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정상수200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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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안경 낀, 쌍꺼플진 눈, 하얀 피부, 적당한 키, 그런데로 괜찮게 생긴 그녀가 오늘도 변함없이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 녀가 타는 버스를 늘 이용한다. 그 녀도 내가 타는 그 버스를 늘 이용한다. 왜냐구요? 공짜니까.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난 그 녀를 안다. 그 녀가 나를 아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난 늘 그 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오늘은 내가 더 빨라 버스에 먼저 오를 수 있었다. 버스에 올라 오르는 그 녀의 모습을 바라본다.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그 녀의 패션이 바뀌어 있다. 늘 청바지만을 입더니 오늘은 면바지를 입었다. 하얀 나시에 민소매 오픈 니트를 입었다. 하얀 나시의 가운데에 찍혀 있는 무늬가 참 모던하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고 그 녀는 움직이지 않으려 위 손잡이를 꽉 잡았다.

 아~ 그런데 그 녀가 든 그 손 바로 아래 겨드랑이에 새카만 털이 송송 솟아 있다. 깎긴 한 듯 한데 그 시간이 한 두어 주는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그것을 보려고 한 게 아니고 우연히 정말 우연찮게 본 것이다. 재빨리 눈을 돌렸지만 그 녀의 캐치가 더 빨랐다. 그 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팔을 내리고 좌석의 손잡이를 이용한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그 녀의 앞 모습(가슴과 복부 부분)에 눈이 가졌다. 그 녀가 오를 때 모던하다는 Feel을 느꼈던 그 무늬가 유난히 눈에 부셨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보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아!

 그런데…

 그건 무늬가 아니었다. 새 옷을 사면 자연스레 묻어나가는 사이즈 표시용 투명 테이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녀가 입는 옷의 사이즈를 알게 되었다. 그 녀는 “M”사이즈였던 것이다.

 아침에 바빠서 그 딱지를 떼는 것을 잊었나 보구나 싶어 어떤 방법으로 그 사실을 알려 줄까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버스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 녀는 나의 고민을 뒤로 한 체 버스에서 내리고 만다.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상태로…

 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

 다음 날.

 

또 다시 그 녀를 봤다.

아하 통제라…

어제와 같은 모습의 그녀였던 것이다. 그 안경에 그 가방에 그 옷에 그 스티커까지…

오늘은 어제와 같은 고민을 하지 말자. 굳게 마음 먹는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에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와 버스에 오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가장 자연스럽고 아무런 탈도 없이 무사히 그녀를 도울 수 있을까 또 다시 생각에 빠져야 했다.

‘그냥 나가는 척 하다가 그녀의 가슴에 있는 테이프를 살짝 쥐고서 확 낚아 체?’

아님 그 녀의 귀에 대고

‘이제 그만 당신의 가슴에 묻은 테이프를 떼어내시죠’

아님 당당하게 다가가 바로 떼 줘버려?

이 세가지 생각 중 하나를 고르고 있는데 그녀는 또 내려버린다.

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오늘도 난 그녈 돕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