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호의 집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평범한 한옥집이었는데 작고 깔끔한 마당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고 주변으로 경호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감시의 눈길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고형사는 집 안으로 안내되는 동안 그들의 눈빛을 눈여겨 보았다. 같은 실수를 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되었지만 이 집의 주인도 황필승처럼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으니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정식 훈련을 받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고형사를 반기는 그의 얼굴은 한 번쯤은 형사가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고형사와 일행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연숙을 알아보고는 환한 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기사 잘 봤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숙은 황송한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기자들에 대한 나이든 정치인들의 연출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신참입니다. 녹음기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형사를 살짝 흘겨보았지만 무시당했다.
"하하하하. 이거 큰일이구만 아직 대사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박충호가 써억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지만 고형사는 계속 무서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황필승의 집에서도 단두대는 철통같아 보이던 감시망을 뚫고 그의 집에 미리 숨어 있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 갑자기 나타났었다.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이 자 또한 그의 리스트에 올라있다면 벌써 미리 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두 자리에 앉자 안에서 젊은 여자가 쟁반에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났다. 다들 그 여자를 주시하자 박충호가 말했다.
"제 여식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성희 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그녀는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충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고형사는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려..."
담배를 꺼내 문 박충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영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형사는 아직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온 국민이 그 단두대라는 자를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중 아닙니까?"
이 말을 하며 그는 연숙을 바라보았다. 연숙의 기사가 아니였으면 단두대라 불리는 자는 그저 고위공직자를 노리는 단순 살인범으로 끝났을 것이었다.
"어쨌든 법을 어겼습니다." "그건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긴 살면서 한 두 번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건 의원님도 마찬가지신가 보군요."
고형사의 당찬 질문에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진 않았다.
"저희들이 찾아 온 이유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한 번 말씀을 해 보시오." "범인이 살해한 자들은 전부 좋지 않은 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분명 아직 더 살인을 저지를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 고형사님의 말씀은 다음 살해대상이 나란 말이군요. 나에게도 좋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의원은 계속 웃으며 말했지만 고형사는 정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해 주시면 적어도 그 자의 방문을 피할 수 있을겁니다." "하긴.... 황필승 그 자도 집에 있던 경호원들까지 당했더군요. 저도 나름대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역부족이겠지요?" "그가 찾아올거라 믿고 계시는군요." "그렇소. 언젠가는......"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내 임기가 끝나는 날 분명 고형사님을 다시 찾아뵙겠소.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오." "솔직하시군요." "이제 무얼 숨기겠소. 그저 남은 임기동안에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하고 싶은 생각뿐이오."
그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고형사는 그의 눈을 보며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이 곳에 경찰병력을 배치해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신 마음 아닙니까?" "세간의 주목을 받으실 텐데요." "고형사가 범인을 최대한 빨리 잡아주시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소. 고형사야 범인을 잡기 위해 그러는 것일테니 나라의 녹을 받는 내가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럼 한시간 안으로 잠복을 시키겠습니다." "저기.... 고형사....."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있소."
박충호 의원은 고형사에게 단 둘이서만 얘기할 것을 요구했다. 고형사는 연숙과 김형사를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였고 박충호 의원도 거실 안에 있던 경호원들을 잠시 내보냈다.
"이제 말씀하시죠."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
그는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목숨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어차피 난 얼마 살지 못할테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형사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내 주치의가 말하길 앞으로 6개월을 넘기기 힘들거라 했소. 골수암이라고 하더구만. 수술따위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국민에게 봉사하다 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근데 저 녀석이 아빠를 지키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경호원들을 불렀습니다. 저 녀석은 운동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말을 해도 고집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님께선 범인이 왜 찾아올거라 생각하십니까?" "내 과거 때문이오. 많은 사람이 나의 잘못으로 죽음을 당했지요." "저희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만일 그자가 나타나서 날 죽인다면 그 비밀도 알려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고생만 시킨 마누라와 자식들에게 누가 됩니다. 저녀석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른 식구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7년 전 난 어떤 여인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협박이요?"
그가 말한 내용은 추한 과거를 고백한다기 보다는 지난 잘못에 대한 참회를 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 국회에 진출하기 전에 교수를 역임하던 대학에서 미모의 학생과 해서는 안 될 애정행각을 벌이고 만 것이다. 그 여자는 아이를 지우기로 하고 그가 준 돈을 들고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날,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여 이름을 알리고 있을 때 그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자신의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있으며 그동안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10억이었고 만일 그 돈을 내놓지 않으면 그동안 숨겨진 자식에 대해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을 하자 하는 수 없이 그는 돈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정한 돈을 만진 적이 없는 그에게 그만한 돈은 없었다. 그러는 차에 한 건설업체로부터 10억이 넘는 돈을 넘겨 받게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서울 외곽의 다리건설에 대한 공사권이 그 회사로 넘어가도록 힘을 쓰게 되었고 아무 문제 없이 그녀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4년 뒤 그 다리 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난 것이다. 공사업체에서 그에게 준 뇌물에 대한 마이너스를 충당하기 위해 부실공사를 한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 사실을 참회하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반성하고 봉사하며 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에게 단두대라는 인물은 염라대왕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밀로 해 줄수 있겠냐는 물음에 고형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만일 내가 죽은 다음 공개된다면 고형사가 내 가족들에게 미리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사람들을 피해 외국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난 그렇게 되리라 생각지 못했어요...... 어쨌든 죄 없는 가족에게만은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저 녀석이 그 여자가 낳은 내 자식이오. 제발 설득해서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시오."
말을 마친 그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가짜로 흘릴 수 있는 눈물로 보이지 않았다.
고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김형사가 차에 시동을 걸어 놓은 채 고형사에게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얼른 다가간 고형사가 물었다.
"이번엔 누구야?"
또 단두대가 움직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순서를 잘못 정한 것이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연숙이 전혀 다른 얘기를 해주었다.
"그게 아니구요. 지금 단두대를 잡았대요." "무슨 소리야?"
고형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김형사가 대답했다.
"지금 쌍칼이 데리고 있답니다."
김형사는 이제까지 이렇게 속력을 내며 도심 속으로 차를 몰아본 적이 없었다. 시속 100키로가 넘는 속도로 달리다가 앞차를 추월하기를 계속 반복하며 비상등까지 켜고 달렸다. 고형사가 빨리 가라고 계속 채근하자 김형사는 온 신경을 운전대에 집중했다. 얼마전 황필승에게 속아 돈을 받은 일 이후로 계속 기가 죽어 지내고 있는데 자신이 늦게 도착해서 그자를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일고 있는 중이다.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지만 엑셀을 계속 힘있게 밟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동안 쌍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고형사님. 왜 그렇게 전화를 안받습니까." "누굴 좀 만나고 있었다. 그래, 정말 잡았어?" "남성근 의원 아시죠? 그의 집 주변에서 서성거리길레 수상해서 무조건 잡았죠. 품에서 긴 일본도가 나왔습니다." "어디야?" "지금 술창고에 가둬 놨습니다. 아직 손 안댔으니까 빨리 오십쇼."
거의 다 왔을 때 쌍칼의 부하들이 차 문을 열어주며 인사까지 했다. 고형사는 연숙에게 차 안에서 대기하라고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쌍칼이 운영하는 주류상이 이용하는 술창고는 그의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변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안은 대낮처럼 불을 켜 놓고 있었다. 쌍칼이 다가오며 활짝 웃었다.
"하하하하. 제가 잡았습니다."
쌍칼의 가리키는 쪽을 보니 그의 부하들이 주욱 둘러서있고 그 가운데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고형사는 그에게 바로 다가갔다. 의자에 묶여 있는 그를 바라보던 고형사는 쌍칼을 불렀다.
"이봐, 이 사람 왜 데려왔어?" "예?"
고형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그가 바로 달려왔다.
"이자 아닙니까?" "아니야."
지하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똑똑히 보았다. 지금 고형사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복장은 황필승의 집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본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쌍칼이 손짓을 하자 부하 하나가 남자의 머리칼을 세게 움켜 쥐며 고개를 들고는 입에 붙여놓은 테잎을 떼어냈다. 고형사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야쿠자인가?"
이렇게 물은 이유는 고형사의 머릿속에 일본에서 왔다는 형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발음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한국엔 왜 왔나?"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을 하며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을 내렸다. 묶여 있던 줄은 어느새 잘렸는지 바닥으로 떨어졌고 주위에 있던 쌍칼의 부하들이 놀라는 새에 그는 벌써 쌍칼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고형사가 놀라며 뒤돌아서자 이미 쌍칼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쌍칼은 그의 주먹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부하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그자는 칼을 뽑아 쌍칼의 목에 겨누면서 말했다.
"죽인다." "머, 멈춰."
부하들 중 부두목 격으로 보이는 자가 얼른 나서며 소리쳤다.
"너, 이새끼....... 형님 다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훗..... 그래도 한국의 깡패들은 의리는 있나보군." "안돼."
김형사가 뒤에서 안주머니로 손을 넣는 것을 본 고형사가 소리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훗..... 만일 저 자가 총을 꺼냈다면 그 전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김형사는 황필승의 집에서 본 장면들이 떠오르자 금새 등줄기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형사가 좀 더 다가서며 말했다.
"그 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 내가 시킨 일이야. 우리 우선 얘기를 하자." "좋다."
그는 주위에 많은 적을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칼을 집어넣더니 등에 멨다. 언제라도 원한다면 전원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쌍칼은 어느새 기어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왜 일부러 잡힌거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그럼 이런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당신을 감시하고 있는 눈이 많다. 난 그들 앞에 나서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지?" "오보로 라는 자를 아나?" "..........." "그가 당신한테 말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고향사는 어째서 오보로가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안보이고 있는지 궁금해었던 참이다. 하지만 죽었다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죽였나?" "당신들이 말하는 단두대라는 자가 죽였다."
고형사는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오보로가 말했던 야쿠자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자는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도데체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국에 들어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단두대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건 무슨 소리지?" "오보로는 경찰이지만 우리가 오래전에 심어놓은 조직원이다. 그가 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 그자를 잡았었다. 하지만 결투 끝에 지고 말았다." "단두대가 심한 상처를 받았나?" "오보로라는 자는 독을 사용한다. 그의 실력이라면 작은 상처 하나쯤은 남았을 것이다." "..........." "다 내보내라."
고형사는 이 자와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쌍칼을 쳐다보며 나가라는 눈짓을 했고 쌍칼도 이 자의 실력을 아는지라 바로 부하들과 함께 물러갔다. 그리고 김형사와 연숙도 함께 나갔다. 단 둘만 남게 되자 그자는 고형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형사가 먼저 다가가려 했으나 그자가 문쪽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있었다. 아마 방금 나간 사람들 중 몇 명은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을테니까.
"내 이름은 테슈." "내 이름은 알고 있겠군." "고동우 형사. 당신을 믿고 부탁을 하러 왔다." "무슨 부탁인가?" "그 단두대라는 자를 꼭 데려가야 한다." "그럼 그는 야쿠자인가?" "지금은 아니다."
고형사는 일본 경시청에서 죽었다며 유품까지 보내온 이인겸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모든 얘기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가 야쿠자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가장하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누나의 복수를 했고 그와 더불어 죄를 짓고도 버젓이 살아가는 고위공직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복수에 불타는 그라면 가능한 얘기였다. 그리고 다른 야쿠자들이 그를 다시 데리고 가려 한다는 얘기도 타당성이 있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자는 오보로가 말했던 야쿠자들의 눈을 피해 자신을 만나려고 이런 연극을 꾸몄다고 하고 있다. 자신을 테슈라고 밝인 이 자도 그 야쿠자의 한 명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 다음말에 고형사는 머리속이 다시 엉키고 말았다.
단두대 <10>
박충호의 집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평범한 한옥집이었는데 작고 깔끔한 마당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고 주변으로 경호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감시의 눈길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고형사는 집 안으로 안내되는 동안 그들의 눈빛을 눈여겨 보았다.
같은 실수를 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되었지만 이 집의 주인도 황필승처럼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으니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정식 훈련을 받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고형사를 반기는 그의 얼굴은 한 번쯤은 형사가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고형사와 일행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연숙을 알아보고는 환한 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기사 잘 봤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숙은 황송한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기자들에 대한 나이든 정치인들의 연출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신참입니다. 녹음기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형사를 살짝 흘겨보았지만 무시당했다.
"하하하하. 이거 큰일이구만 아직 대사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박충호가 써억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지만 고형사는 계속 무서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황필승의 집에서도 단두대는 철통같아 보이던 감시망을 뚫고 그의 집에 미리 숨어 있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 갑자기 나타났었다.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이 자 또한 그의 리스트에 올라있다면 벌써 미리 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두 자리에 앉자 안에서 젊은 여자가 쟁반에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났다.
다들 그 여자를 주시하자 박충호가 말했다.
"제 여식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성희 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그녀는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충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고형사는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려..."
담배를 꺼내 문 박충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영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형사는 아직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온 국민이 그 단두대라는 자를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중 아닙니까?"
이 말을 하며 그는 연숙을 바라보았다. 연숙의 기사가 아니였으면 단두대라 불리는 자는 그저 고위공직자를 노리는 단순 살인범으로 끝났을 것이었다.
"어쨌든 법을 어겼습니다."
"그건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긴 살면서 한 두 번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건 의원님도 마찬가지신가 보군요."
고형사의 당찬 질문에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진 않았다.
"저희들이 찾아 온 이유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한 번 말씀을 해 보시오."
"범인이 살해한 자들은 전부 좋지 않은 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분명 아직 더 살인을 저지를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 고형사님의 말씀은 다음 살해대상이 나란 말이군요. 나에게도 좋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의원은 계속 웃으며 말했지만 고형사는 정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해 주시면 적어도 그 자의 방문을 피할 수 있을겁니다."
"하긴.... 황필승 그 자도 집에 있던 경호원들까지 당했더군요. 저도 나름대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역부족이겠지요?"
"그가 찾아올거라 믿고 계시는군요."
"그렇소. 언젠가는......"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내 임기가 끝나는 날 분명 고형사님을 다시 찾아뵙겠소.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오."
"솔직하시군요."
"이제 무얼 숨기겠소. 그저 남은 임기동안에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하고 싶은 생각뿐이오."
그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고형사는 그의 눈을 보며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이 곳에 경찰병력을 배치해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신 마음 아닙니까?"
"세간의 주목을 받으실 텐데요."
"고형사가 범인을 최대한 빨리 잡아주시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소. 고형사야 범인을 잡기 위해 그러는 것일테니 나라의 녹을 받는 내가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럼 한시간 안으로 잠복을 시키겠습니다."
"저기.... 고형사....."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있소."
박충호 의원은 고형사에게 단 둘이서만 얘기할 것을 요구했다.
고형사는 연숙과 김형사를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였고 박충호 의원도 거실 안에 있던 경호원들을 잠시 내보냈다.
"이제 말씀하시죠."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
그는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목숨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어차피 난 얼마 살지 못할테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형사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내 주치의가 말하길 앞으로 6개월을 넘기기 힘들거라 했소. 골수암이라고 하더구만. 수술따위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국민에게 봉사하다 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근데 저 녀석이 아빠를 지키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경호원들을 불렀습니다. 저 녀석은 운동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말을 해도 고집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님께선 범인이 왜 찾아올거라 생각하십니까?"
"내 과거 때문이오. 많은 사람이 나의 잘못으로 죽음을 당했지요."
"저희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만일 그자가 나타나서 날 죽인다면 그 비밀도 알려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고생만 시킨 마누라와 자식들에게 누가 됩니다. 저녀석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른 식구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7년 전 난 어떤 여인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협박이요?"
그가 말한 내용은 추한 과거를 고백한다기 보다는 지난 잘못에 대한 참회를 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 국회에 진출하기 전에 교수를 역임하던 대학에서 미모의 학생과 해서는 안 될 애정행각을 벌이고 만 것이다. 그 여자는 아이를 지우기로 하고 그가 준 돈을 들고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날,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여 이름을 알리고 있을 때 그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자신의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있으며 그동안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10억이었고 만일 그 돈을 내놓지 않으면 그동안 숨겨진 자식에 대해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을 하자 하는 수 없이 그는 돈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정한 돈을 만진 적이 없는 그에게 그만한 돈은 없었다.
그러는 차에 한 건설업체로부터 10억이 넘는 돈을 넘겨 받게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서울 외곽의 다리건설에 대한 공사권이 그 회사로 넘어가도록 힘을 쓰게 되었고 아무 문제 없이 그녀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4년 뒤 그 다리 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난 것이다.
공사업체에서 그에게 준 뇌물에 대한 마이너스를 충당하기 위해 부실공사를 한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 사실을 참회하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반성하고 봉사하며 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에게 단두대라는 인물은 염라대왕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밀로 해 줄수 있겠냐는 물음에 고형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만일 내가 죽은 다음 공개된다면 고형사가 내 가족들에게 미리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사람들을 피해 외국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난 그렇게 되리라 생각지 못했어요...... 어쨌든 죄 없는 가족에게만은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저 녀석이 그 여자가 낳은 내 자식이오. 제발 설득해서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시오."
말을 마친 그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가짜로 흘릴 수 있는 눈물로 보이지 않았다.
고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김형사가 차에 시동을 걸어 놓은 채 고형사에게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얼른 다가간 고형사가 물었다.
"이번엔 누구야?"
또 단두대가 움직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순서를 잘못 정한 것이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연숙이 전혀 다른 얘기를 해주었다.
"그게 아니구요. 지금 단두대를 잡았대요."
"무슨 소리야?"
고형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김형사가 대답했다.
"지금 쌍칼이 데리고 있답니다."
김형사는 이제까지 이렇게 속력을 내며 도심 속으로 차를 몰아본 적이 없었다.
시속 100키로가 넘는 속도로 달리다가 앞차를 추월하기를 계속 반복하며 비상등까지 켜고 달렸다.
고형사가 빨리 가라고 계속 채근하자 김형사는 온 신경을 운전대에 집중했다.
얼마전 황필승에게 속아 돈을 받은 일 이후로 계속 기가 죽어 지내고 있는데 자신이 늦게 도착해서 그자를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일고 있는 중이다.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지만 엑셀을 계속 힘있게 밟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동안 쌍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고형사님. 왜 그렇게 전화를 안받습니까."
"누굴 좀 만나고 있었다. 그래, 정말 잡았어?"
"남성근 의원 아시죠? 그의 집 주변에서 서성거리길레 수상해서 무조건 잡았죠. 품에서 긴 일본도가 나왔습니다."
"어디야?"
"지금 술창고에 가둬 놨습니다. 아직 손 안댔으니까 빨리 오십쇼."
거의 다 왔을 때 쌍칼의 부하들이 차 문을 열어주며 인사까지 했다.
고형사는 연숙에게 차 안에서 대기하라고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쌍칼이 운영하는 주류상이 이용하는 술창고는 그의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변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안은 대낮처럼 불을 켜 놓고 있었다.
쌍칼이 다가오며 활짝 웃었다.
"하하하하. 제가 잡았습니다."
쌍칼의 가리키는 쪽을 보니 그의 부하들이 주욱 둘러서있고 그 가운데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고형사는 그에게 바로 다가갔다.
의자에 묶여 있는 그를 바라보던 고형사는 쌍칼을 불렀다.
"이봐, 이 사람 왜 데려왔어?"
"예?"
고형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그가 바로 달려왔다.
"이자 아닙니까?"
"아니야."
지하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똑똑히 보았다.
지금 고형사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복장은 황필승의 집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본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쌍칼이 손짓을 하자 부하 하나가 남자의 머리칼을 세게 움켜 쥐며 고개를 들고는 입에 붙여놓은 테잎을 떼어냈다.
고형사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야쿠자인가?"
이렇게 물은 이유는 고형사의 머릿속에 일본에서 왔다는 형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발음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한국엔 왜 왔나?"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을 하며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을 내렸다.
묶여 있던 줄은 어느새 잘렸는지 바닥으로 떨어졌고 주위에 있던 쌍칼의 부하들이 놀라는 새에 그는 벌써 쌍칼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고형사가 놀라며 뒤돌아서자 이미 쌍칼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쌍칼은 그의 주먹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부하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그자는 칼을 뽑아 쌍칼의 목에 겨누면서 말했다.
"죽인다."
"머, 멈춰."
부하들 중 부두목 격으로 보이는 자가 얼른 나서며 소리쳤다.
"너, 이새끼....... 형님 다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훗..... 그래도 한국의 깡패들은 의리는 있나보군."
"안돼."
김형사가 뒤에서 안주머니로 손을 넣는 것을 본 고형사가 소리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훗..... 만일 저 자가 총을 꺼냈다면 그 전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김형사는 황필승의 집에서 본 장면들이 떠오르자 금새 등줄기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형사가 좀 더 다가서며 말했다.
"그 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 내가 시킨 일이야. 우리 우선 얘기를 하자."
"좋다."
그는 주위에 많은 적을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칼을 집어넣더니 등에 멨다.
언제라도 원한다면 전원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쌍칼은 어느새 기어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왜 일부러 잡힌거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그럼 이런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당신을 감시하고 있는 눈이 많다. 난 그들 앞에 나서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지?"
"오보로 라는 자를 아나?"
"..........."
"그가 당신한테 말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고향사는 어째서 오보로가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안보이고 있는지 궁금해었던 참이다.
하지만 죽었다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죽였나?"
"당신들이 말하는 단두대라는 자가 죽였다."
고형사는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오보로가 말했던 야쿠자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자는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도데체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국에 들어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단두대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건 무슨 소리지?"
"오보로는 경찰이지만 우리가 오래전에 심어놓은 조직원이다. 그가 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 그자를 잡았었다. 하지만 결투 끝에 지고 말았다."
"단두대가 심한 상처를 받았나?"
"오보로라는 자는 독을 사용한다. 그의 실력이라면 작은 상처 하나쯤은 남았을 것이다."
"..........."
"다 내보내라."
고형사는 이 자와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쌍칼을 쳐다보며 나가라는 눈짓을 했고 쌍칼도 이 자의 실력을 아는지라 바로 부하들과 함께 물러갔다.
그리고 김형사와 연숙도 함께 나갔다.
단 둘만 남게 되자 그자는 고형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형사가 먼저 다가가려 했으나 그자가 문쪽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있었다.
아마 방금 나간 사람들 중 몇 명은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을테니까.
"내 이름은 테슈."
"내 이름은 알고 있겠군."
"고동우 형사. 당신을 믿고 부탁을 하러 왔다."
"무슨 부탁인가?"
"그 단두대라는 자를 꼭 데려가야 한다."
"그럼 그는 야쿠자인가?"
"지금은 아니다."
고형사는 일본 경시청에서 죽었다며 유품까지 보내온 이인겸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모든 얘기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가 야쿠자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가장하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누나의 복수를 했고 그와 더불어 죄를 짓고도 버젓이 살아가는 고위공직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복수에 불타는 그라면 가능한 얘기였다.
그리고 다른 야쿠자들이 그를 다시 데리고 가려 한다는 얘기도 타당성이 있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자는 오보로가 말했던 야쿠자들의 눈을 피해 자신을 만나려고 이런 연극을 꾸몄다고 하고 있다.
자신을 테슈라고 밝인 이 자도 그 야쿠자의 한 명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 다음말에 고형사는 머리속이 다시 엉키고 말았다.
"그리고 내 한국 이름은 이인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