 됐나 의심했지. 돈이면 아무짓이나
하는 나이긴 하지만... 사실 어떻게 그런 짓을 내게 의뢰할 수 있겠니?
하지만 해결사 세계의 철칙은 첫째, 고객 신분 보장, 둘째, 사건 의뢰의
이유를 묻지 말것, 셋째, 일이 잘못되도 절대 남에게 발설하지 말것...이
니까 나는..."
"훗... 프로 의식이 대단하다. 너..."
형민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아무튼... 나는 처음에 사양하다가 그 아줌마가 제시하는
수고비에 넘어가서..."
"넘어가서?"
"이것 저것 생각지도 않고 그냥 겁탈해 버렸지. 사실 그 아줌마 딸...
무척 미인이었거든? 아줌마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딸이 그 정도면 어
머니도 젊었을 때 꽤나 미인이었을 거야. 하여간 내가 그동안 그녀를 감
시해왔으니 겁탈할 기회를 잡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지.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따라가다가 칼을 들이대고 한적한 숲속으로
끌고가 그 짓을 해버렸는데... 이야... 정말 반항, 엄청 많이 하더라. 배
와 허벅지를 몇번이나 때려서야 겨우... 그짓이 가능했는데... 하기야 난
그럴수록 더욱 흥분했지만 말이야. 하. 하. 하."
상규는 얼굴을 한번 찡그리더니 못마땅한 듯 나무랐다.
"너... 변태구나. 더욱이.. 어떻게 그런 짓을..."
"짜식아, 난 철저한 프로라니까. 사건 의뢰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하는 거
고... 풋, 그런데 그녀 정말 처녀였어. 일이 끝난 뒤 울고 불고 하는데...
정말 귀엽기만 하더라."
"미친놈."
"하. 하. 하. 나보고 뭐라해도 좋아. 어쨌거나 그녀의 가녀린 몸매하며 오
동통한 가슴... 그리고 특히, 왼쪽 손목에 조그맣게 새겨진 'W'란 문신이
꽤나 섹시하게 보이더란 말이야."
"그런데... 왜 감옥에 들어간거야?"
형민은 상규의 물음에 술을 한잔 더 들이키고 혀꼬부진 목소리로 대답
했다.
"쓰벌... 재수없게 내가 그녀와 그짓을 하는 걸 본 사람이 있었어. 일이
다 끝나고 옷을 입는데... 경찰이 달려 오더니만... 대충 짐작이 가지?
처음에는 경찰에 가서 모든 걸 불어 버릴까도 생각했는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난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진 사람이라... 큭큭. 나
혼자 죄를 뒤집어 썼지. 생각해 보면 그녀와의 그짓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였는지도 몰라. 하. 하. 하."
".........."
상규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한참동안 형민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뜬금
없는 말을 건냈다.
"저... 한가지 물어 보겠는데. 화려한 네 과거 경력을 듣고 나니 갑자기
상의하고 싶어서 말이야..."
"뭔데? 아무거나 다 물어봐라. 내가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상담해 주
지."
형민의 능글스러운 목소리에 상규는 주위를 한번 '휘'둘러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거든? 후~ 단도직입적으
로 말하면... 얼마전에 꽃뱀한테 당했어."
"꽃뱀? 아니 그러면 여자와 하룻밤 자고서... 그 여자한테 협박을 당하고
있단 말이지? 돈을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불어 버리겠다... 뭐 이런거?"
"휴우~ 그런셈이지. 그것도 처녀가 아닌 유부녀한테..."
"병신."
"그래, 내가 생각해도 병신이야. 그나저나... 한, 두번 돈도 주고 달래도
봤는데 영 말을 듣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자기 뜻대로 조금만 안
돼면 계속 협박하고 그러는데 말이야."
형민은 상규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다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했다.
"흠... 사실 그런 애들은 돈이 떨어지면 계속 협박한다고. 네 처지를
자세히 들어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가는데... 아마 경찰에 알릴 수도
없는 형편 이겠지?"
"그러니까 말이야. 어쩌지?"
"가장 좋은 방법은 죽여버리는 건데..."
"죽인다고?"
상규가 화들짝 놀라며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형민도 얼떨결에
상규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완전범죄를 만들기 위해서는 4무(無)와 1유(有)의 조건이 있지.
즉, 무증거, 무목격자, 무연고, 무양심에 유부재증명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네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와 목격자가 없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아무 관계도 아니어야 하며 또 범죄를 저지른 뒤 자신의 양심에
전혀 꺼리길게 없어야 한다는 말이야. 물론 사건이 일어 났을 때 그 장
소에 없었다는 부재증명, 곧 알리바이가 확실해야 하고 말이야."
"그렇겠군. 그래서?"
"그런데 너는 다른건 어떻게 조작한다 해도 무연고와 무양심이 안될 것
같아. 이미 그 꽃뱀과 관계가 있으니 경찰에서 조사하면 금새 발각될 거
고... 예전의 네 소심한 성격을 보아 평생 양심에 걸려 괴로워 하며 살
것이 분명하니..."
"하긴..."
형민의 친절한 설명에 상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민은 다시 곰곰히 생
각하더니 얘기했다.
"내가 대신 처리해 줄까? 그 일 말이야."
"진짜?"
상규가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형민을 쳐다보자 형민은 다소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이런 얘기하기는 좀 뭐한데... 사실... 요즘 돈이 좀 궁하거든? 그러니
적당한 수고비만 준다면 다신 그년이 네 앞에 안 나타나도록 처리해주지.
까짓거, 나는 이제부터 막나가며 살기로 작정한 놈인데 뭐..."
"돈이야... 당연히 줘야겠지만... 처리를 해 준다는건? 어떻게?"
형민은 상규에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돈만 많이 준다면 죽여 줄 수도 있어.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야."
"뭐라고? 아니.. 그러다가... 혹시..."
"걱정마. 내 입이 무겁다는 건 아까 들어서 알잖아? 끝내 말을 안하고
감옥가서 살다가 온 거 보면 몰라?"
상규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을 했다. 형민은 그런 상규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못참겠다는 듯 물었다.
"어쩔거야?"
"흠... 좋아.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넉넉잡아 일주일. 네가 그 여자 연락처만 내게 가르쳐 주고..."
"그래 결심했다. 돈은 네가 확실히 그 여자를 죽였다는 걸 확인하고 줄
테니... 일주일 후 바로 여기서 이 시간에 만나기로 하자. 그 여자는 매
일 같이 내게 연락을 하니 만약 일주일 안에 그 여자와 연락이 끊기면
네가 그 여자를 죽였다는 것을 믿고 돈을 주마."
형민은 상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좋아. 계약한 거야. 그런 뜻에서... 자, 건배!"
둘은 밝은 표정으로 술잔을 부딪쳤다.
*********************
상규를 기다리다 지친 형민은 초조한 듯 포장마차에 앉아 술잔을 홀짝
이고 있었다. 일주일전 약속한 시간에서 한시간이나 넘었는데도 상규는
오지 않고 있었다. 형민은 기다리다가 왠지 속았다는 기분에 험악한 얼
굴이 되서 술을 연거퍼 들이 부었다.
"강아지... 기껏 여자를 죽여 줬더니... 약속을 안 지키네? 이거...
이러다 안 나타나면 나만 헛짓한 꼴 되는 거 아냐?"
속이 몹시 타는 듯 술 몇잔을 더 마시는데 상규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
와 형민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형민은 잔뜩 인상을 쓰며 상규에게 얘
기했다.
"야, 약속 시간을 지켜야 할 것 아냐? 왜 늦었어?"
"미안하다. 미안해.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참, 그나저나 어찌됐니?"
형민은 그나마 상규가 온 것에 안심을 하며 한껏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말했다.
"그 여자에게서 요새 연락 안오지? 깨끗하게 처리했다.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며칠... 그 여자 주위를 맴돌며 조사를 하고 계획
을 짰는데... 매일 새벽마다 습관적으로 등산을 하더라고. 그걸 이용해서
산행길에 그냥 절벽에서 밀어서... 아마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도 않았을
걸? 워낙 외진 곳에 떨어 뜨려 버렸으니... 하. 하. 하."
"정말 뒷탈 없이 끝냈지?"
"걱정 말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했어. 나만 믿으라고."
"잘됐구나. 어쩐지 요새 전혀 연락이 안 오더라니. 수고했다. 자, 오늘
밤은 거하게 술이나 먹자고..."
상규가 술을 따르자 형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 은?"
"걱정마, 자식아. 가져왔으니..."
상규는 형민이 앞에 지갑을 펴보이며 얘기했다. 형민은 한껏 기분이 좋
아져 만면에 미소를 띠며 상규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
*********************
"우와... 취한다. 이거... 끄윽~ 너무 먹은 것 같은데? 네... 가 하도
먹이는 바람에... 꺼억..."
상규의 두팔에 의지한 채 형민이 비틀거리며 어둡고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다.
"형민아. 도저히 더 못가겠다. 여기서 좀 쉬다 가자."
도심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길가에 털썩 주저 앉으며 상규가 말했다.
형민은 희멀건한 눈으로 상규를 따라 바닥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가 어디야? 흠... 왠 기찻길이 다 보이고? 아... 내 자취집
근처인가? 딸꾹..."
상규가 형민에게 담배를 한대 권하고 자신도 한대 불을 붙여 입에 물었
다. 형민은 한모금을 채 다 피지 못하고 담배를 떨어 뜨리며 그 자리에
서 잠이 들고 말았다. 상규는 그런 형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거리더니 미친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흑...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네가 며칠전 죽인 그 여자는...
네가 2년 전에 겁탈한 아가씨의 어머니... 아니 새어머니야. 그러니까 네
게 자기 의붓딸을 겁탈해 달라고 의뢰한 바로 그 여자라고... 무슨 소리
인지 알아? 네가 겁탈한 그녀, 윤미는 바로 내가 5년동안 사귀던 애인
인... 둘 사이에는 결혼까지 약속한... 크윽...
너를 만난날...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네 과거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
문신 얘기를 듣고서... 난... 너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더구나. 설마
네가 겁탈한 여자가 혹시... 윤미... 흑... 흑... 야, 이 새끼야. 그녀
왼쪽 손목에 있던 문신은 'W'자가 아니라 '3'자를 네가 옆으로 기울여 본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군대를 간 '3'년 동안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겠다는 맹세의 표시로... 그녀가 그곳에 문신을 해 넣은 거란
말이다. 흑... 이년전... 내가 군에 있을 때 그녀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집안 일 때문에 그녀가 어리석게도 자살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네가 죽인 그 여자가... 윤미 아버지가 말기 암환자로 곧 죽게
되니까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윤미에게 해꼬지를 해달라고 했던 거야.
순진한 그녀는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정신이 나가거나... 자살... 흑...
결국 그 못된 새어머니의 의도대로 자살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자, 이제 알만하지? 너는 스스로 네 무덤을 판 셈이야. 이제 내 원수는
너밖에 안 남은 셈이니... 너를 어떻게 해줄까? 응? 이... 강아지야...!"
상규는 널부러져 술에 취해 정신 없이 자고 있는 형민을 등에 간신히
업고는 으슥한 기찻길로 걸어 가더니 형민의 머리를 철로 위에 베개하
고 누이고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 너는 그 여자를 죽이기 위해 조사를 하는 동안 나는 너를 몰래 따
라 다니며 윤미의 자살 진위를 다시금 확인하고 너를 죽일 방법을 연구
했지. 넌 언제나 이 기찻길을 지나 집으로 향했고... 거의 매일 술에 취
해 다니더구나. 아무튼 조금 있으면 기차가 지나갈 시간이야. 그러면 네
머리통은 기차 바퀴에 깔려... 완전히...
풋~ 네 얘기대로 완전범죄의 요건은 현재로서는 다 갖춰진 셈이다. 네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술에 취한 사람이 기찻길에 누워 자다가 변을 당했
다고 생각할 거고 또 지금 이곳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
에... 더욱이 너와 나는 표면적으로는 아무 연고도 없으니...
그리고 내가 오늘 약속에 늦은 이유도...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거
든. 지금 나는 지방 출장 중이야. 가는 도중 잠시 돌아 오긴 했지만 톨
게이트 표며 또 휴게소의 주유소 영수증도 전부 있으니...
지금 네가 죽는 것을 확인하고 떠나도 출장지에는 시간 안에 갈 수 있지.
겨우 몇십분 늦은 셈이 되는 거니 차가 막혔다고 하면 아무도 의심 안
하거든?
마지막으로... 내 양심에... 꺼리끼는 건... 푸훗... 우습게도 전혀 없구
나. 사랑하는 내 연인을 겁탈한 너나... 또 그걸 시킨 년이나... 당연히
죽어 마땅하니... 오히려 평생 기쁜 마음으로 살 것 같아....
다만, 다만... 흑... 흑.. 흑... 불쌍한 건 먼저 죽어버린 윤미와...
그녀를 그리워 하며 영원히 혼자 살아갈... 나뿐인 것 같구나. 흑... 흑..
흑... 윤미야... 흑... 흑..."
상규의 흐느낌이 조용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가운데 멀리서 고속 기차의
기적 소리만이 고즈넉하게 메아리쳐 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