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비 [Ⅰ]-쏴아아아아세호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으로 물 든 하늘에서는 같은 색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 징조를 느꼈을 때 재빨리 대처했어야 했다. 티비 일기예보를 과신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면 어쩌겠는가. 이미 엎어진 물인 것을. 비야 집안에 피해 있으면 그만이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이 썩은 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창문 틈새마다 두꺼운 청 테이프를 얼마나 붙여댔는지 덕지덕지를 넘어서 울퉁불퉁할 정도였다. 세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촘촘한 갈색 빗줄기에 가려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세호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쾅 쾅 쾅.그 사람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호는 여느 때처럼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감쌌다. “지영아.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세호는 벌떡 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고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나흘 째였다. 본격적으로는 이틀쯤이었지만. 그러니까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게 말이다.............그 날도 세호는 수업을 마치고 과 후배들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민속학과라는 과 특성상 남자 동기는 자신을 포함해 셋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한 명은 전과를 했고, 한 명은 휴학 중이었다. 그리고 수많았던 여자 동기들은, 군대를 마치고 1년간 캐나다에 연수를 갔다 오니 거짓말처럼 모두 졸업해 버린 상태였다. 그렇다고 후배들과의 술자리가 껄끄럽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매 번 술값을 자신이 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오늘만큼은 더치페이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열곤 했다. 이런 쫀쫀한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정확히 일주일전에 나온 카드 명세서가 아버지 눈에 들어간 것이 발단이었다. “선배. 오늘따라 몸 좀 사리시는 것 같네요?”후배 한 명이 말했다. 지영이라는 이름의 여자 후배였는데, 최근 세호가 눈독을 들이는 상대이기도 했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하얀 피부가 세호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그러게요? 어디 속 안 좋으세요?”또 다른 후배가 말했다. 함께 모인 네 명 중에 유일한 남자 후배로, 이름은 명철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머리까지 짧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조폭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세호가 바로 말을 이었다.“그런데 오늘 비 온다고 했냐?”세호의 시선이 미희의 의자 맡에 놓인 체크무늬 우산에 향하고 있다. 분명히 아침 일기예보에서는 하루 종일 맑을 거라고 했었다.“아. 요즘 계속 일기예보가 틀려서, 아예 우산을 매일 갖고 다녀요 히히”미희가 유난히 알이 큰 자신의 안경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세호의 바로 맞은편에는 아담한 체구의 미희와 대조되는 커다란 덩치의 여자 후배, 윤희가 앉아있었다. 특유의 귀염성으로 인기를 독차지 하는 미희에 비해, 윤희는 뚱뚱한데다 성격도 괄괄해서 웬만하면 남자들이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딱히 환영 받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저런 자리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는 타입이라, 알고 있으면 도움은 많이 되는 아이였다. 윤희가 기본 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쉴 세 없이 주워 먹다가 문득 세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선배 왜 오늘은 소주에요? 맥주 먹고 싶은데. 안주도 조개탕 하나만 시킬 건 아니죠?”세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아, 아, 그, 하하. 왜 오늘은 이렇게 소주가 땡기지? 하하. 안주 조개탕 밖에 안 시켰나? 얌마 이명철. 안주 안 시키고 뭐했냐. 어서 시켜!”“우앗! 선배 정말이에요? 저 그럼 모듬 소세지 먹어도 돼요?”명철이 말했다. 그러자 세호가 ‘오늘은 더치페이하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말했다.“으, 어. 시켜 시켜. 하하. 지영이 너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니?”그러자 지영이 눈치도 없이 메뉴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선배 저는 해물 닭꼬치 먹고 싶어요~.”“하하하. 그래 그래. 명철아 해물 닭꼬치도 같이 시켜라.”지영이가 먹고 싶다면 빚을 져서라도 사줘야지.“선배 저는...”하지만 윤희는 아니다.“자. 자. 우리 어서 건배하자. 밤에 과제도 해야 되는데 번개처럼 먹고 헤어지자고!”세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시작되었다.계산대 앞에서 세호가 속으로 ‘으악’ 소리를 질렀다. “얼마라고요?”“8만 4천원입니다~”유난히 생글거리는 주인장의 얼굴이 얄밉다. 이러다 날 잡아서 노가다라도 한 번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세호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어? 비온다!”“아, 정말이네? 미희는 좋겠다.”먼저 나가있는 후배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호가 급하게 명세서에 서명을 마치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야! 정말이야? 진짜 비 와?”“예. 방울이 좀 굵은데요? 진짜 큰일이다.”명철이 말했다. 여자 후배들은 간판 아래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고, 명철만 혼자 길 한 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호도 그런 명철의 옆에 서서 손을 펼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마 안 있어, ‘토옥’ 하고 물방울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야. 어서 가자. 진짜 비 온다!”세호가 외치자 여자 후배들이 미희의 우산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윤희 하나도 커버하기 힘든 작은 우산에 세 사람이 붙어 있으니, 꼭 끈끈이에 파리들이 붙어있는 것 같다.“야. 아직 작은 물방울 수준이야. 호들갑떨지 말고 그냥 와!”세호의 말에 지영이만 머리를 감싸며 우산에서 나왔다. 정작 가장 시급한 윤희는 여전히 미희 옆에 착 달라붙어 반도 채 가려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구겨 넣고 있었다. 세호는 이 상황이 못 내 아쉬웠다.이럴 때 우산을 가져왔으면 지영이와 단 둘이 쓸 수 있었을 텐데. “윤희랑 미희가 같은 방향이던가? 둘이 가면 되겠어?”“같은 방향은 아닌데요. 미희가 저 데려다 줄 거예요.”윤희가 말했다. 세호의 눈에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펴지는 미희의 얼굴이 똑똑히 들어왔다.“......아. 그럴 거예요. 하하하.” 미희가 말했다. 윤희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미희 얼굴은 죽어도 그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아. 윤희야 지금 비도 얼마 안 오는데, 그냥 뛰어 가는 게...”“선배! 미희가 데려다 주겠다는데 왜 그러세요! 미희랑 같이 우산 쓰고 싶으셔서 그래요?”“아, 아니 그게 아니고.”“미희한테 눈독 들이지 마세요. 아셨죠?”미희는 이제 거의 울상이 다 되어서 세호를 향해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그, 그래 그럼. 우리는 반대 방향이니까 이쪽으로 갈게. 내일 보자~”“예...... 선배.”미희의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세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윤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아무도 없었다. 세호는 그렇게 미희와 윤희를 먼저 보내고 이번엔 지영이와 명철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지영이 집이 어느쪽이었지?”“예? 아, 저는 대림 쪽이에요.”“명철이 너는?”“저는 신도림 쪽이요. 선배는요?” “나는 영등포.”세호가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그럼 나랑 지영이가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면 되겠다.”그러자 명철이 말했다.“예? 무슨 말씀이세요. 저랑 더 같은 방향이죠.”그건 세호도 알고 있었다. 눈치 없는 명철이 야속했다.“음. 아니. 너는 아까 술도 많이 마시고 했으니까 그... 응?”빗방울 하나가 세호의 얼굴로 떨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묵직한 느낌이었다. “왜 그러세요 선배?”“어? 아니, 왠지 빗방울이 더 굵어진 것 같아서.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의외로 손쉽게 명철을 떨 굴 수 있었다. 갑자기 세호의 얼굴에서 냄새가 난다고 명철이 투정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세호는 내심 잘 됐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선배한테 그런 장난치는 거 아니라며 명철을 나무랐다. 하지만 명철의 표정은 계속 굳어있었고, 급기야는 세호의 얼굴을 외면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호가 거짓으로 명철을 크게 꾸짖고는 다른 길로 쫓아버린 것이다. 선배 얼굴에 냄새가 난다며 골려댔으니, 지영과 단 둘이 가려고 자신을 쫓았다는 소문은 퍼뜨릴 수 없겠지. 그렇다고 느긋할 여유는 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템포를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지영아. 뛰자.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비가 올 모양이다.”이럴 때 영화처럼 점퍼를 촥 펼쳐서 뛰어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녀린 지영의 어깨에 합법적으로 손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텐데 말이다. 하필 오늘따라 두꺼운 스웨터 하나만 입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게 다 그놈의 일기예보 탓이다. “예. 선배 뛰어요. 그런데 선배 진짜. 아. 아니에요.”지영이 말을 하려다 만다. 찌푸린 인상을 보아하니 대충 왜 그러는지 예상이 갔다. 세호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쓱쓱 문지른 다음, 손을 코로 옮겨 킁킁하고 맡아보았다.“우악. 뭐야 이건.”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자신의 손에 베인 이 역겨운 냄새에 세호는 치를 떨었다. 행여 술자리 내내 이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낭패였다. 호탕하게 안주를 더 시키라고 외쳤던, 멋지게 카드를 긁었던 그 모습들은 잊혀지고, 얼굴에서 역겨운 똥냄새가 나는 선배로 낙인이 찍힐 테니 말이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난 세호가 지영에게 물었다.“어, 언제부터야 이 냄새? 처음부터 계속 그랬어?”지영은 아예 코까지 쥐고 있었다. “그건 아니에요. 수산시장이 근처에 있어서 비린내가 나나했는데, 아까 명철 선배 때문에 알게 됐어요.”“술집에서는 안 그랬다는 거지?”“예? 예. 아마도요.”세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선배 화장실에서 뭐 잘못 만지신 거 아니에요? 이건 영락없는 화장실 냄새인데.”그러니까 똥냄새라는 얘기겠지. 세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얼굴을 쓱쓱 문지른 다음 냄새를 맡아봤다.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의 강렬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시골 어귀에서 한 10년은 방치된 푸세식 화장실에서나 맡아봄 직한 냄새였다. 순간 세호에게 군 시절, 하수구가 터져서 온 몸에 똥을 뒤집어썼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는 군기가 바짝 들던 시절이라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복구 작업에 힘을 쏟았었다. 점심도 바로 그 자리에서 먹었는데,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오물에 밥을 비벼먹다시피 했었다.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버스 정류장에 닿을 때까지도 세호는 연신 얼굴을 비비고, 냄새를 맡고의 행동을 반복했다. 계속 손으로 문지르면 냄새도 없어지겠거니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웬걸, 냄새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지영은 참기 힘든 얼굴로 세호의 뒤꽁무니를 간신히 따라붙고 있었다. 참으로 보람 없는 둘만의 귀가 길이었다. -투욱, 투욱굵직한 빗방울 두 개가 또다시 세호의 얼굴을 때렸다. 얼마나 굵었는지 세호의 얼굴에 닿자마자 산탄총처럼 퍼져 코와 눈까지 덮쳐버렸다. “아 큰일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퍼부울 기세인데.”“그러게요. 저도 방금 얼굴에 몇 방울 맞았어요.”그 때였다. “억. 억...... 지영아. 너 얼굴에서......”세호가 코를 쥐었다. 지영의 얼굴에서 끔찍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나던 냄새와 비슷했는데 그 강도가 더욱 심했다.“예? 선배, 진짜 아무리 제가 여자로 안 보여도 그렇지......”아뿔사. 지영이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세호는 당황하며 황급히 코에서 손을 떼었다.“아,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지영... 으윽. 크으윽.”하지만 이내 코를 다시 쥐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냄새였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눈을 흘기던 미영 또한 코를 쥐고 있긴 마찬가지였다.“선배 냄새나 걱정하세요.”“지영아. 이거 아무래도 이상해. 갑자기 왜 우리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까?”“뭐라구욧! 저한테 무슨 냄새가..... 아. 꺄아악!”지영이 세호가 한 것처럼 손을 이용해 자신의 냄새를 맡아 보더니, 소스라치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곱게 바른 파우더가 무색할 정도로 얼굴을 비벼대기 시작한다. 그래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지 점점 얼굴은 울상이 되어간다. “아무래도 물로 씻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게. 이상한 걸 만진 적도 없고, 얼굴에 뭐가 닿은 적도 없는데. 얼굴에 비 몇 방울 맞은......”세호가 말을 멈췄다. 그 사이 지영이 말을 꺼냈다.“아아. 저는 이대로 버스에 못 타요. 사람들 많은데 어떻게 이런 꼴로 탈 수가 있겠어요. 가까운 건물에서 세수라도 하고 가죠. 선배. 선배?” 세호는 말없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선배 저라도 다녀올게요.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잠깐만.”세호가 지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평소의 심리상태였다면 쾌재를 불렀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호의 마음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지영이 너도 얼굴에 비 몇 방울 맞았다고 했지?”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예. 맞아요.”“이거 아무래도 비 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얼굴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가 비 몇 방울 맞은 것 외에는 딱히 무슨 일이 있지도 않았잖아.”“무슨 비에서 똥, 아니 이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요. 뭔가 다른 게 있었겠죠.”“혹시라도 내 말이 맞으면? 아. 버스 온다. 씻는 건 집에 가서 하고 어서 저거 타자.”세호가 지영의 팔을 끌었다. 그러자 지영이 도리질을 치며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안돼요! 이렇게 탈 수는 없어요. 안 돼! 놔! 놓으라고!”세호의 앞에 선 6514번 버스가 앞문을 열었다. 하지만 지영은 완고했다. 도무지 세호의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선배 먼저가요 그럼. 저는 씻고 갈 테니까. 저는 어차피 집에 가는 버스 많아요.”세호의 마음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세호는 6514번 버스가 아니면 곤란하긴 했다. 다른 버스들은 빙 돌아가거나,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앞 문 너머로 보이는 버스기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싸움은 거기까지 하고 어서 올라타라는 마음의 소리가 전해져오는 듯 했다. 군 시절, 하수도에서 맞아본 오물세례에 의한 트라우마였을까. 결국 세호는 지영의 손을 놓아버렸다. 명철을 쫓아버릴 정도로 지영과 함께 가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당장 이 비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지영 또한 먼저 가라는 말은 했지만 정말 손을 놓는 것은 의외였는지, 잠시 멀뚱히 세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지영아. 선배가 내일 맛있는 거 사줄게!”일말의 미안함을 표현한 세호가 버스에 올라탔다. 점점 멀어지는 지영의 모습을 보니, 적잖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 후회는 버스 앞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심상치 않아지면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장편] 똥 비 [Ⅰ]
-쏴아아아아
세호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으로 물 든 하늘에서는 같은 색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 징조를 느꼈을 때 재빨리 대처했어야 했다.
티비 일기예보를 과신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면 어쩌겠는가. 이미 엎어진 물인 것을.
비야 집안에 피해 있으면 그만이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이 썩은 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창문 틈새마다 두꺼운 청 테이프를 얼마나 붙여댔는지 덕지덕지를 넘어서 울퉁불퉁할 정도였다.
세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촘촘한 갈색 빗줄기에 가려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세호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쾅 쾅 쾅.
그 사람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호는 여느 때처럼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감쌌다.
“지영아.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세호는 벌떡 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고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
......
정확히는 나흘 째였다.
본격적으로는 이틀쯤이었지만.
그러니까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게 말이다.
......
......
그 날도 세호는 수업을 마치고 과 후배들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민속학과라는 과 특성상 남자 동기는 자신을 포함해 셋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한 명은 전과를 했고, 한 명은 휴학 중이었다.
그리고 수많았던 여자 동기들은,
군대를 마치고 1년간 캐나다에 연수를 갔다 오니 거짓말처럼 모두 졸업해 버린 상태였다.
그렇다고 후배들과의 술자리가 껄끄럽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매 번 술값을 자신이 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오늘만큼은 더치페이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열곤 했다.
이런 쫀쫀한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정확히 일주일전에 나온 카드 명세서가 아버지 눈에 들어간 것이 발단이었다.
“선배. 오늘따라 몸 좀 사리시는 것 같네요?”
후배 한 명이 말했다.
지영이라는 이름의 여자 후배였는데, 최근 세호가 눈독을 들이는 상대이기도 했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하얀 피부가 세호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러게요? 어디 속 안 좋으세요?”
또 다른 후배가 말했다.
함께 모인 네 명 중에 유일한 남자 후배로, 이름은 명철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머리까지 짧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조폭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세호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비 온다고 했냐?”
세호의 시선이 미희의 의자 맡에 놓인 체크무늬 우산에 향하고 있다.
분명히 아침 일기예보에서는 하루 종일 맑을 거라고 했었다.
“아. 요즘 계속 일기예보가 틀려서, 아예 우산을 매일 갖고 다녀요 히히”
미희가 유난히 알이 큰 자신의 안경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세호의 바로 맞은편에는 아담한 체구의 미희와 대조되는 커다란 덩치의 여자 후배, 윤희가 앉아있었다.
특유의 귀염성으로 인기를 독차지 하는 미희에 비해,
윤희는 뚱뚱한데다 성격도 괄괄해서 웬만하면 남자들이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딱히 환영 받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저런 자리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는 타입이라, 알고 있으면 도움은 많이 되는 아이였다.
윤희가 기본 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쉴 세 없이 주워 먹다가 문득 세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선배 왜 오늘은 소주에요? 맥주 먹고 싶은데. 안주도 조개탕 하나만 시킬 건 아니죠?”
세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 그, 하하. 왜 오늘은 이렇게 소주가 땡기지? 하하. 안주 조개탕 밖에 안 시켰나? 얌마 이명철.
안주 안 시키고 뭐했냐. 어서 시켜!”
“우앗! 선배 정말이에요? 저 그럼 모듬 소세지 먹어도 돼요?”
명철이 말했다.
그러자 세호가 ‘오늘은 더치페이하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말했다.
“으, 어. 시켜 시켜. 하하. 지영이 너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그러자 지영이 눈치도 없이 메뉴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선배 저는 해물 닭꼬치 먹고 싶어요~.”
“하하하. 그래 그래. 명철아 해물 닭꼬치도 같이 시켜라.”
지영이가 먹고 싶다면 빚을 져서라도 사줘야지.
“선배 저는...”
하지만 윤희는 아니다.
“자. 자. 우리 어서 건배하자. 밤에 과제도 해야 되는데 번개처럼 먹고 헤어지자고!”
세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계산대 앞에서 세호가 속으로 ‘으악’ 소리를 질렀다.
“얼마라고요?”
“8만 4천원입니다~”
유난히 생글거리는 주인장의 얼굴이 얄밉다.
이러다 날 잡아서 노가다라도 한 번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세호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어? 비온다!”
“아, 정말이네? 미희는 좋겠다.”
먼저 나가있는 후배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호가 급하게 명세서에 서명을 마치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야! 정말이야? 진짜 비 와?”
“예. 방울이 좀 굵은데요? 진짜 큰일이다.”
명철이 말했다.
여자 후배들은 간판 아래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고,
명철만 혼자 길 한 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호도 그런 명철의 옆에 서서 손을 펼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마 안 있어, ‘토옥’ 하고 물방울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야. 어서 가자. 진짜 비 온다!”
세호가 외치자 여자 후배들이 미희의 우산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윤희 하나도 커버하기 힘든 작은 우산에 세 사람이 붙어 있으니,
꼭 끈끈이에 파리들이 붙어있는 것 같다.
“야. 아직 작은 물방울 수준이야. 호들갑떨지 말고 그냥 와!”
세호의 말에 지영이만 머리를 감싸며 우산에서 나왔다.
정작 가장 시급한 윤희는 여전히 미희 옆에 착 달라붙어
반도 채 가려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구겨 넣고 있었다.
세호는 이 상황이 못 내 아쉬웠다.
이럴 때 우산을 가져왔으면 지영이와 단 둘이 쓸 수 있었을 텐데.
“윤희랑 미희가 같은 방향이던가? 둘이 가면 되겠어?”
“같은 방향은 아닌데요. 미희가 저 데려다 줄 거예요.”
윤희가 말했다.
세호의 눈에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펴지는 미희의 얼굴이 똑똑히 들어왔다.
“......아. 그럴 거예요. 하하하.”
미희가 말했다.
윤희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미희 얼굴은 죽어도 그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아. 윤희야 지금 비도 얼마 안 오는데, 그냥 뛰어 가는 게...”
“선배! 미희가 데려다 주겠다는데 왜 그러세요! 미희랑 같이 우산 쓰고 싶으셔서 그래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미희한테 눈독 들이지 마세요. 아셨죠?”
미희는 이제 거의 울상이 다 되어서 세호를 향해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그, 그래 그럼. 우리는 반대 방향이니까 이쪽으로 갈게. 내일 보자~”
“예...... 선배.”
미희의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세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윤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아무도 없었다.
세호는 그렇게 미희와 윤희를 먼저 보내고 이번엔 지영이와 명철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지영이 집이 어느쪽이었지?”
“예? 아, 저는 대림 쪽이에요.”
“명철이 너는?”
“저는 신도림 쪽이요. 선배는요?”
“나는 영등포.”
세호가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럼 나랑 지영이가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면 되겠다.”
그러자 명철이 말했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저랑 더 같은 방향이죠.”
그건 세호도 알고 있었다.
눈치 없는 명철이 야속했다.
“음. 아니. 너는 아까 술도 많이 마시고 했으니까 그... 응?”
빗방울 하나가 세호의 얼굴로 떨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묵직한 느낌이었다.
“왜 그러세요 선배?”
“어? 아니, 왠지 빗방울이 더 굵어진 것 같아서.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의외로 손쉽게 명철을 떨 굴 수 있었다.
갑자기 세호의 얼굴에서 냄새가 난다고 명철이 투정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세호는 내심 잘 됐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선배한테 그런 장난치는 거 아니라며 명철을 나무랐다.
하지만 명철의 표정은 계속 굳어있었고, 급기야는 세호의 얼굴을 외면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호가 거짓으로 명철을 크게 꾸짖고는 다른 길로 쫓아버린 것이다.
선배 얼굴에 냄새가 난다며 골려댔으니,
지영과 단 둘이 가려고 자신을 쫓았다는 소문은 퍼뜨릴 수 없겠지.
그렇다고 느긋할 여유는 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템포를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영아. 뛰자.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비가 올 모양이다.”
이럴 때 영화처럼 점퍼를 촥 펼쳐서 뛰어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녀린 지영의 어깨에 합법적으로 손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텐데 말이다.
하필 오늘따라 두꺼운 스웨터 하나만 입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게 다 그놈의 일기예보 탓이다.
“예. 선배 뛰어요. 그런데 선배 진짜. 아. 아니에요.”
지영이 말을 하려다 만다.
찌푸린 인상을 보아하니 대충 왜 그러는지 예상이 갔다.
세호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쓱쓱 문지른 다음, 손을 코로 옮겨 킁킁하고 맡아보았다.
“우악. 뭐야 이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자신의 손에 베인 이 역겨운 냄새에 세호는 치를 떨었다.
행여 술자리 내내 이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낭패였다.
호탕하게 안주를 더 시키라고 외쳤던, 멋지게 카드를 긁었던 그 모습들은 잊혀지고,
얼굴에서 역겨운 똥냄새가 나는 선배로 낙인이 찍힐 테니 말이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난 세호가 지영에게 물었다.
“어, 언제부터야 이 냄새? 처음부터 계속 그랬어?”
지영은 아예 코까지 쥐고 있었다.
“그건 아니에요. 수산시장이 근처에 있어서 비린내가 나나했는데, 아까 명철 선배 때문에 알게 됐어요.”
“술집에서는 안 그랬다는 거지?”
“예? 예. 아마도요.”
세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화장실에서 뭐 잘못 만지신 거 아니에요? 이건 영락없는 화장실 냄새인데.”
그러니까 똥냄새라는 얘기겠지.
세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얼굴을 쓱쓱 문지른 다음 냄새를 맡아봤다.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의 강렬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시골 어귀에서 한 10년은 방치된 푸세식 화장실에서나 맡아봄 직한 냄새였다.
순간 세호에게 군 시절, 하수구가 터져서 온 몸에 똥을 뒤집어썼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는 군기가 바짝 들던 시절이라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복구 작업에 힘을 쏟았었다.
점심도 바로 그 자리에서 먹었는데,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오물에 밥을 비벼먹다시피 했었다.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닿을 때까지도 세호는 연신 얼굴을 비비고, 냄새를 맡고의 행동을 반복했다.
계속 손으로 문지르면 냄새도 없어지겠거니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웬걸,
냄새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지영은 참기 힘든 얼굴로 세호의 뒤꽁무니를 간신히 따라붙고 있었다.
참으로 보람 없는 둘만의 귀가 길이었다.
-투욱, 투욱
굵직한 빗방울 두 개가 또다시 세호의 얼굴을 때렸다.
얼마나 굵었는지 세호의 얼굴에 닿자마자 산탄총처럼 퍼져 코와 눈까지 덮쳐버렸다.
“아 큰일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퍼부울 기세인데.”
“그러게요. 저도 방금 얼굴에 몇 방울 맞았어요.”
그 때였다.
“억. 억...... 지영아. 너 얼굴에서......”
세호가 코를 쥐었다.
지영의 얼굴에서 끔찍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나던 냄새와 비슷했는데 그 강도가 더욱 심했다.
“예? 선배, 진짜 아무리 제가 여자로 안 보여도 그렇지......”
아뿔사. 지영이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세호는 당황하며 황급히 코에서 손을 떼었다.
“아,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지영... 으윽. 크으윽.”
하지만 이내 코를 다시 쥐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냄새였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눈을 흘기던 미영 또한 코를 쥐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선배 냄새나 걱정하세요.”
“지영아. 이거 아무래도 이상해. 갑자기 왜 우리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까?”
“뭐라구욧! 저한테 무슨 냄새가..... 아. 꺄아악!”
지영이 세호가 한 것처럼 손을 이용해 자신의 냄새를 맡아 보더니, 소스라치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곱게 바른 파우더가 무색할 정도로 얼굴을 비벼대기 시작한다.
그래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지 점점 얼굴은 울상이 되어간다.
“아무래도 물로 씻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게. 이상한 걸 만진 적도 없고, 얼굴에 뭐가 닿
은 적도 없는데. 얼굴에 비 몇 방울 맞은......”
세호가 말을 멈췄다.
그 사이 지영이 말을 꺼냈다.
“아아. 저는 이대로 버스에 못 타요. 사람들 많은데 어떻게 이런 꼴로 탈 수가 있겠어요. 가까운 건물에
서 세수라도 하고 가죠. 선배. 선배?”
세호는 말없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선배 저라도 다녀올게요.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잠깐만.”
세호가 지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평소의 심리상태였다면 쾌재를 불렀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호의 마음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지영이 너도 얼굴에 비 몇 방울 맞았다고 했지?”
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맞아요.”
“이거 아무래도 비 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얼굴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가 비 몇 방울 맞
은 것 외에는 딱히 무슨 일이 있지도 않았잖아.”
“무슨 비에서 똥, 아니 이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요. 뭔가 다른 게 있었겠죠.”
“혹시라도 내 말이 맞으면? 아. 버스 온다. 씻는 건 집에 가서 하고 어서 저거 타자.”
세호가 지영의 팔을 끌었다. 그러자 지영이 도리질을 치며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안돼요! 이렇게 탈 수는 없어요. 안 돼! 놔! 놓으라고!”
세호의 앞에 선 6514번 버스가 앞문을 열었다.
하지만 지영은 완고했다.
도무지 세호의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선배 먼저가요 그럼. 저는 씻고 갈 테니까. 저는 어차피 집에 가는 버스 많아요.”
세호의 마음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세호는 6514번 버스가 아니면 곤란하긴 했다.
다른 버스들은 빙 돌아가거나,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앞 문 너머로 보이는 버스기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싸움은 거기까지 하고 어서 올라타라는 마음의 소리가 전해져오는 듯 했다.
군 시절, 하수도에서 맞아본 오물세례에 의한 트라우마였을까.
결국 세호는 지영의 손을 놓아버렸다.
명철을 쫓아버릴 정도로 지영과 함께 가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당장 이 비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지영 또한 먼저 가라는 말은 했지만 정말 손을 놓는 것은 의외였는지,
잠시 멀뚱히 세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지영아. 선배가 내일 맛있는 거 사줄게!”
일말의 미안함을 표현한 세호가 버스에 올라탔다.
점점 멀어지는 지영의 모습을 보니, 적잖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 후회는 버스 앞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심상치 않아지면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