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8>

사나토스200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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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기는 힘들겠구만 그래."
"날 죽일 셈인가?"
"설마..... 어찌 경찰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더군다나 당신이 여기 온 것을 다 알고 있을텐데."
"어쩔 셈이지?"
"우선 나랑 술을 먹어야지."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달려든 사내들에 의해 고형사는 두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우선 술 한잔 하고 자네가 나한테 총을 들이댄 것으로 하지. 그런 다음 나의 충실한 경호원들이 나의 안전을 위해 자네를 쏘고 말이야."
"머리가 좋지 않군 그래. 경찰서에는 이미 당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 어차피 당신은 빠져나가지 못해. 이젠 경관살인죄까지 적용되겠군.... 사형인데 그래......."
"머리가 나쁜 것은 너야. 지금쯤 김형사 그 친구가 그 증거들을 가지고 이리로 올 거라구."

 

고형사는 무언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뭐? 김...... 형사가?"
"자네같은 사람들한테 일억이면 꽤 큰 돈이지. 나한텐 껌값이지만 형사 하나 수족으로 만들기엔 충분하더군."
"이런...... 더러운 자식."
"요즘 어떤 미친놈이 인사들을 죽이고 다니더구만. 얼마 전에 강간비디오 만들다가 죽은 놈 기억나나? 그 친구도 내 말 참 잘 들었는데......"
"그럼....."
"맞아. 그 사업도 내가 하던 것이지. 이젠 힘들게 되었지만 말야."
"하하하하."
"죽을 생각을 하니 허탈한가?"
"그 반대다."
"............."
"이제 곧 네 놈의 목도 떨어질테니까."
"뭐야?"
"잘 알텐데. 그자가 틀림없이 네 목을 가져갈거다. 단 칼에 말야."
"그럼 너 먼저 가서 기다리면 되겠군 그래."

 

고형사의 말에 주위의 부하들을 스윽 둘러본 황필승은 흐믓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가볍게 턱짓을 하자 부하 하나가 양주병을 따면서 다가왔다.
고형사는 세차게 반항하였으나 두 팔이 이미 붙잡힌 상태에서 아무리 힘을 써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는 양주병을 박았다.
고형사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독한 술이 목으로 흘러들어갔다.
혀로 술병의 입구를 막으면 그들은 고형사의 배를 가격하면서 술병이 다 빌 때까지 쏟아 부었다.
지옥같은 시간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다섯병째의 양주가 빈병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고형사를 풀어주었다.
세게 몸부림을 치느라 입술이 술병에 짓이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빨 하나도 부러졌다.
고형사는 정신을 가다듬고 이곳에서 살아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려 했지만 눈 앞의 모든 것이 회전하면서 그의 생각조차 방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서 총을 뽑아. 그리고 날 쏘라구."

 

하지만 그는 총을 꺼내지 않았다.
그 순간이 자신이 죽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의 남자만큼은 죽이고 싶은 생각에 총이 있는 쪽으로 손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서 어떤 사내가 자신의 머리 위에 술을 부어대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피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겨우 총을 꺼낸 고형사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고형사가 쓰러지자 황필승 그자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거...... 형사가 술을 먹고 뻗었구만. 무고한 시민을 죽이려고 총까지 빼들고 말이야."
"하하하하"

 

부하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고 황필승은 정색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그만 치워라."

 

그 말이 떨어지자 부하중 한 명이 권총을 꺼내고는 고형사의 몸을 가슴이 보이도록 뒤집은 다음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심장에 총알이 박히면 그들의 계획대로 술취한 형사가 총을 들고 난입하다가 경호원들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수사는 김형사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검은 물체가 황필승의 앞에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물체는 바닥에 닿자마자 몸을 일으켰는데 검은 옷차림의 건장한 사내가 얼굴에는 검은 두건을 쓴 채 서 있었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던 황필승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소리쳤다.

 

"너, 너, 넌..... "

 

황필승도 그의 부하들도 갑자기 뛰어든 괴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부하들은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한 마음을 뒤로 하며 괴한에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괴한은 빛처럼 빠른 동작으로 등에 멘 칼을 뽑으며 그대로 황필승의 목에서 멈추었다.

 

"모두 가만있어!"

 

황필승의 입에서 먼저 다급하게 나온 말이었다.
황필승은 이 자가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면하고 이 단두대라는 자를 이 자리에서 잡을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자신은 먼저 죽은 자들보단 한 수 위라는 자부심을 억지로 새기며 방법을 생각했지만 심장이 미치도록 놀라는 비명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황필승의 부하들을 뒤로 한 채 황필승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그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거 뜻밖의 수확이군 그래..."
"무슨 뜻이지?"
"저 녀석들은 단순히 경호원인줄 알았다. 헌데 그게 아니군."
"원하는게 뭔가?"
"여기서 전부 사형에 처한다."

 

이 말을 하며 몸을 낮춘 그는 먼저 황필승의 한 쪽 발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발목이 잘려나간 그는 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몸을 날려 부하들의 뒤쪽으로 착지한 단두대의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단두대가 바로 옆에 내려앉자 총을 꺼낸 자는 보이지도 않는 칼에 손목을 잘리고 바로 심장이 관통당하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맞은 편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겨냥했지만 그는 바로 다른 부하의 몸을 돌아가며 목을 따고 다시 총을 겨누고 있는 자에게 달려들어 손목을 절단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다른 이들은 감히 총을 꺼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방금 손목을 잘린 자의 등에 칼을 박으며 단두대가 조용히 말했다.

 

"총을 꺼내라."

 

총을 꺼내지 말라는 말보다 더 강압적이었다. 하지만 총을 꺼내는 순간이 자신들의 목숨이 끝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단두대가 방심했던 일이 벌어졌다.

 

"움직이지 마."

 

황필승이 피가 쏟아지는 발목을 부여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한손으로 고형사의 총을 들고 고형사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헉헉... 이자를..... 헉헉...... 죽일.... 셈인가?"
"상관없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황필승이 단두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미리 예측한 단두대는 몸을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총알을 피했고 바로 황필승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가 떨어졌고 머리를 잃은 몸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머지 부하들은 온 몸이 공포로 떨리며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놈은 바지에 오줌까지 흘리고 있었다.

 

"다신 이런 일에 끼여들지 마라."

 

이 말을 남기며 단두대는 베란다 창을 열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유리창 틈으로 안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김형사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꼭 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두대는 황필승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황필승의 집에 숨어들기 전 근처 놀이터에서 수풀 사이에 옷을 숨겨 놓았었다.
서둘러 땅을 파던 그는 살기를 느끼고 고개를 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이 떨어질 뻔 한 것이다.
아래로 내려진 칼날이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날아오자 그는 몸을 굴려 겨우 피했지만 허벅지를 살짝 베이고 말았다.

 

"실력은 여전하군."

 

방금 칼을 휘두른 자가 자세를 다시 잡으며 말했다.

 

"당신 혼자인가?"

 

단두대가 천천히 일어서며 묻자 상대방은 음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오보로. 지금은 때가 아니다. 돌아가다오."
"그럴수 없다는 거 잘 알텐데. 히루카. 아니, 전태성. 여기서는 단두대라고 하더군 그래."
"내 한국이름까지 알고 있었나?"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너같은 조선놈을 받아들인 것 부터가 그분의 실수였다."
"그분께선 잘 계신가?"
"훗. 지금 네놈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계시지. 네 목만 가져가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굵어진 빗방울은 두사람의 시야를 방해하기 시작했지만 두사람이 내뿜고 있는 뜨거운 살기는 식히지 못했다.
오보로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한국에 돌아온 것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 들어온 이상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나?"
"난 처음부터 야쿠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왜 그분을 찾아간 거지?"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오보로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원하는 것을 얻었군 그래."
"............"
"이미 죽은 여자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니...... 그분도 실망할 것이다."
"시간을 다오. 내 발로 스스로 그 분 앞에 나타나 벌을 받겠다."
"그럼, 넌 죽을텐데."
"각오하고 있다."

 

단두대는 칼을 서서히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눈에서 살기를 지우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냥 보내다오."

 

하지만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기엔 넌 너무 많은 짓을 저질렀다. 방금 전에도 금기를 어겼잖는가."
"금기......."
"조직에선 널 최고의 실력자로 키웠다. 그 실력을 다른 일에 사용할 경우 그것이 곧 배신이라는 것을 잊었는가?"
"목숨으로 사죄하겠다."
"너무 늦었다. 히루카. 널 처리하기 위해 청소부가 이곳에 와있다. 난 그 분의 부탁으로 너의 목을 직접 가져다 드리기 위해 온 것이다."

 

한참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던 단두대는 다시 눈에 살기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하는 수 없군."
"덤벼라. 그 분의 제자답게 죽도록 해 주겠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둘의 몸이 가까워졌을 때 무수한 칼 부딪히는 소리가 허공을 메우며 그들의 칼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상대방의 몸을 찢기 위해 움직였다.
둘이 다시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을 때 둘 다 몸의 이곳 저곳에 작은 상처들이 무수히 나 있었다.
오보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새 실력이 많이 늘었군."
"이렇게 된 이상 싫지만 널 죽이겠다. 용서해 다오."
"후후. 널 용서한다. 죽어라."

 

이렇게 말하며 오보로가 먼저 몸을 날렸다.
그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단두대는 뒤로 몸을 날리며 칼을 피했다.
공격이 빗나간 오보로가 몸을 회전시키며 휘둘렀던 칼을 그대로 한 보 앞으로 전진하면서 다시 휘둘렀다.
하지만 다시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그때 위로 피했던 단두대가 기합을 넣으며 칼을 아래로 그었다.
예상한 오보로가 몸을 두로 빼며 칼을 세워 막았지만 자신의 눈 사이로 무언가가 번쩍 하며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땅에 내려선 단두대가 칼을 집어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분께서 주신 '성도'다. 이 칼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너의 실수다. 잘가라."

 

그 말을 들었는지 오보로의 눈이 뒤집어지더니 이내 미간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단두대는 다시 땅을 파서 옷을 꺼내 입고는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오보로가 쓰러져 있는 곳에 네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세명은 덩치가 큰 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키의 남자였다.
그들은 세찬 빗줄기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 있는 시체 주변을 빙 둘러 서 있었다.
그가 지팡이로 오보로의 시체를 툭툭 건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계시군. 그래......"

 

부하로 보이는 사내중 한 명이 대답했다.

 

"아마 이번 일로 조직 내에서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우린 너무 약한 주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부하의 말에 심기가 틀렸는지 작은 남자가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들고있던 지팡이로 방금 말한 부하의 머리를 후려쳤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
"죄송합니다."

 

부하는 머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른 부하가 말했다.

 

"방금 저쪽에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곧 경찰이 올 겁니다."
"칼을 챙겨라. 어째든 그 녀석도 곧 죽겠군 그래. 녀석의 죽음을 확인하는 대로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때, 머리를 얻어맞은 부하가 부러진 칼날을 주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처리해."

 

사내들은 곧 사라졌고 혼자 남은 시체는 빗속에서도 노란색의 진한 연기를 뿜어대며 녹아들고 있었다.
그들이 뿌린 화약약품에 의해 오보로의 시체는 녹아들면서 놀이터 주변 하수구로 빗물과 함께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은 경찰이 순찰차를 타고 왔지만 욕지거리를 하며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날이 밝아올 때까지 비는 세차게 쏟아졌다.

 

 


한국 이름으로 전태성이라 불린 그는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며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전태성..... 전태성........"

 

그러면서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잠시 행복한 추억에 젖던 그는 그녀의 처참한 모습이 떠오르자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으깨버리고 말았다.
유리파편이 손에 박혀 피가 흘렀다.
그 피를 보면서 그는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떠오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의 영상을 떨쳐버리기 위해 주먹에 힘을 주자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순간, 무슨 생각이 퍼뜩 난 그는 자신의 상처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냄새도 맡아보았다.
그리곤 절망감에 휩싸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타이머가 작동되었군. 오보로...... 넌 언제나 비겁했어. 가는 길도 그렇군. 하지만 난 아직 죽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는 황필승 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고형사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의사는 술을 너무 마신 것 외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어깨의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이틀만에 깨어난 그의 눈에 처음 보이는 사람은 연숙이었다.

 

"어, 살아있었군요."
"음......"

 

위세척을 하는 바람에 정신이 들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쓰렸다.
감각이 돌아오자 목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바람에 인상을 구기자 그걸 알아챘는지 연숙이 물을 건네주었다.

 

"깨어나면 물을 먹이라고 했어요. 자...."

 

연숙은 고형사가 몸을 일으키도록 도와주며 입가에 물잔을 갖다 댔다.
물을 두어모금 삼킨 고형사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삭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요."
"죽다가 살아났죠 뭐. 왠 술을 그렇게 마셔요."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에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튀어나와서는 황필승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을 보았었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누가 날 데려왔습니까?"

 

고형사가 묻자 연숙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요."
"어디서 말이요."
"어디긴요. 황필승 그사람 집에서 데리고 왔죠. 거기서 술 먹었잖아요."
"그럼..... 김기자가 거기 왔단 말입니까?"
"김순경 언니가 거기 가셨다고 하길레 얼른 가봤죠. 그랬더니..... 김형사님 아니었으면 거기 들어가지도 못했을 거에요. 그런 시체 첨 봤어요."

 

그때, 김형사가 손에 음료수를 들고 들어왔다.
그걸 본 고형사는 눈이 번뜩였고 김형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고형사는 한숨을 쉬며 연숙에게 말했다.

 

"자리를 좀 비켜주시오."
"어머? 생명의 은인한테 이래도 돼요? 전 기자란 말예요."
"그러니까 비켜달라는 거요."

 

연숙은 김형사와 고형사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입을 쭉 내밀며 나가버렸다.

 

"어떻게 된 건가?"

 

고형사가 눈을 번뜩이며 묻자 김형사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그자들이 선배님을 헤칠거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날 헤칠 계획을 알았으면 돈을 안 받았을 거라는 얘긴가?"
"황필승 그자가 이미 선배님하고도 다 얘기를 했으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묻어라."
"네?"
"받은 돈은 아무 고아원에 갖다 주고 없었던 일로 해. 단, 지켜보겠다."
".........."

 

김형사의 눈빛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자신이 먼저 매수되었다는 얘길 듣고 일억을 건네받았다면 사람인 이상 거절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그는 일억이라는 돈에 흔들일 수 밖에 없었던 김형사의 아니, 형사들의 현실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그는 김형사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조용히 일어나서는 문을 확 열어제꼈다.
문 앞에는 눈을 휘둥그레 뜬 연숙이 한 쪽 귀를 아직 치우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어..... 어..... 저기......."

 

그걸 본 김형사는 죽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인생 종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형사는 바로 퇴원했다.
아직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만류가 있었지만 살인자가 말짱하게 돌아다니고 있고 얼마전에 한국에 들어온 야쿠자들이 찾고 있다는 자가 그 범인이라면 편하게 병원에서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에서 바로 나온 그는 김형사와 연숙을 데리고 근처 커피숍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김형사의 문제 때문이다.
고형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봐, 김기자."
"네, 말씀하세요."

 

이젠 둘 다 이 자그마한 여자에게 약점을 잡히고 만 꼴이 되었다.
김형사는 지금은 뉘우치고 있지만 뇌물을 받았었고 그것 때문에 동료 형사가 목숨을 잃을 뻔 한데다가 고형사는 그의 부정을 눈감아주려는 것을 들켜 버렸으니 이 일이 신문에 나는 날에는 범인을 잡기도 전에 뱃지를 반납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하시라니까요."

 

연숙의 눈빛을 본 김형사는 간담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건 고형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그마한 여자의 커다란 눈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큰 쥐를 보고 있는 고양이의 그것과도 같아 보였다.

 

"약속하겠소."
"뭘요?"
"이 사건에 대해 김기자한테만 알려주기로."
"또 속일려구요?"
"아니오. 그럴 필요가 이젠 없어졌잖소."

 

고형사의 얼굴을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려가며 바라보는 연숙의 얼굴이 그의 눈에는 영낙없이 독 오른 고양이로 보였다.

 

"정말 저한테만 알려주신다 이거죠?"
"신세진 것도 있으니 내 꼭 그렇게 하겠소."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저도 아까 들은 얘기는 없던 걸로 하죠 뭐."

 

연숙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고형사는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상대는 기자다.
이런 엄청난 기사거리를 그냥 포기할 리는 없을 것이다.

 

"대신....."

 

올것이 왔다 하는 생각이 들며 고형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연숙은 엄청난 요구를 하고 말았다.

 

"언제나 절 데리고 다니세요. 그럼 사건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안그래요?"

 

그 말에 고형사가 무서운 눈으로 김형사를 쏘아보았고 김형사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한 팀이 되었으니까 아직 말 안한 것 있으면 전부 말해봐요. 네?"

 

고형사는 더 참지 못하고 김형사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갈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