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호사스런 집이었다. 거실 안을 둘러보던 고형사는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 놓고 살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집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은 주변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에서 날라왔는지 상당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쇼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 다가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단정한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작은 명함을 내밀었다.
"전 남의원님의 비서입니다." "강력계 고동웁니다."
자신을 밝히던 고형사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하는 말이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뱉는 말인데 오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마치 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상대방이 그런 그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먼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나요?" "남의원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시죠?" "확인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연쇄살인범 때문이십니까?" "네."
고형사의 거침없는 대답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원님과는 상관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째서죠?" "그간 살해된 사람들이 어떤 과거가 있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불쾌하군요."
비서라는 여자는 얼굴에 정말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저희 의원님께서 그 살인자가 노릴만한 이유라도 있다는 겁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수사를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하고 계시군요. 고동우 형사님."
비서는 고형사에게 마치 당신의 신분을 알고 말하라는 듯 했다. 하지만 고형사는 계속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뭘 말이죠?" "옛날에 저수지 댐이 붕괴되면서 그 밑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하나가 사라져 버린 사건 말입니다." "근데요?"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 "그 댐의 공사를 담당했던 건설회사의 책임자급 직원들이 사장을 포함해서 상당수 사법처리 되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근데......."
말을 꺼내기 전에 고형사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원래 공사계획표와 다른 서류가 발견되었었죠." "............" "나중에 발견된 서류와 원래의 서류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이때, 그녀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고형사는 그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사에 들어간 돈이 상당량 차이가 났습니다. 기록상에는 공사에 들어갔어야 할 돈이 실제 공사에는 쓰이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갔죠. 아마 그래서 그런 말도 안되는 사고가 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그 돈의 행방을 끝내 알아내지는 못했죠. 아니 알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말이죠. 아니, 어쩌면 그때 조사를 담당한 검사가 그렇게 수사를 마무리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리고 그때 조사를 지휘하던 검사가 바로 얼마 전에 죽은 강기호 검사입니다. 아주 처참하게 죽었죠." "이것 보세요." "그리고 그때 남의원님께서는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외국으로 한달씩이나 출장을 다녀오셨더군요. 가족과 함께 말입니다." "고동우 형사님!"
여자는 벌떡 일어서며 한 손을 옆으로 들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주세요. 그리고 오늘 하신 말씀에 대한 책임을 물으셔야 할 겁니다. 근거도 없이 추측만으로 현직 국회의원을 모함하는 말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요." "제가 지금 나가면 남의원님은 위험합니다. 그러기를 바라십니까?" "도데체 무슨........"
고형사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전 남의원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거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범인을 잡고 싶을 뿐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에 좀 뭐하지만 전 지금 범인과 담판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만일 남의원님이 살해당한다면 절대 그자를 잡을 수 없습니다. 범인이 노리는 목표는 남의원님이 마지막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고형사가 나갈 방향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며 정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그렇다고 보시죠? 근거가 있나요?"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느낌이죠. 하지만 범인이 원하던 목표가 90프로 이상 달성된 상황에서 그자가 살인을 또 저지른다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전 그것을 막고자 하는 겁니다." "범인이 원하는 목표라뇨?" "국민의 여론입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정부와 고위공직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악용하며 국민들을 속이려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죠." "............" "이제 남의원님께서 어디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범인이 이번엔 저희 의원님을 노릴 거라고 보십니까?" "그건 당신도 염려하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 말에 여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가며 표정이 확 풀렸다.
"정말 범인만 잡고 다른 얘기는........" "앞으로 남의원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따라 다르겠죠. 당신이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손을 거치지 않습니까?" "........."
이제서야 그녀의 눈에 후회의 빛이 역력했다. 고형사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정도의 큰 돈을 삼키는데 비서의 재빠른 행동과 상황판단이 없으면 금방 들키고 말테니까. 그녀도 김덕중의 경호실장과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 절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약속은 못합니다. 하지만 제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을겁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지금 의원님께서는 이 집 지하실에 계십니다."
고형사는 놀랐다. 남의원 그 자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을테니 당연히 단두대라는 저승사자가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발표되는 뉴스가 그 두려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더군다나 같이 부정을 도모했었던 강검사의 죽음 이후로는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지하실에 들어가신지 꽤 오래되셨군요." "아니, 어떻게 아셨죠?"
강검사는 두 번재 피살자다. 댐공사의 뒷일을 처리해 준 강검사가 피살되었을 때 아마 남의원은 그때부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단두대 그 자도 알고 있었을텐데 왜 남의원을 아직 죽이지 않았을까...... 그 궁금증은 방금 비서의 대답으로 밝혀졌다. 아무도 모르게 지하실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지금 뵐 수 있습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비서는 전화기를 꺼내들더니 단축번호를 눌렀다. 작은 소리로 몇마디 하던 그녀는 전화기를 닫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당신한테 말을 해야겠군요." "아직 말씀하실 것이 남았나요?" "오늘 분명 단두대가 나타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냥 느낌입니다. 어쨌든 전 여기서 기다릴 겁니다. 그가 나타날 때 까지요." "좋아요. 그럼 몇 명이나....."
비서는 아무래도 만만의 준비를 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고형사는 다른 말을 했다.
"저 혼자 지킬 겁니다." "예? 혼자서요? 범인은 무서운 실력을 가진 살인마 아닌가요?" "벌써 한바탕 했었습니다." "그를 잡을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실은 저 밖에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범인이 이쪽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 무장병력은 배치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그 말을 들은 비서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의원님을 미끼로 삼으시려는 거군요." "그렇게 되나요?" "꼭 저희 의원님을 선택하셔야 했나요?" "그자는 분명 남의원을 노립니다." "느낌이시라 그건가요? 그럼 전 다른 사람이 죽기를 바래야 겠군요."
이 말을 던진 그녀는 사람을 부르더니 고형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주라는 지시를 했다. 고형사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꺼냈다.
"나야." "네. 형님. 만나셨습니까?" "아니." "에? 그럼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그자는 지금 지하실에 숨어서 살고 있다고 하는구만."
그 말을 들은 쌍칼은 전화기가 찢어지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국회의원도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구만요. 카하하하하." "근데 데리고 온 애들은 믿을만한 실력인가?" "전부 외부에서 온 실력자들입니다. 녀석들 모으느라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그럼, 자네 부하들이 아냐?" "알고 지내던 조직..... 아니, 사장들한테 부탁해서 데리고 온 베테랑들이죠." "이봐, 쌍칼."
고형사가 갑자기 무거운 목소리로 부르자 쌍칼은 얼른 웃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쩌면 사상자가 나올지도 몰라." "난 또... 뭐라도. 어차피 한 번 죽는거 폼나게 죽는 것도 좋죠." "그럼 안심이고." "근데, 여기서 그냥 기다리면 됩니까?"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 자넨 밖에서 대기해. 만일 그가 나타나면 절대 잡아선 안돼."
이건 또 뭔소린가...
"그럼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내가 먼저 손을 쓰고 도망갈 때 잡아야 해." "그러다가 그 국회의원 죽으면요?" "내가 안에 있는다니까."
잠시 후에 쌍칼은 부하를 시켜 먹을 것을 잔뜩 사왔다. 아직은 날이 밝으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술생각이 간절했지만 오늘만큼은 참기로 했다. 어쩌면 그 사상자가 자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태성은 밤이 되자 옷을 갈아입었다. 고형사를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오늘 그는 남성근 의원을 죽일 계획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이려고 했지만 도데체 어디로 잠적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오늘 고형사가 남의원을 만나러 간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의 집에서 바로 자신을 기다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태성은 하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고형사를 만나 직접 부탁을 하고 싶었다. 남의원을 죽이는 현장에서 자신을 쏘아달아고.. 고형사의 손에 의해 깨끗한 죽음을 맞고 싶었다. 인겸이 건네 준 해독제는 그냥 자신이 당한 독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었다. 단전에 힘을 모으지 못하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그 약 또한 독이어서 그에 맞는 해독제를 먹지 않는 한 자신의 몸은 일반인 보다 훨씬 약한 몸이 되고 만다. 슬슬 약기운이 퍼지고 있으니 앞으로 이틀만 지나면 자신이 혹독한 훈련과 동료의 목에 칼을 꽂으며 키워온 힘이 사라질 것이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의 쓰레기를 더 처리하고 그 동안 형사라는 굴레로 자신을 잡기 위해 고생한 고형사의 손에 죽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형사가 바로 남의원의 집을 지키기 시작한 이상 마냥 기다릴 수 만은 없기에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한 태성은 얼굴에 두건을 썼다. 다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단두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작은 봉투를 올려놓았다. 자신이 고형사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과 인겸에게 꼭 전해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함께 담긴 봉투였다. 어떻게 해서든 남의원을 지옥으로 보내고 나면 자신은 고형사의 총알을 피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런 결심을 하며 일어서는데 어디선가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추악한 살심이 아니면 나오지 않을 듯한 냄새였다. 태성은 그 살기의 주인공이 자신이 숨어 있는 아파트 앞에서 멈추자 숨을 죽였다. 청소부가 벌써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찾아 온 것일까......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고 누군가 발을 천천히 들여놨다. 이미 뒷굼치를 들고 움직이는 발소리였다. 여차 하는 순간에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태성은 아무런 소리 없이 그 불청객 앞으로 다가서며 바로 칼을 꽂았다. 하지만.... 상대는 피할 겨를이 없었는지 급하게 자신의 손으로 태성의 칼을 부여잡았다. 칼 끝으로 여린 떨림이 전해왔지만 태성은 바로 칼을 빼내며 자세를 취했다.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한 이상 상대방의 공격에 우선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두 번째의 공격을 기다리는 법이다. 상대는 자신의 손을 한 번 쓰윽 보더니 혀로 핧으며 말했다.
"이런. 이렇게 운이 좋은 날도 있구만 그래. 이 곳에 네가 있다니 말야." "청소하러 왔나?" "청소부니까. 근데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냐. 오히려 잘 됐지만 말야." "아직 멀었군. 내 냄새를 맡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청소부라 할 수 있는가?"
태성이 비꼬는 말투로 말하자 사내는 방어자세를 풀며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이 자가 드러내는 허연 이빨이 잘 보였다.
"난 너에게 볼일이 없다." "고동우 그 사람을 죽이러 왔나?" "그렇다." "왜지? 너희는 배신자만 처리하는 조직 아닌가?" "예외가 생겼다." "무슨?" "고동우라는 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흔적을 없애야 한다." "그럼 테슈도 죽이겠군." "그건 우리 권한 밖이다. 특별한 친구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그 형사는 죽여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한 태성은 바로 공격자세를 취했다.
"그 형사를 보호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왜지?" "난 그자의 손에 죽어야 한다." "훗~ 웃기는군. 너한테도 방해가 될텐데......." "그자의 손에 의해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은 조용히 끝날 것이다." "그건 네 생각이지."
그 자는 이렇게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태성에게 던졌다. 태성은 이미 알고 있는 듯 그 주머니를 받지 않고 몸을 엎드려 피했다. 뒤로 날아간 주머니는 벽에 부딪히는 순간 퍽 하고 터지며 액체를 사방에 뿌렸다. 그 액체가 닿은 곳은 누런 연기를 뿜으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시 하나의 주머니를 꺼내들고 던지려 했지만 그보다 태성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태성은 빠르게 다가가 그의 주머니가 들린 손을 통째로 절단하고는 다시 자세를 낮추며 발목을 잘랐다.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지만 태성은 안심하지 않고 바로 사내의 목을 내리쳤다.
'스칵!'
날을 세우지 않은 채 오래 사용한 칼은 무디어지는 법. 칼은 평소와는 다른 소리를 내며 사내의 목을 땅에 떨어뜨렸다. 태성은 잘라진 손에 들려있는 주머니를 들고는 방금 바닥에 구른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작은 주머니는 머리에 닿자 작은 소리를 내며 터졌고 흘러나온 액체로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머리를 녹이기 시작했다. 누런 연기가 다시 한 번 방 안을 채웠고 역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태성은 지체하지 않고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좌우를 살핀 그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비상계단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날다시피 뛰어 내려가며 그는 자신에 몸에 남아있는 힘을 가늠했다. 80 퍼센트.....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떨어지겠지만 아직 마지막 일을 할 수는 일을 것이다. 마지막 계단을 한 번에 날아서 내려온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곧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사내 세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작아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이런..... 사라쿠가 실패한 모양이군. 그녀석 말을 들은 것이 실수구만." "그러길레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녀석은 흔적을 처리하는 녀석입니다. 사냥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 히라키.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감사합니다. 조장."
히라키라 불리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허리 뒤쪽에서 팔뚝 길이만한 칼을 양 손으로 뽑았다. 태성은 이 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청소부 중에 두자루의 칼로 상대가 아직 살아있을 때 두 눈을 뽑아낸다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태성은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다행히 세 놈이 한 번에 덤벼들지 않고 한 놈이 먼저 나섰다. 놈이 그걸 후회하기 전에 처치한다면 그 다음에는 두 놈을 상대하면 된다. 한 번에 세 놈을 상대하기란 아무리 혹독한 수련을 거친 그라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단 일 합에 상대의 목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에 태성은 숨을 고르게 하면서 냉정을 끌어올렸다. 상대의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해 태성은 앞으로 발을 내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히라키가 칼을 앞으로 교차되게 하면서 달려들었다. 태성은 흠짓했다. 상대의 동작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채챙!"
세 개의 칼날이 부딪히면서 둘 다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다. 히라키가 칼을 빙글 돌려 역으로 잡으며 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칼이구나. 내 특기인 '단명' 앞에선 어떤 칼이라도 부러지는데." "이건 그 분께서 주신 칼이다." "하지만 또 다시 내 기술을 받으면 부러질 것이다." "그 전에 네 목을 따겠다."
이번엔 태성이 자세를 바꾸며 먼저 뛰어들었다. 히라키의 바로 앞에서 도약을 하며 그의 뒤로 떨어진 그가 몸을 회전시키며 칼을 휘둘렀으나 그 자 또한 미리 예상한 공격이었으므로 바로 몸을 돌려 자신의 칼을 교차시키며 막았다. 그리고는 두 자루의 칼을 미끄러뜨려 손잡이 부분까지 태성의 칼날쪽으로 밀어넣고는 기합을 넣었다.
"헙!" "스챙!"
태성은 상대가 그 기술을 쓸 것을 예상하고 칼을 빼면서 몸을 뒤로 굴렸다. 몸을 굴리면서 아까부터 봐온 밤톨만한 돌맹이를 보이지 않도록 집어든 그는 한 쪽 무릎을 굽힌 채로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피해!"
조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나머지 한 명의 눈에도 그것은 돌맹이가 아닌 태성을 죽이려다 오히려 당한 자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태성은 바로 돌을 히라키를 향해 던졌고 그는 칼로 막으려던 자세를 풀고 바로 옆으로 몸을 굴리며 날아오는 물체로부터 최대한 멀리 피했다. 그때 돌을 던지며 히라키의 발을 유심히 관찰하던 태성은 돌이 손에서 떠나는 것과 동시에 예상한 쪽으로 같이 몸을 굴렸다.
"스컥!"
히라키보다 조금 먼저 자세를 잡은 태성은 바로 히라키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히라키의 몸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려다 목이 잘리는 바람에 태성이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태성은 한 손으로 히라키의 몸을 잡고는 나머지 둘이 있는 쪽으로 힘껏 던졌다. 그 때를 노려 나머지 둘에게 달려든 그는 상대방이 대비를 하기 전에 바로 공격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성은 급하게 몸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조장이라 불리운 사내가 한 손으로 목 없이 날라온 부하의 시체를 가볍게 쳐냈기 때문이다. 태성은 조장이라 불리운 사내가 다른 자들에 비해 작은 몸집을 하고 있기에 그 쪽으로 시체를 던진 것인데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바로 몸을 뒤로 빼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 앞에 무엇인가 날라들었다. 순간적으로 피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왼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파바박"
날라온 십자 수리검 세 개가 태성의 팔뚝 안쪽에 박히며 뜨거운 느낌을 전했다. 그리고 오보로와 싸운 후에 받은 상처에서 느꼈던 이상한 냄새도 풍겼다. 훨씬 진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태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태성은 다시 날라올지도 모르는 수리검을 경계하며 팔을 휘둘러 박힌 수리검들을 떨쳐냈다. 상처가 더욱 커지며 뜨거운 느낌을 배가시켰지만 태성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걸 보던 조장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단두대 <14>
상당히 호사스런 집이었다.
거실 안을 둘러보던 고형사는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 놓고 살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집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은 주변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에서 날라왔는지 상당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쇼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 다가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단정한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작은 명함을 내밀었다.
"전 남의원님의 비서입니다."
"강력계 고동웁니다."
자신을 밝히던 고형사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하는 말이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뱉는 말인데 오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마치 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상대방이 그런 그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먼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나요?"
"남의원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시죠?"
"확인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연쇄살인범 때문이십니까?"
"네."
고형사의 거침없는 대답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원님과는 상관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째서죠?"
"그간 살해된 사람들이 어떤 과거가 있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불쾌하군요."
비서라는 여자는 얼굴에 정말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저희 의원님께서 그 살인자가 노릴만한 이유라도 있다는 겁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수사를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하고 계시군요. 고동우 형사님."
비서는 고형사에게 마치 당신의 신분을 알고 말하라는 듯 했다.
하지만 고형사는 계속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뭘 말이죠?"
"옛날에 저수지 댐이 붕괴되면서 그 밑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하나가 사라져 버린 사건 말입니다."
"근데요?"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
"그 댐의 공사를 담당했던 건설회사의 책임자급 직원들이 사장을 포함해서 상당수 사법처리 되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근데......."
말을 꺼내기 전에 고형사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원래 공사계획표와 다른 서류가 발견되었었죠."
"............"
"나중에 발견된 서류와 원래의 서류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이때, 그녀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고형사는 그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사에 들어간 돈이 상당량 차이가 났습니다. 기록상에는 공사에 들어갔어야 할 돈이 실제 공사에는 쓰이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갔죠. 아마 그래서 그런 말도 안되는 사고가 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그 돈의 행방을 끝내 알아내지는 못했죠. 아니 알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말이죠. 아니, 어쩌면 그때 조사를 담당한 검사가 그렇게 수사를 마무리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리고 그때 조사를 지휘하던 검사가 바로 얼마 전에 죽은 강기호 검사입니다. 아주 처참하게 죽었죠."
"이것 보세요."
"그리고 그때 남의원님께서는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외국으로 한달씩이나 출장을 다녀오셨더군요. 가족과 함께 말입니다."
"고동우 형사님!"
여자는 벌떡 일어서며 한 손을 옆으로 들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주세요. 그리고 오늘 하신 말씀에 대한 책임을 물으셔야 할 겁니다. 근거도 없이 추측만으로 현직 국회의원을 모함하는 말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요."
"제가 지금 나가면 남의원님은 위험합니다. 그러기를 바라십니까?"
"도데체 무슨........"
고형사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전 남의원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거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범인을 잡고 싶을 뿐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에 좀 뭐하지만 전 지금 범인과 담판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만일 남의원님이 살해당한다면 절대 그자를 잡을 수 없습니다. 범인이 노리는 목표는 남의원님이 마지막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고형사가 나갈 방향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며 정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그렇다고 보시죠? 근거가 있나요?"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느낌이죠. 하지만 범인이 원하던 목표가 90프로 이상 달성된 상황에서 그자가 살인을 또 저지른다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전 그것을 막고자 하는 겁니다."
"범인이 원하는 목표라뇨?"
"국민의 여론입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정부와 고위공직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악용하며 국민들을 속이려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죠."
"............"
"이제 남의원님께서 어디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범인이 이번엔 저희 의원님을 노릴 거라고 보십니까?"
"그건 당신도 염려하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 말에 여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가며 표정이 확 풀렸다.
"정말 범인만 잡고 다른 얘기는........"
"앞으로 남의원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따라 다르겠죠. 당신이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손을 거치지 않습니까?"
"........."
이제서야 그녀의 눈에 후회의 빛이 역력했다.
고형사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정도의 큰 돈을 삼키는데 비서의 재빠른 행동과 상황판단이 없으면 금방 들키고 말테니까.
그녀도 김덕중의 경호실장과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 절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약속은 못합니다. 하지만 제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을겁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지금 의원님께서는 이 집 지하실에 계십니다."
고형사는 놀랐다.
남의원 그 자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을테니 당연히 단두대라는 저승사자가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발표되는 뉴스가 그 두려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더군다나 같이 부정을 도모했었던 강검사의 죽음 이후로는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지하실에 들어가신지 꽤 오래되셨군요."
"아니, 어떻게 아셨죠?"
강검사는 두 번재 피살자다.
댐공사의 뒷일을 처리해 준 강검사가 피살되었을 때 아마 남의원은 그때부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단두대 그 자도 알고 있었을텐데 왜 남의원을 아직 죽이지 않았을까......
그 궁금증은 방금 비서의 대답으로 밝혀졌다.
아무도 모르게 지하실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지금 뵐 수 있습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비서는 전화기를 꺼내들더니 단축번호를 눌렀다.
작은 소리로 몇마디 하던 그녀는 전화기를 닫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당신한테 말을 해야겠군요."
"아직 말씀하실 것이 남았나요?"
"오늘 분명 단두대가 나타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냥 느낌입니다. 어쨌든 전 여기서 기다릴 겁니다. 그가 나타날 때 까지요."
"좋아요. 그럼 몇 명이나....."
비서는 아무래도 만만의 준비를 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고형사는 다른 말을 했다.
"저 혼자 지킬 겁니다."
"예? 혼자서요? 범인은 무서운 실력을 가진 살인마 아닌가요?"
"벌써 한바탕 했었습니다."
"그를 잡을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실은 저 밖에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범인이 이쪽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 무장병력은 배치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그 말을 들은 비서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의원님을 미끼로 삼으시려는 거군요."
"그렇게 되나요?"
"꼭 저희 의원님을 선택하셔야 했나요?"
"그자는 분명 남의원을 노립니다."
"느낌이시라 그건가요? 그럼 전 다른 사람이 죽기를 바래야 겠군요."
이 말을 던진 그녀는 사람을 부르더니 고형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주라는 지시를 했다.
고형사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꺼냈다.
"나야."
"네. 형님. 만나셨습니까?"
"아니."
"에? 그럼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그자는 지금 지하실에 숨어서 살고 있다고 하는구만."
그 말을 들은 쌍칼은 전화기가 찢어지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국회의원도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구만요. 카하하하하."
"근데 데리고 온 애들은 믿을만한 실력인가?"
"전부 외부에서 온 실력자들입니다. 녀석들 모으느라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그럼, 자네 부하들이 아냐?"
"알고 지내던 조직..... 아니, 사장들한테 부탁해서 데리고 온 베테랑들이죠."
"이봐, 쌍칼."
고형사가 갑자기 무거운 목소리로 부르자 쌍칼은 얼른 웃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쩌면 사상자가 나올지도 몰라."
"난 또... 뭐라도. 어차피 한 번 죽는거 폼나게 죽는 것도 좋죠."
"그럼 안심이고."
"근데, 여기서 그냥 기다리면 됩니까?"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 자넨 밖에서 대기해. 만일 그가 나타나면 절대 잡아선 안돼."
이건 또 뭔소린가...
"그럼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내가 먼저 손을 쓰고 도망갈 때 잡아야 해."
"그러다가 그 국회의원 죽으면요?"
"내가 안에 있는다니까."
잠시 후에 쌍칼은 부하를 시켜 먹을 것을 잔뜩 사왔다.
아직은 날이 밝으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술생각이 간절했지만 오늘만큼은 참기로 했다.
어쩌면 그 사상자가 자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태성은 밤이 되자 옷을 갈아입었다.
고형사를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오늘 그는 남성근 의원을 죽일 계획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이려고 했지만 도데체 어디로 잠적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오늘 고형사가 남의원을 만나러 간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의 집에서 바로 자신을 기다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태성은 하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고형사를 만나 직접 부탁을 하고 싶었다.
남의원을 죽이는 현장에서 자신을 쏘아달아고..
고형사의 손에 의해 깨끗한 죽음을 맞고 싶었다.
인겸이 건네 준 해독제는 그냥 자신이 당한 독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었다.
단전에 힘을 모으지 못하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그 약 또한 독이어서 그에 맞는 해독제를 먹지 않는 한 자신의 몸은 일반인 보다 훨씬 약한 몸이 되고 만다.
슬슬 약기운이 퍼지고 있으니 앞으로 이틀만 지나면 자신이 혹독한 훈련과 동료의 목에 칼을 꽂으며 키워온 힘이 사라질 것이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의 쓰레기를 더 처리하고 그 동안 형사라는 굴레로 자신을 잡기 위해 고생한 고형사의 손에 죽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형사가 바로 남의원의 집을 지키기 시작한 이상 마냥 기다릴 수 만은 없기에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한 태성은 얼굴에 두건을 썼다.
다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단두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작은 봉투를 올려놓았다.
자신이 고형사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과 인겸에게 꼭 전해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함께 담긴 봉투였다.
어떻게 해서든 남의원을 지옥으로 보내고 나면 자신은 고형사의 총알을 피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런 결심을 하며 일어서는데 어디선가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추악한 살심이 아니면 나오지 않을 듯한 냄새였다.
태성은 그 살기의 주인공이 자신이 숨어 있는 아파트 앞에서 멈추자 숨을 죽였다.
청소부가 벌써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찾아 온 것일까......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고 누군가 발을 천천히 들여놨다.
이미 뒷굼치를 들고 움직이는 발소리였다.
여차 하는 순간에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태성은 아무런 소리 없이 그 불청객 앞으로 다가서며 바로 칼을 꽂았다.
하지만....
상대는 피할 겨를이 없었는지 급하게 자신의 손으로 태성의 칼을 부여잡았다.
칼 끝으로 여린 떨림이 전해왔지만 태성은 바로 칼을 빼내며 자세를 취했다.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한 이상 상대방의 공격에 우선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두 번째의 공격을 기다리는 법이다.
상대는 자신의 손을 한 번 쓰윽 보더니 혀로 핧으며 말했다.
"이런. 이렇게 운이 좋은 날도 있구만 그래. 이 곳에 네가 있다니 말야."
"청소하러 왔나?"
"청소부니까. 근데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냐. 오히려 잘 됐지만 말야."
"아직 멀었군. 내 냄새를 맡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청소부라 할 수 있는가?"
태성이 비꼬는 말투로 말하자 사내는 방어자세를 풀며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이 자가 드러내는 허연 이빨이 잘 보였다.
"난 너에게 볼일이 없다."
"고동우 그 사람을 죽이러 왔나?"
"그렇다."
"왜지? 너희는 배신자만 처리하는 조직 아닌가?"
"예외가 생겼다."
"무슨?"
"고동우라는 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흔적을 없애야 한다."
"그럼 테슈도 죽이겠군."
"그건 우리 권한 밖이다. 특별한 친구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그 형사는 죽여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한 태성은 바로 공격자세를 취했다.
"그 형사를 보호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왜지?"
"난 그자의 손에 죽어야 한다."
"훗~ 웃기는군. 너한테도 방해가 될텐데......."
"그자의 손에 의해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은 조용히 끝날 것이다."
"그건 네 생각이지."
그 자는 이렇게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태성에게 던졌다.
태성은 이미 알고 있는 듯 그 주머니를 받지 않고 몸을 엎드려 피했다.
뒤로 날아간 주머니는 벽에 부딪히는 순간 퍽 하고 터지며 액체를 사방에 뿌렸다.
그 액체가 닿은 곳은 누런 연기를 뿜으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시 하나의 주머니를 꺼내들고 던지려 했지만 그보다 태성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태성은 빠르게 다가가 그의 주머니가 들린 손을 통째로 절단하고는 다시 자세를 낮추며 발목을 잘랐다.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지만 태성은 안심하지 않고 바로 사내의 목을 내리쳤다.
'스칵!'
날을 세우지 않은 채 오래 사용한 칼은 무디어지는 법.
칼은 평소와는 다른 소리를 내며 사내의 목을 땅에 떨어뜨렸다.
태성은 잘라진 손에 들려있는 주머니를 들고는 방금 바닥에 구른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작은 주머니는 머리에 닿자 작은 소리를 내며 터졌고 흘러나온 액체로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머리를 녹이기 시작했다.
누런 연기가 다시 한 번 방 안을 채웠고 역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태성은 지체하지 않고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좌우를 살핀 그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비상계단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날다시피 뛰어 내려가며 그는 자신에 몸에 남아있는 힘을 가늠했다.
80 퍼센트.....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떨어지겠지만 아직 마지막 일을 할 수는 일을 것이다.
마지막 계단을 한 번에 날아서 내려온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곧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사내 세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작아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이런..... 사라쿠가 실패한 모양이군. 그녀석 말을 들은 것이 실수구만."
"그러길레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녀석은 흔적을 처리하는 녀석입니다. 사냥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 히라키.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감사합니다. 조장."
히라키라 불리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허리 뒤쪽에서 팔뚝 길이만한 칼을 양 손으로 뽑았다.
태성은 이 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청소부 중에 두자루의 칼로 상대가 아직 살아있을 때 두 눈을 뽑아낸다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태성은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다행히 세 놈이 한 번에 덤벼들지 않고 한 놈이 먼저 나섰다.
놈이 그걸 후회하기 전에 처치한다면 그 다음에는 두 놈을 상대하면 된다.
한 번에 세 놈을 상대하기란 아무리 혹독한 수련을 거친 그라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단 일 합에 상대의 목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에 태성은 숨을 고르게 하면서 냉정을 끌어올렸다.
상대의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해 태성은 앞으로 발을 내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히라키가 칼을 앞으로 교차되게 하면서 달려들었다.
태성은 흠짓했다.
상대의 동작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채챙!"
세 개의 칼날이 부딪히면서 둘 다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다.
히라키가 칼을 빙글 돌려 역으로 잡으며 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칼이구나. 내 특기인 '단명' 앞에선 어떤 칼이라도 부러지는데."
"이건 그 분께서 주신 칼이다."
"하지만 또 다시 내 기술을 받으면 부러질 것이다."
"그 전에 네 목을 따겠다."
이번엔 태성이 자세를 바꾸며 먼저 뛰어들었다.
히라키의 바로 앞에서 도약을 하며 그의 뒤로 떨어진 그가 몸을 회전시키며 칼을 휘둘렀으나 그 자 또한 미리 예상한 공격이었으므로 바로 몸을 돌려 자신의 칼을 교차시키며 막았다.
그리고는 두 자루의 칼을 미끄러뜨려 손잡이 부분까지 태성의 칼날쪽으로 밀어넣고는 기합을 넣었다.
"헙!"
"스챙!"
태성은 상대가 그 기술을 쓸 것을 예상하고 칼을 빼면서 몸을 뒤로 굴렸다.
몸을 굴리면서 아까부터 봐온 밤톨만한 돌맹이를 보이지 않도록 집어든 그는 한 쪽 무릎을 굽힌 채로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피해!"
조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나머지 한 명의 눈에도 그것은 돌맹이가 아닌 태성을 죽이려다 오히려 당한 자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태성은 바로 돌을 히라키를 향해 던졌고 그는 칼로 막으려던 자세를 풀고 바로 옆으로 몸을 굴리며 날아오는 물체로부터 최대한 멀리 피했다.
그때 돌을 던지며 히라키의 발을 유심히 관찰하던 태성은 돌이 손에서 떠나는 것과 동시에 예상한 쪽으로 같이 몸을 굴렸다.
"스컥!"
히라키보다 조금 먼저 자세를 잡은 태성은 바로 히라키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히라키의 몸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려다 목이 잘리는 바람에 태성이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태성은 한 손으로 히라키의 몸을 잡고는 나머지 둘이 있는 쪽으로 힘껏 던졌다.
그 때를 노려 나머지 둘에게 달려든 그는 상대방이 대비를 하기 전에 바로 공격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성은 급하게 몸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조장이라 불리운 사내가 한 손으로 목 없이 날라온 부하의 시체를 가볍게 쳐냈기 때문이다.
태성은 조장이라 불리운 사내가 다른 자들에 비해 작은 몸집을 하고 있기에 그 쪽으로 시체를 던진 것인데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바로 몸을 뒤로 빼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 앞에 무엇인가 날라들었다.
순간적으로 피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왼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파바박"
날라온 십자 수리검 세 개가 태성의 팔뚝 안쪽에 박히며 뜨거운 느낌을 전했다.
그리고 오보로와 싸운 후에 받은 상처에서 느꼈던 이상한 냄새도 풍겼다.
훨씬 진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태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태성은 다시 날라올지도 모르는 수리검을 경계하며 팔을 휘둘러 박힌 수리검들을 떨쳐냈다.
상처가 더욱 커지며 뜨거운 느낌을 배가시켰지만 태성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걸 보던 조장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