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와대 까러 왔수다” - 1. 21사태와 비정규전

개구장이200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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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와대 까러 왔수다” - 1. 21사태와 비정규전청와대 습격 목표…北 특수부대원 31명 남파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밤, 북한에서 남파된 일단의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이동하다가 검문 중이던 경찰과의 교전으로 분산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후에 생포된 김신조 씨의 진술로 전모가 밝혀진 이 사건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KAL기 납북사건 등과 함께 60년대에 북한이 추구하던 대남 책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60년대 들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62년 4대 군사노선, 64년 3대혁명역량 강화 등을 천명하면서, 군사적으로도 베트남전 분석을 통해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이라는 전략을 채택해 특수부대를 강화했다. 그리하여 편성된 부대가 제124군 부대였다. 67년 창설된 제124군 부대는 대대급의 7개 기지로 편성됐고, 청와대를 습격한 것은 황해도 연산에 위치한 제6기지였다.

이들은 반공을 국시로 삼은 제3공화국이 안정돼 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함으로써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남한 내에서의 ‘혁명역량 강화’를 노리고자 했던 것이다.북한은 최초 35명을 남파해 청와대뿐만 아니라 미 대사관, 육군본부, 서대문 형무소, 방첩대 등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확실한 목표 달성을 위해 청와대 한 곳을 목표로 31명을 남파시켰다.

다양한 실전적 훈련을 마친 이들은 1월 17일 20시쯤 북한 GP를 출발해 23시쯤 미2사단 지역의 남방한계선 철책을 통과했다. 지휘조와 운전조를 비롯해 7개 조로 편성된 이들은 개인별로 기관단총 1정, 권총 1정, 수류탄 8발과 300여 발의 실탄으로 무장하고 5일분의 식량을 휴대했으며, 제1숙영지 도착 이후 국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남진했다.

산악을 이용한 야간 행군과 주간 숙영을 원칙으로 청와대를 목표로 계획대로 움직이던 이들에게 결정적인 우발상황이 발생한 것은 19일 오후 2시쯤이었다. 나무를 하러 올라온 경기 파주군 법원리의 우씨 4형제와 경계병이 조우한 것이다. 나무꾼들을 생포한 공비들은 사전 지시된 대로 살해하려다 오히려 청와대 습격계획이 조기에 탄로 날 것을 우려해 우씨 형제들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협박만 하고 살려주었다.

그러나 우씨 형제들은 21시에 파주군 천현 지서에 무장공비 30여 명의 출현을 신고했고, 이로부터 본격적인 대침투작전이 개시됐다. 제6군단을 중심으로 실시된 수색작전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는 무장공비들이 예상보다 훨씬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의 동원과 더불어 서울 주변에는 수경사 예하 부대들과 경찰들이 주요 길목을 통제하면서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무장공비들과의 최초 교전은 세검정 파출소에서 이들을 포착하면서 시작됐다.

북한과의 교신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난 사실을 알게 된 공비들은 계획된 시간 안에 청와대를 습격하고자 과감하게 대로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에 도달했지만 CIC 방첩대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수상히 여긴 종로경찰서장이 끈질기게 심문하자 결국 경찰들을 사격하면서 비봉, 인왕산, 의정부 방면으로 분산 도주했다. 이때가 21일 22시쯤이었다.

이후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개시됐으나, 철저하게 훈련된 특수부대원을 상대로 한 일반 전투부대의 작전은 의외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2월 3일까지 계속된 작전으로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으며, 나머지 2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됐다. 아군은 경찰을 포함해 30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북한이 게릴라작전에 제한이 많은 겨울을 이용한 것이 아군의 수색 및 토벌작전에 어려움을 가져다 줬다. 추운 날씨에 산악지역을 기동해야 하는 장병들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추위로 야간에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다. 반면에 북한은 눈이라는 장애가 있지만 인적이 드물고 야간이 길어 충분한 행군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겨울에 작전을 개시했다.

비록 초기에 나무꾼에 의해 발견돼 계획에 차질을 빚었지만 청와대 근처까지 도달하는 대담성을 보여주었다.1·21사태 이후 정부는 안보상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향토예비군 창설과 무기 현대화 계획을 서둘렀다. 향토예비군은 유사시 전력화를 목표로 그해 4월에 창설됐으며, 무장공비들의 자동소총에 대응하기 위해 M-16 공장 건설을 미국과 협조해 73년 준공하게 됐다.

대한민국을 꽁꽁 얼게 했던 68년 겨울의 1·21사태는 변화된 북한의 대남 군사전략의 실체와 남한의 안보상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대비 정규전의 어려움을 실감케 했다.

<박일송 중령·육군사관학교 전사학 교수>

2009.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