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다.

민승희2009.08.10
조회155

감기 기운이 있어서 몸 상태는 최악이고

월말 스트레스로 정신 상태 또한 최악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몸살감기가 극에 달했지요.

전 일 년에 꼭 두 차례 정도 심한 몸살감기에 걸립니다.

이때가 되면 온 집안 식구들은 비상이 걸립니다.

제가 한번 아프면 좀 심하게 엄살을 부리는 편이거든요.

토요일 퇴근하자마자 자리를 펴고 누워서 앓는 소릴 내며 엄살에 들어갔습니다.

 

딸아이가 제일 먼저 와서 다릴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아들 녀석도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지요.

딸아이는 우리 집의 대들보인 아빠가 아프면 안 된다며 정성스레 안마를 해주고,

평소 같지 않게 아들 녀석도 진지하게 안마를 해주었습니다.

방문을 빠끔히 열어 보시던 어머니도 걱정스러운 눈빛이셨습니다.

밤이 되어선 아내의 정성스런 병수발(?)이 이어졌습니다.

연신 주물러대는 아내의 안마에 앓는 소리는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난 딸아이 말대로 이 집안의 기둥이 아닌가,

난 왕이다.’

이윽고 일요일 아침. 눈을 떠보니

정말 거짓말처럼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왕처럼 대접해준 가족들을 위해서 오늘 하루는 뭔가를 해야겠다.

기대하시라 백성들이여 왕의 귀환이다.’

가벼운 몸 상태로 거실에 나오니 아버지 어머니가 외출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 어디 가세요? ”

“ 산에 간다.”

“ 같이 갈까요? ”

“ 됐다. 니들끼리 놀아라. 우리끼리 놀란다.”

 

부모님은 간단한 먹을거리까지 챙겨서 산행을 나가셨습니다. 전 생각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부모님 눈치 안 보고 우리 네 식구와 재미난 하루를 보내자.

기대하시라 백성들이여.’

아침밥을 먹고 청소기를 돌리는데 아내가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더군요.

 

“ 뭐해? 어디 가? ”

 

아내가 멍하니 쳐다보며

 

“ 저번에 말했잖아. 오늘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약속 있다고. ”

 

아내는 제가 그렇게 만류하던 스키니진을 입고 나가버렸습니다. ㅠㅠ

‘그래 여우같은 마누라는없지만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으니까.

기대하시라 백성들이여.’

눈 뜨자마자 컴 앞에 매달려 있는 아들 녀석 옆을 서성이며 말을 걸었습니다.

 

“ 언제 끝나냐? ”

 

아들 녀석 고개 한 번 안 돌리며 말하더군요.

 

“ 요번 주 내내 바빠서 한 번도 못했단 말야.

특별히 오늘은 엄마가 맘껏 하랬어.”

 

점심때가 넘어서까지 시체 놀이를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윽고 반가운 윈도우 종료 소리가 울렸습니다.

 

“ 끝났냐? ”

 

아들 녀석 어느새 옷까지 챙겨 입고 나오며

 

“ 아빠, 친구 집에 갔다 올게.”

 

란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덩그러니 딸아이와 저만 남았습니다.

딸아이는 오전부터 밥상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참 정갈한 아이입니다.

항상 예쁜 컵에 우유를 따르고 과자도 항상 예쁜 접시에 담아서

책상이 아닌 밥상에 올려놓고 공부를 합니다.

 

“ 공부 좀 그만하지? ”

 

대답도 없습니다.

 

“ 언제 끝나냐? ”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방 안을 서성이는 저에게

 

“ 아빠, 책이라도 좀 읽지.”

 

빈정 상해서 방에서 나와버렸습니다.

어둑해지는 거실에 혼자 앉아 있다 보니

문득 ‘ 킬리만자로의 표범 ’ 내레이션이 생각났습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이 큰 도시의 벌판에 철저히 혼자 버려진 ~

나보다 더 철저히 버려진 고호란 사람도 있는데 ~~ 바람처럼 왔다가 ~~’

 

저녁밥 때가 되자 한 명, 두 명 식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전···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 깔고 다시 앓는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들어오는 식구들 한마디씩 합니다.

 

부모님

“ 술 좀 작작 쳐 묵으라, 약발도 안 받은 갑다. 쯧쯧.”

 

아들

“ 전직 퀘스트 하라는 거 해놨어? ”

 

아내

“ 이제 고만하지 시끄럽다. 또 삐졌냐? ”

 

“ 하루 종일 담배 핀다고 밖에 왔다갔다하니까

감기가 안 떨어지지.”

···

··

·

 

누워 있는데 서러움이 복받쳐옵니다.

 

난 왕인데···.

 

하지만 왕이면 뭐합니까. 우리 집엔 왕비도 있고 왕자님도 있고 공주님도 있고,

대왕 대비마마까지 있는데 왕이 대순가요···.

무슨 얼어 죽을 왕의 귀환.^^

---------------------------------------

 

[출처] 나는 왕이다.|작성자 나야나

http://blog.naver.com/agora_nayana/150067105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