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30여년간 그리고 당대엔 우리네 교통 활로였는데... 아쉽지만 청계천이 그대로 재현 된다니 다시 명물로 나설것이네유~
<<<사진: 아듀! 청계고가도로>>>
1일 서울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청계고가도로의 통행이 전면 금지됐다. 청계고가는 건설된 지 32년 만에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1977년 이후 복개 구조물로 덮여 있던 청계천은 2005년 9월이면 냇물이 흐르는 생태공간으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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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역사 ~
심지어는 아이도 버리고 주워오는(?) 곳, 청계천은 어떤 곳이었을까. 청계천은 서울의 하수도였다. 조선 6백년간 도성의 백성들은 버리고 싶은 것들은 모두 퍼담아 청계천에 버렸다. 굳이 청계천에 버리지 않았어도 수채 구멍을 통한 물은 모이고 모여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가뭄이 되면 쌓인 쓰레기와 배설물의 냄새가 도성을 진동시키고 홍수가 나면 범람하여 쓰레기를 돌려주던 곳.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1910년대. 그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이었을 따름이다. 태어나면서 저주받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근원부터 탁한 샘물은 어디 있으랴. 청계천도 상류에는 분명이름만큼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박태원의소설 ‘천변풍경’이그려내는 빨래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변의 세상은 두 종류로나뉘었다. 석축위의 세상과 아래의 세상. 석축위로는 가마를 탄 아씨가 지나가도 석축 아래 빨래터에는내일 아씨가 입을 저고리를 빨아야 하는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저고리가 깨끗해지는 만큼 물은 탁해졌다. 석축 아래로는 쓰레기가 쌓였고 거지, 땅꾼들이 모여들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보다 가리는 것이 더 쉬웠을까. 난마(亂麻)같은 하수관 위에 첩첩이 쌓이는 건물들을 정비해서 하수처리장을 만들고 청계천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하기에는 도시의 역량은 부족하기만 했으리라.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된 복개공사는 19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빨래터도 묻혔고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였다는 수표교(水標橋)는 장충공원으로 옮겨졌다. 제일 넓던 다리,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은 장난감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조흥은행 본점 모서리에 쪼그리고 있다. 덮인 청계천 위로는 고가도로까지 마련되었다. 그 위로는 두 발로는 올라갈 수 없고 네 바퀴로만 올라갈 수 있다.
청계고가도로는 3·1빌딩과 함께 이 땅의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둘이 다정히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은 외국에 나갈 홍보책자에 반드시 끼어 들었다. 3·1빌딩과 똑같이 생긴 건물을 미국에서 보았다고 수군거려도 못들은 체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신나게 자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을 흉내냄은 이 땅에서 길이요, 진리가 아니었던가.
청계고가도로는 야심이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자동차를 타고 바람처럼 도시를 질주한다는 도시고속도로는 가슴 벅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심으로 자동차를 불러들이는 것이 마약임은 깨닫지 못했다. 도시의 주위를 순환하는 고속도로는 필요해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위험하기만 한 발상이다. 과연, 흉내는 냈는데 효과는 달랐다. 폭은 좁았고 오르내리는 경사는 급했다. 몽롱한 마약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밀려드는 자동차가 도로를 메웠다. 장안 최고의 추물이니 어서 허물어야 한다는 성토도 쉬지 않고 불거져 나왔다. 해결이 아니고 문제가 되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정글의 논리로 엮여지던 청계천. 가진 자는 옳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르다. 그 역사는 수많은 젊음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를 요구했다. 청년 전태일이 스물두 살 젊기만한 몸을 태워 밝히려던 바로 그 어두움의 현장이 이 곳이다. 과거를 잊자는 듯 평화시장은 밖에 하얀 패널을 붙이는 화장을 했다. 얼굴에종기와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면 내장을 청소해야하건만 더 짙게 화장을 하기만 했다. 건물의 표피보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담아내는 인생이다. 무려 6백m 길이의 건물을 한가지 패널로 감쌌으니 건물은 깨끗해지기보다 무표정해졌다. 거리는 밝아지지 않고 오히려 답답해졌다. 시장안은아직도 어둡기만 하다.
어느 도시에나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다. 그 밝음과 어두움의 편차가 클수록 사회의 갈등은 커진다. 어두운 거리는 가리는 것이 아니고 밝혀야 한다. 청계천은 우리 사회의 음지가 얼마나 밝고 어두운지를 읽어주는 조도계(照度計)다.[서현의 「우리거리」읽기]중에서. <구경꾼 펌>
<rnrudRns 꽁쥐>오우! 옛날이여~ 저기 고가를 얼마나 내달렸던가...새벽에도 야밤에도 대낮에도..
대한민국 서울 청계 고가도여~ Adieu~~~~~~!
드디어~ 7월1일 대한민국의 역사의 한 획을 다시 긋는다!
서울 한복판에 실내천이 흐르는 날 (2005년 9월 1일)을 기약 하면서~
그래도 30여년간 그리고 당대엔 우리네 교통 활로였는데... 아쉽지만 청계천이 그대로 재현 된다니 다시 명물로 나설것이네유~
<<<사진: 아듀! 청계고가도로>>>
1일 서울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청계고가도로의 통행이 전면 금지됐다. 청계고가는 건설된 지 32년 만에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1977년 이후 복개 구조물로 덮여 있던 청계천은 2005년 9월이면 냇물이 흐르는 생태공간으로 되살아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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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역사 ~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1910년대. 그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이었을 따름이다. 태어나면서 저주받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근원부터 탁한 샘물은 어디 있으랴. 청계천도 상류에는 분명이름만큼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박태원의소설 ‘천변풍경’이그려내는 빨래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변의 세상은 두 종류로나뉘었다. 석축위의 세상과 아래의 세상. 석축위로는 가마를 탄 아씨가 지나가도 석축 아래 빨래터에는내일 아씨가 입을 저고리를 빨아야 하는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저고리가 깨끗해지는 만큼 물은 탁해졌다. 석축 아래로는 쓰레기가 쌓였고 거지, 땅꾼들이 모여들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보다 가리는 것이 더 쉬웠을까. 난마(亂麻)같은 하수관 위에 첩첩이 쌓이는 건물들을 정비해서 하수처리장을 만들고 청계천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하기에는 도시의 역량은 부족하기만 했으리라.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된 복개공사는 19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빨래터도 묻혔고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였다는 수표교(水標橋)는 장충공원으로 옮겨졌다. 제일 넓던 다리,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은 장난감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조흥은행 본점 모서리에 쪼그리고 있다. 덮인 청계천 위로는 고가도로까지 마련되었다. 그 위로는 두 발로는 올라갈 수 없고 네 바퀴로만 올라갈 수 있다.
청계고가도로는 야심이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자동차를 타고 바람처럼 도시를 질주한다는 도시고속도로는 가슴 벅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심으로 자동차를 불러들이는 것이 마약임은 깨닫지 못했다. 도시의 주위를 순환하는 고속도로는 필요해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위험하기만 한 발상이다. 과연, 흉내는 냈는데 효과는 달랐다. 폭은 좁았고 오르내리는 경사는 급했다. 몽롱한 마약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밀려드는 자동차가 도로를 메웠다. 장안 최고의 추물이니 어서 허물어야 한다는 성토도 쉬지 않고 불거져 나왔다. 해결이 아니고 문제가 되었다.
어느 도시에나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다. 그 밝음과 어두움의 편차가 클수록 사회의 갈등은 커진다. 어두운 거리는 가리는 것이 아니고 밝혀야 한다. 청계천은 우리 사회의 음지가 얼마나 밝고 어두운지를 읽어주는 조도계(照度計)다.[서현의 「우리거리」읽기]중에서. <구경꾼 펌>
<rnrudRns 꽁쥐>오우! 옛날이여~ 저기 고가를 얼마나 내달렸던가...새벽에도 야밤에도 대낮에도..
40대 불혹을 여기서 매일 보냈었지~너저분한 주변 옥상들이 눈에 가시였지...
구경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