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이슈로 인한 한-일 신경전이 좀 잦아드나 했더니 최근 왠 당파전이 웹을 아궁이처럼 달구고있다. 이순신파 대 원균파의 맞싸움이다. 옥포대전, 한산대첩이 무색할 정도다.
월드컵 예선전 열기나 요즘 뉴욕의 염천 날씨를 능가한달까. 야후, 네이버를 비롯한 여러 서버와 사이트 등에 둘의 망령이 되살아난 양 서로 헐뜯기/흠집내기 작전에 여념이 없다. 누가 승세를 잡을지 가닥잡기가 어려울 만큼 양상이 치열하다. 이와 함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과연 역사적 고증과 픽션의 어느 쪽에 치우쳤는지도 갑론을박 되고 있다.
우선 지적되는 사안 하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이순신 위인전 집필 바람으로 이어진 이순신 성웅화 작업. 이순신은 일제 때 이 나라를 지켜준 '수호신' 내지 해방의 저력이었기에 위대한 영웅에서 '거룩한 영웅'으로 한단계 승화하려 든 것이다. 그 절정은 박정희 집권기인 1960,70년대였다.
당시 사람들이 다 겪은 바이지만, 충무공 성웅화는 박 정권의 일대 명작이었다. 영화 '성웅 이순신'이 이를 웅변해준다. 둘다 군인인 탓일까 은연중 [이순신=박정희]의 숨은 등식이 통했다. 수학여행 때면 으레 정해진 코스가 남해 전적지였다. 이와 함께 거북선의 '잠수함'설, 이순신 사적의 성역화, 각하께서 손수 일필휘지한 '현충사'란 현판, 충무공을 기리는 묵념, 난중일기/보검, 초라한 거북선모형 관람 등등 기억에 새롭다. 듣자니 '박통'은 만주 일본군 사관학교 시절 일인 군관들이 이순신 제독을 존경하는 데 충격받아 열렬히 숭배하게 되셨다는 데 어느 정도 근거있는지는 모르겠다.
원균 한풀이?
누가 '시소 효과'로 비유했지만 충무공을 드높이 띄우다보니 상대적으로 그 라이벌 격인 충정공 원균 장군은 '일본놈'들 못지않은 '천하에 나쁜놈'으로 왕따돼간 것이 사실이다. 우리들 두뇌회로 속엔 아직도 매국노 이완용 못지 않은(?) 부정적 원균 상이 잔뜩 입력돼있다. 박정권의 충무공 이미지 극대화 주입교육이 제대로 먹혀든 셈이다. 박정희의 잠재 어젠다 속엔 [이순신=박정희] 등식과 함께 [원균=장도영] 등식도 숨어있지 않았나싶다. 장도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버린 사람이지만 말이다. 보다 훗날엔 [원균=김대중] 등식도 떴을 거고.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고증도 물론 했겠지만 원작 격인 김탁환의 소설 '불멸',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픽션적인 요소도 적당히 추출/희석돼 상상에 의한 새로운 '이순신 상'을 주물러낸 것이란다. 이순신의 죽음도 우발적 전사가 아닌 고의적인 자결로 처리된다. 이 드라마가 인기몰이를 할동안 그 부수효과로 원균의 역사적 행보도 덩덜아 조명발을 받는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그동안의 일방적인 충무공 성웅화, 충정공 간웅화 주입교육을 맞받아쳐 '뒷풀이'라도 할 셈인 양 말이다. 아니면 '원균 살풀이'랄까.
어느 역사담론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순신 얘기도 신화의 거품을 빼고 기독교인인 우리 나름의 관점을 지녀야한다. 첫째로 중요한 기정 사실은 충무공은 하나님이 조선/대한민국의 국운을 잇기 위해 허락하신 위인이었다는 것이다. 바람 앞에 등잔불 같던 절대절명의 위기 때 이순신처럼 지략이 뛰어난 명장이 없었다면. 아니면, 서슬이 퍼런 선조의 섣부른 칼날에 일찍이 목숨을 앗기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 했는가. 곧장 일본에 나라를 뺏기고 그들의 야만적인 문화말살과 동화정책으로 조선과 미래의 대한민국, 더나아가 오늘날 같은 세계적인 한국교회는 영 없었을지 모른다. 안 그런가?
아울러, 이순신만이 나라를 살린 것이 아니다. 원균의 실수는 많았지만 나라를 살리기 위해선 그도 필요했고 행주대첩을 연승으로 이끈 대원수 권율도 필요했다. 수하의 수많은 기타 장졸들도 필요했고.
충무공은 성자?
둘째로, 이순신을 '크리스천' 내지 성인으로 착각하여 우리네 아이돌 내지 이콘으로 삼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는 것이다. 어떤 젊은 기독교 네티즌들의 희망사항은 그가 지금 하늘나라에 가있지 않을까란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역사 기록을 보면 장군은 하늘을 향해 "하느님, 저를 통해 이 나라를 반드시 살려주소서!" 탄원하는 장면도 나온다. 정말 예수 크리스토를 알기라도 했더라면.. 그러나 그는 집안내력상 독실한 유교도였다.
이것은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때때로 천주님 또는 '성모'님께 기도란 것을 하는 사람이었다. 만일 우리가 카톨릭 신자를 참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유키나가도 참 신자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비록 흉폭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는 달리 온건파 내지 중도파였다곤 하나 수많은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고대의 바빌론, 아씨리아인들처럼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고 양민의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간 사람이었다. 포르투갈인 사제까지 전쟁에 대동했다니 카톨릭의 이름으로 그 교리를 이용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순신의 황당한 여성 편력
셋째로 이순신의 삶은 비범 속 평범이었다. 아니 우리가 보기엔 상상을 넘는 박약한(?) 윤리적 기준의 사람이었다. 당시 사회상 탓이랄까. 난중일기를 보면, 그는 난중에도 취침시 수시로 이런저런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그를 성웅시한 박정희도 그런 방만한 삶을 동경 내지 추구했던 걸까? 속설에 '박통'의 구중궁궐 안에 끌려든 미녀들이 많다지 않은가.
장군의 난중일기엔 최소한[최소한이다] 서너 명의 여성과 동침한 기록이 꾸밈없이 대수롭지않게 밝혀져있다. 아마도 부하들 또는 그를 우상 받들듯 했던 백성들이 딸이나 기타 여성들을 '몸 풀기' 상대 내지 '몸 보시'용으로 수시 상납(?)했던 걸까? 당대 무관들 중엔 그러지 않고 나라와 스스로를 위해 적극 여색을 멀리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부하들은 오죽했으랴.
잘 나가다 왠 여자 얘기냐 할진 몰라도 전쟁터에 가신들을 내보내놓고 목욕하던 남의 집 여인과 침대에 자빠져 뒹굴며 재미 아닌 재미를 본 아무개 임금 얘기, 기억나는가? 전시에도 때를 가리쟎는 정사는 영웅들의 다반사란 얘기다. 순신이 그랬으니 균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알렉산데르처럼 동성애/양성애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고보면 대장군도 싸구려 '영웅호색' 범주에서 못 벗어난, 별수없는 여느 범상한 세속 남정네였다. 나라를 위한다면서 군대관리는 잘했지만 아랫도리 관리는 그랬단 얘기다. 그래서 인간적/남성적이고 솔직한 이순신을 더 존중한다면 할말없지만. 그럼 빌 클린턴과도 별차이 없단 것인데, 과연 그런가. 그 편이 좋겠는가?
그러니 순신이 단지 나라를 지킨 애국자였다는 공로만으로 천국 비자를 받아 무사통과했을 리 없었단 얘기다. 비도덕성도 애국심을 위해서라면 타당화될 수 있다는 법칙은 우리 기독교엔 없다. 필자의 본론은 이순신이 존중의 대상일지언정 숭배 대상은 아니란 것이다. 충무공 존중이 아닌 충무신 숭배 유혹에 빠지지 말자. 적어도 우리만큼은 충무공에 대한 고마움을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돌려야 옳다.
왜.왜.왜..왜?
거듭 '삼천포'로 빠지지만..'왜'자 낱말이 역사책만이 아닌 현대 한국문화에도 너무 난무한다는 딴지를 걸어본다. 왜놈/왜적/왜인/왜구/왜군/왜선/왜국/임진왜란..등등. 고래로 체구가 왜소해 딸깍발이('게다'짝) 신세를 져야하던 이 남쪽바다 건너 침략자들에게 걸맞은 호칭이라곤 하나 신체적 약점에 빗댄 이 말을 옛 기록이 꼭 필요한 역사문헌 외에는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싶다. "아까운 '왜'를 왜 버려?" 묻겠지만 사실 인격 폄하에 가깝기 때문이다. '왜인'은 한글 '쪽발이'나 다름없는 비하어다.
지금은 꽤 유명한 목회자인 필자의 절친한 벗은 학창시절 자기 키가 좀 크다고 필자를 늘 "왜소하다"고 진담반농담반으로 깔보곤 했다. 자칫하면 필자를 거의 '왜놈'이라고 부를 뻔 했을지도 모른다. 이 친구야,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자네 키를 깎아서 나한데 보태준 거라도 있나, 이 사람아. 하지만 이건 농담이고..
당시 조선인들의 신체가 얼마나 거구였는지 모르나 서구인만 했을리 만무다. 릴리풋(소인국) 대 걸리버(거인), 이스라엘 족 대 아낙 족, 다윗 대 골리앗이 아닌이상 도토리 키재기 차원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왜놈'이란 말은 명실공한 말이기보다는 다분히, 침략자들을 호칭상으로나마 짐짓 비하시켜 깔봄으로써 은근히 통쾌감을 맛보기 위한 말이 아닐까. 알고보면 같은 동양인을 스스로 모독/비하하는 비인도적/비인권적 용어다.
더욱이 그 옛적 우리와 핏줄을 나눈 민족이라지 않는가. 더더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삼가야할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의 의미를 안다면 하다못해 유엔인권위에서도 싫어할 것 같다. "무슨 소리? 그들도 우릴 조센징이라고 하지 않나? 36년 노예생활과 신사참배, 정신대를 벌써 잊었나? 왜놈이라도 백번 싸지 싸, 암!" 할테지만 그렇다고 복음을 따르는 우리마저도 이엔 이빨, 눈엔 '누깔'로 응할 텐가? 기왕 일제잔재 청산작업을 하려면 친일파 망령 때려잡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왜'자 편집증도 떼버리면 안될까? 아니면 말고. '왜'자 말놀이에 치우치다보면 한겨레의 정신적 키가 정도껏 이상 자라기도 어렵지 않을까?
원균 그 사람
이순신에 관해선 알만큼 알고 느낄만큼 느꼈다고 생각돼 그보다는 원균에 관한 사료를 좀 알아봤다. 가장 근거있는 자료는 그 어느누구의 소설도 아니며 역사적 자료들일텐데 사료라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적을 때는 문제다. 예를 들면 이순신-원균 사이에 끼여 함께 삼각 다이내믹스로 작용한 당대 국왕, 선조의 이슈가 매우 민감한데 겉으로는 나타난 자료만으로 선조의 본심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날조된 역사도 없지않단 얘기다. 더욱이 선조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미묘한 인물임에랴.
원균은 김산호 화백이 고증을 거쳐 그려낸 상상도인 영정을 보면 짐작하지만 힘이 세고 장부답게 생겼다. 외양이나 저돌적 성격이 꼭 삼국지의 장비 스타일이다. 장비는 유머감각이나마 있었는데 원균은 그것마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가하면 이순신은 지략/덕성을 겸한 관우 스타일이 아닐까. 아니면 [유비+제갈공명]형이랄까.
그런데도 그가 '역적', '졸장'이란 일각의 주장은 그의 경력에 따라붙은 심상찮은 족적 때문이다. 예컨대 무과시험 때 아버지 원준량의 도움으로 부정을 한 흔적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또 선조실록에 따르면 어느 지방 수령으로 있다가 평이 나빠 파면됐고 파면 반년만에 전라좌수사 임명을 받았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재차 파면됐다.
순신 같은 지장이 아닌 용장이라는 지적도 맞다. 자신의 용맹만을 믿은나머지 만용을 부린 흔적이 적지않다. 그리고 순신과 달리 부하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지혜가 머리에 몰려있기보다 온몸에 퍼진 쪽이었다. 졸장부라는 평판은 아마도 순신에 대한 질시 탓인 듯하다. 질투심에 물들어 동료 장군을 폄하/폄훼/참소할만큼 자주 용렬했다. 그렇지만도 그것이 균의 애국심 자체를 결하진 않는다. 순신이 애국자라면 균도 애국자로 봐줘야 공평하다. 게다가 난중일기에 보면 균에 대한 순신의 불평불만과 적개심도 만만치 않다. 순신도 별다름없는 감정의 사람이었단 얘기다.
원균은 북쪽 오랑캐 토벌에 공이 커 승진이 빨랐다. 어려서부터 날랬다는데 만년엔 너무 비둔했던 모양이다. 혈기방장한 성격상 술과 고기를 즐기지 않았나 싶다.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해 삼도 수군이 몰살당한 끝에 고성 추원포 부근 바닷가 야산으로 도주했다가 일본 수군 분대에 목을 잘렸다. 이 패배엔 물론 일군의 간계를 파악하지 못한 조정의 어이없고 무리한 출정 강압도 작용했다. 원균으로선 패배가 너무도 뻔한 전투였다. 살 것이라곤 그의 용맹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이순신과의 관계에 관한 자세한 사료는 http://www.njaro.pe.kr 등을 참조하면 된다. 좋은 자료들이 많으니 여기서 군더더기로 되풀지 않으련다. 다만 몇가지를 꼭 언급한다면..원균의 집안은 명문 무가였다. 그의 선대는 고려태조 당시 통합삼한 공신의 한사람인 병부령 원극유로부터 줄줄이 고위급 무관들이었다. 따라서 군맥/인맥의 뿌리가 깊었다. 그 점에서 순신과는 판이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선조가 총애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선전관/선산만호/부령부사 등을 거쳐 경상우수사가 된 그해 4월 일본함대가 대거 몰려왔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됐을 당시 원균은 전함 단 네 척만 갖고 맞싸울 수가 없어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했는데 당시 이장군은 수군의 한계가 있다며 조정의 교지를 기다리다 5월4일께야 비로소 출전한다.
원균은 이순신의 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직접 적과의 교전에 나서 적선 10여척을 불사르고 빼앗는다. 그의 용맹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5월6일 드디어 이장군이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직접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거제 앞바다에 모여 7일 새벽 옥포 앞바다에 진 친 일본 함대를 공격, 대승한다.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임진란 당시 남해안의 승리가 대부분 이순신이 지휘한 전라좌수영 수군들의 공적 중심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은 이순신/이억기/원균 휘하 3군 합동작전이었다. 원균의 전함은 소수였지만 선봉에서 싸웠다.
원균은 을미년(1595년) 겨울엔 충청병사, 이듬해인 병신년(96년) 가을엔 전라병사로 임명됐는데 선조가 말 한필을 하사하면서 말했다. "경이 나라를 위해 애쓰는 충용 정신의 예는 고금에 비길 데 없어 짐이 일찍부터 가상히 여겨왔으나 아직 이렇다할 보답을 못하던 터인데 이제 멀리 떠나게 됨에 친히 전송코자 했으나 마침 심기가 불편한 탓에 뜻대로 못했노라."
자료에 따르면, 선조는 늘 원균에 대해 한구석 애틋한 마음을 지녔던 듯하다. 원균은 선조의 하사품인 이 말을 끔찍이 아꼈나보다. 전사한 원균의 유품을 갖고 천리길을 마다않고 단숨에 고향으로 달려왔다는 전설의 애마였다. 지금도 원균의 무덤 가까이 '애마총'이라는 말 무덤이 있다.
정유년(1597)년 기요마사가 재차 출전하면서 유키나가가 보낸 일본 간자 요시라가 경상우수사 김응서에게 와서 고니키가 가토를 미워하는 터에 가토가 쳐들어오니 바다 가운데서 지키고 있으면 생포할수 있다고 거짓 간언을 한다.
김응서가 이 말을 올리자 조정은 그 말을 믿고 위유사(慰諭使: 국란이 있을 때 위로를 맡은 임시벼슬) 황신을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은밀히 알리고 출전케 했지만 이순신은 적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출전을 거부한다. 이처럼 지략에 있어선 이순신이 늘 몇수 위였다. 그러나 조정은 불같이 대로해 이순신을 투옥해버리고 원균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원균이 오매불망하던 바였지만 그 결과는 재앙과 자멸이었다! 지혜가 몸에 퍼진 그에겐 애시당초 어울리지 않는 벼락벼슬이었다.
결국 울며겨자먹기로 이순신이 되맡긴 했지만 그도 노량대전을 최후의 승전으로 장식한 뒤 장렬하게 순직한다. 결국 선조의 조정은 국력으로 나라를 지키려기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그럴듯한 직함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셈이다. 일부 장군들이 죽은 뒤 내려진 '선무공신교서'란 것도 직접 나가 싸운 무신들보다는 선조 곁에서 아양 떨던 문신들에게 주로 돌아간 걸 보면 알량한 선심이다.
맺음글
이상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선 원균이나 이순신이나 '고놈이 고놈' 아닌가 싶다. "아니 '고놈'이라니 어디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그런 말을?" 할지 모르나 예수님 앞에선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신자들의 십자가 대군의 대장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완벽완전하시고 겁없고 담대하신 사령관, 승전왕이시다. 이순신/원균도 갔고 선조도 가고 다 갔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선 우리들 속에 살아계시다. 이순신이 불멸이라는데 물론 불멸은 불멸이다. 인간 영혼은 사멸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몸도 마지막날 심판의 부활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예수 크리스토는 불멸이실 뿐 아니라 불변이시다. 이순신도 원균도 시시때때로 썩고 부패한 변질변화하는 인생들이었지만 주님은 늘 변함 없으시다.
이순신을 개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개신교
충무공 파 vs 충정공 파
독도 이슈로 인한 한-일 신경전이 좀 잦아드나 했더니 최근 왠 당파전이 웹을 아궁이처럼 달구고있다. 이순신파 대 원균파의 맞싸움이다. 옥포대전, 한산대첩이 무색할 정도다.
월드컵 예선전 열기나 요즘 뉴욕의 염천 날씨를 능가한달까. 야후, 네이버를 비롯한 여러 서버와 사이트 등에 둘의 망령이 되살아난 양 서로 헐뜯기/흠집내기 작전에 여념이 없다. 누가 승세를 잡을지 가닥잡기가 어려울 만큼 양상이 치열하다. 이와 함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과연 역사적 고증과 픽션의 어느 쪽에 치우쳤는지도 갑론을박 되고 있다.
우선 지적되는 사안 하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이순신 위인전 집필 바람으로 이어진 이순신 성웅화 작업. 이순신은 일제 때 이 나라를 지켜준 '수호신' 내지 해방의 저력이었기에 위대한 영웅에서 '거룩한 영웅'으로 한단계 승화하려 든 것이다. 그 절정은 박정희 집권기인 1960,70년대였다.
▲충무공 영정 일부. 장우성 화백(1953년 작). © 장우성
당시 사람들이 다 겪은 바이지만, 충무공 성웅화는 박 정권의 일대 명작이었다. 영화 '성웅 이순신'이 이를 웅변해준다. 둘다 군인인 탓일까 은연중 [이순신=박정희]의 숨은 등식이 통했다. 수학여행 때면 으레 정해진 코스가 남해 전적지였다. 이와 함께 거북선의 '잠수함'설, 이순신 사적의 성역화, 각하께서 손수 일필휘지한 '현충사'란 현판, 충무공을 기리는 묵념, 난중일기/보검, 초라한 거북선모형 관람 등등 기억에 새롭다. 듣자니 '박통'은 만주 일본군 사관학교 시절 일인 군관들이 이순신 제독을 존경하는 데 충격받아 열렬히 숭배하게 되셨다는 데 어느 정도 근거있는지는 모르겠다.
원균 한풀이?
누가 '시소 효과'로 비유했지만 충무공을 드높이 띄우다보니 상대적으로 그 라이벌 격인 충정공 원균 장군은 '일본놈'들 못지않은 '천하에 나쁜놈'으로 왕따돼간 것이 사실이다. 우리들 두뇌회로 속엔 아직도 매국노 이완용 못지 않은(?) 부정적 원균 상이 잔뜩 입력돼있다. 박정권의 충무공 이미지 극대화 주입교육이 제대로 먹혀든 셈이다. 박정희의 잠재 어젠다 속엔 [이순신=박정희] 등식과 함께 [원균=장도영] 등식도 숨어있지 않았나싶다. 장도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버린 사람이지만 말이다. 보다 훗날엔 [원균=김대중] 등식도 떴을 거고.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고증도 물론 했겠지만 원작 격인 김탁환의 소설 '불멸',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픽션적인 요소도 적당히 추출/희석돼 상상에 의한 새로운 '이순신 상'을 주물러낸 것이란다. 이순신의 죽음도 우발적 전사가 아닌 고의적인 자결로 처리된다. 이 드라마가 인기몰이를 할동안 그 부수효과로 원균의 역사적 행보도 덩덜아 조명발을 받는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그동안의 일방적인 충무공 성웅화, 충정공 간웅화 주입교육을 맞받아쳐 '뒷풀이'라도 할 셈인 양 말이다. 아니면 '원균 살풀이'랄까.
어느 역사담론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순신 얘기도 신화의 거품을 빼고 기독교인인 우리 나름의 관점을 지녀야한다. 첫째로 중요한 기정 사실은 충무공은 하나님이 조선/대한민국의 국운을 잇기 위해 허락하신 위인이었다는 것이다. 바람 앞에 등잔불 같던 절대절명의 위기 때 이순신처럼 지략이 뛰어난 명장이 없었다면. 아니면, 서슬이 퍼런 선조의 섣부른 칼날에 일찍이 목숨을 앗기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 했는가. 곧장 일본에 나라를 뺏기고 그들의 야만적인 문화말살과 동화정책으로 조선과 미래의 대한민국, 더나아가 오늘날 같은 세계적인 한국교회는 영 없었을지 모른다. 안 그런가?
아울러, 이순신만이 나라를 살린 것이 아니다. 원균의 실수는 많았지만 나라를 살리기 위해선 그도 필요했고 행주대첩을 연승으로 이끈 대원수 권율도 필요했다. 수하의 수많은 기타 장졸들도 필요했고.
충무공은 성자?
둘째로, 이순신을 '크리스천' 내지 성인으로 착각하여 우리네 아이돌 내지 이콘으로 삼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는 것이다. 어떤 젊은 기독교 네티즌들의 희망사항은 그가 지금 하늘나라에 가있지 않을까란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역사 기록을 보면 장군은 하늘을 향해 "하느님, 저를 통해 이 나라를 반드시 살려주소서!" 탄원하는 장면도 나온다. 정말 예수 크리스토를 알기라도 했더라면.. 그러나 그는 집안내력상 독실한 유교도였다.
이것은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때때로 천주님 또는 '성모'님께 기도란 것을 하는 사람이었다. 만일 우리가 카톨릭 신자를 참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유키나가도 참 신자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비록 흉폭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는 달리 온건파 내지 중도파였다곤 하나 수많은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고대의 바빌론, 아씨리아인들처럼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고 양민의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간 사람이었다. 포르투갈인 사제까지 전쟁에 대동했다니 카톨릭의 이름으로 그 교리를 이용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순신의 황당한 여성 편력
셋째로 이순신의 삶은 비범 속 평범이었다. 아니 우리가 보기엔 상상을 넘는 박약한(?) 윤리적 기준의 사람이었다. 당시 사회상 탓이랄까. 난중일기를 보면, 그는 난중에도 취침시 수시로 이런저런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그를 성웅시한 박정희도 그런 방만한 삶을 동경 내지 추구했던 걸까? 속설에 '박통'의 구중궁궐 안에 끌려든 미녀들이 많다지 않은가.
▲난중일기 서책들. 이순신의 진중 여성편력도 엿뵌다. © 난중일기
장군의 난중일기엔 최소한[최소한이다] 서너 명의 여성과 동침한 기록이 꾸밈없이 대수롭지않게 밝혀져있다. 아마도 부하들 또는 그를 우상 받들듯 했던 백성들이 딸이나 기타 여성들을 '몸 풀기' 상대 내지 '몸 보시'용으로 수시 상납(?)했던 걸까? 당대 무관들 중엔 그러지 않고 나라와 스스로를 위해 적극 여색을 멀리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부하들은 오죽했으랴.
잘 나가다 왠 여자 얘기냐 할진 몰라도 전쟁터에 가신들을 내보내놓고 목욕하던 남의 집 여인과 침대에 자빠져 뒹굴며 재미 아닌 재미를 본 아무개 임금 얘기, 기억나는가? 전시에도 때를 가리쟎는 정사는 영웅들의 다반사란 얘기다. 순신이 그랬으니 균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알렉산데르처럼 동성애/양성애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고보면 대장군도 싸구려 '영웅호색' 범주에서 못 벗어난, 별수없는 여느 범상한 세속 남정네였다. 나라를 위한다면서 군대관리는 잘했지만 아랫도리 관리는 그랬단 얘기다. 그래서 인간적/남성적이고 솔직한 이순신을 더 존중한다면 할말없지만. 그럼 빌 클린턴과도 별차이 없단 것인데, 과연 그런가. 그 편이 좋겠는가?
그러니 순신이 단지 나라를 지킨 애국자였다는 공로만으로 천국 비자를 받아 무사통과했을 리 없었단 얘기다. 비도덕성도 애국심을 위해서라면 타당화될 수 있다는 법칙은 우리 기독교엔 없다. 필자의 본론은 이순신이 존중의 대상일지언정 숭배 대상은 아니란 것이다. 충무공 존중이 아닌 충무신 숭배 유혹에 빠지지 말자. 적어도 우리만큼은 충무공에 대한 고마움을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돌려야 옳다.
왜.왜.왜..왜?
거듭 '삼천포'로 빠지지만..'왜'자 낱말이 역사책만이 아닌 현대 한국문화에도 너무 난무한다는 딴지를 걸어본다. 왜놈/왜적/왜인/왜구/왜군/왜선/왜국/임진왜란..등등. 고래로 체구가 왜소해 딸깍발이('게다'짝) 신세를 져야하던 이 남쪽바다 건너 침략자들에게 걸맞은 호칭이라곤 하나 신체적 약점에 빗댄 이 말을 옛 기록이 꼭 필요한 역사문헌 외에는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싶다.
"아까운 '왜'를 왜 버려?" 묻겠지만 사실 인격 폄하에 가깝기 때문이다. '왜인'은 한글 '쪽발이'나 다름없는 비하어다.
지금은 꽤 유명한 목회자인 필자의 절친한 벗은 학창시절 자기 키가 좀 크다고 필자를 늘 "왜소하다"고 진담반농담반으로 깔보곤 했다. 자칫하면 필자를 거의 '왜놈'이라고 부를 뻔 했을지도 모른다. 이 친구야,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자네 키를 깎아서 나한데 보태준 거라도 있나, 이 사람아. 하지만 이건 농담이고..
당시 조선인들의 신체가 얼마나 거구였는지 모르나 서구인만 했을리 만무다. 릴리풋(소인국) 대 걸리버(거인), 이스라엘 족 대 아낙 족, 다윗 대 골리앗이 아닌이상 도토리 키재기 차원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왜놈'이란 말은 명실공한 말이기보다는 다분히, 침략자들을 호칭상으로나마 짐짓 비하시켜 깔봄으로써 은근히 통쾌감을 맛보기 위한 말이 아닐까. 알고보면 같은 동양인을 스스로 모독/비하하는 비인도적/비인권적 용어다.
더욱이 그 옛적 우리와 핏줄을 나눈 민족이라지 않는가. 더더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삼가야할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의 의미를 안다면 하다못해 유엔인권위에서도 싫어할 것 같다. "무슨 소리? 그들도 우릴 조센징이라고 하지 않나? 36년 노예생활과 신사참배, 정신대를 벌써 잊었나? 왜놈이라도 백번 싸지 싸, 암!" 할테지만 그렇다고 복음을 따르는 우리마저도 이엔 이빨, 눈엔 '누깔'로 응할 텐가? 기왕 일제잔재 청산작업을 하려면 친일파 망령 때려잡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왜'자 편집증도 떼버리면 안될까? 아니면 말고. '왜'자 말놀이에 치우치다보면 한겨레의 정신적 키가 정도껏 이상 자라기도 어렵지 않을까?
원균 그 사람
이순신에 관해선 알만큼 알고 느낄만큼 느꼈다고 생각돼 그보다는 원균에 관한 사료를 좀 알아봤다. 가장 근거있는 자료는 그 어느누구의 소설도 아니며 역사적 자료들일텐데 사료라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적을 때는 문제다. 예를 들면 이순신-원균 사이에 끼여 함께 삼각 다이내믹스로 작용한 당대 국왕, 선조의 이슈가 매우 민감한데 겉으로는 나타난 자료만으로 선조의 본심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날조된 역사도 없지않단 얘기다. 더욱이 선조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미묘한 인물임에랴.
▲김산호 화백이 그린 충정공 영정. © 김삼
원균은 김산호 화백이 고증을 거쳐 그려낸 상상도인 영정을 보면 짐작하지만 힘이 세고 장부답게 생겼다. 외양이나 저돌적 성격이 꼭 삼국지의 장비 스타일이다. 장비는 유머감각이나마 있었는데 원균은 그것마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가하면 이순신은 지략/덕성을 겸한 관우 스타일이 아닐까. 아니면 [유비+제갈공명]형이랄까.
그런데도 그가 '역적', '졸장'이란 일각의 주장은 그의 경력에 따라붙은 심상찮은 족적 때문이다. 예컨대 무과시험 때 아버지 원준량의 도움으로 부정을 한 흔적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또 선조실록에 따르면 어느 지방 수령으로 있다가 평이 나빠 파면됐고 파면 반년만에 전라좌수사 임명을 받았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재차 파면됐다.
순신 같은 지장이 아닌 용장이라는 지적도 맞다. 자신의 용맹만을 믿은나머지 만용을 부린 흔적이 적지않다. 그리고 순신과 달리 부하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지혜가 머리에 몰려있기보다 온몸에 퍼진 쪽이었다. 졸장부라는 평판은 아마도 순신에 대한 질시 탓인 듯하다. 질투심에 물들어 동료 장군을 폄하/폄훼/참소할만큼 자주 용렬했다. 그렇지만도 그것이 균의 애국심 자체를 결하진 않는다. 순신이 애국자라면 균도 애국자로 봐줘야 공평하다. 게다가 난중일기에 보면 균에 대한 순신의 불평불만과 적개심도 만만치 않다. 순신도 별다름없는 감정의 사람이었단 얘기다.
원균은 북쪽 오랑캐 토벌에 공이 커 승진이 빨랐다. 어려서부터 날랬다는데 만년엔 너무 비둔했던 모양이다. 혈기방장한 성격상 술과 고기를 즐기지 않았나 싶다.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해 삼도 수군이 몰살당한 끝에 고성 추원포 부근 바닷가 야산으로 도주했다가 일본 수군 분대에 목을 잘렸다. 이 패배엔 물론 일군의 간계를 파악하지 못한 조정의 어이없고 무리한 출정 강압도 작용했다. 원균으로선 패배가 너무도 뻔한 전투였다. 살 것이라곤 그의 용맹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이순신과의 관계에 관한 자세한 사료는 http://www.njaro.pe.kr 등을 참조하면 된다. 좋은 자료들이 많으니 여기서 군더더기로 되풀지 않으련다. 다만 몇가지를 꼭 언급한다면..원균의 집안은 명문 무가였다. 그의 선대는 고려태조 당시 통합삼한 공신의 한사람인 병부령 원극유로부터 줄줄이 고위급 무관들이었다. 따라서 군맥/인맥의 뿌리가 깊었다. 그 점에서 순신과는 판이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선조가 총애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선전관/선산만호/부령부사 등을 거쳐 경상우수사가 된 그해 4월 일본함대가 대거 몰려왔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됐을 당시 원균은 전함 단 네 척만 갖고 맞싸울 수가 없어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했는데 당시 이장군은 수군의 한계가 있다며 조정의 교지를 기다리다 5월4일께야 비로소 출전한다.
원균은 이순신의 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직접 적과의 교전에 나서 적선 10여척을 불사르고 빼앗는다. 그의 용맹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5월6일 드디어 이장군이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직접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거제 앞바다에 모여 7일 새벽 옥포 앞바다에 진 친 일본 함대를 공격, 대승한다.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임진란 당시 남해안의 승리가 대부분 이순신이 지휘한 전라좌수영 수군들의 공적 중심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은 이순신/이억기/원균 휘하 3군 합동작전이었다. 원균의 전함은 소수였지만 선봉에서 싸웠다.
원균은 을미년(1595년) 겨울엔 충청병사, 이듬해인 병신년(96년) 가을엔 전라병사로 임명됐는데 선조가 말 한필을 하사하면서 말했다. "경이 나라를 위해 애쓰는 충용 정신의 예는 고금에 비길 데 없어 짐이 일찍부터 가상히 여겨왔으나 아직 이렇다할 보답을 못하던 터인데 이제 멀리 떠나게 됨에 친히 전송코자 했으나 마침 심기가 불편한 탓에 뜻대로 못했노라."
자료에 따르면, 선조는 늘 원균에 대해 한구석 애틋한 마음을 지녔던 듯하다. 원균은 선조의 하사품인 이 말을 끔찍이 아꼈나보다. 전사한 원균의 유품을 갖고 천리길을 마다않고 단숨에 고향으로 달려왔다는 전설의 애마였다. 지금도 원균의 무덤 가까이 '애마총'이라는 말 무덤이 있다.
정유년(1597)년 기요마사가 재차 출전하면서 유키나가가 보낸 일본 간자 요시라가 경상우수사 김응서에게 와서 고니키가 가토를 미워하는 터에 가토가 쳐들어오니 바다 가운데서 지키고 있으면 생포할수 있다고 거짓 간언을 한다.
▲평택시 도일동에 있는 원균 장군의 묘역. 부인과 합장됐다. © 김삼
김응서가 이 말을 올리자 조정은 그 말을 믿고 위유사(慰諭使: 국란이 있을 때 위로를 맡은 임시벼슬) 황신을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은밀히 알리고 출전케 했지만 이순신은 적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출전을 거부한다. 이처럼 지략에 있어선 이순신이 늘 몇수 위였다. 그러나 조정은 불같이 대로해 이순신을 투옥해버리고 원균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원균이 오매불망하던 바였지만 그 결과는 재앙과 자멸이었다! 지혜가 몸에 퍼진 그에겐 애시당초 어울리지 않는 벼락벼슬이었다.
결국 울며겨자먹기로 이순신이 되맡긴 했지만 그도 노량대전을 최후의 승전으로 장식한 뒤 장렬하게 순직한다. 결국 선조의 조정은 국력으로 나라를 지키려기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그럴듯한 직함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셈이다. 일부 장군들이 죽은 뒤 내려진 '선무공신교서'란 것도 직접 나가 싸운 무신들보다는 선조 곁에서 아양 떨던 문신들에게 주로 돌아간 걸 보면 알량한 선심이다.
맺음글
이상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선 원균이나 이순신이나 '고놈이 고놈' 아닌가 싶다. "아니 '고놈'이라니 어디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그런 말을?" 할지 모르나 예수님 앞에선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신자들의 십자가 대군의 대장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완벽완전하시고 겁없고 담대하신 사령관, 승전왕이시다. 이순신/원균도 갔고 선조도 가고 다 갔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선 우리들 속에 살아계시다. 이순신이 불멸이라는데 물론 불멸은 불멸이다. 인간 영혼은 사멸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몸도 마지막날 심판의 부활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예수 크리스토는 불멸이실 뿐 아니라 불변이시다. 이순신도 원균도 시시때때로 썩고 부패한 변질변화하는 인생들이었지만 주님은 늘 변함 없으시다.
요컨대..'불멸의 성웅' 이순신을 숭배하지 말자. 불변의 성자 예수님을 경배하자! 아멘.
2005/06/09 [21:59] ⓒ 뉴스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