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얘기만으로도 정신없는데 요 며칠 또 강 때문에 어수선하네. 남쪽의 강만으로는 부족한지 이번엔 임진강이야. 임진강 하면 먼저 영화 <박치기>부터 떠올라. 이어 옵션처럼 이어지는 노래 임진강.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북조선의 국가를 작곡한 작곡가가 만들었다는 그 절절한 가락의 노래. 김정구 할아버지의 두만강 푸른 물에 하고 묘하게 대칭을 이루는 그 노래. 하지만 오늘 하려는 얘기는 임진강이나 가요에 대해서가 아니고, 그냥 누군가 강을 파는 것에 대한 얘기야.
우리 쪽엔 비도 오지 않았는데 물난리 참사가 벌어진 임진강.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비집고 나오는 평화의 댐 찬가. 그런 소리들을 들으며 문득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어. 그래 일단 이런 제목을 써봤어. '강바닥 파는 독재자'
이렇게 적고 나니 마치 무슨 영화 제목 같지? '피아노 치는 대통령' 이던가? 하지만 뭐 그렇게 나긋나긋하고 몰캉몰캉한 얘긴 아니고.
그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강바닥을 파고 싶어 하는 걸까? 한반도를 관통하는 대운하를 파야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그게 잘 안 먹히니까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럼 강이라도 네 개 파겠다고 덤비는 걸 보며, 그 참 괴이쩍으면서 한편 신비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어. 그냥 보통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니까.
그는 왜 그렇게 강바닥을 파헤치지 못해 안달인 걸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처음 대운하 얘기가 나온 건 대선공약으로였지. 물론 그때도 말도 안 되는 공약이라며 반대가 많았어. 하지만 뭐 상관없었어. 그땐 대운하 정도 아니라 똥으로 메주를 쑨다던가, 오줌으로 맥주를 만들고 그 맥주를 마시고 오줌을 누고 다시 맥주를 만드는 무한반복시스템을 개발해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여 우리국민 모두 놀고먹게 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어도 상관없었을 거야. 아무튼 대운하는 지난 2007 대선에서 이명박의 대표 공약이었어.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의 운하 얘기는 그 역사가 상당히 길어. 처음은 언제냐 하면, 지겹지만 할 수 없이 또 박정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운하 논쟁의 역사
1966년, 당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하면서 운하건설 계획도 세우고 건설부가 한강 유역에 대한 조사까지 했어. 그때 미국의 하천 운하관계 전문 기관인 내무성 개척국 지질조사소와 협정을 맺고 한강 유역의 치수, 수자원 개발과 운하건설 가능성 등을 검토했대. 그 조사는 한강유역에 치중된 거라 인천-서울-영월 간 내륙운하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에 대해서였어.
그 보고서가 완성돼 나온 것이 1971년, 시간이 그렇게 걸린 걸로 봐서는 상당히 공들인 보고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암튼 가장 중요한, 결론은?
"운하 즐~!"
주된 이유는 1970년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54달러, 국민 총생산 81억 달러의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향후 50년간 아무리 경제가 발전한다 하더라도 운하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의 물동량이 없다는 거지.
그러나 박정희는 운하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어. 1977년 말, 정부는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달성으로 제2의 경제도약을 이루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어. 원래 계획보다 3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하자 박정희는 갑자기 엔돌핀이 마구 치솟았나 봐. 그래 1978년 당시 건설부장관인 신형식씨를 불렀어.
"님자, 그 운하 다시 주물러 보라우"
지시를 받은 건설부는 하필 거기밖에 없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미국 육군 공병단'에 의뢰했어. 그래 1978년 9월부터 12월까지 인천-서울-팔당-영월에 이르는 한강 본류와 남한강 유역 270km 구간의 운하건설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예비조사를 실시하게 되지. 본 조사가 아니라 예비조사야.
그 결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1978년 12월 건설부장관과 미 육군 공병감 J.W.모리스 중장은 운하건설 타당성 조사를 위한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정식으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게 돼.
하지만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어버리지. 그렇다고 국책사업이 중단될 리는 없잖아? 지금이야 정치가 너무 많이 발전해버려 정권만 바뀌면 옳든 그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 정권이 진행하던 사업은 모조리 없던 일로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정치가 좀 후져서 국책사업은 정권이 바뀌어도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었나 봐. 순진하게.
아무튼 조사 업무는 계획대로 진행돼 1980년 12월, [남한강 주운계획 예비타당성조사] 보고서가 미 육군 공병단과 건설부 및 산업기지개발공사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결론은?
"운하, 짱!"
물론 인천에서 영월까지야. 보고서에 따르면 운하 건설에 따르는 연간 편익과 비용을 비교한 수치는 1.15였대. 이 비율이 1을 넘으면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는 거지. 보고서는 모래, 자갈, 시멘트 단 3개 품목의 화물 수송 편익만으로도 경제성이 있다고 판정을 내린 거야. 관광 산업의 이득이나 지역개발 등의 편익은 전혀 계상하지 않고도 말야.
또한 1986년에 충주댐이 완공되고 1990년까지 여주댐이 완공될 경우 1991년부터 남한강 운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수량은 95% 이상 갖추어 진다고 예측했어. 그러니까 당장 운하가 완성되는 건 아니므로 1990년대에 운하가 개통된다면 앞으로 닥칠 수도권의 막대한 운송수요를 감당해내는 데 운하가 큰 효과를 낼 거라는 거였지.
이 보고서가 나온 이후 건설부와 산업기지개발공사(지금의 수자원공사)등 정부 및 유관기관에서는 한강운하를 당연히 하는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1981년부터 3-4년간 전두환의 5공화국 정부의 고 예산과 긴축 분위기 때문에 건설에 착수하지 못했어. 그러다 1984년 하반기부터 다시 이걸 끄집어 내 주물럭거리며 슬슬 키우기 시작해.
당시 수자원공사는 1986년 충주댐이 완공될 경우 남한강 상류에 배를 띄울 수 있는 충분한 물이 확보되기 때문에 이 기회에 물길을 내고 싶어 했어. 하지만 역시 운하를 판다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았나 봐. 관광수익과 발전수익에 환경영향평가서까지 붙은 정식 타당성 보고서가 완성된 것은 1989년 1월이야. 보고서 명칭은
[한강주운개발사업 타당성조사 보고서]
이에 따르면 2000년대 국제화시대 및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운하사업의 착수가 시급히 요청되며, 기술적, 경제적으로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어. 또한 이 사업은 수도권의 골재 수급 등을 위해서도 조속히 착수해야 한다고 평가하고 곧바로 실시 설계에 들어갈 것까지 건의할 정도로 나아갔어.
그동안에는 물류비용 절감액만 반영했었으나 이 보고서에서는 관광수익 19%, 발전수익 6%, 등 전체편익의 25%를 관광발전 수익으로 계상하고 있어. 더불어 이 사업을 수도권과 태백권 사이의 화물과 골재 수송은 물론, 수력발전, 관광, 지역개발 등 다목적 수자원 개발 사업이라고 높이 평가해.
환경 분야에서도 조사단은 여러 가지 실험과 과학적인 오염물질 영향 평가를 실시한 결과, 물의 증발량, 풍향, 풍속, 구름의 양 등 기상변화는 아주 적을 것으로 나타났으며 새들이나 곤충 등 동식물을 비롯한 생태계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고했어. 그러니 이런 사업은 즉시 시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이유는 우선 영향력이 커진 환경단체들이 운하를 환경을 해치는 사업으로 지목하여 이슈화한 것이고, 두 번째는 도로건설이 눈에 잘 띠고 생색이 나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강 보다는 도로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 운하건설은 뒤로 밀리게 되었대. 그리고 이때 노태우 정부가 운하 대신 시작한 게 바로 고속전철과 새만금이란 것.
그러니까 만약 운하를 시작했으면 고속전철이나 새만금은 포기했거나 훨씬 뒤로 밀렸을지 모르지. 뭐 이런 건 그 쪽 전문가들이나 알 테지만. 아무튼 운하는 다시 그렇게 사라지는 듯하더니, 결국 다시 등장해. 바로 세종보고서와 삼성보고서가 연이어 나오거든. 다만 달라진 건, 그 대상 지역에서 강원도 영월은 보이지 않고 경부운하로 변경됐다는 것 정도랄까?
성장하는 운하
박정희에 의해 한번 잉태된 운하는 수없는 낙태의 위기를 넘기면서도 끝내 살아남는 것은 물론, 위기를 한번 넘길 때마다 부쩍부쩍 성장하기까지 해. 경부운하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5년. 세종대학교 부설 세종연구원이 아래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부터였어.
[한-낙동강 운하의 가능성과 내륙수운 체계의 필요성]
이 보고서의 골자는 서울-부산 간 물류비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경부운하를 건설하면 물류비가 절감되고 국민경제에 막대한 보탬이 된다는 거였어. 이 보고서가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키기도 전에 또 하나의 보고서가 나오는데 바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삼성!
대구지역 일간지 '영남일보'는 1995년 8월30일자 1면 톱기사에 "대구를 부산과 연결되는 항구도시로 만든다"는 제목을 달았어. 기사의 주 내용은 "삼성그룹은 수출 물량과 원료의 용이한 수송과 물류비용 절약을 위해선 기존 고속도로로는 곤란하다는 판단 하에 과거 수상 수송로로 쓰였던 낙동강에 수로를 개발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지.
더불어 "삼성이 성서공단 삼성상용차 공장과 부품단지 건립을 계기로 성서공단과 쌍용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는 달성군 구지공단, 위천공단 등 낙동강 공업벨트의 물동량 수송과 최단거리 수출부두의 확보를 위해 순수 민간자본으로 대구와 부산을 직접 연결하는 운하를 계획하고 있다"고 이어졌어.
당시 삼성상용차는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구지역에 자리 잡았으나 물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어. 때마침 쌍용자동차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일대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자 삼성은 아예 자신들이 운하를 만들어 돈을 벌 궁리까지 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삼성의 이런 계획은 IMF를 거치며 2000년 삼성상용차가 문을 닫고, 쌍용자동차 구지공장과 위천공단 건립까지 연이어 무산되면서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어.
하지만 운하라는 이름의 이 태아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정치권으로 옮겨져 자라기 시작했어. 당시 김혁규 경남도지사는 평소 세종연구원의 경부운하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영남일보 기사를 읽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안 된다면 한강과 낙동강이 지나가는 광역 지자체가 힘을 합해서라도 경부운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어. 대구시도 장기 국토개발계획안에 경부운하 건설을 넣을 것을 국토개발원에 다섯 차례나 요구한 바 있었고. 그러다 드디어 그분께 간택이 되는데.
이명박의 입에서 운하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96년 5월이야.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던 이명박은 정부와 한국수자원공사가 경부운하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경부운하건설추진위원회(이하 운하추진위)를 구성하려 했어. 그러나 60여 명의 의원으로부터 서명까지 받았지만 위원회는 구성되지 못했어. 그들은 그 이유를 청와대, 즉 YS가 반대했기 때문이라고들 얘기하곤 했어. 아무튼 성공 여부보다는 일단 그분의 입에서 운하가 언급됐다는 게 중요해.
그러다 곧 김유찬 폭로사건이 터지며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가지. 당연히 운하든 뭐든 정치적 발언을 할 위치도 아니었고. 하지만 미국에 가서도, 김경준을 만나 금융 사업을 논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는 저 운하가 흐르고 있었나 봐. 그러다 드디어 2002년, 서울시장이 되고 나서는 청계천을 상대로 그 워밍업을 하게 되지. 물론 청계천 복원논의는 원래 있었다든가 그건 실패라는 등의 얘기도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제대로 몸을 풀었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2006년, 대선후보로 나선 이명박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후 청계천 복원에 대한 칭찬 여론이 무성하자 자신의 대통령선거 제1공약을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내륙운하 건설로 확정했어. 이어 8월17일부터는 3박4일간 한강과 낙동강을 따라가는 정책탐사를 벌이며 지역민과 언론을 대상으로 내륙운하의 필요성을 역설했지. 내용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다만 그냥 다시 꺼내들었을 뿐.
이 운하정책탐사를 끝낸 뒤인 9월부터 경부운하는 명칭이 '한반도운하'로 바뀌어 불리게 돼. 서울-부산뿐 아니라 호남지역, 나아가 신의주, 원산 등 북한 전역에까지 운하를 만들고, 이 모든 운하를 하나로 연결하겠다는 거대 구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지. 물론 지금은 4대강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튼 처음 한반도대운하 얘기가 나오던 그 땐 그랬어. 그러니까 이 대운하란 괴물은 처음 박정희에 의해 잉태되어, 온갖 낙태의 위기를 넘기며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을 꾸준히 자라 마침내 이명박에 이르러 괴물이 된 거야.
박정희 <한강수역운하> => 세종, 삼성 <경부운하> => 이명박 <한반도대운하>
이렇게. 실로 놀라운 생명력과 성장력이지.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건, 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운하에 집착할까 하는 거야. 그러니 그 부분을 찔러 봐야겠지. 무엇보다 위의 내용들만 열거하고 끝내면 우리 구여분 딴지스들이 이게 뭐냐, 딴지답지 않다, 고 한마디씩 할 테니까 더욱. 그래서 손금에 땀 배어가며 준비한 것이 아래, 역사 속에 기록된 강바닥 파는 이야기야.
독재자와 강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지. 그건 모두 알 테고. 인류사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독재자란 것도 알 테고. 또한 그는 만리장성도 축조했어. 물론 장성은 그의 시대에 시작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있었고 그 후에도 증축되었지. 하지만 장성의 대부분은 진시황 시대에 만들어졌어. 물론 우리 딴지스들은 그것들 모두 알 거라고 봐. 더불어 진시황은, 강도 팠어. 그것도 아주 많이.
당시, 그러니까 기원 전 2세기 경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치수, 물을 다스리는 거였어. 중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황하는 툭하면 둑을 넘어 그 물줄기에 기대어 살던 수많은 사람과 가축, 농토를 뒤덮으며 쓸어갔어. 때문에 그들에게 물은, 생존의 조건이며 동시에 죽음의 상징이었지. 황하의 민중들은 물로 인해 생명을 잇다가 물로 인해 죽었어.
따라서 춘추시대의 우왕도 치수에 골몰했고 전국시대 각 제후들은 황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모여앉아 회의를 열곤 했어. 이 황하가 농사에만 활용된 것은 아니었어. 제나라와 위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조나라는 황하의 제방을 터뜨려 상대 군사들을 수장해 버리기도 했었지. 그러므로 자연스레 황하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까지 탄생됐어.
진시황은 중원이 아닌 서역의 유목민출신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봐. 그는 천하통일 후 황하의 치수에 정열을 쏟았어. 그의 업적을 새긴 비문에, '하천이 막힌 것을 터뜨려 통하게 했다'는 구절까지 나오는 걸로 보아 그 사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둔 모양이야. 나아가 황하의 명칭을 덕수(德水)로 바꾸기까지 했어. 막힌 물줄기를 뚫고 제방을 쌓아 물을 다스려, 드디어 공포의 대상이 아닌 유익한 생명수로 바꿔놓은 거지.
황하 외에도 진시황은 많은 강들을 팠다고 해. 지금까지도 유명한 사천의 도강언, 섬서의 정국거, 하북의 장수12거 모두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에 걸쳐 완성됐어. 특히 한나라 출신 정국은 치수의 달인으로 유명했는데, 소문을 들은 진시황은 그를 전격 발탁해 진나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어. 섬서성의 정국거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 붙은 거야. 아무튼 그렇게 진시황은, 많은 강을 팠어.
이번엔 인도.
그쪽 그러니까 인더스문명부터 시작해 인도 역사를 배우다 보면 수많은 왕 중 가장 높은 자리에 기록된 왕이 있어. 아소카 왕. 그는 고타마의 싯다르타가 오를 뻔했던 위치인 '전륜성왕'이란 명칭을 듣는 유일한 왕이야. 무슨 얘기냐 하면, 싯다르타가 태어났을 때 어느 고승이 와서 그랬대. '나라를 다스리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도를 닦으면 붓다가 될 것' 이라고.
결국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고 그보다 약 200년 쯤 뒤에 태어난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 아소카는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륜성왕이 된 거지. 그런데 이 아소카도 처음부터 성군은 아니었어. 아니 성군이라기보다 어마어마한 폭군이었지. 그는 왕이 되기 위해 무려 99명의 형제를 죽였어. 형제가 99명이란 것도 놀랍지만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건 더 놀랍지.
즉 아소카는 서열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거야. 왕이 된 뒤의 살육은 더 끔찍했어. 자신에게 호응하지 않는 신하 500명을 참수하고 궁녀 500명도 화형에 처해 버렸거든. 형제들 숫자서부터 저 500이란 숫자들 모두 가공의 냄새를 상당히 풍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록은 그래.
나아가 전쟁을 벌이면서는 더했어. 왕국의 기틀을 다진 마지막 싸움인 칼링가의 전투에서는 무려 10만 명을 죽이고 15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어. 때문에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를 阿育王(아육왕)이라고 불러. 그리고 그 이름은, 불교를 부흥하고 전파한 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잔인함의 대명사로도 되어 있어. 아무튼 초기의 아소카는 인간이 아닌 악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독재자야.
그런 왕이었는데 오, 놀라워라! 그 독재자께서 칼링가전투가 끝난 후 전장을 둘러보던 중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회개하셨다는 거야. 시체의 산, 피의 강을 보며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 말이지. 실은 그게 아니라 어느 도인의 충고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튼 완전히 환골탈태 한 건 사실인가 봐. 그때부터 그는 불교도가 되어 성군의 길을 걷기 시작해.
그 후 그가 남긴 업적들은, 그 시대라는 걸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멋지고 선진적이었어. 그는 불교를 믿으면서 누구에게도 그걸 강요하지 않았어. 즉 종교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됐지. 당시 인도에는 불교는 물론 힌두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거든. 하지만 왕은 불교를 장려하진 않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을 뿐이야.
따라서 그는 불교를 부흥하고 국외로까지 널리 전파한 왕, 인도의 토대를 세운 왕, 인도역사와 불교사에 가장 중요한 왕으로 기록돼 있어. 지금 인도의 국가상징 문양도 아소카 왕의 석주에 새겨졌던 사자문양을 쓰고 있을 정도로 그의 업적들은 이루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아. 재미삼아 하나 꼽는다면 가로수 정도일까?
각 문명의 발달사를 보다 보면 넓은 도로가 빠지지 않지. 중국에서 관도라고 하는 그 도로. 나아가 그 도로가에는 가로수들이 심어져 있잖아. 그런데 이 가로수를 맨 처음 누가 심었을까를 캐다 보면 바로 아소카 왕에 이른다는 거야. 그만큼 사람을 위한 정치를 했다, 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 아소카 왕도, 강을 팠어.
당시 인더스 강 역시 중국의 황하 정도는 아니더라도 은혜면서 동시에 공포였거든. 아소카는 대규모 관개수로공사를 통해 치수를 확립했어. 이렇게 말하면 물론, 어느 왕이든 치수를 하지 않은 왕은 없었을 테고 따라서 억지춘향 격으로 끼워 맞춘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겠지. 하지만 독재자와 강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럼 그들은 왜 강을 파는 걸까?
그는 멈출 수 있을까?
나는 이명박이 저 진시황이나 아소카의 치적을, 나아가 내가 모르는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강바닥 파 엎은 행적들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뭐 혹 알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다고 해도 그들을 흉내 내는 것은 아닐 테고, 본능이 그들과 닮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그 본능이란 것도 실은 별 거창한 게 아니라 매우 단순한 것. 이를테면 아주 시답잖은 콤플렉스랄까?
모든 독재자에겐 콤플렉스가 있어. 따라서 콤플렉스가 독재자를 만든다고도 하지. 히틀러에게도, 박정희에게도. 물론 진시황에게도 여불위라는 부친과 희대의 바람둥이 모친이라는 근원적 콤플렉스가 있었고, 아소카도 종교의 힘이 아니면 씻기 힘들 만큼의 죄의식이 있었지. 그렇다면 이명박에게 내재되어 있는 콤플렉스나 죄의식은 뭘까? 뭐 그렇다고 이명박이 그들에 버금가는 독재자란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이명박도 콤플렉스가 있을 거라는 거지.
이명박의 행동을 보면 공통적인 게 있어. 누군가 반대를 하면 혀를 날름거리며 초조해하면서도 그걸 애써 무시하는 거. 이건 상당히 중요해. 왜 어린애들이 하지 말라고 야단치면 더하는 거 있잖아. 크레파스로 벽지에 낙서를 하다, 하지 말라고 야단치면 눈치를 보면서 더 많이 그리고, 소리치면 도망갔다가 다시 와 그리는 것 같은 행동. 그것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거든. 존재의 확인이랄까? 이런 건 누가 심리학적으로 좀 분석해 줬으면 좋겠다.
더불어 하나 더. 그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 그러니까 토목이나 건설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공통적으로 하는 멘트가 있어. '그게 중요합니다.' 하는 말. 좀 더 어려우면 상당히 중요하거나 엄청 중요하거나, 아무튼 중요한 거야. 중요하니까 잘 해야 한다, 고 하고. 하지만 사실 그게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는 잘 몰라. 그냥 중요할 뿐이지. 그러니까 그건 다른 누군가가 하면 되는데, 이때 더 초조해지며 강박증이 생겨. 자신도 뭔가 해야 한다, 는.
그 초조한 만큼 서두르게 되지.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빨리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고, 그래야 불안하지도 않고 초조하지 않으니까. 그럼 도대체 대통령까지 된 인물이 왜 존재의 확인이 필요한지에 대한 얘기도 나와야 겠지? 난 그 콤플렉스를 그의 형인 이상득과 왕회장 정주영, 그 둘과의 관계에서 찾는데, 솔직히 이건 자신이 없어. 내가 그 방면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니까.
자신할 수 있는 건 이명박은 누군가가 말린다고 해서 들을 인물이 아니란 거. 그렇다고 잘 하라고 부추긴다고 해서 김이 새 멈출 위인도 물론 아니지만. 그러니 참 골치 아프지. 그는 대통령이 됐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어떤 건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의 관심은 언제나 자신이 뭘 할 건지, 그게 뽀다구가 나는지에만 맞춰져 있지. 말하자면 본질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그게 자신의 성과로 남는지만 중요하단 거야. 그건 요즘 입에 달고 사는 서민정책과 행보에도 여실히 나타나.
그가 펼치는 서민정책은 아주 단순해. 서민들 있는 곳으로 '가서' 서민들 먹는 걸 '먹는 것' 이야. 그것보고 뭐라 하면 곤란해. 그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서민이 된 거거든. 그에게 그건 어떤 정책이나 이론보다도 더 중요한 거야.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정말 서민이 된다는 건 엄청 힘든 거니까. 그러니까 그의 서민정책은 쇼가 아니고 진심이야. 그 '순간만큼은.' 그러니 믿어야 돼.
대운하, 아니 4대강도 그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돼. 그에게 아무리 그 사업의 부당성을 얘기해 봤자 소용없어. 그는 이미 그걸 하기로 작정했고 누가 뭐라던 간에 그게 엄청 뽀다구 나는 일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도 그에 걸맞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지. 말하자면 아이가 벽지 망가뜨릴 때 쓰는 수법 같은 걸 쓰면 되지 않을까? 그보다 더 재미있는 장난감을 던져주는 거.
이건 어떨까? 누군가 일본과의 해저터널 떡밥을 슬며시 던져주는 거야. 아니면 독도에다 일본과 합동으로 해상 인공도시를 건설한다든가. 물론 야권이 아닌 그쪽의 연구소에서 내는 보고서라면 더 좋겠지. 그건 세밀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냥 그의 삘이 꽂히는 게 중요하니까. 만약 그가 떡밥을 물기만 하면 가능성 있어. 그 뒤엔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반대만 하면 되니까. 그걸 하려면 차라리 대운하를 파라, 고 하면 그는 분명 해저터널을 추진할 거야. 모르겠다. 그 외엔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네.
우린 포기할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 들지 않아? 어차피 만들어질 운하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부라보! 그게 뇌리에 떠오른 적 있다면 바로 그만큼 이명박은 성공한 거야. 내 장담하는데, 딱 그만큼 대운하도 진행되고 분명 그만큼 성공을 거둘 거야. 사실 이건 전쟁이야. 그것도 우리가 엄청 불리한 전쟁. 왜냐하면 그는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고 따라서 전쟁이란 것도 모르니까. 적이 없는 전쟁을 하는 거니까 당연히 불리하고 힘들지.
지금은 21세기인데. 치수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시대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낙동강이나 금강이 황하나 인더스 강처럼 범람한다고 해서 민족의 생존까지 위험해지는 그런 나라도 아니고. 그런데도 저 강바닥 파헤치며 치수대책 운운하는 말을 들으면 난 문득 우리가 춘추전국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곤 해. 그래서 몇 년 지나면 홍수를 막아 국민들이 마음 놓고 농사지으며 살 수 있게 해 준 위대한 왕으로 누군가를 칭송해야만 할 것 같은 상상도 하게 되고.
또한 지금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해도 그 날을 상상하면 어떤 잘못이라도 다 용서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진시황이나 아소카도 그랬으니까. 끔찍한 독재자였지만 그래도 치수는 했고 그 공적은 역사에 길이 남아 있으니까. 지금 미디어법이든 비정규직이든 아무리 독재 비슷한 짓을 해도, 치수를 할 거니까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러니 찍소리 말고 꾹 참을까?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라 기원 전 전국시대라고 믿으면서. 강이 넘치면 안 돼. 물이 넘치면 큰일 나, 라고 허경영을 부르듯 강력한 주문을 외며.
걱정 마, 강바닥을 팔 거야~! 욕하지 마, 치수를 할 거야~! 그럴 순 없잖아, 씨바. 그러니 어떻게든 싸워 이겨야지. 졸라 빡세게.
충격-그가 삽을 드는 이유
[정치] 강바닥 파는 독재자
- 그가 삽을 드는 이유
2009.9.11.금요일
4대강 얘기만으로도 정신없는데 요 며칠 또 강 때문에 어수선하네. 남쪽의 강만으로는 부족한지 이번엔 임진강이야. 임진강 하면 먼저 영화 <박치기>부터 떠올라. 이어 옵션처럼 이어지는 노래 임진강.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북조선의 국가를 작곡한 작곡가가 만들었다는 그 절절한 가락의 노래. 김정구 할아버지의 두만강 푸른 물에 하고 묘하게 대칭을 이루는 그 노래. 하지만 오늘 하려는 얘기는 임진강이나 가요에 대해서가 아니고, 그냥 누군가 강을 파는 것에 대한 얘기야.
우리 쪽엔 비도 오지 않았는데 물난리 참사가 벌어진 임진강.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비집고 나오는 평화의 댐 찬가. 그런 소리들을 들으며 문득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어. 그래 일단 이런 제목을 써봤어. '강바닥 파는 독재자'
이렇게 적고 나니 마치 무슨 영화 제목 같지? '피아노 치는 대통령' 이던가? 하지만 뭐 그렇게 나긋나긋하고 몰캉몰캉한 얘긴 아니고.
그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강바닥을 파고 싶어 하는 걸까? 한반도를 관통하는 대운하를 파야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그게 잘 안 먹히니까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럼 강이라도 네 개 파겠다고 덤비는 걸 보며, 그 참 괴이쩍으면서 한편 신비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어. 그냥 보통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니까.
그는 왜 그렇게 강바닥을 파헤치지 못해 안달인 걸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처음 대운하 얘기가 나온 건 대선공약으로였지. 물론 그때도 말도 안 되는 공약이라며 반대가 많았어. 하지만 뭐 상관없었어. 그땐 대운하 정도 아니라 똥으로 메주를 쑨다던가, 오줌으로 맥주를 만들고 그 맥주를 마시고 오줌을 누고 다시 맥주를 만드는 무한반복시스템을 개발해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여 우리국민 모두 놀고먹게 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어도 상관없었을 거야. 아무튼 대운하는 지난 2007 대선에서 이명박의 대표 공약이었어.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의 운하 얘기는 그 역사가 상당히 길어. 처음은 언제냐 하면, 지겹지만 할 수 없이 또 박정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1966년, 당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하면서 운하건설 계획도 세우고 건설부가 한강 유역에 대한 조사까지 했어. 그때 미국의 하천 운하관계 전문 기관인 내무성 개척국 지질조사소와 협정을 맺고 한강 유역의 치수, 수자원 개발과 운하건설 가능성 등을 검토했대. 그 조사는 한강유역에 치중된 거라 인천-서울-영월 간 내륙운하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에 대해서였어.
그 보고서가 완성돼 나온 것이 1971년, 시간이 그렇게 걸린 걸로 봐서는 상당히 공들인 보고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암튼 가장 중요한, 결론은?
"운하 즐~!"
주된 이유는 1970년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54달러, 국민 총생산 81억 달러의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향후 50년간 아무리 경제가 발전한다 하더라도 운하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의 물동량이 없다는 거지.
그러나 박정희는 운하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어. 1977년 말, 정부는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달성으로 제2의 경제도약을 이루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어. 원래 계획보다 3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하자 박정희는 갑자기 엔돌핀이 마구 치솟았나 봐. 그래 1978년 당시 건설부장관인 신형식씨를 불렀어.
"님자, 그 운하 다시 주물러 보라우"
지시를 받은 건설부는 하필 거기밖에 없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미국 육군 공병단'에 의뢰했어. 그래 1978년 9월부터 12월까지 인천-서울-팔당-영월에 이르는 한강 본류와 남한강 유역 270km 구간의 운하건설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예비조사를 실시하게 되지. 본 조사가 아니라 예비조사야.
그 결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1978년 12월 건설부장관과 미 육군 공병감 J.W.모리스 중장은 운하건설 타당성 조사를 위한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정식으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게 돼.
하지만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어버리지. 그렇다고 국책사업이 중단될 리는 없잖아? 지금이야 정치가 너무 많이 발전해버려 정권만 바뀌면 옳든 그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 정권이 진행하던 사업은 모조리 없던 일로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정치가 좀 후져서 국책사업은 정권이 바뀌어도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었나 봐. 순진하게.
아무튼 조사 업무는 계획대로 진행돼 1980년 12월, [남한강 주운계획 예비타당성조사] 보고서가 미 육군 공병단과 건설부 및 산업기지개발공사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결론은?
"운하, 짱!"
물론 인천에서 영월까지야. 보고서에 따르면 운하 건설에 따르는 연간 편익과 비용을 비교한 수치는 1.15였대. 이 비율이 1을 넘으면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는 거지. 보고서는 모래, 자갈, 시멘트 단 3개 품목의 화물 수송 편익만으로도 경제성이 있다고 판정을 내린 거야. 관광 산업의 이득이나 지역개발 등의 편익은 전혀 계상하지 않고도 말야.
또한 1986년에 충주댐이 완공되고 1990년까지 여주댐이 완공될 경우 1991년부터 남한강 운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수량은 95% 이상 갖추어 진다고 예측했어. 그러니까 당장 운하가 완성되는 건 아니므로 1990년대에 운하가 개통된다면 앞으로 닥칠 수도권의 막대한 운송수요를 감당해내는 데 운하가 큰 효과를 낼 거라는 거였지.
이 보고서가 나온 이후 건설부와 산업기지개발공사(지금의 수자원공사)등 정부 및 유관기관에서는 한강운하를 당연히 하는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1981년부터 3-4년간 전두환의 5공화국 정부의 고 예산과 긴축 분위기 때문에 건설에 착수하지 못했어. 그러다 1984년 하반기부터 다시 이걸 끄집어 내 주물럭거리며 슬슬 키우기 시작해.
당시 수자원공사는 1986년 충주댐이 완공될 경우 남한강 상류에 배를 띄울 수 있는 충분한 물이 확보되기 때문에 이 기회에 물길을 내고 싶어 했어. 하지만 역시 운하를 판다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았나 봐. 관광수익과 발전수익에 환경영향평가서까지 붙은 정식 타당성 보고서가 완성된 것은 1989년 1월이야. 보고서 명칭은
[한강주운개발사업 타당성조사 보고서]
이에 따르면 2000년대 국제화시대 및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운하사업의 착수가 시급히 요청되며, 기술적, 경제적으로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어. 또한 이 사업은 수도권의 골재 수급 등을 위해서도 조속히 착수해야 한다고 평가하고 곧바로 실시 설계에 들어갈 것까지 건의할 정도로 나아갔어.
그동안에는 물류비용 절감액만 반영했었으나 이 보고서에서는 관광수익 19%, 발전수익 6%, 등 전체편익의 25%를 관광발전 수익으로 계상하고 있어. 더불어 이 사업을 수도권과 태백권 사이의 화물과 골재 수송은 물론, 수력발전, 관광, 지역개발 등 다목적 수자원 개발 사업이라고 높이 평가해.
환경 분야에서도 조사단은 여러 가지 실험과 과학적인 오염물질 영향 평가를 실시한 결과, 물의 증발량, 풍향, 풍속, 구름의 양 등 기상변화는 아주 적을 것으로 나타났으며 새들이나 곤충 등 동식물을 비롯한 생태계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고했어. 그러니 이런 사업은 즉시 시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이유는 우선 영향력이 커진 환경단체들이 운하를 환경을 해치는 사업으로 지목하여 이슈화한 것이고, 두 번째는 도로건설이 눈에 잘 띠고 생색이 나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강 보다는 도로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 운하건설은 뒤로 밀리게 되었대. 그리고 이때 노태우 정부가 운하 대신 시작한 게 바로 고속전철과 새만금이란 것.
그러니까 만약 운하를 시작했으면 고속전철이나 새만금은 포기했거나 훨씬 뒤로 밀렸을지 모르지. 뭐 이런 건 그 쪽 전문가들이나 알 테지만. 아무튼 운하는 다시 그렇게 사라지는 듯하더니, 결국 다시 등장해. 바로 세종보고서와 삼성보고서가 연이어 나오거든. 다만 달라진 건, 그 대상 지역에서 강원도 영월은 보이지 않고 경부운하로 변경됐다는 것 정도랄까?
박정희에 의해 한번 잉태된 운하는 수없는 낙태의 위기를 넘기면서도 끝내 살아남는 것은 물론, 위기를 한번 넘길 때마다 부쩍부쩍 성장하기까지 해. 경부운하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5년. 세종대학교 부설 세종연구원이 아래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부터였어.
[한-낙동강 운하의 가능성과 내륙수운 체계의 필요성]
이 보고서의 골자는 서울-부산 간 물류비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경부운하를 건설하면 물류비가 절감되고 국민경제에 막대한 보탬이 된다는 거였어. 이 보고서가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키기도 전에 또 하나의 보고서가 나오는데 바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삼성!
대구지역 일간지 '영남일보'는 1995년 8월30일자 1면 톱기사에 "대구를 부산과 연결되는 항구도시로 만든다"는 제목을 달았어. 기사의 주 내용은 "삼성그룹은 수출 물량과 원료의 용이한 수송과 물류비용 절약을 위해선 기존 고속도로로는 곤란하다는 판단 하에 과거 수상 수송로로 쓰였던 낙동강에 수로를 개발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지.
더불어 "삼성이 성서공단 삼성상용차 공장과 부품단지 건립을 계기로 성서공단과 쌍용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는 달성군 구지공단, 위천공단 등 낙동강 공업벨트의 물동량 수송과 최단거리 수출부두의 확보를 위해 순수 민간자본으로 대구와 부산을 직접 연결하는 운하를 계획하고 있다"고 이어졌어.
당시 삼성상용차는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구지역에 자리 잡았으나 물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어. 때마침 쌍용자동차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일대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자 삼성은 아예 자신들이 운하를 만들어 돈을 벌 궁리까지 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삼성의 이런 계획은 IMF를 거치며 2000년 삼성상용차가 문을 닫고, 쌍용자동차 구지공장과 위천공단 건립까지 연이어 무산되면서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어.
하지만 운하라는 이름의 이 태아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정치권으로 옮겨져 자라기 시작했어. 당시 김혁규 경남도지사는 평소 세종연구원의 경부운하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영남일보 기사를 읽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안 된다면 한강과 낙동강이 지나가는 광역 지자체가 힘을 합해서라도 경부운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어. 대구시도 장기 국토개발계획안에 경부운하 건설을 넣을 것을 국토개발원에 다섯 차례나 요구한 바 있었고. 그러다 드디어 그분께 간택이 되는데.
이명박의 입에서 운하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96년 5월이야.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던 이명박은 정부와 한국수자원공사가 경부운하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경부운하건설추진위원회(이하 운하추진위)를 구성하려 했어. 그러나 60여 명의 의원으로부터 서명까지 받았지만 위원회는 구성되지 못했어. 그들은 그 이유를 청와대, 즉 YS가 반대했기 때문이라고들 얘기하곤 했어. 아무튼 성공 여부보다는 일단 그분의 입에서 운하가 언급됐다는 게 중요해.
그러다 곧 김유찬 폭로사건이 터지며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가지. 당연히 운하든 뭐든 정치적 발언을 할 위치도 아니었고. 하지만 미국에 가서도, 김경준을 만나 금융 사업을 논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는 저 운하가 흐르고 있었나 봐. 그러다 드디어 2002년, 서울시장이 되고 나서는 청계천을 상대로 그 워밍업을 하게 되지. 물론 청계천 복원논의는 원래 있었다든가 그건 실패라는 등의 얘기도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제대로 몸을 풀었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2006년, 대선후보로 나선 이명박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후 청계천 복원에 대한 칭찬 여론이 무성하자 자신의 대통령선거 제1공약을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내륙운하 건설로 확정했어. 이어 8월17일부터는 3박4일간 한강과 낙동강을 따라가는 정책탐사를 벌이며 지역민과 언론을 대상으로 내륙운하의 필요성을 역설했지. 내용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다만 그냥 다시 꺼내들었을 뿐.
이 운하정책탐사를 끝낸 뒤인 9월부터 경부운하는 명칭이 '한반도운하'로 바뀌어 불리게 돼. 서울-부산뿐 아니라 호남지역, 나아가 신의주, 원산 등 북한 전역에까지 운하를 만들고, 이 모든 운하를 하나로 연결하겠다는 거대 구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지. 물론 지금은 4대강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튼 처음 한반도대운하 얘기가 나오던 그 땐 그랬어. 그러니까 이 대운하란 괴물은 처음 박정희에 의해 잉태되어, 온갖 낙태의 위기를 넘기며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을 꾸준히 자라 마침내 이명박에 이르러 괴물이 된 거야.
박정희 <한강수역운하> => 세종, 삼성 <경부운하> => 이명박 <한반도대운하>
이렇게. 실로 놀라운 생명력과 성장력이지.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건, 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운하에 집착할까 하는 거야. 그러니 그 부분을 찔러 봐야겠지. 무엇보다 위의 내용들만 열거하고 끝내면 우리 구여분 딴지스들이 이게 뭐냐, 딴지답지 않다, 고 한마디씩 할 테니까 더욱. 그래서 손금에 땀 배어가며 준비한 것이 아래, 역사 속에 기록된 강바닥 파는 이야기야.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지. 그건 모두 알 테고. 인류사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독재자란 것도 알 테고. 또한 그는 만리장성도 축조했어. 물론 장성은 그의 시대에 시작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있었고 그 후에도 증축되었지. 하지만 장성의 대부분은 진시황 시대에 만들어졌어. 물론 우리 딴지스들은 그것들 모두 알 거라고 봐. 더불어 진시황은, 강도 팠어. 그것도 아주 많이.
당시, 그러니까 기원 전 2세기 경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치수, 물을 다스리는 거였어. 중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황하는 툭하면 둑을 넘어 그 물줄기에 기대어 살던 수많은 사람과 가축, 농토를 뒤덮으며 쓸어갔어. 때문에 그들에게 물은, 생존의 조건이며 동시에 죽음의 상징이었지. 황하의 민중들은 물로 인해 생명을 잇다가 물로 인해 죽었어.
따라서 춘추시대의 우왕도 치수에 골몰했고 전국시대 각 제후들은 황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모여앉아 회의를 열곤 했어. 이 황하가 농사에만 활용된 것은 아니었어. 제나라와 위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조나라는 황하의 제방을 터뜨려 상대 군사들을 수장해 버리기도 했었지. 그러므로 자연스레 황하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까지 탄생됐어.
진시황은 중원이 아닌 서역의 유목민출신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봐. 그는 천하통일 후 황하의 치수에 정열을 쏟았어. 그의 업적을 새긴 비문에, '하천이 막힌 것을 터뜨려 통하게 했다'는 구절까지 나오는 걸로 보아 그 사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둔 모양이야. 나아가 황하의 명칭을 덕수(德水)로 바꾸기까지 했어. 막힌 물줄기를 뚫고 제방을 쌓아 물을 다스려, 드디어 공포의 대상이 아닌 유익한 생명수로 바꿔놓은 거지.
황하 외에도 진시황은 많은 강들을 팠다고 해. 지금까지도 유명한 사천의 도강언, 섬서의 정국거, 하북의 장수12거 모두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에 걸쳐 완성됐어. 특히 한나라 출신 정국은 치수의 달인으로 유명했는데, 소문을 들은 진시황은 그를 전격 발탁해 진나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어. 섬서성의 정국거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 붙은 거야. 아무튼 그렇게 진시황은, 많은 강을 팠어.
이번엔 인도.
그쪽 그러니까 인더스문명부터 시작해 인도 역사를 배우다 보면 수많은 왕 중 가장 높은 자리에 기록된 왕이 있어. 아소카 왕. 그는 고타마의 싯다르타가 오를 뻔했던 위치인 '전륜성왕'이란 명칭을 듣는 유일한 왕이야. 무슨 얘기냐 하면, 싯다르타가 태어났을 때 어느 고승이 와서 그랬대. '나라를 다스리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도를 닦으면 붓다가 될 것' 이라고.
결국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고 그보다 약 200년 쯤 뒤에 태어난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 아소카는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륜성왕이 된 거지. 그런데 이 아소카도 처음부터 성군은 아니었어. 아니 성군이라기보다 어마어마한 폭군이었지. 그는 왕이 되기 위해 무려 99명의 형제를 죽였어. 형제가 99명이란 것도 놀랍지만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건 더 놀랍지.
즉 아소카는 서열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거야. 왕이 된 뒤의 살육은 더 끔찍했어. 자신에게 호응하지 않는 신하 500명을 참수하고 궁녀 500명도 화형에 처해 버렸거든. 형제들 숫자서부터 저 500이란 숫자들 모두 가공의 냄새를 상당히 풍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록은 그래.
나아가 전쟁을 벌이면서는 더했어. 왕국의 기틀을 다진 마지막 싸움인 칼링가의 전투에서는 무려 10만 명을 죽이고 15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어. 때문에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를 阿育王(아육왕)이라고 불러. 그리고 그 이름은, 불교를 부흥하고 전파한 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잔인함의 대명사로도 되어 있어. 아무튼 초기의 아소카는 인간이 아닌 악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독재자야.
그런 왕이었는데 오, 놀라워라! 그 독재자께서 칼링가전투가 끝난 후 전장을 둘러보던 중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회개하셨다는 거야. 시체의 산, 피의 강을 보며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 말이지. 실은 그게 아니라 어느 도인의 충고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튼 완전히 환골탈태 한 건 사실인가 봐. 그때부터 그는 불교도가 되어 성군의 길을 걷기 시작해.
그 후 그가 남긴 업적들은, 그 시대라는 걸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멋지고 선진적이었어. 그는 불교를 믿으면서 누구에게도 그걸 강요하지 않았어. 즉 종교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됐지. 당시 인도에는 불교는 물론 힌두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거든. 하지만 왕은 불교를 장려하진 않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을 뿐이야.
따라서 그는 불교를 부흥하고 국외로까지 널리 전파한 왕, 인도의 토대를 세운 왕, 인도역사와 불교사에 가장 중요한 왕으로 기록돼 있어. 지금 인도의 국가상징 문양도 아소카 왕의 석주에 새겨졌던 사자문양을 쓰고 있을 정도로 그의 업적들은 이루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아. 재미삼아 하나 꼽는다면 가로수 정도일까?
각 문명의 발달사를 보다 보면 넓은 도로가 빠지지 않지. 중국에서 관도라고 하는 그 도로. 나아가 그 도로가에는 가로수들이 심어져 있잖아. 그런데 이 가로수를 맨 처음 누가 심었을까를 캐다 보면 바로 아소카 왕에 이른다는 거야. 그만큼 사람을 위한 정치를 했다, 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 아소카 왕도, 강을 팠어.
당시 인더스 강 역시 중국의 황하 정도는 아니더라도 은혜면서 동시에 공포였거든. 아소카는 대규모 관개수로공사를 통해 치수를 확립했어. 이렇게 말하면 물론, 어느 왕이든 치수를 하지 않은 왕은 없었을 테고 따라서 억지춘향 격으로 끼워 맞춘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겠지. 하지만 독재자와 강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럼 그들은 왜 강을 파는 걸까?
나는 이명박이 저 진시황이나 아소카의 치적을, 나아가 내가 모르는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강바닥 파 엎은 행적들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뭐 혹 알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다고 해도 그들을 흉내 내는 것은 아닐 테고, 본능이 그들과 닮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그 본능이란 것도 실은 별 거창한 게 아니라 매우 단순한 것. 이를테면 아주 시답잖은 콤플렉스랄까?
모든 독재자에겐 콤플렉스가 있어. 따라서 콤플렉스가 독재자를 만든다고도 하지. 히틀러에게도, 박정희에게도. 물론 진시황에게도 여불위라는 부친과 희대의 바람둥이 모친이라는 근원적 콤플렉스가 있었고, 아소카도 종교의 힘이 아니면 씻기 힘들 만큼의 죄의식이 있었지. 그렇다면 이명박에게 내재되어 있는 콤플렉스나 죄의식은 뭘까? 뭐 그렇다고 이명박이 그들에 버금가는 독재자란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이명박도 콤플렉스가 있을 거라는 거지.
이명박의 행동을 보면 공통적인 게 있어. 누군가 반대를 하면 혀를 날름거리며 초조해하면서도 그걸 애써 무시하는 거. 이건 상당히 중요해. 왜 어린애들이 하지 말라고 야단치면 더하는 거 있잖아. 크레파스로 벽지에 낙서를 하다, 하지 말라고 야단치면 눈치를 보면서 더 많이 그리고, 소리치면 도망갔다가 다시 와 그리는 것 같은 행동. 그것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거든. 존재의 확인이랄까? 이런 건 누가 심리학적으로 좀 분석해 줬으면 좋겠다.
더불어 하나 더. 그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 그러니까 토목이나 건설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공통적으로 하는 멘트가 있어. '그게 중요합니다.' 하는 말. 좀 더 어려우면 상당히 중요하거나 엄청 중요하거나, 아무튼 중요한 거야. 중요하니까 잘 해야 한다, 고 하고. 하지만 사실 그게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는 잘 몰라. 그냥 중요할 뿐이지. 그러니까 그건 다른 누군가가 하면 되는데, 이때 더 초조해지며 강박증이 생겨. 자신도 뭔가 해야 한다, 는.
그 초조한 만큼 서두르게 되지.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빨리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고, 그래야 불안하지도 않고 초조하지 않으니까. 그럼 도대체 대통령까지 된 인물이 왜 존재의 확인이 필요한지에 대한 얘기도 나와야 겠지? 난 그 콤플렉스를 그의 형인 이상득과 왕회장 정주영, 그 둘과의 관계에서 찾는데, 솔직히 이건 자신이 없어. 내가 그 방면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니까.
자신할 수 있는 건 이명박은 누군가가 말린다고 해서 들을 인물이 아니란 거. 그렇다고 잘 하라고 부추긴다고 해서 김이 새 멈출 위인도 물론 아니지만. 그러니 참 골치 아프지. 그는 대통령이 됐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어떤 건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의 관심은 언제나 자신이 뭘 할 건지, 그게 뽀다구가 나는지에만 맞춰져 있지. 말하자면 본질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그게 자신의 성과로 남는지만 중요하단 거야. 그건 요즘 입에 달고 사는 서민정책과 행보에도 여실히 나타나.
그가 펼치는 서민정책은 아주 단순해. 서민들 있는 곳으로 '가서' 서민들 먹는 걸 '먹는 것' 이야. 그것보고 뭐라 하면 곤란해. 그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서민이 된 거거든. 그에게 그건 어떤 정책이나 이론보다도 더 중요한 거야.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정말 서민이 된다는 건 엄청 힘든 거니까. 그러니까 그의 서민정책은 쇼가 아니고 진심이야. 그 '순간만큼은.' 그러니 믿어야 돼.
대운하, 아니 4대강도 그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돼. 그에게 아무리 그 사업의 부당성을 얘기해 봤자 소용없어. 그는 이미 그걸 하기로 작정했고 누가 뭐라던 간에 그게 엄청 뽀다구 나는 일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도 그에 걸맞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지. 말하자면 아이가 벽지 망가뜨릴 때 쓰는 수법 같은 걸 쓰면 되지 않을까? 그보다 더 재미있는 장난감을 던져주는 거.
이건 어떨까? 누군가 일본과의 해저터널 떡밥을 슬며시 던져주는 거야. 아니면 독도에다 일본과 합동으로 해상 인공도시를 건설한다든가. 물론 야권이 아닌 그쪽의 연구소에서 내는 보고서라면 더 좋겠지. 그건 세밀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냥 그의 삘이 꽂히는 게 중요하니까. 만약 그가 떡밥을 물기만 하면 가능성 있어. 그 뒤엔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반대만 하면 되니까. 그걸 하려면 차라리 대운하를 파라, 고 하면 그는 분명 해저터널을 추진할 거야. 모르겠다. 그 외엔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네.
가끔 그런 생각 들지 않아? 어차피 만들어질 운하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부라보! 그게 뇌리에 떠오른 적 있다면 바로 그만큼 이명박은 성공한 거야. 내 장담하는데, 딱 그만큼 대운하도 진행되고 분명 그만큼 성공을 거둘 거야.
사실 이건 전쟁이야. 그것도 우리가 엄청 불리한 전쟁. 왜냐하면 그는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고 따라서 전쟁이란 것도 모르니까. 적이 없는 전쟁을 하는 거니까 당연히 불리하고 힘들지.
지금은 21세기인데. 치수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시대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낙동강이나 금강이 황하나 인더스 강처럼 범람한다고 해서 민족의 생존까지 위험해지는 그런 나라도 아니고. 그런데도 저 강바닥 파헤치며 치수대책 운운하는 말을 들으면 난 문득 우리가 춘추전국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곤 해. 그래서 몇 년 지나면 홍수를 막아 국민들이 마음 놓고 농사지으며 살 수 있게 해 준 위대한 왕으로 누군가를 칭송해야만 할 것 같은 상상도 하게 되고.
또한 지금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해도 그 날을 상상하면 어떤 잘못이라도 다 용서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진시황이나 아소카도 그랬으니까. 끔찍한 독재자였지만 그래도 치수는 했고 그 공적은 역사에 길이 남아 있으니까. 지금 미디어법이든 비정규직이든 아무리 독재 비슷한 짓을 해도, 치수를 할 거니까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러니 찍소리 말고 꾹 참을까?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라 기원 전 전국시대라고 믿으면서. 강이 넘치면 안 돼. 물이 넘치면 큰일 나, 라고 허경영을 부르듯 강력한 주문을 외며.
걱정 마, 강바닥을 팔 거야~!
욕하지 마, 치수를 할 거야~!
그럴 순 없잖아, 씨바.
그러니 어떻게든 싸워 이겨야지.
졸라 빡세게.
출처: 딴지일보 불타던 과부